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심판과 쉼
고난받는 사람들에게 들려준 하나님의 판결
고난을 겪는 사람에게 가장 견디기 어려운 것은 고통 자체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당하는 일이 부당한데도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은 여전히 힘을 누리고 자신은 계속 짓눌린다는 현실이 사람을 지치게 합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다면 왜 이런 일이 계속되는 것일까요?
데살로니가후서 1장은 바로 이 질문 앞에 서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믿음이 자라고 사랑이 풍성해지고 있었지만, 그들의 형편이 좋아졌다는 말은 없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박해와 환난을 견디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들에게 고난이 곧 사라질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고난을 하나님의 부재를 보여 주는 증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이해하는 자리로 끌어옵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을 짓누르는 현실이 마지막 판결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달라진다는 것일까요? 바울의 대답은 단순히 박해자들이 벌을 받고 신자들이 보상을 받는다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1장의 마지막에 이르면, 그날 드러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지금 고난받는 사람들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지가 밝혀집니다.
고난 속에서도 자라고 있는 것
편지는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 세 사람의 이름으로 시작됩니다. 수신자는 데살로니가인들의 교회인데, 이 교회를 설명하는 말이 눈에 들어옵니다.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가, 우리 아버지이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들의 교회에 이 편지를 씁니다.데살로니가후서 1:1 · 본디새김
그들은 데살로니가라는 도시에 살고 있지만, 바울은 그들이 속한 자리를 지리적 위치만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공동체입니다.
사도행전 17:5–9에 따르면, 데살로니가에서 복음을 전하던 바울 일행은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반대자들은 야손과 몇몇 신자들을 도시 관리들 앞으로 끌고 가서, 이 사람들이 황제의 명령을 거스르고 예수라는 다른 왕을 내세운다고 고발했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일이 도시의 정치적 질서와 충돌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다만 이 사건이 후서 1장에서 언급하는 박해의 전부였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배경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교회라는 말은 단순한 종교적 수식어에 머물지 않습니다. 도시의 사람들이 그들을 어떻게 판단하든, 그들의 궁극적인 소속은 그리스도께 있다는 선언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어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화를 빕니다. 바로 뒤에서 박해와 환난이 언급되므로, 그들이 처한 환경과 바울이 비는 평화 사이에는 긴장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의 형편을 이야기하기에 앞서 감사부터 시작합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을 두고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이 마땅한 일입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크게 자라고 여러분 모두가 저마다 서로에게 품는 사랑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1:3 · 본디새김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훌륭하다고 칭찬하는 데 머물지 않고, 그들의 성장을 하나님께 감사할 일로 받아들입니다. 그들이 실제로 믿고 사랑하며 견디고 있지만, 바울은 그 삶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일하고 있음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3:12에서 바울은 주님께서 그들의 사랑을 서로에게뿐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더욱 풍성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때 기도에 쓰인 ‘늘어나다’와 후서 1:3에서 사랑이 ‘많아지고 있다’고 할 때 쓰인 동사는 같은 그리스어 동사의 형태입니다. 그 기도가 적어도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향한 사랑의 성장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읽을 만한 연결입니다.
그런데 이 성장에는 뜻밖의 배경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도 하나님의 여러 교회에서 여러분을 두고, 여러분이 참아 내고 있는 온갖 박해와 환난 속에서 여러분이 견디는 것과 여러분의 믿음을 자랑하는 것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1:4 · 본디새김
바울이 다른 교회들 앞에서 자랑하는 것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규모나 영향력이나 외적인 성공이 아닙니다. 박해 가운데서도 그들이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견디는 것」과 「참아 내고 있는」은 비슷해 보이지만 역할이 조금 다릅니다. 앞의 표현은 지속적인 압박 아래에서 흔들리지 않고 버티는 태도를 가리키고, 뒤의 표현은 그들이 실제로 환난을 감당하고 있음을 설명합니다. 믿음은 내면의 확신으로만 제시되지 않고, 현실의 압박 속에서 지속되는 삶으로 나타납니다.
고난은 공동체를 굳게 결속시키기도 하지만, 서로를 향한 여유를 앗아 가고 관계를 메마르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해 들은 데살로니가 교회에서는 믿음의 견딤과 서로를 향한 사랑이 함께 나타나고 있습니다.
바울이 발견한 것은 고난을 이겨 낸 사람들의 승리가 아니라, 고난이 끝나지 않은 자리에서도 믿음과 사랑이 자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잘 견디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왜 계속 박해를 받아야 할까요? 이 질문 앞에서 바울은 감사에서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야기를 옮깁니다.
무엇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보여 주는가
이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보여 주는 증거입니다. 그 심판은 여러분이 하나님의 나라에 걸맞다고 여겨지게 하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바로 그 나라를 위해 고난도 겪고 있습니다.데살로니가후서 1:5 · 본디새김
박해받는 신자들의 모습이 어떻게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보여 주는 증거가 된다는 것일까요?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앞에서 언급한 박해와 환난, 그리고 그 속에서 나타나는 믿음과 견딤의 모습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박해 자체를 하나님이 의롭게 심판하신다는 증거로 읽으면 부당한 고난을 하나님께서 직접 내리시는 벌처럼 이해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곧이어 그들을 박해하는 사람들을 심판의 대상으로 말합니다. 따라서 박해 자체가 의롭다는 뜻은 아닙니다.
문맥에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지금 부당한 고난을 당하고 있음에도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들의 현재 처지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결이 아직 완전히 드러나지 않은 현실을 보여 주고, 동시에 그들은 하나님이 의롭게 판단하실 나라를 바라보며 견디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현재의 견딤은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판결을 가리키는 증거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5절은 그 증거가 작동하는 방식을 상세히 설명하지 않으므로, 모든 고난이 장래의 구원을 증명한다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걸맞다고 여겨지게 하려는 것입니다」라는 말은 고난을 많이 견딘 만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을 얻는다는 뜻일까요? 그렇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말은 ‘합당하다고 여겨지다’라는 수동형 표현이어서, 중요한 것은 누군가가 그들을 합당하다고 여기는 판단입니다. 더구나 11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심에 걸맞은 사람으로 여겨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판단과 행동이 문단의 처음과 끝을 연결합니다.
그러므로 고난은 구원의 대가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고난받고 있으며,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최종적인 판단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판단이 왜 의롭다고 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거의 대칭을 이루는 문장으로 대답합니다.
여러분을 짓누르는 이들에게는 환난으로 갚으시고, 짓눌리는 여러분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께서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는 천사들과 함께 하늘에서 드러나실 때에 그리하실 것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1:6–7 · 본디새김
지금은 어떤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짓누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짓누르는 자들과 짓눌리는 자들을 똑같이 대하지 않으십니다. 압박을 가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가한 일에 대한 응답을, 압박받는 자들에게는 그 압박에서 벗어나는 안식을 주십니다.
그리스어에서 「환난」(θλῖψις)은 압박과 짓눌림을 뜻할 수 있는 말이고, 「안식」(ἄνεσις)은 긴장이 풀리고 압박에서 벗어나는 상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한쪽은 짓누름이고 다른 쪽은 풀어 줌입니다. 따라서 이곳의 안식은 단순히 고요한 시간을 보내는 휴식이 아니라, 자신을 짓누르던 힘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은 고난받는 사람들의 상황을 무시하고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결과를 선언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누가 고난을 가했고 누가 고난을 당했는지 아시며, 그 차이를 정의롭게 판단하시는 분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것이 이루어질 시점을 현재로 잡지 않습니다. 주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드러나실 때라고 말합니다.
이는 현재의 부당함을 가볍게 여겨도 된다는 뜻이 아니라, 현재의 판결이 최종 판결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판단과 권력이 아무리 확고해 보여도, 그것이 마지막으로 현실을 결정하는 권위는 아닙니다.
이 점에서 하나님의 보응에 관한 말씀은 신자들에게 복수할 권한을 주는 말과 구별됩니다. 로마서 12:19에서 바울은 직접 복수하지 말고 갚으시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라고 권합니다. 보응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확신은 인간이 그 권한을 자기 손에 쥐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자신들을 짓누르는 사람들을 향해 동일한 폭력을 행사하라는 요청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의로운 판결을 내리실 것이라는 약속 안에서 믿음을 지키도록 격려받습니다.
그러나 그날에 실제로 나타나시는 분은 누구일까요? 본문은 하나님의 심판을 설명하다가 그 심판을 실행하시는 분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등장시킵니다.
주 예수님께서 드러나시는 날
짓눌리는 여러분에게는 우리와 함께 안식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의로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께서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는 천사들과 함께 하늘에서 드러나실 때에 그리하실 것입니다. 타오르는 불길 가운데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이들에게 보응을 내리시면서 드러나실 것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1:7–8 · 본디새김
바울은 여기서 ‘오시다’보다 먼저 ‘드러나다’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이 말은 가려진 것이 드러나는 계시를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그날 비로소 주님이 되시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주님이신 분이 그날 자신의 권위와 능력을 드러내십니다.
데살로니가 교회가 현재 경험하는 세계에서 예수님의 주권은 분명하게 인정받고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날에는 누가 참으로 권위를 지니신 주님인지 드러나게 됩니다.
천사들과 불길은 이 드러남의 위엄을 표현합니다. 장면의 중심은 천사들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 드러나시는 주 예수님입니다.
「타오르는 불길」은 이사야 66:15처럼 여호와야훼께서 불 가운데 오셔서 심판하시는 구약의 신적 현현과 심판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바울은 그 장면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를 놓습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야훼께 속했던 심판의 권위가 여기에서는 주 예수님께서 드러나시는 사건과 연결되고, 하나님이 의롭게 심판하신다는 앞선 진술이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통해 구체화됩니다.
그분은 단지 신자들에게 고난을 잘 견디라고 가르치신 분이 아니십니다. 세상의 불의를 최종적으로 판단하실 권위를 지니신 주님이십니다.
바울은 그 심판의 대상을 「하나님을 모르는 이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이들」이라고 말합니다. 이 두 표현을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과 복음에 순종하지 않는 유대인들, 곧 서로 다른 두 집단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을 민족별로 명시하지 않으며, 두 표현이 겹치는 사람들을 묘사한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은 단순한 민족적 구분보다 하나님과 예수님의 복음에 대한 관계를 심판의 문제로 제시합니다.
복음은 좋은 소식인데, 왜 좋은 소식에 「순종한다」는 말을 사용할까요? 바울에게 복음은 단순한 종교 정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라는 선포이며, 그 선포는 사람에게 믿음의 응답을 요구합니다. 로마서 1:5와 16:26에서도 바울은 믿음과 순종을 긴밀하게 연결합니다. 이것은 구원이 도덕적 성취에 대한 보상이라는 뜻이 아니라, 그 복음을 믿는 것이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일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제 바울은 심판의 결과를 말합니다.
그들은 주님의 면전과 그분의 힘이 드러나는 영광에서 멀어져 영원한 무너짐이라는 벌을 받을 것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1:9 · 본디새김
이 구절은 데살로니가후서 1장에서 가장 무거운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영원한 무너짐」이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멀어져」가 주님에게서 분리됨을 말하는지 주님에게서 비롯됨을 말하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 앞에서 불의가 최종적으로 심판받는다는 사실은 같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심판의 불길이나 영원한 파멸을 더 자세히 묘사하지 않습니다. 시선을 갑자기 다른 사람들에게 돌립니다.
그분이 자기 성도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믿은 모든 이들 가운데서(우리의 증언이 여러분에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 놀랍게 여겨지시려고 오시는 그날에 그리하실 것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1:10 · 본디새김
같은 날, 같은 주님이 드러나십니다. 그러나 그날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은 의미를 지니지는 않습니다. 어떤 이들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믿은 이들에게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고 그분을 놀랍게 여기는 날입니다.
「자기 성도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라는 표현에는 두 가지 의미가 열려 있습니다. 하나는 성도들이 주님을 보고 그분의 영광을 찬양한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그분께 속한 사람들의 모습이 그분의 영광을 보여 주는 자리가 된다는 뜻입니다. 두 읽기는 서로 배척할 필요가 없지만, 문법적으로 어디에 무게를 두느냐는 다를 수 있습니다. 12절에서 바울이 예수님의 이름이 「여러분 안에서」 영광을 받는다고 말하는 점은 두 번째 읽기에도 의미 있는 문맥적 근거가 됩니다.
10절 한가운데에는 바울이 독자들을 직접 바라보며 덧붙이는 듯한 괄호 속 문장, 「우리의 증언이 여러분에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입니다」가 들어 있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과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는 장면이 너무 멀고 커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자신과 상관없는 일처럼 느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바울 일행이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날 주님을 놀랍게 여길 믿는 이들 가운데 그들도 포함됩니다.
지금 세상에서는 그들이 환난을 겪는 소수의 사람들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은 복음이 그들을 그리스도의 영광이 드러나는 미래와 연결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도들’은 소수의 뛰어난 신앙인만을 가리키는 칭호가 아니라 「믿은 모든 이들」과 나란히 놓인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맞이하는 사람들은 영적 업적을 달성한 특별한 계층이 아니라, 그분의 복음을 믿은 사람들입니다.
그날의 놀라움은 고난받던 사람들이 마침내 강자가 되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들이 믿었던 예수님께서 참으로 영광스러운 주님이심이 드러나는 데 있습니다.
그렇다면 데살로니가 교회는 그날까지 무엇을 해야 할까요? 바울은 심판과 영광을 이야기한 뒤, 현재의 작은 선한 일들로 돌아옵니다.
조금 더 깊이
천사들을 가리키는 표현은 ‘그분의 능력에 속한 천사들’ 또는 ‘그분의 힘 있는 천사들’로도 읽을 수 있으며,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는 천사들」은 그 관계를 풀어 쓴 번역입니다. 이사야 66:15의 본래 문맥에서 불 가운데 오시는 여호와야훼의 장면은 자기 종들의 처지를 바로잡으시고 악을 심판하시는 종말론적 전망에 속하며, 데살로니가후서와의 관계는 직접 인용이라기보다 공유된 이미지와 신학적 주제를 활용하는 연결입니다. 9절의 「영원한 무너짐」은 파멸이나 멸망을 뜻하는 명사에 영원함을 나타내는 형용사가 붙은 표현으로, 최종적인 파멸의 엄중함을 강조하지만 형벌의 구체적인 경험 방식까지 모두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를 의식적인 고통이 영원히 지속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견해와 돌이킬 수 없는 최종적인 멸망을 강조하는 견해가 있고, 각각 성경의 다른 심판 본문들과 연결하여 논증하지만 이 한 구절만으로 그 논쟁의 모든 세부 사항을 결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또 「멀어져」로 옮긴 그리스어 전치사 아포는 분리뿐 아니라 근원을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첫 번째로 읽으면 심판은 주님의 임재와 영광으로부터의 배제이고, 두 번째로 읽으면 그들에게 임하는 파멸이 주님의 면전과 능력에서 비롯된다는 뜻이 됩니다. 이 표현은 교만한 사람들이 여호와야훼의 위엄과 영광 앞에서 바위틈과 굴속으로 숨어드는 이사야 2:10, 19, 21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중요한 것은 여호와야훼의 심판이 드러날 때 인간이 의지하던 높고 강한 것들이 더는 자신을 지켜 주지 못한다는 사실이며, 데살로니가후서는 그 표현을 예수 그리스도의 드러나심과 연결합니다.
그날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오늘
이를 위하여 우리도 여러분을 두고 언제나 기도합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그 부르심에 걸맞은 이로 여기시고 선함을 향한 온갖 기꺼운 뜻과 믿음에서 비롯된 일을 능력으로 온전히 이루어 주시기를 빕니다.데살로니가후서 1:11 · 본디새김
이 기도는 앞의 심판 이야기와 별개로 덧붙인 경건한 마무리가 아닙니다. 「이를 위하여」라는 말이 보여 주듯,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드러나실 날을 바라보면서 데살로니가 사람들의 지금 삶을 위해 기도합니다.
5절에서는 하나님의 나라에 걸맞다고 여겨지는 일이, 11절에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걸맞다고 여겨지는 일이 언급됩니다. 두 구절 사이에 놓인 심판에 관한 설명을 지나오면, 하나님의 나라에 걸맞다고 여겨지는 것이 인간이 스스로 자격을 증명하여 얻는 지위로만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걸맞은 이로 여겨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의 궁극적인 소망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행동은 이들의 삶을 수동적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선함을 향한 온갖 기꺼운 뜻」은 사람들이 선한 일을 하고자 품는 뜻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하나님의 선한 뜻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문법적으로 어느 쪽인지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뜻으로 읽는다면 하나님께서 신자들의 선한 소망을 실제 행동으로 완성해 주시기를 비는 기도이고, 하나님의 뜻으로 읽는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선한 뜻을 그들 가운데 능력으로 이루시기를 비는 기도입니다.
뒤에 「믿음에서 비롯된 일」이 함께 놓여 있다는 점은 신자들의 선한 뜻과 행동을 강조하는 읽기에 무게를 실어 줍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든, 선함과 믿음의 일은 하나님의 능력을 통해 완성됩니다.
장차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난다고 해서 지금의 삶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날을 바라보기 때문에 현재의 믿음과 선한 일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일은 인간의 의지만으로 완성되어야 하는 짐으로 주어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능력으로 온전히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린다는 것은 날짜를 계산하거나 미래의 사건들을 추측하는 일로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분의 나라에 속한 사람답게 오늘 믿음과 사랑과 선함을 실천하는 일로 나타납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자신들을 짓누르는 힘을 당장 제거할 능력이 없을지도 모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역사의 최종 판결을 직접 집행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일입니다. 대신 지금 그들이 행하는 작은 선한 일들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다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절에서 이 기도의 목적을 밝힙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여러분 안에서 영광을 받고 여러분도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따라.데살로니가후서 1:12 · 본디새김
앞에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오시는 날 성도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예수님의 이름이 「여러분 안에서」 영광을 받기를 기도합니다. 장차 공개적으로 드러날 그리스도의 영광이 지금 교회의 믿음과 사랑과 선한 일 속에서도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영광은 한쪽 방향으로만 움직이지 않습니다. 신자들이 그리스도를 높이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리스도께 속한 신자들도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리스도와 신자가 동등한 영광의 근원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들이 받는 영광은 그리스도와의 관계 안에서 주어지는 영광입니다.
1장 초반에 등장했던 은혜가 마지막 절에 다시 나타납니다. 처음에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오는 은혜와 평화를 빌었고, 마지막에는 그 은혜를 따라 예수님의 이름과 신자들이 영광을 받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를 두 분으로 읽을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읽을지는 문법적으로 갈리지만, 어느 읽기를 따르든 신자들이 장차 받게 될 영광과 지금 그들 가운데 이루어지는 선한 일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께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라는 표현은 관사를 공유하는 명사들의 관계 때문에,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두 분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하나님이자 주님’으로 지칭하는 것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1:1–2에서 아버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별한 문맥은 두 분으로 읽는 데 근거가 되고, 하나의 관사가 공유되는 구조는 한 분을 가리킨다는 해석의 근거가 됩니다. 이 문법만으로 논쟁을 끝낼 수는 없습니다. 또 신자들과 그리스도가 서로 영광을 받는 상호적인 표현은 요한복음 17:10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시는 기도와 연결됩니다. 두 본문이 같은 문장을 인용하는 관계는 아니지만,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을 통해 그분의 영광이 드러난다는 주제를 공유합니다.
마지막 판결보다 먼저 주어진 은혜
이 장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불길 가운데 드러나시는 그리스도의 모습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박해받는 신자들에게 공포를 주려고 심판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지금 그들을 짓누르는 현실이 최종적인 현실은 아니며, 그들의 소망은 고난을 견딘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의롭게 심판하시고 압박받는 자들에게 안식을 주실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판결의 중심에는 그분을 믿은 사람들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그렇기에 이 장은 고난의 의미를 무조건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습니다. 부당한 고난은 여전히 부당하며, 압박은 압박입니다. 하나님이 의롭게 심판하신다는 사실은 악을 악이라고 부를 수 있게 합니다. 그러면서도 고난받는 이들의 현재 모습이 그들의 마지막 모습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편지의 첫머리에서 데살로니가 교회는 박해와 환난을 참아 내는 사람들로 등장했습니다. 마지막에 이르러도 그들의 외적인 상황이 바뀌었다는 소식은 없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같은 도시에서, 같은 현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들을 위해 올리는 기도는 이제 다른 곳을 향합니다. 그들의 믿음에서 비롯된 일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완성되고, 그들 안에서 주 예수님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며, 그들 또한 그분 안에서 영광을 받게 되기를 빕니다.
아직 그들을 짓누르는 힘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직 주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드러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고난받는 교회 안에서 믿음은 자라고, 사랑은 많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가 계속 일하기를 기도합니다.
그들이 믿는 주님의 이름이, 바로 그들 안에서 영광을 받도록.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