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전서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7–10장 · 질문에 답하는 말
자유로운 사람이 스스로 노예가 된 이유
바울은 자신에게 권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긴 논증을 펼칩니다. 그런데 그 논증이 끝나자, 자신은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사도에게는 생활비를 지원받을 권리가 있고, 아내와 함께 사역할 권리도 있으며,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을 권리도 있다고 주장합니다. 군인과 농부와 목자의 사례를 들고, 모세의 율법을 인용하며, 마침내 주님께서도 복음 전하는 사람의 생활을 보장하셨다고 말합니다. 이쯤 되면 독자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무언가를 요구하려 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정반대의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권한을 쓰지 않았습니다.」(12절) 바울은 권리가 없어서 포기한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그 권리가 충분히 있다는 사실을 확증한 다음, 그것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그러므로 그의 행동은 어쩔 수 없는 희생도 아니고 자신의 사도직을 부정하는 행동도 아닙니다. 오히려 바울은 그 결정 속에서 자신이 이해한 복음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8장에서 다른 사람의 믿음을 해치지 않기 위해 자유를 제한해야 한다고 말했다면, 9장에서는 바울 자신이 그 원칙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유롭게 권리를 포기하는 일에서 출발하여, 마침내 자기 자신을 모든 사람의 노예로 삼았다고 선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경기장에서 달리는 선수의 모습으로 자신을 그립니다.
사도직을 변호하던 사람이 왜 노예가 되고, 다시 운동선수가 되는 것일까요? 이 세 모습 사이의 관계를 발견하면 고린도전서 9장의 논증이 하나로 이어집니다.
여러분이 내 사도직의 증거입니다
바울은 왜 갑자기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는가
나는 자유인이 아닙니까? 나는 사도가 아닙니까? 나는 우리 주 예수를 보지 않았습니까? 여러분은 내가 주 안에서 이룬 일이 아닙니까?고린도전서 9:1 · 본디새김
바울은 네 개의 질문을 연달아 던지고, 모두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합니다. 그는 자신의 자유와 사도직을 나란히 놓습니다. 그는 단지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자유를 가진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부름받아 복음을 전하는 사도입니다.
이 질문은 바울의 사도직이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게 합니다. 고린도전서 15:8에서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도 나타나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보았다는 사실만을 내세우지 않습니다. 네 번째 질문은 고린도 신자들을 향합니다.
바울은 자기 사도직을 입증하기 위해 외부의 추천서나 권위 있는 사람의 보증을 먼저 제시하지 않습니다. 자신을 의심할 수도 있는 바로 그 공동체를 증거로 제시합니다.
내가 다른 이들에게 사도가 아닐지라도 적어도 여러분에게는 사도입니다. 여러분이 주 안에서 내 사도직의 도장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9:2 · 본디새김
‘도장’은 문서나 물건에 찍어 그것의 진정성이나 소속을 확인하는 인장을 가리킵니다. 고린도 교회의 존재 자체가 바울의 사도직에 찍힌 인장이라는 뜻입니다.
여기에는 미묘한 논리적 압박이 있습니다. 고린도 신자들은 바울의 사도직을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된 역사에는 바울의 복음 선포가 있었습니다. 바울의 사도직을 부정하려면, 적어도 그들 자신이 어떻게 복음을 받아들이게 되었는지도 함께 돌아보아야 합니다.
물론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자기 능력으로 탄생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는 두 차례나 「주 안에서」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3:6–7에서도 바울은 자신이 심고 아볼로가 물을 주었지만 자라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고린도 교회의 존재는 바울의 능력을 자랑하는 기념비가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바울의 사역을 통해 일하셨다는 증거입니다.
3절에서 바울은 자신을 따져 묻는 사람들에게 변론하겠다고 말합니다. ‘변론’은 비난이나 심문에 맞서 자신의 입장을 설명하고 방어하는 말을 가리킵니다. 고린도 교회의 일부 사람들이 바울의 사도적 권위를 문제 삼았음을 이 표현은 시사합니다. 다만 그들이 정확히 어떤 비난을 했는지, 어떤 집단에 속했는지는 이 장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특히 바울이 생활비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 그의 사도적 지위에 관한 의심과 연결되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다른 사도들은 지원을 받는데 바울은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는 그것을 바울에게 정당한 권한이 없다는 표시로 받아들였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제 자신에게 어떤 권한이 있는지를 하나씩 입증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먹고 마실 권한, 아내와 함께할 권한, 일하지 않을 권한
우리는 먹고 마실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고린도전서 9:4 · 본디새김
바울은 먼저 일상적인 필요에서 시작합니다. 사도라고 해서 먹고 마실 필요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복음 전파를 위해 일하는 사람도 생활을 유지해야 합니다.
다른 사도들과 주님의 형제들과 게바가 그러하듯이, 우리도 믿는 자매인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까?고린도전서 9:5 · 본디새김
「믿는 자매인 아내」라는 표현은 한 여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자매이면서 동시에 아내라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게바는 베드로의 아람어 이름입니다. 이 구절은 초기 그리스도교 선교 활동에 배우자가 동행하는 경우가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여기에 언급된 모든 사도가 결혼했다거나 모든 아내가 언제나 동행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의 요점은 간단합니다. 다른 사도들에게 허용되는 권리가 자신에게도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면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을 권한을 가지고 있지 않은 이는 나와 바나바뿐입니까?고린도전서 9:6 · 본디새김
바울과 바나바는 함께 선교 활동을 했던 인물들입니다(사도행전 13–14장). 두 사람의 이름을 함께 언급한다고 해서 당시 바나바가 고린도에 함께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두 사람이 생활을 위해 일하는 사역자로 알려져 있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생계를 위한 노동을 했습니다. 사도행전 18:3은 그가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일했다고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4:12에서도 그는 자기 손으로 일한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의 노동이 사도에게 생활비를 받을 권한이 없기 때문은 아닙니다. 바울은 그런 오해를 없애려고 합니다. 사도에게는 복음 전파에 전념하면서 생활에 필요한 것을 지원받을 권리가 있고, 자신이 일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 권리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군인과 농부와 목자가 가리키는 것
도대체 누가 자기 비용으로 군 복무를 합니까? 누가 포도밭을 일구고 그 열매를 먹지 않습니까? 누가 양 떼를 치고 그 젖을 마시지 않습니까?고린도전서 9:7 · 본디새김
이 사례들은 조금씩 다른 측면을 보여 줍니다. 군인의 경우에는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에게 필요한 지원이 강조됩니다. 포도밭을 일구는 사람에게는 자기 노동의 결실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목자의 경우에는 지속적으로 돌보는 일과 그 돌봄에서 나오는 생산물이 연결됩니다.
그러나 세 사례가 도달하는 결론은 같습니다. 어떤 일을 위해 노동하는 사람은 그 노동을 통해 생겨나는 유익에서 정당한 몫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특별한 사도적 특권이 아니라 사람들이 일상생활에서 인정하는 원칙으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당연하게 여기는 노동의 원칙이 하나님의 율법에서도 확인된다는 것입니다.
타작하는 소에게 부리망을 씌우지 마십시오
모세의 율법이 사도들의 생활비를 말한다고?
내가 이것을 사람이 하는 식으로 말하는 것입니까?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않습니까? 모세의 율법에 이렇게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 「타작하는 소에게 부리망을 씌우지 마라.」 하나님께서 소에게 관심을 두고 계신 것입니까?고린도전서 9:8–9 · 본디새김
바울이 인용하는 신명기 25:4는 본래 사도나 교회 지도자의 생활비를 다룬 말씀이 아니라, 농사일에 동원되는 소에 관한 명령입니다. 고대 농업에서는 소가 타작마당의 곡식을 밟거나 타작 도구를 끌게 하여 낟알을 분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소의 입에 부리망을 씌우면 소는 자기 앞에 놓인 곡식을 먹을 수 없게 됩니다. 신명기의 명령은 바로 그것을 금지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동물을 함부로 대하지 못하도록 명령하십니다. 신명기에는 이와 같은 배려의 원칙이 다른 곳에도 나타납니다. 신명기 5:14에서는 안식일에 가축도 쉬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22:6–7에서는 새의 둥지를 발견했을 때 어미와 새끼를 함께 취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신명기 25:4를 읽으면서 동물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을 지워 버리면, 원래 본문이 지닌 중요한 의미를 놓치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어서 묻습니다.
아니면 어디까지나 우리를 두고 말하는 것입니까? 우리를 두고 적힌 것입니다. 밭 가는 이는 소망을 품고 갈아야 하고, 타작하는 이는 나누어 받을 것을 바라며 타작해야 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전서 9:10 · 본디새김
바울이 하나님은 소에게 관심이 없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이 구절에는 실제로 해석의 갈림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율법의 궁극적인 의도가 인간의 노동에 관한 원칙을 가르치는 데 있다고 강하게 주장한다는 해석입니다. 이 읽기에서는 하나님이 소를 돌보신다는 사실 자체를 반드시 부정하지는 않더라도, 율법의 핵심적인 관심은 사람에게 있다고 봅니다. 다른 해석은 바울이 동물에 관한 본래의 명령을 인정하면서 그 원칙을 사람에게까지 확대한다고 이해합니다. 소가 일하면서 곡식을 먹을 수 있다면, 복음 전파를 위해 일하는 사람에게도 생활의 몫이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차이는 10절의 판토스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와도 관련됩니다. 이 단어는 문맥에 따라 ‘전적으로’라는 강조를 나타내거나 ‘분명히’, ‘확실히’라는 뜻으로 읽힐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는 앞의 의미를 강하게 살린 번역입니다. 바울의 강조를 과장법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구약 본문에 이미 들어 있는 원칙을 확장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어느 한쪽으로 쉽게 단정하기보다 바울이 율법에서 어떤 원칙을 발견하는지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소망’은 막연한 미래의 기대가 아니라, 노동하는 사람이 자신의 노동에서 정당한 몫을 받을 수 있으리라는 기대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일하도록 맡기신 생명이 아무런 몫도 누리지 못한 채 소모되는 일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노동도 같은 원칙 아래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영에 속한 것을 뿌리고 살림에 속한 것을 거두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영에 속한 것을 뿌렸다면, 우리가 여러분의 살림에 속한 것을 거두는 것이 과한 일입니까?고린도전서 9:11 · 본디새김
바울은 앞의 포도밭과 타작마당의 이미지를 선교 사역에 적용합니다. 고린도 신자들이 받은 것은 영에 속한 것이었습니다.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믿음의 시작, 하나님과의 새로운 관계였습니다. 그 사역을 통해 유익을 얻은 공동체가 바울의 생활에 필요한 것을 제공하는 일은 과도한 요구가 아닙니다.
「살림에 속한 것」은 문자적으로는 ‘육에 속한 것들’이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앞의 ‘영에 속한 것들’과 대조되어 물질적 생활에 필요한 것들을 가리키므로, 죄악된 것이라는 의미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영적인 일이 가치 있고 물질적인 일은 열등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하는 사역과 그것을 감당하는 사람의 실제 생활이 서로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로마서 15:27에서도 바울은 비슷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방 신자들이 유대 신자들의 영적 유익을 함께 누렸다면, 물질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길 책임이 있다는 논증입니다. 바울에게 물질은 언제나 극복해야 할 악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을 실제로 돌보는 데 사용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2절에서 논증의 방향이 갑자기 바뀝니다.
다른 이들이 여러분에 대한 이 권한을 나누어 받는다면 우리는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이 권한을 쓰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그리스도의 복음에 아무런 지장도 주지 않으려고 모든 것을 감수합니다.고린도전서 9:12 · 본디새김
바울은 지금까지 쌓아 올린 논증을 단 한 문장으로 전환합니다. 그에게는 다른 사역자들보다 고린도 교회에 더 직접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그 권리가 잘못되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권리를 행사하는 일이 복음의 전달을 방해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직접 밝히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지장을 주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권리가 있는가 하는 질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복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도 물어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이 실제로 어떤 방해를 염두에 두었는지는 명시되지 않습니다. 그가 돈을 받고 복음을 전한다는 오해를 피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는 당시의 후원 관계가 만들어 내는 의존이나 의무에서 벗어나려 했을 수도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후원은 단순한 금전 거래만이 아니라 사회적 지위와 상호 의무를 형성할 수 있었고, 바울의 노동과 후원 거절이 고린도 공동체의 사회적 관계 및 공동체의 일치와 연결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자체는 그 모든 사회적 동기를 명확하게 열거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받지 않겠습니다
가장 강력한 근거가 마지막에 등장하다
성전 일을 하는 이들이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고, 제단 곁에서 섬기는 이들이 제단의 것을 나누어 받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고린도전서 9:13 · 본디새김
민수기 18:8–20과 신명기 18:1–5에는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제물과 헌물에서 몫을 받는 규정이 나옵니다. 이것은 단순한 임금 지급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전념하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이 그 사역과 연결된 공동체의 공급을 통해 생활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입니다.
그와 같이 주님께서도 복음을 알리는 이들이 복음에서 나는 것으로 살도록 명하셨습니다.고린도전서 9:14 · 본디새김
이제 논증은 절정에 이릅니다.
처음에는 군인과 농부와 목자의 사례였습니다.
이어서 모세의 율법이 등장했습니다.
그리고 성전 봉사자들의 관습이 제시되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주님의 명령이 나옵니다.
바울은 자신의 권한을 정당화하는 마지막 근거로 주님의 권위를 제시합니다. 이쯤 되면 바울에게 생활비를 받을 권리가 없다고 주장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은 다시 방향을 돌립니다.
바울은 왜 주님께서 인정하신 권리를 사용하지 않는가
그러나 나는 이 가운데 아무것도 사용한 적이 없습니다. 나에게 그렇게 되도록 이 말을 적은 것도 아닙니다. 나에게는 죽는 것이 차라리 낫기 때문입니다 — 내 자랑을 아무도 헛되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고린도전서 9:15 · 본디새김
그는 후원을 요청하는 대신, 후원을 받지 않는 자신의 결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명령을 경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원칙은 복음 사역자에게 생활비를 반드시 받아야 한다는 의무를 부과하지 않고, 정당하게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권리가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을 꺼냈다가 끊고 자랑을 지키겠다는 선언으로 넘어가는 문장에서, 그가 자신의 결심을 얼마나 강하게 표현하고 있는지 느껴집니다.
그런데 ‘자랑’이라는 말이 이상합니다. 고린도전서 1:31에서 바울은 자랑하는 사람은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바울이 지키려는 자신의 자랑은 무엇일까요? 그 답은 이어지는 세 절에서 밝혀집니다.
복음을 전하는 것은 내 자랑이 아닙니다
내가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나에게 자랑할 거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피할 수 없는 의무가 나를 내리누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나에게 화가 미칩니다.고린도전서 9:16 · 본디새김
복음을 전하는 일은 자신이 선택한 개인적 업적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명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되는데 특별히 선심을 써서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고,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기셨기 때문에 그 일을 감당합니다.
「피할 수 없는 의무가 나를 내리누르고」라는 표현은 외부의 강제에 끌려 마지못해 일한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의 필연성을 말합니다. 그 일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받은 부르심에 불충실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이것을 자원해서 한다면 나는 삯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마지못해 한다면 나에게 살림을 꾸리는 일이 믿고 맡겨져 있습니다.고린도전서 9:17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쉽게 읽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원해서 일하는 사람과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사람을 대비합니다. 핵심은 그가 복음 전파를 자신의 자유로운 사업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살림을 꾸리는 일(οἰκονομία)’로 옮긴 원문의 낱말은 가정이나 재산을 관리하는 일, 또는 어떤 일을 맡아 관리하는 직무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그리스·로마 사회의 큰 집에는 주인이 맡긴 재산이나 일을 관리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뜻대로 주인의 재산을 다루는 독립적인 소유자가 아니라, 맡겨진 일을 충실하게 관리할 책임을 지닌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복음 사역을 그와 같은 관계로 이해합니다. 복음은 바울이 만들어 낸 상품도, 그가 소유한 지적 재산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15절에서 말한 그의 자랑은 무엇입니까? 18절이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나의 삯은 무엇입니까? 복음을 전하면서 그 복음을 값없이 내놓는 것, 곧 복음을 전하는 일에서 내 권한을 다 쓰지 않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9:18 · 본디새김
보통 삯은 자신이 일한 대가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받을 수 있는 대가를 받지 않는 일을 자신의 삯이라고 말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 자체를 자기 공로로 내세울 수는 없지만, 그 사명을 어떻게 수행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선택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는 복음을 값없이 전하기로 선택했습니다. 자신에게 허용된 권리를 끝까지 행사하지 않음으로써,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복음의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인상을 받지 않도록 하려 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지키려는 자랑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언제나 모든 교회의 물질적 지원을 거부했다고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빌립보서 4:15–16에서 그는 빌립보 신자들이 자신의 필요를 여러 차례 채워 주었다고 말합니다. 고린도후서 11:8–9에서도 고린도에서 사역하는 동안 다른 교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다고 밝힙니다. 따라서 초점은 그가 고린도에서 자신의 생활을 위해 그 교회에 권리를 요구하지 않기로 한 결정에 있습니다.
여기에는 당시의 사회적 조건과 구체적인 목회적 판단이 관련되어 있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강조하는 가장 깊은 이유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복음의 내용과 복음을 전달하는 방식이 서로 어긋나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누가복음 10:7과 마태복음 10:10에는 예수님께서 파송된 일꾼에게 필요한 생활의 몫이 주어져야 한다고 가르치신 내용이 전해집니다. 14절은 이 가르침과 주제와 내용에서 연결되지만, 바울이 현재의 복음서 문장을 직접 인용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15절 원문에는 문장 구조가 갑자기 끊어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바울은 ‘죽는 것이 더 낫다’는 말을 꺼냈다가 자신의 자랑을 아무도 헛되게 하지 못할 것이라는 선언으로 이어 가며, 사본에 따라 뒤 문장의 형태에도 차이가 있습니다. 본디새김 번역은 이 갑작스러운 연결을 긴 줄표로 살리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롭지만 모든 사람의 노예가 되다
바울이 말하는 자유의 역설
나는 모든 이에게서 자유롭지만 더 많은 이를 얻으려고 나 자신을 모든 이의 노예로 삼았습니다.고린도전서 9:19 · 본디새김
바울은 1절에서 자신이 자유인이라고 말했고, 19절에서 다시 자유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자유로운 자신을 모든 사람의 노예로 삼았다는 결론이 따라옵니다. 바울은 누군가에게 강제로 노예가 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그렇게 했다고 말합니다.
자유는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는 상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았기 때문에, 복음을 위해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노예’라는 말은 단순한 친절이나 봉사의 비유보다 강합니다. 노예는 일반적으로 자기 뜻보다 주인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실제 노예 상태의 강제성과 고통을 바울의 자발적인 선택과 동일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자신이 법적·사회적으로 노예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자유를 사용하는 방식이 그만큼 철저하게 다른 사람을 향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더 많은 이를 얻으려고」라는 말은 사람들을 자신의 소유로 만들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20–22절의 반복과 마지막에 나오는 ‘구원’이라는 표현이 그 의미를 밝혀 줍니다. 그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에 이르도록 돕고자 합니다.
유대 사람에게는 유대 사람처럼
유대 사람들을 얻으려고 유대 사람들에게는 유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 나 자신은 율법 아래 있지 않지만, 율법 아래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그들에게는 율법 아래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고린도전서 9:20 · 본디새김
바울 자신이 유대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빌립보서 3:5에서도 그는 자신의 이스라엘 혈통과 바리새파 배경을 설명합니다. 따라서 「유대 사람처럼 되었습니다」는 바울이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버렸다가 다시 취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달라지는 것은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는 방식입니다.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율법과 맺는 관계가 근본적으로 달라졌다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율법 아래 있지 않다는 사실을 모든 상황에서 자신의 행동으로 증명하려 들지 않습니다. 유대 사람들과 복음을 나누기 위해서는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관습과 생활 방식을 존중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6:3에서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일은 이러한 선교적 태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사례입니다. 누가는 그 이유를 그 지역의 유대 사람들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2:3–5에서는 디도가 할례를 받도록 강요하는 요구에 바울이 굴복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어떤 관습을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기 위해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것과, 그 관습을 복음에 필수적인 조건으로 강요받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바울은 유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자신을 조정할 수 있었지만, 예수님 안에서 주어진 복음의 진리를 포기할 수는 없었습니다.
율법 밖에 있는 사람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나 자신은 하나님의 율법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 안에 있지만, 율법 밖에 있는 이들을 얻으려고 그들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사람처럼 되었습니다.고린도전서 9:21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앞의 선언에 한계를 설정합니다.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자신의 생활 규범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방 사람들에게 유대인의 생활 규정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선교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자신이 아무런 법도 없는 사람은 아니라고, 「그리스도의 법 안에」 있다고 밝힙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법’을 길게 정의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를 하나의 완성된 법전처럼 이해하거나, 정확한 조항들의 목록을 확정하려 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갈라디아서 6:2에서 바울은 서로의 짐을 지는 일이 그리스도의 법을 이루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의 문맥에서도 예수님의 죽음과 사랑은 자유를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방식에서 유연합니다. 그러나 그 유연함에는 중심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삶을 다스리시는 주님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태도는 모든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기회주의가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을 포기하면서까지 상대방의 기대에 맞추려 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사람들과 맺는 관계의 방식은 바꾸지만, 자신이 속한 예수님은 바꾸지 않습니다.
약한 이에게는 약한 사람이 되다
약한 이들을 얻으려고 약한 이들에게는 약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고린도전서 9:22 · 본디새김
‘약한 이들’은 앞장에서 등장했던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먼저 강해지라고 요구하지 않고, 자신이 그들의 처지에 맞추겠다고 말합니다. 누군가의 신앙적 이해가 아직 충분히 자라지 않았을 때, 그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 자신의 행동을 제한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적용하도록 밀어붙이지도 않습니다. 그의 목적은 자신의 자유를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구원에 이르도록 돕는 것입니다.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라는 표현은 매우 넓어 보이지만, 앞의 세 사례를 살펴보면 무제한적인 순응을 뜻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사람마다 다르게 행동할 수 있지만, 그 모든 행동에는 같은 목적이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을 얻기 위해.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얻기 위해.
율법 밖에 있는 사람들을 얻기 위해.
약한 사람들을 얻기 위해.
그리고 마침내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기 위해.
반복되는 것은 자신의 자유가 아니라 사람을 얻으려는 목적입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반드시 자신을 통해 구원받을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려고」라고 말합니다. 이 표현에는 자신의 사역이 갖는 한계에 대한 인식이 담겨 있습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복음이 전해지는 길을 열어 놓고, 자신의 행동이 그 길을 막지 않도록 힘쓰는 것입니다.
복음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이 되려는 것입니다
나는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합니다. 그 복음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이 되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9:23 · 본디새김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각기 다른 방식으로 다가갑니다. 누구에게도 속박되지 않았지만 모두의 노예가 됩니다. 그 모든 행동의 이유는 복음입니다.
‘함께 참여하는 사람’은 무엇인가를 함께 나누거나 공동으로 참여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두 가지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복음의 사역에 참여하려 한다는 뜻입니다. 앞에서 자신이 모든 사람을 위해 무엇을 하는지 이야기했다는 점이 이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다른 하나는 그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복음이 가져오는 유익과 구원의 몫에 참여하려 한다는 뜻입니다. ‘그 복음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이 되려는 것’이라는 목적 표현은 이 방향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두 의미는 서로 완전히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어느 한쪽만을 가리킨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바울은 복음을 자신이 소유하고 다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나누어 주는 재산처럼 다루지 않습니다. 이것은 17절의 ‘맡겨진 일’과 잘 어울립니다. 바울은 복음의 주인이 아니라, 그 복음을 맡은 사람이며, 그 복음의 유익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그런 삶을 계속 살아가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바울은 마지막 단락에서 그 대답을 경기장의 모습으로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이 스스로 노예가 되었다는 선언은 고린도전서 앞부분과 이어집니다. 1:18–25에서 바울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세상이 생각하는 지혜와 능력의 기준을 뒤집으신다고 말했습니다. 고린도후서 8:9에서는 예수님께서 부요하셨으나 다른 사람을 위해 가난해지셨다고 말하고, 빌립보서 2:5–11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낮추시고 종의 형체를 취하시어 죽기까지 순종하신 일을 공동체의 삶과 연결합니다. 두 본문은 고린도전서 9장에서 직접 인용되지는 않지만, 바울의 여러 편지에서 예수님의 자기 낮추심이 공동체를 향한 삶의 방식과 연결된다는 점을 보여 줍니다. 물론 바울이 권리를 내려놓는 행위와 예수님의 십자가를 동일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바울의 선택이 사람을 구원하는 속죄 행위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이 복음을 위해 자신의 지위와 권한을 사용하는 방식에는, 자신이 전하는 예수님의 낮아짐과 섬김이 반영되어 있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선언은 단지 사람을 얻기 위한 효율적인 선교 전략으로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경기장에서 달리는 사도
고린도 사람들이 잘 아는 풍경
경기장에서 달리는 이들이 다 달리지만 상은 한 사람이 받는다는 것을 여러분은 알고 있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상을 차지하려고 그렇게 달리십시오.고린도전서 9:24 · 본디새김
바울은 갑자기 운동 경기의 비유를 시작합니다. 고린도 근처 이스트미아에서는 포세이돈을 기리는 이스트미아 경기가 열렸으므로, 이 비유는 고린도 신자들에게 낯선 이야기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도 한 사람만 구원받거나, 다른 사람을 이겨야만 상을 받을 수 있다는 뜻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의 관심은 상을 받는 사람의 숫자가 아니라, 경기에서 승리하려는 선수가 얼마나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달리는지에 있습니다. 이 권면의 핵심은 다른 그리스도인을 경쟁자로 여기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달려가는 목적을 잊지 말라는 것입니다.
바울이 노예가 되겠다는 말 뒤에 이 비유를 꺼낸 것은, 그가 보여 준 자유가 순간적인 선의만으로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받을 수 있는 것을 받지 않는 일.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자신의 생활 방식을 조정하는 일.
상대방이 약하다고 해서 그를 함부로 대하지 않는 일.
복음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는 일.
이러한 삶에는 지속적인 의지와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제 자신의 삶을 운동선수의 훈련에 비유합니다.
썩을 관과 썩지 않을 관
겨루는 이는 누구나 모든 면에서 자제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썩을 관을 받으려고 그렇게 하지만 우리는 썩지 않을 관을 받으려고 합니다.고린도전서 9:25 · 본디새김
운동선수는 경기에서 승리하려는 목적 때문에 자신의 생활을 조절합니다. 먹고 싶은 것을 모두 먹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언제나 다 하지도 않습니다. 그 선수에게 중요한 것은 당장의 자유를 최대한 누리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비유가 앞의 논증과 연결됩니다. 바울은 복음을 위해 자신에게 허용된 권리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절제는 단순한 금욕이 아니라, 더 중요한 목적을 위해 작은 자유를 제한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운동선수는 썩을 관을 받기 위해 절제하고, 그리스도인은 썩지 않을 관을 바라봅니다. 고대 경기에서 주어지는 관은 명예롭지만 결국 시들어 버리는 식물로 만들어졌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보상의 종류를 상세히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두 목표의 지속성을 대조하고 있습니다.
이 장에서 그가 훈련하고자 하는 삶은 자신의 성공을 극대화하는 삶이 아닙니다. 자기 권리를 복음에 종속시키고, 다른 사람을 얻기 위해 자신을 섬기는 자리에 두는 삶입니다. 이 점을 놓치면 24–27절이 앞의 논증에서 떨어져 나온 독립적인 노력의 교훈처럼 변해 버립니다.
허공을 치지 않는 권투선수
그러니 나는 목표 없이 달리지 않고, 권투하되 허공을 치듯이 하지 않습니다.고린도전서 9:26 · 본디새김
달리기 선수에게는 도달할 목표가 있고, 권투선수에게는 정확하게 맞혀야 할 상대가 있습니다. 바울은 아무런 방향 없이 여러 사람의 요구에 맞추며 살아가는 것이 아닙니다. 그 목표는 앞에서 이미 밝혔습니다. 복음에 지장을 주지 않는 것, 더 많은 사람을 얻는 것,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도록 돕는 것, 그리고 자신도 그 복음에 함께 참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는 목적 없이 자신을 바꾸는 사람이 아닙니다. 한 가지 목적에 충실하기 위해 자신을 바꾸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었습니다」라는 말과 「목표 없이 달리지 않고」라는 말이 서로 이어지는 이유입니다. 겉으로 보면 바울은 상황에 따라 계속 달라지는 사람이지만, 그 변화하는 행동을 관통하는 방향은 일정합니다. 예수님의 복음입니다.
자신의 몸을 쳐서 노예로 부리다
도리어 나는 내 몸을 쳐서 노예로 부립니다. 다른 이들에게 선포하고 나서 나 자신이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고린도전서 9:27 · 본디새김
‘친다’는 말은 본래 눈 아래를 때려 멍이 들게 하는 모습을 나타낼 수 있는 말이며, 여기서는 강한 훈련과 제압을 표현합니다. 「노예로 부립니다」는 19절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19절에서는 자신을 모든 사람의 노예로 삼았고, 27절에서는 자신의 몸을 노예로 부립니다. 바울은 자신의 욕구와 권한이 복음의 목적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문자 그대로 자신의 몸을 때리거나 해치는 행동에 대한 명령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문맥은 운동 경기의 비유이며, 바울은 자신의 몸을 학대해야 거룩해진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몸이 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가 복음의 목적에 충실하도록 훈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장은 예상보다 무겁습니다.
‘인정받지 못한’은 시험이나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여 부적합한 것으로 판정된 상태를 나타내는 말로, 운동 경기의 문맥에서는 실격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바울이 염두에 두는 구체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해석이 갈립니다. 한 해석은 그가 복음 사역자로서의 신실함을 인정받지 못하고 자신이 기대한 상을 잃을 위험을 말한다고 봅니다. 경기의 상과 실격이라는 직접적인 문맥이 이 해석을 뒷받침합니다. 다른 해석은 경고의 범위가 궁극적인 구원과 관련된 실패의 가능성까지 포함한다고 봅니다. 이어지는 고린도전서 10:1–12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하고도 광야에서 넘어졌다는 경고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둘 가운데 어느 하나만을 이 절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두 해석 모두에서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는 이유만으로 끝까지 충실하게 살아갈 책임에서 면제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 자신도 그 복음이 요구하는 삶에서 벗어나 있을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스트미아 경기는 고대 그리스의 중요한 범그리스 경기 축제 가운데 하나였으며, 달리기와 권투 등 여러 종목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승자에게는 식물로 만든 관이 수여되었는데, 관에 사용된 식물은 시대와 전승에 따라 셀러리와 소나무가 언급되므로 한 종류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이 실제로 이 경기를 관람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고린도 사람들에게 경기장의 달리기와 승리의 관이 친숙한 이미지였다는 점은 역사적 배경과 잘 어울립니다.
자유를 포기하는 것이 왜 복음에 충실한 일인가
바울은 왜 자신의 권리를 사용할 수 있는데도 사용하지 않았을까요? 단순히 그가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면 본문의 중심을 놓칩니다. 12절에서 그는 복음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해 권리를 쓰지 않았고, 16절에서 복음 전파를 피할 수 없는 사명이라 했으며, 18절에서 복음을 값없이 내놓는 것을 자신의 삯이라 했고, 23절에서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한다고 선언했습니다. 사도직을 변호하던 사람이 노예가 되고 다시 운동선수가 되는 것은, 세 모습이 모두 예수님께서 맡기신 복음을 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선택을 모든 사역자나 신자에게 무조건적인 무보수 노동을 요구하는 근거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노동한 사람이 정당한 대가를 받는 것은 마땅하고, 약한 사람을 보호하고 착취를 막기 위해서는 권리를 분명하게 세우는 일이 필요합니다. 바울이 보여 준 것은 강요된 희생이 아니라 자유로운 선택이며, 그는 다만 묻습니다. 그 권리를 행사하여 무엇을 이루려 합니까?
9장은 「나는 자유인이 아닙니까? 나는 사도가 아닙니까?」라는 질문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장의 마지막에서 독자가 바라보는 바울은 더 이상 자신의 지위를 변호하는 사람의 모습만은 아닙니다.
그는 경기장에서 달리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일이지만 하지 않기로 결정한 일들이 있습니다. 받을 수 있는 것이지만 받지 않기로 한 몫도 있습니다. 자유로운 사람이지만 스스로 섬김의 자리를 선택했습니다. 이 모든 일을 하면서도 자신이 이미 승리한 사람인 양 안주하지 않습니다.
처음에 바울은 자신의 사도직을 인정받을 충분한 증거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자신도 인정받지 못한 사람이 되지 않도록 달리겠다고 말합니다. 권위를 가졌다는 사실이 그를 멈추게 하지 않고, 자유롭다는 사실이 그를 자기 자신만을 위해 살게 하지 않습니다.
그의 손에는 행사하지 않은 권리가 있습니다.
그의 눈앞에는 아직 도달하지 않은 목표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목표를 향해 달립니다. 자신의 자유를 증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에 끝까지 충실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