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장 · 마지막 인사

자기 빵을 먹으며 형제를 잃지 않는 교회

복음이 온 세상에 퍼지기를 기도하는 사람에게, 왜 바울은 자기 손으로 일해서 밥을 먹으라고 말했을까요?

데살로니가후서의 마지막 장은 조금 뜻밖의 모습으로 시작됩니다. 바울은 주님의 말씀이 빠르게 퍼지도록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밤낮으로 일하여 음식을 마련했던 이야기를 꺼냅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하지 않으면서 남의 일에 참견하고 있었고, 바울은 그런 사람들에게 조용히 일해서 스스로 마련한 음식을 먹으라고 명령합니다.

온 세상으로 퍼지는 하나님의 말씀과 한 사람의 식탁 위에 놓이는 음식. 언뜻 보기에 두 이야기는 서로 별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바울에게 복음은 미래에 이루어질 구원에 관한 소식을 듣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소식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지금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가까지 이어집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생깁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공동체의 배려를 이용하면서 자기 책임을 회피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조건 도와주는 것이 사랑일까요? 아니면 그 사람을 공동체에서 멀리하는 것이 옳을까요?

바울은 매우 단호하게 말합니다. 일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하고, 사도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사람과는 어울리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그러나 바로 뒤에서 「그를 원수로 여기지 말고 형제자매로 대하며 타이르십시오」라고 다시 말합니다.

이 두 명령을 함께 이해하는 것이 데살로니가후서 3장을 읽는 열쇠입니다. 바울이 세우려는 공동체는 책임을 묻지 않는 공동체도 아니고, 잘못한 사람을 쉽게 내쫓는 공동체도 아닙니다.

그는 책임과 사랑이 함께 살아 있는 교회를 세우려 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권면의 처음과 끝에는 교회를 굳세게 하시는 주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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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가는 말씀과 흔들리지 않는 사람들

데살로니가후서 3:1–5 본문 →

끝으로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십시오. 주님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서 그랬던 것처럼 빠르게 퍼지고 높임을 받도록 기도해 주십시오.데살로니가후서 3:1 · 두루새김

지금까지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를 위해 기도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에게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한 사람이지만, 그들의 기도가 필요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기도에서는 사도와 교회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요청하는 기도의 첫 번째 내용은 자신의 안녕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이 빠르게 퍼지기를 원합니다.

두루새김의 「빠르게 퍼지고」(τρέχω)에 해당하는 자리에서 원문은 말씀이 ‘달려간다’고 표현합니다. 실제로 달리는 움직임을 나타내는 동사입니다. 바울은 복음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주자처럼 달려간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말씀이 빠르게 퍼지기만을 기도하지 않습니다. 「높임을 받도록」 해 달라고도 기도합니다. 사람들이 그 말씀을 하나님의 구원 소식으로 받아들이고 존중하기를 바라는 기도입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 가운데서 주님의 말씀이 높임을 받았던 것처럼, 다른 곳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바울은 복음의 성공을 자신의 영향력이 커지는 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높임을 받아야 할 대상은 사도가 아니라 그가 전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퍼지는 길에는 장애물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못되고 악한 사람들에게서 건져 주시도록 기도해 주십시오.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3:2 · 두루새김

「못되고 악한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복음 전파를 방해하거나 바울 일행을 위협하는 사람들로 이해할 수 있지만, 그들의 신분이나 특정 사건까지 확인할 수는 없습니다.

복음이 모든 곳에서 환영받지는 않습니다. 말씀을 듣는 사람 모두가 믿음으로 응답하지도 않습니다. 그렇기에 바울은 말씀이 퍼지는 일과 자신들의 보호를 함께 기도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믿을 만한 분이십니다. 그분께서 여러분을 굳세게 하시고 악한 자에게서 지켜 주실 것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3:3 · 두루새김

2절은 「모든 사람이 믿음을 가진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로 끝나고, 3절은 「그러나 주님은 믿을 만한 분이십니다」로 시작합니다. 원문에서는 2절의 「믿음」(πίστις)과 3절의 「믿을 만한」(πιστός)이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이어서 이 연결이 더욱 분명합니다.

사람에게는 믿음이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믿을 만한 분이십니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결국 믿게 될 것이므로 안심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악한 사람들이 더는 활동하지 않을 것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믿을 만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이 신자들을 굳세게 하시고 지켜 주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의 믿음 없음이 주님의 믿음직하심을 무너뜨리지는 못합니다.

바울은 이어서 데살로니가 교회가 자신의 권면을 따르리라고 확신합니다. 그런데 그 확신도 단순히 그들이 좋은 사람들이라는 판단에 근거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주님을 의지하여 이렇게 확신합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명령하는 것을 지금도 실천하고 있고, 앞으로도 실천할 것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3:4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 믿을 만한 분이시고 교회를 굳세게 하신다는 믿음이 그들을 향한 확신의 토대가 됩니다.

주님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로 이끌어 주시기를 빕니다.데살로니가후서 3:5 · 두루새김

바울은 주님께서 그들의 환경을 바꾸어 주시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마음을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끌어 주시기를」(κατευθύνω)에 해당하는 원문의 표현은 마음이 어떤 목적지를 향해 나아가도록 길을 바로잡는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는 사랑으로도, 그들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도 읽힙니다. 「그리스도의 인내」도 예수님께서 친히 보여 주신 인내로도, 예수님을 기다리며 견디는 태도로도 읽힙니다. 어느 해석을 따르든, 바울의 기도는 신자들의 마음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인내에서 벗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앞에서는 주님께서 마음을 이끌어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이제는 그 마음이 실제 생활에서 어떤 모습을 취해야 하는지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말씀이 달려간다’는 표현은 시편 147:15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 시편에서 여호와야훼는 말씀을 땅에 보내시며, 그 말씀은 빠르게 달려갑니다. 데살로니가후서가 이를 명시적으로 인용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스어 구약에 사용된 ‘말씀이 달려간다’는 독특한 이미지를 공유합니다. 3절의 「악한 자」는 원문에서 악한 인격적 존재를 가리키는 남성형으로도, 악 자체를 가리키는 중성형으로도 읽힙니다. 바로 앞의 악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인간적인 악의 세력과 연결할 수 있고, 앞 장에서 등장한 사탄을 생각하면 그 악한 자를 가리킨다고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문법만으로 어느 쪽인지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바울이 말하는 보호는 적대적인 힘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는 보장과는 다르며, 그런 힘이 활동하는 상황에서도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지키신다는 약속입니다. 5절의 「그리스도의 인내」는 앞 장에서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문제가 다루어졌으므로 기다리는 인내라는 읽기에도 문맥적인 근거가 있지만,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인내를 바라보게 해 달라는 기도로 읽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사도가 밤낮으로 일했던 이유

데살로니가후서 3:6–9 본문 →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명령합니다. 질서를 어기며 살면서 우리에게서 전해 받은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형제자매는 누구든 멀리하십시오.데살로니가후서 3:6 · 두루새김

바울의 어조가 갑자기 단호해집니다.

「질서를 어기며」라는 표현은 정해진 대열이나 질서에서 벗어난 태도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바울이 모든 사람이 사회적으로 정해진 자기 신분이나 계급에서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마땅히 감당해야 할 책임을 회피하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요구하는 조치는 상당히 강합니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할까요? 바울은 잘못한 사람들의 행동을 자세히 열거하기보다 자신이 데살로니가 교회 가운데서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합니다.

여러분 스스로 우리를 어떻게 본받아야 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질서를 어기지 않았습니다. 누구에게서도 음식을 거저 얻어먹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수고하고 애쓰며 일했습니다.데살로니가후서 3:7–8 · 두루새김

그가 제시하는 본보기는 설교나 기도, 기적과 같은 활동이 아닙니다.

자기가 먹을 음식을 위해 일했던 모습입니다.

사도행전 18:3에 따르면 바울은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생업에 종사하기도 했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어떤 작업을 얼마나 오랫동안 했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알아내기 어렵지만, 바울은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실제로 노동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고 그 까닭은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교회로부터 생활에 필요한 도움을 받는 것은 잘못된 일일까요? 바울은 바로 그 오해를 막습니다.

우리가 여러분에게 도움을 받을 권리가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이 우리를 본받도록 우리 자신이 본보기가 되려는 것이었습니다.데살로니가후서 3:9 · 두루새김

고린도전서 9:4–18에서도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물질적인 지원을 받을 권리를 인정하면서도, 복음 전파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그 권리를 사용하지 않았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 장의 가르침은 모든 신앙인이 반드시 스스로 생계를 해결해야만 한다는 단순한 원칙으로 줄여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권리가 없어서 일한 것이 아닙니다. 권리가 있었지만 공동체를 위해 그것을 사용하지 않기로 선택했습니다.

그에게 노동은 돈을 버는 수단이면서 동시에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르친 공동체 앞에서 자신이 지닌 권리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삶으로 보여 주었고, 이 본보기가 있었기 때문에 이제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들을 향해 말할 수 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빌립보서 2:5–8에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지위를 자신만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시고 자신을 낮추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셨다고 설명합니다. 그 본문과 여기 사이에 직접적인 인용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자신의 권리를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 앞에서 내려놓는다는 점에서 신학적 연결이 있습니다. 물론 바울의 생계 노동을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은 차원의 사건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일하지 않는 사람인가, 일하려 하지 않는 사람인가

데살로니가후서 3:10–12 본문 →

우리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에도, 일하려 하지 않는 사람은 먹지도 말라고 명령했습니다.데살로니가후서 3:10 · 두루새김

데살로니가후서 3장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말씀일 것입니다.

직업을 구하지 못한 사람, 병들어서 일할 수 없는 사람, 장애나 노령으로 노동하기 어려운 사람은 먹을 자격도 없다는 뜻일까요? 본문은 그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그 차이를 결정하는 표현은 「일하려 하지 않는」입니다. 원문에는 ‘원하다’, ‘의지하다’를 뜻하는 동사가 쓰였습니다. 바울은 일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일하려는 의지가 없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생계를 유지할 능력이 없어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상황과, 일할 수 있는데도 그것을 거부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는 상황은 같지 않습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두 번째 상황입니다. 이 명령이 공동체의 모든 식량 지원을 없애라는 지시라고 볼 근거도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여러분 가운데 몇몇 사람이 질서를 어기며 산다는 소식을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일은 전혀 하지 않고 남의 일에 참견한다고 합니다.데살로니가후서 3:11 · 두루새김

「일은 전혀 하지 않고」(ἐργάζομαι)와 「남의 일에 참견한다고」(περιεργάζομαι)는 원문에서 같은 동사 어근을 공유하는 말놀이입니다.

· 에르가조메누스: 일하는 사람들

· 페리에르가조메누스: 쓸데없는 일에 간섭하며 돌아다니는 사람들

자기 일에는 손을 놓고 있으면서, 남의 일에는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단순한 게으름보다 넓습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 몫의 책임을 회피할 뿐 아니라, 공동체의 자원을 이용하면서 그 공동체의 질서와 평화를 해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왜 일하지 않았을까요? 한 가지 설명은 예수님의 오심이 임박했다고 생각해 일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는 것이고, 다른 설명은 당시 그리스·로마 사회의 후원 관계에 기대어 살던 방식을 교회 안에서도 이어 갔다는 것입니다. 본문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은 이유가 아니라 이들의 행동입니다. 그들은 일하려 하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의 일에 참견했으며, 공동체가 받은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명령하며 권합니다. 조용히 일해서 스스로 마련한 음식을 먹으라는 것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3:12 · 두루새김

바울의 처방은 의외로 소박합니다. 잘못을 길게 해명하라고도, 더 많은 종교 활동을 하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조용히」는 말을 전혀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11절의 남의 일에 참견하며 공동체를 어지럽히는 태도와 대조되는 말입니다. 다른 사람의 삶을 뒤흔드는 활동을 멈추고 자기 책임을 차분히 감당하라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1–12에서도 바울은 조용히 자기 일을 하고 자신의 손으로 일하라고 이미 권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부자가 되거나 다른 사람보다 높은 지위에 올라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감당할 수 있는 책임을 감당하고, 다른 사람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개인의 자립만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삼는 가르침은 아닙니다. 갈라디아서 6:2에서는 서로의 짐을 지라고 하고, 고린도후서 8:13–15에서는 가진 사람과 부족한 사람 사이의 균형을 강조합니다. 바울은 사랑을 없애려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제대로 이루어지도록 도움을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 모두의 책임을 바로 세우려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종말을 기다리느라 일을 그만두었다는 설명은 앞 장에서 종말에 대한 혼란이 다루어졌으므로 자연스러운 추론일 수 있지만, 본문은 그렇게 명시하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사람들의 지원을 받으며 생계를 유지하거나 사회적 영향력을 얻으려 했던 사람들이 교회 안에서도 비슷하게 행동했다는 사회적 설명이 본문에 더 잘 맞는다고 보는 읽기도 있습니다. 다만 두 설명 모두 당시 상황을 재구성하려는 가설이지, 본문에서 직접 확인되는 사실은 아닙니다.

지치지 말라는 말이 왜 여기에 있는가

데살로니가후서 3:13 본문 →

그러나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좋은 일을 하다가 지쳐 포기하지 마십시오.데살로니가후서 3:13 · 두루새김

이 말씀은 앞의 명령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일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을 꾸짖은 바로 다음 문장에서, 바울은 다른 신자들에게 좋은 일을 하다가 지쳐 포기하지 말라고 합니다. 공동체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책임을 감당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들을 도와 온 사람들은 마음이 이용당한다고 느끼며 지쳤을 수 있습니다. 그런 감정이 실제로 얼마나 퍼져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바울은 바로 이 문제를 다루는 한가운데에서 이 권면을 둡니다.

책임을 회피하는 행동을 바로잡는 것과 어려운 사람을 돕는 일을 중단하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잘못된 의존을 거부하는 것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외면하는 것도 같지 않습니다.

사랑은 때때로 상대방이 요구하는 것을 거절해야 합니다. 그러나 거절한다고 해서 사랑하기를 멈춘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 긴장을 단순한 원칙 하나로 해결하지 않고, 이어지는 두 절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갈라디아서 6:9–10에서도 바울은 선한 일을 하다가 지치지 말고 기회가 있을 때 모든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고 권합니다. 두 본문을 함께 읽으면, 좋은 일을 하는 것은 분별 없이 요구하는 대로 다 들어주는 것과 같지 않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잘못을 이유로 사랑의 책임 자체를 포기해서도 안 된다는 점이 드러납니다.

멀리하되 원수로 만들지 말라

데살로니가후서 3:14–15 본문 →

누가 이 편지로 전하는 우리의 말에 따르지 않으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아 두고 그와 어울리지 마십시오. 그가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려는 것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3:14 · 두루새김

「그가 부끄러움을 느끼게」라는 표현은 현대 독자에게 다소 불편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수치심을 주는 것이 교회의 역할이라는 뜻일까요? 이 표현은 단순히 벌을 받는 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려는 뜻을 포함한다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시 공동체에서 교제는 같은 믿음을 고백하며 서로를 형제자매로 인정하는 관계의 중요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교제를 제한하는 일은 상당히 무거운 조치였습니다. 다만 구체적으로 어떤 모임과 식사까지 포함하는지는 이 구절만으로 모두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를 원수로 여기지 말고 형제자매로 대하며 타이르십시오.데살로니가후서 3:15 · 두루새김

이 구절을 놓치면 앞의 말씀은 매우 위험하게 사용될 수 있습니다.

교제를 제한하는 조치가 그 사람에 대한 적대감이나 보복으로 바뀌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여전히 형제자매로 불립니다. 바울은 그를 공동체가 싸워 이겨야 할 적이 아니라, 잘못을 깨닫고 바로잡아야 할 형제자매로 대하라고 합니다.

「타이르십시오」는 마음이나 생각을 바로잡도록 경고하고 권면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잘못을 공개적으로 비난하거나 모욕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4에서도 바울은 질서를 어기는 사람들을 타이르라고 권했고, 후서에서는 교제 제한까지 언급하지만 타이르는 관계를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잘못을 그냥 덮어 주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경계를 세웠다는 이유로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원수로 취급할 권한을 주지도 않습니다. 바울에게 잘못을 바로잡는 목적은 형제자매를 적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형제자매를 다시 형제자매답게 살아가도록 돕는 것입니다.

이 교제 제한을 어떤 상황에든 곧바로 적용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본문은 반복적으로 사도의 가르침을 거부하면서 공동체의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들을 다루고 있으며, 단순한 의견 차이나 개인적인 갈등을 이유로 사람을 밀어낼 근거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특히 「부끄러움을 느끼게」라는 말을 공개적인 망신 주기나 집단적인 괴롭힘을 정당화하는 말로 사용할 수 없습니다. 바로 15절에서 그를 원수로 여기지 말라는 제한이 붙기 때문입니다.

잘못을 지적받은 사람은 마음을 닫을 수 있고, 지적한 사람은 분노에 사로잡힐 수도 있습니다. 공동체는 서로를 돕는 사람들과 도움을 거부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로 갈라질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 어려운 상황을 해결하는 마지막 길로 기도를 선택합니다.

조금 더 깊이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18:15–17에서 가르치신 공동체 안의 잘못을 다루는 과정과 주제적인 연결이 있습니다. 그곳에서도 잘못을 바로잡으려는 권면이 공동체 관계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다만 구체적인 절차와 상황이 같지 않으므로, 데살로니가후서가 마태복음의 절차를 그대로 반복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을 위한 평화

데살로니가후서 3:16 본문 →

평화의 주님께서 몸소 언제나 모든 면에서 여러분에게 평화를 주시기를 빕니다. 주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데살로니가후서 3:16 · 두루새김

이 모든 긴장 끝에서 그는 평화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공동체의 질서를 바로잡는 것만으로 참된 평화가 완성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사도의 명령을 모두 지키면 자동으로 갈등이 사라질 것이라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평화는 주님께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가 잘못을 바로잡는 목적은 누군가를 굴복시켜 공동체를 조용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 안에서 사람들이 다시 바르게 관계를 맺도록 돕는 것입니다. 「언제나 모든 면에서」라는 말처럼, 평화는 갈등이 없을 때만이 아니라 서로를 타이르고 책임을 요구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필요합니다.

기도의 마지막에는 「여러분 모두」가 등장합니다. 바울은 몇몇 사람들을 엄하게 꾸짖고 그들과 어울리지 말라고까지 명령했지만, 주님께서 함께 계시기를 바라는 대상은 공동체 전체입니다. 그렇다고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어도 모든 일이 해결된다는 뜻은 아니며, 앞선 명령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 평화는 갈등을 덮어 두는 평화가 아니라 잘못을 바로잡으면서도 형제자매를 잃지 않으려는 평화이고, 교회가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결과물이 아니라 평화의 주님께서 주시는 선물입니다.

바울의 손으로 남긴 마지막 인사

데살로니가후서 3:17–18 본문 →

이 인사는 나 바울이 직접 손으로 씁니다. 이것이 내가 보내는 모든 편지의 표시입니다. 내 글씨는 이렇습니다.데살로니가후서 3:17 · 두루새김

편지의 마지막에 이르면 작은 장면 하나가 등장합니다.

고대의 편지는 다른 사람이 받아 적는 방식으로 작성되기도 했습니다. 로마서 16:22에서는 그 편지를 받아 적은 더디오가 자신의 이름으로 인사를 전합니다. 바울은 여기서 자신의 손으로 쓰는 인사가 자신이 보내는 모든 편지의 표시라고 말합니다.

2장에서 바울은 자신에게서 온 것처럼 여겨지는 편지 때문에 교회가 혼란에 빠지지 않도록 경고했습니다. 그래서 이 손글씨를 편지의 출처를 확인하는 표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구절이 위조 편지가 실제로 유통되었다는 사실을 증명하지는 않으며, 바울이 받는 사람들에게 직접 인사를 전하며 관계를 맺는 행위로 읽는 해석도 있습니다.

바울은 앞에서 밤낮으로 수고하며 손으로 일했던 이야기를 했고, 이제 그 손으로 편지의 마지막 인사를 남깁니다. 두 손의 장면 사이에 바울이 의도한 문학적 대응이 있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그가 전한 가르침은 그의 노동 속에서도 나타났고 이제 글로도 공동체에 전달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기를 빕니다.데살로니가후서 3:18 · 두루새김

편지는 은혜로 끝납니다.

평화의 기도에 이어 마지막 은혜의 인사에서도 「여러분 모두」가 다시 등장합니다. 바울이 공동체에 요구한 책임과 질서는 은혜의 반대편에 놓여 있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명령했고, 예수님 안에서 권면했으며, 마지막에는 예수님의 은혜를 빕니다.

자기 빵을 먹고, 형제를 형제로 대하는 삶

데살로니가후서 3:1–18 본문 →

데살로니가후서 3장은 누가 일해야 하는지, 공동체의 도움을 어디까지 베풀어야 하는지, 잘못을 반복하는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같은 매우 일상적인 문제를 다룹니다. 주님의 날이나 불법의 사람에 관한 앞 장의 이야기와 비교하면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바울은 사소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공동체에게 미래의 모든 일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지만, 오늘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이미 많은 부분 알려져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내려놓음으로써 공동체를 섬길 수 있고, 복음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불필요한 부담을 주지 않음으로써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밤낮으로 일하고, 일하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스스로 마련한 음식을 먹으라고 명령한 이유도 이것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자신이 옳다는 이유로 상대를 미워하고 밀어내는 일도 경계합니다. 무책임한 사람에게는 책임을 요구하고, 책임을 요구하는 사람에게는 사랑을 잃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 삶의 힘은 주 예수님께로부터 옵니다. 예수님의 은혜는 책임을 없애지 않고, 잘못을 무조건 눈감아 주지도 않습니다. 잘못을 분명히 지적하면서도 그 사람을 형제자매로 대할 수 있도록 하는 힘입니다.

이제 편지의 마지막 장면을 바라봅니다.

바울은 자신의 손으로 인사를 적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밤낮으로 수고했던 바로 그 사도의 손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 안에는 여전히 책임을 회피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을 바로잡아야 할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마지막 인사에서 누구를 제외하지 않습니다.

그 손으로 적는 마지막 문장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 있기를 빕니다」, 그들 모두를 향한 은혜의 기도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