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풀어 읽기 · 8장
이 장의 자리 · 8–9장 · 나눔의 준비
가난한 사람들이 보여 준 부유함
고린도후서 8장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자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극심하게 가난하지만 풍성하게 나누고, 도움을 받아야 할 처지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남을 도울 기회를 달라고 간청합니다. 바울은 그들의 행동을 설명하면서 돈이 얼마나 모였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이야기합니다.
그 일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 가운데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고린도 교회에도 헌금을 요청하려 합니다. 그런데 그는 처음부터 돈 이야기를 꺼내지 않습니다. 마케도니아 교회에 주어진 은혜를 이야기하고, 그다음 예수님께서 부유하셨으나 가난해지신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러고 나서야 얼마를 내야 하는지, 어떻게 모아야 하는지, 누가 그 돈을 관리해야 하는지를 논합니다.
바울에게 헌금은 먼저 재정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자신의 소유와 다른 사람의 필요를 어떻게 바라보게 되는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가난한 사람들의 헌신을 칭찬하면서도 고린도 사람들에게 가난해질 만큼 내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자기희생을 이야기하면서도 강제로 헌금을 거두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서로 신뢰해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돈을 관리하는 일에는 철저한 검증과 공개성을 요구합니다.
이 장은 이 긴장들을 해소하지 않고 함께 붙들고 있습니다. 은혜는 자발적인 행동을 일으키지만, 그 행동에는 책임이 따릅니다. 사랑은 마음에서 시작되지만, 실제로 누군가의 부족함을 채워야 합니다. 믿음으로 맺어진 관계라 해도 그 관계가 돈을 다룰 때에는 사람들 앞에서 떳떳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모든 것을 한 가지 이야기 안에 담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기꺼이 내놓은 선물에서 시작하여, 여러 교회가 함께 책임지는 헌금의 여정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헌금할 기회를 간청하다
바울의 첫 문장은 예상과 다르게 시작됩니다.
형제 여러분, 마케도니아의 교회들에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여러분에게 알립니다.고린도후서 8:1 · 본디새김
바울이 소개하려는 것은 마케도니아 교회들의 훌륭한 인품이 아닙니다. 그는 인간의 행동보다 하나님의 행동을 먼저 놓습니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특별히 선량했기 때문에 은혜를 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 가운데 일했고 그 결과 놀라운 행동이 나타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은혜가 나타난 현장은 뜻밖에도 풍요로운 환경이 아닙니다.
곧 환난이라는 큰 시험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풍성한 너그러움으로 넘쳐났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8:2 · 본디새김
바울은 서로 어울리지 않을 법한 말들을 한데 묶습니다. 환난과 기쁨, 가난과 풍성함입니다. 여기서 가난은 상징적인 말이 아닙니다. 마케도니아 신자들은 실제로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그들의 기쁨이 환난을 없애 주지도 않았습니다. 환난과 기쁨은 동시에 존재했습니다.
일반적으로 가난은 내놓을 수 있는 것을 제한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가진 재산의 규모가 아니라 그들이 보여 준 나눔의 성격을 풍성하다고 부릅니다. 「너그러움」(ἁπλότης)으로 번역된 말은 단순함이나 꾸밈없음에서 출발하여, 이 문맥에서는 아낌없이 나누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적은 것을 가진 사람들에게서도 아낌없이 내놓는 풍성함이 나타날 수 있다는 역설입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베풀 수 있는 능력이 개인의 사회적 존엄과도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도움을 받기만 해야 하는 처지는 경제적 어려움뿐 아니라 사회적 열등감으로도 이어질 수 있었습니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난 때문에 공동체의 일에서 제외되기를 바라지 않았고, 바울도 그들을 단지 도움받아야 할 불쌍한 사람들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는 주체로 그립니다.
3–4절에 이르면 이 역설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내가 증언하건대, 그들은 힘이 닿는 대로, 아니 힘을 넘어서 스스로 나서서 성도를 위한 그 섬김의 은혜와 그 섬김을 함께 나누는 일을 많은 간청으로 우리에게 구하며,고린도후서 8:3–4 · 본디새김
보통은 헌금을 요청하는 사람이 간청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헌금을 내는 사람들이 간청합니다. 자신들을 도와 달라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도 다른 성도들을 돕는 일에 참여하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일을 「섬김의 은혜」와 「함께 나누는 일」이라고 부릅니다. 함께 나눔은 단순히 모금에 돈을 보태는 행위를 넘어 공동의 일에 참여하는 관계를 가리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성도들의 어려움이 마케도니아 신자들에게도 자신의 일로 받아들여진 것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형편을 넘어 참여하려 했다는 표현은 무리한 헌금의 모범으로 읽힐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뒤에서 바울은 각자가 가진 것에 따라 참여해야 하고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하려고 자신이 환난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명시합니다(8:12–13). 3절은 마케도니아 교회들의 특별한 자발성을 묘사하는 것이지, 모든 가난한 신자에게 자기 형편을 넘어 헌금하도록 요구하는 일반 규칙은 아닙니다.
바울도 그들의 모습을 예상하지 못했던 듯합니다.
또 우리가 바라던 정도에 그치지 않고, 도리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먼저 주님께, 또 우리에게 주었습니다.고린도후서 8:5 · 본디새김
바울이 예상한 것 이상이었다는 말은 헌금 액수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먼저」는 헌금하기 전에 어떤 의식을 치렀다는 뜻이라기보다, 그들의 행동을 결정한 근본적인 헌신을 드러냅니다. 그들은 자신이 예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관계 안에서 바울과 동역자들이 맡은 일에도 자신을 내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물질적인 나눔은 자기희생의 과시가 아니라, 이미 자신을 드린 사람들이 자기 소유를 바라보는 방식에서 일어난 변화입니다.
이 장에서 처음 제시되는 부유함의 모습은 바로 이것입니다. 남에게 줄 것이 전혀 없어 보이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누군가에게 선물을 주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고린도의 풍성함에는 무엇이 빠져 있는가
마케도니아 교회들에 관한 이야기는 곧바로 고린도 교회로 향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디도에게 권했습니다. 그가 앞서 시작한 그대로 여러분 가운데서 이 은혜도 마저 이루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8:6 · 본디새김
고린도 교회는 이미 이 헌금에 관해 알고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16:1–4에서 바울은 성도들을 위한 모금을 매주 준비하도록 지시했고, 예루살렘으로 가져갈 사람들도 고린도 교회가 인정한 이들로 정하도록 했습니다. 이제 디도는 앞서 시작된 그 일을 마무리하도록 요청받고 있습니다.
여기서도 바울은 헌금을 「이 은혜」라고 부릅니다.
1절에서 은혜는 하나님이 마케도니아 교회들에 주신 것이었고, 4절에서는 그들이 참여하기를 간청한 섬김의 기회였습니다. 이제 6절에서는 고린도 교회가 완성해야 할 일이 됩니다. 같은 은혜가 사람들에게 주어지고, 사람들의 행동으로 나타나며, 공동체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됩니다. 바울은 은혜와 헌금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지 않지만, 은혜가 헌금이라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표현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모든 일에 — 믿음과 말과 앎과 온갖 애씀에, 그리고 우리에게서 나와 여러분 안에 있는 사랑에 — 넘치듯이 이 은혜에도 넘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8:7 · 본디새김
이 표현은 고린도전서 1:4–5를 떠올리게 합니다. 거기서 바울은 고린도 신자들이 예수님 안에서 모든 말과 모든 앎에 풍성해졌다고 감사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전체에서 드러나듯, 풍성한 지식과 은사는 반드시 성숙한 공동체 생활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풍성함을 부정하지 않고, 지식이나 믿음을 돈으로 대체하지도 않습니다. 믿음과 말과 앎은 여전히 귀합니다. 다만 이미 많은 것을 가진 그들의 삶에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위한 나눔도 풍성해져야 한다고 요청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한 가지 선을 긋습니다.
명령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다른 이들의 애씀을 통해 여러분의 사랑이 참된지 시험해 보면서 말합니다.고린도후서 8:8 · 본디새김
바울에게는 사도로서 권위가 있지만, 그 권위를 앞세워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아무런 압력도 없는 중립적인 요청은 아닙니다. 그는 마케도니아 신자들의 열성을 들려주고, 이를 통해 고린도 사람들의 사랑이 참된지를 시험한다고 분명히 밝힙니다. 바울은 자발적인 행동을 원하지만, 그 행동이 일어나도록 적극적으로 설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사랑을 시험하기 위한 금액을 지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음 절에서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한 분을 떠올리게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헌금은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로마서 15:25–27은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신자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기꺼이 기부했다고 설명하고, 갈라디아서 2:9–10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의 주요 지도자들에게 이방인을 위한 사역을 인정받았을 때 가난한 사람들을 기억해 달라는 요청도 받았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이 헌금은 단순한 구호 사업을 넘어, 이방 지역의 교회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신자들의 필요를 채우며 서로 다른 민족적·지역적 배경의 공동체들이 하나의 믿음 안에서 연결되어 있음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가난해지셨는가
여러분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분은 부유하셨으나 여러분을 위해 가난해지셨습니다. 그분의 가난으로 여러분이 부유해지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8:9 · 본디새김
이 절은 고린도후서 8장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앞에서 마케도니아 교회들의 가난과 풍성함을 말하던 표현을, 바울은 이제 예수님에게 적용합니다. 왜 그는 예수님의 생애를 설명하면서 이러한 경제적 표현을 사용합니까?
가장 널리 알려진 해석은 예수님의 부유함을 성육신 이전의 영광과 연결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래 하나님과 함께 누리시던 영광을 가지셨지만, 인간의 낮은 처지에 들어오셨고 마침내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셨습니다. 그 결과 죄인들이 구원의 풍성함을 누리게 되었다는 설명이며, 빌립보서 2:6–8의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는 진술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다만 8:9 자체는 그 부유함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 가난해지신 일이 성육신의 어느 순간을 가리키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 다른 해석의 가능성도 있습니다. 「부유하셨으나」로 옮긴 그리스어 분사구 플루시오스 온(πλούσιος)은 양보의 뜻으로 읽을 수 있지만, 문법적으로는 「부유하신 채로」 또는 「부유하시기에」로 읽는 것도 가능합니다. 이렇게 읽으면 예수님께서는 부유함을 그만두시고 가난해지신 것만이 아니라, 자신의 풍성한 사랑을 나누시는 바로 그 행동 안에서 가난해지셨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해석을 대체하는 확정적인 결론이라기보다, 본문의 경제적 언어와 문법을 함께 고려한 학문적 제안입니다.
두 해석 모두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본문의 강조점은 예수님께서 과거에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셨는가보다, 「여러분을 위해」 자신을 낮추셨고 그 결과 다른 사람들이 부유해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유함을 예수님을 믿으면 경제적으로 부자가 된다는 약속으로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바로 앞의 마케도니아 신자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하게 받았으면서도 여전히 극심한 가난 속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물질과 관계없는 내면적인 만족만을 뜻하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이 은혜를 근거로 실제 가난한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도록 권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읽으면 9절은 헌금에 관한 논의에 갑자기 삽입된 교리적 설명이 아닙니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서 드러난 풍성함도, 고린도 사람들에게 요청되는 너그러움도, 예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의 삶에서 일어나는 변화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에게 가난을 사랑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알고 있다면, 그 은혜가 다른 사람의 부족함 앞에서 어떤 행동을 일으키는지 생각하도록 합니다.
하려던 마음을 실제 행동으로 완성하라
예수님의 은혜를 제시한 뒤, 바울은 다시 고린도 사람들의 구체적인 상황으로 돌아옵니다.
이 일에 관해 내 의견을 말합니다. 이것이 여러분에게 유익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지난해부터 행하는 일을 앞서 시작했을 뿐 아니라 하려는 마음까지 먼저 품은 사람들입니다.고린도후서 8:10 · 본디새김
고린도 교회는 일을 시작했지만 아직 마무리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이 왜 중단했는지는 8장에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의 갈등이 영향을 주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본문은 그 이유를 확정할 수 있는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행하는 일도 마저 이루십시오. 하려는 마음이 간절했던 그대로, 가진 것으로 마저 이루도록 말입니다.고린도후서 8:11 · 본디새김
여기에는 두 가지 대조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과 행동입니다. 좋은 뜻을 품는 것과 그 뜻을 완성하는 것은 다릅니다. 다른 하나는 과거와 현재입니다. 지난해에 품었던 마음이 지금의 행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바울은 마음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은 실제로 누군가에게 전달되는 행동으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절에서 그는 행동의 크기를 결정하는 기준도 제시합니다.
하려는 마음이 있으면, 그 마음은 가지지 않은 것이 아니라 가진 것에 따라 받아들여질 만하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8:12 · 본디새김
바울은 고린도 사람들이 마케도니아 사람들과 똑같이 내놓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마음의 진실성과 경제적 형편은 서로 경쟁하지 않고 둘 다 존중받습니다. 부유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것이 많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하지만, 형편이 어려운 사람은 자신에게 없는 것까지 요구받지 않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헌금 액수에 차등을 두는 기술적인 원칙이 아니라, 경제적인 능력만으로 사람의 헌신을 판단하지 않겠다는 원칙입니다. 바울은 좋은 뜻이 행동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면서도, 형편을 넘어서는 액수를 요구하는 방식으로 그 뜻을 훼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나눔의 목적은 모두가 최대한 많이 내는 것입니까? 바울의 대답은 다음 단락에 있습니다.
많이 거둔 사람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둔 사람도 모자라지 않았다
다른 이들에게는 편안함이 있고 여러분에게는 환난이 있게 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공평함을 바탕으로, 지금 이때에 여러분의 넉넉함이 그들의 모자람을 채우고, 그들의 넉넉함도 여러분의 모자람을 채우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공평함이 이루어지도록 말입니다.고린도후서 8:13–14 · 본디새김
이 문장에는 바울이 고린도후서 앞부분에서 자신의 경험을 설명할 때 사용한 말들이 다시 등장합니다. 「편안함」은 2:13과 7:5에서 바울 자신이 얻지 못했다고 말한 것이고, 「환난」 역시 이 편지의 중요한 어휘입니다. 바울은 이 말들을 이제 경제적 나눔의 원칙으로 가져옵니다. 다른 사람의 환난을 덜어 주는 일이 새로운 환난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논의를 이끄는 기준은 공평함입니다. 「공평함」(ἰσότης)으로 옮긴 말은 같음 또는 공평함을 뜻하는데, 이 문맥에서는 모든 사람이 정확히 같은 재산을 가지는 상태라기보다 누구의 풍성함이 다른 사람의 부족함을 채우는 관계를 가리킵니다.
14절에는 대칭이 있습니다. 지금은 고린도 사람들의 넉넉함이 다른 사람들의 부족함을 채우지만, 언젠가는 다른 사람들의 넉넉함이 고린도 사람들의 부족함을 채울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단순히 나중에 돈을 돌려받으리라는 뜻입니까?
여기에는 두 가지 주요 해석이 있습니다. 하나는 경제적인 처지가 바뀔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지금 넉넉한 사람들도 나중에는 어려워질 수 있고, 지금 부족한 사람들도 훗날 다른 사람을 도울 수 있으니, 나눔은 일방적인 시혜가 아니라 서로를 돌보는 관계라는 읽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물질적인 풍성함과 영적인 풍성함의 교환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5:25–27에서 바울은 이방 신자들이 유대 신자들의 영적인 것에 참여했으므로 물질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설명합니다. 이 관점에서는 예루살렘 성도들이 이미 지닌 영적 풍성함과 고린도 사람들의 물질적인 풍성함이 서로 연결됩니다.
두 해석 모두 바울의 다른 진술과 연결되지만, 8:14 자체는 어떤 형태의 풍성함이 언제 돌아올지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습니다. 이 구절만으로 어느 한쪽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은 기부자와 수혜자를 영원히 고정된 두 집단으로 나누지 않습니다. 가진 사람이 베풀고 없는 사람이 감사하는 일방적인 질서가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을 채울 수 있는 관계입니다.
바울은 이 원칙을 설명하기 위해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경험했던 만나 이야기로 돌아갑니다.
이렇게 적힌 그대로입니다. 「많이 거둔 이도 남은 것이 없었고 적게 거둔 이도 모자라지 않았다.」고린도후서 8:15 · 본디새김
출애굽기 16:18의 직접적인 인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을 때, 여호와야훼께서는 하늘에서 양식을 내려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많이 거두었고 어떤 사람은 적게 거두었지만, 정해진 분량으로 재었을 때 각 사람은 먹을 만큼 얻었습니다.
그 이야기의 중심에는 하나님이 백성의 필요를 채우시는 사건이 있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모든 사람이 똑같은 재산을 가지게 만드는 제도에 관한 설명이 아닙니다. 만나를 내려 주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부족함 때문에 굶주리도록 버려두지 않으셨고, 이제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교회들도 서로의 부족함을 외면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두 장면에는 차이도 있습니다. 광야에서는 하나님이 만나를 공급하셨지만, 고린도후서에서는 신자들이 자신에게 있는 것을 나눕니다. 바울은 하늘에서 내려 주신 양식을 기억하게 함으로써, 지금 자기 손에 있는 풍성함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울 기회가 될 수 있음을 보게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공평함」이라는 말을 두 번이나 사용하면서도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액수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같은 액수를 내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 그의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은혜를 운반할 사람들을 어떻게 믿을 것인가
15절에서 바울의 논증은 거의 완결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는 마케도니아 교회의 본보기, 예수님의 은혜, 고린도 사람들의 약속, 공평함을 위한 성경적 근거까지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16절부터 이야기가 뜻밖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이제 바울은 디도와 이름을 밝히지 않은 두 형제를 소개합니다. 긴 신학적 논의 뒤에 붙은 실무적인 안내처럼 보이지만, 이 부분은 앞의 논의가 실제로 어떤 모습으로 구현되는지를 보여 줍니다. 돈을 나누는 일에는 반드시 돈을 맡는 사람이 필요하고, 그 사람을 믿을 만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디도 — 권유를 받아들이되 스스로 나서는 사람
디도의 마음에 여러분을 위한 같은 애씀을 넣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고린도후서 8:16 · 본디새김
첫 절에서 마케도니아 교회들에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했듯이, 바울의 시선은 다시 하나님에게 향합니다. 디도는 바울이 강제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에게도 고린도 교회를 위한 열성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의 권함을 받아들였을 뿐 아니라, 더욱 애쓰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나서서 여러분에게로 떠났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8:17 · 본디새김
「스스로 나서서」(αὐθαίρετος)는 앞서 마케도니아 교회들에게 사용했던 것과 같은 그리스어 낱말이며, 신약에서 이 낱말은 고린도후서 8:3과 8:17, 이 두 자리에 등장합니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은 스스로 나서서 헌금에 참여했고, 디도도 스스로 나서서 그 헌금을 돕는 일에 참여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일으킨 자발성은 헌금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그 일을 맡아 섬기는 사람에게서도 나타납니다.
디도에게 고린도 교회는 단순히 일을 처리해야 할 대상이 아닙니다. 바울이 7장에서 이미 드러낸 것처럼, 그는 그 교회 사람들을 깊이 아끼며 그들과의 관계에 마음을 쏟고 있습니다.
이름 없는 두 형제 — 신뢰를 개인에게만 맡기지 않다
디도와 함께 보낼 첫 번째 형제는 복음에 관한 일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는 교회들에 의해 선정되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는 교회들이 뽑아 준 우리의 동행으로, 이 은혜와 함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이 은혜는 우리가 주님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고 우리의 기꺼운 마음을 보이려고 맡아 섬기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8:19 · 본디새김
이 형제는 바울이 개인적으로 신뢰한다는 이유만으로 선발된 사람이 아닙니다. 본문은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그가 누구였는지 확정할 근거도 없습니다. 여러 인물을 후보로 제시하는 전통적인 견해들이 있지만, 여기서는 이름보다 선발 방식이 더 중요합니다. 바울에게 필요한 것은 자기편 사람이 아니라, 교회들 앞에서 공적으로 신뢰받는 동행자입니다.
또 한 명의 형제는 여러 일에서 여러 번 시험을 거쳐 애쓰는 사람으로 확인되었다고 합니다(8:22). 그에 대해서도 이름보다는 검증된 성품과 고린도 교회를 향한 신뢰가 강조됩니다.
왜 이렇게 많은 사람이 필요합니까?
이렇게 조심하는 것은, 우리가 맡아 섬기는 이 큰 액수를 두고 아무도 우리를 흠잡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고린도후서 8:20 · 본디새김
「큰 액수」는 단지 돈이 크다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표현이 아닙니다. 적지 않은 자원을 여러 공동체로부터 모아 운반하는 일에는 오해와 비난의 위험이 따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정직하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정직하게 행동하는 것과 다른 사람들이 그 정직함을 확인할 수 있도록 일을 처리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제입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만이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떳떳한 일을 미리 살펴 챙기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8:21 · 본디새김
바울은 「하나님은 내 마음을 아시니 사람들의 의심은 상관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행하는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도 그 일이 바르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 줄 책임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들이 선정한 대표자들과 검증된 동역자들을 함께 보냅니다.
이것은 돈을 다루는 사람에 대한 불신의 표현만이 아니라 신뢰를 보호하는 방법입니다. 은혜로 시작된 일이라고 해서 관리와 검증이 불필요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은혜가 다른 사람들의 손을 거쳐 끝까지 온전하게 전달되도록 해야 합니다.
교회들의 사도들, 그리스도의 영광
디도를 두고 말하자면, 그는 나의 동반자이고 여러분을 향해서는 동역자. 우리의 형제들을 두고 말하자면, 그들은 교회들의 사도들이고 그리스도의 영광.고린도후서 8:23 · 본디새김
「교회들의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직접 택하신 열두 사도라는 뜻으로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도」(ἀπόστολος)로 옮긴 말은 보냄받은 사람들, 곧 사절이나 대표자를 가리킬 수도 있고, 「교회들의」라는 표현은 이들이 여러 교회의 위임을 받고 파견된 사람임을 나타냅니다.
돈을 운반하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부르는 말은 다소 뜻밖입니다. 그러나 앞의 논의를 생각하면,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필요를 채우고 그 일을 맡은 사람들이 성실하고 신뢰할 수 있게 섬길 때 그 행동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헌금의 의미를 돈을 내는 순간에만 한정하지 않습니다. 그 돈을 맡고, 운반하고, 전달하는 모든 과정이 그리스도의 이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사랑과 여러분을 두고 한 우리의 자랑, 그 둘의 증거를 교회들 앞에서 그들에게 보이십시오.고린도후서 8:24 · 본디새김
바울은 지금까지 고린도 교회의 믿음과 앎과 열성을 자랑해 왔고, 이제 그 자랑이 사실임을 보여 달라고 요청합니다. 「증거」는 사랑에 관한 말이 아니라 사랑이 실제로 드러난 모습입니다. 그 사랑이 멀리 떨어진 예루살렘 성도들에게도 전달되어야 합니다.
처음에 바울은 마케도니아 교회들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드러났는지를 고린도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고, 마지막에는 고린도 사람들이 자신의 사랑을 다른 교회들 앞에서 보여 주기를 요청합니다. 마케도니아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고린도로 옮겨 왔고, 그곳에서 예루살렘으로 이어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은혜와 함께 길을 가는 사람들
고린도후서 8장에는 마지막까지 헌금의 총액이 나오지 않습니다. 마케도니아 사람들이 얼마를 냈는지, 고린도 사람들이 얼마를 내야 하는지, 예루살렘에 최종적으로 얼마가 전달될 것인지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바울은 그 헌금을 맡아 길을 가는 사람들을 소개합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사람을 홀로 풍성하게 만드는 데 머물지 않고, 서로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관계를 형성합니다. 그 관계에서 주는 사람은 우월한 위치에 서지 않고, 받는 사람은 열등한 존재가 되지 않습니다. 마케도니아 교회들의 헌신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리한 헌금을 요구하는 근거가 아니며, 바울이 자발적인 마음을 존중했다고 해서 실제적인 나눔의 책임이 희미해지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모습은 가난을 미화하도록 초대하지 않고, 가난한 사람들을 무력한 존재로만 보지 않도록 시선을 바꾸어 줍니다.
19절에서 바울은 교회들이 뽑아 준 형제를 「이 은혜와 함께 길을 가는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서 실제로 길을 가는 것은 교회들이 보내기로 한 사람이고, 그가 동행하는 것은 여러 교회가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모은 헌금입니다. 바울은 그 헌금을 여전히 「이 은혜」라고 부릅니다.
마케도니아 교회들에 주어졌던 하나님의 은혜가 이제 사람들의 손을 거쳐 이동하려 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이 기꺼이 내놓은 것과 고린도 사람들이 완성해야 할 약속이 모여, 예루살렘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한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그 길에 나서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름조차 남지 않은 형제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교회들의 신뢰를 받고, 맡겨진 일을 조심스럽게 수행하며, 주님 앞에서뿐 아니라 사람들 앞에서도 떳떳하려 합니다. 바울은 그들을 그리스도의 영광이라고 부릅니다. 누군가가 기꺼이 내놓은 것을 다른 누군가에게 정직하게 전달하는 평범하고도 책임 있는 일에서도 그 영광이 드러날 수 있습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 남는 장면은 부유한 사람들이 큰돈을 내놓아 찬사를 받는 모습이 아닙니다.
서로 멀리 떨어진 교회들이 아직 만나지 못한 형제자매의 부족함을 생각하고, 믿을 만한 사람들을 세우고, 그들에게 자신의 나눔을 맡기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이제 길을 나서고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 가는 것을 바울은 은혜라고 부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