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카베오기 하권 풀어 읽기 · 12장

이 장의 자리 · 8–13장 · 되찾은 성전

적들의 죄와 형제들의 숨겨진 죄

적들의 죄를 심판하던 사람들이 자기 형제들의 숨겨진 죄를 발견하다

마카베오기 하권 12장은 평범하고 조용한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오랫동안 전쟁과 박해를 겪었던 사람들이 다시 밭으로 돌아갑니다. 군대가 물러났고, 협약이 맺어졌으며, 사람들은 농사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 평화로운 장면은 오래가지 않습니다.

욥바에서는 유대인 가족들이 배에 올라탔다가 집단으로 수장됩니다. 유다는 그 소식을 듣고 보복에 나서며, 이후 여러 도시와 요새를 공격합니다. 수많은 적군이 죽고, 이방인들과 평화를 맺는 일도 일어납니다. 마침내 유다의 군대에서도 전사자가 발생합니다.

이 장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적들과 싸우시는 분일 뿐 아니라, 자기 백성의 죄까지 판단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동시에 그분의 심판을 인정하는 사람들이 죄를 지은 형제들을 위해 어떻게 행동하는지도 보여 줍니다.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812장 본문 읽기 →

평화의 약속을 믿고 배에 오른 가족들

마카베오기 하권 12:1–9 본문 →

농사일로 돌아간 사람들이 다시 전쟁에 휘말리다

이 협약들이 맺어지자 리시아스는 왕에게로 떠났고, 유대 사람들은 농사일에 종사했다.마카베오기 하권 12:1 · 본디새김

앞 장에서 유대 사람들은 자신들의 법과 생활방식을 인정받기 위해 왕국과 협상했습니다. 그들이 바란 것은 끝없는 전쟁이 아니라 다시 평범하게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농사를 짓는다는 것은 바로 그런 삶으로 돌아가는 일입니다.

그러나 2절은 지역 지휘관들이 그들을 안정과 평온 속에 내버려 두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왕국의 중앙 권력과 협약을 맺었다고 해서 각 지역의 적대 행위가 모두 중단되지는 않았습니다.

살해의 도구가 된 친절한 초대

욥바 사람들은 자기들 가운데 살던 유대 사람들에게 배를 마련해 줍니다.

아내들과 자녀들까지 함께 타라고 권합니다. 3절은 욥바 사람들이 아무런 적의도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4절은 유대 사람들이 평화롭게 지내기를 원했고 아무런 의심도 품지 않았다고 덧붙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신뢰가 학살의 수단으로 이용됩니다.

욥바 사람들은 그들을 바다로 데려가 물에 빠뜨려 죽입니다. 죽은 사람은 이백 명 이상입니다. 그중에는 아내들과 자녀들도 있었습니다.

더구나 4절은 이것이 「도시의 공동 결의」에 따른 일이라고 기록합니다. 학살은 몇몇 사람이 몰래 저지른 개인적인 범행으로만 묘사되지 않습니다. 도시 공동체의 공식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사람들을 보호하고 공동의 삶을 유지해야 할 도시의 제도적 결정이 오히려 그 도시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을 살해하는 수단이 되었습니다.

공동체의 결정이라는 사실만으로 그 결정이 정의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의로운 재판관에게 부르짖는 유다

유다는 이 소식을 듣고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6절은 하나님을 「의로운 재판관」이라고 부릅니다. 욥바에서 죽임당한 사람들은 스스로를 지킬 기회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유다가 하나님께 의로운 재판을 구한다는 것은 그들이 당한 일이 그냥 지나갈 수 없는 불의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행동입니다.

이후 유다는 밤에 욥바의 항구와 배들을 불태웁니다. 욥바 사람들은 배를 이용해 유대인 가족들을 죽였습니다.

학살에 사용된 수단이 보복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7절에서는 한층 더 거친 의도가 드러납니다.

유다는 욥바 사람들의 공동체 전체를 뿌리째 뽑으려 했습니다. 본문은 그가 실제로 도시 전체를 없애 버렸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도시가 문을 닫자 물러났고, 다시 돌아올 생각이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오늘날 모든 집단적 보복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특정한 학살과 전쟁의 상황을 기록하고 있으며, 죄를 저지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의 책임을 어떻게 구별했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야브네에서 아직 일어나지 않은 학살

8–9절에서는 야브네 사람들이 그곳에 사는 유대 사람들에게 같은 일을 하려 한다는 소식이 전해집니다.

유다는 다시 밤에 항구와 함대를 공격합니다. 불길은 멀리 예루살렘에서도 보일 정도였다고 기록됩니다.

욥바에서는 실제로 이백 명 이상의 사람들이 살해되었습니다. 반면 야브네에서는 비슷한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저자는 그 계획이 실행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유다는 야브네에서 실제 학살이 발생하기 전에 공격했습니다. 따라서 이것은 앞선 학살에 대한 보복이라기보다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한 선제적 공격으로 서술됩니다. 본문은 유다의 공격을 전체적으로 긍정적인 전쟁 서술 속에 놓지만, 그가 받은 소식의 진위와 구체적인 정보의 출처까지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한 도시에서 일어난 집단 학살은 다른 도시에 사는 사람들까지 두렵게 만듭니다. 그곳에서도 같은 일이 벌어질 수 있다는 생각이 사람들을 움직입니다.

이 두려움이 전쟁을 더 넓은 지역으로 확산시키는 배경이 됩니다.

화해의 악수와 피로 물든 호수

마카베오기 하권 12:10–16 본문 →

패배한 아라비아 사람들과 평화를 맺다

10절에서 유다의 군대는 아라비아 사람들의 공격을 받습니다.

본문은 오천 명 이상의 보병과 오백 명의 기병이 공격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러나 유다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도움으로 승리하자 아라비아 사람들은 화해를 요청합니다.

이때 그들은 오른손을 내밀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11–12절의 이 표현은 단순한 인사 동작이 아닙니다. 고대 세계에서 오른손을 맞잡는 일은 신뢰와 합의, 화해를 나타내는 행위로 사용되었습니다.

패배한 아라비아 사람들은 가축을 제공하고 앞으로 다른 일에서도 유대 사람들을 돕겠다고 약속합니다. 유다는 그들이 여러모로 유익한 사람들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평화에 동의합니다.

앞에서는 평화를 가장한 초대가 살해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실제 전투를 벌인 상대와 화해의 악수를 나눕니다. 싸울 이유가 있는 상황에서 싸웠지만, 평화롭게 지낼 수 있는 조건이 마련되자 전쟁을 멈춘 것입니다.

그렇게 유다의 군대는 아라비아 사람들과 악수한 뒤 각자의 길로 떠납니다.

여리고를 무너뜨리신 하나님을 부르다

13–16절에서는 카스핀이라는 도시가 등장합니다.

이 도시는 높은 성벽과 충분한 식량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여러 민족이 함께 살고 있었습니다. 그곳의 주민들은 자기들이 가진 방어시설을 믿고 유다의 군대를 조롱합니다.

유다의 부하들은 여호수아 시대에 성벽을 들이받는 공성추와 공성 기계 없이 여리고를 무너뜨린 세상의 위대한 권세자에게 부르짖고, 성벽을 향해 사납게 들이쳤다.마카베오기 하권 12:15 · 본디새김

여호수아 6장에서 여리고의 성벽은 이스라엘의 군사적 능력만으로 무너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방식에 따라 성 주위를 돌고 나팔을 불었을 때 무너졌습니다. 유다의 사람들은 바로 그 사건을 자신들의 전투와 연결합니다.

성벽이 아무리 견고해도 하나님께서 그것을 무너뜨리실 수 있다는 믿음입니다.

피로 가득 찬 호수

그들은 하나님의 뜻으로 도시를 점령하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을 학살했다. 그 옆에 있는 너비 두 스타디온의 호수가 피로 가득 차 피가 흘러나오는 듯 보일 정도였다.마카베오기 하권 12:16 · 본디새김

처음에는 유대인 가족들이 학살당했고, 이제는 유다가 공격한 도시에서 수많은 사람이 죽습니다. 저자는 카스핀의 점령이 하나님의 뜻으로 이루어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과정에서 얼마나 끔찍한 살상이 벌어졌는지를 감추지 않습니다.

특히 이 장에는 전쟁을 끝낼 수 있는 곳에서는 화해하고, 어떤 곳에서는 철저히 공격하는 유다의 모습이 함께 등장합니다. 저자는 두 행동을 모두 유대 공동체가 처한 위기 속에서 기록합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공격을 멈추고 어떤 경우에 계속해야 하는지에 관한 보편적인 규칙을 이 장에서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13절의 「다리를 놓으려 나섰다」는 표현은 정확한 대상과 구조를 확인하기 어렵습니다. 성벽에 접근하기 위한 통로를 놓는 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무엇을 건너려 했는지는 본문에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호수가 피로 가득 찼다는 표현을 문자 그대로 물의 양과 피의 양을 계산할 수 있는 보고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대규모 살상의 참혹함을 드러내는 문학적 표현으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적장을 죽일 수 있었지만 형제들을 위해 놓아주다

마카베오기 하권 12:17–28 본문 →

죽었다고 기록된 티모테오스가 다시 등장하는 문제

17절부터 이야기는 투비 사람들이라고 불리는 유대 사람들이 사는 지역으로 이동합니다.

이들은 요단강 동쪽의 유대인 공동체와 관련되어 이해됩니다. 마카베오기 상권 5장 9–13절에도 그 지역 유대인들이 위협받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티모테오스가 다시 등장합니다.

앞서 10장 37절에서는 티모테오스가 죽임을 당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12장에서는 그가 군대를 이끌고 다시 등장할 뿐 아니라, 25절에서는 살아서 풀려나기까지 합니다.

모든 것을 살피시는 이가 나타나다

20–23절에서 티모테오스는 대규모 군대를 모읍니다.

그는 여자들과 아이들, 군수 물자를 접근하기 어려운 카르니온으로 미리 보냅니다.

유다의 부대가 맨 먼저 모습을 드러내자 적들에게 두려움이 닥쳤다. 또 모든 것을 살피는 이가 나타나 공포가 그들을 덮치자, 그들은 저마다 다른 방향으로 내달아 도망했다. 그 때문에 자기편에게 다치고 자기편 칼끝에 꿰찔리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마카베오기 하권 12:22 · 본디새김

특히 「모든 것을 살피는 이」는 9장 5절에서도 안티오코스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는 그분의 나타나심이 적군의 혼란과 연결됩니다.

포로들의 생명과 적장의 생명

티모테오스가 유다의 지휘관들에게 붙잡힙니다.

본문은 그가 온갖 속임수를 쓰며 자신을 풀어 달라고 간청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유대 사람들의 부모들과 형제들 가운데 많은 사람을 붙잡고 있다고 말합니다. 자기를 죽이면 그 포로들의 안전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포로들을 자신의 생존을 위한 협상 수단으로 이용하는 행동입니다.

그가 그들을 아무런 해 없이 돌려보내겠다는 약정을 거듭 보증하자, 그들은 형제들의 목숨을 구하려고 그를 풀어 주었다.마카베오기 하권 12:25 · 본디새김

아라비아 사람들과의 화해에서는 앞으로의 유익이 강조되었습니다. 여기서는 붙잡힌 형제들의 목숨이 직접적인 이유입니다. 그들은 티모테오스가 신뢰할 만한 사람이기 때문에 풀어 준 것이 아닙니다. 본문은 오히려 그의 태도를 속임수라고 묘사합니다.

적을 붙잡았다는 사실보다 자기 형제들을 살릴 수 있다는 가능성을 더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성소를 침범하는 전쟁의 반복

26–28절에서는 카르니온과 아테르가티스 신전, 에프론을 공격하는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아테르가티스는 시리아 지역에서 숭배되던 여신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 절들은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매우 짧게 기록합니다.

이러한 전투 기록에서 저자는 하나님의 도움을 거듭 강조합니다. 하지만 각각의 공격이 어떤 구체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졌는지, 죽은 사람들 가운데 전투에 참여하지 않은 사람이 있었는지까지는 충분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본문은 당시 유대 공동체가 이해한 전쟁의 성격을 보여 주는 역사 서술로 먼저 읽어야 합니다. 그 모든 행동을 오늘날 그대로 따라야 하는 신앙적 명령으로 바꾸는 것은 본문이 허락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조금 더 깊이

같은 이름을 가진 서로 다른 지휘관이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는 마카베오기 하권의 저자가 서로 다른 시기의 전쟁 전승들을 반드시 발생 순서대로 배열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어느 설명이 옳은지는 이 본문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28절의 제공된 본문은 「적들의 화물선을 부수는 권세자」라고 번역했지만, 다른 그리스어 전승은 「적들의 힘을 꺾는 권세자」라고 읽습니다. 여기서는 후자의 읽기가 요새 공격의 문맥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다만 본문이 제시한 판본의 낱말을 임의로 바꾸어 원문이 확정된 것처럼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공격하지 않은 도시가 이 장의 전쟁을 해석하게 한다

마카베오기 하권 12:29–31 본문 →

스키토폴리스에서는 무엇이 달랐을까

29절에서 유다의 군대는 스키토폴리스로 향합니다.

스키토폴리스는 구약에서 벳산이라고 불린 도시와 연결됩니다. 요단 계곡 서쪽의 중요한 도시였습니다.

유다는 이미 여러 도시를 공격했습니다. 독자는 또 다른 전투가 시작될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전혀 다른 일이 벌어집니다.

그곳에 살던 유대 사람들이 유다에게 증언합니다. 스키토폴리스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호의를 베풀었고, 어려움을 당했을 때에도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에 유다의 사람들은 공격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감사의 뜻을 전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유대 사람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부탁합니다.

평화는 말로만 약속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위기의 순간에 실제 행동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같은 민족이 아니어도 친구가 될 수 있다

그는 유대 사람들을 박해한 도시들을 공격했지만, 유대 사람들을 선하게 대했던 도시에는 감사했습니다. 유대 공동체 밖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모두 동일한 적으로 여겨지는 것은 아닙니다.

욥바 사람들이 평화를 말하면서 이웃을 죽였다면, 스키토폴리스 사람들은 어려운 때에 이웃을 도우면서 평화를 지켰습니다.

이 두 도시는 같은 장에서 서로를 비추는 거울처럼 놓여 있습니다.

유다는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경험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증언을 바탕으로 행동했습니다. 다른 지역에서 일어난 학살 때문에 모든 도시가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고 단정하지 않았습니다.

공동체의 안전을 지키는 일에는 위협을 경계하는 것뿐 아니라 실제로 신뢰할 만한 사람들의 증언을 듣는 일도 필요합니다.

전쟁 한가운데 찾아온 칠칠절

31절은 유다의 군대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고 기록합니다.

때는 칠칠절이 가까워진 시기였습니다. 32절에서는 오순절이라고 불리는 그 명절이 지난 뒤 다시 전쟁에 나갔다고 설명합니다.

칠칠절과 오순절은 별개의 절기가 아닙니다.

칠칠절은 수확과 관련된 절기로, 레위기 23장 15–21절과 신명기 16장 9–12절에 규정되어 있습니다. 일곱 주간을 센다는 점에서 칠칠절이라 불리며, 그리스어로는 오십째 날을 뜻하는 오순절이라는 이름이 사용됩니다.

이 장의 처음에 유대 사람들이 농사일로 돌아갔다면, 여기서는 수확과 관련된 절기를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전쟁에서 이기는 것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시간과 질서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 그들의 목표였습니다.

이번에는 유다의 사람들도 죽었다

마카베오기 하권 12:32–39 본문 →

승리의 기록 속에 들어온 작은 문장

32절부터 유다는 고르기아스와 싸웁니다.

고르기아스는 보병 삼천 명과 기병 사백 명을 거느리고 나옵니다.

그들이 전열을 갖추어 싸우다가 유대 사람 몇 명이 쓰러졌다.마카베오기 하권 12:34 · 본디새김

죽은 사람들의 이름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죽었는지도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바로 이 짧은 문장이 마지막 이야기의 출발점이 됩니다.

승리의 함성에 섞인 조상들의 말

35–37절에서는 도시테오스가 고르기아스를 붙잡으려다가 어깨에 부상을 입는 일이 기록됩니다.

고르기아스는 달아납니다. 전투가 길어지면서 유다의 사람들은 지칩니다. 그때 유다는 하나님께 함께 싸워 주시고 전쟁을 앞장서 이끌어 달라고 부르짖습니다. 그리고 37절에서 「조상들의 말」로 찬송을 곁들인 함성을 선창합니다.

유다의 군대는 고르기아스의 부하들을 물리칩니다. 여기까지라면 또 하나의 승리 이야기로 끝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자는 전투가 끝난 뒤의 일을 자세히 전합니다.

안식일을 지킨 뒤 시신을 거두다

38절에서 유다는 군대를 이끌고 아둘람으로 갑니다.

이레째 날이 다가오자 사람들은 몸을 정결하게 하고 안식일을 지킵니다. 39절에서는 그다음 날에 전사자들의 시신을 거두러 갑니다. 그들을 조상들의 무덤에 묻으려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을 가족의 무덤에 묻는 일은 그가 조상들과 이어진 공동체에 속한다는 사실을 표현합니다. 창세기에서는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레아가 같은 가족 묘역과 연결됩니다(창세기 23장; 49:29–32).

유다의 사람들도 전사자들을 그렇게 대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전쟁터에 쓰러진 형제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가족과 조상들이 있는 자리로 데려가려고 합니다.

이제 이야기는 매우 조용한 장면으로 옮겨 갑니다.

전투의 함성도 사라졌습니다. 적군을 추격하는 소리도 없습니다. 남아 있는 것은 쓰러진 사람들의 시신과 그들을 고향으로 데려가려는 동료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시신을 거두는 과정에서 뜻밖의 물건들이 발견됩니다.

조금 더 깊이

「조상들의 말」이 당시 구체적으로 히브리어를 가리키는지, 아람어를 포함하는 보다 넓은 의미의 조상들의 언어를 가리키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중요한 것은 전쟁터에서 그들의 전통적인 언어로 찬양이 울려 퍼졌다는 사실입니다.

옷 아래 감추어진 것들이 드러나다

마카베오기 하권 12:40–42 본문 →

그들이 지니고 있던 물건은 무엇인가

그런데 그들은 죽은 이들 각자의 속옷 아래에서 야브네의 우상들에게 바친 봉헌물들을 발견했다. 율법은 유대 사람들이 그런 물건을 가까이하지 못하게 했다. 이들이 바로 그 일 때문에 쓰러졌다는 사실이 모두에게 분명해졌다.마카베오기 하권 12:40 · 본디새김

전사자들은 유다와 함께 싸웠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군대의 일원이었습니다.

야브네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야브네의 우상으로 돌아오다

처음에 야브네는 유대 사람들을 위협하는 외부의 도시로 등장합니다. 마지막에는 그 도시의 종교적 물건들이 유대 공동체 내부에서 발견됩니다.

유다는 자기 백성을 위협하는 외부 세력과 싸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기편 사람들의 옷 아래에 무엇이 숨겨져 있는지는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야브네를 공격했지만, 야브네의 우상들에게 바친 물건들을 자기들 가운데서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이 발견은 그들이 무엇을 지키기 위해 싸웠는지를 다시 묻게 합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 싸운다고 하면서도, 그 군대의 일부 사람들은 율법이 금한 것을 자기 몸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아간의 이야기와 닮은 숨겨진 죄

이 장면은 여호수아 7장을 강하게 떠올리게 합니다.

여리고를 점령한 뒤 이스라엘은 아이성 전투에서 패배합니다. 아간은 여리고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자기 장막 안에 숨겨 두었습니다(여호수아 7:20–21). 아간의 숨겨진 죄는 공동체의 패배와 연결됩니다.

마카베오기 하권 12장에서도 비슷한 구조가 나타납니다. 저자는 전사자들의 죽음을 단순한 우연이나 군사적 불운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숨겨진 죄와 연결합니다.

그런데 아간의 이야기와 12장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도 있습니다.

여호수아 7장에서 아간은 살아 있는 동안 죄가 드러나고 심판받습니다. 반면 마카베오기 하권 12장에서는 이미 죽은 사람들에게서 죄가 발견됩니다. 그들은 더 이상 직접 자신의 행동을 설명하거나 고칠 수 없습니다.

모든 죽음을 죄의 결과로 읽을 수 있는가

12장 40절은 특정한 전사자들이 금지된 물건을 지녔고, 그 때문에 죽었다고 해석합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가 모든 죽음과 고난을 개인적인 죄의 직접적인 결과로 설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욥기는 바로 그러한 단순한 인과관계를 강하게 문제 삼습니다. 욥의 친구들은 그의 고난이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지만, 욥기 서론은 그들의 판단이 얼마나 불충분한지를 보여 줍니다.

마카베오기 하권 자체에서도 6–7장의 순교자들은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율법을 지키려고 죽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본문은 특정한 죄와 죽음을 연결하지만,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게 숨겨진 죄가 있다고 의심하라고 가르치지는 않습니다.

의로운 재판관은 자기편의 죄도 드러내신다

그러므로 그들은 모두 숨겨진 것을 드러내는 의로운 재판관인 주가 한 일들을 찬양하고,마카베오기 하권 12:41 · 본디새김

처음에 유다는 욥바 사람들에게 살해당한 형제들을 위해 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때는 적군의 악행이 문제였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자기편의 죄가 드러났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을 의로운 재판관이라고 부릅니다. 그분은 숨겨진 것을 드러내시는 분입니다. 자기 백성의 죄라고 해서 감추어 두지 않으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단순한 편들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아모스 3장 2절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신과 특별한 관계에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의 죄를 물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은 심판으로부터 무조건 면제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관계 안에서 더욱 책임 있게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자기 공동체가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이 그 공동체 안에는 죄가 없다는 뜻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이 사실은 어떤 공동체가 정의로운 목적을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과, 그 공동체에 속한 모든 사람이 언제나 올바르게 행동한다는 주장을 구별하게 합니다.

42절에서 그들은 저질러진 죄가 완전히 지워지기를 간구합니다. 유다는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스스로를 지켜 죄를 짓지 말라고 권합니다.

그들은 죄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를 발견했다고 해서 형제들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도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봉헌물들이 야브네의 우상들과 관련된 물건이었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정확히 어떤 모양이었는지, 어떤 신에게 바쳐졌는지, 전사자들이 그것들을 왜 지니고 있었는지는 명확히 말하지 않습니다. 부적처럼 보호를 얻으려고 몸에 지녔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것만이 가능한 설명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신명기 7장 25–26절은 이방 신상과 그에 속한 물건들을 탐내어 자기 집에 들이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이러한 율법을 고려하면 유다의 사람들은 전사자들에게서 발견된 물건들이 단순한 장신구가 아니라고 판단했습니다. 그것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공동체가 멀리해야 할 우상 숭배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죽은 이들을 위해 속죄 제사를 마련하다

마카베오기 하권 12:43–45 본문 →

전사자들의 죄를 발견한 뒤 유다가 한 일

그는 사람마다 돈을 거두어 은 이천 드라크마가량을 마련하고, 죄를 위한 제사를 드리도록 예루살렘에 보냈다. 그는 부활을 헤아리며 매우 훌륭하고 고결하게 행동했다.마카베오기 하권 12:43 · 본디새김

이 행동의 대상은 이미 죽은 사람들입니다.

레위기의 일반적인 속죄 제사는 살아 있는 사람이 지은 죄를 다루는 의식입니다. 반면 마카베오기 하권 12장에서는 죽은 사람들을 위해 속죄 제사를 마련합니다. 유다는 율법의 속죄 전통에 근거하여 이미 죽은 형제들에게도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행동을 하고 있습니다.

왜 죽은 사람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는 일이 부활에 대한 소망과 연결될까요?

부활이 없다면 이 행동은 어리석은 일이다

그가 쓰러진 이들이 다시 일어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다면,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은 쓸데없고 어리석은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마카베오기 하권 12:44 · 본디새김

저자는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면 반드시 부활이 일어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유다가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한 것은 그들이 다시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의미 있는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소망은 마카베오기 하권 7장에서 이미 강하게 나타났습니다. 7장 9절에서 순교한 형제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다시 살리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7장 14절에서도 하나님께서 죽은 이들을 다시 일으키실 것이라는 소망을 고백합니다.

그때 부활은 율법을 지키다가 죽은 사람들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러나 12장에서는 새로운 문제가 등장합니다.

죽은 사람들은 모두 순교자들처럼 신실하게 죽은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금지된 우상 봉헌물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다는 그들이 다시 일어날 것을 기대하며 그들을 위해 속죄 제사를 마련합니다.

7장에서는 하나님께 충실한 사람이 죽었을 때 그에게 어떤 미래가 있는지를 묻습니다. 12장에서는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의 일원이 중대한 죄를 지은 채 죽었을 때 그를 위해 무엇을 구할 수 있는지를 묻습니다.

경건하게 잠든 이들이라는 표현의 어려움

또 경건하게 잠든 이들에게 가장 아름다운 보답이 마련되어 있음을 바라본 것이라면, 그 생각은 거룩하고 경건했다. 그러므로 그는 죽은 이들이 죄에서 풀려나도록 그들을 위해 속죄를 행했다.마카베오기 하권 12:45 · 본디새김

40절에서는 전사자들이 율법으로 금지된 물건들을 지니고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45절에서는 「경건하게 잠든 이들」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그들의 죄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지막 운명을 자기 자신이 결정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그들을 맡기며 죄에서 풀려나기를 구했습니다.

죽음 이후에도 죄에서 풀려날 수 있는가

여기서는 본문이 실제로 말하는 것과 그로부터 발전할 수 있는 신학적 해석을 구별해야 합니다.

유다는 그들의 죄가 하나님 앞에서 해결되기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 요청이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 그들의 죄가 언제 어떤 과정으로 처리되는지, 속죄 제사가 어떤 조건에서 효력을 갖는지에 관한 체계적인 설명은 없습니다.

또한 유다가 제사를 마련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 제사의 결과로 전사자들의 죄가 실제로 사해졌다는 하나님의 별도 선언이 기록된 것도 아닙니다. 이 구절은 훗날 죽은 이를 위한 기도와 속죄, 죽음 이후의 정화에 관한 신학적 논의에서 중요한 본문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후대의 교리 체계 전체가 이 세 절에 이미 명시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유다는 부활을 믿었기 때문에 죽은 형제들을 위해 하나님께 속죄를 구하는 일이 의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저자는 그 행동을 긍정적으로 평가했습니다.

부활의 소망은 죄를 가볍게 만드는가

죄가 심각하기 때문에 속죄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의로운 재판관이시기 때문에 그 죄를 무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죽은 자를 다시 일으키실 수 있는 분이시기에 그들을 위한 간구가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공의와 자비가 함께 놓여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경건하게 잠든 이들」에 대한 한 가지 이해는 이 전사자들이 심각한 죄를 저질렀지만, 그들의 삶 전체가 하나님을 완전히 거부한 것으로 평가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유다와 함께 유대 공동체를 위해 싸운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율법이 금한 물건을 지니는 죄를 범했습니다. 다른 가능성은 45절의 표현이 특정 전사자들에 대한 확정적인 판정보다, 경건하게 잠든 이들에게 마련된 보상을 바라보는 일반적인 부활 소망을 설명한다는 것입니다. 그 소망에 비추어 유다의 행동이 경건했다고 평가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 둘을 완전히 구별해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전사자들이 모두 이미 경건한 사람으로 인정되었다고 확정할 수도 없고, 반대로 그들이 모두 하나님의 구원에서 영원히 제외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전쟁의 마지막에 남은 은 이천 드라크마

마카베오기 하권 12:1–45 본문 →

의로운 재판관이신 하나님께 적들의 악행을 판단해 달라고 부르짖었던 사람들이, 이제 그 하나님께 자기 형제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구합니다. 죄를 심각하게 여긴다는 것이 반드시 죄를 지은 사람에 대한 모든 관심을 포기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여기서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인간이 죽은 사람의 운명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는 능력이 아닙니다. 그 운명을 하나님께 맡기며 자비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행동을 오늘날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는 죽은 이를 위한 기도와 속죄를 어떻게 이해하는지에 따라 교회 전통마다 다르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는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같은 죄를 짓지 말라고 권합니다. 그러면서 죽은 형제들을 위해 돈을 거둡니다. 은 이천 드라크마가 모입니다. 그 돈은 예루살렘으로 보내집니다.

이 장의 앞부분에서는 사람들이 전쟁터를 향해 움직였습니다. 배들을 불태우고, 성벽을 공격하고, 적군을 추격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움직이는 것은 군대가 아닙니다.

죽은 형제들의 죄를 위한 제사를 마련하려고 보내는 은전입니다.

그들은 이미 전사자들의 죽음을 되돌릴 수 없습니다. 그들이 지은 죄를 대신 없었던 일로 만들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다시 일으키실 수 있는 하나님께 그들을 맡기며 죄에서 풀려나기를 구합니다.

마카베오기 하권 12장은 그 간구를 담은 은전이 예루살렘으로 보내지는 장면에서 끝납니다.

전쟁터의 함성이 사라진 자리에, 죽은 형제들을 위한 속죄의 간구가 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