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10–13장 · 바울의 변호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땅에서 배운 것

고린도후서 12장에는 성경에서도 손꼽힐 만큼 놀라운 경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셋째 하늘까지 들려 올라갑니다. 낙원에 들어가고, 사람의 말로 전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바울은 이 경험이 열네 해 전에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무엇을 들었는지 공개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 사람이 몸을 지닌 채 올라갔는지, 몸을 떠나 올라갔는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경험의 놀라운 내용은 감추고, 오히려 그 경험 이후에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자세히 이야기합니다.

그는 육에 박힌 가시를 없애 달라고 세 번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들은 대답은 가시를 제거하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내 은혜가 너에게 넉넉하다. 힘은 약함 가운데서 완성되기 때문이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에 이 장의 중심적인 역설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가보다, 자신의 약함 가운데 예수님의 힘이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다시 고린도 교회의 문제로 돌아와, 자신은 그들의 재산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원한다고 말하고, 그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다 쓰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고린도 교회를 다시 방문할 때 하나님이 자신을 그들 앞에서 낮추실까 두렵다고 말합니다.

하늘로 들려 올라간 경험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사람들 앞에서 낮아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끝납니다.

이 움직임을 따라가면 12장의 중심이 단순히 신비로운 환상이나 치유받지 못한 고통에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이 정말로 보여 주려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어떤 사람을 통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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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하늘까지 올라간 사람은 왜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가

고린도후서 12:1–6 본문 →

유익하지 않은 자랑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

자랑해야 합니다. 유익하지는 않지만, 나는 주님의 환상과 계시로 나아가겠습니다.고린도후서 12:1 · 본디새김

바울은 앞 장에서 다른 사람들의 자랑에 맞서 자신의 고난을 열거했습니다. 이제 그는 자신이 경험한 환상과 계시를 이야기합니다. 상대방이 자랑할 만한 것으로 여기는 영적인 경험까지 자신에게 있었음을 보여 주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반대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환상이나 계시를 자랑했는지는 편지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시작부터 자랑이 유익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자신의 경험이 거짓이거나 무가치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유익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 경험이 자신의 인격이나 사도적 자격을 다른 사람보다 우월하게 만드는 증거로 사용되는 것을 경계합니다.

이 때문에 그의 이야기는 예상과 다르게 전개됩니다.

나는 열네 해 전에 셋째 하늘까지 들려 올라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몸 안에서였는지 나는 모르고, 몸 밖에서였는지도 나는 모릅니다.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고린도후서 12:2 · 본디새김

바울은 「내가 셋째 하늘에 올라갔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그가 가리키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12:7에서 바울이 계시들의 크기와 자신에게 주어진 가시를 직접 연결하므로, 그 사람이 바울 자신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것은 오래된 주석 전통에서도 일반적인 읽기입니다. 그러나 2–4절의 문장 자체에는 그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5절에서 바울은 그런 사람을 두고 자랑하는 것과 자기 자신을 두고 자랑하는 것을 구별합니다. 따라서 그 사람이 바울 자신이라는 이해는 문맥 전체에 근거한 강한 해석이지만, 2절의 문면에 명시된 사실과는 구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렇게 간접적으로 이야기할까요? 한 가지 설득력 있는 설명은 자신이 경험한 계시를 현재 사람들 앞에서 평가받아야 할 자신의 모습과 거리를 두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특별한 경험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 경험이 자신을 평가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특별한 영적 경험을 이야기하면서도 그 경험을 자기 이름의 영광으로 바꾸는 일을 피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

2절에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무엇을 경험했는가뿐 아니라 무엇을 모른다고 인정하는가입니다. 그는 그 경험이 몸을 지닌 상태에서 이루어졌는지, 몸을 떠난 상태에서 이루어졌는지 모른다고 말하고, 같은 설명을 3절에서 다시 반복합니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경험에 관해 확정적인 설명을 만들어 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계시를 이야기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경험에 관해 자신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고 인정합니다.

두 번 반복되는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라는 말은 경험의 진실성을 하나님께 맡기는 동시에, 바울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부분을 분명하게 남겨 둡니다. 본문은 그의 경험이 육체적인 이동이었는지, 몸을 떠난 영적인 경험이었는지 결정할 정보를 주지 않고, 바울도 그 결정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가 아는 것은 그 사람이 들려 올라갔다는 사실입니다.

「들려 올라간」(ἁρπάζω)은 붙잡아 가져가다, 갑자기 데려가다는 뜻의 동사가 수동형으로 쓰인 것입니다. 그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하늘에 올라간 것이 아니라 들려 올라갔음을 나타냅니다. 본문은 그를 들어 올린 주체를 문법적으로 명시하지 않지만, 경험 전체가 하나님의 영역에 속한 일이라는 문맥에서 바울은 자신이 무언가를 성취했다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는 올라간 사람이 아니라 들려 올라간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그가 경험한 것은 자신의 영적인 능력을 증명하는 업적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사건입니다.

셋째 하늘과 낙원은 서로 다른 장소인가

그리고 그런 사람이 — 몸 안에서였는지 몸을 떠나서였는지 나는 모르지만, 하나님이 알고 계십니다 — 낙원으로 들려 올라가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사람이 입 밖에 내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말입니다.고린도후서 12:3–4 · 본디새김

2절에서는 「셋째 하늘」이라고 했는데, 4절에서는 「낙원」이라고 합니다. 이 두 표현은 서로 다른 두 장소를 가리킬까요? 아니면 같은 경험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일까요?

2절과 4절의 표현이 병행되는 방식으로 보아, 셋째 하늘과 낙원이 같은 경험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본문은 그것들이 정확히 어떤 관계에 있는지 설명하지 않으며, 바울이 구체적인 우주 구조를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 속한 특별한 영역에서 계시를 경험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들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은 독자의 호기심을 채워 주지 않습니다.

「말할 수 없는 말」은 단순히 너무 감동적이어서 표현할 수 없었다는 뜻만은 아닙니다. 이어지는 설명은 그것을 사람에게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내용 자체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는 뜻인지, 이해할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뜻인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특별한 계시를 경험했다는 사람은 있는데, 그 계시의 내용은 없습니다.

높이 올라간 경험은 있는데, 그곳에 관해 상세하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랑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그 자랑을 완성하는 정보는 의도적으로 독자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바울이 설명하고 싶은 것은 하늘의 비밀이 아니라, 그 경험을 한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보거나 들은 것 이상으로 평가하지 말라

내가 자랑하려 한다 해도 나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참된 것을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는 삼갑니다. 누가 나를 보는 것이나 나에게서 듣는 것 이상으로 나를 여기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2:6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더 많이 말할 수도 있었고, 그렇게 한다고 반드시 거짓말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염려하는 것은 이야기의 진실성만이 아니라,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게 될 것인가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이 확인할 수 없는 놀라운 경험을 이야기함으로써 특별한 지위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지위를 자신의 권위의 중심에 놓기를 거부합니다. 그가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고린도 사람들이 실제로 보았던 자신의 삶과 들었던 복음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무엇을 가르쳤고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을 섬겼는지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1–6절의 논증은 뜻밖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계시를 자랑하기 위해 이야기하면서, 바로 그 계시가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다음 절에서 그 이유는 더욱 구체적인 형태를 얻습니다.

그처럼 큰 계시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가시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유대교의 묵시문학에는 하늘을 여러 층으로 이해하는 전통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문헌은 하늘을 셋으로 구분하고, 다른 문헌은 일곱 하늘을 이야기합니다. 따라서 「셋째 하늘」이라는 표현이 고대 독자들에게 낯선 것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하늘의 층위를 체계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계시가 지극히 큰데, 왜 가시가 주어졌는가

고린도후서 12:7–8 본문 →

그 계시들이 지극히 크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나치게 높아지지 않도록 나에게 육에 박힌 가시가 주어졌습니다. 곧, 나를 치게 하려는 사탄의 사자입니다. 내가 지나치게 높아지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2:7 · 본디새김

바울은 계시의 놀라움과 자신의 고통을 직접 연결합니다. 「내가 지나치게 높아지지 않도록」이라는 표현이 가시가 주어졌다는 말의 앞과 뒤에 두 번 놓이고, 반복되는 목적 표현 사이에 가시와 사탄의 사자가 들어 있습니다.

특별한 계시를 경험한 사람은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특별한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생각할 위험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경험이 자신을 높이는 근거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앞에서 그 경험을 공개적으로 자랑하지 않으려 한 이유도 그것과 관련됩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삶에 계속 남아 있는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고통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육에 박힌 가시의 정체

「가시」(σκόλοψ)로 옮긴 말은 작은 가시에서 큰 말뚝이나 날카로운 물체까지 표현할 수 있는 낱말입니다. 바울이 이야기하는 것은 그를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고통스러운 무엇입니다.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신체적인 질병이나 장애, 반복적으로 바울을 괴롭히는 반대자, 그의 사역을 방해하는 지속적인 고난을 가리킨다는 견해들이 오래전부터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견해를 결정적으로 입증할 정보는 없습니다.

바울은 가시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그 가시가 자기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설명합니다.

누가 가시를 주었는가

7절의 「주어졌습니다」는 수동형이고, 누가 주었는지는 문장에 명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곧바로 그 가시를 「사탄의 사자」라고 부릅니다. 이 구절에는 서로 다른 두 방향이 함께 나타납니다.

사탄의 사자는 바울을 치려 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바울이 교만하게 높아지지 않도록 하는 계기가 됩니다.

이것을 하나님이 사탄에게 가시를 주라고 직접 명령하셨다는 뜻으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가시가 주어진 경위나 하나님과 사탄의 행위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이 자기 자신을 높이지 못하게 하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에 관해 내린 신앙적인 해석입니다. 여기서 모든 질병과 불행이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 보내신 것이라는 일반 법칙을 도출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도 가시가 떠나기를 원했다

이것을 두고 나는 주님께 그것이 나에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세 번 간청했습니다.고린도후서 12:8 · 본디새김

바울은 가시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처음부터 기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그는 떠나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것도 세 번이나 했습니다.

그는 가시를 불편하지만 유익한 상징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자신에게서 없어지기를 바랐던 무엇으로 이야기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에서 고난의 잔이 지나가기를 구하셨습니다.

바울도 자신의 가시가 떠나기를 구했습니다.

두 장면에서 고난이 제거되기를 바라는 요청은 믿음 없는 행동으로 취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12장의 메시지를 약함을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가 요청한 방식으로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다른 말씀을 주셨습니다.

조금 더 깊이

가시를 신체적인 질병으로 보는 이해는 「육에 박힌 가시」라는 표현과 바울이 그것을 떠나게 해 달라고 간청한 사실에 근거합니다. 반대자나 박해를 가리킨다는 이해는 구약의 용례와 연결됩니다. 민수기 33:55와 에스겔 28:24에서는 가시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주변 사람들을 묘사하는 이미지로 쓰이고, 앞 장에서 바울은 거짓 사도들을 사탄의 활동과 연결하여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4:13–15의 몸의 약함이 반드시 이 가시와 같은 문제였다고, 또는 11장의 반대자들이 바로 이 가시였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겟세마네와의 연결도 주제적인 것입니다. 마태복음 26:39–44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에 자신을 맡기며 세 번 기도하셨다고 기록합니다. 바울의 세 번의 간청과는 분명한 유사성이 있지만, 바울이 의도적으로 겟세마네 기도를 인용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내 은혜가 너에게 넉넉하다」 — 무엇이 완성되는가

고린도후서 12:9–10 본문 →

그리고 그분이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너에게 넉넉하다. 힘은 약함 가운데서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히려 나의 약함을 더없이 기쁘게 자랑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힘이 내 위에 머물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2:9 · 본디새김

이것이 고린도후서 12장의 신학적 중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를 없애 주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자신의 은혜가 충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은혜는 무엇에 충분하다는 뜻일까요? 고통을 견디기에, 사도로서 자신의 일을 계속하기에, 또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데 충분하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중 하나로 의미를 제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맥에서 바울은 자신의 약함 때문에 사명을 감당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약함 가운데 예수님의 힘이 나타난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은혜가 충분하다는 것은 바울에게 더 이상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문제를 안고 있는 상태에서도 예수님의 힘이 그의 삶과 사역 안에서 나타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힘은 왜 약함 가운데서 완성되는가

이 문장은 조심해서 읽어야 합니다.

바울은 약함 자체가 곧 힘이라고 말하지 않고, 모든 약함이 자동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만들어 낸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완성된다」는 어떤 일이 목적에 이르거나 충분히 이루어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본래 불완전하여 인간의 약함을 통해 비로소 더 강해진다는 뜻이 아니라, 그 힘이 인간의 약함이라는 조건 속에서 온전히 나타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어울립니다.

사람들은 흔히 약함이 없어질 때 강함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인 부족함이 없어지고, 건강이 회복되고, 반대자들이 사라지고, 모든 조건이 좋아져야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도 자신의 가시가 제거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그가 약한 채로 있을 때에도 예수님의 힘이 그를 통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약함이 능력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약함 때문에 가려지거나 중단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힘이 내 위에 머문다는 것

8절에서는 약함이 떠나기를 간청했습니다.

9절에서는 자신의 약함을 기쁘게 자랑하겠다고 말합니다.

무엇이 달라졌을까요?

가시가 없어졌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가 경험한 고통의 성격이 달라졌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달라진 것은 그가 자신의 약함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이제 그는 가시가 남아 있는 자신의 삶에서도 예수님의 힘이 머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머물게 하려는 것입니다」(ἐπισκηνόω)로 옮긴 동사는 장막이나 천막과 관련된 말에서 나온 것으로, 천막을 치고 머문다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힘이 바울 위에 장막을 치고 머문다는 그림입니다.

그 힘이 머무는 자리는 바울이 자신을 높이는 자리도, 특별한 계시를 자랑하는 자리도 아닙니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자리입니다.

바울은 더 이상 자신의 약함을 숨겨야 할 결함으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힘이 자기 삶에서 드러나는 자리로 이해합니다.

약할 때 강하다는 말의 범위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함과 모욕과 곤경과 박해와 막다른 처지를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때, 바로 그때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2:10 · 본디새김

바울은 이제 자신의 경험을 더 넓은 사도적 삶에 적용합니다. 여기서 약함은 추상적인 인간의 불완전함만이 아니라, 바울이 예수님을 전하고 섬기는 과정에서 경험했던 실제적인 어려움들입니다.

그러므로 「약할 때 강하다」는 말을 모든 종류의 고통을 무조건 기뻐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고통을 위해 고통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실제로 고통이 제거되기를 기도했고, 11장에서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광주리에 담겨 도망친 일을 기록했습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행동을 정당한 권위의 모습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장을 이용하여 고통받는 사람에게 그 고통을 무조건 참고 기뻐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본문의 방향을 벗어납니다. 바울은 고통을 해결하려는 시도를 포기하라는 보편적인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제거할 수 없었던 약함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은혜가 충분했다는 사실을 고백합니다.

그런데도 그가 예수님을 위하여 겪는 약함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고통이 좋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힘이 그 고통 속에서도 그를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은혜는 고통을 선한 것으로 바꾸어 이름 붙이게 하기보다, 고통이 바울의 사명을 무너뜨리지 못하게 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사도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약함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힘이 나타나는 사람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장막 이미지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신다는 성경의 주제와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40:34–38에서는 여호와야훼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하고 구름이 그 위에 머뭅니다. 바울이 그 구절을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장막과 연결하는 이미지는 이 표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이 이해는 고린도후서 전체의 십자가 신학과도 이어집니다. 4:7–12에서 바울은 자신과 동역자들을 질그릇에 보배를 지닌 사람들로 묘사하며, 능력의 뛰어남이 자신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것임을 보여 주고, 예수님의 죽음과 생명이 사도적 고난 가운데 어떻게 나타나는지 설명합니다. 다음 장 13:4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능력의 관계를 더욱 직접적으로 설명합니다. 12장은 그 주제를 바울 자신의 가시라는 더욱 개인적인 형태로 보여 줍니다.

기적보다 앞에 놓인 견딤

고린도후서 12:11–13 본문 →

나는 어리석은 자가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그렇게 하도록 몰아붙였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내세웠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 해도 저 지극히 크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뒤지지 않았으니 말입니다.고린도후서 12:11 · 본디새김

자신이 이런 자랑을 해야 했던 이유가 고린도 사람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바울을 인정해 주었다면 바울이 스스로 자신의 자격을 길게 변호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이 문장 역시 역설적입니다.

바울은 다른 사도들보다 못하지 않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그는 사도로서 자신의 사명이 실제적이고 정당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 사실을 자기 자신의 위대함과 동일시하지도 않습니다.

사도의 표징은 온전한 견딤 속에서, 표징과 놀라운 일과 능력 있는 일들로 여러분 가운데서 이루어졌습니다.고린도후서 12:12 · 본디새김

바울은 표징과 놀라운 일과 능력 있는 일들만 언급하지 않고, 「온전한 견딤 속에서」라는 말을 함께 놓습니다. 견딤은 어려움 아래에서도 계속 견디며 머무는 인내를 뜻합니다.

견딤과 기적의 관계는 두 가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견딤 자체도 참된 사도의 중요한 표징으로 포함된다고 읽을 수 있고, 표징과 놀라운 일들이 끈질긴 견딤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상황 설명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문법적으로는 둘을 완전히 분리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어도 바울이 사도의 표징을 놀라운 능력의 행사만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힘이 약함 가운데 완성된다는 9절의 말씀과 잘 어울립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한 사람인 동시에, 그 능력이 나타나는 과정에서 모욕과 박해와 어려움을 겪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에게 기적과 견딤은 서로 무관한 두 종류의 사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사도적 삶의 서로 다른 측면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진지하게 자신의 사도적 자격을 설명하던 바울은 바로 다음 절에서 다시 반어를 사용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나 자신이 여러분에게 짐이 되지 않았다는 것 말고 여러분이 다른 교회들보다 못한 대우를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 잘못에 대해서는 나를 용서해 주십시오.고린도후서 12:13 · 본디새김

이것은 진지한 죄의 고백이 아니라 날카로운 반어입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면서 고린도 교회에 재정적인 부담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일이 자신의 사도적 지위를 낮게 평가하는 근거가 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 평가의 부조리함을 드러냅니다. 자신이 그들에게 짐이 되지 않은 것이 정말 잘못이라면, 그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바울이 어떤 방식으로 그들을 섬겼는지를 오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자신의 방문 계획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더욱 직접적으로 밝힙니다.

「내가 찾는 것은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 여러분입니다」

고린도후서 12:14–15 본문 →

보십시오, 나는 이번에 세 번째로 여러분에게 갈 채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짐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찾는 것은 여러분의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기 때문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위해 쌓아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를 위해 쌓아 두어야 하니 말입니다.고린도후서 12:14 · 본디새김

바울은 세 번째 방문을 준비하면서, 그 방문에서도 경제적인 부담을 주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이번에는 이전보다 더욱 강한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는 고린도 사람들이 가진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 자신을 원합니다.

이것은 그들을 자신의 사적인 소유로 만들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들과의 관계이며, 그들이 예수님 안에서 온전히 세워지는 일입니다. 셋째 하늘까지 들려 올라간 경험을 말할 수 있었던 사람이 실제로 얻으려 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높여 주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왜 그는 그들에게서 재정적인 지원을 받지 않으려 합니까? 바울은 자신을 부모의 위치에 놓습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복음을 통해 그가 영적으로 돌보아 온 자녀와 같습니다.

부모의 역할은 자녀에게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자녀를 위해 쌓아 두는 일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자신에게 경제적인 유익을 제공해야 할 집단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이 돌보고 세워야 할 공동체로 바라봅니다.

물론 이 비유를 자녀가 부모를 경제적으로 도울 책임이 전혀 없다는 일반 명령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복음을 처음 전한 사도와 고린도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부모가 자녀를 돌보는 모습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는 더없이 기쁘게 여러분의 목숨을 위해 내 것을 쓰고, 나 자신까지 다 쓰이겠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더 많이 사랑하면 나는 덜 사랑받는 것입니까?고린도후서 12:15 · 본디새김

「쓰고」(δαπανάω)와 「다 쓰이겠습니다」(ἐκδαπανάομαι)는 원문에서 같은 어근을 쓰면서 두 번째 표현을 더욱 강하게 만듭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진 것을 사용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완전히 소모되기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말합니다. 그는 단순히 많은 고난을 겪었던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의 삶을 기꺼이 사용하려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결심에는 아픈 질문이 따라옵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을 더 깊이 사랑하고 더 많이 헌신할수록, 오히려 그들로부터 덜 사랑받는 것 같은 관계의 역설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무런 갈등도 없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동기를 의심하고 자신의 권위를 문제 삼는 사람들을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계속 사용하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힘이 바울의 약함 가운데 나타난다는 말은 이제, 사랑을 충분히 돌려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모습으로 구체화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사랑의 선언을 한 직후, 자신에게 제기될 수 있는 또 다른 의혹을 다룹니다.

조금 더 깊이

「세 번째로 여러분에게 갈 채비」는 세 번째 방문을 준비한다는 의미로 일반적으로 이해됩니다. 다만 12:14만으로 이전에 정확히 몇 차례 방문을 완료했고 어떤 방문 계획이 취소되었는지까지 재구성할 수는 없으며, 고린도후서 2:1과 13:1–2를 함께 고려해야 합니다. 부모 비유는 고린도전서 4:14–15에서도 나타나며, 바울은 그곳에서 자신이 복음으로 그들을 낳은 아버지와 같다고 설명했습니다. 15절은 8:9에서 설명한 예수님의 은혜, 곧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낮추셨다는 사실과 자신이 가진 것을 다른 사람의 유익을 위해 내어놓는다는 주제로 연결됩니다. 다만 12:15가 8:9를 직접 인용하는 것은 아닙니다.

직접 돈을 받지 않았어도 속임수가 있었을까

고린도후서 12:16–18 본문 →

내가 여러분에게 짐을 지우지 않았다고 해 둡시다. 그러나 나는 간교한 사람이라 속임수로 여러분을 붙잡았다는 것이지요.고린도후서 12:16 · 본디새김

바울은 여기서 다시 반대자의 말을 옮기는 듯한 풍자를 사용합니다. 자신이 짐을 지우지 않았다는 사실은 인정하더라도, 누군가는 그가 다른 방법으로 그들을 속였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구절이 실제로 제기된 비난을 그대로 인용한 것인지, 바울이 예상 가능한 비난을 수사적으로 구성한 것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17–18절의 질문을 보면 문제의 초점이 분명해집니다. 바울이 직접 돈을 받지는 않았더라도 자신이 보낸 사람들을 통해 부당한 이득을 취했을 가능성을 그는 반박하고 있습니다.

그의 반박은 놀라울 만큼 구체적입니다. 그는 「내가 여러분에게 보낸 사람들 가운데 누구를 통하여 여러분에게서 부당한 이득을 취하기라도 했습니까?」라고 물으며, 자신의 마음이 깨끗하다고 주장하는 대신 자신이 보낸 사람들의 행동을 확인해 보라고 합니다. 그다음에는 디도를 직접 언급합니다.

나는 디도에게 가도록 권했고 그 형제를 디도와 함께 보냈습니다. 디도가 여러분에게서 부당한 이득을 취했습니까? 우리가 같은 영으로 걷지 않았습니까? 같은 발자취를 따라 걷지 않았습니까?고린도후서 12:18 · 본디새김

첫 질문은 부정, 뒤 두 질문은 긍정을 기대합니다. 디도는 부당한 이득을 취하지 않았고, 바울과 디도는 같은 영으로 걷고 같은 발자취를 따랐습니다. 여기서 「같은 발자취」는 실제 걸어간 길이 완전히 같았다는 뜻이 아니라, 같은 행동 방식과 사역의 태도를 따랐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은 앞서 성도들을 위한 헌금을 맡기면서 디도와 다른 형제들을 소개한 일과 연결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맡은 일을 혼자 처리하지 않고 교회들이 신뢰할 수 있는 동역자들과 함께 수행했으며, 지금 그 동역자들의 행동 역시 검증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나는 사도이므로 나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영적인 경험이나 높은 지위가 그의 경제적 행동에 대한 검증을 불필요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특별한 계시를 경험했고, 하나님의 능력 있는 일들을 고린도 교회 가운데서 경험하게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재정적인 문제에 관한 의혹을 다룰 때에는 그 사실들을 자신의 정직함에 대한 유일한 증거로 삼지 않고, 그 권위를 검증할 수 없는 특별한 영역에 가두지 않습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의 모든 자기 변호를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조금 더 깊이

「간교한 사람」이라는 표현은 11:3과 주제적으로 이어집니다. 그곳에서 바울은 뱀이 간교함으로 하와를 속인 일을 이야기하며, 다른 가르침이 고린도 사람들을 속일 위험을 경고했습니다. 같은 그리스어 단어가 그대로 반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바울은 자신이 속이는 사람으로 의심받을 수 있는 상황을 다룹니다.

변호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세움이다

고린도후서 12:19 본문 →

여러분은 우리가 여러분에게 우리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고 여태 여겨 왔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모든 것은 여러분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2:19 · 본디새김

독자는 지금까지 바울이 계시와 가시, 사도의 표징, 자신을 내어놓겠다는 결심, 그리고 자신과 동역자들의 정직함을 들어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변호하는 이야기를 읽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모든 일을 단순한 자기 변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가 고린도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명예를 회복하는 것만을 최종 목표로 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합니다. 자신을 최종적으로 평가하시는 분은 고린도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말은 고린도 사람들을 향하고 있고, 바울은 그들의 믿음과 삶이 실제로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여기서 「세우다」는 건축이나 세움을 뜻하며, 공동체를 세우고 성장하게 하는 일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10:8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권위를 주신 목적이 고린도 사람들을 세우는 것이지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동안 바울의 말이 강해지고 날카로워진 이유도 그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의심하는 사람들을 향해 「사랑하는 여러분」이라고 말합니다. 앞에서는 강하게 반박했고 경제적 의혹도 단호하게 부인했지만,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로 부릅니다.

이 호칭이 다음 두 절의 분위기를 결정합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다시 증명하려 하지 않고,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까 두렵다고 고백합니다. 그의 말은 자기 자랑에서 시작해 염려로 끝나게 됩니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두려워하는 것

고린도후서 12:20–21 본문 →

내가 가서 여러분을 내가 바라는 모습으로 보지 못하고, 나도 여러분이 바라지 않는 모습으로 여러분에게 드러나게 될까, 다툼과 시기와 성냄과 파벌과 헐뜯음과 수군거림과 우쭐댐과 소란이 있을까 두렵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2:20 · 본디새김

하나는 고린도 사람들이 자신이 바라는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지 않을 가능성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도 그들이 바라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가능성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았다면 자신이 엄격하게 행동해야 할 수도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을 바라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힘이 자신의 약함 가운데 나타난다는 말은 그가 어떤 상황에서도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필요하다면 잘못을 바로잡고 공동체의 질서를 회복하려 합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것은 고린도 사람들이 스스로 회개하고 변화되어, 기쁨 가운데 서로를 만나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여덟 가지 모습

20절의 목록에 나오는 여덟 가지는 대부분 공동체 안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행동입니다.

다툼은 사람들을 서로 맞서게 하고, 시기는 다른 사람이 누리는 것을 기뻐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성냄은 갈등을 폭발시키고, 파벌은 공동체를 작은 집단으로 갈라놓습니다. 헐뜯음과 수군거림은 직접 마주하지 않은 자리에서 다른 사람의 평판을 손상시킵니다. 우쭐댐은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높게 여기게 하고, 소란은 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립니다.

이 목록에 등장하는 죄들은 모두 노골적으로 종교적인 행동은 아닙니다.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거나 거짓 사도를 따르는 일만이 문제가 아니라, 일상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를 헐뜯고 시기하고 자신을 높이는 태도도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바울은 복음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과 실제로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분리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목적은 그들이 바울을 높이 평가하도록 만드는 것만이 아닙니다. 서로를 파괴하지 않고 예수님의 공동체답게 살아가도록 하는 것입니다.

마지막 두려움은 분노가 아니라 애통이다

내가 다시 갈 때에 내 하나님이 여러분 앞에서 나를 낮추지 않으실까, 그리고 전에 죄를 짓고 자기들이 저지른 더러움과 음행과 방탕을 회개하지 않은 많은 사람을 두고 내가 애통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고린도후서 12:21 · 본디새김

앞의 목록이 주로 공동체 내부의 갈등과 분열에 관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더러움과 음행과 방탕, 곧 성적인 부도덕과 관련된 문제들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과거에 죄를 지었다는 사실만을 문제 삼지 않고 「회개하지 않은」 사람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죄를 지었던 사람은 영원히 공동체에서 회복될 수 없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잘못이 계속되는데도 회개하지 않는 상황입니다.

그는 자신이 그들을 처벌할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애통하게 될까 두렵다고 말합니다. 「애통하다」는 죽음이나 큰 상실을 경험한 사람이 깊이 슬퍼하는 일을 가리킬 수 있는 말입니다. 바울에게 공동체가 회개하지 않은 채 죄 가운데 머무르는 일은 단순한 규정 위반이 아니라 깊이 애통할 만한 일입니다.

「내 하나님이 여러분 앞에서 나를 낮추지 않으실까」라는 말도 7절과 이어집니다. 앞에서 바울은 계시 때문에 지나치게 높아지지 않도록 가시가 주어졌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가 말하는 낮아짐의 이유는 다릅니다. 교회가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슬픔과 굴욕을 경험하게 될 가능성입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를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의 죄와 불순종을 가볍게 여길 수 없고, 그들에게 일어나는 일이 자신에게도 영향을 미칩니다. 그렇기에 그가 마지막으로 표현하는 감정은 분노의 승리가 아니라 애통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조금 더 깊이

20절의 목록은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이미 나타났던 문제들과 연결됩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자신이 따르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서로를 구별하고 자랑하며, 지혜와 지위와 능력에 관한 평가로 자신들이 다른 사람보다 낫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21절의 성적 부도덕 문제는 고린도전서 5–7장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의 몸과 삶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 설명했습니다.

하늘에 올라간 사람의 마지막 두려움

고린도후서 12:1–21 본문 →

고린도후서 12장에는 두 종류의 말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셋째 하늘에서 들었지만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바울이 자신의 약함 속에서 들었고 공동체를 위해 공개적으로 전하는 말, 「내 은혜가 너에게 넉넉하다. 힘은 약함 가운데서 완성되기 때문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바울은 첫 번째 말을 통해 자신의 특별한 지위를 확립하려 하지 않습니다. 두 번째 말씀에 따라 자신의 삶과 사도적 권위를 이해합니다. 그가 고린도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싶은 것은 하늘에서 무엇을 보았는가가 아니라, 예수님의 힘이 어떻게 약한 사람을 통해 일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 힘은 화려한 경험으로 자신을 높이거나 다른 사람을 지배하는 힘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면서도 사랑과 책임을 포기하지 않고 자신을 내어놓아 다른 사람을 세우는 힘입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은혜는 잘못을 무시하는 근거가 되지 않고, 사람들이 변화될 수 있다는 기대를 가지고 계속 사랑하는 근거가 됩니다.

처음에 그는 하늘에 들려 올라간 사람을 이야기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사람들 앞에서 낮아질지도 모르는 자신을 이야기합니다.

처음에는 말할 수 없는 신비로운 계시가 있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다투고, 서로를 헐뜯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죄 가운데 머무르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그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자신이 특별한 사도라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일이 아니라, 고린도 사람들이 자신이 바라는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지 않은 것입니다.

고린도후서 12장은 그 슬픔에 대한 두려움에서 멈춥니다.

셋째 하늘의 비밀을 들은 사람은 그 계시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삶에서 멀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의 삶에 더욱 깊이 연결되어, 사랑하는 사람들을 세우기 위해 감당해야 할 또 하나의 약함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내 은혜가 너에게 넉넉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