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7–10장 · 질문에 답하는 말
같은 은혜를 받고도 광야에 쓰러진 사람들
그들은 모두 바다를 건넜습니다.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음식을 먹었습니다. 모두 바위에서 나온 물을 마셨습니다. 그런데 대부분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은 이 불편한 사실에서 시작합니다.
바울은 앞장에서 경기장의 선수처럼 목표를 향해 달리며 자신을 훈련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달리기를 끝마치지 못한 사람들, 이집트에서 구원받아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런데 바울이 먼저 강조하는 것은 그들이 지은 죄보다 그들이 받은 은혜입니다.
그럼에도 많은 사람이 광야에 쓰러졌습니다.
고린도 신자들도 예수님께 속했고, 주님의 잔과 빵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이 우상숭배에 참여하면서도 안전할 것이라는 보증이 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을 따라가면 10장의 독특한 구조가 드러납니다. 처음에는 광야에서 먹고 마신 사람들이, 중간에는 주님의 잔과 빵을 나누는 공동체와 우상 제사의 잔과 식탁이, 마지막에는 고기 시장과 이웃의 집에 차려진 평범한 식탁이 나옵니다.
고린도전서 10장은 네 종류의 식탁을 지나며, 무엇을 먹느냐보다 누구와 무엇을 함께 나누느냐가 더 중요해지는 순간을 보여 줍니다.
그리고 그 모든 장면을 관통하는 질문은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에게 베푸신 은혜는 그들의 삶에서 어떤 충성으로 나타나야 합니까?
모두가 같은 은혜를 받았지만
바울이 다섯 번 반복하는 말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것을 모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었고 다 바다를 건넜습니다.고린도전서 10:1 · 본디새김
바울은 이스라엘의 출애굽 이야기를 꺼내면서 「우리 조상들」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이방인 출신 신자들도 있었지만, 바울은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그들 모두의 조상으로 소개합니다. 예수님께 속한 공동체가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자신의 신앙적 정체성과 경고를 발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미 고린도전서 5:7에서 예수님을 유월절 양과 연결했습니다. 이제 그는 출애굽 이후의 광야 이야기를 불러옵니다. 그런데 1–4절을 읽다 보면 유난히 반복되는 말이 있습니다. 「다」.
모두가 구름 아래 있었습니다.
모두가 바다를 건넜습니다.
모두가 모세에게로 잠겼습니다.
모두가 같은 음식을 먹었습니다.
모두가 같은 마실 것을 마셨습니다.
그리스어 원문에서도 「모두가」(πᾶς)가 다섯 번 반복됩니다. 바울은 특별히 신앙이 좋았던 소수의 경험이 아니라, 온 공동체가 함께 받은 은혜를 강조합니다.
출애굽기 13:21–22에서 여호와야훼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시고, 14장에서는 바다를 가르시고 그들이 건널 길을 마련하십니다. 이 사건에서 이스라엘이 스스로 구원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여호와야훼께서 열어 주신 길로 걸어갔습니다.
그리고 다 구름 안에서 또 바다 안에서 모세에게로 잠겼습니다.고린도전서 10:2 · 본디새김
여기서 「잠겼습니다」(βαπτίζω)는 세례를 가리키는 동사입니다. 바울은 출애굽 사건을 세례의 언어로 다시 읽습니다. 다만 출애굽기 14장은 이스라엘이 바다 가운데 마련된 마른 땅을 지나갔다고 기록하므로, 그들이 실제로 물속에 잠겼다거나 그리스도교의 세례 의식을 행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그들이 단순히 바다를 건넜다고 말하지 않고 「모세에게로」 잠겼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구원의 사건을 경험하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인도자 모세와 연결된 하나의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으로 세례를 받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이스라엘의 공동체적 구원 경험은 자신들을 비추는 거울이 됩니다.
바위가 그리스도였다는 말
그리고 다 같은 영에 속한 음식을 먹었고, 다 같은 영에 속한 마실 것을 마셨습니다. 그들을 뒤따라오던 영에 속한 바위에서 계속 마셨기 때문입니다. 그 바위는 그리스도였습니다.고린도전서 10:3–4 · 본디새김
이스라엘은 이집트에서 해방되었지만, 광야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충분한 자원을 가진 채 출발하지는 않았습니다. 출애굽기 16장에서 여호와야훼는 만나를 내려 주시고, 17:1–7에서는 마실 물이 없는 백성을 위해 바위에서 물이 나오게 하십니다. 민수기 20:2–13에도 바위에서 물을 얻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음식과 물을 「영에 속한」 것이라고 부릅니다. 물질이 아닌 환상적인 음식이었다는 뜻이 아니라, 실제로 먹고 마시는 음식과 물이었지만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마련하신 공급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 바위는 그리스도였습니다.」
바울은 바위가 예수님을 상징한다고만 말하지 않고, 바위와 예수님을 직접 연결합니다. 구약에는 여호와야훼를 바위라고 부르는 전통이 있습니다. 신명기 32:4는 하나님의 신실함과 공의를 찬양하고, 32:15와 18은 이스라엘이 자신을 구원하고 낳으신 바위를 저버린 일을 비판합니다. 이 전통에서 바위는 이스라엘을 지키고 생명을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함을 나타내는 이미지입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생명 공급을 예수님과 연결합니다. 다만 예수님과 바위의 관계가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성립했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광야의 백성과 함께하시며 그들의 생명을 공급하셨다는 신학적 확신이 중심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토록 풍성한 은혜를 설명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 대부분을 기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광야에 쓰러져 널린 것이 이를 보여 줍니다.고린도전서 10:5 · 본디새김
모두가 같은 은혜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광야에 쓰러졌습니다.
민수기 14:20–35에서 출애굽 세대 가운데 많은 사람이 불신앙 때문에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는 심판이 선언됩니다. 바울은 그 역사를 한 문장으로 압축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한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끝까지 살아간다는 것은 자동으로 일치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정체성은 참으로 귀합니다. 그러나 그 정체성을 하나님께 불순종해도 안전하다는 보증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유대교 전승에는 광야의 이스라엘과 함께 이동하며 물을 공급하는 우물 또는 바위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지고, 바울의 「뒤따라오던 바위」라는 표현이 그러한 전승과 관련되었다고 보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 전해지는 랍비 문헌의 모든 세부 사항이 바울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으므로, 바울이 실제로 움직이는 돌을 역사적 사실로 믿었다거나 특정한 랍비 전승을 그대로 인용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바위가 예수님이시라는 진술은 신명기 32장과 시편 78편 등에서 발견되는 하나님과 바위의 연결을 배경으로 이해될 수 있으며, 움직이는 바위에 관한 전승만으로 이 구절을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광야의 이야기는 왜 우리에게 주어졌는가
지나간 역사가 현재의 경고가 되다
이 일들은 우리에게 본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탐낸 것처럼 우리가 나쁜 것을 탐내는 이가 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0:6 · 본디새김
여기서 「본」은 어떤 본보기나 유형, 형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경의 모든 사건에 숨겨진 상징적 의미를 마음대로 부여해도 된다는 허락이 아닙니다. 바울은 광야 이야기의 실제 사건을 존중하면서, 그 사건과 고린도 공동체 사이의 중요한 유사성을 발견합니다.
둘 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둘 다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로 부름받았습니다.
둘 다 먹고 마시는 일과 관련된 시험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둘 다 하나님을 향한 충성이 요구되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이러한 공통점 때문에 이스라엘의 과거가 고린도의 현재를 비추는 경고가 됩니다.
6절에서 바울은 행동보다 먼저 욕망을 언급합니다. 민수기 11:4–6에는 광야의 백성이 이집트에서 먹던 음식들을 그리워하며 불평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를 공급하고 계셨지만, 그들은 과거에 먹었던 음식들을 떠올리면서 지금 받은 공급에 만족하지 못했습니다.
문제는 맛있는 음식을 원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 욕망이 하나님께서 이루신 구원과 현재 베푸시는 은혜를 경멸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우상에게 바친 음식을 먹는 문제를 논의하면서, 바울은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쉽게 신앙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 수 있는지 보여 줍니다.
이제 그는 네 가지 광야 사건을 이어서 제시합니다.
금송아지 앞의 식사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처럼 우상을 섬기는 이가 되지 마십시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백성이 먹고 마시려고 앉았다가 놀려고 일어났다.」고린도전서 10:7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출애굽기 32:6의 직접 인용입니다. 모세가 산에 올라가 있는 동안 백성은 아론에게 자신들을 인도할 신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고, 아론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제단을 세웁니다.
그들은 제물을 바칩니다.
그리고 먹고 마십니다.
이후 일어나서 놉니다.
바울은 금송아지의 제작 과정이나 백성의 말보다, 제물을 바친 뒤 먹고 마시는 장면을 선택합니다. 고린도 신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우상의 신전에서 음식을 먹는 일에 참여하고 있었고, 우상이 참된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도 먹고 마셨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금송아지 앞에 제물을 바치고 이어진 식사였습니다. 식사가 예배의 일부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사건입니다. 이스라엘은 여호와야훼께 구원받은 백성이었지만, 그분이 아닌 다른 대상을 중심으로 한 제의적 식사에 참여했습니다.
그것이 우상숭배였습니다.
바알브올, 뱀, 그리고 불평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음행한 것처럼 우리는 음행하지 맙시다. 하루에 이만 삼천 명이 쓰러졌습니다.고린도전서 10:8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민수기 25장의 바알브올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일부가 모압 여자들과 성적 관계를 맺었고, 민수기 25:2–3은 백성이 그 신들에게 바친 제물을 먹고 절한 뒤 바알브올에게 결합되었다고 말합니다. 성적 부도덕과 우상숭배가 서로 연결되어 있으므로, 바울은 무관한 죄들을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경고하는 제의적 참여가 다른 형태의 불충성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민수기 25:9에는 재앙으로 죽은 사람이 이만 사천 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차이를 인정하더라도 바울의 논점은 분명합니다. 우상숭배에 참여한 이스라엘의 행동은 하나님의 심판을 불러왔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시험한 것처럼 우리는 그리스도를 시험하지 맙시다. 그들은 뱀들에게 멸망당해 갔습니다.고린도전서 10:9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민수기 21:4–9와 연결됩니다. 백성은 광야의 여정을 견디지 못하고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마저 업신여깁니다. 이후 독사들이 나타나 백성을 물어 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시험하다」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신뢰하기보다 불평과 도전으로 그분의 인내를 시험하는 행동입니다.
「그리스도를 시험하지 맙시다」가 원문이라면 4절의 바위에 관한 진술과 더욱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광야에서 이스라엘에게 생명을 공급하셨던 예수님을 그들이 시험했다는 의미가 됩니다. 다만 이 자리에는 중요한 사본 차이가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어떤 이들이 투덜거린 것처럼 투덜거리지 마십시오. 그들은 파괴하는 이에게 멸망당했습니다.고린도전서 10:10 · 본디새김
민수기 14장과 16–17장에는 이스라엘 백성이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다가 심판을 받는 사건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특히 민수기 16장에서는 고라 일당의 반역과 그 뒤에 이어진 백성의 불평, 그리고 재앙이 등장합니다.
바울의 강조점은 구원을 경험한 백성도 하나님께 불평하고 그분을 거역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받은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불순종은 더 심각하게 드러납니다.
시대의 끝에 선 사람들이 읽는 오래된 이야기
이 일들은 본이 되어 그들에게 일어났고, 시대의 끝이 이른 우리를 훈계하려고 적혔습니다.고린도전서 10:11 · 본디새김
그 사건들은 과거에 실제로 일어났지만, 그 기록은 과거의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시대의 끝이 이른」이라는 말은 세계의 마지막 날이 곧바로 닥친다는 시간표를 제시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오심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 역사가 결정적인 단계에 이르렀다는 신앙적 인식과 관련됩니다.
바울에게 고린도 신자들은 이스라엘과 전혀 무관한 새로운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서 시작하신 약속과 구원의 역사에 예수님을 통해 참여하게 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역사는 그들을 위한 교훈이 됩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은 실패했고 교회는 성공했다는 식으로 과거의 이스라엘과 현재의 교회를 대립시키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큰 은혜를 받았어도 넘어졌다면, 우리도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실패는 고린도 신자들이 자신의 우월성을 확인하는 도구가 아닙니다. 자신의 위험을 발견하는 거울입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의 「놀려고 일어났다」는 축제의 흥겨운 행동을 나타내는데, 구체적으로 어떤 활동을 포함했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행동까지 암시한다고 보는 견해가 있지만, 이 표현 하나만으로 그 내용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8절의 이만 삼천 명과 민수기 25:9의 이만 사천 명의 차이에 대해, 일부 해석은 바울이 하루 동안 죽은 사람을 말하고 민수기는 전체 사망자를 말한다고 설명하고, 다른 해석은 숫자 전승의 차이나 기억에 의한 인용 가능성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민수기 자체가 하루 사망자와 전체 사망자를 구분해서 기록하지 않으므로, 차이가 실제로 어떤 이유에서 생겼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9절은 어떤 사본에는 「그리스도」, 다른 사본에는 「주」, 소수의 사본에는 「하나님」으로 전해집니다. 해석상의 의미가 곧 사본 문제를 결정하지는 않으므로 사본들의 증거를 따로 평가해야 하며, 원래 어떤 단어였는지에 관해서는 본문비평상의 논의가 존재합니다. 10절이 민수기의 사건들 중 정확히 어느 장면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고, 「파괴하는 이」도 출애굽기 12:23의 멸하는 자를 떠올릴 수 있지만 본문은 그 정체를 명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미더우십니다
넘어질 수 있다는 경고 다음에 오는 약속
그러므로 서 있다고 여기는 이는 쓰러지지 않도록 조심할 일입니다.고린도전서 10:12 · 본디새김
이 짧은 문장은 앞의 긴 역사 이야기를 현재의 경고로 바꿉니다. 바울이 겨냥하는 사람은 자신이 이미 쓰러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서 있다고 여기는 이」입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에 관한 올바른 지식이 있습니다. 우상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도 알고, 주님의 공동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도 확신합니다. 그러나 그 확신이 자신을 살피지 않는 태도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신자가 끊임없이 자신의 구원을 의심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자신이 받은 은혜를 근거로 하나님의 뜻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경고만 남기지 않습니다.
여러분에게 닥친 시험은 사람이 겪는 것뿐입니다. 하나님은 미더우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견딜 수 있는 것을 넘어 시험받게 두지 않으시고, 도리어 시험과 함께 빠져나갈 길도 내시어 여러분이 견딜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0:13 · 본디새김
12절에서는 인간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는지가 문제였습니다. 13절에서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가 중심이 됩니다. 미더우심은 그분이 신뢰할 만하시고 신실하시다는 뜻이며, 바울은 인간의 견고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확신의 마지막 근거로 제시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거듭 불신앙을 드러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하시고 광야에서 먹이신 사실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보여 줍니다. 그들이 넘어졌다고 해서 하나님이 신실하지 않으셨던 것은 아닙니다. 이제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에게 그 신실하심을 의지하라고 말합니다.
빠져나갈 길을 내시는 하나님
13절은 종종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고난은 절대로 주지 않으신다는 뜻으로 인용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의 무게를 일반적으로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우상숭배와 불순종의 유혹 속에서 하나님께 충실하게 남아 있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를 다룹니다. 원문의 낱말은 문맥에 따라 시험이나 유혹을 가리킬 수 있는데, 여기서는 시험받는 상황이 죄로 넘어질 위험과 연결됩니다.
빠져나갈 길을 내신다는 약속은 모든 어려운 상황이 즉시 사라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빠져나갈 길」과 「견딜 수 있게 하실 것」을 함께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마련하시는 길은 시험을 피하도록 하는 길일 수도 있고, 시험 가운데서 불순종하지 않고 견딜 수 있도록 하시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핵심은 신자가 자신의 능력만으로 하나님께 충실해야 하는 상황에 홀로 내버려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약속에는 매우 구체적인 행동이 뒤따릅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하는 이들이여, 우상 섬김을 피해 달아나십시오.고린도전서 10:14 · 본디새김
하나님께서 빠져나갈 길을 내신다고 말한 바울은 곧바로 우상숭배를 피해 달아나라고 명령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는다는 것은 위험한 상황에 계속 머물면서 자신이 얼마나 강한지 시험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길로 실제로 움직이는 일입니다. 이것은 고린도 사람들이 자신의 지식을 이용하여 우상숭배와 얼마나 가까이 지낼 수 있는지 시험하려는 태도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이 미더우시다는 믿음은 위험을 가볍게 여기는 담대함이 아니라, 그분께 충실한 길을 선택하는 용기로 나타납니다.
주님의 잔과 귀신들의 잔
바울은 왜 갑자기 주님의 식탁을 이야기하는가
나는 여러분을 지각 있는 이들로 여기고 말합니다. 내가 하는 말을 여러분 스스로 판단해 보십시오.고린도전서 10:15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의 권위를 내세워 아무런 설명 없이 명령하지 않고, 왜 우상숭배에 참여해서는 안 되는지 그들이 스스로 이해하도록 논증합니다. 그리고 그 논증을 시작하는 장소는 우상의 신전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식탁입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를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그 빵은 그리스도의 몸을 함께 나누는 것이 아닙니까?고린도전서 10:16 · 본디새김
「함께 나누는 것」(κοινωνία)으로 옮긴 말은 단순히 물건을 나누어 갖는 행위뿐 아니라, 어떤 관계나 유익에 함께 참여하는 것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9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신자들을 그분의 아들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데로 부르셨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 관계가 구체적인 식사 행위와 연결됩니다.
이 표현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기독교 전통마다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어떤 전통은 성찬에서 예수님과 실제로 이루어지는 신비로운 참여를 강하게 강조하고, 다른 전통은 예수님의 죽음을 기념하고 믿음으로 그 유익에 참여하는 의미를 강조합니다. 본문 자체는 그 참여가 물질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해석을 따르더라도, 바울에게 주님의 잔과 빵은 단순한 사교적 식사가 아니라 예수님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진지한 참여 행위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피와 몸, 곧 예수님께서 자기 생명을 내어 주신 죽음을 중심에 놓습니다. 이 식탁에서 나누는 것은 단순히 공동체의 우정이 아니라,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주어진 새로운 관계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한 빵을 나누는 사람들이 한 몸이 되다
빵이 하나이니 여럿인 우리가 한 몸입니다. 우리가 다 그 한 빵을 나누어 받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0:17 · 본디새김
16절의 「몸」이 예수님의 몸이었다면, 17절의 「몸」은 신자들의 공동체입니다. 이 연결은 예수님과의 관계가 신자들 사이의 관계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여러 사람이 하나의 빵을 나누어 받는 행위는 그들이 서로 무관한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바울의 초점은 빵의 숫자를 관리하는 방식이 아니라, 하나의 빵을 나누는 행위가 표현하는 공동체의 일치에 있습니다. 예수님께 참여한다는 것은 예수님께 속한 다른 사람들과도 연결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다시 이스라엘의 제사로 시선을 옮깁니다.
육을 따라 이어진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제물을 먹는 이들이 제단과 함께 나누어 받는 이들이 아닙니까?고린도전서 10:18 · 본디새김
이스라엘의 제사 제도에서는 제물의 일부가 제단에 바쳐지고, 정해진 경우에는 제사장이나 제물을 드린 사람이 그 일부를 먹었습니다. 레위기 7:11–21의 화목제 규정이 보여 주듯, 제물을 먹는 일은 단순히 고기를 섭취하는 일이 아니라 제사와 관련된 참여였습니다.
주님의 식탁에서도 참여가 있고, 이스라엘의 제사에서도 참여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상의 신전에서 열리는 제의적 식사에서도 참여가 생기는 것은 아닐까요?
우상은 아무것도 아닌데, 왜 귀신을 말하는가
그러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 것입니까? 우상에게 바친 것이 무엇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 우상이 무엇이라도 된다는 말입니까?고린도전서 10:19 · 본디새김
우상은 참된 신이 아니고, 우상에게 바친 제물도 특별한 신적 능력을 가진 음식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철회하지 않습니다. 20절에서 그가 제시하는 것은 다른 종류의 문제입니다.
아닙니다. 그들이 바치는 것은 귀신들에게 바치는 것이지 하나님께는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는 여러분이 귀신들의 동반자가 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10:20 · 본디새김
신명기 32:17에서 이스라엘의 우상숭배는 여호와야훼가 아닌 귀신들에게 제사를 바치는 행동으로 묘사됩니다. 신명기 32장은 이스라엘이 자신을 구원하신 바위를 저버리고 다른 신들을 따랐다고 비판하는데, 바울은 이 언어를 다시 사용합니다. 앞에서는 광야에서 생명을 공급하는 바위가 예수님이라고 말했고, 이제는 우상숭배의 제사가 귀신들에게 바치는 행위라고 말합니다.
바위, 귀신에게 바치는 제사, 하나님을 질투하시게 하는 행동이 고린도전서 10장의 서로 다른 부분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바울이 이스라엘의 배교를 다룬 신명기 32장을 10장의 중요한 배경으로 삼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모든 이방 사람이 자신이 귀신을 섬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 자체가 언제 어디서나 악한 힘을 가진다고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제의적 참여입니다.
우상은 참된 신이 아닙니다.
그러나 우상숭배는 실제로 하나님에 대한 불충성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음식의 물리적 성질에 관한 논쟁이 아니라, 예배와 충성의 대상에 관한 논쟁입니다.
두 잔을 동시에 마실 수 없다
여러분은 주님의 잔과 귀신들의 잔을 둘 다 마실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상과 귀신들의 상에 둘 다 참여할 수 없습니다.고린도전서 10:21 · 본디새김
여기서 바울의 논증은 절정에 도달합니다.
주님의 식탁에서 예수님의 피와 몸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 다른 신을 섬기는 제의에 참여할 수 있습니까? 한 사람이 실제로 두 식탁에 참여하는 행동 자체는 가능합니다. 그러나 그 행동이 표현하는 충성은 서로 양립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질문은 더욱 날카롭습니다.
아니면 우리가 주님을 질투하시게 만드는 것입니까? 설마 우리가 그분보다 힘이 셉니까?고린도전서 10:22 · 본디새김
여기서 「질투」를 인간의 불안정한 감정과 동일하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야훼의 질투는 자신이 언약을 맺은 백성이 다른 신들에게 충성을 돌리는 일을 용납하지 않으시는 성품과 관련됩니다. 출애굽기 34:14에서 여호와야훼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명하시면서 자신을 질투하시는 하나님으로 소개하시고, 신명기 32:21은 이스라엘이 다른 신들을 따름으로 하나님을 질투하시게 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의 관계를 진지하게 여기시며, 우상숭배를 사소한 취향의 차이로 취급하지 않으십니다. 「설마 우리가 그분보다 힘이 셉니까?」라는 질문은 자신의 지식과 자유를 지나치게 신뢰하며 우상숭배의 위험을 충분히 통제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 모를 고린도 신자들을 향합니다.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리에 들어서고 있음을 경고합니다.
참된 자유는 하나님과 얼마나 멀리 떨어져도 안전한지 시험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사람답게 어느 식탁에 참여할지 분별하는 능력입니다.
고기 시장에서는 먹어도 되는 이유
모든 것이 허락되어 있다는 주장
「모든 것이 허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이롭지는 않습니다. 「모든 것이 허락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남을 세워 주지는 않습니다.고린도전서 10:23 · 본디새김
「모든 것이 허락되어 있습니다」는 고린도전서 6:12에도 등장하며, 고린도 사람들이 자신들의 자유를 주장하면서 사용하던 말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바울은 그 말을 곧바로 두 가지 기준 앞에 세웁니다.
이롭습니까?
남을 세워 줍니까?
바로 앞에서 우상숭배를 피해 달아나라고 명령했으므로, 23절은 우상숭배에 참여할 자유를 다시 허락하는 문장일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제 제의에 참여하는 일과 일상생활에서 음식을 먹는 일을 구별하면서, 자유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지 설명하려 합니다.
누구든 자기 이익을 찾지 말고 남의 이익을 찾을 일입니다.고린도전서 10:24 · 본디새김
자기 자신에게 아무런 관심도 가져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유익을 자신의 결정에서 중요한 기준으로 삼으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 원칙을 아주 구체적인 생활 장면에 적용합니다.
시장에서 고기를 살 때
고기 시장에서 팔리는 것은 무엇이든 양심 때문에 따져 묻지 말고 먹으십시오.고린도전서 10:25 · 본디새김
바울은 이제 신전에서 시장으로 장소를 옮깁니다.
앞에서는 우상 제사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을 금했지만, 이제 시장에서 판매되는 고기는 먹어도 된다고 말합니다. 시장에 나온 고기는 특정한 제의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고기의 과거 출처가 무엇이든, 그것을 시장에서 사서 먹는 행위가 곧 그 제의에 참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모든 고기의 제의적 출처를 조사하도록 요구하지 않고, 오히려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지나치게 세밀한 종교적 불안에서 신자를 자유롭게 하는 권면입니다.
땅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주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10:26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시편 24:1의 직접 인용입니다. 시편 24편은 세상을 세우신 창조주이시기에 땅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여호와야훼께 속한다고 고백하며 시작하고, 그분 앞에 나아가는 사람에게 요구되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그중 창조주에 관한 고백을 일상적인 음식 문제에 적용합니다.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다는 사실이 고기를 창조주 하나님의 소유에서 벗어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같은 종류의 고기라도 어떤 관계와 맥락에서 먹느냐에 따라 행위의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앞에서 강력하게 우상숭배를 금지했던 바울이 여기서 고기를 자유롭게 먹으라고 말하는 것은 모순이 아닙니다. 그는 우상숭배에 참여하는 행위와 하나님께 속한 창조물을 사용하는 행위를 구별하고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집에서도 먹으십시오
믿지 않는 이들 가운데 누가 여러분을 부르고 여러분이 가고 싶으면, 여러분 앞에 차려 놓이는 것은 무엇이든 양심 때문에 따져 묻지 말고 먹으십시오.고린도전서 10:27 · 본디새김
장소가 다시 바뀝니다.
바울은 믿지 않는 사람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 식사를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초대에 응하고 싶으면 가서 차려진 음식을 먹으라고 합니다. 이 권면에는 이웃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는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 평범한 식사 자리에서 누군가가 말을 건넵니다.
그러나 누가 여러분에게 「이것은 제사에 바친 것입니다」 하고 말하면, 그렇게 알려 준 이와 그의 양심을 생각하여 먹지 마십시오.고린도전서 10:28 · 본디새김
방금 전까지 먹어도 된다고 했던 음식입니다. 음식 자체가 갑자기 달라졌기 때문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 음식의 물질적 성질은 전혀 바뀌지 않았습니다. 달라진 것은 그 음식을 둘러싼 관계와 의미입니다. 그 말을 한 사람이 그리스도인인지 믿지 않는 사람인지, 어떤 의도로 정보를 제공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바로 그 사람과 그의 양심을 고려하여 먹지 않기로 선택하라고 권면합니다.
음식이 악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음식을 먹는 일이 다른 사람의 양심과 신앙적 판단에 불필요한 문제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제시하는 행동 기준은 상황마다 달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일관된 논리가 있습니다. 신전의 제의적 식사에서는 우상숭배에 참여하지 않기 위해 먹지 않습니다. 시장에서 산 음식과 이웃의 집에서 차려 준 음식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므로 출처를 조사하지 않고 먹습니다. 그러나 그 음식이 제사에 바쳐졌다는 사실이 특별히 제기되어 다른 사람의 양심이 문제가 되는 상황에서는 먹지 않습니다.
왜 내 자유가 다른 사람의 양심에 판단받아야 하는가
내가 말하는 양심은 여러분 자신의 양심이 아니라 남의 양심입니다.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에 의해 판단받습니까? 내가 감사하며 나누어 받는데 어찌하여 내가 감사하는 그것을 두고 비방을 받습니까?고린도전서 10:29–30 · 본디새김
앞에서는 다른 사람의 양심을 고려하여 먹지 말라고 해 놓고, 곧바로 왜 자신의 자유가 다른 사람의 양심에 의해 판단받아야 하느냐고 묻습니다. 마치 앞에서 말한 원칙에 반대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여기에는 주요한 두 가지 읽기가 있습니다. 첫째는 바울이 자유를 주장하는 사람의 항의를 대신 말하고, 31–33절에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고 다른 사람의 유익을 추구하라고 자신의 대답을 내놓는다는 해석입니다. 둘째는 바울 자신의 질문으로 보아, 다른 사람의 양심이 자기 자유의 정당성을 결정하지는 않지만 그 자유를 행사하는 방식에서는 다른 사람을 고려해야 한다고 설명한다는 해석입니다. 두 해석 모두 문맥적 근거를 갖지만, 원문은 화자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명시하지 않으므로 한쪽을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어느 쪽을 따르더라도 바울의 중요한 구별은 남습니다. 다른 사람의 양심을 고려한다는 것이 그 사람에게 내 자유의 본질을 결정할 권한을 넘겨준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유로운 사람으로서 스스로 다른 사람의 유익을 고려할 수 있으며, 이것은 상대방의 모든 요구에 끌려다니는 것과 다릅니다.
30절은 하나님의 선물을 감사하며 받아 누리는 자유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감사한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행동이 무조건 정당화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먹는 행위도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분별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무엇이든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태도도, 모든 음식과 모든 관계를 의심하며 자유를 잃는 태도도 택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을 자유롭게 누리면서도, 그 자유를 사용하는 방식에서 다른 사람의 유익을 찾으라고 권면합니다.
조금 더 깊이
23절의 「모든 것이 허락되어 있습니다」에 대해, 원래 편지에는 현대적인 인용 부호가 없으므로 그 표현이 어디까지 상대방의 주장인지 세부적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30절의 「감사하며」로 옮긴 원문의 카리티는 문맥에 따라 감사나 은혜의 의미로 이해될 수 있고, 바로 뒤에는 「감사하다」라는 동사가 이어집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은 식탁에서 어떻게 드러나는가
그러므로 여러분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십시오.고린도전서 10:31 · 본디새김
이 말을 앞의 논의에서 떼어 놓고 읽으면 지나치게 추상적인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인생의 모든 영역에서 열심히 살라는 일반적인 명령이 아니라, 매우 구체적인 음식 문제를 논의한 뒤 이 결론에 이릅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는 것.
이웃의 집에서 식사를 하는 것.
이러한 일상적인 행동도 하나님의 영광과 관계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먹는다는 것은 먼저, 땅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주님의 것이므로 음식을 하나님께 감사하며 받아 누리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으로서 다른 신을 섬기는 제의적 행위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고, 자유롭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라도 다른 사람의 양심을 해치지 않도록 절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행동은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행동에만 국한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에서도 하나님이 누구신지가 드러납니다.
세 부류의 사람과 한 가지 목적
유대 사람들에게도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교회에도 걸림돌이 되지 마십시오.고린도전서 10:32 · 본디새김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은 민족적·문화적 구별을 가리키고,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님께 속한 공동체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행동을 판단할 때 교회 내부의 관계만 고려하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영향도 살핍니다.
「걸림돌이 되지 말라」는 명령을 누구에게도 불쾌감을 주지 않는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 자신도 복음을 전하면서 반대와 갈등을 경험했습니다. 그가 경계하는 것은 자신이 행사하는 자유 때문에 다른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에 불필요한 장애물이 생기는 일입니다.
내가 내 이로움을 찾지 않고 많은 사람의 이로움을 찾으면서 모든 일에서 모든 이를 기쁘게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들이 구원받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10:33 · 본디새김
이 문장은 바울이 복음을 위해 여러 사람의 처지에 맞추어 살았다고 말한 앞장과 직접 연결됩니다. 「모든 이를 기쁘게 한다」는 표현을 무조건적인 영합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복음의 진리를 포기하지 않으면서, 사람들이 그 복음을 받아들이는 데 불필요한 장애물이 생기지 않도록 자신의 행동을 조절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이익보다 많은 사람의 이익을 찾는 이유는 단지 사회적 관계를 원만하게 유지하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구원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네 식탁을 지나며 드러나는 한 가지 진실
고린도전서 10장을 다시 돌아보면, 바울이 먹고 마시는 장면을 반복해서 사용하는 이유가 드러납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공급하신 음식을 먹었지만, 금송아지 앞에서도 먹고 마셨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의 잔과 빵을 나누어 받지만, 어떤 사람들은 우상 제의의 식탁에도 참여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상의 시장과 이웃의 식탁이 등장합니다.
식탁은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누구와 관계를 맺고 있는지 드러내는 장소가 됩니다.
이 장은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의 책임을 서로 대립시키지 않습니다. 은혜는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사랑하시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신다는 사실에서 출발하기에, 하나님은 그들이 다른 대상에게 충성을 바치는 일을 사소하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인간의 불충성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성품이 아니라, 인간이 그분께 충실하게 살 수 있는 근거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을 감사하며 누리고,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훼손하는 행동은 피하며,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자유를 조절하는 충성으로 나타납니다.
마지막 장면을 떠올려 봅시다. 한 그리스도인이 믿지 않는 이웃의 집에 초대받았습니다. 식탁에는 음식이 차려져 있습니다. 그는 땅과 그 안에 가득한 것이 주님의 것임을 알기에, 그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일일이 조사하지 않고 감사하며 식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그 음식이 제사에 바쳐졌다고 말합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무엇을 먹을 수 있는지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건넨 사람의 양심을 살피고, 그 자리에서 자신의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 생각합니다. 그리고 먹지 않기로 결정할 수도 있습니다. 음식을 두려워해서도, 자신의 자유를 잃었기 때문도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에게 속해 있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주신 음식을 먹었지만, 그분께 대한 충성을 잃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식탁에서 예수님의 피와 몸을 함께 나눈 사람들이, 일상의 식탁에서도 그분께 속한 사람답게 행동하기를 바랍니다. 그 식탁이 자신의 자유를 과시하는 자리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자리가 됩니까.
바울은 바로 그것을 묻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