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이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끝인사

사랑은 왜 어떤 문을 닫아야 하는가

요한이서는 신약성경에서 가장 짧은 편지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이 짧은 편지에는 쉽게 화해시키기 어려운 두 명령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장로는 「서로 사랑하자」고 부탁합니다(5절). 그런데 불과 몇 줄 뒤에는 이 가르침을 전하지 않는 사람을 「집에 받아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건네지 마십시오」라고 말합니다(10절).

서로 사랑하라는 사람이 누군가에게는 문을 열어 주지 말라고 합니다. 사랑을 가르치는 사람이 인사조차 건네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사랑에 예외를 두는 것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사랑보다 훨씬 구체적이고 어려운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실마리는 편지의 한가운데 놓인 7절에 있습니다. 속이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장로가 염려하는 것은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신가 하는 문제이고, 그 문제는 공동체가 사랑을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가까지 바꾸어 놓습니다.

장로가 지키려는 것은 단순히 올바른 교리의 목록이 아닙니다.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된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읽는 시간 19분소단락 61장 본문 읽기 →

진리가 사람들을 서로 사랑하게 한다

요한이서 1:1–3 본문 →

이름 대신 관계로 시작하는 편지

장로인 내가 선택받은 부인과 그 자녀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나는 여러분을 진리 안에서 사랑합니다. 나뿐 아니라 진리를 알게 된 모든 사람도 여러분을 사랑합니다.요한이서 1:1 · 두루새김

편지를 쓰는 사람은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고 자신을 「장로」라고 소개합니다. 편지를 받는 사람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분을 길게 증명하지 않고 곧바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말을 건넵니다.

그런데 받는 사람 역시 이름이 없습니다. 「선택받은 부인과 그 자녀들」은 누구일까요?

하나는 실제 여성과 그의 자녀들이라는 해석입니다. 고대의 여성 수신인에게 쓰던 호칭과 편지 관습이 근거이며, 그 여성이 그리스도인들이 모이는 장소를 제공하는 지도자였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한 지역 교회를 여성에 빗대어 부른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원문에서 받는 이를 부를 때 단수와 복수가 번갈아 나오고 6절 이후의 권면이 여러 사람을 향한다는 점이 근거입니다. 이 경우 「자녀들」은 신자들이고, 마지막 절의 「선택받은 자매」는 다른 지역 교회입니다. 어느 한쪽을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해석을 선택하든, 그들은 장로의 명령을 받는 대상이기 전에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장로는 그들이 누구인지를 그들이 해야 할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일에서 찾습니다. 이것이 뒤이어 나오는 권면의 출발점입니다.

진리는 사랑을 가로막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이유다

이렇게 사랑하는 것은 우리 안에 머무는 진리 때문입니다. 그 진리는 영원히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요한이서 1:2 · 두루새김

보통 누군가를 사랑하는 이유로는 그 사람의 성품이나 자신과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장로는 「진리 때문」이라고 말하고, 진리를 알게 된 모든 사람이 그들을 사랑한다고 덧붙입니다. 진리를 함께 아는 사람들 사이의 사랑의 연결입니다.

이 편지에서 진리는 추상적인 원리가 아닙니다. 7절이 밝히듯, 그 중심에는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고백이 있습니다.

진리는 잠시 방문했다가 떠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새로운 가르침을 들고 찾아와 공동체가 흔들려도, 이 진리는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같은 취향 때문이 아니라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진리를 함께 알기 때문에 서로 사랑합니다.

은혜와 자비와 평화의 출처

아버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와 자비와 평화가 진리와 사랑 안에서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요한이서 1:3 · 두루새김

장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특별히 「그분의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뒤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경계할 것을 생각하면 이 호칭은 가볍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에 관한 새 지식을 전한 교사가 아니라 아버지의 아들이시며, 은혜와 자비와 평화가 예수님에게서도 옵니다.

원문의 동사는 미래형이어서, 두루새김도 「우리와 함께 있을 것입니다」(εἰμί)라고 옮깁니다. 인사말의 형식 안에서 주어지는 확신입니다.

장로는 먼저 사랑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과 그분의 아들이 주시는 은혜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그 은혜를 얻기 위해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 은혜 안에서 살아가는 방식입니다.

조금 더 깊이

「장로」로 옮긴 말은 나이 많은 사람도, 공동체에서 존경받는 지도자도 가리킬 수 있으며, 요한삼서도 똑같이 시작합니다. 전통적으로 이 편지는 사도 요한과 연결되어 왔지만 편지 자체에는 그 이름이 없어 이 표현만으로 저자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2절의 「진리」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진리라고 하시고(요한복음 14:6) 진리의 영이 제자들 안에 계실 것이라 약속하신 말씀(요한복음 14:16–17)과 같은 주제로 이어집니다. 다만 곧바로 성령과 같은 말로 볼 필요는 없고, 그리스도에 관한 참된 복음과 그 복음이 믿는 이들 안에서 계속 작용한다는 뜻이 함께 담겨 있습니다.

사랑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 처음부터 받은 길이다

요한이서 1:4–6 본문 →

장로가 발견하고 기뻐한 것

나는 무척 기뻤습니다. 부인의 자녀들 가운데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명령대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보았기 때문입니다.요한이서 1:4 · 두루새김

장로가 기뻐한 것은 뛰어난 지식이나 공동체의 성장 소식이 아닙니다. 그들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살아가는」(περιπατέω)으로 옮긴 원문의 표현은 「걷는다」는 뜻으로, 한두 번의 행동이 아니라 삶의 방식을 가리킵니다. 구약에서도 하나님의 길을 걷는다는 말은 그분의 뜻대로 사는 것을 뜻합니다(신명기 10:12–13; 시편 119:1–3). 진리는 머릿속 정보로 끝나지 않고 사람이 걸어가는 길이 됩니다.

「자녀들 가운데」라는 말 때문에 나머지 사람들은 진리에서 떠났다고 추측하기 쉽지만,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장로는 자신이 본 사람들을 이야기할 뿐입니다. 이 구절은 일부가 신앙을 버렸다는 증거라기보다, 실제로 이루어진 신실한 삶에 대한 기쁨으로 읽는 것이 안전합니다.

사랑하라는 명령이 왜 새롭지 않은가

이제 부인께 서로 사랑하자고 부탁합니다. 새 명령을 써 보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처음부터 받은 명령을 전하는 것입니다.요한이서 1:5 · 두루새김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요한복음 13:34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명령을 새 명령으로 주셨습니다. 서로 모순되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서 그 명령이 새로웠던 까닭은 기준이 예수님 자신의 사랑이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제자들을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요한이서의 장로는 공동체가 이미 처음부터 받았던 그 가르침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처음부터」는 세상의 처음이라기보다 그들이 복음을 듣고 신앙의 길에 들어선 시작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요한일서 2:7–8 참고).

예수님께서 주셨을 때 새로웠던 그 명령이 이제는 공동체가 처음부터 받아 지켜 온 가르침이 된 것입니다.

여기에는 뒤에 나올 거짓 가르침과의 대비가 숨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장은 처음 받은 복음을 낡은 것으로 여기며 다른 복음으로 갈아타는 데 있지 않습니다. 처음 받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깊이 이해하고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사랑과 명령이 서로를 설명하다

하나님께서 주신 명령들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사랑입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대로 사랑 안에서 살아가라는 것이 그 명령입니다.요한이서 1:6 · 두루새김

사랑이 무엇입니까? 명령들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명령은 무엇입니까? 사랑 안에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장로는 사랑과 명령을 서로 바꾸어 설명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뜻 없는 되풀이가 아닙니다. 5절이 명령의 내용을 제시했다면, 6절은 그 사랑이 실제 삶에서 무엇을 뜻하는지 밝힙니다. 사랑은 명령과 무관한 감정이 아니고, 명령은 사랑을 억누르는 규칙이 아닙니다.

「사랑 안에서」로 옮긴 자리는 원문에서 「그 안에서」이며, 이것이 가리키는 대상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사랑, 명령,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삶은 서로 떨어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 편지의 방향이 갑자기 바뀝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의 「기뻤습니다」는 원문에서 지나간 사건을 말하는 부정과거형이고, 「보았기」는 완료형입니다. 다만 완료형만으로 그 사람들이 이후에도 늘 같은 상태였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6절의 「그 안에서」는 가까운 명사인 「명령」을 가리킬 수도 있고, 앞에서 말한 「사랑」을 가리킬 수도 있으며, 넓게는 「진리」를 떠올리게 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사랑을 가리키는 것으로 옮겼습니다.

사람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잃으면 무엇을 잃는가

요한이서 1:7–9 본문 →

사랑하라는 명령 뒤에 찾아온 경고

이렇게 말하는 것은 사람들을 속이는 이들이 세상에 많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속이는 자이며 적그리스도입니다.요한이서 1:7 · 두루새김

7절은 원문에서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로 시작합니다. 앞에서 서로 사랑하고 명령을 따라 살라고 권면한 까닭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장로는 그들의 가르침을 상세히 소개하지 않고 단 하나의 결정적인 특징만 말합니다.

왜 이 문제가 그렇게 심각할까요? 예수님의 몸이 실제였는지가 신앙생활에서 그렇게 중요합니까?

이 질문은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는 요한복음 1:14로 우리를 데려갑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서 진리를 전해 주기만 하신 분이 아니라 인간의 삶 안으로 들어오신 분이십니다. 피곤함을 겪으셨고, 친구의 죽음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으며(요한복음 4:6; 11:35), 십자가에서 실제로 죽으셨습니다(요한복음 19:30–34).

그러므로 이것은 예수님의 겉모습에 관한 작은 사항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을 드러내시고 구원을 이루신 방식 자체에 관한 문제입니다. 요한일서 4:2에서도 이 고백이 하나님에게서 온 영을 분별하는 기준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적인 가르침은 받아들이지만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 둘을 나눌 수 없습니다.

사람의 몸으로 오신 바로 그분이 그리스도이십니다.

적그리스도라는 말의 실제 대상

「적그리스도」라는 말을 들으면 미래에 나타날 한 명의 강력한 악한 인물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7절은 속이는 이들이 「많이」 나왔다고 말한 뒤, 「이런 사람」이 적그리스도라고 그들이 속한 부류를 밝힙니다. 요한일서 2:18도 이미 많은 적그리스도가 나타났다고 말합니다.

요한이서가 겨냥하는 대상은 먼 미래의 인물이 아니라, 당시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고백을 무너뜨리며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을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소개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종교적인 가르침을 가지고 공동체에 다가오지만, 그 가르침 안에서는 사람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가 사라집니다.

그리스도에 관해 말하면서도 그리스도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살피라는 명령

여러분은 우리가 애써 이룬 것을 잃지 않고 보상을 온전히 받도록 자신을 잘 살피십시오.요한이서 1:8 · 두루새김

장로는 거짓 가르침을 분석하라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살피라고 합니다. 원문에서 직접적인 명령은 「살피십시오」 하나이고, 잃지 않는 것과 받는 것은 그 목적입니다. 장로가 원하는 것은 위험한 사람을 찾아내는 일보다, 공동체가 받은 것을 잃지 않고 그 열매를 온전히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애써 이룬 것」이라는 말은 장로와 함께 일한 이들이 그들을 위해 수고해 온 일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의 신앙은 개인이 홀로 만든 결과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고 돌본 수고 속에서 자랐습니다. 그래서 거짓 가르침은 한 사람의 생각을 틀리게 만드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함께 세운 신앙의 관계까지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보상을 온전히」 받는다는 것은 신실함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본문은 그것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넘어서 나아갔지만 하나님을 잃은 사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넘어서 나아가 그 안에 머무르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그 가르침 안에 머무르는 사람에게는 아버지께서도 아들께서도 계십니다.요한이서 1:9 · 두루새김

한 사람은 넘어서 나아갑니다.

다른 사람은 머무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계시는 사람은 머무르는 사람입니다.

「넘어서 나아가」(προάγω)로 옮긴 말은 본래 앞서 나아간다는 뜻으로, 그 자체로 나쁜 말이 아닙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표현과 함께 쓰이면서 부정적인 뜻을 띱니다. 새로운 지식을 얻거나 신앙 이해를 깊게 하는 일을 반대하는 말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새 가르침이라면서 정작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는 것이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가르침으로도, 그리스도에 관한 가르침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가 쟁점이었으므로, 적어도 그리스도께서 누구시며 무엇을 하셨는지에 관한 참된 가르침이 중심에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그 가르침을 떠난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관계를 맺는 일이 예수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4:6–7과 요한일서 2:23도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 갈 수 없고, 아들을 고백하는 사람에게 아버지도 있다고 말합니다.

그리스도를 떠나 하나님에게 더 가까이 갈 수는 없습니다.

2절에서 진리가 우리 안에 「머문다」고 했던 장로는, 이제 우리가 그 가르침 안에 「머무르라」고 합니다. 신앙의 안정은 굳은 의지에서만 나오지 않고, 먼저 우리에게 오셔서 자신을 알려 주신 그리스도와의 관계에 뿌리를 둡니다.

조금 더 깊이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로 옮긴 7절의 표현(에르코메논 엔 사르키)은 요한일서 4:2의 완료분사와 달리 현재분사여서, 문자적으로는 「육으로 오시는」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미래에 오실 일을 가리킨다는 해석도 문법적으로 가능합니다. 하지만 요한일서 4:2와 매우 비슷한 고백이라는 점에서, 그리스도께서 역사 속에 실제로 사람으로 계셨음을 고백하는 표현으로 볼 강한 근거가 있습니다. 현재분사를 쓴 정확한 이유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이 편지의 반대자들을 그리스도의 실제 인성을 약화하거나 부정한 후대의 「가현설」과 연결하는 해석도 있지만, 그들의 사상 체계를 이 편지만으로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집의 문을 열어 주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는가

요한이서 1:10–11 본문 →

이제 편지에서 가장 어려운 명령에 도착합니다.

누군가 여러분을 찾아와 이 가르침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을 집에 받아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건네지 마십시오.요한이서 1:10 · 두루새김
그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는 사람은 그의 악한 일에 함께 참여하기 때문입니다.요한이서 1:11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질문을 풀려면 당시 「집에 받아들이」는 일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여행하는 교사와 그들을 맞아들이는 공동체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집은 중요한 모임 장소였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의 집에 교회가 모였고(로마서 16:5; 고린도전서 16:19), 요한삼서 5–8절에서는 복음을 위해 여행하는 형제들을 맞아 돕는 일이 진리를 위한 협력으로 묘사됩니다.

그러니 여행하는 교사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내주고 공동체 안에서 환영하는 일은 개인적인 친절 이상이었습니다. 맞아들이는 공동체가 그의 활동을 돕고 그의 가르침을 소개하는 통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이 「집」이 가정집인지 모임 장소인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어느 경우든 거짓 교사에게 활동의 기회를 주는 문제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장로는 신앙이 다른 사람에게 기본적인 친절을 베풀지 말라는 일반 원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이 겨냥하는 사람은 사람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가르침을 가지고 공동체에 찾아오는 사람이고, 장로는 그 가르침에 공동체의 지지와 협력을 주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인사말조차 악한 일에 참여하는 것이 되는 이유

10절의 「인사도 건네지」에 쓰인 말은 카이레인입니다. 본래 기뻐한다는 뜻의 동사에서 온 말로, 만날 때나 편지를 시작할 때 쓰는 인사말이었습니다. 이것을 평범한 인사 전체로 볼지, 여행하는 교사를 환영하고 동료로 인정하는 인사로 볼지에는 해석이 필요합니다.

11절이 방향을 알려 줍니다. 문제는 인사의 형식이 아니라, 그 결과 그 사람의 「악한 일에 함께 참여」하게 된다는 데 있습니다. 진리를 아는 사람들이 사랑을 함께 나누듯, 거짓 교사를 환영하고 지원하면 그의 일에도 함께하게 됩니다. 한 사람에게 좋은 뜻으로 베푼 친절이, 공동체의 신뢰를 이용해 다른 이들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본문을 근거로 신앙이 다른 모든 사람과의 관계를 끊어야 한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본문이 다루는 상황을 넘어서는 적용입니다. 본문이 문제 삼는 것은 가르침을 가지고 찾아오는 사람, 그리고 그 가르침을 공동체가 어떻게 받아들이고 지원할 것인가입니다.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것과 그가 전하는 가르침을 지지하는 것은 구별해야 하며, 본문도 그 구별에 쓸 상세한 기준을 모든 경우에 맞게 주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원칙은 분명합니다.

사랑한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해치는 거짓을 돕는 것이 사랑일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지닌 경계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자기 마음속에서 만들어 낸 이상이 아닙니다. 그 기준은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사람들 가운데 사셨고, 자신을 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복음 13:34은 예수님의 사랑을 제자들이 서로 사랑하는 기준으로 삼고, 요한일서 3:16은 그분이 목숨을 내놓으신 일에서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사람의 몸으로 오신 예수님을 부정하면서 그분의 사랑을 그대로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습니다. 장로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지키라고 명령하는 것은 교리를 사랑보다 높은 자리에 올려놓는 일이 아니라, 공동체가 사랑의 근원을 잃지 않도록 보호하는 일입니다.

「선택받은 부인과 그 자녀들」은 외부인을 밀어내는 일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생겨난 관계 안에서 서로를 돌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지키기 위해 장로는 어떤 가르침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문을 닫으라고 말합니다.

종이와 잉크로 끝낼 수 없는 이야기

요한이서 1:12–13 본문 →

이렇게 엄격한 경고가 이어졌으므로 편지는 마지막까지 심각한 분위기로 끝날 것 같습니다.

여러분에게 쓸 말이 많지만, 종이와 잉크로 전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우리의 기쁨이 가득해지도록 직접 찾아가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하기를 바랍니다.요한이서 1:12 · 두루새김

그는 위험한 가르침을 더 분석하고 구체적인 지침을 덧붙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더 쓰는 대신 만나기를 원합니다.

목적은 「우리의 기쁨이 가득해지도록」 하는 것입니다. 4절에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기뻐했던 그의 기쁨이, 이제 앞으로의 만남을 향합니다. 이미 경험한 기쁨이 있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습니다.

참된 교제는 편지보다 더 넓다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로 옮긴 원문은 문자적으로 「입과 입을 마주하여 말한다」는 뜻으로, 실제로 마주 앉아 목소리를 들으며 나누는 만남을 가리킵니다.

10절에서는 어떤 사람에게 인사도 건네지 말라고 했습니다. 12절에서는 자신이 직접 찾아가 이야기하겠다고 합니다.

이 둘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장로가 원하는 것은 누구와든 무조건 교류하는 공동체도, 높은 담을 쌓은 공동체도 아닙니다. 진리와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참된 교제입니다. 그가 거짓 가르침을 경계하는 것도 논쟁에서 이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들이 참된 기쁨을 잃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에 남는 인사

부인의 선택받은 자매의 자녀들이 부인께 안부를 전합니다.요한이서 1:13 · 두루새김

첫 절에는 「선택받은 부인과 그 자녀들」이 있었고, 마지막 절에는 「부인의 선택받은 자매의 자녀들」이 있습니다. 지역 교회로 읽으면 편지의 양 끝에 하나의 신앙으로 연결된 두 공동체가 서 있고, 실제 여성과 가족으로 읽으면 두 가족이 장로를 통해 인사를 주고받습니다. 어느 쪽이든 마지막에 남는 것은 관계입니다.

바로 앞에서 누군가에게 인사하지 말라고 명령했던 장로가, 마지막에는 다른 이들의 안부를 전해 줍니다.

조금 더 깊이

4절의 「기뻤습니다」, 10절의 인사말 카이레인, 12절의 「기쁨」은 원문에서 같은 어근과 관련된 말입니다. 저자가 의도한 말놀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진리 안에 사는 이들을 보고 기뻐하고, 거짓 교사에게는 환영의 인사를 삼가고, 함께 누릴 기쁨을 바라는 흐름이 이 낱말들로 이어집니다. 또 12절에는 사본 차이가 있어, 일부 사본은 「여러분의 기쁨」으로 읽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장로의 방문으로 받는 이들의 기쁨이 가득해진다는 뜻이 뚜렷해지고, 두루새김이 따른 「우리의 기쁨」은 쓰는 이와 받는 이가 함께 누릴 기쁨을 강조합니다.

진리와 사랑은 왜 분리될 수 없는가

요한이서 1:1–13 본문 →

그래서 처음의 물음에 답할 수 있습니다. 장로의 닫힌 문은 사랑의 예외가 아니라, 사람의 몸으로 오신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된 사랑을 지키는 방식입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그리스도에 관한 참된 고백을 무너뜨리는 가르침을 돕는다면 사랑의 토대가 무너지고, 진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잃어버린다면 그것 역시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 삶과 어긋납니다. 요한이서는 사랑을 말하기 위해 진리를 약화하지 않고, 진리를 지키기 위해 사랑을 버리지도 않습니다. 둘의 기준은 공동체가 스스로 만든 우월감이 아니라 그리스도 자신이십니다.

장로에게는 아직 할 말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는 종이와 잉크를 내려놓고 직접 찾아가 마주 앉기를 바랍니다.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서로 안부를 전하고, 장로는 다시 만날 날을 소망합니다.

그가 바라보는 마지막 장면은 닫힌 문이 아닙니다. 진리와 사랑 안에서 서로를 다시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