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왕기하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9–16장 · 예후와 왕조의 교체

평안을 묻는 왕들, 피를 기억하시는 하나님

열왕기하 9장에서 가장 많이 되풀이되는 질문은 뜻밖에도 「평안하냐?」입니다.

안쪽 방에서 나온 예후에게 장교들은 평안한지 묻습니다. 이스르엘의 왕은 다가오는 병거들을 향해 평안한지 거듭 묻게 합니다. 마침내 왕 자신이 예후를 만나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마지막에는 이세벨까지 성문으로 들어오는 예후에게 평안하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질문이 반복될수록 평안은 멀어집니다. 기름 부음은 반역으로 이어지고, 병거들은 이스르엘로 달려가며, 두 왕이 죽고, 왕비는 창문에서 떨어집니다.

왜 이렇게 피비린내 나는 이야기에서 평안을 묻는 말이 거듭 등장할까요?

열왕기하 9장의 중심에는 바로 이 사실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권력을 통해 과거의 잘못을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여호와야훼는 그들이 흘린 피를 기억하십니다.

하나님의 정의와 인간의 폭력이 한 사건 안에서 맞닿을 때, 우리는 무엇을 구별하여 읽어야 할까요? 열왕기하 9장은 그 쉽지 않은 질문을 피하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읽는 시간 21분소단락 79장 본문 읽기 →

닫힌 방에서 시작된 왕위 교체

열왕기하 9:1–10 본문 →

왕궁이 아니라 군사 주둔지에서

이야기는 엘리사가 예언자 무리 가운데 한 젊은이를 부르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가 받은 임무는 라못 길르앗으로 가서 예후에게 기름을 붓는 것입니다. 라못 길르앗은 아람과 이스라엘이 다투던 군사적 요충지입니다. 앞 장에서 이스라엘 왕 여호람은 아람 왕 하사엘과 싸우다가 부상하여 이스르엘로 돌아갔습니다. 유다 왕 아하시야도 그를 방문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엘리사는 왕이 없는 전방의 군사 주둔지로 사람을 보냅니다.

예후는 아직 왕이 아닙니다. 그는 다른 군대 지휘관들과 함께 앉아 있습니다. 그러나 젊은 예언자는 그를 동료들 가운데서 일으켜 세워 안쪽 방으로 데려갑니다.

「기름병을 가져다가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여호와야훼가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다』라고 말했다고 전해라. 그런 다음 문을 열고 달아나거라. 지체하지 마라.」열왕기하 9:3 · 본디새김

본문은 그 이유를 직접 설명하지 않지만, 임무의 성격을 생각하면 위험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아직 살아 있는 왕의 군대 안에서 다른 사람을 새로운 왕으로 선포하는 행위는 정치적 반란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름 부음의 의미는 사적인 것이 아닙니다.

예후가 일어나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젊은이는 그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그에게 말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네게 기름을 부어 여호와야훼의 백성, 곧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웠다.』」열왕기하 9:6 · 본디새김

「여호와야훼의 백성」이라는 표현은 예후가 받을 왕권의 성격을 결정합니다. 왕이 된다는 것은 이스라엘을 자기 마음대로 소유할 권리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야훼의 백성을 맡아 다스리는 자리에 세워진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후의 권력 역시 그에게 왕권을 주신 여호와야훼 앞에서 평가받아야 합니다.

새로운 왕의 첫 임무는 심판이다

예후가 받은 말씀은 왕위에 오르라는 선언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너는 네 주인 아합의 집안을 쳐라. 내가 내 종들인 예언자들의 피와 여호와야훼의 모든 종들의 피에 대해 이세벨에게 복수하겠다.』」열왕기하 9:7 · 본디새김

열왕기상 18:4에 따르면 이세벨은 여호와야훼의 예언자들을 죽였고, 오바댜는 그들 가운데 백 명을 숨겨 먹였습니다. 열왕기상 19:10에서 엘리야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여호와야훼의 예언자들을 칼로 죽였다고 탄식합니다.

여기서 「피」는 단순히 오래전 사건을 떠올리는 말이 아닙니다. 억울하게 죽임당한 사람들의 생명에 대한 책임을 뜻합니다. 그들이 죽었을 때 왕실은 권력을 유지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의 판결은 그 사건들을 끝난 일로 처리하지 않았습니다.

아합 집안은 여로보암의 집안과 바아사의 집안처럼 멸망할 것이라는 선언도 이어집니다(9:9). 여로보암의 집안은 바아사에게 멸망했고(왕상 15:27–30), 바아사의 집안은 시므리의 반란으로 무너졌습니다(왕상 16:9–13).

왕조를 세우고 유지하는 일이 곧 그 왕조가 영원히 정당하다는 증거는 아니었습니다.

9:8의 「벽에 오줌을 누는 자」는 남성을 가리키는 거친 관용 표현이며, 「갇힌 자든 풀려난 자든」이라는 짝은 아무도 남기지 않겠다는 심판의 철저함을 강조합니다. 다만 두 번째 표현이 정확히 어떤 신분의 사람들을 구별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오늘의 독자에게는 왕가의 모든 남성을 끊어 버린다는 말이 매우 가혹하게 들립니다. 고대 왕조의 권력과 죄에 대한 집단적 심판이라는 본문의 문맥을 인정하더라도, 이 표현을 현대의 정치적 폭력이나 집단 살해를 정당화하는 일반 원칙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열왕기상 19:16에서는 이미 엘리야에게 예후를 이스라엘 왕으로 세우라는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엘리야가 활동하던 시대에 선포된 말씀이 엘리사를 거쳐 이름 없는 젊은 예언자에게 전달되고, 마침내 예후에게 도착한 것입니다.

엘리야 자신은 이 왕위 교체의 현장에 없습니다. 엘리사도 직접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호와야훼께서 하신 말씀은 그들을 지나 계속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제 젊은 예언자는 임무를 마치고 문을 열어 달아납니다.

그가 떠난 뒤, 닫혀 있던 방에서 일어난 일이 바깥으로 알려지기 시작합니다.

미친 자의 말을 듣고 왕을 세우다

열왕기하 9:11–13 본문 →

예언자는 미친 자인가?

예후가 안쪽 방에서 나오자 동료 지휘관 한 사람이 묻습니다.

예후가 자기 주인의 신하들에게 나오자 한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평안하오? 저 미친 자가 왜 당신에게 왔소?」 예후가 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도 그 사람과 그가 하는 말을 알지 않소.」열왕기하 9:11 · 본디새김

예언자를 미친 자라고 부르면서도, 그가 예후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 궁금해합니다. 동료들은 예언자의 권위를 처음부터 인정하는 모습으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를 비웃습니다.

예후도 처음에는 자세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나 동료들이 계속 묻자 마침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말을 전합니다.

그러자 그들의 태도가 즉시 바뀝니다.

그들은 서둘러 저마다 자기 옷을 가져다가 맨계단 위 예후의 발밑에 깔았다. 그리고 뿔나팔을 불며 말했다. 「예후가 왕이 되었다.」열왕기하 9:13 · 본디새김

옷을 예후의 발밑에 까는 행동은 그를 높이고 왕으로 인정하는 행위입니다. 뿔나팔을 부는 것은 그 선언을 주변에 알리는 행동입니다.

예후는 왕궁에 들어가지도 않았습니다. 기존 왕은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하지만 군대 지휘관들이 그를 왕으로 인정하면서 새로운 권력의 중심이 형성됩니다.

이들은 왜 그토록 빨리 예후를 지지했을까요?

예언자의 말에 설득되었을 수도 있고, 기존 왕에 대한 불만이 있었을 수도 있으며, 예후를 통해 자신들의 미래를 기대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의 속마음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예언자의 사회적 지위와 그가 전하는 말씀의 영향력 사이의 간격을 보여 줍니다.

사람들은 예언자를 우습게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한 말은 군대 지휘관들의 행동을 바꾸고 왕국 전체를 뒤흔드는 사건의 출발점이 됩니다.

평안을 묻는 사람들, 돌아오지 않는 사자들

열왕기하 9:14–20 본문 →

반역의 성공을 위해 정보를 차단하다

예후는 지휘관들의 지지를 얻자 곧바로 행동합니다.

여호람 왕은 아람 왕 하사엘과 싸울 때 아람 사람들에게 입은 상처를 치료하려고 이스르엘로 돌아와 있었다. 예후가 말했다. 「여러분의 뜻이 그렇다면, 아무도 이 성읍을 빠져나가 이스르엘로 가서 알리지 못하게 하시오.」열왕기하 9:15 · 본디새김

이 명령은 예후가 단순히 충동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그는 반역이 성공하려면 이스르엘에 있는 왕이 미리 소식을 알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왕에게 정보가 전달되는 길부터 막은 것입니다.

예후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지만, 그 말씀을 실현하는 과정에서는 군사 지휘관답게 움직입니다. 그는 정보를 통제하고, 기동력을 활용하며, 상대방이 준비하기 전에 공격하려 합니다.

이제 예후는 병거를 타고 이스르엘로 향합니다.

두 번이나 돌아오지 않는 사자

이스르엘의 망대에 서 있던 파수꾼이 멀리서 다가오는 무리를 발견합니다.

말을 탄 사람이 예후를 맞으러 가서 말했다. 「왕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평안하냐?』」 예후가 말했다. 「평안이 너와 무슨 상관이냐? 돌아서서 내 뒤를 따라라.」 파수꾼이 보고했다. 「사자가 그들에게 이르렀지만 돌아오지 않습니다.」열왕기하 9:18 · 본디새김

이 질문은 단순한 안부가 아닙니다. 전쟁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군사 무리가 왕의 거처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왕은 이들이 어떤 소식을 가져오는지, 적대적인 목적이 있는지 확인하려 합니다.

첫 번째 사자가 돌아오지 않자 왕은 두 번째 사자를 보냅니다. 하지만 그도 똑같은 대답을 듣고 돌아오지 않습니다.

본문은 두 기병이 자발적으로 예후를 지지했는지, 그의 명령에 복종할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왕의 입장에서는 분명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자신의 명령을 수행해야 할 사람들이 이제 자신의 통제를 벗어났습니다.

왕이 아직 왕좌에 있어도 그의 명령이 더 이상 효력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권력은 이미 흔들리고 있는 것입니다.

파수꾼이 보고했다. 「그도 그들에게 이르렀지만 돌아오지 않습니다. 병거를 모는 모습이 님시의 손자 예후가 모는 모습과 같습니다. 미친 듯이 몰고 있습니다.」열왕기하 9:20 · 본디새김

예후는 소식을 전달할 시간도 주지 않고, 왕이 상황을 판단할 여유도 주지 않습니다. 그는 이제 이스르엘에 거의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왕 자신이 병거에 오르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예언자를 미친 자라고 부르던 장면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미친 듯이 병거를 몰아 왕에게 달려가는 예후의 모습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두 표현은 같은 어근을 사용합니다. 하지만 그 의미는 다릅니다. 하나는 예언자에 대한 멸시이고, 다른 하나는 병거를 모는 거친 행동에 대한 묘사입니다.

나봇의 밭에서 끝난 아합의 아들

열왕기하 9:21–26 본문 →

두 왕이 예후를 맞으러 나가다

여호람은 병거를 준비하라고 명령합니다.

여호람이 말했다. 「병거에 말을 매어라.」 그의 병거에 말을 매었다. 이스라엘 왕 여호람과 유다 왕 아하시야는 저마다 자기 병거를 타고 나갔다. 그들은 예후를 맞으러 나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밭에서 그를 만났다.열왕기하 9:21 · 본디새김

나봇은 이스르엘에 포도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합 왕은 자기 궁전 가까이에 있는 그 땅을 원했지만, 나봇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땅을 왕에게 넘길 수 없다고 거절했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상속받은 땅은 단순히 시장에서 자유롭게 사고파는 재산 이상의 의미를 지녔습니다. 조상에게서 물려받아 다음 세대로 이어 가는 기업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봇은 바로 그 점을 이유로 아합의 제안을 거절했습니다(왕상 21:3).

그러나 이세벨은 나봇에게 거짓 혐의를 씌우도록 사람들을 움직였고, 나봇은 돌에 맞아 죽었습니다. 아합은 그 뒤 포도원을 차지하러 갔습니다. 그때 엘리야가 나타나 물었습니다.

「죽이고 또 차지하려느냐?」(왕상 21:19의 뜻)

아합은 단순히 남의 땅을 욕심낸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불의한 과정을 통해 그의 땅을 차지한 왕이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렀습니다.

나봇을 죽인 아합도 죽었습니다. 그의 아들 여호람이 왕위를 이어받았습니다. 왕조는 계속되었고, 사람들의 관심은 전쟁과 국가의 앞날로 옮겨 갔을 것입니다.

이제 아합의 아들이 바로 그 밭에서 예후를 만납니다.

왕이 말하는 평안과 예후가 말하는 평안

여호람은 예후를 만나자 묻습니다.

여호람은 예후를 보고 물었다. 「평안하냐, 예후야?」 예후가 대답했다. 「네 어머니 이세벨의 음행과 그 숱한 주술이 계속되는 동안 무슨 평안이 있겠느냐?」열왕기하 9:22 · 본디새김

「음행」과 「주술」은 이세벨에 대한 고발입니다.

여호람이 묻는 것은 당장의 안전일 가능성이 큽니다. 예후는 그보다 깊은 문제를 제기합니다.

아합 집안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평안을 파괴하는 일을 저질렀습니다. 이제 그 집안의 왕이 자신에게 평안이 있는지 묻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피 위에 세워진 안전은 그것을 누리는 사람에게 평안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정의로운 평안은 아닙니다.

여호람이 쓰러진 곳

여호람은 예후의 대답을 듣자 즉시 상황을 알아차립니다.

그는 병거를 돌려 달아납니다. 그러나 예후가 활을 당깁니다. 화살은 여호람의 등을 지나 심장을 뚫고 나왔고, 그는 병거 안에 고꾸라집니다.

여기서 예후는 왕을 죽이는 데 그치지 않습니다.

그는 자기 부관 비드갈에게 여호람의 시신을 나봇의 밭에 던지라고 명령합니다. 예후와 비드갈은 과거 아합 왕을 뒤따라가던 때, 여호와야훼께서 아합을 향해 선포하신 신탁을 들었다고 합니다.

「『내가 어제 나봇의 피와 그 아들들의 피를 분명히 보았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내가 이 밭에서 네게 갚아 주겠다. 여호와야훼의 말이다.』 그러니 이제 여호와야훼의 말대로 그를 들어 이 밭에 던져라.」열왕기하 9:26 · 본디새김

나봇은 왕에게 저항할 군대도 없었고, 자신을 보호해 줄 권력자도 없었습니다. 그는 거짓 고발을 받고 죽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야훼는 그가 당한 일을 보셨습니다.

본문이 기억하는 나봇은 왕의 명령에 맞서다가 불운하게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억울한 죽음을 기억하시고 책임을 물으시는 사람입니다. 아들들의 피까지 언급되는 순간, 나봇의 밭은 한 사람이 잃어버린 재산을 넘어 한 가문의 생명과 미래가 짓밟힌 장소로 드러납니다.

열왕기상 21:27–29에서 아합은 엘리야의 심판 선언을 듣고 자신을 낮추었습니다. 그러자 여호와야훼는 그 재앙을 아합의 생전에 내리지 않고 그의 아들 시대에 내리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열왕기하 9장은 그 유예되었던 심판이 역사 속에서 실현되는 장면입니다.

아합은 죽었고 세월은 흘렀지만, 나봇의 피에 대한 판결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불편한 질문도 남습니다. 아버지 시대의 죄에 대한 심판이 아들의 죽음으로 나타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합니까?

본문은 여호람을 아무런 연관이 없는 개인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는 아합 집안의 왕권을 이어받았고, 앞서 열왕기하 3:2–3에서도 여호와야훼의 눈에 악을 행하며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않은 왕으로 평가받았습니다. 또한 이 장의 예후는 이세벨의 악행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고 고발합니다.

그럼에도 이 본문만으로 여호람 개인의 모든 행위와 죽음 사이의 책임 관계를 낱낱이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이야기는 아합 왕조 전체에 대한 심판이라는 관점에서 사건을 제시합니다.

왕실이 나봇의 땅을 차지했던 곳에 왕실의 후손이 쓰러져 있습니다.

그 밭은 오랫동안 불의한 권력이 승리한 장소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같은 장소가 그 불의에 대한 판결을 드러내는 자리가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열왕기상 16:31–33과 18:19는 아합 왕실이 바알 숭배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이 문맥에서 음행은 여호와야훼에 대한 충성을 버리고 다른 신을 따르는 종교적 불성실함과 연결하여 읽을 수 있습니다. 본문은 음행과 주술이라는 서로 다른 두 표현을 사용하며, 이세벨의 행위를 구체적인 악으로 고발합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만으로 특정한 성적 행위나 주술 의식의 상세한 모습을 확정할 수도 없습니다. 9:26은 나봇뿐 아니라 그의 아들들의 피도 언급합니다. 그러나 열왕기상 21장은 나봇의 아들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나봇과 함께 죽임당했는지, 별도의 사건으로 죽었는지에 관한 구체적인 경위를 확정할 수 없습니다.

예후의 명령은 어디까지였는가?

열왕기하 9:27–29 본문 →

아하시야도 죽임당하다

여호람이 죽는 것을 본 유다 왕 아하시야는 달아납니다.

유다 왕 아하시야는 이것을 보고 벳하간 길로 달아났다. 예후가 그를 뒤쫓으며 말했다. 「이블르암 곁에 있는 구르 오르막에서 병거에 탄 저자도 쳐라.」 아하시야는 므깃도로 달아났다가 거기서 죽었다.열왕기하 9:27 · 본디새김

그의 신하들은 시신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다윗성에 묻습니다. 젊은 예언자가 전한 명령은 아합 집안을 치라는 것이었습니다(9:7). 아하시야는 다윗 왕조의 후손이지만 아합 집안과 혼인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그 집안의 길을 따랐고, 여호람과 함께 하사엘을 상대로 전쟁에 나섰습니다(왕하 8:25–29).

하지만 9장에는 예후가 유다 왕 아하시야를 죽여야 한다는 별도의 직접적인 신탁이 나오지 않습니다.

본문은 예후가 아하시야까지 죽였다는 사실을 기록하지만, 그 명령을 처음부터 명시된 심판의 범위와 동일하게 취급해서는 안 됩니다. 앞 장에서 여호와야훼께서 다윗의 후손을 위한 등불을 남겨 두겠다고 하신 말씀이 있었지만, 여기서는 그 다윗 왕조에 속한 한 왕이 죽습니다.

왕조에 대한 약속이 개별 왕의 안전을 무조건 보장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후가 일으킨 반란은 이제 북이스라엘의 왕 한 사람을 제거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여파가 유다 왕국까지 미친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르엘에는 아직 한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입니다.

조금 더 깊이

역대하 22:7–9은 아하시야의 몰락을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일로 해석합니다. 열왕기하는 그가 므깃도로 달아나 거기서 죽었다고 하고, 역대하는 그가 사마리아에 숨어 있다가 붙잡혀 예후에게 끌려와 죽임당했다고 기록합니다. 두 기록의 구체적인 경위를 완전히 일치시키는 방법은 본문 자체에서 제시되지 않습니다. 참고로 9:29는 아하시야의 즉위를 요람 통치 십일 년째라고 기록하지만, 8:25는 십이 년째라고 기록합니다. 서로 다른 즉위 연도 계산법으로 설명하려는 해석이 가능하나, 두 구절 자체는 차이의 이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이 수치의 차이를 본문의 설명 없이 확정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창문에서 예후를 기다리는 이세벨

열왕기하 9:30–37 본문 →

죽음을 앞둔 이세벨은 왜 단장했는가?

예후가 이스르엘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은 이세벨은 눈에 검은 물감을 바르고 머리를 꾸밉니다.

예후가 이스르엘에 왔다. 이세벨은 그 소식을 듣고 눈에 검은 물감을 바르고 머리를 꾸민 뒤 창문으로 내려다보았다.열왕기하 9:30 · 본디새김

이세벨의 다음 말을 보면 적어도 그녀가 예후에게 순순히 굴복하려 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드러납니다.

예후가 성문으로 들어오자 이세벨이 말했다. 「평안하냐, 제 주인을 죽인 시므리야?」열왕기하 9:31 · 본디새김

그러나 이번에는 안부보다 조롱과 도전의 성격이 강합니다. 분명한 것은 그녀가 예후를 정당한 왕으로 인정하지 않고, 주인을 죽인 반역자로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시므리라는 이름에 담긴 경고

시므리는 열왕기상 16:9–20에 등장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왕 엘라를 죽이고 왕위를 빼앗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통치는 칠 일 만에 끝났습니다.

이세벨의 말에는 예후도 시므리처럼 반역자로 기억되고 짧은 통치 끝에 몰락할 것이라는 조롱이나 경고가 담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러나 그 말의 정확한 의도를 하나로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녀의 비난이 예후의 행위에 관한 실제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예후는 자신이 섬기던 왕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이세벨의 말만으로 아합 집안이 저지른 악이 지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이 옳을 수 있어도, 그 말을 하는 사람이 자신의 잘못에서 자유로운 것은 아닙니다.

창문 아래에서 바뀌는 충성

예후는 이세벨의 말에 직접 대꾸하지 않습니다.

예후는 창문을 향해 얼굴을 들고 말했다. 「누가 내 편이냐? 누구냐?」 내시 두세 사람이 그를 내려다보았다.열왕기하 9:32 · 본디새김

이 질문은 이세벨을 향한 대답이 아니라 왕궁 안에 있는 사람들을 향한 요구입니다. 그러자 예후는 그들에게 이세벨을 떨어뜨리라고 명령합니다. 그들은 즉시 그 명령을 따릅니다.

이세벨은 창문 위에서 예후를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녀는 여전히 왕궁 안에 있었고, 왕실 사람으로서 높은 자리에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명령을 따르던 왕궁의 사람들이 이제 예후의 말을 따릅니다.

예후는 이세벨을 잡으러 왕궁 안으로 들어가지도 않습니다. 왕궁 내부의 사람들이 그녀를 창문 밖으로 떨어뜨립니다.

피가 벽과 말들에 튀고, 예후는 그녀를 짓밟습니다. 이것은 끔찍한 죽음입니다. 서술자는 그 잔혹함을 감추지 않습니다.

나봇의 피는 오랫동안 이스르엘 땅에 대한 심판의 근거로 남아 있었습니다. 여호람은 나봇의 밭에 쓰러졌습니다. 이제 이세벨의 피가 왕궁의 벽에 튑니다.

왕의 딸이었지만 묻힐 수 없었다

이세벨이 죽은 뒤 예후는 왕궁 안으로 들어갑니다.

예후는 안으로 들어가 먹고 마신 뒤 말했다. 「이 저주받은 여자를 좀 거두어 묻어 주어라. 왕의 딸이기 때문이다.」열왕기하 9:34 · 본디새김

본문은 그가 왜 즉시 식사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왕위를 차지한 사람의 일상적인 행동과 왕궁 밖에 남겨진 시신의 처참한 모습이 강하게 대비됩니다.

열왕기상 16:31에서 이세벨은 시돈 사람들의 왕 엣바알의 딸로 소개됩니다. 예후가 말한 왕의 딸이라는 표현은 실제 왕실 출신이라는 그녀의 신분을 가리킵니다. 그는 그녀를 죽였지만, 왕의 딸에 합당한 장례는 치러 주려 합니다.

다만 결과는 그의 뜻과 달랐습니다.

사람들이 이세벨을 묻으러 갔을 때 두개골과 두 발과 두 손바닥만 남아 있었습니다. 나머지 시신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시신을 수습하고 묻어 주는 일은 죽은 사람에 대한 중요한 의무였습니다. 특히 왕족의 장례는 그 신분과 기억을 보존하는 의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세벨은 왕의 딸이었음에도 제대로 된 장례를 치를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돌아와 예후에게 알리자 그가 말했다. 「이것은 여호와야훼가 자기 종인 디셉 사람 엘리야를 통해 한 말이다. 『이스르엘 땅에서 개들이 이세벨의 살을 먹을 것이다.』」열왕기하 9:36 · 본디새김

열왕기상 21:23에서 이미 이세벨의 시신을 개들이 먹을 것이라는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이제 그 말씀의 성취가 이 장의 마지막 장면에서 확인됩니다.

「『이세벨의 시체는 이스르엘 땅의 들판 위에 똥처럼 될 것이니, 사람들이 이것이 이세벨이라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열왕기하 9:37 · 본디새김

이세벨은 생전에 왕의 이름과 권력을 이용해 나봇에게 거짓 혐의를 씌우고 죽음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자신의 왕실 신분으로도 시신을 온전히 보존하지 못합니다.

이 장면을 여성의 외모나 화장에 대한 교훈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세벨의 단장이 문제가 되어서 심판받은 것이 아닙니다. 열왕기가 그녀를 심판의 대상으로 제시하는 이유는 여호와야훼의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나봇의 죽음에 관여하고, 왕실의 권력을 악하게 사용한 역사에 있습니다.

이세벨의 왕실 신분을 기억하는 예후의 말도, 그녀를 묻어 주려는 뒤늦은 명령도, 오래전에 선포된 여호와야훼의 말씀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세벨이 예후를 유혹하거나 환심을 사려 했다는 읽기가 가능합니다. 반대로 그녀가 자신의 왕실 신분과 품위를 유지하며 죽음에 맞서려 했다는 읽기도 가능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녀가 왜 단장했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단장 자체를 성적인 유혹으로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고대 근동에서 눈 화장과 머리 장식은 신분을 드러내거나 공식적인 모습을 갖추는 행위일 수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군대는 오므리를 왕으로 세웠고, 오므리는 시므리가 차지한 디르사를 공격했습니다. 시므리는 성이 함락되는 것을 보고 왕궁에 불을 질러 그 안에서 죽었습니다. 이세벨은 오므리의 아들 아합과 결혼한 사람입니다. 그녀가 속한 왕실은 바로 시므리의 반란을 진압하고 왕위를 차지한 오므리에게서 이어졌습니다.

맺음 — 왕은 죽었지만, 나봇의 이름은 남았다

열왕기하 9:1–37 본문 →

왕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에서, 왕의 죽음을 이해하는 열쇠가 힘없는 백성 한 사람의 억울한 죽음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평안은 단순히 지금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 상태가 아닙니다.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피를 외면한 채 유지되는 질서를 성경은 참된 평안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불의한 질서가 무너졌다는 사실과 정의로운 질서가 새롭게 세워졌다는 사실은 같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합 집안이 흘린 피에 대해 책임을 물으십니다. 그러나 예후는 그 심판의 과정에 참여하는 인간이며, 그 역시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는 존재는 아닙니다. 이 장은 그 사건들을 심판의 전개 속에 놓지만, 예후의 모든 행동을 독자가 본받아야 할 행동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리하여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아합의 아들 여호람은 나봇의 밭에서 예후를 만납니다. 그는 자신에게 평안이 있느냐고 묻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아합 집안이 저지른 악에 대한 고발입니다. 그리고 화살에 맞아 쓰러진 그의 시신은 바로 그 밭에 던져집니다.

이 장의 마지막에는 이세벨의 시신조차 제대로 수습하지 못했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왕궁과 밭, 권력과 생명, 평안이라는 말과 실제로 흘린 피가 서로 맞닿습니다.

왕은 나봇의 땅을 차지할 수 있었지만, 나봇의 피를 기억하시는 하나님까지 침묵하게 만들 수는 없었습니다.

이스르엘의 밭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리고 열왕기하 9장은 그 밭을 끝까지 나봇의 이름으로 부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