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장 · 마지막 인사
자기 빵을 먹으며 형제를 잃지 않는 교회
복음이 온 세상에 퍼지기를 기도하는 사람에게, 왜 바울은 자기 손으로 일해서 밥을 먹으라고 말했을까요?
데살로니가후서의 마지막 장은 조금 뜻밖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바울은 주님의 말씀이 거침없이 달려가기를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밤낮으로 일하여 빵을 먹었던 이야기를 꺼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하지 않으면서 남의 일에 참견하고 있었고, 바울은 그런 사람들에게 스스로 일하여 자기 빵을 먹으라고 명령합니다.
온 세상으로 달려가는 하나님의 말씀과 한 사람의 식탁 위에 놓이는 빵. 언뜻 보기에 두 이야기는 서로 별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복음은 미래에 이루어질 구원에 관한 소식을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소식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지금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가까지 이어집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음으로써 공동체를 섬길 수 있고, 복음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불필요한 짐을 지우지 않음으로써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공동체의 배려를 이용하면서 자기 책임을 회피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조건 도와주는 것이 사랑일까요? 아니면 그 사람을 공동체에서 멀리하는 것이 옳을까요?
바울은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일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사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바로 뒤에서 다시 말합니다. 「그렇다고 그를 원수처럼 여기지 말고 형제로 대하면서 타이르십시오.」
이 두 명령을 함께 이해하는 것이 데살로니가후서 3장을 읽는 열쇠입니다. 바울이 세우려는 공동체는 책임을 묻지 않는 공동체도 아니고, 잘못한 사람을 쉽게 내쫓는 공동체도 아닙니다.
그는 책임과 사랑이 함께 살아 있는 교회를 세우려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권면의 처음과 끝에는 교회를 굳게 세우시는 주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달려가는 말씀과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
이제 남은 말입니다. 형제 여러분,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이 달려가고 영광을 받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여러분 가운데서도 그러했듯이.데살로니가후서 3:1 · 본디새김
지금까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기도해 왔습니다. 이제는 그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이지만, 그들의 기도가 필요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사도는 교회를 가르치고 교회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지만, 기도에서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요청하는 기도의 첫 번째 내용은 자신의 안녕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 달려가기를 원합니다.
「달려가다」(τρέχω)는 실제로 달리는 움직임을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바울은 복음이 단순히 전파된다고 하지 않고, 마치 살아 움직이는 주자처럼 달려간다고 표현합니다.
바울은 말씀이 달려가기만을 기도하지 않습니다. 「영광을 받게」 해 달라고도 기도합니다. 사람들이 그 말씀을 하나님의 구원 소식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 가운데서 주님의 말씀이 영광을 받았던 것처럼, 다른 곳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성공을 자신의 영향력이 커지는 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말씀이 영광을 받는 일로 설명합니다. 사도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지만, 영광을 받아야 할 대상은 사도가 아니라 그가 전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달려가는 길에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비뚤어지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짐을 받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3:2 · 본디새김
「비뚤어지고 악한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복음 전파를 방해하거나 바울 일행을 위협하는 사람들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들의 신분이나 특정 사건까지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이런 반대를 비현실적인 일처럼 여기지 않습니다. 복음이 모든 곳에서 환영받지는 않고, 말씀을 듣는 사람 모두가 믿음으로 응답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말씀의 전진과 자신들의 보호를 함께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대조가 나타납니다.
그러나 주님은 미더우십니다. 그분이 여러분을 굳게 세우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3:3 · 본디새김
2절은 「모든 사람에게 믿음이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라고 끝났고, 3절은 「그러나 주님은 미더우십니다」라고 시작합니다. 그리스어에서는 이 연결이 더욱 분명합니다. 2절의 「믿음」은 피스티스(πίστις), 3절의 「미더우십니다」는 같은 어근의 형용사 피스토스(πιστός)입니다.
사람에게는 믿음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신실하십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결국 믿게 될 것이므로 안심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더는 활동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신실하시기 때문에 그분이 신자들을 굳게 세우시고 지켜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불신앙이 주님의 신실하심을 무너뜨리지는 못합니다.
「악한 자」는 악한 인격적 존재로도, 악 자체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이 말하는 보호는 적대적인 힘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보장과는 다릅니다. 그런 힘이 활동하는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키신다는 약속입니다.
바울은 이어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자신의 권면을 따르리라고 확신합니다. 그 확신도 단순히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판단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주 안에서 여러분이 우리가 이르는 것을 지금도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하리라고 확신합니다.데살로니가후서 3:4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신실하시고 교회를 굳게 세우신다는 믿음이 그들을 향한 확신의 토대가 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견딤으로 곧게 이끌어 주시기를 빕니다.데살로니가후서 3:5 · 본디새김
바울은 주님께서 그들의 환경을 바꾸어 주시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곧게 이끌어 주시기를」은 마음이 어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도록 길을 바로잡는다는 의미를 지니고, 그 목적지는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견딤입니다.
이 두 표현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는 사랑일 수도 있고,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견딤」도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 주신 견딤을 가리킬 수도 있고, 예수님을 기다리며 견디는 태도를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
앞 장에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문제가 중요하게 다루어졌으므로, 예수님을 기다리는 견딤이라는 읽기에도 문맥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견딤을 바라보게 해 달라는 기도로 읽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어느 해석을 따르든, 바울의 기도는 신자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과 관련된 견딤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기도가 끝나자마자 바울은 공동체 안에서 질서를 무너뜨리는 사람들에 관한 문제를 꺼냅니다. 앞에서는 주님께서 마음을 곧게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했고, 이제는 그 마음이 실제 생활에서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말씀이 달려간다」는 표현은 시편 147:15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시편에서 여호와야훼는 말씀을 땅에 보내시며, 그 말씀은 빠르게 달려갑니다. 시편의 본래 문맥에서는 자연세계를 다스리고 이스라엘에게 말씀을 알리시는 여호와야훼의 능력이 찬양됩니다. 데살로니가후서가 이를 명시적으로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어 구약에 사용된 ‘말씀이 달려간다’는 독특한 이미지를 공유하고, 바울은 그 이미지를 복음 전파에 적용합니다. 3절의 「악한 자」는 그리스어로 악한 인격적 존재를 가리키는 남성형으로도, 악 자체를 가리키는 중성형으로도 읽힙니다. 바로 앞의 악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인간적인 악의 세력과 연결할 수 있고, 앞 장에서 등장한 사탄을 생각하면 그 악한 자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의 문법만으로 어느 쪽인지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가 밤낮으로 일했던 이유
그런데 형제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이릅니다. 제 자리를 지키지 않고 걸으며 그들이 우리에게서 전해 받은 전통을 따르지 않는 형제는 누구든 멀리하라는 것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3:6 · 본디새김
바울의 어조가 갑자기 단호해집니다.
앞에서는 형제들에게 기도를 부탁했고 그들을 향한 확신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합니다.
「제 자리를 지키지 않고」는 정해진 대열이나 질서에서 벗어난 태도를 가리킬 수 있는 말입니다. 바울이 모든 사람이 사회적으로 정해진 자기 신분이나 계급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이고, 이 점은 뒤에 이어지는 노동에 관한 설명에서 구체화됩니다.
바울이 요구하는 조치는 상당히 강합니다. 그러한 형제들을 멀리하라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바울은 그 이유를 설명하면서 잘못한 사람들의 행동을 자세히 열거하기보다, 자신이 데살로니가 교회 가운데서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합니다.
우리를 어떻게 본받아야 하는지 여러분 스스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곧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서 제 자리를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누구에게서도 빵을 거저 먹지 않았고, 도리어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짐을 지우지 않으려고 수고하고 애쓰며 밤낮으로 일해서 먹었습니다.데살로니가후서 3:7–8 · 본디새김
바울이 제시하는 모범은 설교나 기도, 기적과 같은 활동이 아닙니다.
자기 빵을 위해 일했던 모습입니다.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토록 애써 일했을까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짐을 지우지 않으려고」 그랬다고 합니다. 바울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단순한 경제적 자립이 아니라,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공동체에 불필요한 부담을 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교회로부터 생활에 필요한 도움을 받는 것은 잘못된 일일까요?
우리에게 권한이 없어서가 아니라,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도록 우리 자신이 여러분에게 본이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3:9 · 본디새김
바울에게는 공동체로부터 지원받을 권한이 있었습니다. 고린도전서 9:4–18에서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물질적인 지원을 받을 권리를 인정하면서도, 자신은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데살로니가후서 3장의 가르침은 모든 신앙인이 반드시 스스로 생계를 해결해야만 한다는 단순한 원칙으로 축소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권리가 없어서 일한 것이 아닙니다. 권리가 있었지만 공동체를 위해 그것을 사용하지 않기로 선택했습니다. 그에게 노동은 돈을 버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바울은 말로만 가르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르친 공동체 앞에서 자신이 지닌 권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삶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모범이 있었기 때문에 이제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들을 향해 말할 수 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사도행전 18:3에 따르면 바울은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생업에 종사하기도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어떤 작업을 얼마나 오랫동안 했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상세히 복원하기 어렵지만, 바울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실제로 노동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또 빌립보서 2:5–8에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지위를 자신만을 위해 붙잡지 않으시고 자신을 낮추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 본문과 여기 사이에 직접적인 인용 관계는 없고, 바울의 생계 노동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은 차원의 사건으로 보아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자신의 권리를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 앞에서 내려놓는다는 점에서 두 본문은 신학적으로 이어집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인가, 일하려 하지 않는 사람인가
실제로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도 이것을 여러분에게 거듭 일렀습니다. 「일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데살로니가후서 3:10 · 본디새김
데살로니가후서 3장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말씀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쉽게 오해될 수 있습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은 먹을 자격도 없다는 뜻일까요? 직업을 구하지 못한 사람, 병들어서 일할 수 없는 사람, 장애나 노령으로 노동하기 어려운 사람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일까요?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 차이를 결정하는 표현은 「일하려 하지 않는」입니다. 그리스어에는 ‘원하다’, ‘의지하다’를 뜻하는 동사가 쓰였습니다. 바울은 일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일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누군가 생계를 유지할 능력이 없어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과, 일할 수 있고 해야 할 책임이 있는데도 그것을 거부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상황은 같지 않습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두 번째 상황입니다. 이 명령이 공동체의 모든 식량 지원을 철폐하라는 지시라고 볼 근거도 없습니다. 바울은 이 말씀을 누구에게 적용하는지 바로 다음 절에서 설명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여러분 가운데 몇몇 사람이 제 자리를 지키지 않고 걸으며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도리어 남의 일에 참견한다는 말을 듣기 때문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3:11 · 본디새김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ἐργάζομαι)에 해당하는 말과 「남의 일에 참견한다」(περιεργάζομαι)에 해당하는 말은 그리스어에서 같은 동사 어근을 공유합니다.
· 에르가조메누스: 일하는 사람들
· 페리에르가조메누스: 쓸데없는 일에 간섭하며 돌아다니는 사람들
바울은 앞에 ‘아무것도’라는 말을 붙여 이 대조를 만듭니다. 그들은 정작 해야 할 일은 하지 않으면서, 하지 않아도 될 남의 일에는 열심이었습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단순한 게으름보다 넓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 몫의 책임을 회피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에 불필요하게 개입하고 있었습니다. 공동체의 자원을 이용하면서 그 공동체의 질서와 평화를 해치는 행동까지 이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왜 일하지 않았을까요? 한 가지 설명은 예수님의 오심이 임박했다고 생각해 더는 일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앞 장에서 종말에 대한 혼란이 다루어졌으므로 자연스러운 추론일 수 있지만, 본문은 그들이 종말을 기다리느라 일을 그만두었다고 명시하지 않습니다.
다른 설명은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의 후원 관계와 연결됩니다. 여유 있는 사람들의 지원을 받으며 생계를 유지하거나 사회적 영향력을 얻으려 했던 일부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비슷하게 행동했을 가능성입니다. 이 사회적 설명이 종말론적 설명보다 본문에 더 잘 부합한다고 보는 읽기도 있지만, 이는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려는 연구상의 가설이지 본문에서 직접 확인되는 사실은 아닙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이들의 행동입니다. 그들은 일하려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일에 참견했으며, 공동체가 받은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 이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르고 권합니다. 조용히 일하여 제 빵을 먹으라는 것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3:12 · 본디새김
바울의 처방은 소박합니다. 그는 그들에게 공개적으로 자신의 잘못을 길게 해명하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더 많은 종교 활동을 하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조용히」는 말을 전혀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11절에서 묘사된 남의 일에 참견하며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태도와 대조됩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뒤흔드는 활동을 멈추고 자기 책임을 차분히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1–12에서도 바울은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자신의 손으로 일하여 외부 사람들에게 단정하게 처신하며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는 삶을 권했습니다. 그는 새로운 노동 윤리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 이전부터 가르쳤던 삶의 방식을 다시 요구하고 있습니다.
「제 빵을 먹으라」는 말도 부자가 되거나 경제적으로 성공하여 다른 사람보다 높은 지위에 오르라는 뜻이 아닙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책임을 감당하고, 다른 사람에게 불필요하게 짐을 지우지 않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자립만을 절대화하는 가르침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6:2에서는 서로의 짐을 지라고 하고, 고린도후서 8:13–15에서는 가진 사람과 부족한 사람 사이의 균형을 강조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3:12의 가르침은 사랑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제대로 작동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는 사람과 도움을 주는 사람 모두의 책임을 바로 세우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권면을 마치자마자 시선을 다시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에게 돌립니다.
지치지 말라는 말이 왜 여기에 있는가
그러나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좋은 일을 하면서 지치지 마십시오.데살로니가후서 3:13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앞의 명령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일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하고, 그들에게 조용히 일해서 자기 빵을 먹으라고 권한 바로 다음에 이 말이 옵니다. 왜 이런 말을 덧붙였을까요?
공동체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자기 책임을 감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을 도와 온 사람들은 지쳤을 수 있습니다. 선의를 베풀었지만 그 선의가 계속 이용당한다고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러한 감정이 실제로 얼마나 퍼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바울이 이 문제를 다루는 한가운데에서 선한 일을 하다가 지치지 말라고 권면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공동체의 선의를 이용하는 사람들을 바로잡으면서도, 교회의 선행 자체가 중단되는 것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책임을 회피하는 행동을 바로잡는 것과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중단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잘못된 의존을 거부하는 것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는 것도 같지 않습니다.
갈라디아서 6:9–10에서도 바울은 선한 일을 하다가 지치지 말고 기회가 있을 때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고 권합니다. 두 본문을 함께 읽으면, 선행은 아무런 분별 없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는 행동과 같지 않으면서도, 타인의 잘못을 이유로 사랑의 책임 자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사랑은 때때로 상대방이 요구하는 것을 거절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절한다고 해서 사랑하기를 멈춘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런 긴장을 단순한 원칙 하나로 해결하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두 절에서 그 긴장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멀리하되 원수로 만들지 말라
그런데 누가 이 편지로 전한 우리의 말에 순종하지 않으면 그 사람을 표해 두십시오. 그가 부끄러워지도록 그와 어울리지 말라는 것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3:14 · 본디새김
앞의 권면이 단순한 조언이 아니라 공동체가 따라야 할 사도적 가르침이라는 사실이 다시 강조됩니다.
「그가 부끄러워지도록」이라는 표현은 현대 독자에게 다소 불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수치심을 주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라는 뜻일까요? 이 표현은 단순히 벌을 받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려는 의도를 포함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공동체에서 교제는 같은 믿음을 고백하며 서로를 형제자매로 인정하는 관계의 중요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제를 제한하는 일은 상당히 무거운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바로 다음 절에서 이 조치의 경계를 분명하게 설정합니다.
그렇다고 그를 원수처럼 여기지 말고 형제로 대하면서 타이르십시오.데살로니가후서 3:15 · 본디새김
이 구절을 놓치면 앞의 말씀은 매우 위험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교제를 제한하는 조치가 그 사람에 대한 적대감이나 보복으로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사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를 바로잡아야 할 이유가 됩니다. 그러나 그 사실 때문에 그를 대하는 모든 관계가 적대적인 관계로 바뀌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형제로 불립니다.
바울은 그를 공동체가 싸워 이겨야 할 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타이르십시오」는 마음이나 생각을 바로잡도록 경고하고 권면하는 행위를 가리키며, 잘못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모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는 잘못을 그냥 덮어 주라고 하지 않습니다. 잘못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아무런 경계도 세우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경계를 세웠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원수로 취급할 권한을 주지도 않습니다.
바울에게 권징의 목적은 형제를 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형제를 다시 형제답게 살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 교제 제한을 어떤 상황에든 곧바로 적용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은 반복적으로 사도의 가르침을 거부하면서 공동체의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습니다. 단순한 의견 차이나 개인적인 갈등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배척할 근거를 제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부끄러워지도록」이라는 말을 공개적인 망신 주기나 집단적인 괴롭힘을 정당화하는 말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그를 원수로 여기지 말라는 제한이 붙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실제로 어려운 일입니다. 잘못을 지적받은 사람은 마음을 닫을 수 있고, 지적한 사람은 분노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는 서로를 돕는 사람들과 도움을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갈라질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는 마지막 길로 기도를 선택합니다.
조금 더 깊이
교제 제한이 어느 정도의 사회적 단절을 요구하는지, 구체적으로 어떤 모임과 식사까지 포함하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모두 확인할 수 없습니다. 「타이르십시오」에 쓰인 그리스어는 누테테오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4에서도 바울은 제 자리를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타이르라고 권했습니다. 후서에서는 문제가 계속되는 사람들과 교제를 제한하는 조치까지 언급하지만, 타이르는 관계를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8:15–17에서 가르치신 공동체 안의 잘못을 다루는 과정과도 주제적인 연결이 있어, 그곳에서도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권면이 공동체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다만 두 본문은 구체적인 절차와 상황이 같지 않으므로, 데살로니가후서가 마태복음의 절차를 그대로 반복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평화
평화의 주님께서 몸소 언제나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데살로니가후서 3:16 · 본디새김
바울은 교회 안에서 서로 멀리해야 하는 상황까지 언급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자기 책임을 감당하라고 명령했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선한 일을 하다가 지치지 말라고 권했습니다. 이 모든 긴장 끝에서 그는 평화를 기도합니다.
그 평화는 「평화의 주님」께서 주십니다. 바울은 공동체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만으로 참된 평화가 완성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사도의 명령을 모두 지키면 자동으로 갈등이 사라질 것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평화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교회는 필요한 경우 잘못을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목적은 누군가를 굴복시켜 공동체를 조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 안에서 사람들이 다시 바르게 관계를 맺도록 돕는 것입니다.
「언제나 모든 면에서」라는 표현처럼, 평화가 필요한 때는 공동체에 갈등이 없을 때뿐만이 아닙니다. 서로를 타이르고, 잘못을 바로잡고, 책임을 요구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주님의 평화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기도의 마지막에는 「여러분 모두」라는 말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앞에서 잘못된 행동을 하는 몇몇 사람들을 엄중하게 책망했고, 그들과 어울리지 말라고까지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바라는 대상은 「여러분 모두」입니다.
그렇다고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어도 모든 일이 해결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바울의 앞선 명령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러나 그는 잘못을 바로잡는 과정에서도 공동체 전체가 주님의 평화 안에 있기를 바랍니다.
이 평화는 단순히 갈등을 덮어 두는 평화가 아닙니다. 잘못을 바로잡으면서도 형제를 잃지 않으려는 평화이며, 교회가 스스로 만들어 내어 하나님께 드리는 결과물이 아니라 평화의 주님께서 그들에게 주시는 선물입니다.
바울의 손으로 남긴 마지막 인사
나 바울이 내 손으로 쓰는 인사입니다. 이것이 모든 편지에서 표징입니다. 나는 이렇게 씁니다.데살로니가후서 3:17 · 본디새김
편지의 마지막에 이르면 작은 장면 하나가 등장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손으로 쓰는 인사가 자신의 모든 편지에 나타나는 표징이라고 말합니다. 앞서 2장에서 바울은 자신에게서 온 것처럼 여겨지는 편지 때문에 교회가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했습니다. 따라서 이 손글씨를 편지의 출처를 확인하는 표징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3:17이 실제 위조 편지가 유통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손글씨를 단순한 저자 인증 장치로만 축소하지 않고, 서신의 마지막에서 바울이 수신자들에게 직접 인사를 전하는 관계적 행위로 읽어야 한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바울은 앞에서 밤낮으로 수고하며 자기 손으로 일해 빵을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손으로 편지의 마지막 인사를 적습니다. 두 손의 장면 사이에 바울이 의도한 문학적 대응이 있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그가 전한 가르침은 그의 노동과 행동 속에서 나타났고 이제 글로도 공동체에 전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자신의 손으로 남기는 마지막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기를 빕니다.데살로니가후서 3:18 · 본디새김
편지는 은혜로 끝납니다.
평화의 기도에 이어 「여러분 모두」가 다시 등장합니다. 바울은 공동체 안의 잘못된 행동을 심각하게 다루었고, 사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제한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권면을 마치고 마지막으로 바라는 것은 예수님의 은혜가 공동체 전체와 함께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했고, 예수님 안에서 권면했으며,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은혜를 빕니다. 그가 공동체에 요구한 책임과 질서는 은혜의 반대편에 놓여 있지 않고, 은혜와 무관한 인간의 성취로 제시되지도 않습니다.
자기 빵을 먹고, 형제를 형제로 대하는 삶
데살로니가후서 3장은 매우 일상적인 문제를 다룹니다. 누가 일해야 하는지, 공동체의 도움을 어디까지 베풀어야 하는지, 잘못된 행동을 반복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주님의 날이나 불법의 사람에 관한 앞 장의 이야기와 비교하면 사소해 보이지만, 바울은 사소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공동체에게 아직 미래의 모든 일이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이미 많은 부분 알려져 있습니다.
바울이 밤낮으로 일했던 것도, 일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자기 빵을 먹으라고 한 것도, 잘못한 사람을 원수로 여기지 말라고 한 것도 한 방향을 가리킵니다. 자기중심적인 삶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삶입니다. 바울은 무책임한 사람에게는 책임을 요구하고, 책임을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잃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삶의 힘은 주 예수님에게서 옵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책임을 없애지 않고 잘못을 무조건 눈감아 주지도 않습니다. 잘못을 분명히 지적하면서도 그 사람을 형제로 대할 수 있도록 하는 힘입니다.
이제 편지의 마지막 장면을 바라봅니다.
바울은 자신의 손으로 인사를 적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밤낮으로 수고했던 바로 그 사도의 손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는 여전히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을 바로잡아야 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마지막 인사에서 누구를 제외하지 않습니다.
그 손으로 적는 마지막 문장은, 그들 모두를 향한 은혜의 기도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기를 빕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