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하 풀어 읽기 · 28장

이 장의 자리 · 10–28장 · 둘로 갈라진 나라

형제를 돌려보낸 사람들, 하나님을 떠난 왕

역대하 28장에서 가장 뜻밖의 장면은 전쟁에 승리한 사람들이 포로들에게 옷을 입히고 음식을 먹인 뒤 집으로 돌려보내는 모습입니다.

그러나 같은 장에서 유다 왕 아하스는 정반대의 길을 걷습니다. 나라가 무너지고 백성이 고통받는 동안에도 그는 여호와야훼께 돌아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을 공격한 나라의 신들이 더 강하다고 판단하여 그 신들에게 제사를 드립니다. 마침내 여호와야훼의 집 문들을 닫아 버립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집행하는 데 사용된 사람들도 죄를 지을 수 있고, 하나님께 심판받는 사람들도 돌봄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심판을 경험한 왕이 반드시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은 아닙니다.

읽는 시간 18분소단락 928장 본문 읽기 →

다윗의 자손이 다른 왕들의 길을 걷다

역대하 28:1–4 본문 →

아하스는 스무 살에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열여섯 해 동안 다스렸습니다.

아하스는 왕이 되었을 때 스무 살이었고, 예루살렘에서 열여섯 해 동안 다스렸다. 그는 자기 조상 다윗과 달리 여호와야훼의 눈에 옳은 일을 하지 않았다.역대하 28:1 · 본디새김

아하스는 다윗 왕조의 왕이었습니다. 그는 다윗의 후손이라는 이유로 예루살렘의 왕좌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왕좌를 물려받는 것과 다윗의 길을 걷는 것은 다른 일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걸었으며, 바알들을 위해 금속을 부어 신상들도 만들었다.역대하 28:2 · 본디새김

여기서 ‘이스라엘 왕들의 길’은 북왕국의 모든 왕이 똑같은 행동을 했다는 일반화가 아니라, 역대기에서 반복적으로 비판하는 북왕국 왕들의 우상숭배 전통을 가리킵니다. 바알은 고대 가나안 지역에서 숭배되던 신들의 이름 또는 칭호로 사용되었으며, 비와 폭풍, 풍요와 관련된 신앙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그는 왕으로서 다른 신들의 형상을 제작하고 예배의 대상으로 세웠습니다.

그는 벤힌놈 골짜기에서 제물을 태워 연기를 올렸으며, 여호와야훼가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쫓아낸 민족들의 역겨운 행위를 따라 자기 아들들을 불에 태웠다.역대하 28:3 · 본디새김

자녀를 보호해야 할 아버지가 신에게 제물을 바친다는 명목으로 자녀를 불에 태웠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떠난 예배가 인간의 삶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극단적인 장면입니다.

그는 산당들과 언덕들 위와 온갖 푸른 나무 아래에서 제물을 잡아 바치고 태워 연기를 올렸다.역대하 28:4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신명기 12:2에서 이스라엘이 제거해야 할 다른 민족들의 예배 장소를 묘사할 때 사용한 언어와 연결됩니다. 아하스는 여호와야훼께서 금하신 예배 방식을 왕의 권한으로 유다 안에 퍼뜨렸습니다.

그 결과가 다음 장면에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벤힌놈 골짜기는 예루살렘 남쪽과 서쪽에 걸친 골짜기와 관련됩니다. 훗날 예레미야는 이 골짜기에서 자녀들을 불살라 바치는 행위를 강하게 비판합니다(예레미야 7:31–32). 아하스가 행한 구체적인 의식의 모든 과정이나 그가 이곳에서 섬긴 신의 이름은 역대하 28장에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신명기 12:31은 다른 민족들이 자기들의 신에게 자녀들을 불살라 바치는 행위를 금지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짓밟혀도 되는 것은 아니다

역대하 28:5–8 본문 →

아하스의 통치 아래 유다는 연이어 공격을 받습니다.

그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그를 아람 왕의 손에 넘겼다. 아람 사람들은 그를 치고 그에게서 많은 포로를 잡아 다마스쿠스로 데려갔다. 그는 이스라엘 왕의 손에도 넘겨졌으며, 이스라엘 왕은 그에게 큰 타격을 입혔다.역대하 28:5 · 본디새김

여기서 아하스를 심판하시는 분은 여전히 ‘그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라고 불립니다. 아하스가 다른 신들을 섬긴다고 해서 그가 여호와야훼 앞에서 지고 있는 책임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아하스는 여호와야훼를 떠났지만, 여호와야훼의 다스림 아래 있는 다윗 왕조의 왕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르말랴의 아들 베가는 유다에서 하루 동안 십이만 명을 죽였는데, 모두 용사였다. 그들이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버렸기 때문이다.역대하 28:6 · 본디새김

역대기 기자는 유다가 패배한 이유를 그들이 하나님을 버린 데서 찾습니다. 에브라임의 용사 시그리가 왕의 아들과 왕궁 책임자와 왕 다음가는 사람을 죽입니다. 왕실과 행정 체계의 핵심에 속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자손은 자기 형제들 가운데 여자들과 아들딸 이십만 명을 포로로 잡았다. 또 그들에게서 많은 전리품을 약탈하여 사마리아로 가져갔다.역대하 28:8 · 본디새김

여기서 ‘자기 형제들 가운데’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유다와 북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분열된 왕국이었습니다. 왕도 달랐고, 서로 전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역대기 기자는 이들이 여전히 형제라는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정치적인 적대 관계가 그들 사이에 남아 있는 공동체적 책임까지 없애지는 못합니다.

조금 더 깊이

하루에 십이만 명이 죽었다는 숫자는 엄청난 규모의 참사를 묘사합니다. 이 수치는 역대기가 전하는 기록이며, 당시의 전체 인구와 군사 규모를 독립적으로 확인하여 그 숫자의 역사적 정확성을 판정할 자료는 여기서 확보할 수 없습니다. 본문이 전하려는 것은 유다의 패배가 부분적인 국경 분쟁의 수준을 넘어서는 심각한 재앙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승리한 군대 앞을 가로막은 예언자

역대하 28:9–11 본문 →

사마리아에는 오뎃이라는 여호와야훼의 예언자가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오뎃이라는 여호와야훼의 예언자가 있었다. 그는 사마리아로 들어오는 군대 앞으로 나가 그들에게 말했다. 「보아라. 너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가 유다에게 진노하여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겼다. 그런데 너희는 하늘에 닿을 만큼 격노하여 그들을 죽였다.」역대하 28:9 · 본디새김

이 발언에는 두 종류의 진노가 등장합니다. 하나는 유다를 향한 여호와야훼의 진노입니다. 다른 하나는 유다 사람들을 향한 이스라엘 군대의 격노입니다.

오뎃은 이 둘을 동일하게 취급하지 않습니다.

그는 여호와야훼가 유다를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군대가 격노하여 사람들을 죽인 행동까지 정당하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격노가 ‘하늘에 닿을 만큼’ 컸다고 비판합니다.

하나님이 어떤 민족을 심판하시는 데 다른 민족을 사용하셨다고 해서, 그 민족의 모든 폭력이 하나님의 뜻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승리자는 하나님의 심판에 사용되었다는 이유로 자기 행동을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이제 너희는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들을 억눌러 너희 남종과 여종으로 삼으려 한다. 너희 자신에게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거스른 죄가 있지 않느냐?」역대하 28:10 · 본디새김

이 질문은 북이스라엘의 도덕적 위치를 뒤집습니다.

조금 전까지 그들은 심판의 도구였습니다. 이제 예언자는 그들에게도 하나님 앞에 죄가 있음을 상기시킵니다. 그는 북이스라엘에게도 ‘너희 하나님 여호와야훼’라고 말합니다. 정치적 분열과 종교적 타락이 있었지만, 북이스라엘 역시 여호와야훼 앞에서 책임을 져야 할 백성이었습니다.

「그러니 이제 내 말을 듣고, 너희 형제들 가운데서 잡아 온 포로들을 돌려보내라. 여호와야훼의 타오르는 진노가 너희 위에 있기 때문이다.」역대하 28:11 · 본디새김

이 명령은 포로를 돌려보내는 것이 단순한 선행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것은 죄를 더하지 않기 위해 반드시 취해야 할 행동이었습니다. 군대는 승리했지만 아직 하나님 앞에서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죄를 지었다는 사실이 그들을 돌보지 않아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뎃은 유다의 죄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레위기 25:39–43은 가난 때문에 종이 된 이스라엘 형제를 가혹하게 다루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신명기 24:7은 동족을 납치하여 종으로 삼거나 파는 행위를 엄중하게 다룹니다. 오뎃의 발언은 이러한 율법의 정신과 맞닿아 있습니다. 전쟁에서 이겼다는 이유로 형제를 노예로 삼을 권리가 생기지 않습니다.

전리품이 옷과 음식으로 바뀌다

역대하 28:12–15 본문 →

에브라임 자손의 우두머리 네 사람이 일어나 돌아오는 군대를 막아섭니다.

그들의 이름이 하나하나 기록됩니다. 여호하난의 아들 아사랴, 므실레못의 아들 베레갸, 살룸의 아들 히스기야, 하들래의 아들 아마사입니다.

그들은 돌아오는 사람들에게 말했다. 「포로들을 이리로 데려오지 마라. 너희는 우리에게 여호와야훼를 거스르는 죄책을 지워 우리의 죄와 죄책을 더하려 한다. 우리가 지고 있는 죄책은 크고, 타오르는 진노가 이스라엘 위에 있기 때문이다.」역대하 28:13 · 본디새김

그들은 ‘우리의 죄와 죄책’이라고 말합니다. 군대가 저지른 행동을 자기들과 상관없는 일로 밀어내지 않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이미 큰 죄책을 지고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다음 절에서 군인들은 포로들과 전리품을 고관들과 회중 앞에 내려놓습니다. 전쟁의 성과로 가져온 것을 실제로 포기하는 행동입니다.

이름으로 지명된 사람들이 일어나 포로들을 돌보았다. 그들은 포로들 가운데 벌거벗은 이들 모두에게 전리품에서 가져온 옷을 입혔다. 이렇게 그들에게 옷을 입히고 신을 신기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고 기름을 발라 주었다. 비틀거리는 사람은 모두 나귀에 태워 이끌고, 포로들을 종려나무 성읍 여리고에 있는 그들의 형제들에게 데려다주었다. 그러고는 사마리아로 돌아왔다.역대하 28:15 · 본디새김

이들은 포로들을 단순히 풀어 주는 데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자기 삶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필요한 것을 실제로 마련해 주었습니다.

조금 전까지 전리품은 패배한 사람들에게서 빼앗은 물건이었습니다. 이제 그 물건이 그들을 돌보는 데 사용됩니다.

약탈의 결과가 회복의 수단으로 바뀝니다.

잘못을 중단하는 것과 잘못으로 생긴 피해를 돌보는 것은 구별됩니다.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둘 다 행했습니다.

왜 여리고까지 데려다주었을까?

이들은 포로들을 사마리아 밖으로 내보내는 것으로 책임을 끝내지 않았습니다. 유다 쪽의 형제들이 있는 여리고까지 데려다주었습니다. 그들이 돌아갈 곳에 이를 수 있도록 동행했다는 것입니다.

원문에서 ‘형제(⁨אָח⁩)’를 가리키는 말이 이 장면에 반복됩니다. 8절에서는 포로로 잡힌 사람들이 북이스라엘의 형제들이었고, 11절에서는 그 형제들을 돌려보내라는 명령이 내려졌으며, 15절에서는 그들이 여리고의 형제들에게 돌아갑니다.

처음에는 형제들을 포로로 잡았지만, 마지막에는 형제들에게 돌려보냅니다.

그렇다고 북이스라엘이 앞서 저지른 폭력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죽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았고, 포로들이 겪은 고통도 없었던 일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더 큰 죄를 저지르는 일은 멈추었습니다. 예언자의 말을 듣고 행동을 바꾼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여리고는 요단강 서쪽에 있는 성읍으로, 성경에서는 종려나무 성읍이라고도 불립니다(신명기 34:3). 여리고, 기름, 짐승,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돌보는 행동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떠올리게 합니다(누가복음 10:30–35). 두 본문이 직접적인 인용 관계에 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그러나 적대와 분열의 경계를 넘어 곤경에 처한 사람을 실제로 돌본다는 점에서 주제적으로 닮아 있습니다.

아하스가 구한 도움은 왜 도움이 되지 않았는가

역대하 28:16–21 본문 →

여리고까지 포로들을 데려다준 사람들이 사마리아로 돌아간 뒤, 이야기는 다시 아하스에게 돌아옵니다.

아하스는 아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의 상황은 절박했습니다. 에돔 사람들이 유다를 공격하여 포로를 잡아갔고, 블레셋 사람들도 유다의 평지와 네게브 지역의 성읍들을 점령했습니다.

18절은 블레셋 사람들이 차지한 성읍들을 구체적으로 나열합니다. 벳세메스, 아얄론, 그데롯, 소고, 딤나, 김소와 그에 딸린 마을들이 등장합니다. 이것은 유다가 단순히 일시적인 전투에서 패한 것이 아니라 실제 영토와 생활의 터전을 빼앗기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스라엘 왕 아하스 때문에 여호와야훼가 유다를 낮추어 이런 일이 일어났다. 아하스가 유다를 방종하게 하고 여호와야훼를 크게 배신했기 때문이다.역대하 28:19 · 본디새김

여기서 아하스가 유다를 ‘방종하게 했다’는 표현은 단순히 자신이 죄를 지었다는 말보다 넓은 의미를 가집니다. 아하스의 잘못이 개인적인 신앙 문제에 그치지 않고 유다 전체의 질서를 해쳤다는 평가입니다. 그가 거짓된 예배를 허용하고 확산시키자, 유다 전체가 그 영향 아래 놓였습니다.

아시리아는 실제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

아시리아 왕 딜갓빌네셀이 그에게 와서는 그를 압박했으며, 그에게 힘이 되어 주지 않았다.역대하 28:20 · 본디새김

아하스는 여호와야훼의 집과 왕궁, 고관들에게서 재물을 떼어 내어 아시리아 왕에게 주었지만 도움을 받지 못했습니다. 열왕기는 아하스가 아시리아 왕에게 자신을 구해 달라고 요청했고, 아시리아가 다마스쿠스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아람 왕 르신을 죽였다고 기록합니다.

열왕기는 아시리아의 구체적인 군사 행동을 기록하고, 역대기는 그 결과가 아하스와 유다에 진정한 힘이 되지 못했음을 강조합니다. 아시리아는 유다의 적을 공격했지만, 유다를 압박하는 또 다른 강대국이 되었습니다.

성전과 왕궁의 자원을 희생하면서 얻으려 했던 안전은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이 장에 반복되는 ‘도움’

16절부터 23절까지는 도움이라는 개념이 여러 차례 등장합니다. 아하스는 아시리아에 도움을 요청합니다. 그러나 아시리아 왕은 그에게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재물을 바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나중에는 아람의 신들이 자신을 도울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그 기대 역시 실패합니다. 이 반복을 앞의 포로 석방 장면과 나란히 놓으면 뜻밖의 대조가 드러납니다. 북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은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지 않는 행동을 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돌보았습니다. 반면 아하스는 자신을 위해 도움이 될 것이라고 판단한 강대국과 다른 신들을 계속 찾아다녔습니다.

도움을 구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선택이 지혜로운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의지하고, 그 도움을 얻기 위해 무엇을 희생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조금 더 깊이

아하스는 역사적으로 남유다의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 본문에는 실제로 ‘이스라엘 왕’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필사 과정의 오류로 볼 가능성도 있고, 역대기에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북왕국만이 아니라 여호와야훼의 백성 전체를 가리킬 수 있다는 점과 연결하여 이해할 가능성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본래 의도였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고난은 왜 아하스를 돌이키지 못했는가

역대하 28:22–23 본문 →

이제 역대기 기자는 아하스의 삶을 결정적으로 평가합니다.

곤경에 처했을 때에도 그는 여호와야훼를 더욱 배신했다. 그가 바로 아하스 왕이었다.역대하 28:22 · 본디새김

사람은 고난을 겪으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볼 수 있습니다. 이전의 판단을 의심하고 도움을 구하던 대상을 다시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하스에게서는 반대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므낫세는 훗날 큰 곤경에 처했을 때 자신을 낮추고 여호와야훼께 간구한 왕으로 묘사됩니다(역대하 33:12–13). 그러나 아하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고난은 사람이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지만, 사람은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잘못된 믿음과 선택을 더욱 굳게 붙들 수 있습니다.

그는 자기를 친 다마스쿠스 신들에게 제물을 잡아 바치며 말했다. 「아람 왕들의 신들이 그들을 도우니, 나도 그 신들에게 제물을 잡아 바치겠다. 그러면 그들이 나를 도울 것이다.」 그러나 그 신들은 그와 온 이스라엘을 넘어뜨리는 원인이 되었다.역대하 28:23 · 본디새김

그는 전쟁의 승패를 통해 신의 능력을 판단하고 있습니다. 어떤 나라가 전쟁에서 이겼다는 사실이 곧 그 나라가 섬기는 신이 참된 신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역대기는 이미 5절에서 유다의 패배를 설명했습니다. 유다가 아람과 북이스라엘에 패배한 것은 그 신들이 여호와야훼보다 강해서가 아니라, 여호와야훼가 유다를 그들의 손에 넘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아하스는 자신이 경험한 사건의 의미를 정반대로 이해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을 다른 신들의 우월함에 대한 증거로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에게 유익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상을 따라 예배의 방향을 계속 바꾸었습니다.

그에게 예배는 자신이 도움을 얻기 위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그 신들이 그를 넘어뜨렸다’는 표현을 그 신들이 독립적인 신적 능력을 가지고 아하스를 공격했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역대기 기자의 관점에서 그것은 아하스가 그 신들을 섬긴 행동 자체가 자신과 백성에게 파멸을 가져왔다는 평가입니다.

조금 더 깊이

「그가 바로 아하스 왕이었다.」라는 표현은 아하스가 바로 그런 왕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문장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역대기 기자는 그가 고난 중에도 여호와야훼를 더욱 배신한 사실에 특별히 주목하도록 합니다.

여호와야훼의 집 문을 닫고, 제단을 늘리다

역대하 28:24–25 본문 →

아하스의 종교적 행동은 마지막에 이르러 더욱 극단적으로 변합니다.

아하스는 하나님의 집 기물들을 모았다. 그러고는 그 기물들을 잘라 버렸다. 그는 여호와야훼의 집 문들을 닫고, 자기를 위해 예루살렘 구석구석에 제단들을 만들었다.역대하 28:24 · 본디새김

성전 기물을 잘랐다는 것은 그 기물들이 본래의 예배 목적에 사용될 수 없도록 훼손한 행동을 가리킵니다. 아하스는 다른 신들을 섬기는 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야훼께 드리는 예배의 중심 장소를 폐쇄하는 데까지 나아갔습니다.

이 장면은 바로 앞 장의 요담과 강하게 대비됩니다.

요담은 여호와야훼의 집 윗문을 세웠습니다(27:3). 그러나 그의 아들 아하스는 여호와야훼의 집 문들을 닫았습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통치를 구별하는 구체적인 행동이 성전의 문을 통해 나타납니다.

여호와야훼의 집 문은 닫히지만, 다른 신들을 위한 제단은 늘어납니다.

예루살렘의 여러 곳에 제단이 생기고 유다의 성읍마다 산당이 만들어집니다. 아하스는 종교적 활동 자체를 없애려 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배 장소를 늘렸습니다.

문제는 그 예배가 누구를 향하고 있었는가입니다.

아하스의 시대에는 제단이 부족했던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실함이 무너져 있었습니다. 많은 제단이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하나님을 더 잘 섬긴다는 뜻이 아닙니다. 아하스는 자신과 나라를 도와줄 신들을 찾으며 예배 장소를 늘렸지만, 정작 자기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야훼를 더욱 거슬렀습니다.

왕의 마지막 길과 닫힌 문

역대하 28:26–27 본문 →

아하스의 이야기는 그의 죽음으로 끝납니다.

그의 나머지 행적과 그가 걸어간 모든 길은 처음부터 끝까지 유다와 이스라엘 왕들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역대하 28:26 · 본디새김

여기서 ‘그가 걸어간 모든 길’이라는 표현은 2절의 ‘이스라엘 왕들의 길을 걸었으며’라는 평가를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그는 왕이 되었을 때부터 잘못된 예배의 길을 걸었고, 전쟁의 패배와 외교적 실패, 계속되는 곤경 속에서도 그 길에서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 길의 끝에서 아하스는 죽습니다.

아하스는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었다. 사람들은 그를 예루살렘 성안에 묻었지만, 이스라엘 왕들의 무덤에는 들이지 않았다. 그의 아들 히스기야가 그를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역대하 28:27 · 본디새김

아하스는 여호와야훼의 집 문을 닫았지만, 다음 장은 히스기야가 그 문들을 다시 여는 이야기로 시작됩니다(29:3). 그러므로 역대하 28장의 마지막에 놓인 히스기야라는 이름은 단순한 왕위 계승 기록 이상의 의미를 갖습니다.

그러나 이 장에서는 아직 성전의 문이 닫혀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왜 그가 왕들의 무덤에 묻히지 못했는지 구체적인 절차나 결정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그의 통치를 지속적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러한 매장 기록은 그의 생애를 마무리하는 부정적인 평가와 잘 어울립니다. 여기서도 그는 ‘이스라엘 왕들’의 무덤에 들어가지 못했다고 표현됩니다. 이는 역대기가 다윗 왕조의 왕들을 더 넓은 이스라엘의 역사 안에서 바라보는 언어와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맺음 — 전리품을 내려놓은 손과 성전 문을 닫은 손

역대하 28:1–27 본문 →

사마리아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붙잡고 있던 사람들을 놓아주었습니다. 그 결과 형제들이 돌아갈 길이 열렸습니다. 아하스는 여호와야훼의 집 문을 닫았습니다. 그 결과 백성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던 중심 장소가 폐쇄되었습니다.

왕이 하나님을 배신하던 시대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자기 형제를 돌려보내는 사람들은 있었습니다.

이 장에서 가장 오래 눈앞에 남는 장면은 어쩌면 왕의 폐쇄된 성전 문이 아니라, 여리고로 돌아가는 포로들의 행렬일 것입니다. 전쟁에서 빼앗긴 옷을 다시 입고, 지친 몸을 나귀에 싣고, 자신들을 잡아 왔던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고향 쪽으로 돌아가는 사람들.

그들은 여리고의 형제들에게 도착했고, 그들을 데려다준 사람들은 사마리아로 돌아갔습니다. 역대기 기자는 그들이 어떤 말을 나누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날, 전리품으로 남을 뻔했던 사람들이 다시 형제들에게 돌아갔다는 사실을 남겨 놓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