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11–14장 · 예배와 은사

주님의 만찬이 아닐 때

고린도 교회는 주님의 만찬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모여서 먹는 것이 주님의 만찬이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고린도 신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함께 모였고, 빵과 잔을 나누는 예식도 행했습니다. 바울이 전해 준 전승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배불리 먹고 술에 취하는 동안 다른 사람들은 굶주리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모습을 보고 단순히 식사 예절이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도 그 모임이 주님의 만찬이 아닐 수 있습니까?

이 장에는 처음 보기에 서로 별개의 주제처럼 보이는 두 논의가 있습니다. 앞부분에서는 남자와 여자가 기도하거나 예언할 때 머리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뒷부분에서는 공동체가 주님의 만찬을 어떻게 나누어야 하는지 다룹니다.

그러나 두 대목에는 의미 있는 연결이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바울은 남자와 여자가 자기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문제를 말합니다. 뒷부분에서는 가진 사람들이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는 문제를 꾸짖습니다. 그리스어 원문은 두 자리에서 같은 동사, 부끄럽게 하다를 사용합니다.

앞에서는 예배하는 사람의 머리가 문제였습니다.

뒤에서는 함께 예배하는 사람이 문제입니다.

두 논의의 역사적 상황과 구체적인 해결책은 서로 다릅니다. 그러나 이 반복은 독자에게 질문을 남깁니다.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모인 사람들이, 바로 그 예배의 자리에서 누군가를 부끄럽게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읽는 시간 37분소단락 1011장 본문 읽기 →

예배하는 남자와 여자, 그리고 그들의 머리

고린도전서 11:1–6 본문 →

바울은 왜 머리 이야기를 시작하는가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이들이 되십시오. 나도 그리스도를 본받듯이 말입니다.고린도전서 11:1 · 본디새김

바울은 그리스도를 본받는 범위 안에서 자신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앞장에서는 자신의 자유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는 삶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관심은 공동체가 함께 모여 예배하는 자리로 옮겨 갑니다.

나는 여러분을 칭찬합니다. 여러분이 모든 일에서 나를 기억하고 내가 여러분에게 전해 준 그대로 그 전승들을 붙들고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1:2 · 본디새김

바울은 칭찬으로 시작합니다.

여기서 ‘전승’은 단순히 오래된 인간적 관습을 뜻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사도로서 공동체에 전해 준 가르침과 실천의 내용을 가리킵니다. 고린도 교회는 배운 것이 있었고 그것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지키고 있는 예배의 모습에도 바로잡아야 할 문제가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런데 나는 여러분이 이것을 알고 있기를 원합니다. 모든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이고, 여자의 머리는 남자이며,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입니다.고린도전서 11:3 · 본디새김

이 구절은 고린도전서에서 해석이 가장 어려운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여기서 실제 신체의 머리만을 말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는 실제로 무엇인가를 머리에 드리우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바울은 ‘머리’라는 표현이 가진 두 의미를 오가면서 논증하고 있습니다.

‘머리’는 무엇을 뜻하는가

이 낱말이 비유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는 오랫동안 논쟁되어 왔습니다. 읽기는 권위나 지도적 지위, 근원이나 출처, 관계 안에서의 대표성과 명예로 갈립니다. 어느 쪽으로 읽느냐에 따라 이 구절이 남녀 관계에 관해 말하는 내용이 달라지므로, 이 구절만으로 남자와 여자의 모든 사회적 역할이나 권위 관계를 확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입니다」라는 표현을 그리스도께서 본질적으로 하나님보다 열등하시다는 주장으로 곧바로 연결할 수도 없습니다. 본문은 그리스도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를 언급하지만, 그 관계가 신적 본질의 차이를 뜻하는지에 관해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삼위일체의 존재론을 체계적으로 논증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의 직접적인 관심은 예배하는 남자와 여자의 행동이 그들이 맺고 있는 관계와 어떻게 어울려야 하는가에 있습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갈림이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로 옮긴 그리스어 낱말은 문맥에 따라 남편과 아내를 뜻하기도 합니다. 본디새김은 창조 이야기와 남녀의 상호 의존을 다루는 8–12절을 근거로 남자와 여자로 옮겼지만, 본문이 주로 기혼 여성과 남편의 관계를 다룬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냐에 따라 이 대목의 적용 범위가 달라집니다.

예배하는 여자들은 이미 말하고 있었다

머리에 무엇인가를 드리워 지니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남자는 다 자기 머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머리를 덮지 않고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여자는 다 자기 머리를 부끄럽게 합니다. 그런 여자는 머리가 밀린 여자와 매한가지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1:4–5 · 본디새김

바울은 여자들이 기도하고 예언하는 행위 자체를 금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자들이 기도하거나 예언할 때 머리를 덮지 않는 문제를 다룹니다.

이것은 당시 고린도 공동체에서 여성들이 기도와 예언의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예언이 공동체를 향한 발언과 관련될 수 있다는 점은 고린도전서 14장의 논의에서도 확인됩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여자가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예언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활동을 하는 방식입니다.

그런데 왜 머리를 덮지 않는 것이 문제였을까요?

머리를 덮는다는 것은 무엇을 나타냈는가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머리를 가리거나 드러내는 관습은 성별, 신분, 혼인 여부, 종교적 상황 등에 따라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일부 여성들에게 머리 덮개는 정숙함과 사회적 명예, 혼인한 여성의 신분을 나타내는 요소였습니다. 그러나 모든 지역과 계층의 여성이 언제나 같은 방식으로 머리를 덮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로마의 남성 제사장들은 종교 의식을 행할 때 옷자락으로 머리를 덮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따라서 바울의 명령을 당시 모든 남자는 머리를 드러내고 모든 여자는 덮었다는 보편적 관습으로 설명하기도 어렵고, 고린도 교회에서 정확히 어떤 복장과 머리 모양이 문제가 되었는지를 완전하게 재구성할 수도 없습니다.

바울의 말에서 직접 확인되는 사실은 좀 더 제한적입니다. 그는 남자가 머리를 드리운 채, 여자가 머리를 덮지 않은 채 기도하거나 예언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깁니다. 예배의 자리에서 남녀의 신체적 표현과 사회적으로 인식되는 명예가 서로 관계된다는 것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가 머리를 덮지 않는다면 머리도 깎을 일입니다. 그러나 머리를 깎거나 미는 것이 여자에게 부끄러운 일이라면 머리를 덮을 일입니다.고린도전서 11:6 · 본디새김

바울은 머리를 덮지 않는 일과 머리를 깎거나 미는 일을 연결합니다. 그가 예상하는 독자들은 여자가 머리를 완전히 밀거나 짧게 깎는 것을 부끄러운 일로 여길 것입니다. 바울은 청중에게 이미 익숙한 명예와 수치의 감각을 사용하여 머리를 덮는 문제를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 문제를 단순한 지역 관습의 문제로만 다루지 않고 창조 이야기까지 가져오는 것일까요?

조금 더 깊이

‘머리’(케팔레)를 권위나 지도적 지위로 읽는 해석은, 그리스도께서 남자의 머리이시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머리이듯 남자도 여자와의 관계에서 일정한 권위와 책임을 가진다고 봅니다. 근원이나 출처로 읽는 해석은 여자가 남자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창세기 2장의 이야기를 중요한 근거로 삼습니다. 또 다른 접근은 이 표현을 지배나 기원의 문제로만 환원하지 않고, 한 사람의 행동이 자신과 관계된 다른 사람의 명예에 영향을 준다는 대표성과 명예의 문제로 읽습니다. 이 본문을 남녀의 위계질서와 평등의 대립 구도보다 상호 의존의 관계 안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논의, ‘머리’의 여러 의미와 고린도의 복장 관습을 함께 검토하는 논의도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로 옮긴 아네르와 귀네를 남편과 아내로 읽는 해석은, 고대 사회에서 머리를 덮는 관습이 혼인 여부와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낼 수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삼습니다. 고린도 공동체에 속한 노예 여성들의 처지와 당시 혼인 관습을 고려할 때, 이 권면이 주로 자유인 신분의 기혼 여성들에게 향했을 가능성을 보는 읽기도 있습니다. 6절의 머리를 미는 일을 당시 고린도의 특정한 사회적 처벌이나 성적 부도덕의 표시로 보는 설명도 제시되지만, 본문 자체는 그 구체적인 배경을 밝히지 않습니다.

창조의 순서에서 상호 의존으로

고린도전서 11:7–9 본문 →

여자는 남자의 영광이라는 말

남자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영광이므로 머리를 덮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자는 남자의 영광입니다.고린도전서 11:7 · 본디새김

그렇다면 바울은 여자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일까요? 그렇게 결론을 내리면 창세기 1:27과 충돌합니다. 창세기 1:27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으며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고린도전서 11:7에서는 왜 이처럼 비대칭적인 표현을 사용합니까? 바울은 여기서 창세기 1장뿐 아니라 2장의 창조 이야기를 활용하고 있습니다.

남자가 여자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에게서 비롯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자가 여자를 위하여 지어진 것이 아니라 여자가 남자를 위하여 지어졌으니 말입니다.고린도전서 11:8–9 · 본디새김

바울은 창세기 2:18–23을 떠올립니다. 그 이야기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고 말씀하시고, 그에게 알맞은 돕는 이를 마련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여자는 남자의 몸에서 취한 것으로 만들어지고, 남자는 그 여자를 보고 자신의 뼈에서 나온 뼈이며 살에서 나온 살이라고 말합니다.

창세기 2장에서 여자가 남자를 위해 창조되었다는 사실은 여자가 남자보다 덜 인간적이거나 하나님의 형상을 덜 지녔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야기의 시작은 남자가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는 하나님의 판단입니다. 여자의 창조는 남자의 결핍이 해결되는 사건이며, 남자는 여자를 통해 자신과 같은 인간을 만납니다.

바울이 이 창조 이야기를 사용하는 방식에는 남녀 사이의 비대칭성이 분명히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 비대칭성만으로 바울의 논증 전체를 정리해서는 안 됩니다. 곧바로 이어지는 11–12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는

다만 주 안에서는 여자도 남자와 따로 있지 않고 남자도 여자와 따로 있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11:11 · 본디새김

「다만」(πλήν)으로 옮긴 말은 앞에서 한 말을 인정하면서도 중요한 제한이나 보완을 제시할 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등장하는 순간 논증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지금까지는 여자가 남자에게서 비롯되었다는 창조의 순서가 강조되었지만, 이제 바울은 남자와 여자가 서로 떨어져 존재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여자가 남자에게서 비롯되었듯이 남자도 여자를 통해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됩니다.고린도전서 11:12 · 본디새김

여자는 처음에 남자에게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 모든 남자는 여자를 통해 태어납니다.

한쪽의 기원만 이야기하면 관계가 일방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실제 삶을 살펴보면 남자와 여자는 서로 의존합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통해 앞에서 강조했던 창조의 순서를 다시 상대화합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리고 만물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됩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의 관계를 통해 존재하지만, 둘 모두의 궁극적인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어느 한쪽도 자신의 존재를 다른 한쪽에 대한 절대적인 우월성의 근거로 삼을 수 없습니다.

8–9절은 창조의 순서와 차이를 강조하고, 11–12절은 상호 의존과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된 존재라는 공통점을 강조합니다. 한쪽만을 선택하여 다른 쪽을 지워서는 바울의 논증을 온전히 읽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11절의 「주 안에서는」은 바울이 생물학적인 상호 의존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께 속한 공동체에서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의 관계는 상대방의 존재를 무시하거나 독립적으로 자신을 높이는 관계가 될 수 없습니다.

창조의 순서를 말하던 논증은 결국 서로가 서로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고백으로 이어집니다.

이 사실을 기억한 채, 10절의 어려운 표현을 살펴봅니다.

여자는 왜 머리에 권한을 지녀야 하는가

고린도전서 11:10–12 본문 →

그러므로 여자는 천사들 때문에 머리에 권한을 지녀야 합니다.고린도전서 11:10 · 본디새김

이 구절은 고린도전서 11장에서 가장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여자가 머리에 지녀야 한다는 ‘권한’이 무엇인지 분명하지 않고, 천사들이 왜 이 문제에 등장하는지도 설명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해석자는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것과 자신이 추정하는 내용을 구별해야 합니다.

머리에 있는 권한

원문은 직역하면 ‘머리 위에 권한을 지니다’에 가깝습니다. 여기에는 ‘덮개’나 ‘권위의 표’라는 명사가 직접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두 해석이 갈립니다.

첫 번째는 이 표현을 머리에 쓰는 덮개가 나타내는 권위의 표시로 이해합니다. 앞뒤 문맥이 머리를 덮는 문제를 다루고 있으므로, 바울이 덮개를 권위와 관련된 상징으로 표현했다고 보는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많이 받아들여져 온 해석입니다.

두 번째는 여자가 자신의 머리에 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이 경우 바울은 예배에 참여하는 여자가 자신의 머리를 적절하게 다룰 권한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셈입니다. 이 낱말(엑수시아(ἐξουσία))은 일반적으로 권리나 권한을 뜻하고,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이 단어를 여러 차례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설명하는 데 사용했습니다. 따라서 10절의 권한을 무조건 다른 사람이 여자에게 행사하는 권위로 바꾸는 것은 원문의 의미를 미리 결정할 위험이 있습니다.

두 읽기 모두 본문 전체의 흐름과 관계됩니다. 그러나 10절의 표현만으로 어느 하나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천사들 때문에

더 어려운 것은 「천사들 때문에」라는 표현입니다. 천사들이 예배하는 공동체의 모임에 함께하며 그 예배를 지켜본다는 관념을 배경으로 삼는 해석, 천사들을 창조 질서와 관련된 존재로 이해하는 해석, ‘천사’가 본래 전달자나 사자를 뜻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교회에서 온 사람들과 관련된 표현으로 보는 해석, 창세기 6장의 하늘 존재들과 여성에 관한 전승을 배경으로 보는 해석이 제시됩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어느 설명도 고린도전서 11:10 자체에서 직접 확인되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천사들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여성의 머리 덮개에 관한 상세한 천사론을 세우거나 특정한 초자연적 위험을 단정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이 불확실성을 인정하는 것이 본문에 더 충실한 읽기입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합니다.

바울에게 예배는 단순히 개인이 자기 마음대로 표현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그는 예배하는 사람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또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 남자와 여자의 상호 의존을 강조함으로써, 권한과 머리에 관한 논의가 일방적인 우월성의 주장으로만 이해되지 않도록 합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의 원문은 엑수시안 에케인 에피 테스 케팔레스입니다. 이 구절을 여자가 자신의 머리를 통제하고 머리 모양을 적절하게 할 권한과 연결하는 해석도 있고, 덮개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권위의 표지라는 전통적인 해석도 여전히 중요한 선택지입니다. 천사들이 예배를 지켜본다는 관념을 배경으로 삼으면, 바울의 말은 예배가 단지 인간들 앞에서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라 천사들 앞에서도 이루어지는 거룩한 행위라는 뜻이 됩니다.

본성과 머리카락, 그리고 다투는 습관

고린도전서 11:13–16 본문 →

바울은 왜 본성을 이야기하는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 여자가 머리를 덮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마땅합니까?고린도전서 11:13 · 본디새김

앞에서는 창조 이야기를 제시했습니다. 이제는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적절함과 부끄러움에 관한 감각을 사용합니다.

본성 자체도 여러분에게 가르치지 않습니까? 남자가 머리를 길게 기르면 그 남자에게 수치이지만, 여자가 머리를 길게 기르면 그 여자에게 영광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긴 머리는 덮개 대신 주어졌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1:14–15 · 본디새김

바울이 말하는 본성은 정확히 무엇을 뜻할까요? 남자와 여자가 머리카락을 기르는 능력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은 아니며, 역사적으로 모든 문화권에서 남자는 짧은 머리, 여자는 긴 머리를 유지한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본성을 시대와 문화에 관계없이 적용되는 정확한 머리카락 길이의 법칙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한 해석은 이를 남녀의 신체적 차이에서 비롯된 자연적 적절함으로 봅니다. 다른 해석은 당시 사회에서 오랫동안 형성된 관습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현상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이 남녀의 머리 모양에 관해 이미 가지고 있는 사회적 판단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자에게 긴 머리가 영광으로 여겨진다는 사실을 통해, 예배 중 머리를 가리는 일의 적절함을 주장합니다.

그런데 15절의 「긴 머리는 덮개 대신 주어졌기 때문입니다」는 다시 해석상 문제를 남깁니다. 긴 머리카락 자체가 충분한 덮개이므로 별도의 천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인지, 긴 머리카락이 자연스러운 덮개의 역할을 하는 것처럼 예배에서도 적절한 덮개를 갖추어야 한다는 비유적 논증인지 해석이 갈립니다. 5–6절에서 머리를 덮는 일과 머리카락을 깎는 일을 구별했다는 점은 별도의 덮개를 전제하는 해석에 무게를 줍니다. 그러나 ‘덮개 대신’이라는 표현을 근거로 머리카락 자체가 논의의 중심이라고 보는 읽기도 있으며, 이 구절은 그 긴장을 완전히 해소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뜻밖의 말

누가 스스로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여긴다면, 우리는 그런 습관을 지니고 있지 않고 하나님의 교회들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11:16 · 본디새김

긴 논증 끝에 등장한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가 다루는 문제가 단순한 의복 규정 이상이었음을 보여 줍니다. 고린도 교회 안에서 머리를 덮는 문제를 둘러싼 의견 차이나 논쟁이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다만 구체적으로 누가 어떤 행동을 주장했는지는 본문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 습관」이 무엇을 가리키는지도 분명하지 않습니다. 다투는 습관 자체를 가리킨다면, 그런 다툼을 지속하는 것이 바울이나 다른 교회들의 관습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여자들이 머리를 덮지 않는 관습을 가리킨다면, 다른 교회들에서는 그런 방식의 예배를 행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리스어의 지시어는 어느 쪽으로도 연결될 여지가 있으므로 완전히 결정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은 이 대목을 고린도 교회만의 독립적인 판단으로 끝내지 않고 다른 하나님의 교회들도 언급합니다. 고린도 신자들의 예배는 그들만의 사적인 활동이 아닙니다. 그들은 다른 교회들과 함께 그리스도께 속한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예배의 방식도 그 넓은 관계 안에서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17절에서 논의는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옮겨 갑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문제는 예배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본성’으로 옮긴 낱말은 퓌시스입니다. 구약의 나실인 규정인 민수기 6:5에서는 서원 기간에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도록 했으며, 남자의 긴 머리가 언제나 부끄러운 것으로 취급된 것도 아니었습니다. 고대 그리스·로마의 복장과 머리 모양이 지역과 계층에 따라 달랐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이 논의를 단순히 생물학의 문제로만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함께 모일수록 더 나빠지는 교회

고린도전서 11:17–22 본문 →

칭찬으로 시작했지만 이제는 칭찬할 수 없다

이것을 명하면서 나는 칭찬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모여서 더 나아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나빠지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1:17 · 본디새김

2절에서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을 칭찬했습니다. 앞에서는 예배의 모습 가운데 바로잡아야 할 부분을 다루면서도 그들이 전승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훨씬 심각합니다.

그들의 모임 자체가 공동체에 해를 끼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함께 예배하고 기도하며 주님의 만찬을 나누는 일은 공동체를 세우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모임의 존재 자체가 그 모임의 유익을 보증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교회가 함께 모인다는 사실보다, 그 모임에서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선 여러분이 교회로서 모일 때 여러분 가운데 갈라짐이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말을 얼마쯤은 믿습니다.고린도전서 11:18 · 본디새김

고린도전서 1:10–12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다른 지도자를 내세우며 갈라지는 문제가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예배와 식사의 자리에서 갈라짐이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다는 것만이 아니라, 그 차이가 실제로 공동체의 식탁을 나누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갈라진 무리도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인정받은 이들이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1:19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분열이 필요하거나 바람직하다는 주장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가 함께 모일수록 더 나빠진다고 꾸짖고 있으므로, 이 구절을 갈라진 무리를 만들어야 한다는 권면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해석은 바울이 공동체에서 갈등이 발생하는 현실을 인정하면서, 그 과정에서 실제로 신실한 사람들이 드러난다고 말한다고 봅니다. 다른 해석은 이 말을 반어적인 표현으로 이해합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자기들 가운데 누가 옳고 인정받는 사람인지 구별하려는 태도를 바울이 비판적으로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두 읽기에는 각각 근거가 있으며, 문맥만으로 바울의 어조를 완전히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주님의 만찬이 자기 만찬으로 변하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한자리에 모여 먹는 것은 주님의 만찬이 아닙니다. 저마다 먹을 때에 자기 만찬을 먼저 먹는 까닭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주리고 어떤 이는 술에 취합니다.고린도전서 11:20–21 · 본디새김

「주님의 만찬」.

「자기 만찬」.

원문에서도 두 표현은 같은 명사, 만찬을 사용합니다. 앞에는 주님께 속한다는 말이 붙고, 뒤에는 자기 것이라는 말이 붙습니다. 주님께 속한 식사가 각자 자기 몫을 챙기는 식사로 바뀐 것입니다.

같은 공동체가 한자리에 모여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먹을 것이 없고, 다른 사람은 지나치게 먹고 마셔 술에 취합니다. 이것은 단지 몇몇 사람이 식사 예절을 잘 지키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음식과 자원이 불균등하게 나누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가진 사람들은 자기 몫을 먼저 먹습니다.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은 굶주립니다.

그리고 그 일이 주님의 만찬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일어납니다.

교회를 업신여기는 일이 되는 이유

여러분에게 먹고 마실 집이 없기라도 합니까? 아니면 여러분이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입니까? 내가 여러분에게 무슨 말을 하겠습니까? 여러분을 칭찬하겠습니까? 이 일에서는 칭찬하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11:22 · 본디새김

그들은 자신들의 음식을 먼저 먹었을 뿐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가진 것 없는 이들을 부끄럽게 하는 행동이라고 폭로합니다.

여기서 4–5절과의 연결이 다시 드러납니다. 앞에서는 예배하는 사람이 자기 머리를 부끄럽게 하는 문제가 있었고, 이제는 같은 예배의 자리에서 가진 것 없는 사람을 부끄럽게 만드는 일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바울에게 두 문제가 완전히 같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모임에서 누군가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일이 가볍게 다뤄질 수 없다는 점은 공통됩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 일이 왜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는 일이 됩니까? 교회는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의 사적인 모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였지만 자신들이 가진 사회적 지위와 재산에 따라 사람을 대한다면,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의 성격을 훼손하고 있는 것입니다.

2절의 칭찬은 이제 완전히 뒤집혔습니다.

그들은 전승을 지킨다고 생각했지만, 가장 중요한 전승 가운데 하나인 주님의 만찬을 실제로 왜곡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예수님께서 마지막 식사에서 하신 말씀을 다시 전합니다.

조금 더 깊이

당시 고린도 교회의 모임은 독립적인 교회 건물보다 신자들의 집에서 열렸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리스·로마 세계의 집에서는 사회적 지위에 따라 손님들이 서로 다른 공간에 자리하거나 다른 음식을 제공받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고대 주택의 식사 공간과 안뜰의 차이를 활용하여, 비교적 부유한 신자들이 식사 공간의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가난한 신자들은 다른 공간에 머물렀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공간 배치가 고린도 교회의 모든 모임에서 그대로 나타났다는 사실까지 확인할 수는 없으므로, 구체적인 건축 구조를 확정하는 것보다 본문이 직접 보여 주는 사회적 차이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이 넘겨지시던 밤에

고린도전서 11:23–26 본문 →

바울은 왜 예수님의 마지막 식사를 다시 이야기하는가

나는 여러분에게 넘겨준 그것을 주님에게서 받았기 때문입니다. 곧, 주 예수께서 넘겨지시던 그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고린도전서 11:23 · 본디새김

바울은 주님의 만찬에 관한 가르침을 자신의 생각으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것을 공동체에 전달했다고 말합니다. 「주님에게서 받았다」는 표현을 예수님께 직접 계시를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해석과, 예수님께 기원을 둔 전승을 사도적 전달 과정을 통해 받았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이 구절만으로 전달 방식을 확정할 수는 없지만, 바울이 이 가르침의 궁극적인 권위를 주님께 두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어지는 표현에는 독특한 반복이 있습니다. 바울이 공동체에 전승을 「넘겨준」(παραδίδωμι) 것과 주 예수님께서 「넘겨지시던」 일이 같은 그리스어 동사에서 나왔습니다. 하나는 가르침을 전달하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적들의 손에 넘겨지시는 일입니다. 이 반복은 독자로 하여금 전승의 내용과 그 전승이 가리키는 사건을 함께 생각하게 합니다.

「그 밤」은 평온한 시기가 아니었습니다. 배반과 체포, 고난과 죽음이 다가오던 밤이었습니다.

고린도의 어떤 사람들은 자기 식사를 먼저 차지하고 다른 사람들을 굶주리게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넘겨지시는 밤에 빵을 손에 드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감사드리시고 그것을 떼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나를 기억하기 위하여 이것을 행하여라.」고린도전서 11:24 · 본디새김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너희를 위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죽음이 단지 폭력적인 희생자의 죽음에 머물지 않고, 다른 사람을 위한 행위라고 설명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 주십니다.

그런데 고린도 신자들은 자신의 음식을 다른 사람과 나누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대조를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전할 뿐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묘사한 식사 장면을 기억하는 독자에게 그 말씀은 강력한 비판이 됩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 주신 몸을 기억한다면서, 바로 곁에 있는 사람에게 자기 몫을 내어 주지 않는 것입니다.

「나를 기억하기 위하여」에서 기억은 단순히 과거의 정보를 머릿속에 떠올리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을 공동체의 식사 가운데 계속 기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억이 기억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예식을 잊었다는 데 있지 않았습니다. 그 예식이 가리키는 주님의 행동과 자신들의 행동이 어긋나 있었습니다.

새 언약은 누구의 피로 세워졌는가

만찬을 잡수신 뒤에 잔도 그와 같이 손에 드시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다.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기 위하여 이것을 행하여라.」고린도전서 11:25 · 본디새김

여기서 핵심은 「새 언약」입니다. 예레미야 31:31–34에서 여호와야훼는 이스라엘과 유다 집안에 새 언약을 세우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그 언약은 이집트에서 이스라엘을 이끌어 내실 때 맺으셨던 언약과 같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법을 백성의 마음에 새기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다시 기억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새 언약은 단순히 이전 언약의 규정을 조금 수정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불충실한 백성과의 관계를 새롭게 하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또한 출애굽기 24:8에서는 모세가 언약의 피를 백성에게 뿌리며 여호와야훼께서 그들과 맺으신 언약을 선언합니다. 이처럼 구약에서 언약과 피는 서로 연결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피를 새 언약과 연결하십니다. 새 언약이 인간의 결심이나 도덕적 개선으로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죽음에 근거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말씀을 서로 갈라져 있는 공동체에 전하고 있습니다. 같은 식탁에 앉아 있으면서도 어떤 사람은 굶주리고 어떤 사람은 술에 취하는 공동체입니다. 새 언약의 잔을 마시는 사람들은 각자 종교적인 혜택을 받는 독립적인 개인들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세워진 새 언약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들입니다.

먹고 마시는 일이 선포가 되다

여러분이 이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실 때마다 주님이 오시기까지 그분의 죽음을 선포하는 까닭입니다.고린도전서 11:26 · 본디새김

일반적으로 선포는 말로 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빵을 먹고 잔을 마시는 행위가 주님의 죽음을 선포합니다.

그렇다면 어떤 식사가 그 죽음을 올바르게 선포합니까? 주님의 죽음을 말과 예식으로 선포하는 일 자체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바울의 문맥에서는 그 만찬에 참여하는 사람들의 행동도 그 선포와 어울려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른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는 사실을 선포하면서 다른 사람을 굶주리게 하고 부끄럽게 한다면, 그들의 식사는 자신들이 선포하는 내용을 거스르는 모습이 됩니다.

「주님이 오시기까지」는 이 선포가 지속되는 기간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이미 일어났지만, 공동체는 그분의 오심을 기다리며 살아갑니다. 그 사이에 교회는 빵을 먹고 잔을 마시면서, 그 사건이 현재의 공동체를 어떻게 살아가게 해야 하는지 계속 묻습니다.

그 몸을 분별하지 않고 먹는다는 것

고린도전서 11:27–29 본문 →

합당하지 않게 먹는다는 말

그러므로 누구든지 합당하지 않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잔을 마시면 주님의 몸과 피에 대해 죄책을 지게 됩니다.고린도전서 11:27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종종 성찬에 참여하기 전에 자신이 충분히 거룩한 사람인지 확인해야 한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고,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원문의 이 낱말은 행위가 이루어지는 방식을 수식하는 부사입니다.

바울의 관심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만큼 완전한 자격을 갖추었는가에 있지 않고, 주님의 만찬을 어떤 방식으로 행하고 있는가에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만찬은 자기 힘으로 완전한 의로움을 이룬 사람에게 주어지는 상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만찬을 아무렇게나 행해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기억한다고 말하면서 공동체의 다른 구성원을 멸시하는 행동은 단지 사람에게 예의를 갖추지 못한 일이 아니라, 주님의 몸과 피에 대해 죄책을 지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분리될 수 없고, 그 죽음을 기념하는 행위가 그분의 죽음이 보여 준 사랑과 정면으로 어긋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시험해 보라는 명령

사람은 자기를 시험해 보고 그런 다음에 그 빵을 먹고 그 잔을 마실 일입니다.고린도전서 11:28 · 본디새김

바울은 자기를 시험해 본 뒤 주님의 만찬에서 영원히 물러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런 다음에」 먹고 마시라고 말합니다. 자기 시험은 참여를 포기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올바르게 참여하기 위한 과정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살펴야 합니까? 앞의 문맥이 그 대답을 제공합니다. 주님의 만찬을 자기 만찬처럼 이용하고 있지는 않은지, 공동체 안에서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다른 사람의 필요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입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이 자신의 삶을 넓게 성찰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특별히 다루는 죄를 잊어버린 채 자기 마음속의 개인적인 잘못만을 찾는다면, 본문의 중요한 관심을 놓치게 됩니다. 그의 질문은 개인의 내면을 넘어 공동체와의 관계를 향합니다.

먹고 마시는 이가 그 몸을 분별하지 않고 먹고 마시면 자기에게 내릴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1:29 · 본디새김

여기서 「그 몸」은 무엇을 가리킵니까?

그리스도의 몸인가, 교회라는 몸인가

읽기는 셋으로 갈립니다. 성찬의 빵이 가리키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는 읽기, 교회 공동체로 보는 읽기, 두 의미가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고 보는 읽기입니다. 어느 쪽이냐에 따라 분별하지 못한 것이 빵의 의미인지, 함께 식탁에 앉은 신자들이 그리스도의 몸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인지가 달라집니다. 29절의 원문에는 「그리스도의」나 「주님의」라는 소유격이 붙어 있지 않고 ‘그 몸’이라고만 되어 있으며, 「그 몸」이라는 번역은 이러한 해석의 여지를 남깁니다.

그렇다면 이 구절을 읽을 때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몸과 공동체를 서로 완전히 분리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이 바로잡으려는 문제는 주님의 만찬에서 어떤 특별한 종교적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는 일이 아닙니다. 그들은 주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식탁에서 다른 신자들을 부끄럽게 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 몸을 분별한다는 것은 최소한, 그리스도의 죽음이 만들어 낸 공동체를 그 식탁에서 실제로 인정한다는 의미를 포함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몸을 귀하게 여긴다고 말하면서, 그 몸에 속한 사람들을 하찮게 대할 수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보는 해석은 바로 앞에서 바울이 주님의 몸과 피를 언급했고, 24절에서 예수님께서 빵을 자신의 몸이라고 말씀하셨다는 점을 근거로 삼습니다. 성찬에 참여하는 사람이 그 빵의 의미를 제대로 분별하지 못하고 평범한 음식처럼 대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로 보는 해석은 고린도전서 10:17에서 바울이 여러 사람이 한 빵을 나누어 받기 때문에 한 몸이라고 말했고, 12장에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설명한다는 흐름을 근거로 삼습니다. 특히 바로 앞에서 가난한 신자들을 부끄럽게 한 일을 꾸짖었다는 사실은 이 해석을 강하게 뒷받침합니다. 두 의미를 함께 보는 해석은 성찬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그분의 몸인 공동체를 올바르게 대하는 것과 연결된다고 보며, 바울이 주님의 몸과 피를 말한 직후 공동체의 식탁을 논의한다는 구조상 상당히 설득력이 있습니다. 사본으로 보면, 일부 후대 사본에는 ‘주님의’라는 표현이 추가되어 있지만 중요한 초기 사본들은 그 표현 없이 ‘그 몸’으로 읽습니다. 번역에서 미리 「주님의 몸」이라고 확정하면 교회 공동체를 가리킬 가능성을 가리게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 판단받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고린도전서 11:30–32 본문 →

약하고 병든 사람들, 그리고 잠든 사람들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 약한 이와 병든 이가 많고 잠든 이도 적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11:30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매우 무겁습니다.

여기서 ‘잠든 이’는 죽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죽음을 가리키는 완곡한 표현으로 잠든다는 말을 사용하며, 고린도전서 15:6과 18절에서도 이와 같은 표현이 나타납니다. 그는 앞에서 잘못된 방식으로 먹고 마시는 일이 심판을 가져온다고 경고했고, 이어서 그 공동체의 질병과 죽음을 언급합니다.

그 심판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서는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전통적인 해석에서는 바울이 공동체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실제적인 징계를 말한다고 이해합니다. 다른 해석은 가난한 사람들은 충분히 먹지 못하고 가진 사람들은 지나치게 먹고 마시는 식사 구조가 실제로 사람들의 건강을 해쳤을 가능성에 주목합니다. 두 접근 모두 바울이 이 문제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이 구절을 근거로 오늘날 어떤 사람이 병에 걸렸거나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이 성찬에 잘못 참여했거나 하나님께 특별한 징계를 받았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고린도 공동체의 특정한 상황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그 상황을 모든 질병과 죽음에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인과 법칙으로 확대할 근거는 없습니다.

심판과 훈육의 차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분별했더라면 판단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 판단받을 때 훈육받습니다. 세상과 함께 정죄받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1:31–32 · 본디새김

바울은 ‘분별한다’와 ‘판단받는다’는 표현을 연달아 사용하며, 원문에서도 두 동사가 연결됩니다. 신자가 자신의 행동을 올바르게 분별하지 않으면 주님의 판단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32절에서 바울은 판단과 정죄를 구별합니다. 주님께 판단받는 일이 곧 최종적으로 버림받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분의 판단은 자기 백성을 바로잡기 위한 훈육의 성격을 지닐 수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의 행동을 매우 심각하게 비판하지만, 공동체를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스스로를 분별하고, 주님의 만찬을 올바르게 행하며, 다시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답게 모이기를 원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는 일을 사소하게 보지 않으시고, 그들을 바로잡아 세상과 함께 정죄받지 않도록 훈육하십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교회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바꾸어야 합니까? 바울은 마지막에 뜻밖에도 매우 간단한 명령을 내립니다.

조금 더 깊이

30절의 질병과 죽음을 두고, 영양 부족과 과도한 섭취가 공동체의 실제 신체적 손상으로 나타났을 가능성을 보는 읽기가 있습니다. 반면 고대의 상호성 및 신적 심판에 관한 관념을 배경으로, 바울의 표현을 실제적인 신적 징계의 언어로 이해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31–32절의 ‘분별하다’와 ‘판단하다’는 원문에서 디아크리노와 크리노입니다. 32절의 훈육은 히브리서 12:5–11에서 하나님의 징계가 자녀를 향한 아버지의 교육과 연결되는 주제와도 통합니다. 두 본문은 서로 다른 상황을 다루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바로잡으시는 일이 단순한 파괴가 아니라 그들을 생명으로 이끄는 목적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서로 기다리십시오

고린도전서 11:33–34 본문 →

그러므로 나의 형제 여러분, 먹으려고 모일 때 서로 기다리십시오.고린도전서 11:33 · 본디새김

지금까지 바울은 공동체의 분열과 주님의 죽음, 새 언약과 심판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논의의 결론으로 한 가지 행동을 제시합니다.

「기다리십시오」(ἐκδέχομαι)로 옮긴 동사는 맞아들인다는 뜻으로도 이해될 수 있지만, 21절에서 각자가 자기 만찬을 먼저 먹었다는 사실과 연결되어 서로 기다리라는 뜻이 자연스럽습니다. 바울은 자기 몫을 먼저 챙기는 사람에게 다른 사람의 도착과 필요를 고려하라고 합니다. 그는 부유한 사람에게 먼저 먹을 권한이 있는지를 따지지 않고, 그 식탁이 주님의 만찬이라면 함께 모인 사람들이 함께 나누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다른 사람을 위해 내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자기 옆에 있는 사람도 그 죽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을 기다리지 못하고 자기 몫을 먼저 차지하는 모습은, 그분의 죽음을 기억하는 식탁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누가 주리거든 제 집에서 먹을 일입니다. 여러분이 모여서 심판받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나머지는 내가 가서 지시하겠습니다.고린도전서 11:34 · 본디새김

이 말은 교회 모임에서 가난한 사람에게 음식을 제공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앞에서 바울은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을 부끄럽게 하는 행동을 강하게 꾸짖었으므로, 교회에서는 아무도 음식을 나누지 말고 집에서 각자 해결하라는 뜻으로 읽으면 논증 전체와 충돌합니다. 바울의 관심은 자기 배를 채우려는 욕구 때문에 공동체의 식사를 망치지 말라는 데 있습니다.

나머지 문제는 자신이 가서 지시하겠다는 말은 우리가 고린도 교회의 모든 구체적인 식사 규정과 문제를 알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이미 충분히 드러났습니다.

주님의 만찬은 자기 몫을 먼저 차지하는 식사가 아닙니다. 서로를 기다리며 그리스도의 죽음을 기억하는 식사입니다.

조금 더 깊이

33절의 동사 엑데케스테는 기다리거나 맞아들인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맞아들이고 함께 나누는 의미도 문맥상 중요하지만, 그 단어 자체를 반드시 ‘환영하다’로 번역해야 한다고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예배의 중심에 계신 그리스도

고린도전서 11:1–34 본문 →

머리를 덮는 문제와 주님의 만찬, 두 대목의 직접적인 근거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앞부분에서는 창조 이야기와 당시의 명예 관습이, 뒷부분에서는 예수님의 죽음과 새 언약이 근거가 됩니다. 따라서 앞부분의 구체적인 복장 규정을 뒷부분의 음식 나눔과 동일한 수준의 보편적인 명령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두 부분 모두에서 바울은 예배를 개인적인 자유의 행사로만 이해하지 않습니다. 예배하는 사람의 행동은 다른 사람을 드러내거나 부끄럽게 하고, 공동체를 세우거나 무너뜨릴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와 관계됩니다.

고린도 교회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이고 그분의 말씀을 기억하면서도 주님의 만찬을 먹지 못한 까닭이 여기 있습니다. 주님의 만찬은 단순한 종교적 기념이나 의식적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공동체를 세우셨는지 드러내는 자리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성찬의 신비를 부정하거나 단순한 윤리적 식사로 환원하는 설명이 아닙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함께 나누는 일의 의미를 아무리 깊게 설명하더라도, 그 식탁에서 가난한 사람을 수치스럽게 만든다면 바울의 질문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정말 주님의 만찬입니까?

그 교회는 돈을 낸 사람의 소유도 아니고, 권위를 가진 사람의 소유도 아닙니다. 그 안에 속한 사람의 가치는 그가 얼마나 많은 것을 가져왔는지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가 먼저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식탁을 떠올려 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미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을 가지고 있습니다. 마실 것도 있습니다. 자기들끼리 먼저 음식을 나누어 먹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 도착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자기 식사로 충분한 음식을 가져올 수 없는 사람들일 수도 있습니다. 정확히 누가 언제 도착했는지는 본문이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서로 기다리십시오」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이 명령을 따르는 순간 식탁의 모습이 달라집니다. 먼저 도착한 사람이 자기 몫을 먼저 차지하지 않고, 다른 사람이 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그것은 단지 예절을 지키는 행동이 아니라, 주님의 만찬이 누구의 식사인지를 인정하는 행동입니다.

주님은 넘겨지시던 밤에 빵을 손에 드시고 「이것은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기억하는 사람은 자기 앞에 놓인 빵을 더 이상 자기만의 몫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와 함께 그 빵을 나누고 있는지 바라보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1장은 그 장면에서 끝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내어 주셨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사람들.

그리고 그분의 식탁에 함께 참여할 형제를 기다리는 사람들.

주님의 만찬은 모두가 같은 식탁에 앉았다는 사실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식탁에서 서로를 주님께 속한 사람으로 대할 때, 비로소 그 만찬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