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10–13장 · 바울의 변호
나의 약함을 자랑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은 한 사도가 자신의 자격을 증명하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다른 사도들보다 못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돌에 맞고, 바다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일들을 숨 가쁘게 나열합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바울은 자신의 특별한 헌신을 증명하여 고린도 사람들의 존경을 되찾으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이야기가 끝나는 자리에서 그는 뜻밖의 사건을 꺼냅니다.
「나는 큰 바구니에 담긴 채 성벽의 창문을 통해 아래로 내려져, 그 관리의 손에서 벗어났습니다」(33절). 그는 성벽을 무너뜨린 영웅이 아닙니다. 성문을 당당하게 통과한 승리자도 아닙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큰 바구니에 넣어 성벽 아래로 내려 주어야 했던 사람입니다.
왜 바울은 자신의 사도로서의 권위를 변호하는 이야기의 끝에 이런 장면을 놓았을까요?
바울은 자신이 뛰어난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듯 말하지만, 그가 내놓는 증거들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위대함의 기준을 계속 뒤집습니다. 높은 신분 대신 낮아진 모습을 이야기하고, 넉넉한 보수 대신 아무 대가도 받지 않은 일을 자랑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지배한 경험 대신 자신이 당한 폭력과 고난을 나열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모든 고난보다 자신을 더 무겁게 짓누르는 것을 밝힙니다. 교회들을 향한 걱정입니다.
이 장을 관통하는 질문은 단순히 누가 참된 사도인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의 위대함은 무엇으로 드러납니까?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자랑의 형식을 잠시 빌려 옵니다. 그러나 그 형식 안에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결국 그 형식 자체가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지를 드러냅니다.
바울이 질투하는 이유 — 고린도 교회는 누구에게 속하는가
자랑이 아니라 질투로 시작하다
내가 조금 어리석은 말을 하더라도 여러분이 참아 주셨으면 합니다. 아니, 사실 여러분은 나를 참아 주고 있습니다.고린도후서 11:1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이 지금부터 하려는 말을 「어리석은 말」이라고 부릅니다. 그는 곧 자신의 업적과 자격을 늘어놓을 것이지만, 그런 자기 자랑이 그리스도의 사도에게 어울리는 말하기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일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인정합니다. 그런데 왜 그 일을 굳이 해야 합니까?
내가 여러분을 두고 하나님의 질투로 질투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과 한 남편이신 그리스도 사이에 결혼 약속을 맺어 주었습니다. 여러분을 순결한 처녀로 그리스도 앞에 세우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1:2 · 두루새김
바울이 자신의 평판을 지키기 위해서만 싸우고 있었다면 이 비유는 어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신랑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신랑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와 그리스도 사이에 결혼 약속을 맺어 준 사람으로 자신을 묘사합니다. 그의 역할은 고린도 사람들이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온전히 속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당시의 결혼 약속은 사적인 약속이 아니라 결혼을 향한 구속력 있는 관계로 이해되었고, 그 안에서 상대방을 한결같이 대하는 태도가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바울은 이 이미지를 통해 고린도 교회가 이미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었지만, 그 관계를 한결같이 지키는 마음이 위협받고 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질투」라는 표현도 그렇습니다. 질투는 흔히 다른 사람을 독점하고 통제하려는 욕망으로 나타나지만, 바울이 바라는 것은 고린도 사람들이 바울이라는 지도자에게 더욱 강하게 얽매이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을 자기 사람으로 붙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로 지키려 합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하와가 등장하는가
그러나 뱀이 교묘한 속임수로 하와를 속인 것처럼, 여러분의 생각도 잘못된 길로 빠져 그리스도를 향한 한결같고 깨끗한 마음에서 떠날까 두렵습니다.고린도후서 11:3 · 두루새김
결혼을 약속한 신부의 이미지 다음에 갑자기 에덴동산의 하와가 등장합니다. 신부에게 필요한 것은 신랑을 향한 한결같은 마음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하와는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자리에서 벗어납니다.
창세기 3:1–6에서 뱀은 단순히 열매를 먹으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질문을 던지고, 그 말씀이 참인지 의심하게 하며, 하나님이 그 열매를 금하신 이유를 다르게 해석하도록 유도합니다.
속임은 생각을 통해 일어납니다.
바울도 고린도 사람들의 행동이 아니라 「생각」이 잘못된 길로 빠질까 두렵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앞 장에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거스르는 생각을 무너뜨리겠다고 한 말(10:5)과 직접 연결됩니다. 바울이 싸우려는 대상은 자신을 나쁘게 평가하는 의견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신지에 대한 이해를 왜곡할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한결같고」는 나뉘지 않은 마음, 꾸밈없고 일관된 헌신을 뜻합니다. 바울은 복잡한 사상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단순한 사람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이 다른 가르침에 의해 갈라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
누군가 찾아와 우리가 전하지 않은 다른 예수를 전하거나, 여러분이 전에 받지 않은 다른 영을 받거나, 전에 받아들이지 않은 다른 복음을 받아들여도, 여러분은 잘도 참아 주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1:4 · 두루새김
바울의 두려움은 막연하지 않습니다.
그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은 전혀 다른 종교를 내세운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영과 복음이라는 익숙한 언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같은 이름과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내용을 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구절만으로는 그들이 십자가를 부정했는지, 부활을 다르게 이해했는지, 영적인 능력을 지나치게 강조했는지 확정할 수 없습니다. 확실한 것은 바울이 그들의 가르침을 복음이 무엇인지와 관련된 심각한 문제로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잘도 참아 주기 때문입니다」는 칭찬이 아니라 반어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자신의 어리석은 말을 조금 참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사람들은 바울의 말은 견디기 어려워하면서, 다른 예수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잘도 참아 줍니다. 이 「참아 주다」라는 표현은 뒤의 19–20절에서 다시 나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섬긴 사도에게는 의심이 많으면서, 자신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울 만큼 너그럽습니다.
바울의 질투는 바로 그 뒤바뀐 판단에서 나옵니다.
조금 더 깊이
구약에서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언약 관계를 설명하는 표현이었습니다. 출애굽기 34:14에서 하나님께서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고 명하시면서 자신을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나타내시고, 호세아 2:19–20에서는 이스라엘과의 관계를 혼인에 비유하며 의와 정의와 한결같은 사랑과 자비와 신실함으로 새로운 관계를 맺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두 본문에서 문제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사적인 소유물처럼 취급하신다는 것이 아니라, 언약을 저버린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한결같이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특정 절을 직접 인용하지 않고, 이 이미지를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발전시킵니다. 또 3절의 「한결같고」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하플로테스(ἁπλότης)는 원문에서 앞의 헌금 대목에서 너그러움을 나타낸 단어와 같지만, 이 자리에서는 나뉘지 않은 마음이라는 의미가 두드러집니다.
복음을 거저 전한 것이 죄입니까
바울이 인정하는 약함과 인정하지 않는 약함
나는 그토록 대단하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고린도후서 11:5 · 두루새김
「그토록 대단하다는 사도들」이 누구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한 견해는 이 표현을 예루살렘의 이름난 사도들, 곧 갈라디아서 2:6–9에서 바울이 언급한 주요 지도자들과 연결합니다. 다른 견해는 고린도에 들어와 자신들의 지위를 과시하던 사람들을 비꼬는 반어로 읽습니다. 후자가 11장 전체의 논쟁과 자연스럽게 이어지지만, 본문은 5절의 사람들과 13절의 「거짓 사도」가 같은 사람들이라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곧바로 자신의 약점 하나를 인정합니다.
내가 말에는 서툴지 몰라도 지식까지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는 여러분에게 이 지식을 분명히 드러내 보였습니다. 모든 일에서, 모든 사람 앞에서 그렇게 했습니다.고린도후서 11:6 · 두루새김
「말에는 서툴지」는 이 문맥에서 바울이 말을 더듬었다는 뜻이라기보다, 전문적인 연설가의 기교를 갖추지 못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식, 곧 자신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이해까지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말하는 방식과 전하는 내용의 중요성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잘 말하는 사람이 반드시 참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대로 세련된 연설 능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가 전하는 복음도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자신의 자격에 대한 또 다른 비난을 꺼냅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돈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돈을 받지 않은 일이 왜 문제가 되었을까
여러분을 높이려고 나 자신을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아무 대가 없이 전한 것이 죄입니까?고린도후서 11:7 · 두루새김
복음을 아무 대가 없이 전한 일이 왜 죄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까?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가르치고 후원받는 관계는 돈 거래 이상의 의미를 지녀, 존경과 명예, 서로에 대한 의무와 연결되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대가를 요구하지 않은 것은 그가 사회적 기대에 맞춰 행동하지 않았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그의 지위가 낮다는 인상을 주었을 수도 있고, 고린도 사람들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들이 실제로 바울에게 후원을 제안했고 바울이 거절했는지는 본문에 명시되지 않습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지원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바울 자신의 설명은 분명합니다. 그는 고린도 사람들을 높이기 위해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이 말은 앞의 결혼 약속 이미지와도 어울립니다. 바울의 목적은 고린도 사람들이 자신에게 경제적으로 의존하거나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복음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도록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다른 교회들을 털었습니다. 여러분을 섬기는 데 쓰려고 그 교회들에서 생활비를 받은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1:8 · 두루새김
「털었습니다」는 실제로 다른 교회의 재산을 빼앗았다는 고백이 아니라, 자신을 지원해 준 다른 교회들의 도움을 매우 과장된 표현으로 묘사한 것입니다. 이 표현이 강하게 들리는 이유는 그가 관계의 불균형을 숨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들은 바울을 지원했고, 고린도 교회는 그 지원으로 이루어진 섬김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필요한 것이 부족해도 아무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았습니다. 마케도니아에서 온 형제들이 내게 부족한 것을 채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했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겠습니다.고린도후서 11:9 · 두루새김
바울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넉넉했기 때문에 고린도 사람들에게 지원을 요청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필요한 것이 부족했지만, 다른 교회들의 도움으로 채웠습니다. 그 역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자랑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고린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경제적인 부담과 연결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계속 받지 않겠다
왜 그렇게 하겠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알고 계십니다.고린도후서 11:11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의 행동이 사랑의 부족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마음을 아신다고 말하고, 앞으로도 같은 방식을 유지하겠다고 선언합니다.
나는 지금 하는 일을 앞으로도 계속하겠습니다. 자기들이 자랑하는 일에서 우리와 똑같이 인정받을 구실을 찾는 사람들에게 그런 구실을 주지 않으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1:12 · 두루새김
여기서 또 하나의 목적이 드러납니다.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이용할 구실을 없애,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자기 과시를 정당화하는 데 쓰이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반대자들의 자랑이 무엇이었는지, 그들이 어떤 경제적 조건으로 고린도 교회를 섬겼는지는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바울의 선택이 그들과 자신을 구별하는 중요한 문제였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의 섬김은 자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 사람들을 섬기기 위한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빌립보서 4:15–16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자신이 섬기는 일을 물질적으로 지원했던 일을 돌아봅니다. 두 본문은 마케도니아 지역 교회들의 실제적인 후원과 바울의 섬김이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11:9에서 언급한 모든 지원이 어느 교회에서 얼마나 왔는지까지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빛의 천사인 척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이며, 사람들을 속이는 일꾼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도인 척하는 사람들입니다.고린도후서 11:13 · 두루새김
바울의 표현이 갑자기 거칠어집니다.
그는 반대자들이 단순히 자신과 섬기는 방식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그리스도의 사도인 척하는」은 겉모습이나 형태를 바꾸는 것을 나타내는 말로, 그들이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그리스도의 사도처럼 보이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놀랄 일도 아닙니다. 사탄도 빛의 천사인 척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1:14 · 두루새김
사탄은 어둠의 모습이 아니라 빛의 천사의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속임의 위험은 악한 것이 언제나 분명하게 악한 모습으로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잘못된 가르침도 의롭고 선해 보이는 말로 제시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을 근거로 겉으로 훌륭해 보이는 사람은 누구나 의심해야 한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바울의 논지는 그리스도의 사도처럼 보인다는 겉모습만으로 그 사람이 실제로 그리스도를 섬기는지 확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탄을 섬기는 사람들이 의로운 일을 하는 일꾼인 척해도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들은 결국 자기들이 한 일에 맞는 결과를 맞을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1:15 · 두루새김
그들은 자신을 어떻게 꾸미는가가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하는가에 따라 판단받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 결과를 상세히 설명하지 않고, 겉모습과 실제 행동 사이의 차이가 끝내 드러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도가 참된지는 인상적인 외모나 말솜씨, 훌륭한 자기소개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며, 자신의 권위를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 자신이 자랑을 시작합니다.
어리석은 자랑 — 상대방의 기준을 빌려 그 기준을 무너뜨리다
바울은 다시 어리석음을 이야기합니다.
「나도 조금은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사람으로라도 받아 주십시오」(16절). 이제부터 그는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자랑의 방식으로 자신을 소개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가 이 방법을 얼마나 불편하게 여기는지는 17절에서 드러납니다.
지금 이처럼 자신 있게 자랑하는 말은 주님의 방식에 따른 말이 아닙니다. 어리석은 사람처럼 하는 말입니다.고린도후서 11:17 · 두루새김
바울이 이제부터 거짓말을 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드러내고 공로를 늘어놓는 말하기 방식이 주님을 따르는 태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그 방식으로 말하려는 이유는 고린도 사람들이 바로 그런 자랑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인간적인 기준으로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습니다.고린도후서 11:18 · 두루새김
바울은 「인간적인 기준으로」 하는 자랑에 비판적이면서도 자신도 그 자랑을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자기 말과 모순되는 행동이라기보다 상대방의 말하기 방식을 의도적으로 빌리는 전략입니다. 그러면서 결국 자신이 진정으로 자랑하려는 것은 그들이 기대한 것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드러낼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혜로운 사람들이니, 어리석은 사람들을 기꺼이 참아 줍니다.고린도후서 11:19 · 두루새김
이 말은 노골적인 풍자입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고린도 사람들이 참아 주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합니까?
누가 여러분을 노예로 부려도, 여러분의 것을 먹어 치워도, 여러분을 이용해 이익을 챙겨도, 거만하게 굴어도, 여러분의 얼굴을 때려도 참아 주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1:20 · 두루새김
다섯 가지 행동은 모두 상대방을 자기보다 낮은 위치에 두고 이용하거나 모욕하는 행동입니다. 「여러분의 것을 먹어 치워도」는 상대방을 탐욕스럽게 이용하는 모습입니다. 「여러분의 얼굴을 때려도」는 실제 폭행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심한 모욕과 경멸을 나타내는 비유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만으로 실제로 어떤 사람이 고린도 교인들의 얼굴을 때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4절의 표현을 더욱 날카롭게 만듭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잘도 참아 주더니, 이제 보니 자신들을 노예처럼 다루는 사람들까지 참아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권위와 지배를 혼동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거칠게 다루고 자신이 더 뛰어나다고 과시하는 태도가 강한 지도력처럼 보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을 낮추고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은 바울의 태도는 약함으로 평가되었습니다.
부끄러운 말입니다만, 우리는 너무 약해서 그런 짓을 하지 못한 셈입니다. 그러나 누군가 무엇을 가지고 대담하게 자랑한다면 나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어리석은 사람처럼 하는 말입니다.고린도후서 11:21 · 두루새김
이 문장은 바울의 풍자가 절정에 이르는 자리입니다.
그는 마치 고린도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이용해 이익을 챙기고, 모욕할 만큼 강하지 못했던 것을 부끄러워한다는 듯이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드러내는 것은 그런 행동이 강함의 증거처럼 받아들여지는 상황 자체입니다. 바울은 그럴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권위를 행사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그는 반대자들이 자랑하는 다른 자격들에 관해서도 자신이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합니다. 그러나 그 자랑 역시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자격을 자랑하려던 사람이 고난을 열거하다
히브리 사람, 이스라엘 사람, 아브라함의 자손
그들이 히브리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고린도후서 11:22 · 두루새김
바울은 먼저 자신의 혈통과 정체성을 이야기합니다.
「히브리 사람」은 유대인의 언어와 문화에 속한다는 점을,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백성에 속한다는 정체성을,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스라엘의 조상과 이어지는 혈통을 드러냅니다. 이 세 표현이 엄격히 나뉜 자격 항목은 아니며, 바울은 서로 겹치는 표현들을 연이어 써서 자신도 상대방과 같은 유대적 배경을 지녔다고 강조합니다.
반대자들이 유대인이라는 정체성을 자신의 권위와 연결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 이유로 자신보다 더 권위 있는 사도라고 주장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곧바로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증거가 왜 고난인가
그들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입니까?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말하겠습니다. 나는 그들보다 더 그렇습니다. 나는 더 많이 수고했고, 더 많이 감옥에 갇혔고, 매를 엄청나게 많이 맞았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겪었습니다.고린도후서 11:23 · 두루새김
이 말을 듣는 사람은 바울이 이제 자신의 놀라운 업적을 이야기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첫 번째로 제시하는 증거는 수고입니다. 그다음은 감옥, 그리고 매 맞음과 죽을 고비입니다.
사람은 보통 자신이 얼마나 많은 권력을 가졌는지, 얼마나 큰 성공을 이루었는지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이야기합니다. 그가 고난 자체를 좋아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치른 대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고난을 많이 겪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사람이 참된 사도가 되는 것은 아니며, 바울도 고통의 양이 진리를 증명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에게 고난은 사도의 권위를 얻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 내는 실적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경험한 일입니다.
매 맞음과 돌에 맞음
유대 사람들에게 서른아홉 대씩 매를 맞은 일이 다섯 번 있었습니다.고린도후서 11:24 · 두루새김
원문은 이 횟수를 사십에서 하나를 뺀 수로 표현하는데, 두루새김은 이를 「서른아홉 대씩」으로 옮겼습니다. 신명기 25:3은 매질이 사십 대를 넘지 못하도록 정하며, 유대교 전통에는 이를 넘기지 않으려고 서른아홉 대를 때리는 관행이 알려져 있습니다. 한 번만으로도 심각한 상처를 남길 수 있는 이 형벌을 바울은 다섯 차례 겪었습니다. 그 시기와 장소는 사도행전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몽둥이로 세 번 맞았고, 돌로 한 번 맞았고, 타고 가던 배가 부서지는 일을 세 번 겪었습니다. 하룻밤과 하루 낮을 깊은 바다에서 보내기도 했습니다.고린도후서 11:25 · 두루새김
몽둥이로 맞는 형벌은 로마의 공식 처벌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6:22–23에는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일이, 14:19에는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돌에 맞고 죽은 줄로 여겨져 도시 밖으로 끌려 나간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배가 부서지는 일을 세 번 겪었다는 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구체적으로 찾아볼 수 없습니다. 바울의 생애에는 기록되지 않은 여정과 위험들이 훨씬 더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여덟 번 반복되는 위험
여행도 여러 번 했습니다. 강에서도 위험을 겪었고, 강도 때문에도 위험을 겪었습니다. 같은 민족 사람들과 다른 민족 사람들 때문에도 위험을 겪었습니다. 도시에서도, 사람이 없는 들판에서도, 바다에서도, 거짓 형제들 가운데서도 위험을 겪었습니다.고린도후서 11:26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위험」(κίνδυνος)이라는 낱말이 여덟 번 반복되고, 문장의 서술을 맡는 동사도 없이 위험의 이름들만 연달아 나옵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위험을 겪었습니다」라는 문장으로 풀어 옮기면서, 바울이 위험을 겪은 곳과 사람들을 차례로 짚습니다.
그가 어디에 있었든 위험이 있었습니다.
도시에 있어도, 사람이 없는 들판에 있어도 안전하지 않았습니다. 바다도 위험했으며, 심지어 형제라고 불리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위험을 겪었습니다.
바울에게 위험은 언제나 교회 바깥에서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거짓 형제들」은 앞서 고린도에 들어온 거짓 사도들과 주제상 연결되지만, 반드시 같은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공동체 안에서 겪는 배신과 위협까지 경험했습니다.
힘들게 일하며 애썼고, 여러 번 밤을 새웠습니다. 굶주리고 목말랐으며, 여러 번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추위에 떨고 입을 옷이 부족해 고생했습니다.고린도후서 11:27 · 두루새김
이 목록에는 영웅적인 장면이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해 온 일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를 설명하는 대신, 그 일을 하는 동안 자신이 얼마나 자주 인간적인 한계에 부딪혔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목록이 끝나는 자리에서 뜻밖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밖에서 자신에게 가해진 고통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을 안에서부터 누르는 무게를 이야기합니다.
조금 더 깊이
사도행전 27장에는 로마로 가던 바울이 배가 부서지는 일을 겪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사건의 시기를 정리하면 그것은 고린도후서를 쓴 이후의 일입니다. 따라서 25절의 세 번의 경험은 사도행전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항해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는 사도행전이 바울의 모든 활동을 빠짐없이 기록한 전기가 아니라는 점도 일깨웁니다.
모든 교회를 두고 마음 쓰는 일
그 밖의 일은 제쳐 두더라도, 모든 교회를 걱정하는 마음이 날마다 나를 짓누릅니다.고린도후서 11:28 · 두루새김
이 절은 고린도후서 11장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앞에서는 매 맞음과 감옥과 배가 부서지는 일과 굶주림이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모든 바깥의 고난 다음에, 교회들을 돌보는 일이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폭력과는 다른 종류의 무게를 지닌다고 말합니다. 단지 여러 교회의 행정적인 문제로 바빴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이 29절에서 드러납니다.
누군가 약해지면 나도 함께 약해지지 않습니까? 누군가 믿음의 길에서 걸려 넘어지면 내 마음도 타들어 가지 않습니까?고린도후서 11:29 · 두루새김
바울은 다른 사람의 약함을 자신의 약함과 연결합니다.
10장에서 반대자들은 그가 직접 와 있을 때의 모습이 약하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에게 약함은 남보다 부족하다는 평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외면하지 못하는 관계입니다. 누군가 믿음의 길에서 걸려 넘어질 때 그는 그 일을 무관심하게 바라보지 못합니다.
「내 마음도 타들어 가지 않습니까」는 의로운 분노로 읽히기도 하고, 고통과 걱정으로 마음이 타는 모습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바울이 다른 사람의 영적인 위험에 깊이 반응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것이 그가 모든 교회를 걱정하는 마음의 실제적인 내용입니다.
자랑해야 한다면, 나는 내 약함을 드러내는 일들을 자랑하겠습니다.고린도후서 11:30 · 두루새김
이 문장은 앞서 이어진 모든 자랑의 방향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바울은 수많은 여행을 했고, 복음을 전했고, 여러 교회를 세웠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의 영광스러운 결과보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자신의 약함을 선택합니다. 28–29절을 거치면서 그 약함은 고난을 겪은 기록을 넘어, 다른 사람의 약함을 함께 겪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여기에는 두 종류의 지도력이 뚜렷하게 대조됩니다. 바울은 거짓 사도들이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고, 이용해 이익을 챙기고, 거만하게 군다고 말했습니다.
한쪽은 다른 사람을 자기 아래에 두면서 강함을 얻습니다.
다른 한쪽은 다른 사람의 약함을 함께 겪으면서 자신도 약해집니다.
바울이 자랑하는 것은 바로 두 번째 모습입니다.
조금 더 깊이
29절의 「타들어 가다」에 해당하는 원문 동사 퓌로오마이(πυρόομαι)는 기본적으로 불타다, 타오르다라는 뜻이어서, 이 절만으로 어느 감정 하나라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바울의 약함 자랑은 고린도전서 1:18–25의 십자가 신학을 배경으로 합니다. 바울은 거기서 십자가의 말씀이 세상의 기준으로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셨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4:7–12에서는 그 뛰어난 능력이 자신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보여 주려고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며,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나도록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고 말했습니다. 11장의 고난 목록은 그 말이 바울의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이었는지 보여 줍니다.
성벽 아래로 내려진 사도
주 예수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이신 분, 영원히 찬양받으실 그분께서는 내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고린도후서 11:31 · 두루새김
바울은 갑자기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릅니다. 자신의 고난에 관한 말이 사실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엄숙한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 직후 한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다마스쿠스에서 아레타 왕의 관리가 나를 잡으려고 도시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고린도후서 11:32 · 두루새김
다마스쿠스는 사울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기 시작한 곳입니다(사도행전 9:1–19). 사도행전 9:23–25에는 그를 죽이려는 음모가 생겨 제자들이 밤에 그를 바구니에 담아 성벽 아래로 내려 보냈다는 기록이 있어, 이 사건과 연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다만 사도행전은 유대인들의 음모를, 고린도후서는 아레타 왕의 관리를 이야기합니다.
그는 붙잡힐 위험에 처해 있었고, 그 위험을 정면으로 뚫고 나갈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망쳐야 했습니다.
나는 큰 바구니에 담긴 채 성벽의 창문을 통해 아래로 내려져, 그 관리의 손에서 벗어났습니다.고린도후서 11:33 · 두루새김
이것이 고린도후서 11장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담대한 사람인지, 적들과 맞서 싸워 그들을 물리쳤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큰 바구니에 몸을 싣고 성벽 아래로 내려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빠져나오기 어려웠던 사람입니다.
왜 하필 이 장면으로 끝나는가
이 사건을 마지막에 배치한 이유는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펼친 주장에 비추면 이 장면의 효과는 분명합니다. 바울은 사도의 권위를 변호하면서 승리의 이야기가 아니라, 붙잡히지 않으려고 큰 바구니에 담겨 도망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는 그 경험을 숨기지 않고 자신의 사도 생활을 설명하는 증거로 사용합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사도의 삶은 언제나 인간적인 강함과 위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사도행전과 고린도후서의 두 설명이 같은 사건의 서로 다른 측면을 기록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 관계를 정확히 알아내기는 어렵습니다. 아레타는 일반적으로 나바테아 왕 아레타 4세로 이해되는데, 그의 관리가 다마스쿠스 전체를 다스렸는지, 그곳의 나바테아인 공동체와 관련된 권한만 행사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또 고대 로마에는 적의 성벽을 가장 먼저 올라간 병사에게 주던 성벽관이라는 상이 있어, 바울이 성벽 아래로 내려가는 자신을 보여 주어 군사적 명예를 뒤집었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반면 당시 듣는 사람들이 이런 암시를 알아차렸으리라는 근거가 부족하고 이야기 자체도 그 상을 떠올리게 할 특징이 없다는 해석도 있어, 이 장면을 반드시 성벽관에 대한 풍자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광주리를 붙잡고 있던 손
11장의 마지막 장면에는 바구니를 붙잡고 바울을 내려 준 누군가의 손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르기까지 바울은 어리석은 말을 참아 달라고 부탁하고, 감옥, 매 맞음, 돌에 맞음, 배가 부서지는 일, 강도, 굶주림, 추위를 열거한 끝에 「나는 내 약함을 드러내는 일들을 자랑하겠습니다」라고 밝혔습니다. 그가 보여 주려는 것은 자신이 훌륭한 사도라는 증명이 아니라, 그가 전한 예수님과 그가 사도로 살아온 삶이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다만 바울의 고난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은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바울이 선포하는 복음의 중심 사건이고, 바울의 고난은 그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겪은 고난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난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다마스쿠스의 밤입니다.
그를 붙잡으려는 사람들이 도시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문을 당당하게 통과할 수 없습니다. 적들을 물리칠 군대도 없습니다. 그에게는 성벽의 작은 창문과 큰 바구니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를 큰 바구니에 담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성벽 아래로 내려 줍니다. 바울은 그 안에서 자신의 몸을 맡긴 채 내려갑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인상적인 말솜씨와 당당한 모습에서 권위를 찾고 있었다면, 바울은 바로 이 장면을 마지막에 놓아 그들에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복음을 위해 살았지만, 자신의 힘으로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었던 사람.
다른 사람들을 섬겼고, 자신 역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했던 사람.
누군가의 약함을 함께 짊어졌고, 자신의 약함도 숨기지 않았던 사람.
그것이 바울이 보여 주는 예수님의 사도입니다. 높은 성벽 위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아니라, 큰 바구니에 몸을 싣고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바구니를 누군가가 붙잡고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