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베오기 상권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3–8장 · 유다 마카베오의 싸움
승리 끝에 다시 시작된 예배
전쟁에서 승리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적군은 물러났고, 막강한 왕의 군대도 그들을 막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도착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기뻐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옷을 찢고 가슴을 치며 통곡했습니다.
그들이 싸워서 얻으려 했던 것은 단순히 적이 없는 땅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삶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적군의 진영이 등장하고, 마지막에는 성전의 제단이 등장합니다. 처음에는 전쟁을 알리는 나팔이 울리고, 마지막에는 예배를 위한 악기가 울립니다. 처음에는 전쟁의 승리를 두고 하늘을 찬양하지만, 마지막에는 회복된 예배를 두고 온 백성이 엎드려 하늘을 찬양합니다.
그 사이에서 전쟁의 승리는 목적지가 아니라 성소를 회복하기 위한 길이 됩니다.
강한 군대 앞에서 기억해야 할 것
고르기아스는 군사 오천 명과 정예 기병 천 명을 거느리고 밤에 움직였습니다. 그들의 계획은 유대 사람들의 진영을 기습하는 것이었습니다. 성채의 사람들이 길잡이가 되었다는 사실은 유다가 외부의 군대뿐 아니라 예루살렘 안에 자리 잡은 적대 세력까지 상대해야 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유다는 이미 적의 움직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고르기아스가 진영을 떠난 틈을 이용하여 엠마오에 남아 있는 왕의 군대를 공격하려 했습니다.
고르기아스가 밤에 유다의 진영에 도착했을 때 그곳은 비어 있었습니다. 그는 유대 군사들이 도망쳤다고 생각하고 산으로 들어가 그들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적이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아침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에게 유리한 조건이 주어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날이 밝자 유다는 삼천 명을 거느리고 평야에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들에게는 필요한 만큼의 방패와 칼조차 없었습니다. 반면 적군은 갑옷과 기병을 갖춘, 전쟁 훈련을 받은 군사들이었습니다.
유다는 자기와 함께 있는 군사들에게 말했다. 「그들의 수가 많다고 두려워하지 마라. 그들의 거센 공격에 겁먹지 마라.」마카베오기 상권 4:8 · 본디새김
유다가 군사들에게 요구한 것은 적군의 강함을 부정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적군의 힘을 보면서도, 그것이 전쟁의 결과를 결정하는 유일한 힘이라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파라오가 군대를 거느리고 우리 조상들을 뒤쫓았을 때, 조상들이 홍해에서 어떻게 구원받았는지 기억하라.」마카베오기 상권 4:9 · 본디새김
출애굽기 14장에서 이스라엘은 바다 앞에 갇혀 있었고, 뒤에서는 파라오의 군대가 추격해 왔습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빠져나갈 길이 없어 보였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유다는 지금의 상황을 그 이야기 속에 놓습니다. 자신들이 처음으로 강대국의 군대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역사도 처음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닙니다. 과거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행동하셨는지를 기억함으로써, 현재의 두려움을 새롭게 바라보는 행위입니다.
「이제 하늘을 향해 외치자. 하늘이 우리를 기꺼이 받아들이시고 조상들과의 언약을 기억하시며 오늘 우리 앞에서 이 진영을 부수어 주실지 모른다.」마카베오기 상권 4:10 · 본디새김
유다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으로 승리하게 해 주신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늘이 그들을 받아들이시고 언약을 기억해 주시기를 구합니다. 그가 의지하는 것은 조상들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입니다.
여기서 ‘하늘’은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4장 후반에서 온 백성이 하늘을 향해 찬양하는 장면에서도 같은 방식이 사용됩니다.
「그러면 모든 민족이 이스라엘을 속량하고 구원하시는 분이 계심을 알게 될 것이다.」마카베오기 상권 4:11 · 본디새김
유다가 바라보는 승리는 단순히 유대 군대의 명성을 높이는 사건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사건입니다.
출애굽기 14:4와 14:18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집트 사람들이 자신이 여호와야훼임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은 주변 민족에게도 하나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사건이었습니다.
유다의 연설은 바로 그 구원의 기억을 현재의 전쟁 속으로 가져옵니다.
승리보다 먼저 지켜야 할 것
전투는 놀라울 만큼 빠르게 진행됩니다.
이방 군대가 유다의 군사들을 발견하고 진영에서 나와 싸우지만 참패하여 달아납니다. 유다의 군대는 그들을 추격하고, 본문은 약 삼천 명의 적군이 쓰러졌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유다는 추격에서 돌아온 군사들에게 예상 밖의 명령을 내립니다.
유다가 백성에게 말했다. 「노획물을 탐내지 마라. 우리 앞에는 아직 싸움이 있다.」마카베오기 상권 4:17 · 본디새김
승리한 군사들에게 적의 진영은 많은 재물을 얻을 기회였습니다. 특히 장비가 부족했던 유다의 군사들에게 노획물은 실제로 필요한 자원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유다는 군사들이 눈앞의 이익 때문에 상황을 잘못 판단하지 않도록 경계합니다. 산에는 아직 고르기아스의 부대가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남은 적을 물리친 다음 재물을 가져가라고 합니다.
그의 판단은 곧 옳았음이 드러납니다. 산에서 돌아온 고르기아스의 군사들은 자기들 진영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발견합니다. 동시에 유다의 군대가 평야에서 전투 태세를 갖추고 있는 것을 봅니다.
밤에는 유다의 군대가 도망쳤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아침에는 자신들이 싸울 수 없는 상황에 놓였음을 깨닫습니다. 고르기아스의 군대는 이들과 다시 싸우지 않고 달아납니다. 이렇게 두 차례의 위협이 물러난 뒤에야 유다는 노획물을 거두게 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재물을 얻는 장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은 돌아오면서 하늘을 향해 찬송을 부르며 찬양했다. 「그분의 자비는 선하며 영원하다.」마카베오기 상권 4:24 · 본디새김
이 찬양은 시편 136편의 반복되는 후렴을 떠올리게 합니다. 시편 136편은 창조와 출애굽, 광야에서의 인도와 구원을 회상하며 하나님의 영원한 자비를 찬양합니다.
흥미롭게도 이 찬양은 역대하 5:13과 7:3에서 솔로몬 성전의 봉헌과 관련하여 울려 퍼지는 찬양과도 이어집니다. 성전 봉헌의 자리에서 사용되던 찬양이 지금은 전쟁에서 돌아오는 군사들의 입에서 나옵니다. 그들은 아직 성소를 회복하지 못했지만, 자신들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일을 이미 시작했습니다.
그날 이스라엘에 큰 구원이 이루어졌다.마카베오기 상권 4:25 · 본디새김
본문은 하나님께서 직접 나타나 적군을 무너뜨리셨다고 묘사하지 않습니다. 유다의 전략과 군사들의 행동을 자세히 기록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이룬 결과를 하나님의 자비와 연결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고백한다는 것은 인간이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인간이 한 일을 궁극적인 구원의 근거로 삼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숫자에 의지하는 군대와 언약을 기억하는 군대
첫 번째 패배의 소식은 리시아스에게 전달됩니다. 그는 자신이 바라던 결과도, 왕이 명령한 결과도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고 낙심합니다.
그러나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듬해 리시아스는 보병 육만 명과 기병 오천 명을 모읍니다. 그들은 이두매로 들어와 예루살렘 남쪽의 주요 방어 거점인 벳술에 진을 칩니다. 유다는 군사 만 명을 거느리고 그들과 맞섭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투를 앞둔 유다가 군사들에게 연설하는 대신 직접 기도합니다.
유다는 그 군대가 강한 것을 보고 기도하며 말했다. 「이스라엘의 구원자여, 당신은 찬양받으실 분입니다. 당신은 당신의 종 다윗의 손으로 그 용사의 거센 공격을 꺾으셨고, 블레셋 군대를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드는 사람의 손에 넘기셨습니다.」마카베오기 상권 4:30 · 본디새김
다윗이 강한 블레셋 용사와 싸운 사건은 사무엘상 17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드는 사람이 블레셋 사람들을 공격한 사건은 사무엘상 14:1–15에 나옵니다. 특히 요나단은 사무엘상 14:6에서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으로든 적은 사람으로든 구원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드러냅니다.
과거 이스라엘은 군사력이 압도적인 상대 앞에서도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유다는 이전 세대에 역사하셨던 하나님께 지금도 자기 백성을 위해 행동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시고, 자기 힘을 믿는 그들의 배짱을 녹여 주십시오. 그들이 자기들의 패망에 흔들리게 해 주십시오.」마카베오기 상권 4:32 · 본디새김
적군은 더 많은 병사와 더 강한 기병으로 승리를 얻으려 합니다. 유다는 하나님의 구원을 기억하며 싸움에 나섭니다.
두 군대의 차이는 단순히 병력의 수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신뢰하는가에 있습니다.
물론 이 기도에는 적군이 칼에 쓰러지기를 구하는 전쟁의 언어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생사를 건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의 간구를 기록하고 있으며, 그 폭력을 오늘의 모든 갈등에 그대로 적용할 수 있는 보편적 명령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전투가 벌어지자 리시아스의 군대에서 약 오천 명이 쓰러집니다. 리시아스는 유대 군사들이 용기를 얻었으며 살아도 죽어도 싸울 각오가 되어 있음을 보고 물러납니다. 그러나 그가 안디옥으로 돌아가는 것은 항구적인 평화가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는 더 많은 용병을 모아 다시 돌아오려 합니다.
4장의 군사적 승리는 적의 위협을 완전히 끝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이제 성소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했습니다.
그들이 그 기회를 어떻게 사용하는지가 이 장의 중심을 드러냅니다.
승리한 사람들이 성소에서 울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이 말했다. 「보라, 우리 원수들이 참패했다. 올라가서 성소를 깨끗하게 하고 새로 봉헌하자.」마카베오기 상권 4:36 · 본디새김
그들은 적군이 물러난 뒤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하러 나서지 않습니다. 먼저 성소를 깨끗하게 하러 올라갑니다.
그러나 성소에서 그들이 마주한 것은 기쁨이 아니라 폐허였습니다.
그들은 우리 성소가 황폐해지고 제단이 더럽혀졌으며 문들이 불타 버린 것을 보았다. 뜰에는 숲이나 산처럼 초목이 자랐고, 곁방들은 헐려 있었다.마카베오기 상권 4:38 · 본디새김
원래 그곳은 제사장들이 섬기고, 백성이 제사를 드리며, 절기에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을 예배하던 자리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오랫동안 돌보지 않은 들판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은 옷을 찢고 가슴을 치며 통곡합니다. 머리에 재를 얹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그리고 나팔을 불며 하늘을 향해 외칩니다.
앞에서는 나팔 소리가 전쟁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여기서는 성소의 폐허 앞에서 하늘을 향해 부르짖는 소리와 함께 울립니다.
적을 이겼다고 해서 잃어버린 것이 저절로 회복되지는 않았습니다.
성소를 되찾았다는 사실과 그 성소가 다시 예배의 장소가 되었다는 사실은 서로 다릅니다. 그들은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이제는 폐허를 치우고 더럽혀진 것을 제거하며 무너진 예배의 질서를 다시 세워야 했습니다.
더럽혀진 제단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유다는 성소를 정화하는 동안 성채의 적대 세력이 방해하지 못하도록 군사들을 배치합니다. 그리고 흠이 없고 율법을 사랑하는 제사장들을 뽑습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능력과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맡을 자격은 같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제사장들은 먼저 성소를 깨끗하게 하고 더럽혀진 돌들을 옮깁니다. 그러나 번제단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는 쉽게 결정하지 못합니다. 그 제단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곳이었습니다. 동시에 이방 민족들이 더럽힌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의논한 끝에 제단을 헐기로 합니다. 그러나 돌들을 버려 버리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예언자가 와서 그 돌들을 어떻게 할지 답해 줄 때까지 성전이 있는 산의 적당한 곳에 그 돌들을 두었다.마카베오기 상권 4:46 · 본디새김
전쟁에서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던 사람들이, 제단의 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는 판단을 유보합니다.
유다는 군대를 지휘하고 성소를 회복하도록 이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나님께 속한 모든 문제에 대해 자신이 최종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해 싸우는 열심과 하나님의 뜻을 모두 안다는 확신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들은 아직 모르는 것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마카베오기 상권 9:27은 이스라엘에 예언자가 나타나지 않게 된 시기를 언급하며, 14:41에서는 믿을 만한 예언자가 나타날 때까지 지도자의 직무가 지속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두 구절은 4:46의 기다림이 단순한 행정적 절차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명하게 알려 줄 예언자에 대한 기대와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이야기는 에스라 3:10–13에서 성전의 기초가 다시 놓였을 때 백성이 찬양하는 동시에 일부 사람들이 크게 울었던 장면과도 통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던 자리가 회복되는 일에는 기쁨만 아니라 잃어버린 시간과 상처를 기억하는 슬픔도 함께할 수 있습니다.
무너진 곳에 다시 켜지는 빛
더럽혀진 제단을 헐어 낸 사람들은 새 제단을 쌓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율법에 따라 온전한 돌들을 가져다가 이전 제단과 같은 새 제단을 쌓았다.마카베오기 상권 4:47 · 본디새김
‘온전한(ὁλόκληρος)’, ‘손상되지 않은’이라는 뜻을 지닌 이 표현은 칠십인역 신명기 27:6에서 제단을 쌓는 돌을 가리킬 때도 사용됩니다. 출애굽기 20:25와 신명기 27:5–6은 제단을 쌓을 때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돌을 사용하도록 규정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취향이나 권위에 따라 제단을 만들지 않고, 율법에 규정된 방식으로 예배를 회복하려 합니다.
제단은 새것이어야 합니다. 이미 더럽혀진 제단을 그대로 사용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새로움은 이전의 언약과 율법을 버리는 새로움이 아닙니다.
그들이 추구하는 회복은 과거를 지워 버리는 일이 아니라, 무너진 언약의 질서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일이었습니다.
등잔대가 다시 들어오고, 분향 제단과 상이 제자리를 찾습니다. 향이 피어오르고 등잔대의 등잔들에 불이 붙습니다. 상 위에는 빵이 놓이고 휘장이 펼쳐집니다.
이 장면은 출애굽기 25–30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성막의 기구와 예배의 질서를 마련하신 이야기와 연결됩니다. 등잔대는 단순한 조명이 아니고, 빵을 놓는 상도 일상적인 식탁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이스라엘의 예배를 위해 구별된 성소의 기구들입니다.
치욕의 날이 봉헌의 날이 되다
이제 3년 뒤, 바로 그 기슬르월 스무닷새에 새 제단이 봉헌됩니다.
이방 민족들이 제단을 더럽혔던 때와 같은 시기, 같은 날에 노래와 수금과 비파와 꽹과리 소리 속에서 제단이 새로 봉헌되었다.마카베오기 상권 4:54 · 본디새김
과거에는 그날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이 짓밟힌 날이었습니다. 이제는 다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날이 되었습니다.
고통의 기억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기억이 남아 있기 때문에, 같은 날 이루어진 회복의 의미가 더 선명해집니다.
두 번의 엎드림
제단이 봉헌되자 온 백성이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립니다.
처음에 그들은 황폐해진 성소 앞에서 옷을 찢고 통곡하며 엎드렸습니다. 이제는 새롭게 봉헌된 제단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엎드립니다.
몸의 자세는 같지만 그들이 경험하는 상황은 정반대입니다.
이어서 여드레 동안 봉헌식이 이어집니다. 번제가 드려지고 화목제와 찬양의 제사가 이루어집니다. 성전 앞면은 장식되고 무너진 문들과 곁방들은 회복됩니다.
백성 가운데 몹시 큰 기쁨이 일었고, 이방 민족들에게 당한 치욕이 사라졌다.마카베오기 상권 4:58 · 본디새김
앞에서 적군의 패배가 ‘큰 구원’으로 표현되었다면, 이제 성소의 봉헌은 백성의 ‘몹시 큰 기쁨’으로 묘사됩니다. 전쟁의 승리는 그들의 생존을 지켜 주었습니다. 성소의 회복은 그들이 어떤 백성으로 살아갈 것인지를 다시 확인하게 했습니다.
여드레 동안의 축제는 왜 시작되었는가
유다와 그의 형제들, 그리고 이스라엘 온 회중은 기슬르월 스무닷새부터 여드레 동안 봉헌일들을 해마다 지키기로 결정합니다. 이것이 뒤에 하누카라고 불리는 봉헌절의 시작입니다.
그런데 왜 여드레였을까요?
마카베오기 상권 4장 자체는 그 이유를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본문은 여드레 동안 봉헌식을 거행했고, 그것을 해마다 지키기로 결정했다고 기록합니다.
병행 기록인 마카베오기 하권 10:6–8은 중요한 설명을 덧붙입니다. 그들은 초막절과 같은 방식으로 여드레 동안 기뻐하며 축제를 지켰고, 얼마 전 초막절 기간에 산과 동굴에서 지내야 했던 일을 기억했습니다.
초막절은 광야에서 살았던 이스라엘의 역사를 기억하는 절기입니다(레위기 23:33–43). 마카베오기 하권은 성소 봉헌의 기쁨을 이 절기의 기억과 연결합니다.
훗날 하누카와 관련하여 널리 알려진, 적은 양의 기름이 기적적으로 여드레 동안 지속되었다는 이야기는 마카베오기 상권 4장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장이 강조하는 것은 제단을 정화하고 새롭게 봉헌한 일, 회복된 예배, 그리고 그것을 해마다 기억하기로 한 공동체의 결정입니다.
그 결정은 하나의 역사적 경험을 다음 세대가 함께 기억할 신앙의 전통으로 만듭니다.
조금 더 깊이
셀레우코스 왕조 연호로 148년, 기슬르월 스무닷새였습니다. 일반적으로 기원전 164년에 해당하는 것으로 계산되는 날입니다. 마카베오기 상권 1:54에 따르면 성소에 황폐하게 하는 가증한 것이 세워진 것은 145년 기슬르월 열닷새였습니다. 그리고 1:59에는 이방 제단에서 제사가 이루어지던 스무닷새가 언급됩니다. 훗날 요한복음 10:22는 예루살렘에서 봉헌절을 지키던 때를 언급합니다. 이것은 마카베오기 상권 4장에서 제정된 절기가 신약 시대에도 이어졌음을 보여 주는 직접적인 역사적 연결입니다. 그러나 마카베오기 상권의 봉헌 사건을 곧바로 예수에 관한 예언으로 읽을 근거는 이 장 자체에 없습니다. 먼저 이 이야기가 당시 유대 공동체에 의미했던 예배의 회복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기쁨이 끝난 자리에 다시 세워지는 성벽
4장은 봉헌절을 정하는 장면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지막 두 절에서 사람들은 시온산 둘레에 높은 성벽과 튼튼한 망대를 세웁니다. 군대를 배치하고 벳술을 요새화하여 적의 침입에 대비합니다.
조금 전까지는 제단에서 제사를 드리고, 악기를 연주하고, 온 백성이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다시 성벽과 군대로 돌아갑니다.
왜 이렇게 끝날까요?
그들이 경험한 회복이 아직 완전한 평화를 뜻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리시아스는 전쟁에서 물러났지만 더 많은 병력을 모아 돌아오려 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채에도 적대 세력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소를 봉헌한 백성은 이제 그 성소가 다시 짓밟히지 않도록 보호할 준비를 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했다는 것이 모든 위험이 사라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며 예배를 회복한 사람들도 여전히 자신들이 살아가는 현실을 책임져야 합니다.
성벽이 세워지는 마지막 장면은 앞선 봉헌의 기쁨을 지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기쁨이 얼마나 어렵게 얻어진 것이며, 여전히 보호받아야 하는 것인지를 보여 줍니다.
회복이란 무엇인가
이후 그들이 한 일도 거창한 선언이 아니었습니다. 더럽혀진 돌을 옮기고, 새 돌을 가져오고, 무너진 곳을 고치고, 성전의 기구들을 제자리에 놓았습니다. 회복은 그렇게 구체적인 행동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무너진 성전의 뜰이 다시 정돈되고, 새로운 제단 위에 제물이 바쳐집니다. 향이 피어오르고, 등잔대의 불빛이 성전 안을 밝힙니다. 한때 황폐한 성소를 바라보며 얼굴을 땅에 대고 울었던 백성이 이제 같은 자세로 엎드려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성전 바깥에서는 다시 적을 막기 위한 성벽을 세우는 작업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모든 위협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전 안에는 이미 불이 켜졌습니다.
그들이 되찾은 것은 전쟁에서 이긴 한순간의 영광이 아니라, 다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 삶의 자리였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