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풀어 읽기 · 13장

이 장의 자리 · 10–13장 · 바울의 변호

예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지 않습니까?

고린도후서의 마지막 장은 엄중한 경고로 시작합니다.

바울은 세 번째 방문을 앞두고 더 이상 봐주지 않겠다고 선언합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그의 사도적 권위를 계속 의심한다면, 이번에는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대응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곧 뜻밖의 질문을 던집니다. 「여러분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알지 않습니까?」(13:5)

그들은 바울에게 증거를 요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정말 바울 안에서 말씀하시는지 입증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증거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자기 자신을 시험해 보라고 합니다.

왜일까요?

이것은 다른 사람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의 잘못부터 돌아보라는 일반적인 충고가 아닙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예수님 안에 있는 공동체라면, 그들이 예수님을 알게 된 과정에는 바울이 전한 복음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 자신 안에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사실은 바울의 사역에 관해 무엇을 말해 줍니까?

바울은 자신을 의심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위대함을 더 많이 증명하려 하지 않고, 그들 가운데 이미 일어난 예수님의 일을 보게 합니다. 그리고 자신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처럼 보이더라도 고린도 사람들이 옳은 일을 한다면 기뻐하겠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권위를 증명할 힘을 가지고 있지만, 그 힘을 사용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을 더 원합니다.

이 역설의 중심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13장은 예수님의 약함과 능력을 설명하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도가 어떤 방식으로 권위를 행사해야 하는지를 밝힙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툼으로 갈라진 공동체를 향해 평화와 사귐을 축복합니다.

심판을 예고하며 시작한 장이 거룩한 입맞춤과 축복으로 끝나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이 결말에 도달합니까?

읽는 시간 26분소단락 913장 본문 읽기 →

세 번째 방문 — 왜 바울은 증인을 이야기하는가

고린도후서 13:1–2 본문 →

나는 이번에 세 번째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일은 두세 증인의 말로 확정될 것이다.」고린도후서 13:1 · 두루새김

바울은 방문 계획을 밝히면서 곧바로 구약의 법을 인용합니다. 이 말씀은 신명기 19:15에서 왔습니다.

신명기 19장은 공동체 안에서 어떤 사람의 잘못을 판단할 때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 유죄를 확정해서는 안 되며, 두세 사람의 증언이 필요하다고 규정합니다. 그다음에는 거짓 증인이 나타났을 때의 문제를 다룹니다. 제사장과 재판관들은 사건을 자세히 조사해야 하고, 거짓 증언으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려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그에 따른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따라서 이 규정의 목적은 단순히 죄인을 엄하게 벌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의 말 역시 확인하는 것입니다. 확인되지 않은 비난 때문에 억울한 사람이 처벌받지 않도록 하고, 동시에 실제로 저지른 잘못은 공정하게 다루려는 원칙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에 가서 자신에게 반대한 사람들을 무조건 처벌하겠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잘못된 일들이 있다면 그것을 제대로 확인하고 다루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하필 세 번째 방문을 이야기한 바로 뒤에 두세 증인에 관한 말씀을 인용했을까요? 바울의 반복된 방문과 경고 자체가 두세 차례의 증언처럼 기능한다는 읽기, 바울이 도착하면 실제 증언을 근거로 잘못을 조사하겠다는 읽기,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 있는 바울을 증인으로 보는 읽기가 있으며, 학계에서 합의된 단일한 설명은 없습니다. 그러나 어느 해석을 따르더라도 바울이 자신의 경고를 단순한 감정적 위협으로 남겨 두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는 실제로 고린도 교회의 문제를 다루려 합니다.

「봐주지 않겠습니다」는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인가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 나는 전에 죄를 지은 사람들과 나머지 모든 사람에게 이미 경고했습니다. 지금 떨어져 있으면서 다시 경고합니다. 내가 다시 가면 봐주지 않겠습니다.고린도후서 13:2 · 두루새김

「봐주지 않겠습니다」(φείδομαι)라는 표현은 이 편지의 앞부분을 떠올리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1:23에서 바울은 고린도에 다시 가지 않았던 이유가 그들을 엄하게 대하지 않으려는 뜻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두 구절에는 아끼다, 삼가다, 관대하게 대하다는 뜻을 지닌 같은 그리스어 동사가 쓰입니다.

처음에는 그들을 엄하게 대하지 않기 위해 방문을 미루었습니다.

이제는 다시 방문하면 봐주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의 마음이 바뀐 것일까요?

그가 처음에는 온유했지만 이제는 분노하게 된 것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습니다. 앞에서 방문을 미룬 이유도 고린도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고, 이제 더 이상 잘못을 그대로 둘 수 없다고 말하는 이유 역시 그들의 회복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문제를 끝없이 미루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엄한 조치를 취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근거도 없습니다. 13:10에 이르면 그는 직접 만났을 때 엄하게 대하지 않으려고 지금 이 편지를 쓴다고 밝힙니다. 그러므로 경고는 처벌을 향한 욕망의 표현이라기보다, 처벌이 필요하지 않은 상황을 만들기 위한 마지막 권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방문 횟수를 돌아보는 일보다 다음 방문이 어떤 의미를 갖게 될지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 사람들이 자신을 시험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이 요구한 증거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룹니다.

조금 더 깊이

두세 증인에 관한 읽기들에는 저마다 근거가 있습니다. 반복된 방문을 증언으로 보는 읽기는 그의 방문이 거듭될수록 고린도 사람들이 충분한 경고를 받은 셈이라고 보며, 바울이 세 번째 방문과 증인의 수를 나란히 언급한 표현상의 연결을 설명합니다. 실제 증인에 관한 법적 원칙으로 보는 읽기는 신명기의 본래 의미를 직접적으로 살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습니다. 하나님과 예수님 안에 있는 바울을 증인으로 보는 읽기는 세 차례 방문을 증언이 이루어지는 계기로 연결합니다. 또 2절의 「두 번째로 방문했을 때」는 앞선 방문을 가리키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해되지만, 원문의 문장 구조를 다르게 읽으면 두 번째 경고를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12:14와 13:1–2를 함께 읽으면 바울이 세 번째 방문을 준비하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이전의 모든 방문과 변경된 계획을 이 구절만으로 상세히 복원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약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고린도후서 13:3–4 본문 →

여러분이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서 말씀하신다는 증거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대하실 때 약하지 않으시며, 여러분 가운데서 능력을 나타내십니다.고린도후서 13:3 · 두루새김

바울은 마침내 논쟁의 핵심을 밝힙니다.

여기서 「증거」는 시험이나 검증을 거쳐 확인된 사실을 뜻할 수 있는 말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단순히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의 사도적 권위가 실제로 예수님에게서 온 것인지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바울이 여기서 예수님의 능력을 이야기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앞서 바울의 반대자들은 그의 편지에는 힘이 있지만 직접 만나면 약해 보인다고 평가했습니다(10:10). 이제 바울은 자신이 약하게 보인다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약하시다는 주장을 구별합니다. 바울의 겉모습이 강하지 않다고 해서, 그를 통해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능력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고린도 사람들 가운데 능력 있게 일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능력은 어떤 방식으로 나타납니까? 바울은 그 질문에 답하면서 가장 역설적인 사건을 꺼냅니다.

그리스도는 약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십니다. 우리도 그분 안에서 약하지만, 여러분을 대할 때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3:4 · 두루새김

고린도후서 13장의 중심에는 이 문장이 있습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의 힘을 부정하는가

사람들이 강한 예수님을 원한다면, 십자가는 가장 설득하기 어려운 사건일 수 있습니다. 로마 제국의 십자가 처형은 극심한 고통뿐 아니라 공개적인 수치와 굴욕을 동반하는 형벌이었습니다. 바울 자신도 고린도전서 1:23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께서 유대 사람들에게는 걸림돌이시고 이방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음이시라고 설명했습니다.

「약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실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죽으셨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실제로 인간의 약함과 죽음을 겪으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겉으로만 연약해 보인 사건이 아니라 실제 죽음에 이른 사건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다음에 바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신다고 말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이 한 문장 안에서 맞서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약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십니다.

바울이 선포하는 예수님께서는 실제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예수님이시며, 바로 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십니다. 십자가에서 나타난 약함과 부활에서 나타난 능력은 서로 다른 두 예수님의 모습이 아니라, 동일한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자신에게 제기된 비난에 답하기 위해 십자가를 이야기하는 이유입니다. 사람들은 바울의 연약한 모습을 근거로 그를 통해 일하시는 예수님의 능력을 의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직접 약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으며,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신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약함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없다고 판단할 수 없습니다.

「우리도 그분 안에서 약하지만」

바울은 십자가와 부활을 이야기한 직후 자신과 동역자들의 삶으로 돌아옵니다. 4절 후반부의 「우리도 그분 안에서 약하지만, … 하나님의 능력으로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는 앞의 예수님에 관한 진술과 정확하게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신이 예수님처럼 고통받았으므로 예수님과 똑같이 위대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약함과 능력을 이해합니다.

그는 예수님 안에서 약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 것입니다.

「살 것입니다」는 미래형이어서 마지막 부활의 생명과 연결하는 읽기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같은 문장에 「여러분을 대할 때에는」이라는 말이 있고, 바울은 지금 고린도를 다시 방문할 때 자신의 사도적 권위가 실제로 나타날 수 있다는 문제를 논의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산다는 것은 미래의 부활만을 가리키기보다, 살아 계신 예수님의 능력이 바울의 사역을 통해 고린도 사람들에게 나타날 것을 포함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음 이후에 자신이 강한 사람이 될 것이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자신은 약하게 보일지라도, 고린도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능력은 무엇을 하려는 것입니까? 고린도 사람들을 제압하여 자신의 권위를 과시하려는 것입니까? 바울은 자신의 능력을 더 증명하는 대신, 고린도 사람들 자신에게 시선을 돌립니다.

「여러분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 평가의 방향이 뒤바뀌다

고린도후서 13:5–6 본문 →

여러분이 믿음 안에 있는지 스스로 살펴보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시험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다는 것을 여러분 자신도 알지 않습니까?고린도후서 13:5 · 두루새김

이 구절은 흔히 개인이 자신의 구원 여부를 끊임없이 점검해야 한다는 권면으로 사용됩니다. 물론 자기 믿음을 돌아보는 일은 본문이 요구하는 행동에 포함됩니다. 그러나 이 절이 왜 여기 등장하는지를 살펴보면 바울의 의도가 훨씬 선명해집니다.

그들은 바울을 시험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제 그들 자신을 시험하라고 합니다.

원문에서도 「여러분 자신」이 두 번 강조되어 나타납니다. 바울은 시험의 대상이 누구인지 의도적으로 부각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새로운 정보를 알려 주지 않고, 그들이 이미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을 상기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고린도 교회 자신이 바울의 사역에 관한 증거다

고린도 사람들은 바울이 전한 복음을 통해 예수님을 알게 된 공동체입니다. 그렇다면 그들 안에 예수님께서 계신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들은 바울의 사역을 통해 실제로 예수님의 일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도 인정해야 합니다.

이것은 고린도 사람들이 바울의 모든 말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논증이 아닙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신앙을 형성한 복음과 그 복음을 전한 바울의 사역을 서로 완전히 분리하여 평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울 안에서 말씀하시는지 알고 싶다면, 먼저 예수님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말에는 「여러분이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면」이라는 경고도 함께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의 믿음이 아무런 검증 없이 자동으로 참되다고 선언하지 않고, 그들이 정말 믿음 안에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시험은 자기 안에서 완벽한 감정이나 확신을 찾아내라는 요구로 축소할 수 없습니다.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삶이 그 고백과 일치하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앞서 공동체 안의 다툼과 시기와 음행과 회개하지 않는 태도를 심각하게 염려했습니다.

또 「여러분」은 복수형입니다. 이 권면은 개인 각자의 자기 점검을 배제하지 않지만, 지금 바울은 고린도 교회라는 공동체를 향해 말하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자기 시험을 오직 개인의 마음속 불안으로 바꾸지 않도록 도와줍니다.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인가

나는 우리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여러분이 알게 되리라고 기대합니다.고린도후서 13:6 · 두루새김

5–6절에는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이라는 말이 반복됩니다. 시험이나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 상태를 가리키는 이 말이 5절에서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6절에서는 바울 자신과 동역자들에게 사용됩니다. 이렇게 시험이라는 말이 고린도 사람들과 바울 사이를 오갑니다.

그러나 이 말은 다음 절에서 다른 방향으로 바뀝니다. 바울은 자신이 시험을 통과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다고 말합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옳은 일을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검증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처럼 보여도 괜찮은 이유

고린도후서 13:7–9 본문 →

우리는 여러분이 아무런 악한 일도 하지 않기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우리가 시험을 통과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시험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처럼 보이더라도, 여러분이 옳은 일을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3:7 · 두루새김

이 절은 13장의 가장 뜻밖의 반전입니다.

바울이 자신의 권위를 행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심각한 잘못이 계속된다면 바울은 직접 방문하여 엄하게 대응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고린도 사람들은 그에게 실제적인 사도적 권위가 있음을 보게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반대로 고린도 사람들이 미리 회개하고 올바르게 행동한다면, 바울이 자신의 엄격한 권위를 보여 줄 필요가 없어질 것입니다. 그러면 그를 약하다고 비난하던 사람들은 계속 바울이 강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7절은 이런 가능성을 포함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정확히 그런 상황만을 염두에 두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지만, 이어지는 9–10절과 연결하면 그의 관심이 분명해집니다. 그는 자신이 능력 있는 사도라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해 고린도 사람들의 잘못이 계속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징계가 필요하지 않을 만큼 공동체가 변화되는 것이야말로 그가 바라는 결과입니다.

진리는 바울의 권위보다 크다

우리는 진리를 거스르는 일은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한 일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13:8 · 두루새김

여기서 진리를 바울의 개인적인 의견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자신의 사역이 예수님의 복음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습니다. 이 표현은 바울이 진리에 반하는 행동을 절대로 저지를 수 없다는 뜻이라기보다, 자신의 사도적 사명이 진리를 거슬러 행동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문맥에 어울립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옳은 일을 하고 있다면, 바울은 자기 권위를 증명하기 위해 그들을 잘못된 사람으로 몰아갈 수 없습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믿음 안에 서 있다면, 자신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그들의 믿음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진리는 바울의 체면보다 큽니다.

바울은 자신이 가진 권위를 진리를 위해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권위로 진리를 자기 뜻대로 만들어 낼 수는 없습니다.

강함의 의미가 다시 뒤집히다

우리가 약하고 여러분은 강할 때 우리는 기뻐합니다. 또한 우리는 바로 여러분이 온전해지기를 기도합니다.고린도후서 13:9 · 두루새김

이 절은 13:3–4의 강함과 약함에 관한 논의를 새로운 방향으로 이끕니다. 처음에는 고린도 사람들이 바울을 약하다고 여기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이제 바울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강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사람들이 강해지는 것입니다. 공동체를 세우는 자신의 목적이 이루어진다면 자신이 약하게 보이는 상황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가 「온전해지기를」 기도합니다. 원문의 명사는 온전한 상태로 갖추거나 바로잡고 회복하는 일을 나타냅니다. 문맥에서 이것은 추상적인 완벽함보다 갈라지고 잘못된 공동체가 다시 제자리를 찾는 일과 연결됩니다.

같은 어근의 동사가 11절의 「온전해지십시오」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9절에서 바울이 기도한 것은 11절에서 고린도 사람들이 실제로 이루어 가야 할 과제로 이어집니다. 그는 하나님께 고린도 교회의 회복을 구하면서, 고린도 사람들에게도 그 회복을 향해 살아가라고 요청합니다.

편지를 쓰는 목적 — 직접 만나서 매섭게 대하지 않기 위하여

고린도후서 13:10 본문 →

그래서 나는 여러분과 떨어져 있는 동안 이 편지를 씁니다. 함께 있을 때 주님께서 내게 주신 권한으로 여러분을 엄하게 대하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그 권한은 여러분을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우기 위해 주신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3:10 · 두루새김

이것은 10장에서 제기되었던 비난과 연결됩니다. 반대자들은 바울의 편지는 강하지만 실제로 만나면 약하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오히려 직접 만났을 때 매섭게 행동하지 않기 위해 편지를 쓰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들에게 약함으로 보였던 태도가 사실은 목적을 가진 선택이었다는 것입니다.

「무너뜨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우기 위해」라는 표현은 고린도후서 10:8에서 이미 등장했습니다. 앞의 말은 건물을 무너뜨리는 모습을, 뒤의 말은 세우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의 권한은 진리를 거스르는 것들을 바로잡기 위해 사용될 수 있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바울은 방문을 예고하며 엄하게 경고했고, 예수님의 능력을 이야기했고, 고린도 사람들에게 자신을 시험해 보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모든 말의 목적은 자신이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공동체를 엄하게 다루지 않아도 되도록, 미리 그들이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입니다.

바울이 가장 바라는 승리는 자신의 권한을 행사하여 반대자들을 굴복시키는 일이 아니라, 그 권한을 엄하게 행사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다섯 개의 명령 — 갈라진 공동체를 다시 세우는 길

고린도후서 13:11 본문 →

마지막으로, 형제자매 여러분, 기뻐하십시오. 온전해지십시오. 위로를 받으십시오.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고린도후서 13:11 · 두루새김

바울의 마지막 권면은 짧습니다.

앞에서 오랫동안 자신의 권한을 변호하고 고린도 교회의 잘못을 경고했던 바울은 이제 매우 단순한 말들을 남깁니다.

기뻐하십시오.

온전해지십시오.

위로를 받으십시오.

같은 마음을 품으십시오.

평화롭게 지내십시오.

이 명령들은 서로 관계없는 좋은 덕목들의 목록이 아닙니다. 바울이 염려했던 고린도 교회의 문제들을 생각하면, 공동체가 회복되기 위해 필요한 방향들이 드러납니다.

마지막에 왜 기뻐하라고 하는가

원문의 이 말은 문맥에 따라 인사말로도 쓰일 수 있지만, 이어지는 명령들과 같은 형태로 놓여 있어 기뻐하라는 권면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고린도 교회에 갈등과 죄의 문제가 남아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권면은 뜻밖입니다. 이는 문제를 무시하고 밝은 감정을 유지하라는 요구가 아니라, 예수님 안에서 회복의 길이 열려 있음을 바라보게 하는 권면입니다.

바울이 앞에서 고린도 사람들이 강해질 때 자신도 기뻐한다고 말한 사실(13:9)과도 연결됩니다. 그가 바라는 기쁨은 자신의 권한을 인정받는 데서 오는 승리감이 아니라, 고린도 사람들이 믿음 안에서 온전히 세워지는 데서 오는 기쁨입니다.

「온전해지십시오」 — 잘못된 것을 바로잡다

두 번째 명령은 9절에서 바울이 기도했던 내용과 같은 어근을 사용하며, 갖추다, 바로잡다, 회복하다라는 의미와 연결됩니다. 이 동사는 문법적으로 수동 또는 중간태로 읽을 수 있는 형태여서, 자신들의 삶을 바로잡으라는 뜻과 회복되도록 자신을 맡기라는 뜻이 모두 문맥상 검토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각자가 흠 없는 완벽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갈라진 관계를 바로잡고, 믿음에 어긋나는 행동을 돌이키며, 공동체가 마땅히 있어야 할 모습으로 회복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들을 세우고 싶어 하지만, 고린도 사람들도 그 회복의 요청에 응답해야 합니다.

「위로를 받으십시오」 — 처음의 위로로 돌아가다

여기서 사용된 동사는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의 수동 명령형입니다. 이 단어는 문맥에 따라 위로받다, 격려받다, 권면을 받아들이다 등의 의미를 가질 수 있어, 「위로를 받으십시오」로 읽을 수도 있고 바울의 권면을 받아들이라는 의미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 읽기가 서로 완전히 배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위로」라는 읽기는 이 편지의 처음을 떠올리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1:3에서 바울은 하나님을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불렀고, 하나님께서 고난 가운데 있는 자신들을 위로하시고 그 위로로 다른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신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렇게 시작한 편지가 이제 위로를 받으라는 명령으로 끝납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을 강하게 책망했지만, 그들이 절망하거나 공동체에서 완전히 멀어지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여기서 위로는 잘못을 덮어 두는 일이 아니라,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킨 사람들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의 은혜와 연결됩니다.

같은 마음과 평화

네 번째와 다섯 번째 명령은 공동체의 관계를 직접 다룹니다. 같은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모든 문제에 관해 똑같은 의견을 가져야 한다는 뜻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복음과 공동체의 유익이라는 공통된 방향을 향해 마음을 모으는 것입니다.

평화는 단순히 다툼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서로를 시기하고, 헐뜯고, 자신을 높이며, 상대방을 억누르는 행동이 바로잡혀야 합니다.

바울은 이 모든 명령의 끝에 「그러면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실 것입니다」라는 약속을 덧붙입니다. 이것은 공동체가 스스로 평화를 만들어 내면 하나님께서 보상으로 오신다는 거래의 원리라기보다, 그들이 어떤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인지를 떠올리게 하는 말입니다.

고린도 사람들이 회복되어야 할 이유는 단순히 바울이 그렇게 명령했기 때문만이 아닙니다. 그들이 사랑과 평화의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입맞춤 — 마지막에 등장하는 몸의 행동

고린도후서 13:12 본문 →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십시오. 하나님께 속한 모든 사람이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고린도후서 13:12 · 두루새김

바울은 같은 마음을 품고 평화롭게 지내라고 권한 뒤 곧바로 서로 인사하라고 합니다. 바울이 그 인사를 「거룩한」 입맞춤이라고 부르는 것은, 단순히 아는 사람끼리 인사를 나누는 일이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받아들이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서로 다투었고, 파벌을 이루었으며,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권한을 의심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바울은 마지막에 서로 인사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갈등이 해결되지 않았는데도 겉으로만 친밀하게 행동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 말한 관계의 회복을 눈에 보이는 행동으로 표현하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비난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제 서로를 예수님 안의 형제자매로 맞아들이도록 요청받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하나님께 속한 모든 사람」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 사람들이 정확히 어느 지역에 있었는지는 이 문장만으로 확정할 수 없지만, 고린도 교회가 홀로 존재하는 공동체가 아니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갈등을 겪고 있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바울은 자신들과 함께 예수님께 속한 다른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마지막에 떠올리게 합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입맞춤은 친밀함과 인사를 표현하는 여러 방식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서 거룩한 입맞춤이 신자들 사이의 인사에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로마서 16:16, 고린도전서 16:20, 데살로니가전서 5:26에서도 확인됩니다. 그러나 당시의 구체적인 관습과 지역에 따른 차이까지 이 구절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으므로, 이 행동을 오늘날의 인사법과 똑같은 형식으로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세 이름으로 이루어진 마지막 축복

고린도후서 13:13 본문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시는 사귐이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고린도후서 13:13 · 두루새김

이것이 고린도후서의 마지막 문장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권한을 한 번 더 강조하거나, 고린도 사람들의 잘못을 다시 나열하거나, 심판을 예고하며 편지를 끝내지 않습니다.

그는 축복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께서 이루시는 사귐.

이 세 표현은 초기 기독교의 신앙에서 예수님과 하나님과 성령이 어떻게 함께 언급되는지를 보여 주는 본문이며, 후대 기독교 신학은 이러한 본문들을 삼위일체 교리를 정리하는 성경적 근거로 읽어 왔습니다. 다만 13:13 자체가 후대의 정교한 삼위일체 교리 전체를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문장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교리적인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고린도 교회 위에 은혜와 사랑과 사귐이 함께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은혜

예수님께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낮추신 일, 자신의 약함 가운데 예수님의 은혜가 충분하다는 말씀은 고린도후서 전체에서 중요한 주제였습니다. 마지막 축복에서 바울은 그 은혜를 자신에게 우호적인 사람들에게만 제한하지 않고, 자신의 권한을 의심했던 사람들을 포함하여 고린도 교회 전체를 향해 빕니다. 그들의 잘못이 문제가 아니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회개와 회복을 강하게 요구했지만, 그들이 예수님의 은혜 밖에 남아 있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여러 차례 말했지만, 그 사랑이 모든 사랑의 근원은 아닙니다. 고린도후서 5:14–15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사랑이 자신과 동역자들을 사로잡고 있으며,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분을 위해 살도록 하려는 것이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마지막에 하나님의 사랑을 축복하는 것은 그들이 이미 받은 사랑 안에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기를 바라는 기도와 연결됩니다.

성령께서 이루시는 사귐

「사귐」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코이노니아(κοινωνία)는 함께 나누는 일, 참여, 교제 등을 가리킵니다. 원문은 ‘성령의 코이노니아’라는 소유격 관계여서, 성령께서 공동체 안의 사귐을 이루어 주신다는 읽기와 신자들이 성령 안에 함께 참여한다는 읽기가 있습니다. 두 해석 모두 문법적으로 가능하며 반드시 하나만 선택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두루새김은 「성령께서 이루시는 사귐」으로 옮겨 첫 번째 읽기를 드러냅니다.

고린도 교회의 문제는 단순히 서로 마음이 잘 맞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할 사람들이 서로 갈라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이루시는 사귐은 이 편지의 마지막에 매우 적절한 축복입니다.

왜 마지막까지 「여러분 모두」인가

고린도 사람들은 바울의 기쁨과 자랑이었지만, 동시에 그를 슬프게 만들고 염려하게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바울의 권한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회개하지 않은 채 죄 가운데 머무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편지의 마지막에서 그는 축복의 대상을 「여러분 모두」라고 부릅니다.

이 표현은 그들이 모두 똑같은 영적인 상태에 있다는 판단이 아니라, 그들을 향한 바울의 마지막 소망이 얼마나 넓은지를 보여 줍니다. 그의 목표는 자신을 반대한 사람들을 영원히 배제하여 자신의 권한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한 그들이 회복되어 예수님의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엄한 경고에서 거룩한 입맞춤까지

고린도후서 13:1–13 본문 →

엄한 경고로 시작한 13장이 거룩한 입맞춤과 축복에 이르는 길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약함으로 십자가에 못 박히셨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 계시기에, 바울의 권한은 강하지만 무제한적이지 않습니다. 그는 잘못을 바로잡고 회개를 촉구할 수 있지만, 그 권한은 사람들을 지배하거나 자신의 지위에 대한 복종을 확인하는 데가 아니라 진리를 위해, 사람들을 세우기 위해서만 쓰여야 합니다. 그는 잘못을 방치하지 않으면서도 회복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장은 오늘의 교회와 지도자, 그리고 갈등 속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를 묻습니다. 잘못을 지적할 때 그 목적은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하는 데 있습니까, 아니면 관계가 회복되는 데 있습니까?

이 마지막 장면을 생각해 봅시다.

서로 다투고, 상대방을 의심하고, 자신을 높이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이 사도로서 받은 권한에 대해서도 의견이 갈렸고, 바울은 그들에게 엄한 경고를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가 마지막으로 기대하는 장면은 자신의 권위 앞에 모든 사람이 두려워하며 무릎 꿇는 모습이 아니라, 서로를 예수님 안의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며 인사하는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실제로 이루어졌는지는 이 편지의 마지막에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아직 고린도에 도착하지 않았고, 그가 계획한 방문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지도 이 장은 말하지 않습니다.

고린도후서는 바울의 승리 선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서로를 향해 손을 내밀고 인사해야 할 사람들 위에, 바울은 예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께서 이루시는 사귐을 축복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갈라진 공동체가 다시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편지는 바로 거기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