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8–9장 · 나눔의 준비

선물이 하나님께 돌아가는 길

바울은 고린도후서 9장을 조금 이상한 말로 시작합니다.

성도들을 향한 그 섬김을 두고는 내가 여러분에게 더 쓸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9:1 · 본디새김

그런데 바울은 바로 그 일을 두고 열네 절을 더 씁니다.

더 쓸 필요가 없다고 말하면서 계속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이 이미 헌금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에게 새로운 가르침을 주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시작한 일을 완성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단순히 돈을 모으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이 헌금을 준비하지 못하면 자신이 부끄러워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미리 보내려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헌금이 억지로 뜯어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합니다.

여기에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 긴장이 있습니다.

바울은 공동체의 평판을 걱정하면서도 사람들의 자유로운 결정을 존중하려 합니다. 헌금을 풍성하게 하라고 권하면서도 그 나눔이 누군가의 탐욕을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많이 뿌리면 많이 거둔다고 하면서도 그 풍성함이 자신에게 쌓이는 재산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감사로 이어진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장의 마지막에서 바울은 전혀 다른 선물에 관해 말합니다.

처음에는 고린도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에게 보낼 선물에 관해 이야기했는데, 마지막에는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이 장을 따라 읽으면 바울이 단순히 헌금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사람이 내놓은 선물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고, 그들의 기도와 감사가 되어 하나님께 돌아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헌금은 한 사람의 손을 떠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그다음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읽는 시간 23분소단락 89장 본문 읽기 →

서로를 분발시킨 두 교회, 그리고 아직 지켜지지 않은 약속

고린도후서 9:1–5 본문 →

마케도니아 사람들도 고린도 사람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8장에서 바울은 마케도니아 교회들의 놀라운 너그러움을 고린도 사람들에게 소개했습니다. 그런데 9장에 들어오면 그 관계가 반대로 나타납니다.

여러분의 기꺼운 마음을 내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여러분을 두고 그 마음을 자랑하며, 아가야는 지난해부터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열심이 마케도니아 사람들 대부분을 분발시켰습니다.고린도후서 9:2 · 본디새김

고린도 사람들의 열심도 이미 마케도니아 교회들을 움직였던 것입니다. 바울은 한 교회를 일방적인 모범으로 세우지 않습니다. 서로 다른 교회들의 열심이 서로에게 영향을 줍니다.

아가야는 고린도가 속한 로마의 속주였고, 마케도니아는 그 북쪽의 속주였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고린도 교회의 헌금 계획을 아가야 전체의 준비로 표현합니다. 그가 자랑한 것은 헌금의 액수가 아니라 그들의 기꺼운 마음과 열심이었고, 지난해부터 준비하려 했다는 사실은 이미 다른 지역의 신자들에게 격려가 되었습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일이 어떻게 다른 사람을 움직일 수 있었을까요? 바울은 완성된 결과만이 아니라, 선한 일을 하려는 마음도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실제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그런데 나는 형제들을 보냈습니다. 여러분을 두고 한 우리의 자랑이 이 일에서 헛되게 되지 않게 하려는 것이고, 내가 말한 그대로 여러분이 준비되어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9:3 · 본디새김

바울이 염려하는 것은 그들의 선한 뜻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선한 뜻이 끝내 실행되지 않아, 이미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진 그들의 열심이 공허한 자랑으로 남는 상황입니다.

바울이 말하다가 물러서는 순간

4절에서 바울의 말투가 갑자기 개인적이고 생생해집니다.

혹시라도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나와 함께 가서 여러분이 준비되어 있지 않은 것을 보게 되면, 이 확신 때문에 우리가 — 여러분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 — 부끄러움을 당할까 해서입니다.고린도후서 9:4 · 본디새김

이것은 정말로 고린도 사람들의 부끄러움을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뜻일까요?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습니다. 그는 그들을 직접 부끄럽게 만들지 않으려는 듯 말하면서도, 그들이 부끄러워할 상황을 선명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자신의 명예가 연결되어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는 다른 지역에서 그 교회를 자랑했습니다. 만약 그 자랑이 사실과 달라진다면 자신의 판단도 의심받겠지만, 고린도 교회의 신뢰 역시 손상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긴장은 남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상대방의 평판을 환기하면서도, 어떻게 그 헌금이 자발적인 선물로 남을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요?

선물과 갈취를 가르는 것은 무엇인가

5절에 그 긴장이 직접 표현됩니다.

그래서 나는 형제들에게 여러분에게 먼저 가서 여러분이 앞서 약속한 그 복을 미리 갖추어 두도록 권하는 것이 꼭 필요하다고 여겼습니다. 그것이 억지로 뜯어낸 것이 아니라 복으로 준비되어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9:5 · 본디새김

여기서 바울은 헌금을 뜻밖의 이름으로 부릅니다.

「복」입니다.

그리스어 율로기아(εὐλογία)는 축복이나 좋은 말을 뜻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주는 선물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바울은 이 단어를 5절에서 반복하고, 바로 다음 절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도 사용합니다. 받는 사람의 입장에서 헌금은 단순한 재정적 지원이 아니라 자신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는 복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복의 반대편에 「억지로 뜯어낸 것」을 놓습니다. 여기 사용된 그리스어 플레오넥시아(πλεονεξία)는 탐욕이나 더 많이 가지려는 욕심을 뜻하고, 그래서 이 문장의 해석은 갈립니다.

하나는 헌금이 바울이나 동역자들의 탐욕 때문에 강제로 거두어진 것처럼 보여서는 안 된다는 읽기입니다. 이런 이해에서는 바울이 미리 사람을 보내는 이유가 분명해집니다. 그가 직접 도착한 자리에서 사람들에게 돈을 내도록 압박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린도 사람들의 인색함이나 소유에 대한 집착이 헌금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읽기입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붙들려는 탐욕이 그 선물을 온전한 복이 되지 못하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두 해석 모두 문맥에 근거가 있으며, 오래된 주석 전통에서도 갈립니다. 앞뒤 문맥은 자발적인 나눔과 아낌없이 내놓는 태도를 함께 강조하기 때문에 어느 한 의미만으로 제한하기 어렵습니다.

이 모호함을 그대로 두더라도 바울의 의도는 충분히 드러납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기꺼이 내놓은 돈과, 체면 때문에 억지로 빼앗긴 돈은 같은 금액일지라도 같은 의미를 갖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헌금이 미리 준비되기를 원합니다. 준비하는 시간을 줌으로써, 고린도 사람들이 바울이 도착한 순간의 압박이 아니라 이미 품었던 뜻에 따라 행동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의 「여러분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습니다」는 그리스어 원문에도 끼어들기로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들이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라고 말한 다음, 고린도 사람들까지 거론하지는 않겠다는 표현을 덧붙이고, 이 말은 듣는 사람에게 그들 역시 부끄러움을 피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것은 고대 지중해 사회에서 명예와 수치가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가졌다는 배경과도 어울립니다. 다만 이 표현을 오직 체면을 이용한 심리적 압박으로만 설명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에게는 이미 알려진 공동체의 약속을 지킨다는 실제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씨를 뿌리는 사람은 무엇을 거두는가

고린도후서 9:6–7 본문 →

이렇게 말합니다. 적게 뿌리는 사람은 적게 거둘 것이고, 복으로 뿌리는 사람은 복으로 거둘 것입니다.고린도후서 9:6 · 본디새김

이 구절은 흔히 많이 헌금하면 하나님이 더 많은 물질적 복을 주신다는 뜻으로 읽힙니다.

그러나 바울의 표현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습니다. 첫 번째는 적게 뿌리는 사람인데, 두 번째는 단순히 많이 뿌리는 사람이 아니라 「복으로 뿌리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씨를 뿌리는 양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그 행동의 성격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농부의 입장에서 씨를 뿌리는 일은 지금 자기 손에 있는 곡식을 흙 속에 놓아주는 것입니다. 씨를 그대로 보관한다면 당장은 그것을 가지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씨가 자라서 열매를 맺으려면 뿌려져야 합니다. 바울은 이 익숙한 농사의 원리를 나눔에 적용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거두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8–14절에서 실제로 어떤 결실이 나타나는지를 설명합니다. 그 결실은 선한 일의 증가, 가난한 성도들의 필요가 채워지는 일,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와 영광, 그리고 서로를 향한 기도입니다.

따라서 많이 헌금할수록 개인의 재산이 그만큼 불어난다는 거래의 원리로 이 구절을 읽는 것은 뒤의 설명과 맞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물질적인 공급이 전혀 관련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10절에서 그는 하나님이 씨와 먹을 빵을 공급하신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다만 하나님의 공급은 나누는 사람이 사적인 부를 축적하도록 보장하는 약속과는 다릅니다.

각 사람은 마음에 미리 정한 그대로 내줄 일입니다. 아까워하며 하거나 마지못해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기쁘게 내주는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9:7 · 본디새김

풍성하게 뿌리는 일을 말한 바로 다음에 바울은 각자의 결정을 앞세웁니다. 많이 거둘 수 있다는 희망이 헌금의 동기가 될 수는 있지만, 그 희망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정해진 금액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미리 정한」은 미리 선택하거나 숙고하여 결정했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순간적인 감정에 휩쓸려 돈을 내는 행동이 아니라, 사람이 자신의 마음으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을 말합니다.

그 결정에는 아까워하는 마음도, 마지못해 하는 마음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아까워하며」에 사용된 말은 슬픔이나 괴로움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를 내놓는 일이 계속해서 빼앗기는 듯한 괴로움으로 경험된다면, 바울이 지금 말하는 기쁜 나눔과는 다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기쁘게 내주는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말을 헌금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지 못한다는 조건문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장은 하나님이 어떤 나눔을 기뻐하시는지 설명하는 것이지, 하나님의 사랑을 얻기 위한 금액이나 심리 상태를 규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사람의 손에서 돈을 빼앗는 일이 아니라, 그 사람의 마음이 자유롭게 다른 사람을 향하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마음으로 결정했다고 해도 여전히 두려움은 남습니다.

내가 나누어 주고 나면 나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될까요?

바울은 그 질문을 피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6절의 「복으로」는 원문에서 에프 율로기아이스로, 문자적으로는 복 또는 축복이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풍성하게」나 「너그럽게」라는 의미를 지니는 것은, 문맥상 아낌없이 내놓는 행동을 가리키기 때문입니다. 7절의 「슬픔」은 고린도후서에서 낯설지 않은 말입니다. 바울은 앞서 고린도 교회와의 아픈 관계를 설명하면서 슬픔에 관해 길게 이야기했고, 7:10에서는 하나님 뜻에 따른 슬픔이 회개를 이루어 낸다고 말했습니다. 슬픔 자체가 언제나 나쁜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슬픔에서 나오는 헌금을 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기쁘게 내주는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는 잠언 22:8의 그리스어에 나타나는 문구와 가깝습니다. 해당 표현은 즐겁게 내주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말하며, 바울은 이를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표현으로 사용합니다. 히브리어 본문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어 성경 전통의 표현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신명기 15:10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가난한 형제를 도울 때 마음에 아까워하는 생각을 품지 말고 손을 움켜쥐지 말라는 명령이며, 그 근거에는 여호와야훼의 돌보심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구약의 나눔 전통을 이어받으면서, 선물을 내놓는 행동에는 그 사람의 마음도 함께 있어야 한다고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은 씨와 빵을 함께 주신다

고린도후서 9:8–10 본문 →

하나님은 온갖 은혜를 여러분에게 넘치게 하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모든 일에 언제나 모든 넉넉함을 지녀 모든 선한 일에 넘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9:8 · 본디새김

온갖 은혜, 모든 일, 언제나, 모든 넉넉함, 모든 선한 일. 「모든」이 거의 숨 가쁘게 반복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모든 은혜를 받아 언제나 많은 재산을 소유하게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넉넉함을 지녀 모든 선한 일에 넘치도록」 하신다고 말합니다. 「넉넉함」은 충분함 또는 자족을 뜻하는 말로, 바울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은혜로 선한 일을 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함을 누리는 상태를 이야기합니다.

얼마나 많은 재산을 가졌는가와 얼마나 넉넉한가가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닙니다. 많이 가지고도 늘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고, 적게 가지고도 다른 사람을 도울 여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넉넉함은 단순한 만족감에 머물지 않고 실제적인 선한 일로 이어집니다.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이유는 그들이 계속 소유할 수 있도록 하려는 데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계속 나눌 수 있도록 하려는 데에도 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흩어 주는 사람

(이렇게 적힌 그대로입니다. 「그가 흩어 주었고 가난한 이들에게 내주었다. 그의 의는 영원히 남는다.」고린도후서 9:9 · 본디새김

이것은 시편 112:9의 직접적인 인용입니다. 시편 112편은 여호와야훼를 두려워하고 그분의 계명을 기뻐하는 사람을 묘사합니다. 그는 은혜롭고 자비로우며 의롭고,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신의 것을 나눕니다.

따라서 시편에서 「그가 흩어 주었고」라고 할 때, 그 주어는 하나님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의로운 사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의 것을 흩어 나누는 모습을 성경에서 찾아 보여 줍니다. 「흩어 주었다」는 표현은 이어지는 씨 뿌리는 이미지와도 연결됩니다. 씨를 뿌리는 농부가 씨를 한곳에 쌓아 두지 않듯, 시편의 의로운 사람도 자신에게 있는 것을 움켜쥐기보다 가난한 이들에게 흩어 줍니다.

그런데 시편은 그 사람이 나눈 재산이 영원히 남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의 의는 영원히 남는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의는 단순히 개인의 도덕적 결백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며 다른 사람에게 올바르게 행하는 삶과 연결됩니다.

돈은 그의 손을 떠납니다. 그러나 그가 행한 의로운 일의 가치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시편은 말합니다.

씨 뿌리는 사람과 먹을 빵

씨 뿌리는 이에게 씨를 대 주시고 먹을 빵을 주시는 분이 여러분의 씨를 대 주시고 늘려 주시며, 여러분의 의가 맺는 열매를 자라게 하실 것입니다.)고린도후서 9:10 · 본디새김

이번에는 이사야 55:10의 표현이 떠오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비와 눈이 땅을 적셔 싹이 나게 하고, 씨 뿌리는 사람에게 씨를, 먹는 사람에게 빵을 준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이 이미지를 고린도 사람들의 나눔과 하나님의 공급을 설명하는 데 적용합니다.

하나님은 씨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먹을 빵도 주십니다.

씨는 다시 뿌려야 할 것이고, 빵은 지금 먹어야 할 것입니다. 내일의 수확을 위해서는 씨가 있어야 하지만, 오늘 살아가기 위해서는 먹을 양식이 있어야 합니다. 바울이 이 둘을 함께 언급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모든 것을 무조건 다른 사람에게 내놓아야 한다는 뜻으로 이 구절을 읽지 않게 해 줍니다.

하나님이 자라게 하시는 것은 「여러분의 의가 맺는 열매」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흩어 주는 시편의 의로운 사람의 삶이 이제 고린도 교회의 삶에서도 열매를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농부는 씨를 뿌리지만, 씨 자체를 만들어 내지는 못합니다. 땅과 비와 생장의 조건을 자기 힘으로 통제하지도 못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나눔을 권하면서, 그 선한 행동이 가능하게 되는 궁극적인 근거를 하나님께 둡니다.

나눔의 시작에도 하나님의 공급이 있고, 그 나눔이 맺는 열매에도 하나님의 공급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의 「넉넉함」(αὐτάρκεια)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그리스 철학에서도 사용되던 말이지만, 여기서는 철학자가 외부의 도움 없이 자립하는 이상을 설명하기 위해 등장한 것이 아닙니다. 10절이 떠올리는 이사야 55:10–11의 본래 맥락은, 비와 눈이 땅을 적셔 열매 맺게 하듯 여호와야훼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도 헛되이 돌아오지 않고 그분의 뜻을 이룬다는 설명입니다. 이사야 55장은 포로 생활과 회복의 전망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도록 초대합니다. 바울은 씨와 빵을 공급하는 이미지를 가져오되,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의 효력에 관한 설명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풍성함의 결실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다

고린도후서 9:11–12 본문 →

모든 일에 부유해져서 온갖 너그러움에 이르는 것이며, 그 너그러움이 우리를 통해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를 빚어냅니다.고린도후서 9:11 · 본디새김

「모든 일에 부유해져서」 — 바울은 정말로 헌금하는 사람들에게 경제적 부유함을 약속하고 있는 것일까요?

이 문장을 뒤에서부터 읽어 보면 풍성함의 목적이 분명해집니다. 부유해지는 것은 「온갖 너그러움에 이르는」 것이고, 그 너그러움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를 만들어 냅니다. 풍성함은 자기 자신의 재산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향한 나눔으로 나아가고, 그 나눔을 받은 사람들의 감사가 하나님께 향합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헌금을 마련합니다. 바울과 동역자들이 그것을 전달합니다.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실제적인 도움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이 예배의 섬김이 성도들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 줄 뿐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많은 감사로 넘쳐 나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9:12 · 본디새김

바울은 헌금이 만들어 내는 두 가지 결과를 나란히 놓습니다. 하나는 성도들의 부족함이 채워지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풍성해지는 것입니다.

「예배의 섬김」의 중심 단어 레이투르기아는 공적 봉사나 섬김을 가리킬 수 있고, 유대교와 기독교 문맥에서는 예배와 제의적인 봉사를 나타내는 데에도 사용됩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예배」를 오늘날 교회에서 드리는 정해진 예배 의식으로 한정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여러 교회의 헌금을 준비하고 전달하는 실제적인 봉사를 하나님 앞에서 의미 있는 섬김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돈을 모으고, 신뢰할 만한 사람들을 세우고, 다른 도시로 운반하여 어려운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일은 분명 행정적이고 경제적인 활동입니다. 그런데 그 일의 결과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되기 때문에, 바울은 이를 예배의 의미를 지닌 섬김으로 바라봅니다. 그렇다고 헌금 자체가 구제받는 사람의 삶보다 더 중요한 종교적 의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 이 섬김의 첫 번째 실제적인 결과이고, 그 위에 감사가 더해집니다.

은혜가 넘치고, 선한 일이 넘치고, 너그러움이 생겨나며, 감사가 넘칩니다. 하지만 이 풍성함은 한 사람의 손에 계속 축적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필요를 따라 흘러가고,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향한 감사로 나타납니다.

헌금이 어떻게 복음에 대한 순종의 증거가 되는가

고린도후서 9:13 본문 →

이 섬김이 시험을 거쳐 드러난 것을 통해, 그들은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백한 데 따른 순종과 그들과 모든 사람을 향해 함께 나누는 너그러움을 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9:13 · 본디새김

지금까지 헌금은 자발적인 나눔이었고, 가난한 사람의 부족함을 채우는 섬김이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순종과 연결합니다.

왜 헌금이 복음의 문제입니까? 고린도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백한 사람들이고, 그 고백에는 삶의 방향이 따릅니다. 바울이 8:9에서 제시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위해 부유함을 지키시는 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가난해지신 분이셨습니다. 바울은 그 고백이 그들의 소유를 사용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나기를 기대합니다.

이것은 헌금을 해야 구원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방향은 반대입니다. 그들은 이미 그리스도의 복음을 고백한 사람들이고, 바울은 그 고백이 그들의 공동체적 행동과 일치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시험을 거쳐 드러난 것」은 말로 고백한 믿음이 헌금의 실행을 통해 공동체의 삶에서도 확인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이 너그러움이 「그들과 모든 사람을 향해」 있다고 덧붙입니다. 이 말이 고린도 교회가 당시 실제로 모든 사람에게 헌금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본문에서 확인되는 직접적인 대상은 어려움에 처한 성도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특별한 나눔에서 드러난 너그러움을 더 넓은 공동체적 태도와 연결하고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방 지역의 교회이고, 헌금의 주요 목적지는 예루살렘의 성도들입니다. 로마서 15:25–27에서 바울은 이방 신자들이 예루살렘 성도들을 물질적으로 섬기는 일을, 그들이 이미 유대 신자들의 영적인 것에 참여했다는 사실과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이 나눔은 단순히 넉넉한 지역이 가난한 지역을 돕는 사건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하나로 연결된 공동체들이 서로에게 책임을 지는 사건입니다.

복음은 사람들이 무엇을 믿는가를 변화시킬 뿐 아니라, 자신과 멀리 떨어진 사람을 누구로 여기게 되는지도 변화시킵니다.

이방 지역의 신자들에게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은 단순히 소식을 들은 타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나누어야 할 형제자매입니다.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도리어 기도하게 된다

고린도후서 9:14 본문 →

여기까지 읽으면 바울은 헌금의 결과를 충분히 설명한 것처럼 보입니다. 성도들의 부족함이 채워지고,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이 그들의 행동 속에서 드러납니다.

그런데 바울은 한 가지를 더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분에게 있는 하나님의 뛰어난 은혜 때문에 여러분을 사무치게 그리워하며 여러분을 위해 간구하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9:14 · 본디새김

처음에 고린도 사람들은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성도들은 도움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도움을 받은 사람들이 고린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사무치게 그리워하며」는 단순한 예의상의 감사보다 깊은 정서적인 움직임을 나타냅니다. 이들이 서로 직접 만났는지에 관한 정보는 없습니다. 서로 다른 지역의 신자들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자신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그 나눔을 통해 서로를 향한 마음을 품게 됩니다.

왜 그렇게 그리워합니까? 바울은 그 이유를 「여러분에게 있는 하나님의 뛰어난 은혜」라고 설명합니다. 이들이 감동하는 것은 고린도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그들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났다는 사실입니다.

기도는 돈을 받는 사람이 돈을 준 사람에게 돌려주는 대가가 아닙니다. 바울은 기도를 헌금의 보상으로 정해 놓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기도는 도움을 받은 사람도 단순한 수혜자로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경제적인 자원은 한쪽에서 다른 쪽으로 흘렀습니다. 그런데 감사와 기도는 반대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13절의 「함께 나누는」이 바로 이런 깊이를 지닙니다. 함께 나눈다는 것은 각자가 정확히 같은 것을 주고받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구는 물질을 나누고, 누구는 감사하며, 누구는 기도합니다.

다만 바울은 아직 헌금이 최종적으로 전달되었다고 보고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는 헌금이 완성되어 전달되었을 때 일어날 일을 기대하며 묘사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예루살렘 성도들이 실제로 어떤 기도를 했는지를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고,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무엇을 기대했는가입니다. 그는 헌금의 성공을 목표 금액이 모이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나눔으로 인해 서로 다른 교회들이 서로를 사랑하고, 감사하고, 기도하는 관계가 되기를 기대했습니다.

헌금은 부족한 재산을 채우지만, 은혜는 멀리 떨어진 사람들 사이의 거리까지 좁힙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선물은 무엇인가

고린도후서 9:15 본문 →

바울은 마지막에 갑자기 감사의 말을 터뜨립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로 말미암아 그분께 감사합니다.고린도후서 9:15 · 본디새김

마케도니아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도, 씨 뿌리는 비유도,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는 문제도, 예루살렘의 신자들이 드릴 기도도 모두 뒤로 물러납니다. 이제 남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그 선물은 무엇일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주요한 이해가 있습니다.

그 선물은 예수님 자신인가

첫 번째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예수님과 그분 안에서 주어진 구원으로 이해하는 것입니다. 이 해석은 8:9에서 말한 그리스도의 은혜와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바울은 헌금을 요청하면서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 가난해지셨다는 사실을 제시했으니, 두 장에 걸친 논의가 끝나는 자리에서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인 예수님을 떠올렸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로마서 5:15–17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와 선물을 예수님을 통해 주어진 구원과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이런 읽기에서는 예수님께서 나눔의 본보기이실 뿐 아니라, 그 나눔을 가능하게 하신 하나님의 근원적인 선물이 되십니다.

그 선물은 공동체에 부어진 하나님의 은혜인가

두 번째는 이 선물을 조금 더 넓게 이해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바로 앞에서 말한 것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있는 하나님의 뛰어난 은혜였습니다. 이 흐름을 고려하면 15절의 선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이루시는 풍성한 은혜 전체, 곧 예수님을 통한 구원과 그 결과로 형성된 공동체의 사랑을 분리하지 않는 은혜를 가리킨다고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 해석 모두 가능합니다. 선물은 예수님을 가리킬 수도 있고, 고린도 교회에 주어진 은혜와 유대인·이방인 신자들의 연합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 대상을 명시적으로 밝히지 않으므로, 어느 하나로만 한정해야 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 읽기 모두에서 이 선물은 고린도 교회가 하나님께 드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주신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헌금을 잘해 주어서 감사하다고 끝내지 않습니다. 그들이 좋은 신자가 되었다는 칭찬으로 마무리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조금 더 깊이

15절의 「감사합니다」는 원문에서 카리스(χάρις)라는 단어로 표현됩니다. 이 말은 문맥에 따라 은혜 또는 감사를 뜻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두 장에 걸쳐 반복해 온 은혜의 언어가 마지막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되는 것이며, 이는 단지 말장난이 아니라 논증이 실제로 움직여 온 방향입니다.

씨앗에서 시작된 감사

고린도후서 9:1–15 본문 →

고린도후서 9장에 등장하는 씨앗을 다시 생각해 봅니다.

씨앗은 농부의 손을 떠나 땅에 흩어집니다. 손을 떠나는 순간에는 아무것도 돌아오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리는 결실은 곡식 창고에 가득 쌓이는 재산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함은 다른 사람을 향한 선한 일을 가능하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기꺼이 나누는 행동은 은혜를 얻을 자격을 증명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가 삶에서 맺는 열매입니다. 이 순서가 뒤바뀌면 헌금은 하나님께 무언가를 얻기 위한 거래가 되기 쉽습니다.

가난한 성도들의 부족함이 채워지고,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하며, 멀리 떨어진 고린도 사람들을 사무치게 그리워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렇게 한 사람의 손에서 시작된 나눔이 여러 사람을 지나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됩니다.

바울은 그 모든 일을 바라보다가 마지막에 자신도 감사의 대열에 들어섭니다. 고린도 사람들에게 헌금을 권하기 시작했지만, 사람들의 손을 거쳐 전달될 선물을 이야기하다가, 그 모든 나눔을 가능하게 하신 「말로 다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선물」을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씨앗이 흩어지듯 누군가의 손을 떠난 작은 선물이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채우고, 그 사람의 입에서 감사가 나오게 합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 자신의 입에서도 감사가 나옵니다.

그가 기대하는 풍성한 수확은 바로 이런 모습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