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10–13장 · 바울의 변호

무엇을 무너뜨리고 누구를 세울 것인가

고린도후서 10장은 한 사람의 목소리로 시작됩니다.

앞 장에서 바울은 교회들이 서로의 필요를 채우는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사도로서 받은 권한을 의심하는 사람들과 정면으로 마주합니다. 그는 평소처럼 자신을 가리켜 「우리」라고 말하는 대신, 「바로 나 바울이」라고 나섭니다.

그런데 이렇게 자신을 앞에 내세운 사람이 가장 먼저 꺼내는 말은 권한도, 능력도, 심판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온유함과 너그러움입니다.

이후 바울은 요새를 무너뜨리고, 생각을 사로잡고, 불순종을 벌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강한 말을 사용하기 전에, 자신에게 싸울 권한이 있는지보다 그 권한을 어떤 방식으로 사용해야 하는지를 먼저 밝힙니다.

이것이 10장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입니다.

본문에는 두 가지 서로 반대되는 움직임이 반복됩니다. 하나는 무너뜨리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세우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맞서는 것들을 무너뜨리겠다고 말하면서도,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권한을 주신 목적은 사람들을 세우는 것이라고 분명히 합니다. 또 하나의 대조는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과 예수님께 인정받는 사람 사이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바울 역시 자신의 권한을 자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의 자랑과 반대자들의 자랑은 어떻게 다릅니까?

10장은 바로 이 질문에 답합니다.

10장부터 바울의 말투는 뚜렷하게 날카로워집니다. 이 변화 때문에 10–13장이 원래 별개의 편지였다고 보는 견해(앞서 언급한 고통스러운 편지, 2:3–4; 7:8–12와 연결하기도 합니다)가 있고, 하나의 편지 안에서 관계가 회복된 다수와 여전히 반대하는 사람들을 구분해 다루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현재의 본문만으로 어느 쪽이 역사적 사실인지 확정할 수는 없으므로, 여기서는 지금의 편지에서 10장이 실제로 보여 주는 바울의 설명을 따라가겠습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810장 본문 읽기 →

바울은 왜 자신의 온유함을 변호해야 하는가

고린도후서 10:1–2 본문 →

바로 나 바울이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너그러움으로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나는 여러분을 직접 대할 때는 낮은 자세를 보이고, 떨어져 있을 때는 여러분에게 대담하게 말하는 사람입니다.고린도후서 10:1 · 두루새김

바울의 말에는 날카로운 반어가 담겨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두고 고린도에서 나돌던 평가를 받아 적는 듯합니다. 직접 만나면 낮은 자세를 보이면서, 멀리 떨어져 편지를 쓸 때는 대담해진다는 것입니다. 고대 지중해 세계의 공적인 자리에서 훌륭한 연설 능력과 당당한 태도는 지도력과 신뢰성을 보여 주는 자질이었기에, 이 평가는 그의 권한에 대한 공격이 될 수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평가를 부인하는 대신 예수님의 온유함과 너그러움을 이야기합니다. 두 단어는 힘이 없어서 소극적으로 물러나는 태도와는 다릅니다. 상대방을 함부로 억누르지 않는 온화함과 너그럽게 받아 주는 태도입니다. 바울은 약하게 보였다는 이유로 그 태도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신이 따르는 예수님의 성품을 사도로서 행동하는 기준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바울이 언제나 부드럽게만 행동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은 아닙니다.

부탁합니다. 내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는 단호하게 나설 필요가 없게 해 주십시오. 우리가 인간적인 기준을 따라 산다고 여기는 몇몇 사람에게는 확신을 가지고 맞설 생각입니다.고린도후서 10:2 · 두루새김

바울이 바라는 것은 권한을 강하게 행사할 기회가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입니다. 또 그가 맞서려는 대상은 고린도 교회 전체가 아니라, 바울과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인간적인 기준을 따라 산다」고 여기는 몇몇 사람입니다.

그들이 바울을 정확히 무엇 때문에 그렇게 평가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들이 바울의 사역을 인간적인 기준으로 평가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그 비난에 응답하면서 원문에서 「육」이라는 말을 새로운 방식으로 사용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 문화의 영향을 받은 도시에서 말하는 능력은 사회적인 인정과 연결될 수 있었지만, 이 사실만으로 고린도에 있던 특정 반대자의 직업이나 교육 수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예수님의 온유함을 근거로 삼는 것은 마태복음 11:29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온유하고 마음이 겸손한 분으로 말씀하신 것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2절의 반대자들은 바울이 개인적인 욕심이나 세상적인 동기로 행동한다고 의심했을 수도 있고, 그가 일하는 방식이 하나님의 능력을 드러내지 못한다고 판단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추론은 가능하지만, 그들의 주장을 하나의 구체적인 혐의로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육 안에서 살지만 육을 따라 싸우지 않는다

고린도후서 10:3–6 본문 →

우리가 몸을 지닌 사람으로 살지만, 인간적인 방식으로 싸우지는 않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0:3 · 두루새김

바울은 원문에서 한 문장 안에 「육」(σάρξ)이라는 말을 두 번 사용합니다.

그런데 두 표현은 같지 않습니다.

원문의 「육 안에서」와 「육을 따라」를 두루새김은 「몸을 지닌 사람으로」와 「인간적인 방식으로」로 풀어 옮겼습니다. 앞의 것은 피로와 질병과 위험을 겪으며 인간적인 한계 안에서 살아간다는 뜻이고, 뒤의 것은 인간적인 방식과 기준에 따라 싸운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연약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 연약함을 이유로 자신의 사역이 세상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고 판단하는 것은 거부합니다.

반대자들은 바울이 직접 만나면 약해 보인다는 사실에서 그의 권한도 약하다고 판단한 듯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도 인간적인 한계를 지닙니다. 그 사실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의 사역을 통해 나타날 수 없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바울이 무너뜨리려는 요새는 무엇인가

우리가 싸울 때 쓰는 무기는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요새를 무너뜨리는 무기입니다. 우리는 주장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맞서 높이 솟은 모든 것을 무너뜨립니다. 또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합니다.고린도후서 10:4–5 · 두루새김

갑자기 편지의 말이 전쟁터를 그려 냅니다.

무기와 요새가 등장하고, 무너뜨림과 사로잡음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바울이 무너뜨리겠다고 밝힌 것은 도시나 건물이나 사람의 몸이 아니라, 「주장」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맞서 높이 솟은 모든 것」입니다. 「주장」은 추론이나 논증, 계산된 생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바울의 전쟁 비유는 무력을 사용하는 싸움이 아니라 진리와 순종을 둘러싼 갈등을 그리고 있습니다.

요새는 사람의 생각과 주장 속에 세워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인간의 이성이나 질문하는 능력 자체를 부정하는 것입니까? 그렇게 읽을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바울 자신이 이 편지에서 독자들에게 다시 생각해 보라고 요청하고(10:7, 11), 비교와 판단의 기준이 잘못되었다고 논증합니다(10:12–18). 그가 반대하는 것은 생각하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맞서 높아지는 생각입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한 비난을 예수님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의 문제로 넓힙니다. 자신의 권한을 부인하는 일이 그가 전한 예수님의 복음까지 왜곡하거나 거부하는 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신의 의견에 반대한다고 해서 곧 하나님께 맞서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반대자들의 주장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문제와 연결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복음을 전하는 사도로서 맡겨진 사명을 변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을 근거로 오늘날의 어떤 지도자가 자신의 판단을 곧 하나님의 판단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생각을 사로잡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5절 끝의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합니다」는 자주 따로 사용되어, 마음속에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감시하고 통제하라는 권면으로 적용되기도 합니다. 그러한 자기 성찰도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이 구절의 직접적인 문맥은 잡념을 관리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맞서는 주장이 무너지고, 그 결과 생각이 예수님의 권위 아래 들어오는 사도의 사역입니다.

「사로잡아」라는 말은 요새를 점령한 군대가 포로를 붙잡는 모습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모든 생각을 자기 자신에게 순종하게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 순종하게 한다고 말합니다.

바울에게 사도로서 받은 권한이 있다 해도, 그 목적은 사람들을 마음대로 지배하는 데 있지 않고 예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인정하도록 이끄는 데 있습니다. 그래서 전쟁의 모습 속에서도 예수님의 온유함이 중요합니다.

불순종을 벌하겠다는 말의 무게

우리는 여러분의 순종이 온전해질 때 모든 불순종을 벌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고린도후서 10:6 · 두루새김

바울은 온유함을 말했지만, 필요한 모든 징계를 포기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표현에는 두 가지 제한이 있습니다. 첫째, 아무나 벌할 수 있는 무제한적인 권한이 아니라 예수님께 대한 순종과 불순종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둘째, 「여러분의 순종이 온전해질 때」라는 조건이 붙어 있습니다.

이 조건은 고린도 교회의 대다수가 순종을 회복한 뒤에도 불순종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징계하겠다는 뜻일 수도, 공동체의 순종이 충분히 자리 잡은 다음 남아 있는 불순종의 문제를 처리하겠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두 해석 모두 가능하지만 본문은 징계의 구체적인 대상과 절차를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바울이 즉시 강한 조치를 취하기보다 공동체의 순종이 먼저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고린도 교회 전체를 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그 권한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다음 단락에서 분명하게 답합니다.

조금 더 깊이

2절에서 몇몇 사람이 바울을 인간적인 기준을 따라 산다고 「여기는」 일과, 4절에서 무너뜨리는 「주장」은 원문에서 같은 어근으로 연결됩니다. 바울의 사역을 잘못 평가하는 사람들의 판단 자체가 논쟁의 중심에 들어온 것입니다. 그러나 4–5절을 오직 바울 개인에 대한 비난을 반박하는 말로 좁혀서도 안 됩니다. 바울은 그 논쟁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문제로 넓히고 있기 때문입니다.

요새는 무너뜨리지만 교회는 무너뜨리지 않는다

고린도후서 10:7–8 본문 →

눈앞의 사실을 보십시오. 자기가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라고 확신하는 사람은 이 점도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그 사람처럼 우리도 그리스도께 속해 있습니다.고린도후서 10:7 · 두루새김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의 판단 방식으로 다시 돌아옵니다.

첫 말 「눈앞의 사실을 보십시오」는 그들이 눈앞에 보이는 것에 의존하고 있다는 지적으로도, 그들 앞에 있는 분명한 사실을 살펴보라는 촉구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이 제기하는 질문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 속한 사람임을 판단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적어도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예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특별한 권한의 근거로 내세운 듯합니다. 바울은 그 말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그들의 판단이 일관적인지 묻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왜 바울이 예수님께 속했다는 사실은 부정합니까?

권위의 목적을 밝히는 한 문장

사실 내가 우리의 권한을 조금 더 자랑하더라도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우기 위해 그 권한을 주셨습니다.고린도후서 10:8 · 두루새김

이 절은 앞의 전쟁 비유를 다시 읽게 만듭니다.

4–5절에서 바울은 요새와 잘못된 주장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맞서 높아진 것을 무너뜨린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8절에서는 자신의 권한이 고린도 사람들을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4절에서 요새를 「무너뜨리는」 일과 8절의 「무너뜨리기」에 해당하는 원문은 모두 카타이레시스(καθαίρεσις)입니다.

바울은 무너뜨리는 행동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무너뜨리는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맞서는 주장과 교만은 무너뜨려야 합니다. 그러나 교회와 성도들은 세워져야 합니다. 「세우기」라는 말은 건축의 모습이어서, 요새를 공격하는 전쟁의 장면이 이제 집을 세우는 장면으로 바뀝니다.

잘못된 요새를 그대로 둔 채 교회를 세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요새를 무너뜨리는 데 열중하다가 정작 사람들을 파괴한다면, 그 역시 예수님께서 주신 권한의 목적을 벗어납니다. 바울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는 것을 자신의 능력의 증거로 삼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 13:10에서도 바울은 권한이 세우기 위한 것이지 무너뜨리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다시 밝힙니다. 10:8이 둘러대는 변명이 아니라 그가 사도로서 받은 권한을 이해하는 핵심 원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7절의 「보십시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동사는 형태상 직설법과 명령법으로 모두 읽힐 수 있습니다. 직설법으로 읽으면 「여러분은 눈앞에 보이는 것만 봅니다」라는 지적이 되고, 명령법으로 읽으면 「눈앞의 사실을 보십시오」라는 촉구가 됩니다. 두루새김은 명령법을 따라 옮겼지만, 문법적으로 직설법을 배제할 수는 없습니다. 또 이 반대자들이 실제로 어떤 집단이었는지, 자신들만이 예수님께 속한다고 주장했는지는 10장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4절 끝의 「무너뜨리고」도 카타이레시스와 같은 어근의 동사입니다.

편지는 강하지만 사람은 약하다는 비난

고린도후서 10:9–11 본문 →

바울은 「편지로 여러분을 겁주려는 것처럼 보이고 싶지 않」다고 말한 뒤, 자신의 편지가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지 직접 언급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의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다. 하지만 직접 만나 보면 그는 약하고 말도 보잘것없다.」고린도후서 10:10 · 두루새김

이 비난은 바울의 편지 자체가 약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편지는 무게가 있고 힘이 있다고 인정합니다. 문제는 그 강한 편지를 쓴 사람이 직접 나타났을 때 기대만큼 인상적이지 않다는 것입니다.

고대 세계에서 편지는 글쓴이가 없는 자리에서 그의 뜻을 전달하는 수단이었습니다. 편지의 힘과 직접 만남에서 드러나는 태도가 다르면, 사람들은 그 차이를 문제 삼을 수 있었습니다. 바울의 반대자들은 바로 그 점을 공격한 듯합니다.

다만 「직접 만나 보면 그는 약하고」라는 말이 바울의 키가 작았다거나, 외모가 볼품없었다거나, 특정한 질병을 지녔다는 사실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10절은 비판자들의 평가를 전달할 뿐이며, 그들이 겉모습을 비난했는지 태도를 문제 삼았는지는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말도 보잘것없다」도 그의 말이 어떤 기준에서 낮게 평가되었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2:1–5에서 바울은 고린도에 갔을 때 뛰어난 말이나 지혜가 아니라 예수님,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을 전하기로 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중요하게 여긴 설교의 기준과 고린도의 일부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긴 기준이 달랐을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말솜씨가 실제로 어느 정도였는지에 관한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무엇이 권위의 증거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부인하는가

그런 사람은 이 점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떨어져 있을 때 편지로 말하는 그대로, 함께 있을 때에도 행동합니다.고린도후서 10:11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이 실제로 강한 인상을 주는 사람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반대자들이 좋아하는 방식의 강함을 보여 주겠다고 약속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편지에서 말한 것을 직접 만났을 때에도 책임 있게 실행하겠다는 행동의 일관성입니다.

이 말에는 필요하다면 실제로 권한을 행사하겠다는 경고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 권한은 고린도 교회를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 바울은 온유하기 때문에 잘못을 방치하는 사람이 아니며, 단호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함부로 파괴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이제 바울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문제는 편지가 강한가, 직접 만나 보면 약한가 하는 평가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러한 평가를 가능하게 한 기준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재는 사람들

고린도후서 10:12–13 본문 →

우리는 자신을 내세우는 몇몇 사람과 감히 같은 무리에 끼거나 우리 자신을 그들과 비교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끼리 서로를 기준으로 삼아 자신을 재고 비교하니, 바르게 판단하지 못합니다.고린도후서 10:12 · 두루새김

바울의 말투에는 날카로운 풍자가 있습니다.

감히 비교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은 겉으로는 겸손하게 들리지만, 이어지는 문장은 그들이 자신을 평가하는 방식 자체가 잘못되었다고 말합니다. 원문에서는 자기들을 기준으로 자기들을 재고, 자기들을 자기들과 비교한다는 표현이 반복되어 조금 우스꽝스럽게 들리기까지 합니다.

자기 자신을 기준으로 삼으면 자신이 잘하는 것을 뛰어남의 기준으로 만들고, 그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평가하게 됩니다. 그러면 자신은 언제나 유리한 위치에 놓입니다.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일을 맡았는지보다, 다른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얼마나 뛰어나 보이는지에 관심을 두기 쉽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음 절에서 전혀 다른 기준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계를 넘어 자랑하지 않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의 범위 안에서만 자랑하겠습니다. 그 범위는 여러분에게까지 이릅니다.고린도후서 10:13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자로 재고 정해진 범위를 확인하는 이미지가 이어집니다. 「범위」로 옮긴 그리스어 카논(κανών)은 원래 곧은 막대나 길이를 재는 기준을 가리킬 수 있는 말입니다. 후대 기독교에서 이 단어는 성경의 정경을 가리키는 용어로도 발전했지만,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것은 성경 목록의 경계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기신 일의 범위입니다.

반대자들은 자기들끼리 서로를 기준으로 삼아 자신을 잽니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기준과 범위에 따라 자신을 평가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역설이 생깁니다.

바울은 자신을 내세우는 사람들을 비판하면서, 자신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랑하는 일 자체를 모두 금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무엇을 근거로 자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권한을 예수님께서 주셨다고 말하고(10:8), 자신에게 맡겨진 일의 범위도 하나님이 맡기셨다고 말합니다(10:13). 자신의 공로를 부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설명하기 위해 자랑합니다. 이것이 그의 자랑을 제한하는 기준입니다.

물론 누구나 자신이 하나님께 특별한 사명을 받았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바울 역시 그것을 알기에 자신의 주장에 실제적인 근거를 제시합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바로 그 근거입니다.

고린도에까지 이른 복음, 그리고 그 너머의 지역

고린도후서 10:14–16 본문 →

우리는 여러분에게 가 본 적도 없는 사람처럼 우리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며 여러분에게까지 갔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0:14 · 두루새김

바울이 실제로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며 고린도에 갔기 때문에, 그의 범위는 고린도에까지 이릅니다. 사도행전 18:1–11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고 머물렀던 일을 기록하고, 고린도전서 3:6에서 바울은 자신은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는 자격을 보여 주기 위해 갑자기 나타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며 그들에게 왔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설명은 자신의 영역을 지키기 위한 경쟁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남이 수고한 일을 가지고 범위를 넘어 자랑하지 않습니다. 다만 여러분의 믿음이 자라감에 따라, 우리에게 맡겨진 범위 안에서 우리가 여러분 가운데서 하는 일이 더욱 커지기를 바랍니다.고린도후서 10:15 · 두루새김

바울은 다른 사람이 이미 이룬 일을 자신의 성과로 내세우지 않겠다고 하면서, 곧바로 고린도 사람들의 믿음이 자라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왜 그들의 믿음이 자라는 것이 바울이 하는 일이 커지는 것과 연결됩니까? 고린도 교회가 굳게 서면, 자신에게 맡겨진 복음 전파의 일이 더 넓은 지역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고린도 사람들을 자신에게 영원히 의존하도록 묶어 두려는 태도와 다릅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를 자신의 영향력을 증명하는 전시물로 삼지 않습니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남의 성과가 아니라 새로운 복음 전파다

그렇게 해서 여러분이 사는 곳 너머의 지역에도 복음을 전하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맡겨진 범위 안에서 이미 이루어진 일로 자랑하려는 것이 아닙니다.고린도후서 10:16 · 두루새김

바울은 다른 사람의 수고를 자기 것으로 삼기보다, 아직 복음이 전해지지 않은 지역으로 나아가고 싶어 합니다. 로마서 15:20에서도 그는 예수님의 이름이 아직 알려지지 않은 곳에 복음을 전하려고 힘썼다고 말합니다. 다만 여기서는 「여러분이 사는 곳 너머의 지역」이라고만 할 뿐, 구체적인 도시나 지역을 밝히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방향입니다.

경계는 자신의 영향력을 넓히기 위해 다른 사람의 일을 빼앗지 못하게 하면서, 동시에 맡겨진 일을 성실하게 하며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도록 방향을 제시합니다. 바울에게 맡겨진 일의 범위는 다른 사람을 밀어내기 위한 소유권이 아니라, 하나님이 맡기신 책임의 범위입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최종적인 기준은 아닙니다.

바울은 마지막 두 절에서 자신이 내세울 수 있는 모든 근거보다 더 높은 판단의 자리를 제시합니다.

자랑하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

고린도후서 10:17–18 본문 →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랑하는 사람은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고린도후서 10:17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에게 맡겨진 일의 범위를 설명한 뒤, 예레미야 9:23–24의 말씀을 가져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께서는 지혜로운 사람이 지혜를, 강한 사람이 힘을, 부유한 사람이 재산을 자랑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자랑할 것은 하나님을 알고 깨닫는 것, 곧 그분이 땅에서 한결같은 사랑과 정의와 올바름을 행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예레미야가 금지하는 것은 지혜나 힘이나 재산 자체가 아니라, 그것들을 자신의 안전과 가치를 결정하는 마지막 근거로 삼는 태도입니다.

고린도전서 1:31에서 바울은 같은 표현을 십자가의 역설과 연결했습니다. 세상이 어리석게 여기는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나타났고,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을 강한 편지 뒤에 숨어 있는 약한 사람으로 평가하는 사람들 앞에서 같은 기준으로 돌아갑니다. 사람의 지혜와 힘이 아니라 주님이 누구이신가가 자랑의 근거입니다.

「주님 안에서 자랑하라」는 말은 자신의 성공을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덧붙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벗어나 자랑하지 않고, 남의 수고를 자기 공로로 만들지 않으며, 복음을 전한 일에 근거하여 자신의 역할을 설명하는 것, 곧 13–16절의 태도가 그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자랑의 중심이 자신에게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최종적인 평가는 누가 내리는가

참으로 인정받는 사람은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세우시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0:18 · 두루새김

바울은 이제 자신이 얼마나 훌륭한지도, 반대자들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도 다시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누가 참으로 인정받는 사람인지를 말합니다. 「참으로 인정받는」은 시험이나 검증을 통과하여 인정받은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며, 그 기준은 주님의 인정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사람들의 판단이나 검증은 아무 의미가 없다는 주장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자신도 그리스도께 속하고 말과 행동이 같다는 점, 권한이 주어진 목적, 고린도에 복음을 전했다는 역사적인 근거를 제시했습니다. 그는 근거 없는 자기 확신을 하나님의 인정으로 포장하지 않고, 자신의 주장을 살펴볼 이유들을 내놓은 뒤 마지막 판정이 자기 자신에게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조금 더 깊이

예레미야 9장은 유다 백성의 죄와 그로 인해 닥칠 심판을 다루는 흐름 속에 놓여 있습니다. 바울의 인용은 예레미야 9:23–24의 히브리어 본문을 낱말 하나하나 그대로 옮긴 것이라기보다 그 핵심을 짧게 담아낸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18–25에서 바울은 십자가의 말씀이 멸망하는 사람들에게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구원받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처형당하신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기준에서 패배하신 분으로 보이실 수 있었지만, 바로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약해 보이는 태도는 곧 사도로서 권위가 없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고린도에까지 이른 하나의 금

고린도후서 10:1–18 본문 →

바울은 이 장에서 원문에 담긴 자의 이미지를 꺼냈습니다. 처음에는 요새를 무너뜨리는 무기가 등장했고, 이제는 어떤 범위가 맡겨졌는지를 확인하는 자가 등장합니다. 바울에게는 싸울 힘도 필요하지만, 자신에게 맡겨진 한계를 아는 태도도 필요합니다.

그 기준은 처음부터 끝까지 예수님이십니다. 바울이 권하는 방식은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너그러움에 근거하고(10:1), 싸움의 목적은 생각을 그리스도께 순종하게 하는 것이며(10:5), 권한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고(10:8), 자랑할 곳도 주님 안에서뿐입니다(10:17–18). 예수님께서 권한을 주셨다는 사실은 사도가 마음대로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다는 뜻이 아니라, 그 권한을 주신 분의 성품과 목적, 곧 교회를 세우는 일에 맞게 행동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의 자랑이 반대자들의 자랑과 다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이 비판하는 「자기들끼리 서로를 기준으로 삼아 자신을 재고 비교」하는 방식은 종교적인 지도자에게만 나타나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일을 했는가가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제대로 했는가를 묻는 바울의 기준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자신의 가치를 확인하려는 우리에게도 끝없는 경쟁에서 벗어날 길을 보여 줍니다.

그 범위는 고린도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며 그곳에 도착했고, 고린도 사람들은 그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범위의 끝에서 멈춰 서서 자신의 성취를 자랑하지 않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의 믿음이 자라기를 바라고, 그들이 사는 곳 너머의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기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참으로 인정받는 사람은 자기를 내세우는 사람이 아니라, 주님께서 내세우시는 사람」이라며 자기 자신을 평가하는 일을 주님께 맡깁니다.

자신의 이름을 힘주어 밝히며 시작한 바울은, 마지막에 자신의 이름이 아니라 주님의 인정을 이야기합니다.

그 범위는 이미 고린도에 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의 시선은 그 너머를 향하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