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10–13장 · 바울의 변호
나의 약함을 자랑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은 한 사도가 자신의 자격을 증명하려는 이야기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다른 사도들보다 못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많이 수고했는지,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었는지 이야기합니다. 감옥에 갇히고, 매를 맞고, 돌에 맞고, 바다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일들을 숨 가쁘게 나열합니다. 여기까지만 읽으면 바울은 자신의 특별한 헌신을 증명하여 고린도 사람들의 존경을 되찾으려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이야기가 끝나는 자리에서 그는 뜻밖의 사건을 꺼냅니다.
「나는 광주리에 담겨 창문을 통해 성벽 밖으로 내려졌고, 그의 손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는 성벽을 무너뜨린 영웅이 아닙니다. 성문을 당당하게 통과한 승리자도 아닙니다. 누군가가 자신을 광주리에 넣어 성벽 아래로 내려 주어야 했던 사람입니다.
왜 바울은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변호하는 이야기의 끝에 이런 장면을 놓았을까요?
이 질문을 품고 11장을 처음부터 읽으면 바울이 내놓는 증거들이 통상적인 위대함의 기준을 계속 뒤집는 것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높은 신분 대신 낮아진 모습을 이야기하고, 풍성한 보수 대신 아무 대가도 받지 않은 일을 자랑합니다. 다른 사람들을 지배한 경험 대신 자신이 당한 폭력과 고난을 열거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그 모든 고난보다 자신을 더 무겁게 짓누르는 것, 교회들을 향한 염려를 밝힙니다.
이 장을 관통하는 질문은 단순히 누가 참된 사도인가가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의 위대함은 무엇으로 드러납니까?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자랑의 형식을 잠시 빌려 옵니다. 그러나 그 형식 안에 전혀 다른 내용을 담습니다. 그리고 결국 그 형식 자체가 얼마나 부적절한지를 드러냅니다.
바울이 질투하는 이유 — 고린도 교회는 누구에게 속하는가
자랑이 아니라 질투로 시작하다
나의 어리석음을 조금만 참아 주었으면 합니다. 아니, 실은 나를 참아 주고 있습니다.고린도후서 11:1 · 본디새김
그는 곧 자신의 업적과 자격을 늘어놓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기 자랑이 그리스도의 사도에게 적합한 말하기 방식이라고 생각하지 않기에, 자신이 하려는 일의 부적절함을 먼저 인정합니다. 그런데 왜 그 일을 굳이 해야 합니까?
내가 하나님의 질투로 여러분을 두고 질투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여러분을 한 남편에게 정혼시켰습니다. 순결한 처녀로 그리스도께 세우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1:2 · 본디새김
바울이 자신의 평판을 지키기 위해서만 싸우고 있었다면 이 비유는 어울리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을 신랑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신랑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그리스도께 정혼시킨 사람으로 자신을 묘사합니다. 그의 역할은 고린도 사람들이 자신에게 충성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온전히 속하도록 돕는 것입니다. 당시의 정혼은 결혼을 향한 구속력 있는 관계로 이해되었고, 그 안에서 상대방에 대한 신실함이 중요하게 여겨졌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와 관계를 맺었지만, 그 관계의 신실함이 위협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질투는 흔히 다른 사람을 독점하고 통제하려는 욕망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바울이 바라는 것은 고린도 사람들이 바울이라는 지도자에게 더욱 강하게 종속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그들을 자기 사람으로 붙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로 지키려 합니다.
그런데 왜 갑자기 하와가 등장하는가
그러나 나는 뱀이 제 간교함으로 하와를 속인 것처럼, 여러분의 생각이 그리스도를 향한 순전함과 순결함에서 떠나 무너질까 두렵습니다.고린도후서 11:3 · 본디새김
정혼한 신부의 이미지와 에덴동산의 하와는 서로 다른 이야기지만 바울의 논증에서는 하나로 연결됩니다. 신부에게 필요한 것은 신랑을 향한 신실함입니다. 그런데 창세기 3장에서 하와는 뱀의 말을 듣고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는 자리에서 벗어납니다.
창세기 3:1–6에서 뱀은 단순히 열매를 먹으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질문을 던지고, 그 말씀의 진실성을 의심하게 하며, 하나님이 그 열매를 금하신 이유를 다르게 해석하도록 유도합니다.
속임은 생각을 통해 일어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의 행동이 아니라 「생각」이 떠날까 두렵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거스르는 생각을 무너뜨리겠다고 한 앞 장의 진술(10:5)과 직접 연결됩니다. 바울이 싸우려는 대상은 자신을 나쁘게 평가하는 의견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신지에 대한 이해를 왜곡할 수 있는 가르침입니다.
「순전함」(ἁπλότης)으로 옮긴 낱말은 앞의 헌금 대목에서 「너그러움」으로 사용된 낱말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는 나뉘지 않은 마음, 꾸밈없고 일관된 헌신이라는 의미가 두드러집니다. 바울은 복잡한 사상을 이해할 능력이 없는 단순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마음이 다른 가르침에 의해 갈라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순전함」과 「순결함」은 이렇게 서로를 보완합니다.
다른 예수, 다른 영, 다른 복음
그도 그럴 것이, 오는 사람이 우리가 선포하지 않은 다른 예수를 선포하거나, 여러분이 받지 않은 다른 영을 받거나, 여러분이 받아들이지 않은 다른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여러분은 잘도 참아 줍니다.고린도후서 11:4 · 본디새김
바울의 두려움은 막연하지 않습니다.
그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도 예수님과 영과 복음이라는 익숙한 언어를 사용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같은 이름과 용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반드시 같은 내용을 전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 구절은 그들이 정확히 어떤 교리를 가르쳤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십자가를 부정했는지, 부활을 다르게 이해했는지, 영적인 능력을 지나치게 강조했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확정할 수 없고, 확실한 것은 바울이 그 가르침을 복음의 정체성과 관련된 심각한 문제로 여겼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은 잘도 참아 줍니다」는 칭찬이 아니라 반어입니다. 바울은 1절에서 자신의 어리석음을 조금 참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사람들은 바울의 어리석음은 견디기 어려워하면서, 다른 예수님과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잘도 참아 준다는 것입니다. 이 「참아 주다」라는 표현은 뒤의 19–20절에서도 반복됩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섬긴 사도에게는 의심이 많으면서, 자신들을 잘못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놀라울 만큼 관대합니다.
바울의 질투는 바로 그 역전된 판단에서 나옵니다.
복음을 거저 전한 것이 죄입니까
바울이 인정하는 약함과 인정하지 않는 약함
나는 저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1:5 · 본디새김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이 누구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한 견해는 갈라디아서 2:6–9에서 바울이 언급한 예루살렘의 주요 지도자들을 가리킨다고 봅니다. 다른 견해는 고린도에 들어와 사도적 지위를 과시하던 사람들을 비꼬는 반어로 읽습니다. 후자가 11장 전체의 논쟁과 자연스럽게 이어지지만, 본문은 11:5의 사람들과 11:13의 「거짓 사도들」이 반드시 동일인이라고 명시하지 않으므로 두 견해는 구분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곧바로 자신의 약점 하나를 인정합니다.
나는 말에는 서툰 사람이지만 앎에서는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는 모든 일에서 모든 사람 앞에 이 앎을 여러분에게 드러내 보인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1:6 · 본디새김
「서툰 사람」은 이 문맥에서 전문적인 교육이나 기술을 갖추지 못한 사람을 뜻합니다. 말을 더듬었다기보다 전문 연설가의 기교를 갖추지 못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반면 앎은 그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한 이해와 관련됩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말하는 방식과 전하는 내용의 중요성을 혼동하고 있습니다. 잘 말하는 사람이 반드시 참된 복음을 전하는 것은 아니고, 세련된 연설 능력이 부족하다고 해서 그가 전하는 복음도 부족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바울의 가르침을 직접 들었고 그의 사역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자신의 자격에 대한 또 다른 비난을 꺼냅니다. 그가 복음을 전하면서 돈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돈을 받지 않은 일이 왜 문제가 되었을까
아니면, 여러분이 높아지게 하려고 나 자신을 낮추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거저 전한 것이 죄입니까?고린도후서 11:7 · 본디새김
복음을 거저 전한 일이 왜 죄처럼 여겨질 수 있습니까?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가르치고 후원받는 관계는 단순한 금전 거래 이상으로 존경과 명예, 상호 의무와 연결되기도 했습니다. 바울이 대가를 요구하지 않은 것은 그런 사회적 기대에 맞춰 행동하지 않았다는 뜻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사도적 지위가 낮다는 인상을 주었을 수도 있고, 고린도 사람들과의 관계를 거부하는 행동으로 받아들여졌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그들이 실제로 후원을 제안했고 바울이 그것을 거절했는지는 본문에 명시되지 않습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지원을 요구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바울 자신의 설명은 분명합니다. 그는 고린도 사람들을 높이기 위해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의 목적은 그들이 자신에게 의존하거나 자신의 권위를 인정하도록 만드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도록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다른 교회들을 털었습니다. 여러분을 위한 섬김에 쓰려고 그 교회들에서 삯을 받은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1:8 · 본디새김
「털었습니다」는 실제 약탈의 고백이 아니라, 자신을 지원해 준 다른 교회들의 도움을 과장해 묘사한 표현입니다. 이 표현이 강하게 들리는 것은 그가 관계의 불균형을 숨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떤 교회들은 바울을 지원했고, 고린도 교회는 그 지원으로 이루어진 사역의 유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여러분 곁에 있으면서 모자람을 겪을 때에도 나는 아무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마케도니아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모자람을 채워 주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짐이 되지 않도록 나 자신을 지켰고 앞으로도 지킬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1:9 · 본디새김
바울은 경제적인 어려움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언제나 넉넉했기 때문에 지원을 요청하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부족함을 겪었지만, 그 부족함을 다른 교회들의 도움으로 채웠습니다. 그 역시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자랑하는 것은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아니라, 고린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경제적인 부담과 연결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계속 받지 않겠다
왜 그렇습니까? 내가 여러분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고린도후서 11:11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의 행동이 사랑의 부족으로 오해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신의 마음을 아신다고 말하고, 앞으로도 같은 방식을 유지하겠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내가 지금 하는 일을 앞으로도 계속하겠습니다. 구실을 찾는 이들에게서 그 구실을 잘라 내려는 것입니다. 곧 자기들이 자랑하는 그 일에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으로 드러날 구실입니다.고린도후서 11:12 · 본디새김
자신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이용할 구실을 없애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행동이 다른 사람들의 자기 과시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되지 않도록 하려 합니다. 반대자들의 자랑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그들이 어떤 경제적 조건으로 고린도 교회를 섬겼는지는 상세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바울의 선택이 그들과 자신을 구별하는 중요한 문제였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의 사역은 자신을 높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고린도 사람들을 섬기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빌립보서 4:15–16에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자신의 사역을 물질적으로 지원했던 일을 회상합니다. 두 본문은 마케도니아 지역 교회들의 실제적인 후원과 바울의 사역이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다만 11:9에서 언급한 모든 지원이 어느 교회에서 얼마나 왔는지까지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빛의 천사로 가장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들이고 속이는 일꾼들이며,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1:13 · 본디새김
바울의 표현이 갑자기 거칠어집니다.
그는 그들이 단순히 자신과 사역 방식이 다르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사도를 자처하지만 실제로는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가장하는」은 외적인 모습을 바꾸는 것을 나타내며, 그들이 정체를 감추고 그리스도의 사도처럼 보이게 한다는 뜻입니다.
놀랄 일이 아닙니다. 사탄 자신도 빛의 천사로 가장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1:14 · 본디새김
사탄은 어둠의 모습이 아니라 빛의 천사로 나타납니다. 악한 것이 언제나 명백하게 악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고, 잘못된 가르침도 의롭고 선해 보이는 언어로 제시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근거로 외적으로 훌륭해 보이는 사람은 누구나 의심해야 한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바울의 논지는 빛 자체가 의심스럽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도처럼 보인다는 외적인 모습만으로 그 사람이 실제로 그리스도를 섬기는지 확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를 섬기는 이들도 의를 섬기는 이들로 가장한다 해도 대단한 일이 아닙니다. 그들의 끝은 그들이 한 일대로 될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1:15 · 본디새김
그들은 자신을 어떻게 꾸미는가가 아니라 실제로 무엇을 행하는가에 따라 판단받을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의 최종적인 운명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고, 겉모습과 실제 행위 사이의 차이가 끝내 드러날 것이라고만 말합니다.
사도의 참됨은 인상적인 외모나 말솜씨, 훌륭한 자기소개만으로 확인되지 않습니다. 그가 어떤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며, 자신의 권위를 어떤 목적으로 사용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 자신이 자랑을 시작합니다.
어리석은 자랑 — 상대방의 기준을 빌려 그 기준을 무너뜨리다
다시 말합니다. 아무도 나를 어리석은 자로 여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렇게 여긴다면, 나도 조금은 자랑할 수 있도록 어리석은 자로라도 나를 받아 주십시오.고린도후서 11:16 · 본디새김
이제부터 그는 다른 사람들이 사용하는 자랑의 방식으로 자신을 소개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가 이 방법을 얼마나 불편하게 여기는지는 17절에서 드러납니다.
내가 하는 이 말은 주님을 따라 하는 말이 아니라 어리석은 사람처럼 하는 말이며, 이처럼 자신 있게 자랑하는 말입니다.고린도후서 11:17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신중하게 읽어야 합니다. 바울이 이제부터 거짓말을 하겠다는 뜻도 아니고, 자신의 말이 그리스도인의 삶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는 자기 공로를 열거하는 말하기 방식이 주님을 따르는 태도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고린도 사람들이 바로 그런 자랑에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 방식으로 말하려 합니다.
많은 사람이 육을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습니다.고린도후서 11:18 · 본디새김
육을 따른 자랑에 비판적인 바울이 자신도 그 자랑을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이는 자기 모순이라기보다 의도적인 수사적 전략입니다. 상대방의 방식으로 자신을 소개하면서, 결국 자신이 진정으로 자랑하려는 것은 그들이 기대한 것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드러낼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리석은 자들을 기꺼이 참아 주기 때문입니다. 지혜로운 사람들이면서 말입니다.고린도후서 11:19 · 본디새김
노골적인 풍자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자신들이 지혜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참아 주는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합니까?
누가 여러분을 노예로 부려도, 누가 삼켜도, 누가 빼앗아 가도, 누가 스스로 높여도, 누가 여러분의 얼굴을 쳐도 여러분은 참아 주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1:20 · 본디새김
다섯 행동은 모두 상대방을 자기보다 낮은 위치에 두고 이용하거나 모욕하는 행동입니다. 「삼켜도」는 상대방을 탐욕스럽게 이용하는 모습을 그립니다. 「얼굴을 쳐도」는 실제 폭행을 가리킬 수도 있고 심한 모욕과 경멸을 나타내는 비유일 수도 있어, 본문만으로 실제로 누가 고린도 교인들의 얼굴을 때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4절에서 고린도 사람들은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잘도 참아 주었습니다. 이제 보니 그들은 자신들을 노예처럼 다루는 사람들까지 참아 주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권위와 지배를 혼동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사람들을 거칠게 다루고 우월함을 과시하는 태도가 강한 지도력처럼 보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을 낮추고 경제적 부담을 지우지 않은 바울의 태도는 약함으로 평가받았습니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마치 우리가 그런 일을 하기에는 약했던 것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누가 무엇으로 감히 나선다면 — 어리석음으로 하는 말입니다 — 나도 감히 나서겠습니다.고린도후서 11:21 · 본디새김
바울의 풍자가 절정에 이르는 자리입니다. 그는 고린도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착취하고 모욕할 만큼 강하지 못했던 것을 부끄러워하는 듯이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드러내는 것은, 그런 행동이 강함의 증거처럼 받아들여지는 상황 자체입니다.
바울이 약했던 것은 사람들을 착취할 능력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는 그런 방식으로 자신의 권위를 행사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그는 반대자들이 자랑하는 다른 자격들에 관해서도 자신이 뒤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려 합니다. 그러나 그 자랑 역시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자격을 자랑하려던 사람이 고난을 열거하다
히브리 사람, 이스라엘 사람, 아브라함의 자손
그들이 히브리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이스라엘 사람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의 자손입니까? 나도 그렇습니다.고린도후서 11:22 · 본디새김
「히브리 사람」은 유대인의 언어적·문화적 정체성을, 「이스라엘 사람」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 속한다는 정체성을, 「아브라함의 자손」은 이스라엘의 조상과 이어지는 혈통을 드러냅니다. 다만 이 셋이 엄격히 구분된 자격 항목이었다기보다, 바울은 서로 겹치는 표현들을 연이어 사용하여 자신도 상대방과 동일한 유대적 배경을 지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반대자들이 유대적 정체성을 자신의 권위와 연결하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자신보다 더 권위 있는 사도라고 주장할 수는 없다고 말한 뒤, 여기에 오래 머무르지 않고 가장 중요한 질문으로 넘어갑니다.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증거가 왜 고난인가
그들이 그리스도를 섬기는 이들입니까? 정신 나간 사람처럼 말합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이로서 그들보다 더합니다. 더 많이 수고했고, 더 많이 갇혔고, 매를 엄청나게 많이 맞았고, 여러 번 죽을 고비를 겪었습니다.고린도후서 11:23 · 본디새김
이 말을 듣는 사람은 바울이 이제 자신의 놀라운 업적을 이야기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첫 번째로 제시하는 증거는 수고이고, 그다음은 감옥, 그리고 매 맞음과 죽음의 위험입니다.
사람은 보통 자신이 얼마나 많은 권력을 가졌는지, 얼마나 큰 성공을 이루었는지를 자랑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었는지 이야기합니다. 그가 고난 자체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치른 대가를 보여 주는 것입니다.
고난을 많이 겪었다는 사실만으로 참된 사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 역시 고통의 양이 진리를 증명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고난은 사도적 권위를 얻기 위해 일부러 만들어 내는 실적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경험한 역사입니다.
매 맞음과 돌에 맞음
유대 사람들에게 다섯 번, 사십에서 하나 뺀 만큼씩 매를 맞았습니다.고린도후서 11:24 · 본디새김
「사십에서 하나 뺀 만큼」은 서른아홉 대입니다. 한 번의 처벌만으로도 심각한 상처를 남길 수 있는 일을 그는 다섯 차례나 겪었습니다.
세 번 몽둥이로 맞았고, 한 번 돌로 맞았고, 세 번 배가 부서졌고, 한 밤낮을 깊은 바다에서 보냈습니다.고린도후서 11:25 · 본디새김
몽둥이로 맞는 형벌은 로마의 공적 처벌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사도행전 16:22–23에는 빌립보에서 바울과 실라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돌로 맞은 사건은 사도행전 14:19에서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고 죽은 줄로 여겨져 도시 밖으로 끌려 나간 이야기와 연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의 생애에는 기록되지 않은 여정과 위험들이 훨씬 더 많이 있었을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신명기 25:3은 태형을 집행할 때 사십 대를 넘기지 못하도록 규정하며, 유대교의 태형 전통에서는 사십 대를 넘기는 일을 피하기 위해 서른아홉 대를 집행하는 관행이 알려져 있습니다. 다섯 차례를 합하면 모두 백아흔다섯 대이며, 이 매질이 언제 어디에서 이루어졌는지는 사도행전에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세 번의 파선도 사도행전에서 구체적으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사도행전 27장의 파선은 일반적인 연대 재구성상 고린도후서를 쓴 이후의 사건이므로, 여기서 말하는 세 번의 파선은 사도행전에 자세히 기록되지 않은 다른 항해 경험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는 사도행전이 바울의 모든 활동을 빠짐없이 기록한 전기가 아니라는 점도 일깨웁니다.
여덟 번 반복되는 위험
여러 차례의 여행, 강의 위험, 강도의 위험, 동족에게서 오는 위험, 이방 사람에게서 오는 위험, 도시에서의 위험, 광야에서의 위험, 바다에서의 위험, 거짓 형제들 가운데서의 위험.고린도후서 11:26 · 본디새김
원문에서는 「위험」(κίνδυνος)이라는 낱말이 여덟 번 반복되고, 정동사도 없이 위험의 이름들만 연달아 등장합니다. 이 반복은 바울이 살아온 삶의 불안정성을 독자에게 느끼게 합니다.
그가 어디에 있었든 위험이 있었습니다.
마지막 표현은 「거짓 형제들 가운데서의 위험」입니다. 바울에게 위험은 언제나 교회 바깥에서만 찾아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표현은 앞서 거짓 사도들을 이야기한 대목과 주제적으로 연결되지만, 11:26의 거짓 형제들이 반드시 현재 고린도에서 활동하는 같은 사람들을 가리킨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수고하고 애썼고, 여러 번 밤을 새웠고, 굶주리고 목말랐고, 여러 번 음식을 먹지 않았고, 추위와 헐벗음을 겪었습니다.고린도후서 11:27 · 본디새김
이 목록에는 영웅적인 장면이 없습니다. 배고픔, 목마름, 추위, 옷의 부족함이 있을 뿐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 대신, 그 사역을 수행하는 동안 자신이 얼마나 자주 인간적인 한계에 부딪혔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이 목록이 끝나는 자리에서 뜻밖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지금까지 바울은 밖에서 자신에게 가해진 고통을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을 안에서부터 누르는 무게를 이야기합니다.
모든 교회를 두고 마음 쓰는 일
그 밖의 일은 제쳐 두더라도, 날마다 나를 누르는 것은 모든 교회를 두고 마음 쓰는 일입니다.고린도후서 11:28 · 본디새김
매 맞음과 감옥과 파선과 굶주림을 이야기한 다음, 바울은 자신을 날마다 누르는 다른 것이 있다고 말합니다. 교회들을 돌보는 일은 몸에 가해지는 폭력과는 다른 종류의 무게를 지닙니다. 여러 교회의 행정적인 문제를 처리하느라 바빴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가 약하면 나도 약하지 않겠습니까? 누가 걸려 넘어지면 내가 애가 타지 않겠습니까?고린도후서 11:29 · 본디새김
10장에서 반대자들은 바울의 몸으로 와 있는 모습이 약하다고 비난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다른 사람의 약함을 함께 겪는 사람으로 자신을 설명합니다. 바울에게 약함은 남보다 부족하다는 평가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외면하지 못하는 관계이기도 합니다.
「애가 타다」는 의로운 분노로도, 고통과 염려로 마음이 타는 모습으로도 읽힙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바울이 다른 사람의 영적인 위험에 깊이 반응한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이것이 그가 모든 교회를 두고 마음 쓰는 일의 실제적인 내용입니다.
자랑해야 한다면 나는 나의 약함에 관한 일들을 자랑하겠습니다.고린도후서 11:30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앞서 이어진 모든 자랑의 방향을 밝힙니다. 바울은 수많은 여행을 했고, 복음을 전했고, 여러 교회를 세웠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역의 영광스러운 결과보다 그 과정에서 드러난 자신의 약함을 선택합니다.
특히 28–29절을 거치면서 그 약함은 단순한 수난의 기록을 넘어 다른 사람의 약함을 함께 겪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거짓 사도들은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고, 삼키고, 빼앗고, 스스로 높이는 사람들이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다른 사람의 약함 때문에 자신도 약해지는 사람입니다.
한쪽은 다른 사람을 자기 아래에 두면서 강함을 얻습니다.
다른 한쪽은 다른 사람의 약함에 참여하면서 자신도 약해집니다.
바울이 자랑하는 것은 바로 후자의 모습입니다.
조금 더 깊이
「애가 타다」에 해당하는 동사 퓌로오마이(πυρόομαι)는 기본적으로 불타다, 타오르다라는 뜻을 가지며, 11:29만으로 분노와 염려 가운데 어느 감정 하나를 배타적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바울의 약함 자랑은 고린도전서 1:18–25의 십자가 신학을 배경으로 읽힙니다. 거기서 바울은 십자가의 말씀이 세상의 기준으로는 어리석게 보이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 구원의 능력을 나타내셨다고 설명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4:7–12에서는 능력의 뛰어남이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보이려고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며,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나도록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진다고 말했습니다. 11장의 고난 목록은 그 신학적 진술이 바울의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이었는지 보여 줍니다.
성벽 아래로 내려진 사도
주 예수의 하나님이시며 아버지이신 분, 영원히 찬양받으실 그분이 내가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계십니다.고린도후서 11:31 · 본디새김
바울은 갑자기 하나님을 증인으로 부릅니다. 자신의 진술이 사실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엄숙한 표현입니다. 그런데 그 직후 그는 한 사건을 이야기합니다.
다마스쿠스에서 아레타 왕의 지방관이 나를 잡으려고 다마스쿠스 사람들의 도시를 감시하고 있었습니다.고린도후서 11:32 · 본디새김
사도행전 9:1–19에 따르면, 사울은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이후 그곳에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도행전 9:23–25에는 그를 죽이려는 음모가 생겨 제자들이 밤에 그를 광주리에 담아 성벽 아래로 내려 보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의 이야기는 이 사건과 연결될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는 체포될 위험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그 위험을 정면으로 돌파할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리고 나는 광주리에 담겨 창문을 통해 성벽 밖으로 내려졌고, 그의 손에서 벗어났습니다.고린도후서 11:33 · 본디새김
이것이 고린도후서 11장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바울은 적들과 맞서 싸워 그들을 물리쳤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광주리에 몸을 싣고 성벽 아래로 내려졌습니다. 이 장면에서 그는 자기 힘으로 상황을 통제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빠져나오기 어려웠던 사람입니다.
왜 하필 이 장면으로 끝나는가
이 사건을 마지막에 배치한 이유는 명시적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의 논증을 고려하면 이 장면이 지닌 효과는 분명합니다. 바울은 사도적 권위를 변호하면서 승리의 이야기 대신, 체포를 피하기 위해 광주리에 담겨 도망친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바울은 자신의 대담함과 사도적 자격을 변호해 왔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등장하는 그는 자신의 힘을 내세울 수 없는 사람입니다. 누군가가 그를 내려 주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살아남았습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이 도망쳤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 경험을 숨기지 않고 자신의 사도적 생애를 설명하는 증거로 사용한다는 점입니다. 그에게는 체면을 지키기 위해 초라한 순간을 지워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섬기는 사도의 삶은 언제나 인간적인 강함과 위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사도행전과 고린도후서는 세부사항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은 바울을 죽이려는 유대인들의 음모를, 고린도후서는 아레타 왕의 지방관이 다마스쿠스 사람들의 도시를 감시했다고 설명합니다. 두 설명이 같은 사건의 서로 다른 측면을 기록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 관계를 정확히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아레타는 일반적으로 나바테아 왕 아레타 4세로 이해되지만, 그의 지방관이 다마스쿠스 전체를 통치했는지, 그곳의 나바테아인 공동체와 관련된 권한을 행사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고, 다마스쿠스 내 나바테아인의 이해관계를 대표하던 관리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또 고대 로마의 군사 문화에는 적의 성벽을 가장 먼저 올라간 병사에게 수여하던 성벽관(corona muralis)이 있었고, 바울이 성벽 아래로 내려가는 자신의 모습으로 이 군사적 명예를 뒤집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청중이 이런 암시를 알아차렸으리라는 근거가 부족하고 바울의 서술 자체도 그 상을 직접 떠올리게 할 특징을 갖추지 않았다는 해석도 있어, 이 장면을 반드시 성벽관에 대한 풍자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강렬한 대조가 만들어집니다.
광주리를 붙잡고 있던 손
고린도후서 11장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바울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조금만 참아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다른 사도들과 비교했고, 유대적 혈통을 이야기했으며, 감옥, 매 맞음, 돌에 맞음, 파선, 강도, 굶주림, 추위를 열거했습니다. 그리고 「나의 약함에 관한 일들을 자랑하겠습니다」라고 밝힌 뒤, 광주리를 붙잡고 있던 손의 장면을 들려줍니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사람의 위대함은 무엇으로 드러납니까? 이 장에서 바울은 자신을 훌륭한 사도로 증명하기보다, 그가 전한 예수님과 그가 살아온 사도적 삶이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는 자신을 높이는 대신 낮아지고, 다른 사람들을 이용해 부유해지는 대신 부담을 주지 않으며, 다른 사람들을 지배하는 대신 그들의 연약함에 함께 참여합니다. 이러한 삶의 방식은 예수님의 자기희생과 주제적으로 연결되지만, 바울의 고난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바울이 선포하는 복음의 중심 사건이고, 바울의 고난은 그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겪은 고난이며, 바울은 자신의 고난으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의 삶은 홀로 모든 것을 감당하는 초인적인 지도자의 모습도 아닙니다. 그는 마케도니아 교회들의 지원을 받았고, 다마스쿠스에서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으로 탈출했습니다.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받는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마스쿠스의 밤입니다.
그를 붙잡으려는 사람들이 도시를 감시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성문을 당당하게 통과할 수 없습니다. 적들을 물리칠 군대도 없습니다. 그에게는 성벽의 작은 창문과 광주리가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를 광주리에 담습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성벽 아래로 내려 줍니다. 바울은 그 안에서 자신의 몸을 맡긴 채 내려갑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인상적인 말솜씨와 당당한 모습에서 권위를 찾고 있었다면, 바울은 그들에게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높은 성벽 위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는 모습이 아니라, 광주리에 몸을 싣고 아래로 내려가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광주리를 누군가가 붙잡고 있습니다.
그렇게 고린도후서 11장은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