고린도전서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11–14장 · 예배와 은사

하나님은 왜 여러 지체로 몸을 만드셨는가

발은 자신이 손이 아니라서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눈은 손에게 네가 필요 없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두 사람에게 똑같이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보라고 합니다.

고린도전서 12장에는 이상한 몸이 등장합니다.

발과 눈은 정반대의 말을 하고 있습니다. 발은 자신이 몸에 속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고, 눈은 다른 지체가 몸에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둘 다 같은 사실을 잊고 있습니다.

몸은 어느 한 지체가 자기 필요에 따라 만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여러 지체를 함께 두심으로 이루신 것입니다.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고린도 교회에는 여러 은혜의 선물이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혜로운 말을 할 수 있었고, 어떤 사람은 병을 낫게 하는 은혜의 선물을 지녔습니다. 예언하는 사람도 있었고, 여러 갈래의 혀로 말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풍성함이 공동체의 기쁨이 되기보다 서로의 가치를 비교하는 근거가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바울은 은혜의 선물을 하나씩 소개하면서도 어느 것이 가장 놀라운지, 누가 가장 영적인 사람인지를 판단하는 데 집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그 선물은 누구에게서 왔습니까?

무엇을 위해 주어졌습니까?

그리고 그 선물을 받지 않은 사람은 공동체에서 어떤 자리를 갖습니까?

이 질문을 따라가면 12장의 논증이 세 단계로 발전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여러 선물의 근원이 한 분 하나님이라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다음에는 그리스도의 몸이 하나이기 위해서는 여러 지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께서 오히려 귀함이 모자란 지체에게 더 큰 귀함을 주셨다는 선언이 등장합니다.

11장에서 바울은 주님의 만찬에 모인 사람들이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는 일을 꾸짖었습니다. 이제 12장에서는 그런 사람들까지 포함한 공동체 전체가 어떤 몸인지를 설명합니다. 그 설명의 중심에는 은혜의 선물을 주시는 영과, 그 선물들을 받은 사람들을 자신의 몸으로 묶으시는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읽는 시간 31분소단락 812장 본문 읽기 →

말 못 하는 우상에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영으로

고린도전서 12:1–3 본문 →

영적인 경험을 어떻게 분별할 것인가

형제 여러분, 영에 속한 것들을 두고는 여러분이 모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12:1 · 본디새김

바울은 새로운 주제로 들어갑니다.

뒤에서 여러 은혜의 선물이 열거되므로 「영에 속한 것들」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원문은 ‘영에 속한 사람들’로도 읽을 수 있어서, 고린도 신자들이 자신이나 특정한 사람들을 ‘영적인 사람’으로 여기던 문제까지 이 표현의 배경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다루려는 문제는 단순히 초자연적인 능력이 무엇인가 하는 호기심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나 행동이 참으로 하나님의 영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울은 그 질문에 답하기 전에 고린도 신자들의 과거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방 사람들이었을 때 말 못 하는 우상들에게로 이끌리는 대로 끌려다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고린도전서 12:2 · 본디새김

우상들은 말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말 못 하는 우상들에게 이끌려 다녔습니다.

시편 115:4–8에서도 우상들은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존재로 묘사되며, 시편은 그것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경고합니다. 바울은 그 전통을 떠올리게 하는 언어로 고린도 신자들의 과거를 설명합니다. 다만 그가 모든 이방 종교의 예식이 황홀경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는 것은 아니며, 구체적으로 어떤 제의 경험을 가리키는지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이전에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우상을 향해 이끌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의 영을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전의 종교적 경험과 지금의 영적 경험을 무엇으로 구별해야 할까요? 바울의 대답은 뜻밖에도 간단합니다.

성령의 첫 번째 표지는 예수님에 관한 고백이다

그러므로 나는 여러분에게 알립니다. 하나님의 영 안에서 말하는 이는 아무도 「예수는 저주받은 자다」 하지 않고, 거룩한 영 안에서가 아니면 아무도 「예수는 주님이시다」 할 수 없습니다.고린도전서 12:3 · 본디새김

바울은 놀라운 기적이나 신비로운 경험을 먼저 분별 기준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거부하는 말과 예수님을 주님으로 인정하는 말, 정반대의 두 고백을 제시합니다.

「예수는 주님이시다」는 단순히 역사적 인물 예수님께 존경의 칭호를 붙이는 말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달리셨던 예수님께서 지금 자신들의 주님이시라는 신앙고백입니다. 바울은 이 고백이 거룩한 영 안에서 가능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누구든지 이 문장을 입으로 발음하기만 하면 반드시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의 관심은 특정한 소리를 낼 수 있는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을 누구로 인정하고 누구에게 충성을 드리는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신비로운 말을 하거나 놀라운 능력을 나타낸다고 해서 그 경험 자체가 곧 영적인 권위의 최종적인 증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고백하는 주님은 누구십니까? 그 능력은 누구를 향하고 있습니까?

성령의 활동을 이해하는 출발점은 성령을 소유했다는 사람의 특별함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님으로 고백하게 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의 원문 톤 프뉴마티콘은 문법적으로 남성 복수와 중성 복수가 같은 형태여서 ‘영에 속한 사람들’로도, ‘영에 속한 것들’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실제로 14:37에서 바울은 자신을 예언자나 영에 속한 사람으로 여기는 이를 언급합니다. 3절에서 바울이 왜 ‘예수는 저주받은 자다’라는 표현까지 언급하는지를 두고는, 고린도 모임에서 누군가 영감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이런 말을 했을 가능성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이 실제로 발생했다는 사실은 본문에서 확인할 수 없고, 바울이 두 극단적인 고백을 대비하여 영적인 말의 진위를 판단하는 기준을 제시했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고린도 교회에 예수님을 저주하는 특정 집단이 있었다고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선물은 여러 갈래지만 주시는 분은 같다

고린도전서 12:4–11 본문 →

바울이 세 번 반복하는 대조

은혜의 선물은 여러 갈래지만 영은 같은 분입니다. 섬김도 여러 갈래지만 주님은 같은 분입니다. 이루어 내는 일도 여러 갈래지만 모든 것을 모든 이 안에서 이루어 내시는 하나님은 같은 분입니다.고린도전서 12:4–6 · 본디새김

| 여러 갈래로 나타나는 것 | 그 모든 것의 근거 | |---|---| | 은혜의 선물 | 같은 영 | | 섬김 | 같은 주님 | | 이루어 내는 일 | 같은 하나님 |

왼쪽에는 다양성이 있습니다.

오른쪽에는 동일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다양한 선물들의 차이를 지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차이를 세 번 반복하여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차이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그것들을 하나로 묶는 분이 계신다고 말합니다.

‘은혜의 선물(χάρισμα)’이라는 낱말은 선물의 출발점을 받는 사람의 능력이나 공로가 아니라 주시는 분의 은혜에 둡니다. 어떤 사람이 특정한 은혜의 선물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가 다른 사람보다 본질적으로 더 우월하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그는 받은 사람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 역시 다른 선물을 받았을 수 있습니다. 5절에서 바울은 이 선물들을 ‘섬김’과 연결합니다. 선물은 받은 사람이 자신의 영적 능력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섬기는 일과 관계됩니다.

6절에서는 은혜의 선물이 나타내는 다양한 활동과 결과를 「모든 것을 모든 이 안에서 이루어 내시는 하나님」의 일로 설명합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에게서 특별한 활동이 나타날 때, 그 사람의 능력만을 보지 않습니다. 그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을 봅니다.

이 세 문장에는 영, 주님, 하나님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문맥에서 주님은 예수님을, 하나님은 아버지를 가리킨다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는 후대의 삼위일체 신학과 중요한 신학적 연결을 갖지만, 바울이 여기서 후대 공의회의 교리적 정의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그의 직접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활동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면서도 서로 경쟁하는 여러 신적 근원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선물이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들을 나눌 수 없습니다. 그 선물을 주시는 분이 같기 때문입니다.

또한 선물이 같지 않다는 이유로 어느 한 사람이 하나님과 덜 관계되어 있다고 판단할 수도 없습니다. 같은 하나님께서 여러 사람 안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일하시기 때문입니다.

선물의 목적은 받는 사람의 위대함이 아니다

저마다에게 영의 나타남이 주어지는 것은 이로움을 위해서입니다.고린도전서 12:7 · 본디새김

이 구절은 12장의 모든 은혜의 선물을 해석하는 기준입니다. 바울은 각 선물이 무엇인지 설명하기 전에 그 선물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부터 밝힙니다.

원문에는 누구의 이로움인지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몸의 비유와 25절의 서로를 향한 돌봄, 그리고 14장에서 반복되는 공동체를 세우는 원칙을 고려하면, 바울이 염두에 둔 것은 개인의 이익만이 아니라 공동체의 유익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고린도 신자들이 어떤 선물을 더 높게 평가했는지 세부적인 상황은 모두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선물을 평가하는 기준을 바꾸려 합니다. 그 선물이 얼마나 놀라운지, 얼마나 많은 사람의 주목을 받는지, 그것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특별한지 대신, 그 선물이 실제로 어떤 유익을 만들어 내는지 묻습니다.

개인에게 주어진 선물이지만, 공동체를 향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원칙이 밝혀진 뒤에야 바울은 구체적인 선물들을 열거합니다.

지혜, 앎, 믿음, 치유, 기적, 예언, 여러 혀

한 사람에게는 영을 통해 지혜의 말이 주어지고, 어떤 이에게는 같은 영을 따라 앎의 말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2:8 · 본디새김

고린도전서 앞부분에서 지혜와 앎은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고린도 신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지혜와 앎을 자랑거리로 삼을 위험이 있었고, 바울은 하나님의 지혜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통해 드러났다고 말했습니다(1:18–25).

이제 그는 지혜와 앎을 영이 주시는 선물 가운데 놓습니다. 지혜와 앎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그것들의 근원과 사용 목적을 잊는 데 있습니다. ‘지혜의 말’과 ‘앎의 말’이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가리키는지는 본문이 상세하게 정의하지 않지만, 바울이 분명히 말하는 사실은 두 종류의 말이 모두 영에게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다른 이에게는 같은 영 안에서 믿음이, 어떤 이에게는 그 한 영 안에서 낫게 하는 은혜의 선물들이 주어집니다. 어떤 이에게는 기적을 이루어 내는 것이, 어떤 이에게는 예언이, 어떤 이에게는 영들을 가려내는 것이, 다른 이에게는 여러 갈래의 혀가, 어떤 이에게는 여러 혀로 하는 말을 풀어 옮기는 것이 주어집니다.고린도전서 12:9–10 · 본디새김

여기에는 성격이 서로 다른 활동들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바울은 각 선물의 의미를 완전히 정의하지 않으며, 구체적인 수행 방식에는 어느 정도 불확실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 때문에 바울의 중심 논지가 모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목록 전체에서 그가 반복하는 말이 있습니다.

「같은 영」. 「그 한 영」.

바울은 각 선물의 차이를 열거하면서 그 근원이 같다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11절에서 그 논증을 마무리합니다.

이 모든 것을 하나이며 같은 영이 이루어 내시고, 뜻하시는 대로 저마다에게 따로 나누어 주십니다.고린도전서 12:11 · 본디새김

여기서 주어는 분명합니다. 영이십니다.

은혜의 선물은 인간이 자기 뜻대로 선택하여 소유하는 물건처럼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의 선물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 사람이 영적으로 부족하다는 뜻입니까?

바울은 아직 그 대답을 직접 하지 않습니다. 대신 완전히 다른 이야기, 사람의 몸에 관한 이야기로 들어갑니다.

조금 더 깊이

일부 해석은 지혜의 말을 상황에 맞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여 가르치거나 권면하는 능력으로, 앎의 말을 복음과 하나님의 진리에 관한 이해를 전달하는 능력으로 구별하고, 다른 해석은 두 표현의 의미가 상당 부분 겹칠 수 있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특정한 유형의 직관이나 초자연적인 정보를 얻는 능력에 각각 직접 대응시켜 확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9절의 ‘믿음’은 모든 신자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신앙과 같은 의미라면 왜 특정한 사람에게 주어지는 선물 가운데 다시 언급했는지가 물음으로 남기에, 특별한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능력이나 믿음의 특별한 발휘로 이해하는 해석이 있지만 바울은 따로 정의하지 않습니다. 「낫게 하는 은혜의 선물들」에서는 두 명사가 모두 복수형인데, 다양한 질병을 낫게 하는 활동인지 여러 경우에 주어지는 치유의 선물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특정한 사람이 언제나 모든 질병을 고칠 수 있는 고정된 능력을 소유한다는 식으로 이해할 근거는 없습니다. ‘예언’은 공동체에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말과 관련되며, 14장에서 다른 사람을 세우고 권면하고 위로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영들을 가려내는 것’은 영적 주장이나 현상이 하나님의 영에게서 비롯되었는지를 분별하는 활동으로, 3절의 기준과 연결됩니다. ‘여러 갈래의 혀’가 반드시 학습하지 않은 외국어였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영적 발화였는지는 완전히 결정할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자기 언어로 알아듣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고, 고린도전서 14장에서는 다른 사람이 그 말을 이해하지 못하므로 풀어 옮기는 일이 필요하다고 설명합니다. 두 본문을 연결할 수 있지만, 모든 현상이 같은 방식으로 나타났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 바울은 교회를 몸이라고 부르는가

고린도전서 12:12–13 본문 →

여럿이 모여 한 몸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몸은 하나이고 많은 지체를 지니며 몸의 모든 지체가 여럿이어도 한 몸인 것처럼, 그리스도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2:12 · 본디새김

우리는 보통 ‘몸에 많은 지체가 있지만 한 몸인 것처럼 교회도 그러합니다’라는 문장을 예상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몸의 비유를 설명하면서 교회 대신 예수님을 말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공동체를 사람의 몸에 비유하는 것보다 훨씬 강한 표현입니다. 그 공동체의 정체성이 예수님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27절에서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저마다 그 몸의 지체입니다」라고 이 사실을 직접 밝히니, 12절의 표현은 뒤에 나올 결론을 미리 보여 줍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은 서로 무관한 개인들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일치는 사람들이 좋은 뜻을 가지고 서로 협력하기로 약속한 결과가 아닙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그들을 하나로 묶습니다.

한 영 안에서 한 몸이 되도록 잠기다

유대 사람이든 그리스 사람이든 노예든 자유인이든 우리가 다 한 영 안에서 한 몸이 되도록 잠겼고, 우리가 다 한 영을 마시게 되었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2:13 · 본디새김

바울은 한 몸이 된 근거를 설명하면서 앞에서 열거한 여러 은혜의 선물을 다시 언급하지 않습니다. 한 영 안에서 한 몸이 되도록 잠겼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잠겼다’는 말은 세례의 언어로, 바울은 세례와 성령을 통한 하나 됨을 연결합니다.

「한 영을 마시게 되었다」는 표현을 성령을 받는 경험의 이미지로 읽든, 주님의 만찬과 잇든 중심은 분명합니다. 다양한 선물을 받은 사람들이 한 몸이 된 이유는 그들이 같은 선물을 받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한 영 안에서 하나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설명하면서 두 종류의 구별을 언급합니다.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은 민족적·종교적 배경의 구별이고, 노예와 자유인은 사회적·법적 신분의 차이입니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 노예와 자유인의 지위 차이는 매우 컸습니다.

이것이 당시의 법적 신분 차이가 세례를 받는 순간 사회적으로 모두 사라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여기서 노예제의 폐지가 이미 이루어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구별이 예수님의 몸에 속할 자격이나 성령을 받아 누리는 지위를 결정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하나의 몸에 속합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없어도 되는 존재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 관계가 실제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한 영을 마시게 되었다」를 앞에서 다룬 주님의 만찬과 연결하여 읽는 해석이 있습니다. 10–11장에서 빵과 잔을 함께 나누는 일이 강조되었기 때문에, 12:13이 세례와 성찬의 이미지를 함께 포함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반면 두 표현 모두 성령을 받는 하나의 경험을 서로 다른 이미지로 설명한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이 경우 ‘잠김’과 ‘마심’은 성령 안에 들어가고 성령을 받아 누리는 경험의 두 측면입니다.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

고린도전서 12:14–20 본문 →

몸에서 쫓겨나지 않았는데 스스로 떠나는 지체

사실 몸은 한 지체가 아니라 여럿입니다.고린도전서 12:14 · 본디새김

이 짧은 문장은 다음에 등장하는 두 장면을 준비합니다. 몸에 많은 지체가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말한 뒤, 곧이어 이상한 대화가 시작됩니다.

발이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 한다 해도, 그렇다고 해서 발이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이겠습니까?고린도전서 12:15 · 본디새김

발이 왜 손을 부러워하는지 바울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손은 물건을 잡고 만들고 움직이며, 그 활동이 다른 사람에게 쉽게 보입니다. 발은 몸을 지탱하고 이동시키지만, 다른 지체와 비교하여 자신의 가치를 낮게 평가할 수 있습니다.

‘나는 손처럼 일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몸에 속할 만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나 발이 자신을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선언해도, 그 말 때문에 실제로 몸의 일부가 아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발은 여전히 몸에 속해 있습니다. 그 사실은 발이 자신의 가치를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결정되지 않습니다.

귀가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속하지 않는다」 한다 해도, 그렇다고 해서 귀가 몸에 속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고린도전서 12:16 · 본디새김

귀는 눈이 할 수 있는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귀가 몸에 불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다루는 것은 다른 사람과의 비교 때문에 자신의 자리를 의심하는 태도입니다.

다른 사람처럼 말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처럼 가르치지 못합니다.

다른 사람처럼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일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차이가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다는 결론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를 17절에서 설명합니다.

온몸이 눈이라면 들을 수 없다

온몸이 눈이라면 청각은 어디 있겠습니까? 온몸이 청각이라면 후각은 어디 있겠습니까?고린도전서 12:17 · 본디새김

바울의 비유에는 의도적인 우스꽝스러움이 있습니다. 온몸이 하나의 커다란 눈이라면 보는 능력만 있고 들을 수 없습니다. 온몸이 청각이라면 듣는 기능만 있고 냄새를 맡을 수 없습니다.

몸이 몸으로 존재하려면 지체들이 서로 달라야 합니다.

다양성은 몸의 일치를 방해하는 결함이 아니라 몸이 몸답게 존재하기 위한 조건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없는 선물을 부러워하면서 다른 사람처럼 되어야만 공동체에 속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몸의 본질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몸은 동일한 기능을 가진 부분들을 많이 모아 놓은 집합체가 아니라, 서로 다른 지체들이 함께 존재하는 하나의 생명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그 지체들을 서로 다르게 만들었습니까?

그러나 실상 하나님이 뜻하신 대로 지체들을 하나하나 몸 안에 두셨습니다.고린도전서 12:18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 비유의 깊이가 달라집니다. 바울은 사람의 몸이 원래 그렇게 생겼다고 말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몸의 다양성이 하나님의 의도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다른 사람과 다르다는 사실은 곧 자신이 하나님께 덜 사랑받았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에게 모든 기능을 몰아주시지 않았습니다. 여러 지체를 함께 두셨습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을 근거로 교회 안의 모든 현재 지위와 직책, 모든 사회적 불평등이 하나님께서 직접 정하신 것이므로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해서는 안 됩니다. 사람들이 만들어 낸 모든 서열을 신성화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실제로 뒤에서는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명예 서열을 뒤집으시는 모습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실상 지체는 여럿이고 몸은 하나입니다.고린도전서 12:20 · 본디새김

14절에서 시작한 논증의 결론입니다. 하나의 몸이 되기 위해 모든 지체가 같아질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지체들이 함께 있을 때 몸이 존재합니다.

그러나 이제 바울은 완전히 반대되는 사람들을 향합니다. 자신이 다른 지체 없이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나는 네가 필요 없다

고린도전서 12:21–26 본문 →

발의 열등감보다 더 위험한 눈의 교만

눈이 손에게 「나는 네가 필요 없다」 할 수 없고, 머리가 발에게 「나는 너희가 필요 없다」 할 수도 없습니다.고린도전서 12:21 · 본디새김

앞에서는 발과 귀가 자기 자신을 부정했습니다. 이번에는 눈과 머리가 다른 지체를 부정합니다. 처음에는 비교 때문에 자신을 낮게 평가하는 문제가 있었다면, 이제는 자신의 능력 때문에 다른 사람을 낮게 평가하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눈은 볼 수 있지만 손처럼 물건을 붙잡지는 못합니다. 머리는 몸의 중요한 부분이지만 발이 수행하는 일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눈이 손에게 필요 없다고 말하는 순간, 눈은 자기 자신이 어떤 몸에 속해 있는지 잊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두 태도를 모두 거부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 태도에 대한 반박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약해 보이는 지체가 더 꼭 필요하다

도리어 몸의 지체 가운데 더 약해 보이는 것들이 훨씬 더 꼭 필요합니다.고린도전서 12:22 · 본디새김

바울은 그 지체들이 실제로 가치가 낮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약하다고 여기는 지체들을 말합니다. 이것은 약한 사람도 어느 정도 쓸모가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을 쉽게 무시할 수 없다는 강한 주장입니다.

몸에는 겉으로 잘 드러나지 않고 약해 보이지만 생명을 유지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그 지체들은 화려하지 않을 수 있지만, 없으면 몸 자체가 심각한 손상을 입습니다. 사람들이 잘 알아보지 못하는 선물을 받았다고 해서, 눈에 띄는 활동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공동체에 불필요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덜 귀하게 여기는 지체를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대하십니까?

하나님은 귀함이 모자란 쪽에 더 큰 귀함을 주셨다

그리고 몸에서 덜 귀하다고 여기는 것들에 우리는 더 큰 귀함을 둘러 줍니다. 또 우리의 볼품없는 것들이 더 큰 단정함을 지닙니다. 우리의 단정한 것들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몸을 한데 어우르시어 귀함이 모자란 쪽에 더 큰 귀함을 주셨습니다.고린도전서 12:23–24 · 본디새김

우리는 모든 신체 부위를 같은 방식으로 드러내지 않습니다. 어떤 부분은 그대로 드러내도 괜찮지만, 어떤 부분은 옷으로 가리고 더욱 세심하게 돌봅니다. 가리는 부분이 필요 없는 부분이라서가 아니라, 그 부분을 적절하게 보호하고 존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24절 뒷부분에서 주어가 바뀝니다.

앞에서는 우리가 몸의 일부를 어떻게 대하는지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께서 몸을 어떻게 이루셨는지 말합니다. 바울은 모든 지체에게 똑같은 역할을 주셨다고도, 모든 지체가 같은 평가를 받고 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귀함이 모자란 쪽에 더 큰 귀함을 주시는 하나님의 행동을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몸에서는 존중이 이미 존중받는 곳에만 쌓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존중이 모자란 곳을 향해 더 큰 귀함이 주어집니다.

가진 사람이 자기 만찬을 먼저 먹고 가진 것 없는 사람이 부끄러움을 당하던 11장의 식사와 나란히 놓으면, 고린도 신자들이 사회의 지위와 명예의 기준을 교회 안에 그대로 가져오는 일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 드러납니다.

하나님이 몸을 그렇게 만드신 목적

몸에 갈라짐이 없게 하고 도리어 지체들이 서로를 위해 똑같이 마음 쓰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2:25 · 본디새김

하나님께서 귀함이 모자란 쪽에 더 큰 귀함을 주신 목적입니다. 바울은 갈라짐이 없는 상태만을 목표로 삼지 않습니다. 일치는 모든 사람이 한 공간에 모여 있다는 사실만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서로의 필요를 실제로 돌보는 관계가 있어야 합니다.

「똑같이 마음 쓰게」라는 표현은 균형을 제시합니다. 은혜의 선물은 다르고, 맡은 역할도 다릅니다. 그러나 서로를 향한 관심이 특정한 사람에게만 집중되어서는 안 됩니다.

한 지체가 앓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앓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기뻐합니다.고린도전서 12:26 · 본디새김

발이 다치면 걷는 일이 어려워지고, 손이 다치면 일상적인 활동이 제한됩니다. 몸의 한 부분에서 일어난 일이 그 부분에만 갇히지 않습니다.

상대방의 고통을 무시하는 일도 잘못이지만, 상대방의 영광을 시기하는 일 역시 한 몸의 관계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이 인정받을 때 자신도 기뻐할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과 자신의 삶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일치는 감정적으로 언제나 같은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형편이 나와 무관한 일이 아니게 되는 관계입니다.

이제 바울은 비유를 끝내고 고린도 신자들에게 직접 선언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사람의 몸을 사회나 국가에 비유하는 일은 알려진 수사적 방식이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인 메네니우스 아그리파의 우화에서는 몸의 여러 지체가 배에 불만을 품었다가, 모든 지체가 서로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러나 그 우화가 사용된 사회적 맥락에서는 신체의 상호 의존을 강조함으로써 기존의 정치적 질서를 유지하는 기능이 있었습니다. 반면 바울은 사회적으로 낮게 평가되는 지체에게 더 큰 귀함을 부여하는 하나님의 행동을 강조합니다. 바울이 고대의 신체 우화와 유사한 소재를 변형하여 고린도 공동체의 기존 서열을 흔드는 방식으로 활용한다는 해석도 있지만, 특정한 우화를 직접 인용했다는 사실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한 고린도전서 1:23–29에서 바울은 세상이 약하고 어리석게 여기는 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혜와 능력을 드러내신다고 말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명예와 능력의 기준으로는 자랑하기 어려운 분이셨지만, 바울은 바로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드러났다고 선포했습니다. 12:22–24가 십자가 사건을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인간의 지위와 능력에 관한 판단을 뒤집으신다는 주제가 고린도전서 전체에서 반복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고린도전서 12:27–30 본문 →

비유가 공동체의 정체성이 되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저마다 그 몸의 지체입니다.고린도전서 12:27 · 본디새김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몸처럼 행동해야 한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몸이라고 선언합니다. 몸의 비유는 서로 협력하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실용적인 조언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이 실제로 어떤 관계 안에 놓여 있는지를 설명합니다. 12절의 「그리스도도 그러하기 때문입니다」와 13절의 한 영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는 설명이 여기서 결론에 이릅니다.

「저마다 그 몸의 지체입니다」라는 표현에서 각 사람이 몸 전체가 아니라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읽을 수 있습니다. 누구도 혼자서 몸 전체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각자가 한 부분이라는 사실은 그 사람이 몸에 덜 속한다는 뜻이 아니라, 각자의 구체적인 자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몸에 속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전체로 착각해서도 안 되고, 자신을 몸에서 제외해서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교회 안에 어떤 사람들을 두셨는가

그리고 하나님이 교회 안에 두신 것은 첫째로 사도들, 둘째로 예언자들, 셋째로 가르치는 이들, 그다음에 기적, 그다음에 낫게 하는 은혜의 선물, 도와주는 일, 이끌어 다스리는 일, 여러 갈래의 혀입니다.고린도전서 12:28 · 본디새김

이 목록은 8–10절의 목록과 완전히 같지 않습니다. 앞에서는 지혜의 말과 앎의 말, 믿음, 치유, 기적, 예언, 영들을 분별하는 일, 여러 혀와 그것을 풀어 옮기는 일이 등장했습니다. 28절에서는 사도, 예언자, 가르치는 이처럼 사람의 사역을 나타내는 표현이 먼저 나옵니다. 바울은 은혜의 선물을 고정된 하나의 목록으로 완전히 정리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도와주는 일」과 「이끌어 다스리는 일」이 포함되어, 사람을 돕는 일과 공동체를 이끄는 일도 하나님의 활동과 관련된 목록에 들어갑니다. 바울은 여기서 조직도나 직무기술서를 제시하고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교회 안에 다양한 사람과 활동을 두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런데 목록의 처음에는 「첫째로」, 「둘째로」, 「셋째로」라는 순서가 등장하여 사도, 예언자, 가르치는 이들의 사역에 특별한 중요성을 부여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앞에서 모든 지체가 서로 필요하다고 말한 것과 모순되지 않을까요?

여기서는 사역의 중요성과 사람의 존엄을 구별해야 합니다. 어떤 사역이 공동체의 형성과 가르침에서 더 기초적인 역할을 할 수 있지만, 그런 역할을 맡은 사람의 인간적 가치가 다른 사람보다 더 높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바로 앞에서 하나님께서 귀함이 모자란 지체에게 더 큰 귀함을 주셨다고 말했으므로, 28절의 순서를 모든 교회 구성원의 가치를 매기는 서열표로 읽으면 앞의 논증과 충돌합니다.

역할의 차이는 존재합니다. 그 차이가 사람을 무시할 권리를 만들어 주지는 않습니다.

다 사도입니까?

다 사도입니까? 다 예언자입니까? 다 가르치는 이입니까? 다 기적을 행합니까? 다 낫게 하는 은혜의 선물들을 지녔습니까? 다 여러 혀로 말합니까? 다 풀어 옮깁니까?고린도전서 12:29–30 · 본디새김

그리스어 원문에서 이 질문들은 모두 부정적인 대답을 기대하는 형태입니다.

아닙니다.

몸의 모든 부분이 눈일 수 없듯이, 교회의 모든 사람이 같은 선물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모든 신자가 같은 영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고 말했지만, 모든 신자가 같은 은혜의 선물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한 영 안에서 한 몸이 되었다는 사실은 공동체의 근거이고, 개별 선물은 같은 영께서 뜻하시는 대로 나누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특정한 선물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이 예수님의 몸에 속하지 않거나 성령께 속하지 않는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특정한 선물을 가진 사람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그 선물이 실제로 하나님의 활동을 드러낼 수 있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 선물을 모든 신자가 똑같이 가져야 한다는 요구는 몸의 다양성에 관한 자신의 논증과 어울리지 않습니다.

한 영께서 모든 사람을 한 몸으로 묶으셨다는 사실은, 한 영께서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선물을 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27절의 「저마다 그 몸의 지체입니다」에 해당하는 멜레 에크 메루스는 문자적으로 ‘부분으로서의 지체들’ 또는 ‘각자 자기 몫에 따른 지체들’이라는 의미의 여지를 갖습니다. 이 표현은 다음 장에서 바울이 앎과 예언을 ‘부분으로’ 한다고 말할 때의 표현과도 연결되지만, 두 구절의 의미를 완전히 같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12장에서는 몸의 각 지체가 전체와 맺는 관계가 중심이고, 13장에서는 인간의 앎과 예언이 지닌 부분성이 중심입니다. 28절의 ‘도와주는 일’(안틸렘프세이스)은 도움을 주거나 지원하는 활동과 관련되고, ‘이끌어 다스리는 일’(퀴베르네세이스)은 배를 조종하거나 방향을 잡는 이미지와 관련된 말입니다. 그러나 이를 오늘날 교회 조직의 특정한 직책과 일대일로 대응시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더 큰 은혜의 선물과 훨씬 더 나은 길

고린도전서 12:31 본문 →

그러나 여러분은 더 큰 은혜의 선물을 사모하십시오. 그리고 나는 훨씬 더 나은 길을 여러분에게 보여 줍니다.고린도전서 12:31 · 본디새김

이 마지막 절은 12장의 결론이면서 다음 논의를 여는 문장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해석상의 갈림이 있습니다.

사모하라는 명령인가, 이미 사모하고 있다는 지적인가

「사모하십시오」(ζηλόω)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명령법과 직설법이 같은 형태입니다. 따라서 이 문장은 두 방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명령법입니다. 바울이 고린도 신자들에게 더 큰 은혜의 선물들을 열심히 추구하라고 권면하는 것입니다. 14:1과 14:39에서 은혜의 선물, 특히 예언을 사모하라고 권면하는 문장이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이때 ‘더 큰’은 더 놀랍거나 신비로운 선물이 아니라, 14장에서 바울이 비교할 교회를 세우는 유익이라는 기준과 연결하여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직설법입니다. 문장은 ‘여러분은 더 큰 은혜의 선물들을 사모하고 있습니다’라는 뜻이 되어, 고린도 사람들이 특정한 선물을 더 높이 평가하고 경쟁적으로 추구하는 태도를 지적하는 말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훨씬 더 나은 길」이 그들의 잘못된 열심에 대한 대답이 됩니다. 같은 직설법 읽기에서, 더 큰 은혜의 선물을 계속 추구하고 있느냐고 묻는 수사적 질문으로 번역할 가능성을 제시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두 읽기는 문법적으로 모두 가능합니다. 따라서 어느 하나를 원문 자체가 명백하게 확정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어느 해석을 선택하더라도 바울은 ‘또 하나의 더 큰 선물’을 보여 주겠다고 하지 않습니다. 「길」이라고 말합니다. 은혜의 선물들을 하나 더 추가하여 가장 높은 자리에 올려놓으려는 것이 아니라, 선물을 가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문제로 나아가려 합니다.

다음 장에서 그 길이 무엇인지 밝혀질 것입니다. 그러나 선물은 공동체의 이로움을 위해 주어지고, 약해 보이는 지체가 더욱 필요하며, 한 지체가 앓으면 모두가 함께 앓는다는 12장의 말 속에 그 방향은 이미 드러나 있습니다. 그 길은 지금까지의 논의를 버리는 길이 아니라, 은혜의 선물과 몸의 관계가 참으로 이루어지게 하는 길입니다.

눈이 손에게 말을 건넬 때

고린도전서 12:1–31 본문 →

고린도전서 12장이 끝나갈 무렵, 처음에 등장했던 이상한 몸을 다시 떠올려 볼 수 있습니다. 발은 자신이 손이 아니라서 몸에 속하지 않는다고 말했고, 눈은 손에게 네가 필요 없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두 지체에게 먼저 서로를 존중하라고 명령하지 않았습니다. 왜 서로 존중해야 하는지를 하나님께서 하신 일에서 찾았습니다. 한 영께서 뜻하시는 대로 선물을 나누어 주셨고, 한 영 안에서 사람들을 한 몸으로 묶으셨으며, 하나님께서 지체들을 뜻하신 대로 몸 안에 두시고 귀함이 모자란 지체에게 더 큰 귀함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을 불필요하다고 여기던 발도, 다른 지체를 불필요하다고 여기던 눈도 같은 사실 앞에 섭니다. 소속은 자기 평가로 정해지지 않고, 필요는 자기 능력으로 정해지지 않습니다.

발과 귀는 여전히 몸에 속해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몸 안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눈이 손을 바라봅니다. 눈은 볼 수 있지만, 자신이 본 것을 붙잡거나 만질 수는 없습니다. 손은 눈처럼 볼 수 없지만, 그 때문에 몸에서 제외되지 않습니다. 눈과 손은 서로 다른 일을 하면서 한 몸을 이룹니다.

그 몸에는 약해 보이는 지체도, 사람들이 별로 귀하게 여기지 않는 부분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지체를 없애거나 다른 지체처럼 바꾸지 않으시고, 몸 안에 두시며 더 큰 귀함을 주십니다. 그렇게 어우르신 몸에서는 한 지체가 앓을 때 다른 지체가 무관심하게 지낼 수 없고, 한 지체가 영광을 받을 때 다른 지체가 시기만 하며 바라볼 수도 없습니다.

바울은 그런 몸을 가리키며 고린도 신자들에게 「여러분은 그리스도의 몸이고 저마다 그 몸의 지체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때 물음은 누가 눈이고 누가 손인가 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눈이 손에게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습니까? 「나는 네가 필요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까?

바울은 그 대답을 강요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신 일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한 몸에 두셨고, 서로 다른 모습으로 두셨고, 서로를 필요로 하도록 만드셨습니다.

예수님의 몸은 가장 뛰어난 지체 하나가 온몸을 대신하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서로 다른 지체들을 한데 두시고, 그들이 서로를 필요로 하게 하신 곳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