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끝인사

사랑은 왜 어떤 문을 닫아야 하는가

요한이서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짧은 편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짧은 편지에는 쉽게 화해시키기 어려운 두 명령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장로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부탁합니다. 그런데 불과 몇 줄 뒤에는 「그를 집에 받아들이지 말고 인사말도 건네지 마십시오」라고 말합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문을 열어 주지 말라고 합니다. 사랑을 가르치는 사람이 인사조차 건네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랑에 예외를 두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랑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어려운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이 질문을 풀기 위해서는 편지의 한가운데 놓인 7절, 「예수 그리스도가 육으로 오심을 고백하지 않는 자들」에 대한 경고를 먼저 보아야 합니다. 장로가 염려하는 것은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신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는 공동체가 누구를 사랑해야 하는가뿐 아니라, 그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까지 바꾸어 놓습니다.

이 편지는 진리와 사랑을 함께 이야기하면서 시작합니다. 이어서 진리 안에서 걷는 사람들을 기뻐하고,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일깨웁니다. 그러다가 그리스도를 잘못 전하는 사람들을 경계하도록 명령하고, 마지막에는 다시 만남과 기쁨을 이야기합니다.

장로가 지키려는 것은 단순히 올바른 교리의 목록이 아닙니다. 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61장 본문 읽기 →

진리가 사람들을 서로 사랑하게 한다

요한이서 1:1–3 본문 →

이름 대신 관계로 시작하는 편지

장로가, 택하심을 받은 부인과 그 자녀들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나는 그들을 진리 안에서 사랑합니다. 나만이 아니라 진리를 알게 된 이들도 모두 그렇습니다.요한이서 1:1 · 본디새김

편지를 쓰는 사람은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자신을 ‘장로’라고 소개합니다.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이 ‘장로’가 누구인지 알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길게 증명하지 않고, 곧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런데 받는 사람 역시 이름이 없습니다.

‘택하심을 받은 부인과 그 자녀들’은 누구일까요? 오랫동안 두 가지 해석이 제시되었습니다. 하나는 실제 여성과 그의 자녀들이라는 해석이고, 다른 하나는 한 지역 교회를 여성에 빗대어 부른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교회로 읽으면 ‘자녀들’은 그 공동체의 신자들이고, 마지막 절의 ‘택하심을 받은 자매’는 다른 지역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어느 한쪽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해석을 선택하든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이 편지에서 그들은 장로의 명령을 받는 대상이기 전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장로는 그들의 정체성을 그들이 수행해야 할 일에서 찾지 않고, 하나님이 이미 그들에게 행하신 일에서 찾습니다. 이것이 뒤이어 나오는 권면의 출발점입니다.

진리는 사랑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이유다

우리 안에 머무는 그 진리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요한이서 1:2 · 본디새김

보통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를 이야기할 때는 그 사람의 성품이나 자신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장로는 자신이 그들을 사랑하는 이유가 ‘진리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자신만이 아니라 진리를 알게 된 모든 사람이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하며, 진리를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 성립하는 사랑의 연대를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이 진리는 무엇입니까?

이 편지에서 진리는 단순한 지식이나 추상적인 원리가 아닙니다. 7절이 밝히듯, 그 중심에는 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4:6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진리라고 말씀하시고, 14:16–17에서는 진리의 영이 제자들과 함께하고 그들 안에 계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다만 요한이서의 ‘진리’를 곧바로 성령과 완전히 동일한 표현이라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참된 복음과 그 복음이 믿는 이들 안에 지속적으로 작용한다는 의미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진리는 잠시 방문했다가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안에 머물며,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새로운 가르침을 들고 찾아오고, 공동체의 신앙은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장로가 말하는 진리는 그런 변화 속에서도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진리는 서로 다른 사람들을 하나의 사랑 안으로 묶습니다. 그들은 같은 취향을 가졌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한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공유하기 때문에 서로 사랑합니다.

은혜와 자비와 평화의 출처

아버지 하나님에게서, 또 아버지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은혜와 자비와 평화가 진리와 사랑 안에서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요한이서 1:3 · 본디새김

뒤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사람들을 경계할 것을 생각하면,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호칭은 가볍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하나님에 관해 새로운 지식을 전해 주신 교사가 아니십니다. 아버지의 아들이시며, 하나님에게서 오는 은혜와 자비와 평화가 예수님에게서도 옵니다.

또한 원문의 동사는 미래형으로, ‘함께 있기를 바랍니다’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입니다. 인사말의 형식 안에서 주어지는 확신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공동체를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은혜와 자비와 평화의 근원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장로는 먼저 사랑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은혜와 자비와 평화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그 은혜를 얻기 위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조금 더 깊이

‘장로’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나이가 많은 사람을 가리킬 수도 있고, 공동체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요한삼서도 똑같이 ‘장로’라는 소개로 시작합니다(요한삼서 1절). 전통적으로 이 편지는 사도 요한과 연결되어 왔지만, 편지 자체에는 사도 요한이라는 이름이 없으므로 저자의 정확한 신원을 이 한 표현만으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수신자를 실제 여성으로 읽는다면, 그 여성이 자기 가정을 돌보고 있었거나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장소를 제공하며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교회로 읽는 해석에는 수신자를 부를 때 단수와 복수가 번갈아 등장하고, 특히 6절 이후의 권면이 여러 사람을 향한다는 근거가 있습니다. 반면 실제 여성에게 보내는 편지라도 그의 가족이나 그가 돌보는 신앙 공동체 전체를 함께 권면할 수 있고, 고대의 여성 수신인에게 사용하던 호칭과 편지 관습을 바탕으로 실제 여성 지도자로 보는 읽기도 있습니다.

사랑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 처음부터 받은 길이다

요한이서 1:4–6 본문 →

장로가 발견하고 기뻐한 것

나는 몹시 기뻤습니다. 우리가 아버지에게서 계명을 받은 그대로 진리 안에서 걷는 이들을 그대의 자녀들 가운데서 발견했기 때문입니다.요한이서 1:4 · 본디새김

그가 기뻐한 것은 그들의 지식이 뛰어나다거나, 공동체가 크게 성장했다는 소식이 아닙니다. 그들이 ‘진리 안에서 걷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걷는다’는 표현은 한두 번의 행동이 아니라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길을 걷는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가르치신 뜻에 따라 살아가는 것을 의미합니다(신명기 10:12–13; 시편 119:1–3). 진리는 머릿속에 간직하는 정보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 됩니다.

장로가 ‘그대의 자녀들 가운데서’ 그렇게 걷는 사람들을 발견했다고 했으므로, 나머지 사람들은 진리에서 떠났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은 나머지 사람들이 어떠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공동체 일부에 이미 배교가 일어났다는 증거라기보다, 장로가 확인한 충실한 삶에 대한 기쁨으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이 다음 권면으로 이어집니다.

사랑하라는 계명이 왜 새롭지 않은가

그리고 이제 부인, 나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를 그대에게 부탁합니다. 이는 그대에게 새 계명을 써 보내듯이 하는 부탁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그 계명을 두고 하는 부탁입니다.요한이서 1:5 · 본디새김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3:34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새 계명’으로 주셨습니다. 그 사랑의 새로운 기준은 예수님 자신의 사랑이었습니다. 자신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반면 요한이서에서 장로는 공동체가 이미 처음부터 받았던 가르침을 다시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처음부터’는 세상이 창조된 처음이라기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신앙의 길에 들어선 시작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2:7–8에도 오래된 계명이면서 동시에 새로운 계명이라는 비슷한 표현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셨을 때 새로웠던 그 계명이 이제는 공동체가 처음부터 받아 지켜 온 가르침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뒤에 등장할 거짓 가르침과의 대비가 숨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자신이 처음 받은 복음을 낡은 것으로 여기며 다른 복음으로 갈아타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처음 받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욱 깊이 이해하고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사랑과 계명이 서로를 설명하다

그리고 사랑은 이것입니다 — 우리가 그분의 계명을 따라 걷는 것입니다. 계명은 이것이니,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그대로 그 안에서 걷는 것입니다.요한이서 1:6 · 본디새김

장로는 사랑과 계명을 서로 바꾸어 설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공허한 반복이 아닙니다. 5절에서 계명의 내용, 곧 서로 사랑하는 것이 먼저 제시되었고, 6절에서는 그 사랑이 실제 삶에서 무엇을 뜻하는지 밝힙니다.

사랑은 계명과 무관한 감정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계명은 사랑을 억누르는 규칙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사랑이 일상에서 실현될 때, 사람들은 그분의 계명 안에서 걷게 됩니다.

6절 마지막의 ‘그 안에서’가 가리키는 대상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가까운 명사인 ‘계명’일 수도 있고, 앞에서 말한 ‘사랑’일 수도 있으며, 넓게는 ‘진리’를 떠올리게 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본문의 실제 강조점은 크게 달라지지 않습니다. 장로가 말하는 사랑, 계명, 진리 안에서 걷는 삶은 서로 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편지의 방향이 갑자기 바뀝니다.

조금 더 깊이

4절 원문의 ‘기뻤습니다’는 부정과거형이고, ‘발견했습니다’는 완료형입니다. 발견한 일이 현재의 인식과 관련되어 제시되는 반면, 기뻐한 일은 경험한 사건으로 서술됩니다. 그렇다고 완료형 자체만으로 그 사람들이 이후에도 언제나 같은 상태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장로가 그들을 직접 만났는지, 다른 사람을 통해 소식을 들었는지도 본문은 밝히지 않습니다.

육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잃으면 무엇을 잃는가

요한이서 1:7–9 본문 →

사랑하라는 명령 뒤에 찾아온 경고

헤매게 하는 자가 많이 세상에 나갔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으로 오심을 고백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이런 자가 헤매게 하는 자이고 적그리스도입니다.요한이서 1:7 · 본디새김

7절은 원문에서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앞에서 서로 사랑하고 계명 안에서 걸으라고 권면한 까닭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장로는 그들이 무슨 가르침을 전하는지 상세히 소개하지 않고, 단 하나의 결정적인 특징을 말합니다.

왜 이 문제가 그렇게 심각할까요?

이 질문은 요한복음의 시작으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요한복음 1:14는 말씀이 육신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선언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하늘에서 진리를 전해 주신 분이 아니라, 사람이 되시어 인간의 삶 안으로 들어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피곤함을 겪으셨으며, 친구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고(요한복음 4:6; 11:35), 십자가에서 실제로 죽으셨습니다(요한복음 19:30–34).

따라서 육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은 예수님의 외형에 관한 세부사항 하나를 잘못 이해하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신을 드러내시고 구원을 이루신 방식 자체에 관한 문제입니다. 요한일서 4:2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으로 오신 것을 고백하는 일이 하나님에게서 온 영을 분별하는 기준으로 제시됩니다.

‘그리스도의 영적인 가르침은 받아들이지만 인간으로 오신 예수는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 둘을 분리할 수 없습니다. 이 편지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육체를 잠시 빌리신 존재도 아니시고, 인간 예수님과 별도로 존재하는 구원 원리도 아니십니다.

육으로 오신 바로 그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적그리스도라는 말의 실제 대상

‘적그리스도’라는 말을 들으면 독자는 미래에 출현할 한 명의 강력한 악한 인물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하지만 7절은 ‘헤매게 하는 자가 많이’라고 말하다가, 그들이 속한 부류를 ‘헤매게 하는 자’와 ‘적그리스도’라고 규정합니다. 요한일서 2:18에서도 이미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요한이서가 직접 겨냥하는 대상은 먼 미래의 어떤 인물이 아니라, 당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고백을 훼손하고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소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종교적인 가르침을 가지고 공동체에 접근하지만, 그 가르침 안에서는 정작 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실재가 사라집니다.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살피라는 명령

우리가 일해 놓은 것을 여러분이 잃지 않고 온전한 삯을 받도록 여러분 자신을 살피십시오.요한이서 1:8 · 본디새김

원문에서 직접적인 명령은 ‘살피십시오’ 하나입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두 동사, 곧 잃지 않는 것과 받는 것은 이 명령이 지향하는 목적을 설명합니다. 장로가 원하는 것은 위험한 사람을 찾아내는 일만이 아니라, 공동체가 지금까지 받은 것을 잃어버리지 않고 그 열매를 온전히 누리는 것입니다.

장로는 ‘여러분이 이루어 놓은 것’이라고만 하지 않고, ‘우리가 일해 놓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들의 신앙은 고립된 개인이 홀로 만들어 낸 결과가 아닙니다.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돌보며 함께 수고한 역사 속에서 자라났습니다. 그러므로 거짓 가르침은 한 사람이 틀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이미 세워진 신앙의 관계와 공동의 수고까지 훼손할 수 있습니다.

‘온전한 삯’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본문에 자세히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신앙의 충실함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것을 특정한 보상의 종류나 양으로 계산할 근거는 없습니다.

앞서 나아갔지만 하나님을 잃은 사람

앞서 나가면서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지 않는 사람은 누구든, 그에게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 가르침 안에 머무는 사람, 그에게는 아버지도 아들도 있습니다.요한이서 1:9 · 본디새김

한 사람은 앞서 나아갑니다. 다른 사람은 머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은 앞서 나아간 사람이 아니라 머무는 사람입니다.

보통 ‘앞서 나간다(προάγω)’는 표현에는 긍정적인 의미가 있고, 원문의 말도 본래 그 자체로 나쁜 뜻을 가진 말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 말 뒤에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지 않는’이라는 표현이 결합하면서 부정적인 의미를 띱니다. 이것은 새로운 지식을 얻거나 신앙 이해를 깊게 하는 일을 반대하는 말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리스도에 관한 새로운 가르침이라면서, 정작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주신 가르침으로 읽을 수도 있고,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7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관한 고백이 쟁점으로 제시되었으므로, 여기서는 적어도 그리스도께서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는지에 관한 참된 가르침이 중심에 있다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떠난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4:6–7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올 사람이 없다고 말씀하시고, 요한일서 2:23에서도 아들을 부인하는 사람에게는 아버지가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떠나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갈 수는 없습니다.

2절에서 장로는 우리 안에 머무는 진리를 말했습니다. 이제 9절에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무는 사람을 말합니다. 진리가 우리 안에 머문다는 약속과, 우리가 그 진리 안에 머물러야 한다는 권면이 서로 마주합니다. 신앙의 안정성은 단지 굳은 의지에서 나오지 않고, 먼저 우리에게 오셔서 자신을 알려 주신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요한일서 4:2에서는 ‘오신’에 해당하는 말이 완료분사인 반면, 요한이서 7절은 현재분사를 사용하여 문자적으로는 ‘육으로 오시는’ 또는 ‘육으로 오심’이라는 표현을 이룹니다. 이 때문에 요한이서가 그리스도의 미래의 오심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문법적으로 제시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한일서 4:2와 매우 비슷한 고백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적 실재를 고백하는 표현으로 이해할 강한 근거가 있습니다. 현재분사를 쓴 정확한 이유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 이 편지의 반대자들을 후대에 ‘가현설’이라고 부르는 사상과 연결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인간적 실재를 약화하거나 부정하는 경향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정확히 어떤 체계적인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는 이 편지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장로가 알려 주는 것은 그들의 사상 전체가 아니라, 반드시 분별해야 할 핵심입니다.

집의 문을 열어 주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요한이서 1:10–11 본문 →

이제 편지에서 가장 어려운 명령에 도착합니다.

누가 여러분에게 와서 이 가르침을 가져오지 않거든, 그를 집에 받아들이지 말고 인사말도 건네지 마십시오.요한이서 1:10 · 본디새김
그에게 인사말을 건네는 사람은 그의 악한 일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요한이서 1:11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질문을 풀려면 당시 ‘집에 받아들인다’는 행위가 어떤 역할을 했을지 생각해야 합니다.

여행하는 교사와 그들을 맞아들이는 공동체

초기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는 집이 중요한 만남의 장소였습니다. 로마서 16:5와 고린도전서 16:19는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모이는 교회를 언급합니다. 요한삼서 5–8절에서는 복음을 위해 여행하는 형제들을 맞이하고 도와주는 일이 진리를 위한 협력으로 묘사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여행하는 교사에게 숙식을 제공하거나 그를 환영하는 행위는 개인적인 친절 이상의 의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를 맞아들이는 공동체가 그의 활동을 돕고, 그가 전하는 가르침을 사람들에게 소개하는 통로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이서의 ‘집’이 일반 가정집인지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던 집인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어느 경우든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에게 활동의 기회를 제공하는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과 다른 사람에게 기본적인 인간적 친절을 베풀지 말라는 일반 원칙을 설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이 직접 겨냥하는 사람은 7절에서 규정한, 육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가르침을 가지고 공동체에 찾아오는 사람입니다. 장로는 그들의 가르침에 공동체의 지지와 협력을 제공하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인사말조차 악한 일에 참여하는 것이 되는 이유

단순히 인사를 건네는 것만으로 어떻게 다른 사람의 악한 일에 참여하게 될까요?

10절의 ‘인사말을 건네다(χαίρω)’는 본래 기뻐한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에서 온 표현으로, 만났을 때나 편지를 시작할 때 쓰는 인사말이었습니다. 본문에서 금하는 인사를 평범한 인사 전체로 볼 것인지, 특별히 여행하는 교사를 환영하고 동료로 인정하는 인사로 볼 것인지에는 해석이 필요합니다. 바로 다음 절이 그 방향을 알려 줍니다. 문제는 인사하는 행위의 형식이 아니라, 그 결과 그 사람의 ‘악한 일’을 함께 나누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함께 나누다’는 다른 사람과 무엇인가를 공유하거나 참여한다는 뜻입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들은 함께 사랑을 나눕니다. 그런데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을 환영하고 그의 활동을 지원한다면, 그가 하는 일에도 참여하게 될 수 있습니다. 공동체가 그를 자신의 교사로 받아들이면, 그는 그 공동체의 신뢰를 이용하여 다른 이들을 그릇된 길로 이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본문을 근거로 신앙이 다른 모든 사람과의 관계를 단절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본문이 직접 다루는 상황을 넘어서는 적용입니다. 본문이 직접 겨냥하는 것은 단순히 생각이 다른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가르침을 훼손하는 내용을 가지고 공동체에 접근하여 그것을 전하려는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과 그 사람이 전하는 가르침을 지지하는 것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물론 어떤 행위가 단순한 친절이고 어떤 행위가 실질적인 지지인지 언제나 쉽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며, 본문도 모든 경우에 적용할 상세한 기준을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원칙은 분명합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해치는 거짓을 돕는 것이 사랑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지닌 경계

공동체가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을 잃어버린다면, 그 복음에서 시작된 사랑도 깊은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자기 마음속에서 만들어 낸 이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의 기준은 육으로 오셔서 사람들 가운데 사셨고,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13:34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사랑을 제자들의 상호 사랑의 기준으로 제시하셨습니다. 요한일서 3:16에서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으신 일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육으로 오신 예수님을 부정하면서도 그분의 사랑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장로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은 교리를 사랑보다 높은 자리에 올려놓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공동체가 사랑의 근원을 잃지 않도록 보호하려는 일입니다. ‘택하심을 받은 부인과 그 자녀들’은 위험한 외부인을 찾아내어 배척하는 일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생겨난 관계 안에서 서로를 사랑하고 돌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지키기 위해 장로는 어떤 가르침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문을 닫으라고 말합니다.

종이와 먹으로 끝낼 수 없는 이야기

요한이서 1:12–13 본문 →

이렇게 엄격한 경고가 이어졌으므로 편지는 마지막까지 심각한 분위기로 끝날 것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쓸 말이 많지만 종이와 먹으로는 쓰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여러분에게 가서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기쁨이 가득 차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이서 1:12 · 본디새김

그는 위험한 가르침의 내용을 더 분석하고, 공동체가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구체적인 지침을 덧붙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더 쓰는 대신 만나기를 원합니다. 본문이 밝히는 목적은 ‘우리의 기쁨이 가득 차게 하려는 것’입니다.

앞에서 장로는 진리 안에서 걷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몹시 기뻐했습니다. 이제 그의 기쁨은 앞으로의 만남을 향합니다. 이미 경험한 기쁨이 있지만, 아직 그 기쁨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참된 교제는 편지보다 더 넓다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한다’는 원문은 문자적으로 ‘입과 입을 마주하여 말한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마주 앉아 목소리를 들으며 이야기하는 만남입니다.

10절에서는 어떤 사람에게 인사말도 건네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12절에서는 자신이 직접 찾아가 이야기를 나누겠다고 합니다. 앞에서는 교제를 제한하고, 여기서는 교제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 둘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장로가 원하는 것은 누구를 만나든 무조건 교류하는 공동체도, 사람들 사이에 높은 담을 쌓아 놓는 공동체도 아닙니다. 진리와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교제입니다. 4절의 ‘기뻤습니다’, 10절의 인사말, 12절의 ‘기쁨’은 같은 어근과 관련된 표현들인데, 편지의 흐름에서 이 셋은 의미 있는 대비를 이룹니다. 진리 안에서 걷는 사람들을 발견하고 기뻐하고, 거짓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에게는 환영의 인사를 삼가고, 마지막에는 함께 만나 누릴 기쁨이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장로는 홀로 올바른 신앙을 유지하며 만족하려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의 기쁨은 다른 사람들의 신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가 거짓 가르침을 경계하는 것은 지적인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참된 기쁨을 잃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남는 인사

그대의 자매, 곧 택하심을 받은 이의 자녀들이 그대에게 문안합니다.요한이서 1:13 · 본디새김

첫 절에는 ‘택하심을 받은 부인과 그 자녀들’이 있었고, 마지막 절에는 ‘그대의 자매, 곧 택하심을 받은 이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두 표현이 각각 지역 교회를 가리킨다면, 편지의 양 끝에는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도 하나의 신앙으로 연결된 두 공동체가 서 있는 셈입니다. 실제 여성과 그 가족으로 읽더라도, 한 가족과 다른 가족이 장로를 통해 인사를 주고받는 장면이 됩니다.

편지는 잘못된 가르침을 논박하는 긴 결론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서로 문안하는 것으로 끝납니다. 누군가에게 인사하지 말라고 명령했던 장로가, 마지막에는 다른 이들의 인사를 전해 줍니다.

그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것은 인사를 끊는 일이 아닙니다. 진리와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인사를 지키는 일입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의 ‘기뻤습니다’(에카렌), 10절의 인사말(카이레인), 12절의 ‘기쁨’(카라)이 같은 어근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을 저자가 의도적으로 설계한 언어유희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 12절에는 사본에 따른 차이가 있어, 일부 사본에는 ‘여러분의 기쁨’이라는 독법이 실려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쁨’으로 읽으면 장로의 방문을 통해 수신자들의 기쁨이 충만해진다는 뜻이 더 뚜렷해지고, ‘우리의 기쁨’으로 읽으면 편지를 쓰는 사람과 받는 사람들이 함께 누릴 기쁨이 강조됩니다. 어느 쪽이 원문인지에 관한 본문비평의 논의와 별개로, 이 본문이 채택한 ‘우리의 기쁨’은 이 편지의 관계적 성격을 잘 보여 줍니다.

진리와 사랑은 왜 분리될 수 없는가

요한이서 1:1–13 본문 →

요한이서의 중심에는 한분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편지는 진리 때문에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로 시작하고, 그 진리의 핵심은 육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고백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보여 주신 사랑은 막연한 선의가 아니라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시는 구체적인 사랑이기에, 그리스도인의 사랑도 진실을 떠나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에 관한 참된 고백을 무너뜨리는 가르침을 돕는다면 자신이 지키려던 사랑의 토대를 훼손하게 되고, 진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그것 역시 진리 안에서 걷는 삶과 어긋납니다. 그래서 장로가 문을 닫으라고 한 것은 사랑에 예외를 둔 것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은 경고가 등장했다고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경고를 어떻게 이해하고 실행해야 하는지 결정하는 기준으로 남아 있습니다.

사랑을 말하기 위해 진리를 약화하지 않고, 진리를 지키기 위해 사랑을 폐기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준으로 사랑하고 있습니까? 그리스도께서 누구신지를 기억할 때, 우리는 사랑의 내용과 한계를 함께 배워 갑니다.

그리고 이 편지는 그 배움을 딱딱한 원칙으로 끝내지 않습니다. 장로에게는 아직 할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는 종이와 먹을 내려놓고 직접 찾아가 사람들과 마주 앉기를 바랍니다. 처음에 진리 안에서 걷는 사람들을 발견했을 때 느꼈던 기쁨이, 이제는 서로 얼굴을 마주하는 자리에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서로 문안합니다. 장로는 다시 만날 날을 소망합니다.

그는 공동체가 지켜야 할 경계를 분명히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은 닫힌 문이 아닙니다.

진리와 사랑 안에서 서로를 다시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