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10–13장 · 바울의 변호
하늘에 올라간 사람이 땅에서 배운 것
고린도후서 12장에는 성경에서도 손꼽힐 만큼 놀라운 경험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사람이 셋째 하늘까지 들려 올라갑니다. 낙원에 들어가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바울은 이 경험이 열네 해 전에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무엇을 보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들었는지도 공개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그 사람이 몸을 지닌 채 올라갔는지, 몸을 떠난 상태로 올라갔는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이런 경험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보통 자신이 얼마나 특별한 사람인지를 보여 주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경험의 놀라운 내용을 감추고, 오히려 그 경험 이후에 자신에게 주어진 고통을 자세히 이야기합니다. 그는 몸에 주어진 가시를 없애 달라고 세 번 간청했지만, 그가 들은 대답은 가시를 없애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내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에 이 장의 중심적인 역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을 기쁘게 자랑하겠다고 선언한 뒤, 다시 고린도 교회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자신은 그들의 재산이 아니라 그들 자신을 원한다고 말하고, 그러다가 마지막에는 고린도 교회를 다시 방문할 때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들 앞에서 낮추실까 두렵다고 말합니다.
하늘로 들려 올라간 경험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사람들 앞에서 낮아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으로 끝납니다.
바울이 정말로 보여 주려는 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어떤 사람을 통해,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셋째 하늘까지 올라간 사람은 왜 자신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가
유익하지 않은 자랑을 계속해야 하는 이유
자랑을 계속해야 하겠습니다. 도움이 되지는 않지만, 이제 주님의 환상과 계시에 대해 말하겠습니다.고린도후서 12:1 · 두루새김
바울은 앞 장에서 다른 사람들의 자랑에 맞서 자신의 고난을 하나씩 이야기했습니다. 이제 그는 상대방이 자랑할 만한 것으로 여기는 영적인 경험까지 자신에게 있었음을 보여 주려는 듯 환상과 계시를 이야기합니다. 다만 반대자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환상이나 계시를 자랑했는지는 편지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시작부터 자랑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경험이 거짓이거나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자기 자신을 높이는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의 이야기는 예상과 다르게 펼쳐집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 사람은 열네 해 전에 셋째 하늘까지 들려 올라갔습니다. 몸을 지닌 채였는지 몸을 떠난 상태였는지 나는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고린도후서 12:2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이 셋째 하늘에 올라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12:7에서 바울이 놀라운 계시와 자신에게 주어진 가시를 직접 연결하므로, 그 사람이 바울 자신이라고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오래된 주석 전통에서도 일반적인 읽기입니다. 그러나 2–4절에는 그 사람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고, 5절에서 바울은 그런 사람을 두고 자랑하는 것과 자기 자신을 두고 자랑하는 것을 구별합니다. 따라서 이 이해는 문맥 전체에 근거한 강한 해석이지만, 2절의 문면에 명시된 사실과는 구분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렇게 간접적으로 이야기할까요? 한 가지 설득력 있는 설명은 자신이 경험한 계시를 현재 사람들 앞에서 평가받아야 할 자신의 모습과 거리를 두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그 경험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것이 자신을 평가하는 결정적인 기준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습니다.
바울이 아는 것과 모르는 것
바울은 무엇을 경험했는지뿐 아니라 무엇을 모르는지도 인정합니다. 그리고 같은 설명을 3절에서 다시 반복합니다.
나는 그 사람을 알고 있습니다. 그가 몸을 지닌 채였는지 몸을 떠난 상태였는지 나는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고린도후서 12:3 · 두루새김
그는 하나님에게서 받은 계시를 이야기하는 사람이면서, 바로 그 경험에 관해 자신의 지식에는 한계가 있다고 인정합니다. 두 번 반복되는 「하나님께서는 아십니다」는 경험의 진실성을 하나님께 맡기는 동시에, 바울 자신이 알지 못하는 부분을 분명하게 남겨 둡니다. 본문은 그 경험이 몸으로 이동한 일이었는지 결정할 정보를 주지 않고, 바울도 그 결정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가 아는 것은 그 사람이 들려 올라갔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올라간 사람이 아니라 들려 올라간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그가 경험한 것은 자신의 영적인 능력을 증명하는 업적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진 사건입니다.
셋째 하늘과 낙원은 서로 다른 장소인가
2절에서는 「셋째 하늘」이라고 했는데, 4절에서는 「낙원」이라고 합니다.
그는 낙원으로 들려 올라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습니다. 사람이 입 밖에 내도록 허락받지 않은 말입니다.고린도후서 12:4 · 두루새김
두 표현이 나란히 놓이는 방식으로 보아, 셋째 하늘과 낙원이 같은 경험을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본문은 그것들이 정확히 어떤 관계에 있는지 설명하지 않고, 바울이 구체적인 우주 구조를 설명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하나님께 속한 특별한 영역에서 계시를 경험했다고 말할 뿐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들은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바울은 독자의 호기심을 채워 주지 않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이 내용 자체가 인간의 언어로 표현될 수 없다는 뜻인지, 이해할 수는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는 뜻인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 내용을 공개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특별한 계시를 경험했다는 사람은 있는데, 그 계시의 내용은 없습니다. 자랑할 수 있는 일이 있는데, 그 자랑을 완성하는 정보는 의도적으로 독자에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바울이 설명하고 싶은 것은 하늘의 비밀이 아니라, 그 경험을 한 사람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보거나 들은 것 이상으로 평가하지 말라
내가 자랑하려고 해도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사실을 말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자랑을 삼갑니다. 누가 내게서 보고 들은 것 이상으로 나를 높이 평가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2:6 · 두루새김
그가 더 많이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거짓말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가 염려하는 것은 그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평가하게 될 것인가입니다.
사람은 다른 사람이 확인할 수 없는 놀라운 경험을 이야기함으로써 특별한 지위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지위를 자신의 권위의 중심에 놓기를 거부합니다. 그가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고린도 사람들이 실제로 보았던 자신의 삶과 들었던 복음, 그가 무엇을 가르쳤고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을 섬겼는가입니다.
여기서 1–6절의 논증은 뜻밖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계시를 이야기하면서, 바로 그 계시가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는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처럼 놀라운 계시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가시가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유대교의 묵시문학에는 하늘을 여러 층으로 이해하는 전통들이 있었습니다. 어떤 문헌은 하늘을 셋으로 구분하고, 다른 문헌은 일곱 하늘을 이야기하므로, 「셋째 하늘」이라는 표현이 고대 독자들에게 낯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들려 올라갔습니다」는 붙잡아 가져가다, 갑자기 데려가다는 뜻의 그리스어 동사의 수동형으로, 그 사람이 자기 힘으로 올라간 것이 아님을 나타냅니다. 본문은 그를 들어 올린 주체를 문법적으로 명시하지 않습니다.
계시가 지극히 큰데, 왜 가시가 주어졌는가
그처럼 놀라운 계시를 받았다는 이유로도 나를 높이 평가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를 지나치게 높이지 않도록 내 몸에 가시가 주어졌습니다. 그것은 나를 때리도록 주어진 사탄의 심부름꾼입니다. 내가 스스로를 지나치게 높이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2:7 · 두루새김
바울은 계시의 놀라움과 자신의 고통을 직접 연결합니다. 이 문장은 스스로를 지나치게 높이지 않게 하려는 목적을 두 번 말하고, 그 반복되는 목적 표현 사이에 가시와 사탄의 심부름꾼이 들어 있습니다.
특별한 계시를 경험한 사람은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특별한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 생각할 위험이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알고 있었고, 앞에서 그 경험을 공개적으로 자랑하지 않으려 한 이유도 그것과 관련됩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삶에 계속 남아 있는 고통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고통이 무엇인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육에 박힌 가시의 정체
「가시」(σκόλοψ)로 옮긴 말은 작은 가시에서 큰 말뚝까지 뾰족한 물체를 가리킬 수 있는 말로, 바울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는 고통스러운 무엇을 나타냅니다. 그 정체에 대해서는 몸의 질병이나 장애, 반복적으로 바울을 괴롭히는 반대자, 그의 사역을 방해하는 지속적인 고난이라는 해석이 오래전부터 제시되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한 견해를 결정적으로 입증할 정보는 없습니다. 바울은 가시의 정체를 밝히지 않고 그 가시가 자기에게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설명합니다.
누가 가시를 주었는가
「주어졌습니다」는 수동형이어서, 누가 주었는지는 문장에 명시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곧바로 그 가시를 「사탄의 심부름꾼」이라고 부릅니다.
사탄의 심부름꾼은 바울을 때리려 합니다.
그러나 그 고통은 바울이 교만하게 자신을 높이지 않도록 하는 계기가 됩니다. 본문은 가시가 주어진 경위나 하나님과 사탄의 행위가 어떤 방식으로 연결되었는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직접 명령하셨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고통을 바라보는 바울의 신앙적인 해석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질병과 불행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기 위해 보내신 것이라는 일반 법칙을 여기서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구체적인 경험에 관해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도 가시가 떠나기를 원했다
나는 이것이 내게서 떠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 간청했습니다.고린도후서 12:8 · 두루새김
바울은 가시의 의미를 신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처음부터 기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닙니다. 그는 가시를 불편하지만 유익한 상징으로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자신에게서 없어지기를 바랐던 무엇으로 이야기합니다.
고난이 없어지기를 바라는 요청은 믿음 없는 행동으로 취급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12장의 메시지를 약함을 사랑하라는 명령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가 요청한 방식으로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다른 말씀을 주셨습니다.
조금 더 깊이
가시가 몸의 질병이라는 이해는 「내 몸에 가시가 주어졌습니다」라는 표현과, 바울이 그것을 떠나게 해 달라고 간청한 사실에 근거합니다. 반대자나 박해를 가리킨다는 이해는 민수기 33:55와 에스겔 28:24에서 가시가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주변 사람들을 묘사하는 이미지로 쓰인 예, 그리고 앞 장에서 바울이 거짓 사도들을 사탄의 활동과 연결한 것에 근거합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 4:13–15의 몸의 약함이 반드시 이 가시였다고 확정할 수 없고, 11장의 반대자들이 바로 이 가시였다고 단정할 수도 없습니다. 「간청했습니다」로 옮긴 말은 문맥에 따라 권하다, 위로하다로도 쓰이는 말입니다. 이 기도는 마태복음 26:39–44에서 예수님께서 고난의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세 번 기도하신 겟세마네 장면과 주제적으로 연결되지만, 바울이 의도적으로 그 기도를 인용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내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 — 무엇이 완성되는가
주님께서는 내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 능력은 약함 가운데서 온전히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오히려 나의 약함을 더없이 기쁘게 자랑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위에 머물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2:9 · 두루새김
이것이 고린도후서 12장의 신학적 중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시를 없애 주시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 은혜가 고통을 견디기에, 사도의 일을 계속하기에, 하나님과의 관계를 유지하기에 충분하다는 것인지, 본문은 그중 하나로 의미를 제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문맥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은혜가 충분하다는 것은 바울에게 더 이상 아무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문제를 안고 있는 상태에서도 예수님의 능력이 그의 삶과 사역 안에서 나타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힘은 왜 약함 가운데서 완성되는가
바울은 약함 자체가 곧 능력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모든 약함이 저절로 하나님의 능력을 만들어 낸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본래 불완전하여 인간의 약함을 통해 비로소 더 강해진다는 뜻도 아닙니다. 그 능력이 인간의 약함이라는 조건 속에서 온전히 나타난다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문맥에 어울립니다.
사람들은 흔히 약함이 없어질 때 강함이 온다고 생각합니다. 건강이 회복되고, 반대자들이 사라지고, 모든 조건이 좋아져야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바울도 자신의 가시가 없어지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그가 약한 채로 있을 때에도 예수님의 능력이 그를 통해 일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약함이 능력의 근원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약함 때문에 가려지거나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힘이 내 위에 머문다는 것
8절에서는 약함이 떠나기를 간청했습니다.
9절에서는 자신의 약함을 기쁘게 자랑하겠다고 말합니다.
가시가 없어졌다는 말은 없습니다. 달라진 것은 그가 자신의 약함을 이해하는 방식입니다. 이전에는 가시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그 가시가 남아 있는 자신의 삶에서도 예수님의 능력이 머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머물게 하려는 것입니다」의 원어 동사는 에피스케노오(ἐπισκηνόω)입니다. 장막과 관련된 말에서 나온 동사로, 천막을 치고 머물다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바울 위에 장막을 치고 머문다는 그림입니다.
그 능력이 머무는 자리는 바울이 자신을 높이는 자리도, 특별한 계시를 자랑하는 자리도 아닙니다.
자신의 약함을 인정하는 자리입니다.
바울은 더 이상 자신의 약함을 숨겨야 할 결함으로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자기 삶에서 드러나는 자리로 이해합니다.
약할 때 강하다는 말의 범위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겪는 약함, 모욕, 어려움, 박해, 막다른 처지를 기뻐합니다. 내가 약할 때, 바로 그때 나는 강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2:10 · 두루새김
여기서 그가 말하는 약함은 막연한 인간의 불완전함만이 아닙니다. 바울이 예수님을 전하고 섬기는 과정에서 겪은 모욕, 어려움, 박해, 막다른 처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모든 종류의 고통을 무조건 기뻐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실제로 고통이 없어지기를 기도했고, 11장에서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광주리에 담겨 도망친 일을 기록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이용하고 억누르는 행동을 정당한 권위의 모습으로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따라서 이 장을 이용하여 고통받는 사람에게 그 고통을 무조건 참고 기뻐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은 본문의 방향을 벗어납니다.
그런데도 그가 예수님을 위하여 겪는 약함을 기뻐할 수 있는 것은 고통이 좋기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능력이 그 고통 속에서도 그를 떠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는 약하기 때문에 강한 것이 아닙니다. 약한 자신에게 예수님의 능력이 머물기 때문에 강하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약함에도 불구하고 사도인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약함 가운데서도 예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사람으로 사역하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온전히 이루어지기」로 옮긴 말은 어떤 일이 목적에 이르거나 충분히 이루어지는 것을 나타냅니다. 장막 이미지는 출애굽기 40:34–38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성막에 가득하고 구름이 그 위에 머물며 광야의 이스라엘을 인도하는 장면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 구절을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장막과 연결하는 성경의 이미지가 이 표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또 고린도후서 4:7–12에서 바울은 자신과 동역자들을 질그릇에 보물을 지닌 사람들로 묘사하며, 뛰어난 능력이 하나님께 속한 것이고 예수님의 죽음과 생명이 자신의 고난 가운데 나타난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주제는 13:4에서 예수님의 십자가와 하나님의 능력의 관계로 더욱 직접적으로 설명됩니다.
기적보다 앞에 놓인 견딤
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그렇게 하도록 몰아붙였습니다. 여러분이 나를 내세워 주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일지라도, 그토록 대단하다는 사도들보다 조금도 뒤지지 않았으니 말입니다.고린도후서 12:11 · 두루새김
고린도 사람들이 바울을 내세워 주었다면 그가 스스로 자신의 자격을 길게 변호할 필요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대단하다는 사도들보다 뒤지지 않았다고 말하면서 동시에 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일이 정당하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 사실을 자기 자신의 위대함과 같게 여기지도 않습니다.
여러분 가운데서 내가 사도라는 증거가 나타났습니다. 내가 모든 일을 참아 견디는 가운데 표징과 놀라운 일과 능력 있는 일들이 이루어진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2:12 · 두루새김
바울은 표징과 놀라운 일과 능력 있는 일들 곁에 「내가 모든 일을 참아 견디는 가운데」라는 말을 함께 놓습니다. 이 견딤은 어려움 아래에서도 계속 머무는 인내를 뜻합니다.
견딤과 기적의 관계는 두 가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견딤 자체도 참된 사도의 증거로 포함된다고 읽을 수 있고, 표징과 놀라운 일들이 끈질긴 견딤 가운데 이루어졌다는 상황 설명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문법적으로는 둘을 완전히 분리하기 어렵지만, 어느 쪽으로 읽어도 바울이 사도라는 증거를 놀라운 능력을 행하는 일만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에게 기적과 견딤은 서로 무관한 두 종류의 사역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사도로서의 삶의 서로 다른 측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다음 절에서 다시 반어를 사용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짐이 되지 않았다는 것 말고, 여러분이 다른 교회들보다 못한 대우를 받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 잘못은 용서해 주십시오.고린도후서 12:13 · 두루새김
이것은 진지한 죄의 고백이 아니라 날카로운 반어입니다. 그가 고린도 교회에 경제적인 부담을 지우지 않은 일이 오히려 그의 사도로서의 지위를 낮게 평가하는 근거가 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정말 잘못이라면 용서해 달라는 말로, 바울은 그 평가가 얼마나 앞뒤가 맞지 않는지 드러냅니다.
그래서 그는 이제 자신의 방문 계획을 이야기하면서, 그들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더욱 직접적으로 밝힙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여러분의 재산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입니다」
보십시오. 나는 이제 세 번째로 여러분을 찾아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이번에도 여러분에게 짐이 되지 않겠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여러분의 재산이 아니라 여러분 자신입니다. 자녀가 부모를 위해 재산을 모아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를 위해 모아 두어야 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2:14 · 두루새김
바울은 세 번째 방문을 준비하면서, 이번에도 경제적인 부담을 주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여러분 자신」을 원한다는 것은 고린도 사람들을 자신의 개인적인 소유로 만들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그들과의 관계이며, 그들이 예수님 안에서 온전히 세워지는 일입니다.
셋째 하늘까지 들려 올라간 사람이 실제로 얻으려 하는 것은 사람들이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높여 주는 일이 아닙니다.
그 이유를 그는 가족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복음을 통해 그가 영적으로 돌보아 온 자녀와 같고, 부모의 역할은 자녀에게서 가능한 한 많은 것을 얻어 내는 일이 아니라 자녀를 위해 재산을 모아 두는 일입니다. 다만 이 비유를 자녀가 부모를 도울 책임이 전혀 없다는 일반 명령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복음을 처음 전한 사도와 고린도 교회의 관계를 설명하기 위해 이 모습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는 여러분을 위해 더없이 기쁘게 내 것을 쓰고, 나 자신까지 다 내어 주겠습니다. 내가 여러분을 더 많이 사랑하면, 나는 오히려 덜 사랑받습니까?고린도후서 12:15 · 두루새김
「내 것을 쓰고」(δαπανάω)와 「나 자신까지 다 내어 주겠습니다」(ἐκδαπανάομαι)는 같은 어근의 두 말로, 두 번째 표현이 더 강합니다. 바울은 가진 것을 사용할 뿐 아니라, 자기 자신까지 완전히 소모되기를 기꺼이 받아들이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결심에는 아픈 질문이 따라옵니다.
바울은 더 깊이 사랑하고 더 많이 헌신할수록 오히려 덜 사랑받는 것 같은 관계의 모순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는 아무런 갈등도 없는 이상적인 공동체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동기를 의심하고 자신의 권위를 문제 삼는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말하고, 그들을 위해 계속 자신을 쓰겠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바울의 약함 가운데 나타난다는 말은 이제, 사랑을 충분히 돌려받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공동체를 위해 자신을 내어놓는 모습으로 구체화됩니다.
직접 돈을 받지 않았어도 속임수가 있었을까
내가 여러분에게 짐을 지우지 않았다고 해 둡시다. 그런데 내가 꾀 많은 사람이라 속임수로 여러분을 붙잡았다고들 말합니다.고린도후서 12:16 · 두루새김
바울은 다시 반대자의 말을 옮기는 듯한 풍자를 사용합니다. 이것이 실제로 제기된 비난을 그대로 인용한 것인지, 예상할 수 있는 비난을 반박을 위해 구성한 것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17–18절을 보면, 바울이 직접 돈을 받지는 않았더라도 자신이 보낸 사람들을 통해 부당하게 이익을 챙겼을 가능성을 반박하고 있음이 분명해집니다.
그의 반박은 놀라울 만큼 구체적입니다. 그는 「내가 여러분에게 보낸 사람들 가운데 누구를 통해서라도 여러분을 이용해 이익을 챙긴 일이 있습니까?」라고 묻고, 디도를 직접 언급합니다.
나는 디도에게 여러분을 찾아가 달라고 부탁했고, 그 형제를 함께 보냈습니다. 디도가 여러분을 이용해 이익을 챙겼습니까? 우리는 같은 마음으로 행동하고 같은 발자취를 따라 걷지 않았습니까?고린도후서 12:18 · 두루새김
첫 질문은 부정을, 이어지는 질문은 긍정을 기대합니다. 「같은 발자취」는 같은 행동 방식과 사역의 태도를 따랐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앞서 헌금을 맡기면서 디도와 다른 형제들을 소개했듯이, 자신이 맡은 일을 혼자 처리하지 않고 신뢰할 수 있는 동역자들과 함께 수행했습니다.
그는 「나는 사도이므로 나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누군가가 실제로 부당하게 이익을 챙겼는지 확인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합니다. 특별한 계시를 경험한 사람이었지만, 재정에 관한 의혹을 다룰 때에는 그 사실을 자신의 정직함에 대한 증거로 삼지 않습니다. 사람의 영적인 경험이나 높은 지위가 그의 경제적 행동을 확인할 필요까지 없애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꾀 많은 사람」이라는 표현은 11:3에서 뱀이 꾀를 써서 하와를 속인 일과 주제로 연결됩니다. 같은 그리스어 단어가 그대로 반복되는 것은 아니지만, 앞에서 다른 가르침이 고린도 사람들을 속일 위험을 경고했던 바울이 이제 자신이 속이는 사람으로 의심받는 상황을 다룹니다.
변호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라 세움이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우리가 여러분에게 자신을 변호하고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까?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모든 것은 여러분을 세우기 위한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2:19 · 두루새김
계시, 머무는 능력, 사도의 증거, 자신을 내어 주겠다는 결심, 재정에 관한 반박까지, 바울은 이 모든 일을 단순한 자기 변호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말합니다. 자신을 최종적으로 평가하시는 분은 고린도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말은 고린도 사람들을 향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앞서 10:8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권위를 주신 목적이 고린도 사람들을 세우는 것이지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는데, 이제 그 「세우기」가 다시 등장합니다. 그동안 그의 말이 강하고 날카로워진 것도 논쟁에서 이기려고만 해서가 아니라, 그들이 예수님 안에서 올바르게 살아가도록 돕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사랑하는 여러분」이라는 부름이 특별하게 들립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의심하는 사람들, 방금 단호하게 반박한 사람들을 여전히 사랑하는 사람들로 부릅니다.
그의 말은 자기 자랑에서 시작해 염려로 끝나게 됩니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두려워하는 것
내가 가서 여러분을 만났을 때 여러분이 내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고, 나도 여러분이 바라던 모습이 아닐까 두렵기 때문입니다. 다투고 질투하고, 화를 터뜨리며 자기 이익만 챙기고, 남을 헐뜯고 수군거리고, 우쭐대고 소란을 일으키는 일이 있을까 두렵습니다.고린도후서 12:20 · 두루새김
바울은 두 가지를 두려워합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자신이 바라는 모습으로 변화되어 있지 않을 가능성, 그리고 자신도 그들이 바라지 않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할 가능성입니다. 문제들이 해결되지 않았다면 그는 엄격하게 행동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이 약함 가운데 나타난다는 말이 어떤 상황에서도 수동적으로 기다리기만 하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필요하다면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지만, 그런 행동이 필요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고린도 사람들이 스스로 회개하고 변화되어, 기쁨 가운데 서로를 만나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여덟 가지 모습
이 목록의 대부분은 공동체 안의 관계를 무너뜨리는 행동입니다. 다투는 일은 사람들을 서로 맞서게 하고, 질투는 다른 사람이 누리는 것을 기뻐하지 못하게 합니다. 화를 터뜨리는 일은 갈등을 폭발시키고, 자기 이익만 챙기는 일은 공동체를 작은 집단으로 갈라놓습니다.
남을 헐뜯고 수군거리는 일은 직접 마주하지 않은 자리에서 다른 사람의 평판을 해칩니다. 우쭐대는 일은 자신을 다른 사람보다 높게 여기게 하고, 소란을 일으키는 일은 공동체의 질서를 무너뜨립니다.
이 죄들은 겉으로 뚜렷하게 종교적인 행동이 아닙니다. 잘못된 가르침이나 거짓 사도를 따르는 일만이 아니라, 일상적인 관계 속에서 서로를 헐뜯고 질투하고 자신을 높이는 태도도 공동체를 무너뜨립니다. 바울에게 복음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일과 실제로 서로를 대하는 방식은 나뉠 수 없습니다.
마지막 두려움은 분노가 아니라 애통이다
내가 다시 갔을 때 내 하나님께서 여러분 앞에서 나를 낮추실까 두렵습니다. 또 전에 죄를 짓고도 자기들이 저지른 더러운 행실과 음행과 방탕을 회개하지 않은 많은 사람 때문에 내가 깊이 슬퍼하게 될까 두렵습니다.고린도후서 12:21 · 두루새김
앞의 목록이 주로 공동체 내부의 갈등에 관한 것이었다면, 이제는 성적으로 잘못된 행동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과거에 죄를 지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회개하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는 죄를 지었던 사람은 영원히 회복될 수 없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그는 처벌할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깊이 슬퍼하게 될까 두렵다고 말합니다. 이 「깊이 슬퍼하다」는 죽음이나 큰 상실을 겪은 사람의 슬픔을 가리킬 수 있는 말입니다. 바울에게 공동체가 회개하지 않은 채 죄 가운데 머무르는 일은 단순한 규정 위반이 아니라, 그렇게 애통할 일입니다.
그리고 「내 하나님께서 여러분 앞에서 나를 낮추실까」라는 말이 있습니다. 앞에서는 놀라운 계시 때문에 높아질 위험을 막으려고 가시가 주어졌습니다. 이제는 교회가 회개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이 슬픔과 굴욕을 겪게 될 가능성을 이야기합니다.
조금 더 깊이
다툼과 자랑의 문제는 고린도전서 1–4장에서 이미 나타났습니다. 고린도 교회에는 자신이 따르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서로를 구별하고, 지혜와 지위와 능력에 관한 평가로 자신들이 더 낫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성적인 문제는 고린도전서 5–7장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졌는데, 그곳에서 바울은 예수님께 속한 사람들의 몸과 삶이 어떻게 변화되어야 하는지 설명했습니다.
하늘에 올라간 사람의 마지막 두려움
하늘에 올라간 사람의 이야기는 이렇게 사람들 앞에서 낮아질까 하는 두려움에 이릅니다. 그 사이에서 이 장에는 두 종류의 말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하늘에서 들었지만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은 말이고, 다른 하나는 땅에서 자신의 약함 속에 들은 「내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은 첫 번째 말로 자신의 지위를 굳히려 하지 않고, 두 번째 말씀에 따라 자신의 삶과 사도적 권위를 이해합니다. 예수님의 능력은 그를 다른 사람들보다 높이는 방식이 아니라, 자신을 내어놓아 다른 사람을 세우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처음에 그는 하늘에 들려 올라간 사람을 이야기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사람들 앞에서 낮아질지도 모르는 자신을 이야기합니다.
그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특별한 사도라는 인정을 받지 못하는 일이 아닙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여전히 다투고, 서로를 헐뜯고, 회개하지 않은 채 죄 가운데 머무르는 상황입니다.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그들을 위해 쓰고 싶은 사람에게, 그들이 잘못된 길에서 돌아오지 않는 것보다 더 큰 슬픔은 없을 것입니다.
하늘에 들려 올라갔던 사람이 이제 고린도 사람들 앞에서 깊이 슬퍼할까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자신의 권위가 무너지는 일로만 여기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세우기 위해 감당해야 할 또 하나의 약함으로 마주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에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너에게 충분하다. 능력은 약함 가운데서 온전히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