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베오기 하권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2장 · 이집트로 보낸 편지

꺼진 불을 다시 밝히시는 하나님

마카베오기 하권은 유대 민족이 외세의 박해에 맞서 싸운 역사를 다루는 책입니다. 그런데 첫 장을 펼치면 전쟁도, 영웅도, 박해의 현장도 나오지 않습니다. 대신 예루살렘에서 이집트로 보낸 편지 두 통이 등장합니다.

편지의 목적도 주목할 만합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집트 사람들에게 군사를 보내거나 돈을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요청하는 것은 하나의 축제를 함께 지켜 달라는 것입니다.

왜 이 축제가 그토록 중요할까요? 단순히 전쟁에서 승리한 날이기 때문일까요? 이어지는 편지는 한 왕의 비참한 죽음과 수백 년 전 제단의 불이 되살아났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언뜻 서로 관계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입니다.

하지만 두 편지가 함께 전달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성전이 더럽혀지고 백성이 흩어져도,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과 맺으신 관계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관계가 어떻게 이어지고 회복되는지를 기억하는 것이 이 축제의 의미입니다.

이것이 마카베오기 하권이 역사 이야기에 앞서 독자에게 건네는 첫 번째 질문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무엇을 함께 기억함으로써 여전히 하나의 백성으로 살아갑니까?

읽는 시간 21분소단락 71장 본문 읽기 →

평화를 빌면서 먼저 마음을 이야기하다

마카베오기 하권 1:1–6 본문 →

첫 번째 편지는 따뜻한 인사로 시작합니다.

예루살렘과 유대 땅에 있는 유대 사람 형제들이 이집트에 있는 유대 사람 형제들에게 인사합니다. 여러분에게 좋은 평화가 있기를 빕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1 · 본디새김

이집트에는 오래전부터 유대인들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일부는 정치적 격변과 이주를 통해 그곳에 정착했고, 공동체를 이루어 신앙과 전통을 이어 갔습니다. 예레미야 43–44장에도 이집트에 거주하는 유대인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편지는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을 진정한 유대인으로, 이집트에 있는 사람들을 부차적인 존재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양쪽 모두를 「형제들」이라고 부릅니다.

편지는 뒤이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맺으신 언약을 기억하시기를 기도합니다(1:2). 이 언약은 예루살렘이라는 도시보다 오래되었고, 성전이 건축되기 전부터 존재했습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의 정체성은 현재 어디에 거주하느냐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그들을 하나로 묶는 가장 깊은 근거는 같은 땅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같은 하나님의 언약에 속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여러분 모두에게 그를 받들고 넓은 마음으로 기꺼이 그의 뜻을 행할 마음을 주기를 바랍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3 · 본디새김

편지를 쓰는 사람들은 이집트의 동족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곧장 명령하지 않습니다. 먼저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런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4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과 명령에 순종하라고 요구하기에 앞서,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은 사람의 결심과 노력만으로 이루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음을 열어 주시고, 사람은 열린 마음으로 그 뜻에 기꺼이 응답해야 합니다.

이러한 생각은 신명기 30:6에서 하나님이 백성의 마음을 변화시켜 자신을 사랑하게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는 말씀과 연결됩니다. 예레미야 31:33의 새 언약 약속에서도 하나님은 율법을 백성의 마음에 기록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기도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또 여러분의 간구를 듣고 여러분과 화해하며, 고난의 때에 여러분을 버리지 않기를 바랍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5 · 본디새김

「화해하며」라는 말이 눈에 띕니다. 단순히 무사하고 번영하기를 바라는 인사에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이라는 문제가 등장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험에서 벗어나는 것만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기도를 하나님이 다시 들으시고, 자신들을 외면하지 않으신다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다만 여기서 이집트의 유대인들이 특별히 어떤 죄를 지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화해해야 한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기도는 구체적인 잘못을 지적하는 고발장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비와 호의를 구하는 축복의 말입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여기서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6 · 본디새김

예루살렘의 성전은 한곳에 있지만, 그 성전이 있는 땅의 사람들은 멀리 떨어진 형제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편지는 곧 축제의 공동 참여를 요청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요청보다 먼저 제시되는 것은 상대방을 위한 기도입니다.

불타 버린 문과 다시 차려진 빵

마카베오기 하권 1:7–9 본문 →

축복의 기도가 끝나자 분위기가 바뀝니다. 편지는 과거의 고통을 떠올립니다.

데메트리오스가 다스리던 169년에 우리 유대 사람들은 여러분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야손과 그와 함께한 이들이 거룩한 땅과 왕국을 저버린 뒤로, 그 몇 해 동안 우리에게 닥친 고난과 극심한 위기 가운데서였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7 · 본디새김

야손은 단순한 외국인 침략자가 아닙니다. 그는 유대 사회 내부의 인물이며, 마카베오기 하권 4:7–22에 따르면 대제사장직을 차지하고 예루살렘에 그리스식 제도와 생활 방식을 도입하는 데 앞장섰습니다. 그의 권력 다툼과 폭력적인 행동은 5:5–10에서도 다시 언급됩니다.

이 사실은 유대인들이 겪은 위기가 외부에서만 온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 줍니다. 성전과 율법을 중심으로 살아가야 할 공동체가 내부의 권력 투쟁과 배신으로도 무너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대문을 불태우고 죄 없는 이들의 피를 흘렸습니다. 우리는 주에게 간구했고 응답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제물과 고운 밀가루를 바치고 등불들을 꺼내 놓았으며 빵들을 차려 놓았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8 · 본디새김

공동체의 거룩한 공간이 훼손되는 일과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는 일이 나란히 놓입니다. 이는 성전의 거룩함을 건물이나 의식의 문제로만 이해할 수 없게 만듭니다.

그런데 같은 절의 후반부에서 장면이 갑자기 달라집니다.

제물과 고운 밀가루, 등불과 빵은 임의로 선택한 장식물이 아닙니다. 이들은 성전 예배의 구체적인 요소들입니다. 곡식 제물은 레위기 2장에, 등불은 출애굽기 27:20–21과 레위기 24:1–4에, 하나님 앞에 놓는 빵은 레위기 24:5–9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편지는 먼저 백성이 주에게 간구했다고 말하고, 이어서 응답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제사와 예배가 회복되었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구원의 목표는 적군을 쓰러뜨리는 것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다시 예배할 수 있게 되는 것이 구원의 중요한 결실입니다.

이제 기슬르월의 초막절 날들을 지내 주십시오.마카베오기 하권 1:9 · 본디새김

원래 초막절은 가을의 일곱째 달에 지키는 절기입니다(레위기 23:33–43). 그런데 여기서는 아홉째 달인 기슬르월의 초막절을 말합니다. 달력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초막절과 비슷한 방식으로 지내는 새로운 축제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마카베오기 상권 4:52–59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기슬르월 스물닷샛날 성전 제단을 다시 봉헌하고 여드레 동안 기뻐했으며, 이를 해마다 지키기로 했습니다. 마카베오기 하권 10:5–8은 이 축제를 초막절처럼 여드레 동안 지낸 이유를 설명합니다. 박해 때문에 이전 초막절을 산과 동굴에서 지내야 했던 사람들이 성전을 되찾은 뒤 기쁨의 절기를 회복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전 봉헌을 기념하는 하누카 축제의 기원입니다.

후대 유대교 전승에는 성전의 등불을 켤 기름이 여드레 동안 지속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마카베오기 하권 1장은 그런 이야기를 전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기억하는 것은 박해로 훼손된 예배가 회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곧 등장할 느헤미야의 불 이야기도 기름이 여드레 동안 지속되었다는 이야기와는 별개입니다.

후대의 신약 기록인 요한복음 10:22–23에도 겨울의 성전 봉헌절이 등장합니다. 이는 마카베오 시대에 제정된 성전 정화의 기념이 예수 시대에도 이어졌음을 보여 주는 역사적 연결이지, 요한복음이 마카베오기 하권 1장을 직접 인용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강한 왕은 어째서 이방 신전에서 죽었는가?

마카베오기 하권 1:10–17 본문 →

두 번째 편지는 다시 인사말로 시작합니다. 이번에는 수신자 가운데 특별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88년, 예루살렘에서. 유대에 있는 이들과 원로회와 유다가, 프톨레마이오스 왕의 스승이며 기름부음받은 제사장들의 가문 출신인 아리스도불로와 이집트에 있는 유대 사람들에게 인사하며 건강을 빕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10 · 본디새김

아리스도불로는 이집트 왕실과 관계를 맺고 있으면서 유대 제사장 가문의 혈통을 지닌 인물로 소개됩니다. 편지는 그와 이집트 유대인들을 함께 수신자로 부릅니다. 이집트 사회에서 높은 지위에 오른 유대인도 예루살렘의 성전과 무관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 드러납니다.

여기서 「기름부음받은」이라는 표현은 제사장직과 관련된 말입니다. 제사장은 기름부음을 통해 거룩한 직무에 구별된 사람이었습니다(출애굽기 29:7; 레위기 8:12). 이 표현을 곧바로 신약의 그리스도에 관한 언급으로 읽을 이유는 없습니다.

왕을 상대로 전열을 갖추고 있던 우리는 큰 위험들에서 하나님에게 구원받았으므로 그에게 크게 감사합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11 · 본디새김

이어지는 설명은 왕과 그의 군대가 어떻게 패배했는지를 전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인들이 벌인 영웅적인 전투 이야기가 아닙니다.

왕은 나네아와 혼인한다는 구실로 신전을 방문합니다. 실제 목적은 지참금이라는 명목으로 신전의 재물을 차지하는 것입니다. 고대의 신전은 종교적 공간인 동시에 상당한 재물이 보관되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천장의 숨겨진 문을 열어 돌덩이들을 던져 통치자를 쳐 죽였습니다. 또 몸을 토막 내고 머리들을 바깥에 있는 이들에게 내던졌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16 · 본디새김

아무도 상대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던 왕이 자기 군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밀폐된 공간에서 죽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재물을 빼앗으려던 사람이 오히려 그 재물을 지키는 사람들의 계략에 걸려듭니다.

우리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찬양받을 분입니다. 그는 불경한 짓을 한 이들을 넘겨주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17 · 본디새김

이 문장은 단순히 왕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달하지 않습니다. 그 죽음을 하나님의 정의가 드러난 사건으로 해석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자신의 백성이 직접 적을 처단해야만 정의를 이루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신전 제사장들의 속임수와 살해 방법이 하나님의 명령이었다고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본문은 그들의 행동을 묘사하고 그 결과를 하나님의 심판으로 해석하지만, 하나님이 그들에게 그러한 방법을 지시하셨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강력한 왕들의 지배 아래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편지는 왕의 권세가 아무리 커 보여도 영원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1:24의 기도는 하나님을 「홀로 왕이시며 선하신 분」이라고 부르는데, 그 고백은 바로 앞의 왕의 죽음과 의미 있는 대조를 이룹니다.

왕들은 다른 사람의 재물을 차지하려다가 무너질 수 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구원하시는 왕으로 남으십니다.

조금 더 깊이

1:7의 169년은 셀레우코스 기원으로 대략 기원전 143년에 해당합니다. 한편 1:10의 「88년」은 본문 전승에 차이가 있어, 「188년」으로 전하는 그리스어 본문도 있습니다. 후자를 따르면 대략 기원전 124년이며 첫째 편지의 끝에 붙는 연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전승이 동일하지 않으므로, 이 숫자를 근거로 두 편지의 작성 시기와 순서를 완전히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마카베오기 하권 9:1–29에도 안티오코스의 죽음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는 왕이 병들어 심한 고통을 겪다가 죽습니다. 마카베오기 상권 6:1–16 역시 왕이 동방 원정에서 실패한 뒤 병들어 죽었다고 전합니다. 반면 1:13–16에서는 안티오코스가 나네아 신전에서 살해됩니다. 편지는 어느 안티오코스인지를 명시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두 기록이 반드시 동일한 왕의 죽음을 묘사한다고 단정할 수도 없고, 서로 다른 죽음의 묘사를 억지로 하나의 사건으로 결합해서도 안 됩니다. 각 기록의 역사적 세부를 모두 독립적으로 확인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현재 본문에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번째 편지의 작성자가 전해 받은 왕의 죽음 이야기를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증언하는 근거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불을 숨겼는데 물을 발견하다

마카베오기 하권 1:18–22 본문 →

우리는 기슬르월 스물닷샛날에 성전 정화 축제를 지내려 하므로, 여러분에게 이를 분명히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러분도 초막절과, 당시 성전과 제단을 세운 느헤미야가 제물을 바칠 때의 불을 기념하는 축제를 지내게 하려는 것입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18 · 본디새김

앞서 들려준 왕의 죽음은 축제를 기념해야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그런데 편지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느헤미야 시대의 이야기를 꺼냅니다.

그 이야기는 포로로 끌려가는 제사장들에게서 시작됩니다.

우리 조상들이 페르시아 땅으로 끌려갈 때, 경건한 제사장들이 제단의 불을 몰래 가져다가 물 없는 우물의 움푹한 곳에 숨겼습니다. 그들은 그 안에 불을 단단히 감추어 두어 아무도 그 장소를 알지 못하게 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19 · 본디새김

레위기 6:12–13에서 하나님은 제단 위의 불이 계속 타오르도록 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특별히 6:13은 제단의 불을 꺼뜨리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므로 제단의 불은 평범한 불씨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고 예배하는 삶이 계속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 표지였습니다.

그런데 백성이 포로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성전은 파괴되고, 제사는 중단되고, 제단에서 늘 타올라야 했던 불도 더는 유지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불을 숨긴다는 행위에는 언젠가 다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담겨 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예상과 다르게 진행됩니다.

오랜 세월이 지나 느헤미야가 사람들을 보내 불을 찾게 합니다.

그들이 불은 찾지 못하고 걸쭉한 물을 찾았다고 우리에게 알리자, 느헤미야는 그것을 퍼서 가져오라고 명령했습니다. 제물이 제단에 올라가자 느헤미야는 제사장들에게 그 물을 장작과 그 위에 놓인 것들에 뿌리라고 명령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21 · 본디새김

일반적으로 물을 뿌리는 행동은 불을 붙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행동 다음에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그렇게 한 뒤 얼마간 시간이 흘러 구름에 가렸던 해가 다시 비치자, 큰 불이 붙어 모두가 놀랐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22 · 본디새김

과거의 불을 인간이 온전히 보존했다는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줄 알았던 예배가 다시 가능해졌다는 것이 이야기의 중심입니다.

본문은 이러한 회복을 하나님의 때와 연결합니다. 1:20은 느헤미야가 불을 찾으려 한 때를 「하나님이 좋게 여긴 때」라고 부릅니다. 제사장들은 불을 숨겼고, 후손들은 그것을 찾았으며, 느헤미야는 제물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편지는 그 모든 과정의 결정적인 시기가 하나님께 달려 있었다고 이해합니다.

느헤미야 시대의 공동체는 포로 이후 폐허가 된 삶을 다시 세워야 했습니다. 마카베오 시대의 공동체 역시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고 예배를 회복해야 했습니다. 두 시대의 상황은 같지 않지만, 편지는 그 안에서 비슷한 의미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을 예배할 장소와 질서가 무너졌다가 다시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느헤미야의 불 이야기는 현재의 성전 정화 축제를 과거의 성전 회복 전통과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해가 다시 비친 때와 불이 붙은 때를 연결합니다. 불꽃이 일어난 정확한 물리적 과정을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1:18은 느헤미야가 성전과 제단을 세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에스라기의 기록과 비교하면 차이가 나타납니다. 에스라 3:2–3에서는 스룹바벨과 예수아를 중심으로 제단을 세웁니다. 성전 건축 역시 스룹바벨과 예수아가 시작한 일로 기록되며(에스라 3:8–13), 에스라 6:14–15에서는 성전 완공을 전합니다. 느헤미야는 그보다 뒤에 예루살렘의 성벽을 재건하고 공동체를 정비하는 일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입니다(느헤미야 2–6장). 그러므로 마카베오기 하권 1:18의 진술을 에스라기의 사건 순서와 완전히 일치하는 역사 서술이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편지에는 포로기 이후의 예배 회복을 느헤미야와 연결하는 별도의 전승이 담겨 있습니다. 그 전승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는 이 본문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의 발견과 점화 사건을 역사적으로 독립 검증할 자료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제단 앞의 기도는 왜 흩어진 백성을 향하는가?

마카베오기 하권 1:23–30 본문 →

불이 붙자 사람들은 놀랍니다. 그러나 이어지는 장면의 중심은 불꽃 자체가 아니라 기도입니다.

제물이 타 없어지는 동안 제사장들이 기도했습니다. 제사장들과 모든 사람이 함께 기도하며, 요나단이 먼저 시작하고 나머지 사람들이 느헤미야처럼 소리 내어 응답했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23 · 본디새김

예배 회복의 사건이 한 개인의 특별한 경험으로 끝나지 않고 공동체 전체의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만물의 창조주이자 이스라엘의 구원자

그 기도는 이러했습니다. 「주님, 하나님, 만물을 지으신 분, 두려우시고 강하시며 의롭고 자비로우신 분, 홀로 왕이시며 선하신 분,」마카베오기 하권 1:24 · 본디새김

그런데 이 장엄한 고백은 추상적인 신의 위대함을 찬양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홀로 베푸시는 분, 홀로 의로우시고 전능하시며 영원하신 분, 모든 악에서 이스라엘을 구해 내시는 분, 조상들을 선택된 이들로 삼고 그들을 거룩하게 하신 분,」마카베오기 하권 1:25 · 본디새김

창조와 구원이 하나의 기도 안에 들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이시라는 사실은 그분의 권능이 이스라엘의 영토나 성전 안에 갇혀 있지 않다는 뜻을 담고 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조상들을 선택하시고 거룩하게 하셨다는 사실은 그분의 권능이 구체적인 언약의 역사 속에서 드러났음을 보여 줍니다.

「당신의 온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제물을 받아 주시고, 당신의 몫을 지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마카베오기 하권 1:26 · 본디새김

기도하는 장소는 하나의 제단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드리는 제물은 「온 백성 이스라엘」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서 「당신의 몫」은 하나님께 속한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신명기 32:9에서도 야곱은 하나님이 받으신 몫으로 표현됩니다.

제사는 하나님께 무엇인가를 드리는 행위이지만, 그 목적은 백성의 삶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제단이 다시 세워졌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 속한 백성이 함께 회복되어야 합니다.

제단에 모여 있는데 흩어진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다

「흩어진 우리를 한데 모으시고, 이방 민족들 가운데서 종살이하는 이들을 자유롭게 해 주십시오. 멸시받고 혐오받는 이들을 돌아보시고, 이방 민족들이 당신이 우리 하나님이심을 알게 해 주십시오.」마카베오기 하권 1:27 · 본디새김

앞서 제사장들은 다시 불이 붙은 제단 앞에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제단에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아직 흩어져 있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민족들 사이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이 있으며, 멸시받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성전의 회복은 이루어졌지만, 백성 전체의 회복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것입니다.

편지는 이집트의 유대인들을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이제 오래전 느헤미야 시대의 기도에서도 흩어진 백성들을 다시 모아 달라는 간구가 등장합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들과 그 밖의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의 백성이라는 생각이 책의 처음부터 반복되는 것입니다.

예배가 회복되었다는 사실이 모든 고난이 끝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회복된 예배는 아직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하나님 앞에 기억하게 합니다.

「억압하고 교만하게 횡포를 부리는 이들에게 고통을 안겨 주십시오.」마카베오기 하권 1:28 · 본디새김

이는 앞선 자비의 간구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억압받는 이들을 구해 달라고 하면서 동시에 억압하는 이들에게 책임을 물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자비는 고통받는 이들을 돌아보시는 일로 나타나며, 하나님의 의로움은 교만하게 다른 사람을 짓밟는 이들을 심판하시는 일로 나타납니다.

물론 본문의 기도에는 고대 유대인들이 겪은 박해와 민족적 상처가 반영되어 있습니다. 모든 이방 민족을 똑같은 억압자로 규정하는 기도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구체적으로 심판을 요청하는 대상은 압제와 횡포를 일삼는 사람들입니다.

백성을 다시 심어 주십시오

「모세가 말한 대로 당신의 백성을 당신의 거룩한 곳에 심어 주십시오.」마카베오기 하권 1:29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출애굽기 15:17과 밀접하게 연결됩니다. 홍해를 건넌 뒤 부른 모세의 노래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데려다가 자신의 기업의 산에 심으실 것이라고 노래합니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은 종살이에서 해방되었지만 아직 약속의 땅에 정착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데려다가 심어 주실 것을 기대했습니다.

느헤미야 시대의 귀환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포로에서 돌아왔다고 모든 것이 완성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다시 하나님의 백성으로 굳게 자리 잡아야 했습니다.

나무를 심는다는 것은 단순히 땅에 가져다 놓는 행위가 아닙니다. 뿌리를 내리고, 자라고, 그곳에서 생명을 이어 가도록 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이 기도는 일시적으로 고향에 돌아가게 해 달라는 요청 이상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자리에서 다시 안정되고 지속적인 삶을 누리게 해 달라는 간구입니다.

이 기도에 이어 제사장들은 찬송을 부릅니다(1:30). 놀라운 불꽃으로 시작된 장면은 공동체의 간구와 찬양으로 이어집니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불이 아니라 「정화」라는 이름

마카베오기 하권 1:31–36 본문 →

제물이 모두 타고 난 뒤에도 이야기는 끝나지 않습니다.

느헤미야는 남아 있는 물을 큰 돌들 위에 부으라고 명령합니다.

그렇게 하자 불꽃이 일었습니다. 그러나 제단에서 불빛이 맞비추자 그 불꽃은 사라졌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32 · 본디새김

독자의 시선은 제단 바깥의 특별한 물질에서 다시 제단으로 돌아옵니다.

이야기 전체에서 중요한 것은 걸쭉한 물이 얼마나 놀라운 성질을 가졌느냐가 아닙니다. 그 물을 통해 제물이 불타고 제단의 예배가 회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일이 페르시아 왕에게까지 알려집니다.

왕은 그 일을 확인한 뒤 그곳을 둘러막아 성역으로 삼았습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34 · 본디새김

이야기는 이방의 왕까지 이 사건을 인정하는 장면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곧이어 왕이 그곳에서 수익을 얻고 그것을 나누었다는 이야기도 나옵니다(1:35).

느헤미야와 함께한 이들은 이것을 네프타르라고 불렀습니다. 이를 풀어 옮기면 정화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대개 이것을 네프타르라고 부릅니다.마카베오기 하권 1:36 · 본디새김

사람들은 불을 찾으러 갔습니다. 그러나 물을 발견했습니다. 그 물에서 불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남겨진 이름은 불도, 물도 아닌 「정화」였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기억해야 할 것은 신기한 물질 자체가 아니라, 더럽혀지고 중단되었던 예배가 다시 깨끗하게 회복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1:35의 그리스어 문장은 누가 누구에게서 무엇을 받았는지가 명확하지 않아, 왕이 많은 이익을 얻어 나누었다는 해석과 선물을 주고받았다는 해석이 모두 가능합니다. 따라서 왕이 순수한 신앙심으로 이 장소를 보호했다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본문은 왕의 행위를 신앙적 모범으로 칭송하지도 않습니다. 「네프타르」라는 이름의 정확한 어원과 전승에는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그리스어 본문의 일부 전승에서는 느헤미야 일행이 붙인 이름과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부르는 이름에 차이가 나타나지만, 다른 전승에서는 같은 형태로 나타납니다. 따라서 이 이름의 정확한 어원이나 물질의 정체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특히 이 이야기에 나오는 걸쭉한 물을 특정한 현대 화학 물질로 단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맺으며 — 불을 찾지 못한 사람들

마카베오기 하권 1:1–36 본문 →

느헤미야 시대의 제단 회복과 마카베오 시대의 성전 정화는 서로 다른 시대의 사건입니다. 그러나 편지는 두 사건을 하나의 기억 안에 담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다시 예배의 자리로 이끄셨다는 기억입니다.

느헤미야가 보낸 사람들이 우물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는 기대했던 불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보고를 들은 느헤미야는 물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이어 그 물을 제단의 장작과 제물에 뿌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구름에 가려졌던 해가 다시 비쳤을 때, 제단 위에 큰 불이 일어났습니다.

사람들은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침내 드린 기도는 불꽃을 계속 보게 해 달라는 요청이 아니었습니다.

「흩어진 우리를 한데 모으시고」, 「당신의 백성을 당신의 거룩한 곳에 심어 주십시오.」

제단의 불이 다시 타올랐을 때, 그들은 아직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그것이 마카베오기 하권 1장이 성전 정화의 기쁨을 기억하는 방식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