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10–13장 · 바울의 변호
무엇을 무너뜨리고 누구를 세울 것인가
고린도후서 10장은 한 사람의 목소리로 시작됩니다.
앞 장에서 바울은 교회들이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의심하는 사람들과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그는 평소처럼 자신을 가리켜 「우리」라고 말하는 대신, 「나 바울이 몸소」라고 나섭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을 전면에 내세운 사람이 가장 먼저 꺼내는 말은 권위도, 능력도, 심판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온유함과 너그러움입니다.
바울은 곧 요새를 헐어 버리고, 생각을 사로잡고, 불순종을 벌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강한 언어를 사용하기 전에, 자신에게 싸울 권한이 있는지를 설명하기보다 그 권한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해야 하는지를 먼저 밝힙니다.
이것이 10장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본문에는 두 가지 상반된 움직임이 반복됩니다. 하나는 무너뜨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우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거스르는 것들을 무너뜨리겠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권위를 주신 목적은 사람들을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세우는 것이라고 분명히 합니다. 또 하나의 대조는 자신을 드러내는 사람과 예수님께 인정받는 사람 사이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바울 역시 자신의 권위를 자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 역시 반대자들을 판단하고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그의 자랑과 그들의 자랑은 어떻게 다릅니까?
10장은 바로 이 질문에 답합니다.
본문은 세 움직임으로 이어집니다. 1–6절에서는 바울이 어떤 방식으로 싸우며 무엇을 무너뜨리려 하는지 드러납니다. 7–11절에서는 약해 보이는 외모와 강한 편지라는 모순처럼 보이는 문제를 다루면서 사도적 권위의 목적을 밝힙니다. 12–18절에서는 사람들 사이의 비교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일과 예수님의 인정을 기준으로 삼아, 자신을 평가하는 기준 자체를 바꿉니다.
10장부터 바울의 어조가 현저히 날카로워지는 것은 분명합니다. 이 급격한 변화 때문에 고린도후서 10–13장이 원래는 별개의 편지였다고 보고, 바울이 앞서 언급한 고통스러운 편지(2:3–4; 7:8–12)와 연결하려는 견해가 있습니다. 반면 하나의 편지 안에서 관계가 회복된 다수와 여전히 반대하는 사람들을 구분하여 다루기 때문에 어조가 변했다고 이해하는 견해도 있고, 문학적·수사학적 관점에서 고린도후서 전체의 통일성을 옹호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현재의 본문만으로 어느 편지 구성 가설이 역사적 사실인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는 어느 재구성을 전제하기보다, 현재의 편지에서 10장이 실제로 보여 주는 바울의 논증을 따라가겠습니다.
바울은 왜 자신의 온유함을 변호해야 하는가
나 바울이 몸소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너그러움으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나는 얼굴을 마주할 때에는 여러분 가운데서 낮고, 떨어져 있을 때에는 여러분에게 대담하게 나섭니다.고린도후서 10:1 · 본디새김
바울의 말에는 날카로운 반어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두고 고린도에서 나돌던 평가를 받아 적는 듯합니다. 직접 만나면 낮은 태도를 보이면서, 멀리 떨어져 편지를 쓸 때는 대담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지도자에게 상당히 불리한 평가입니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공적 생활에서 훌륭한 연설 능력과 당당한 태도는 지도력과 신뢰성을 보여 주는 중요한 자질이었습니다. 특히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도시에서 말하는 능력은 사회적 위신과 연결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 환경에서 편지는 힘이 있는데 정작 본인을 만나면 인상적이지 않다는 평가는 그의 권위에 대한 공격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평가를 부인하는 대신, 예수님의 온유함과 너그러움을 이야기합니다. 두 단어는 모두 자신에게 힘이 없어서 소극적으로 물러나는 태도와는 다릅니다. 상대방을 함부로 억누르지 않는 온화함과 관용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약하게 보였다는 이유만으로 그 태도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이 따르는 예수님의 성품을 사도적 행동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바울이 언제나 부드럽게만 행동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청하는 것은, 곁에 있을 때에는 그 확신으로 대담하게 나서지 않아도 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육을 따라 걷는다고 여기는 몇몇 사람을 향해서는 그 확신으로 감히 맞설 생각입니다.고린도후서 10:2 · 본디새김
바울이 바라는 것은 권위를 강하게 행사할 기회가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입니다.
이 대목에서 바울은 대상을 구분합니다. 그가 맞서려는 대상은 고린도 교회 전체가 아니라, 바울과 동역자들을 「육을 따라 걷는다」고 여기는 몇몇 사람입니다. 그들이 바울을 정확히 무엇 때문에 그렇게 평가했는지는 이 절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그들이 바울의 사역을 인간적인 기준으로 평가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그 비난에 응답하면서 「육」이라는 말을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합니다. 그는 자신이 육 안에서 살아간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육을 따라 싸우지는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 미묘한 차이가 다음 단락의 출발점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사회에서 말하는 능력이 위신과 연결되었다는 사실만으로 고린도에 있던 특정 반대자의 직업이나 교육 수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온유함」과 「너그러움」은 마태복음 11:29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한 분으로 말씀하신 것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반대자들이 바울을 「육을 따라 걷는다」고 여긴 까닭은 사사로운 욕심이나 세속적인 동기로 행동한다는 의심이었을 수도 있고, 그의 사역 방식이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지 못한다는 판단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추론은 가능하지만, 그들의 주장을 하나의 구체적인 혐의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육 안에서 살지만 육을 따라 싸우지 않는다
우리가 육 안에서 걷고 있기는 하지만 육을 따라 싸우지는 않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0:3 · 본디새김
바울은 한 문장에서 「육」이라는 말을 두 번 사용합니다.
그런데 두 표현은 같지 않습니다. 「육 안에서」와 「육을 따라」입니다. 두 표현의 차이는 전치사에 있습니다.
「육 안에서 걷는다」는 인간으로서의 조건 속에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몸을 지니고 있고, 피로와 질병과 위험을 겪으며,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적인 한계 안에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육을 따라 싸운다」는 것은 인간적인 방식과 기준에 따라 싸운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인간적인 연약함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연약함을 이유로 자신의 사역이 세속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반대자들은 바울이 직접 만나면 약해 보인다는 사실에서 그의 사도적 권위도 약하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인간적인 한계를 지닌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사역을 통해 나타날 수 없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바울이 무너뜨리려는 요새는 무엇인가
우리가 치르는 싸움의 무기는 육의 것이 아니라 요새를 헐어 버리는 데 하나님 앞에서 힘이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헤아림을 헐어 버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거슬러 높이 솟은 모든 것을 헐어 버리며,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고린도후서 10:4–5 · 본디새김
갑자기 편지의 언어가 전쟁터로 바뀝니다.
무기가 등장하고, 요새가 등장하며, 무너뜨림과 사로잡음이 이어집니다. 고대 전쟁에서 높은 성벽과 방어 시설을 갖춘 요새를 정복하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무너뜨리겠다고 명시한 것은 도시나 건물이나 사람의 몸이 아니라, 「헤아림」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거슬러 높이 솟은 모든 것」입니다.
「헤아림」은 추론이나 논증, 계산된 생각을 가리키며,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맞서는 사고와 논증입니다. 바울의 전쟁 비유는 실제적인 무력 투쟁이 아니라 진리와 순종을 둘러싼 갈등을 그리고 있습니다. 요새는 사람의 생각과 주장 속에 세워질 수 있습니다.
여기에는 단순히 잘못된 정보를 믿는 것 이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자신의 판단과 기준을 높여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거부하는 태도도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인간의 이성이나 질문하는 능력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읽을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바울 자신이 이 편지에서 독자들에게 다시 헤아려 보라고 요청하고(10:7, 11), 비교와 판단의 기준이 잘못되었다고 논증합니다(10:12–18). 그가 반대하는 것은 생각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맞서 높아지는 생각입니다.
바울은 몇몇 사람이 자신을 육을 따라 행동한다고 「여기는」 일을 문제 삼은 다음(10:2),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맞서는 「헤아림」을 무너뜨린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사역을 오판하는 사람들의 판단 자체가 논쟁의 중심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논쟁을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문제로 확대합니다. 자신의 권위를 부인하는 일이 심각한 이유는 사도의 체면 때문이 아니라, 그가 전한 예수님의 복음까지 왜곡하거나 거부하는 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본문은 중요한 구별을 요구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의견에 반대한다고 해서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반대자들의 주장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문제와 연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변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근거로 오늘날의 어떤 지도자가 자신의 판단을 곧 하나님의 판단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5절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며」는 자주 독립적으로 사용되어,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감시하고 통제하라는 권면으로 적용되기도 합니다. 그러한 자기 성찰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의미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직접적인 문맥은 개인의 내면에서 떠오르는 잡념을 관리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을 거스르는 주장과 사고가 무너지고 생각이 예수님의 권위 아래 들어오는 모습입니다.
「사로잡다」라는 말은 군사적인 포로의 이미지입니다. 전쟁에서 요새를 점령한 군대는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을 사로잡습니다. 바울은 이 그림으로 하나님께 맞서던 생각이 예수님께 순종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모든 생각을 자기 자신에게 순종하게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순종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에게 사도적 권위가 있다 해도, 그 목적은 사람들을 자신의 사적인 지배 아래 두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주권을 인정하도록 이끄는 것입니다. 그래서 전쟁의 이미지 속에서도 예수님의 온유함이 중요합니다.
불순종을 벌하겠다는 말의 무게
여러분의 순종이 다 채워질 때에 모든 불순종을 벌할 채비를 가지고 있습니다.고린도후서 10:6 · 본디새김
바울은 온유함을 말했지만, 필요한 모든 징계를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이 절은 불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표현에는 두 가지 제한이 드러납니다. 첫째, 그가 말하는 것은 아무나 벌할 수 있는 무제한적인 권한이 아닙니다. 앞서 몇몇 사람을 지목했고, 이제 예수님께 대한 순종과 불순종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둘째, 그는 「여러분의 순종이 다 채워질 때」라는 조건을 제시합니다.
이 조건은 고린도 교회의 대다수가 순종을 회복한 뒤에도 불순종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징계하겠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또는 공동체의 순종이 충분히 확립된 다음 남아 있는 불순종의 문제를 처리하겠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두 해석 모두 가능하지만 본문은 징계의 구체적인 대상과 절차를 상세히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바울이 즉시 강한 조치를 취하는 것보다 공동체의 순종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는 싸울 준비가 되어 있으면서도 고린도 교회 전체를 적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엄격함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순종을 이루기 위해 필요할 때 행사할 수 있는 권위의 한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그 권위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다음 단락에서 선명하게 답합니다.
요새는 무너뜨리지만 교회는 무너뜨리지 않는다
여러분은 눈앞에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자기가 그리스도께 속했다고 확신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이것을 자기를 두고 다시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그가 그리스도께 속한 것처럼 우리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0:7 · 본디새김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의 판단 방식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여러분은 눈앞에 있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에는 문법적인 갈림이 있습니다. 그리스어 동사 블레페테(βλέπω)는 형태상 직설법과 명령법으로 모두 읽힐 수 있습니다. 직설법으로 읽으면 그들이 눈앞에 보이는 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지적이 되고, 명령법으로 읽으면 그들 앞에 있는 분명한 사실을 살펴보라는 촉구가 됩니다. 본디새김은 직설법을 따르지만, 문법적으로 명령형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이 제기하는 질문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임을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적어도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특별한 권위의 근거로 내세우고 있었던 듯합니다. 바울은 그 말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그들의 판단이 일관적인지 묻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왜 바울이 예수님께 속했다는 사실은 부정합니까?
그런데 바울은 단순히 자신도 예수님께 속했다고 말하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권위의 목적을 밝히는 한 문장
우리의 권위를 두고 내가 조금 더 자랑한다 해도 나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이 그 권위를 주신 것은 여러분을 세우려는 것이지 헐어 버리려는 것이 아닙니다.고린도후서 10:8 · 본디새김
이 절은 앞의 전쟁 비유를 다시 읽게 만듭니다.
4–5절에서 바울은 요새와 잘못된 헤아림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맞서 높아진 것을 무너뜨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8절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위가 고린도 사람들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두 대목에는 같은 그리스어 단어가 사용됩니다.
바울은 무너뜨리는 행동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무너뜨리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맞서는 주장과 교만은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와 성도들은 세워져야 합니다. 바울의 권위는 무너뜨릴 것을 무너뜨려 사람들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세우다」라는 말은 건축의 이미지입니다. 앞에서는 요새를 공격하는 전쟁의 장면이었는데, 이제는 집을 세우는 건축의 장면으로 바뀝니다. 잘못된 요새를 그대로 둔 채 교회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요새를 무너뜨리는 데 열중하다가 정작 사람들을 파괴한다면, 그 역시 예수님께서 주신 권위의 목적을 벗어납니다.
이것이 바울이 강하게 말할 수 있으면서도 예수님의 온유함을 근거로 삼는 이유입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자신의 능력의 증거로 삼지 않고, 예수님께서 무엇을 위해 그 권위를 주셨는지를 기준으로 삼습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의 「헐어 버리는 데」와 8절의 「헐어 버리려는 것이 아닙니다」는 같은 그리스어 명사 카타이레시스이고, 4절 끝의 「헐어 버리고」는 같은 어근의 동사입니다. 7절의 반대자들이 실제로 어떤 집단이었는지, 자신들만이 예수님께 속한다고 주장했는지는 10장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후서 13:10에서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권위를 주신 것이 세우기 위한 것이지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다시 밝힙니다. 이 반복을 보면 10:8이 단순한 수사적 변명이 아니라 바울이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이해하는 핵심 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편지는 강하지만 사람은 약하다는 비난
내가 그 편지들로 여러분을 겁주려는 사람처럼 보이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0:9 · 본디새김
이제 바울은 자신의 편지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직접 언급합니다.
「그 편지들은 무겁고 힘이 있다. 그러나 몸으로 와 있는 모습은 약하고 그 말은 업신여김을 받는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0:10 · 본디새김
비난하는 사람들도 바울의 편지가 약하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그 강한 편지를 쓴 사람이 직접 나타났을 때 기대만큼 인상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편지는 저자가 부재한 상태에서 그의 의사를 전달하는 수단이었고, 바울도 직접 참석할 수 없을 때 편지로 가르치고 권하고 책망했습니다. 그러나 편지의 힘과 직접 만났을 때의 태도가 다르면, 사람들은 그 차이를 문제 삼을 수 있었습니다.
「몸으로 와 있는 모습은 약하고」라는 말이 바울의 키가 작았다거나, 외모가 볼품없었다거나, 특정한 질병을 지녔다는 사실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10절은 비판자들의 평가를 전달할 뿐이며, 그들이 신체적인 외양을 비난했는지, 대면할 때의 태도를 문제 삼았는지, 두 가지를 함께 평가했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 말은 업신여김을 받는다」는 표현도 바울이 실제로 말을 잘하지 못했다는 객관적인 판정이 아니라, 그의 말이 어떤 기준에서 낮게 평가되었는지를 살펴야 할 표현입니다.
고린도전서 2:1–5에서 바울은 고린도에 갔을 때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나님의 증언을 전하지 않고, 예수님,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전하기로 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중요하게 여긴 설교의 기준과 고린도의 일부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긴 기준이 달랐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말솜씨가 실제로 어느 정도였는지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무엇이 권위의 증거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부인하는가
그런 사람은 이것을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떨어져서 편지로 말할 때에 우리가 그러하듯, 곁에 있을 때 하는 일로도 그러하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0:11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이 실제로 강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반대자들이 선호하는 방식의 강함을 보여 주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행동의 일관성입니다. 편지에서 밝힌 판단과 권면을 직접 만났을 때에도 책임 있게 실행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말에는 필요하다면 실제로 권위를 행사하겠다는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권위는 고린도 교회를 세우기 위한 권위입니다. 그래서 바울의 온유함과 단호함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는 온유하기 때문에 잘못을 방치하는 사람이 아니며, 단호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함부로 파괴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이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문제는 그러한 평가를 가능하게 한 기준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린도전서 2:1–5에서 바울은 자신의 선포가 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에 근거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진술은 고린도전서 1:18–25와 이어집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구원받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처형당하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기준에서 패배하신 분으로 보이실 수 있었지만, 바울은 바로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드러났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약해 보이는 태도는 곧 사도적 권위가 없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그가 따르는 예수님 자신이 세상의 강함에 관한 기준을 뒤집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재는 사람들
우리는 자기를 내세우는 몇몇 사람과 우리 자신을 감히 같은 반열에 넣거나 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을 기준으로 자기들을 재고 자기들을 자기들과 견주면서 분별하지 못합니다.고린도후서 10:12 · 본디새김
바울의 말투에는 날카로운 풍자가 있습니다.
표면적으로는 겸손한 말처럼 들리지만, 이어지는 문장에서 의도가 드러납니다. 그들이 자신을 평가하는 방식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같은 표현이 반복되어 조금 우스꽝스럽게 들리기까지 하는데, 이 반복이 그들의 판단 방식이 가진 문제를 정확하게 보여 줍니다.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으면 자신이 잘하는 것을 우수함의 기준으로, 자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을 모든 사람의 기준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그다음 자신이 세운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면, 자신은 언제나 유리한 위치에 놓이게 됩니다. 바울이 비판하는 것은 평가의 기준을 자기 자신에게서 가져오는 방식입니다.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일을 맡았는지보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자신이 얼마나 뛰어나 보이는지에 관심을 두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도적 사역이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으로 평가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다음 절에서 전혀 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우리는 잴 수 없는 데까지 자랑하지 않을 것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로 나누어 주신 그 금으로 잰 만큼만 자랑할 것입니다. 그 금은 여러분에게까지 이릅니다.고린도후서 10:13 · 본디새김
「금」은 원래 곧은 막대나 측량의 기준을 가리킬 수 있는 말이며, 여기서는 어떤 일에 정해진 범위나 한계를 나타냅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나누어 주신 사역의 범위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반대자들은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자신을 잽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기준과 범위에 따라 자신을 평가하며, 하나님이 실제로 자신에게 맡기신 일 안에서만 자랑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역설이 생깁니다.
바울은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자신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랑의 행위 자체를 전면적으로 금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근거로 자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자랑하는 것과,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무엇을 이루셨는지 말하는 것은 다릅니다.
바울은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만들어 냈다고 주장하지 않고 예수님께서 주셨다고 말합니다(10:8). 자신의 사역 범위도 자기 능력으로 얻어 낸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누어 주셨다고 말합니다(10:13). 이것이 그의 자랑을 제한하는 기준입니다.
물론 이런 주장은 검증되어야 합니다. 누구나 자신이 하나님께 특별한 사명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주장에 실제적인 근거를 제시합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바로 그 근거입니다.
조금 더 깊이
「금」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카논(κανών)입니다. 후대 기독교에서 이 단어는 성경의 정경이나 신앙의 규범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발전했지만, 이 구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성경 목록의 경계가 아닙니다.
고린도에까지 이른 복음, 그리고 그 너머의 지역
우리가 여러분에게 이르지 못하는 사람인 양 우리 자신을 지나치게 늘이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여러분에게까지 다다랐습니다.고린도후서 10:14 · 본디새김
바울이 자신의 사역 범위가 고린도에까지 이른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가 실제로 예수님의 복음을 가지고 고린도에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도달한 과정 속에 자신이 있었다는 것을 근거로, 자신과 그들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반대자들은 나중에 등장하여 자신들의 능력이나 자격을 내세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격을 보여 주기 위해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며 그들에게 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논증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한 경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남의 수고를 두고 잴 수 없는 데까지 자랑하지 않고,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감에 따라 여러분 가운데서 우리의 금을 따라 넘치도록 커지리라는 소망을 지니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0:15 · 본디새김
사역의 경계를 말하던 바울은 곧바로 고린도 사람들의 믿음이 자라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그들의 믿음이 자라는 것이 왜 바울의 사역 범위가 커지는 일과 연결됩니까? 그의 사명은 고린도 교회를 세우는 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가 성장하고 굳게 서면, 그에게 맡겨진 복음 전파의 일이 더 넓은 지역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은 고린도 사람들을 자신에게 영원히 의존하도록 묶어 두려는 태도와 다릅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를 자신의 영향력을 증명하는 전시물로 삼지 않습니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남의 성과가 아니라 새로운 복음 전파다
그래서 여러분 너머의 지역에 복음을 전하려는 것이지, 남의 금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일을 두고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고린도후서 10:16 · 본디새김
바울은 다른 사람의 수고를 자기 것으로 삼아 자랑하는 대신,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으로 나아가고 싶어 합니다. 10:16은 고린도 너머의 지역이라고만 말할 뿐, 그가 구체적으로 어느 도시나 지역으로 가려 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맡은 영역을 닫힌 울타리로 만들지 않습니다. 경계는 자신의 영향력을 끝없이 확대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일을 빼앗지 못하게 하면서도,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수행하며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도록 방향을 제시합니다.
바울의 사역 범위는 다른 사람을 배제하기 위한 소유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책임의 범위입니다.
그는 자신이 근거 없이 권위를 주장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실제로 수행했고 고린도 사람들이 그 사역의 열매라는 것을 보여 주려 합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최종적인 기준은 아닙니다.
바울은 마지막 두 절에서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모든 근거보다 더 높은 판단의 자리를 제시합니다.
조금 더 깊이
사도행전 18:1–11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고 그곳에 머물렀던 일을 기록합니다. 고린도전서 3:6에서 바울이 자신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말한 것 역시 고린도 교회 형성에 관한 자신의 역할을 설명하는 진술입니다. 로마서 15:20에서도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이 이미 알려진 곳이 아니라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하려고 힘썼다고 말하는데, 이는 10:16의 진술과 주제적으로 직접 연결됩니다.
자랑하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
「자랑하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린도후서 10:17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의 사역 범위를 설명한 뒤, 예레미야 9:23–24의 말씀을 가져옵니다.
예레미야 9장은 유다 백성의 죄와 그로 인해 닥칠 심판을 다루는 문맥에 놓여 있습니다. 그 가운데 여호와야훼께서는 지혜로운 사람이 자신의 지혜를, 강한 사람이 자신의 힘을, 부유한 사람이 자신의 부를 자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랑할 것은 여호와야훼를 알고 깨닫는 것, 곧 그분이 땅에서 인애와 정의와 공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금지하는 것은 지혜나 힘이나 부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자신의 안전과 가치의 궁극적인 근거로 삼는 태도입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압축하여 인용합니다.
지금 바울은 자신을 강한 편지 뒤에 숨어 있는 약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사람들과 논쟁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겉으로 드러나는 능력과 자격을 중요하게 여기는 듯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레미야와 고린도전서에서 이미 제시했던 기준으로 돌아갑니다. 사람의 지혜와 힘이 아니라 주님이 누구이신가가 자랑의 근거입니다.
「주님 안에서 자랑한다」는 말은 단순히 자신의 성공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덧붙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13–16절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벗어나 자랑하지 않고, 남의 수고를 자기 공로로 만들지 않으며, 예수님의 복음을 전한 일에 근거하여 자신의 역할을 설명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태도가 바로 주님 안에서 자랑한다는 말의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최종적인 평가는 누가 내리는가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이 내세우시는 사람이 시험을 거쳐 인정받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0:18 · 본디새김
바울은 이제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지도, 반대자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도 다시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누가 진정으로 인정받은 사람인지를 말합니다. 「시험을 거쳐 인정받은」은 시험이나 검증을 통과하여 인정받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진정한 사도적 권위는 자신을 추천하고 다른 사람들과 비교하여 우월함을 증명하는 데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사람들의 판단이나 검증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주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비판자에게 자신도 그리스도께 속하고 언행이 같음을 헤아리라고 했습니다. 자신의 권위가 어떤 목적으로 주어졌는지 밝혔고, 고린도에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다는 역사적인 근거도 제시했습니다.
그는 근거 없는 자기 확신을 하나님의 인정으로 포장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주장을 검토할 수 있는 이유들을 제시한 뒤, 궁극적인 판정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 평가자이자 피평가자가 되기 쉽지만, 바울은 자신의 사역까지도 예수님의 판단 아래 놓습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의 인용은 예레미야 9:23–24의 히브리어 본문 전체를 그대로 옮긴 직접적인 축자 인용이라기보다, 그 핵심을 간결하게 담아낸 인용입니다. 고린도전서 1:31에서도 바울은 같은 형태의 표현을 사용하는데, 그곳에서 이 말씀은 십자가의 역설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세상이 지혜롭고 강하다고 여기는 기준을 뒤집으셨고, 세상이 어리석게 여기는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셔서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18절의 「시험을 거쳐 인정받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도키모스(δόκιμος)입니다.
고린도에까지 이른 하나의 금
10장의 마지막에 가까워지면서 바울이 꺼낸 도구는 자였습니다. 처음에는 요새를 무너뜨리는 무기가 등장했고, 이제는 어떤 범위가 맡겨졌는지를 확인하는 자가 등장합니다. 바울에게는 싸울 힘도 필요하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한계를 아는 태도도 필요합니다.
그 자와 무기를 쥔 손은 처음부터 예수님께 매여 있습니다. 그가 권면하는 방식은 예수님의 온유함과 너그러움에 근거하고(10:1), 그의 싸움은 생각을 예수님께 순종하게 하려는 것이며(10:5), 그의 권위는 예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10:8). 그가 사명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복음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전달되었기 때문이고(10:14), 그가 자랑할 곳도, 그를 인정하실 분도 주님이십니다(10:17–18). 예수님의 성품과 복음은 바울의 권위를 정당화하는 동시에 제한합니다. 예수님께서 권위를 주셨다는 사실은 사도가 마음대로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권위를 주신 분의 성품과 목적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늘 어떤 지도자가 강한 권위를 주장한다면, 그 권위가 사람들을 실제로 세우는지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맞서는 교만과 거짓을 바로잡으려 합니까, 아니면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는 사람들을 억누르려 합니까? 이 질문은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도구로만 남지 않습니다. 「자기들을 기준으로 자기들을 재고 자기들을 자기들과 견주는」 방식은 우리 자신의 성취와 신앙적인 열심을 평가할 때에도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룬 일을 끝없이 부풀리지 않고, 남의 수고를 자기 공로로 삼지도 않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일을 바라봅니다. 그 금을 따라 그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며 고린도에 도착했고, 고린도 사람들은 그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금의 끝에서 멈춰 서서 성취를 자랑하지 않고, 그들의 믿음이 자라 그 너머의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기를 기대합니다.
「나 바울이 몸소」라며 자신의 이름을 힘주어 밝히며 시작한 바울은,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주님이 내세우시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권위를 변호했지만 그 목적은 사람들을 세우는 데 있다고 했고, 자신이 수행한 일을 자랑했지만 그 범위는 하나님이 맡기신 일로 제한된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그의 자랑이 반대자들의 자랑과 다른 점입니다.
그 금은 이미 고린도에 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시선은 그 너머를 향하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