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풀어 읽기 · 7장

이 장의 자리 · 7장 · 디도가 전한 소식

상처를 남긴 편지가 기쁨이 되기까지

바울은 자신이 보낸 편지를 후회했습니다.

고린도인들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쓴 편지였습니다. 반드시 해야 할 말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편지를 보내고 나서 그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그 말들이 고린도인들을 얼마나 아프게 했을지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바울은 「내가 그 편지로 여러분을 슬프게 했더라도 후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8절).

후회했지만 이제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왜 마음이 바뀌었을까요? 자신이 옳았다는 사실이 증명되었기 때문일까요? 고린도인들이 결국 자신의 권위를 인정했기 때문일까요?

바울의 대답은 조금 다릅니다.

그들은 슬퍼했습니다. 그러나 슬픔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았고, 행동을 바꾸었으며, 무너졌던 관계를 회복하려 했습니다.

바울은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합니다.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구별은 슬픔과 기쁨 사이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을 무너뜨리는 슬픔과 사람을 돌이키게 하는 슬픔 사이에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차이를 설명하기 전에 자신의 약한 모습을 다시 보여 줍니다. 그는 두려워했고, 안식을 얻지 못했으며, 동역자의 소식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다가 디도가 도착했을 때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낙심한 사람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계십니다.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97장 본문 읽기 →

하나님의 약속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해야 할 일

고린도후서 7:1 본문 →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이런 약속들을 지니고 있으니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가며, 육과 영의 온갖 더러움에서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합시다.고린도후서 7:1 · 본디새김

7장의 첫 절은 앞 장에서 이어지는 권면입니다. 「이런 약속들」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가운데 거하시고, 그들을 받아들이시며, 그들의 아버지가 되시겠다고 하신 약속을 가리킵니다(6:16–18). 바울은 그 약속들을 지닌 사람들에게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고 말합니다.

그는 먼저 깨끗해져야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받아들이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이제 그 약속에 합당하게 살아가자고 권합니다.

「깨끗하게 합시다」에 포함된 사람

「깨끗하게 합시다」는 1인칭 복수 권유형으로, ‘우리가 깨끗하게 하자’는 뜻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만 깨끗해지라고 명령하지 않고 자신도 그 일에 포함합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의 사도직을 변호하고 고린도인들의 잘못을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거룩함의 문제에서는 자신을 심판자의 자리에 따로 세우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받아들이신 백성으로서 자신과 고린도인들이 함께 깨끗해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가 사도라는 사실은 이 권면에서 제외될 근거가 되지 않습니다.

또한 바울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움」을 말합니다. 여기서 육을 더럽고 영을 깨끗한 것으로 대조하지 않고, 둘 다 더러워질 수 있는 영역으로 언급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육체 자체가 악하고 영적인 부분만 선하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사람의 외적인 행동과 내적인 삶을 아우르는 정결을 요청합니다. 우상숭배에 실제로 참여하는 행동뿐 아니라, 하나님과 양립할 수 없는 것을 마음속에서 받아들이는 태도도 문제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거룩함은 완성된 상태인가, 이루어 가는 일인가

바울은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가며」라고 말합니다. 이 동사는 어떤 일을 끝까지 이루거나 완성한다는 뜻을 지닙니다. 바울은 이미 모든 면에서 완전해졌다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거룩함을 향해 계속 나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일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이 두려움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버리실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불안과 동일하지 않습니다. 바로 앞에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시겠다는 약속이 있으므로, 여기서의 두려움은 자신들을 받아들이신 하나님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경외와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으로 그들을 받아들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사랑이 하나님의 거룩함을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가까이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자신의 삶을 더욱 진지하게 돌아보게 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은 거룩함에 관한 일반적인 권면을 멈추고 자신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조금 더 깊이

육과 영을 아우르는 이 정결은 예수님께서 마가복음 7:20–23에서 사람을 더럽히는 것이 인간의 마음에서 나오는 악한 생각과 행동이라고 가르치신 말씀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살 사이라는 말

고린도후서 7:2–4 본문 →

마음에 우리를 받아 주십시오. 우리는 아무에게도 잘못하지 않았고, 아무도 망치지 않았고, 아무에게서도 부당한 이득을 취하지 않았습니다.고린도후서 7:2 · 본디새김

바울의 요청은 단순합니다.

자신과 동역자들을 받아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곧바로 덧붙인 세 가지 부정은 비슷해 보이지만 강조점이 다릅니다. 첫째는 다른 사람에게 부당한 일을 저지르는 문제, 둘째는 다른 사람을 해치거나 손상시키는 문제, 셋째는 다른 사람을 이용해 자신의 이익을 얻는 문제입니다.

이것이 실제로 어떤 고발에 대한 답변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특히 경제적인 이득을 취했다는 의심이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지만, 이 절만으로 특정한 금전 사건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동기뿐 아니라 행동의 정당성도 변호합니다. 그는 고린도인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사랑을 이유로 그들에게 어떤 피해를 주든 용인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사랑과 진실한 행동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정죄하려는 말이 아니다

이렇게 강하게 자신을 변호하고 나면 고린도인들은 자신들이 비난받고 있다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 가능성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정죄하려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우리 마음 안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 사이라고 앞서 말했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7:3 · 본디새김

원문에는 ‘함께’라는 뜻의 접두사가 붙은 두 동사, 곧 함께 죽는다는 동사와 함께 산다는 동사가 쓰입니다. 바울은 단순히 고린도인들이 마음에 든다거나 계속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함께 죽고 함께 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죽음은 인간의 관계를 갈라놓을 수 있는 가장 극단적인 사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 안에서 맺어진 자신과 고린도인들의 관계를 죽음과 삶을 함께 나누는 관계로 묘사합니다. 죽음을 먼저, 삶을 나중에 놓는 표현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바울의 사고방식과도 잘 어울립니다.

여기서 바울의 자기변호가 향하는 방향이 드러납니다. 그는 자신이 옳고 고린도인들이 틀렸다는 결론을 얻으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과 여전히 한편에 서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려는 것입니다.

정죄하지 않으면서 잘못을 말할 수 있는가

바울은 자신에게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면서도 상대방을 정죄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누군가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과 그 사람을 완전히 정죄하는 일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는 고린도인들의 행동에 문제가 있었다고 판단했고, 그래서 그들을 슬프게 하는 편지까지 썼습니다. 그러나 그 잘못 때문에 고린도인들을 자신의 삶에서 지워 버리지는 않았습니다. 바울은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잘못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잘못을 지적한다는 이유로 관계 자체를 부정하지도 않습니다.

이런 태도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화해의 복음과 연결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죄가 없었다고 선언하시는 방식으로 세상과 화해하신 것이 아닙니다. 죄를 다루시고 예수님을 통해 화해의 길을 여셨습니다(5:18–21).

잘못은 실제로 다루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을 통해 사람이 다시 관계 안으로 돌아오기를 바랍니다.

위로와 기쁨이 넘친다는 뜻밖의 선언

4절에서 바울의 어조가 갑자기 밝아집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거리낌 없이 말할 큰 자유가 있고, 여러분을 두고 큰 자랑이 있습니다. 나는 위로로 가득 채워졌고,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기쁨으로 넘치게 되어 있습니다.고린도후서 7:4 · 본디새김

앞에서는 그들과의 관계가 어려웠고 자신이 정당하게 행동했다고 해명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을 두고 자랑하며 위로와 기쁨으로 가득하다고 합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요?

그 이유는 다음 절부터 밝혀집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의 소식을 기다리면서 크게 괴로워했지만, 디도가 돌아와 그들의 반응을 전해 준 뒤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4절은 앞으로 들려줄 이야기의 결말을 먼저 보여 줍니다.

바울은 위로받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위로가 어떻게 찾아왔는지 설명합니다.

밖으로는 다툼, 안으로는 두려움

고린도후서 7:5–7 본문 →

우리가 마케도니아에 갔을 때에도 우리의 육은 조금도 놓임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우리는 모든 면에서 환난을 당했습니다. 밖으로는 다툼, 안으로는 두려움이었습니다.고린도후서 7:5 · 본디새김

이 문장은 앞에서 끊겼던 이야기를 다시 이어 줍니다.

고린도후서 2:12–13에서 바울은 트로아스에 복음을 전할 문이 열렸지만, 디도를 만나지 못해 마음에 놓임을 얻지 못해 마케도니아로 향했다고 말했습니다. 2:14부터는 사도직과 새 언약,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하나님의 화해에 관한 긴 설명이 이어졌습니다. 이제 7:5에서 바울은 마케도니아에 도착했던 때로 돌아옵니다.

바울은 자신의 불안이 단순히 마음속 걱정에 그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마케도니아에 도착한 뒤에도 몸과 삶 전체가 환난의 압박 아래 있었습니다.

바울은 두려워했다

5절의 마지막 표현 「밖으로는 다툼, 안으로는 두려움」은 짧고 강합니다. 원문도 ‘밖으로 다툼들, 안으로 두려움들’이라는 명사구를 나란히 놓습니다.

외부의 다툼이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들이었는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케도니아에서 발생한 반대와 갈등을 가리킬 수 있지만, 이 절만으로 특정 사건을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반면 내면의 두려움은 앞뒤 문맥에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디도가 돌아오지 않았고, 고린도인들이 그 편지를 어떻게 받아들였는지 알 수 없었으며, 관계가 더 나빠졌을 가능성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소식을 기다리며 두려워했을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두려움을 감추지 않습니다. 그는 앞에서 예수님의 사도로서 담대하게 말한다고 했지만, 그 담대함이 두려움이라는 감정의 부재를 뜻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실제로 두려워하면서도 사도로 살아갔습니다.

믿음이 있는 사람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는 생각은 그의 실제 고백과 맞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관계가 무너질 가능성을 두려워했고, 동역자의 소식을 기다리며 불안해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 위로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위로하셨는가

그러나 낙심한 이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디도가 온 것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습니다.고린도후서 7:6 · 본디새김

디도가 바울을 위로했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디도가 온 것으로 바울을 위로하셨다고 말합니다. 디도는 실제로 마케도니아에 도착했고, 바울은 그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만남을 하나님의 위로로 이해합니다.

하나님께서 직접적인 음성이나 환상을 통해 바울의 두려움을 없애셨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한 사람을 통해 다른 사람을 위로하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관계와 역사적 사건을 통해 일하신다고 믿습니다.

디도의 도착은 평범한 인간적인 만남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낙심을 돌보시는 사건이었습니다. 여기서 「낙심한 이들」은 낮아진 사람들, 비천하거나 짓눌린 사람들을 가리킬 수 있으며, 문맥에서는 큰 환난과 두려움에 눌린 바울 일행의 상태를 표현합니다.

그런데 바울을 기쁘게 한 것은 디도가 무사히 돌아왔다는 사실만이 아니었습니다. 디도가 가져온 소식이었습니다.

위로받은 사람이 위로를 가져오다

그가 온 것으로만이 아니라, 그가 여러분을 두고 받은 그 위로로도 우리는 위로받았습니다. 그는 여러분이 나를 사무치게 그리워했다는 것과 여러분이 슬퍼 울었다는 것과 여러분이 나를 위해 열심을 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었고, 그래서 나는 더욱 기뻐했습니다.고린도후서 7:7 · 본디새김

고린도인들의 반응이 디도를 기쁘게 했고, 그 기쁨이 다시 바울에게 전해졌습니다.

위로가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리움과 슬픔과 열심, 이 세 가지는 고린도인들의 마음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그들은 바울의 부재를 아쉬워했고,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슬퍼했으며, 관계를 바로잡기 위해 움직였습니다.

바울이 기뻐한 것은 그들이 자신에게 굴복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그들의 마음이 다시 자신을 향해 열렸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이 보낸 편지가 그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본격적으로 설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2:13에서는 「내 영에 놓임」이 없었다고 하고, 7:5에서는 「우리의 육은 조금도 놓임」을 얻지 못했다고 합니다. 같은 ‘놓임’이라는 낱말이 반복되면서 영과 육의 표현이 달라집니다. 또 낙심한 이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은 이사야의 위로 약속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이사야 49:13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고난받는 자기 백성을 위로하시며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신다고 선포합니다. 원래 그 말씀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둘러싼 약속이지만, 바울 역시 고난받는 사람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7:5–13의 위로의 언어는 예레미야애가의 고통과 위로의 전통과도 연결되어, 바울의 언어가 단순한 심리적 위안이 아니라 이스라엘 성경의 고난과 회복이라는 더 넓은 배경에 놓여 있음을 보여 줍니다.

후회했지만 이제는 후회하지 않는다

고린도후서 7:8–9 본문 →

내가 그 편지로 여러분을 슬프게 했더라도 후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때 후회하기는 했지만 — 그 편지가 잠시나마 여러분을 슬프게 했다는 것을 내가 알고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7:8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바울의 인간적인 모습을 특별히 생생하게 보여 줍니다.

바울의 후회는 잘못된 판단의 고백인가

「후회하다」는 어떤 행동을 한 뒤 마음이 바뀌거나 그 일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뜻을 지닙니다. 바울은 그 편지 자체가 반드시 잘못된 결정이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편지가 고린도인들에게 가져온 슬픔 때문에 한때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고 인정합니다.

상대방을 바로잡기 위해 꼭 해야 할 말을 했더라도, 그 말이 실제로 상대방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 앞에서는 마음이 아플 수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도라는 이유로 그런 마음의 흔들림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바울의 책망이 감정 없는 판단이나 일방적인 권위 행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보여 줍니다. 그는 고린도인들을 사랑했으며, 그 사랑 때문에 그들을 슬프게 해야 하는 일을 괴로워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후회하지 않게 되었는가

이제 나는 기뻐합니다. 여러분이 슬퍼졌기 때문이 아니라 슬퍼져서 회개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따라 슬퍼졌으니 말입니다. 우리 때문에 여러분이 아무 일에서도 손해를 입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고린도후서 7:9 · 본디새김

바울이 기뻐하는 까닭은 슬픔이 아니라, 그 슬픔이 회개로 이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이 차이가 7장의 중심입니다.

바울이 그들을 슬프게 한 목적은 슬픔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잘못된 일을 바로잡고 하나님께 합당하게 돌아오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결과가 나타났기에 이제는 편지를 보낸 일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슬픔은 회개의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슬프다는 사실만으로 회개가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고린도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고 행동을 바꾸었고, 그것이 바울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따라 슬퍼졌다는 말

「하나님을 따라」는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나님께 합당하게,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는 방식으로라는 의미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슬픔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잘못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뜻입니다. 책망받아 단순히 기분이 나빠진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들이 고린도인들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가 보낸 편지는 고통을 가져왔지만, 그 고통이 회개로 이어졌기에 그들을 파괴하는 결과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합니다.

다만 바울은 모든 고통스러운 책망이 반드시 좋은 결과를 낳는다고 일반화하지 않습니다. 그는 디도를 통해 고린도인들의 실제 반응을 확인한 뒤에 이렇게 말합니다.

결과를 확인하기 전에는 후회했습니다.

결과를 확인한 뒤에는 기뻐했습니다.

바울의 판단은 자신의 의도가 선했다는 주장만으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그 편지가 고린도인들의 삶에 실제로 어떤 열매를 맺었는지를 살핍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슬픔과 세상의 슬픔

고린도후서 7:10 본문 →

하나님을 따르는 슬픔은 후회할 것 없는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이루어 내지만, 세상의 슬픔은 죽음을 빚어내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7:10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바울이 자신의 경험에서 하나의 원리를 이끌어 내는 자리입니다. 그는 모든 슬픔이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두 슬픔은 무엇이 다를까요?

슬픔의 깊이가 아니라 방향이 다르다

이 구절을 잘못 읽으면 깊이 슬퍼할수록 참된 회개에 가까워진다는 결론을 내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슬픔의 양을 비교하지 않습니다. 그는 슬픔이 무엇을 이루어 내는지 비교합니다.

어떤 사람은 잘못을 저지른 뒤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다는 사실보다 자신의 평판이 나빠진 것을 더 괴로워할 수 있습니다. 혹은 자신이 잘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피해를 인정하고, 행동을 바꾸며, 관계를 바로잡으려 할 수도 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슬픔을 느낄 수 있지만, 슬픔이 향하는 곳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슬픔은 자신의 잘못을 하나님 앞에서 인정하고 돌이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슬픔입니다. 반면 세상의 슬픔은 하나님의 뜻을 기준으로 한 돌이킴에 이르지 못하고 죽음으로 이어지는 슬픔으로 묘사됩니다.

다만 「세상의 슬픔」을 죄책감이나 우울감 같은 특정한 심리 상태와 곧바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현대 심리학적인 감정 분류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회개와 그에 이르지 못하는 슬픔이 가져오는 서로 다른 영적 결과를 말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근거로 우울증이나 심한 슬픔을 경험하는 사람이 세상적인 사람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본문을 벗어난 적용입니다.

후회와 회개는 어떻게 다른가

8절에서 바울이 「후회했다」고 말할 때 사용한 단어는 메타멜로마이이고, 10절의 「회개」는 메타노이아입니다. 두 단어를 언제나 완전히 대립하는 전문용어처럼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문맥에 따라 의미가 겹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단락에서는 두 단어가 서로 다른 역할을 합니다. 바울의 후회는 편지를 보낸 일에 대한 자신의 감정과 판단의 변화입니다. 고린도인들의 회개는 잘못을 깨닫고 삶의 방향을 돌이키는 일입니다.

바울은 슬픔을 회개와 동일시하지 않습니다. 슬픔이 회개를 이루어 낸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슬픔은 목적지가 아니라 회개를 향한 과정에 놓여 있습니다.

「후회할 것 없는」은 문장 구조상 회개에 걸릴 수도 있고 구원에 걸릴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핵심은 하나님을 따르는 슬픔이 파멸이 아니라 구원으로 이어지는 회개를 이루어 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원리를 추상적인 교훈으로만 남겨 두지 않습니다. 다음 절에서 고린도인들의 실제 행동을 증거로 제시합니다.

조금 더 깊이

「후회할 것 없는」(아메타멜레톤)을 회개에 연결하면 후회할 것 없는 회개가 구원에 이른다는 뜻이 되고, 구원에 연결하면 회개가 후회할 것 없는 구원에 이른다는 뜻이 됩니다. 문장은 두 번째 쪽으로 읽히기 쉽습니다. 첫 번째 해석은 바울이 8절에서 자신의 후회를 이야기한 뒤 10절에서는 후회할 필요가 없는 회개를 말한다는 연결을 강조하고, 두 번째 해석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이 결코 후회할 일이 되지 않는다는 결과를 강조합니다. 또 이 대목의 후회와 회개의 언어를 고대 철학의 감정 및 도덕적 변화에 관한 논의와 비교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바울이 단순히 슬픔을 부정하거나 감정을 억누르라고 하지 않고, 슬픔이 사람의 변화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를 진지하게 다룬다는 해석입니다.

회개는 어떻게 눈에 보이는가

고린도후서 7:11 본문 →

그도 그럴 것이, 보십시오, 하나님을 따라 슬퍼진 바로 그 일이 여러분에게 얼마나 큰 애씀을 빚어냈습니까. 그뿐 아니라 해명을, 그뿐 아니라 분함을, 그뿐 아니라 두려움을, 그뿐 아니라 사무치는 그리움을, 그뿐 아니라 열심을, 그뿐 아니라 벌하려는 마음을 빚어냈습니다. 여러분은 모든 면에서 이 일과 관련하여 자신들이 결백하다는 것을 드러내 보였습니다.고린도후서 7:11 · 본디새김

이 절에서는 바울의 말이 갑자기 빨라집니다.

목록에 나타난 감정과 행동은 서로 다른 역할을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자신을 향해 강한 감정을 느꼈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들의 슬픔이 실제로 행동을 변화시켰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 합니다.

무관심에서 애씀으로

첫 번째인 「애씀」은 어떤 일에 진지하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태도를 뜻합니다. 단순히 마음속으로 미안해한다는 뜻이 아니라, 잘못을 바로잡기 위해 움직이는 태도입니다. 고린도인들은 슬퍼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무엇인가를 바로잡기 위해 행동했습니다. 이것이 바울이 가장 먼저 제시하는 회개의 열매입니다.

해명과 분함

「해명」은 그들이 자신들의 태도와 행동을 설명하고, 문제에 대한 입장을 분명히 밝히려 했던 일일 수 있습니다. 이어지는 「분함」은 잘못된 일에 대한 강한 반응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그 분함이 정확히 누구를 향했는지는 본문이 명시하지 않습니다. 잘못한 사람을 향한 분함일 수도 있고, 자신들의 이전 태도를 향한 분함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들은 이전처럼 잘못을 무심하게 넘기지 않았고, 문제를 문제로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두려움과 그리움이 함께 있다

두려움의 대상이 하나님인지, 바울이 취할 조치인지,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의 결과인지 본문은 명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움에 관해서는 앞의 7절이 단서를 줍니다. 디도는 고린도인들이 바울을 사무치게 그리워했다고 전했으므로, 이 그리움은 바울과의 관계가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두려움과 그리움이 함께 나타납니다. 고린도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면서도, 바울과 다시 가까워지기를 원합니다. 문제를 회피하지도, 문제 때문에 관계를 포기하지도 않습니다.

열심과 벌하려는 마음

「벌하려는 마음」은 정의를 세우거나 잘못에 대해 정당한 조치를 취하는 일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문맥상 고린도인들이 잘못한 사람에 대해 실제로 징계를 시행한 일과 연결될 가능성이 큽니다. 고린도후서 2:6에서 바울은 다수가 내린 징계가 충분하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이 취한 조치의 정확한 형태나 절차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또한 바울은 징계를 끝없이 강화하라고 말하지 않았고, 이미 충분한 징계가 이루어졌을 때는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권했습니다. 따라서 여기서 회개의 열매로 등장하는 벌하려는 마음은 무제한적인 보복이나 가혹한 처벌을 정당화하는 근거가 아닙니다. 잘못을 바로잡는 일이 실제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가리킵니다.

「결백하다」는 말의 의미

그런데 고린도인들이 처음부터 결백했다면 왜 회개해야 했을까요?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이전에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상황을 바로잡으려는 행동을 통해 그 문제에 대한 자신들의 책임을 다했음을 인정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편이 문맥에 맞습니다. 그들이 이제는 그 잘못된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입장을 바로잡았다는 것입니다.

회개는 단순히 감정을 깊이 느끼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태도가 달라지고, 그 변화가 실제 행동으로 나타나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전의 잘못을 끝까지 그들의 정체성으로 붙들어 놓지 않습니다. 변화가 일어났다면 그 변화를 인정합니다. 이것이 2장에서 징계가 충분하다고 말했던 판단과도 연결됩니다.

편지를 쓴 진짜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고린도후서 7:12 본문 →

그러므로 내가 여러분에게 그 편지를 쓰기는 했지만, 그것은 잘못한 사람 때문도 아니고 잘못을 당한 사람 때문도 아닙니다. 도리어 우리를 위한 여러분의 애씀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에게 드러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고린도후서 7:12 · 본디새김

바울은 편지를 쓴 목적을 설명하면서 잘못한 사람과 잘못을 당한 사람을 언급하고, 그 어느 한 사람 때문도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잘못한 사람도, 잘못을 당한 사람도 중심이 아니었다는 말

이 표현을 문자적으로만 받아들이면 바울은 가해자나 피해자에게 관심이 없었다는 뜻이 됩니다. 그러나 그는 잘못한 사람의 문제를 실제로 다루었고, 그 사람이 지나친 슬픔에 삼켜지지 않도록 용서하고 위로하라고 권했습니다(2:6–8).

따라서 12절은 그 사건을 다루면서 바울이 궁극적으로 무엇을 이루고자 했는지 강조하는 문장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 목적은 공동체 전체의 태도가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 사건의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지는 것은 아닙니다. 잘못한 사람과 잘못을 당한 사람이 누구인지, 두 사람이 어떤 관계였는지는 여전히 불분명합니다. 잘못을 당한 사람을 바울 자신으로 보는 견해도 있고 다른 사람으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본문은 그 사람의 신원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사건을 고린도전서 5장의 문제와 반드시 동일시하거나, 바울 개인을 향한 모욕 사건으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스스로 알아보아야 했던 것

12절의 마지막에는 「여러분에게 드러나게」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고린도인들의 애씀을 확인하려고만 편지를 쓴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 애씀을 스스로 알아보게 하려는 것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회개는 단순히 바울의 권위에 굴복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고린도인들 자신이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인지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그들은 진지하게 움직이면서, 자신들이 그 복음의 사역과 관계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이 구절이 피해자의 권리나 잘못에 대한 책임을 공동체의 명예보다 덜 중요하게 여겨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사건의 처리 자체에서 끝나지 않고, 공동체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관계와 책임을 새롭게 인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바울은 그 결과가 자신뿐 아니라 디도에게도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설명합니다.

디도의 기쁨이 바울의 기쁨이 되다

고린도후서 7:13–16 본문 →

이 때문에 우리는 위로받았습니다. 우리가 받은 그 위로에 더해, 디도의 기쁨 때문에 우리는 훨씬 더 기뻐했습니다. 그의 영이 여러분 모두 덕분에 쉬게 되었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7:13 · 본디새김

여기서 이야기는 다시 디도에게로 돌아갑니다.

앞에서는 디도가 바울에게 위로의 소식을 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제는 디도 자신이 고린도인들에게 위로받은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디도도 걱정했을 것이다

디도가 고린도로 갔을 때 어떤 위험을 예상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과 고린도 교회 사이의 관계가 어려웠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그가 맡은 일이 간단하지 않았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바울이 보낸 엄한 편지에 대한 반응을 확인해야 했고, 공동체와 관계를 맺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는 고린도인들에게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들은 디도를 받아들였고, 그에게 순종하는 태도를 보였으며, 바울과의 관계를 바로잡으려는 마음을 드러냈습니다.

「쉬게 되었다」(ἀναπαύω)는 표현은 단순히 여행 후 몸을 쉬었다는 뜻으로만 읽기 어렵습니다. 그가 맡았던 일과 관련된 긴장과 부담이 풀리고, 마음의 안정을 얻은 모습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5절의 ‘놓임’과는 다른 낱말이지만, 앞에서는 바울에게 놓임이 없었고 이제는 디도의 영이 쉬게 되었습니다. 고난과 불안에서 안식과 위로로 옮겨 가는 이야기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바울의 자랑이 사실로 드러나다

내가 그에게 여러분을 두고 자랑한 것이 있었다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우리가 여러분에게 모든 것을 진실하게 말한 것처럼, 디도 앞에서 한 우리의 자랑도 진실임이 드러났습니다.고린도후서 7:14 · 본디새김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깊이 실망하고 상처받았으며, 그들을 슬프게 하는 편지까지 썼습니다. 그럼에도 디도에게는 그들을 자랑했습니다. 그들에 대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지금 잘못된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해서, 그들의 모든 믿음과 사랑이 거짓이었다고 판단하지는 않은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자랑은 위험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디도가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면, 바울의 말은 실제 모습과 맞지 않는 낙관으로 드러났을 것입니다.

그런데 결과는 달랐습니다.

고린도인들은 디도를 받아들였고, 진지하게 반응했습니다. 바울은 이 일을 단순히 자신의 판단이 옳았다는 증거로만 사용하지 않고, 고린도인들의 변화가 자신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았다는 사실을 기뻐합니다.

두려움과 떨림으로 디도를 맞아들이다

그리고 그의 속은 여러분을 향해 더욱 깊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순종한 것, 곧 여러분이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를 맞아들인 것을 그가 되새기기 때문입니다.고린도후서 7:15 · 본디새김

「그의 속」은 깊은 애정과 감정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디도는 고린도인들을 만나고 돌아온 뒤 그들을 더욱 깊이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두려움과 떨림」을 고린도인들이 디도를 무서워하여 벌벌 떠는 모습을 이상적인 태도로 칭찬한 말로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표현은 상황의 엄중함을 인식하고 진지하게 반응하는 태도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고린도인들은 디도가 맡은 사명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 표현에는 실제적인 긴장도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앞에서 자신이 고린도인들의 믿음을 주관하려는 사람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1:24). 그러나 여기서는 그들의 「순종」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바울이 어떤 형태의 사도적 권위도 부정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며, 공동체가 잘못했을 때 그것을 바로잡을 책임을 가지고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그러나 그 권위는 예수님의 복음과 공동체의 유익을 섬기는 권위여야 합니다.

따라서 여기서의 순종을 지도자에게 무조건 복종하라는 일반적인 명령으로 확대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본문이 보여 주는 것은 특정한 갈등을 겪은 공동체가 바울의 권면과 디도의 방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관계를 회복하려는 행동을 보였다는 사실입니다.

관계가 한쪽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고린도인들은 디도를 받아들이고, 디도는 그들에게 위로받고 그들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바울은 그 소식을 듣고 기뻐합니다.

「여러분을 믿고 모든 면에서 마음이 든든합니다」

여러분을 믿고 모든 면에서 마음이 든든하니 나는 기뻐합니다.고린도후서 7:16 · 본디새김

앞에서는 바울이 두려워했습니다. 디도를 기다렸고, 편지를 보낸 일을 후회했으며, 고린도인들의 반응을 알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는 그들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모든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었고 앞으로도 아무런 갈등이 없으리라는 보장은 아닙니다. 편지의 뒤쪽에는 여전히 바울의 사도직과 공동체의 문제를 둘러싼 날카로운 논의가 남아 있습니다. 바울이 지금 확인한 것은 그들의 실제적인 반응이며, 그것이 그에게 다시 그들을 신뢰할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들의 과거 잘못에 대한 기억만으로 현재를 판단하지 않습니다. 지금 그들에게서 나타난 변화를 인정합니다.

그리하여 두려움은 신뢰로, 후회는 기쁨으로 바뀝니다.

디도가 돌아온 날

고린도후서 7:1–16 본문 →

고린도후서 7장의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화려하지 않습니다.

마케도니아에 있는 바울이 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밖으로는 다툼이 있고, 안으로는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보낸 편지를 생각합니다. 꼭 해야 할 말이었지만, 그 말들이 그들을 얼마나 슬프게 했을지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반응을 확인할 방법도 없습니다.

그러다가 디도가 도착합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있었던 일을 전합니다. 고린도인들은 바울을 사무치게 그리워했고, 슬퍼했고,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했으며, 디도를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바울은 그 소식을 듣고, 자신이 보낸 편지를 더 이상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뜻을 관철한 바울의 승리가 아닙니다. 그는 고린도인들을 슬프게 하는 데 성공했다고 자랑하지 않고, 그들이 하나님을 따라 슬퍼졌다고 말합니다. 그가 기뻐한 것은 상대방의 고통이 아니라 그들의 변화였고, 그 슬픔이 그들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회개에 이르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위로는 고린도인들을 잊게 하는 방식이 아니라, 그들과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통해 찾아왔습니다.

물론 고린도인들이 하나님과 화해한 사건과 바울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사건을 완전히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의 화해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 근거하고, 바울과의 관계 회복은 구체적인 갈등 속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화해를 받은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바로잡는다는 점에서, 두 사건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이 변화했을 때 그들을 다시 신뢰했습니다. 물론 모든 상황에서 즉각적인 신뢰 회복이 가능한 것은 아닙니다. 피해가 심각하거나 반복적인 잘못이 있었을 때에는 책임 확인과 안전 확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할 수 있으며, 고린도후서 7장은 그런 모든 상황의 절차를 규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바울과 고린도인들 사이에서 실제로 나타난 변화와 그에 대한 바울의 반응을 보여 줍니다.

그 변화가 디도를 통해 전해졌을 때, 바울은 「여러분을 믿고 모든 면에서 마음이 든든하니 나는 기뻐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관계를 잃을까 두려워했던 사도였습니다.

이제는 그 관계를 다시 신뢰하며 기뻐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가 달라진 것은 단순히 좋은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고린도인들이 실제로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변화 속에서 낙심한 사람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일을 알아보았습니다.

디도가 돌아온 날, 바울은 그렇게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