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장 · 주님의 날과 불법의 사람
아직 오지 않은 날, 이미 일하는 불법
누군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이 이미 시작되었다고 말한다면 어떨까요? 그것도 성령의 계시를 받았다거나, 사도의 가르침에서 들었다거나, 바울이 보낸 편지에 그렇게 적혀 있다고 주장한다면 말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에는 바로 이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는 주장 때문에 흔들리고 불안해하고 있었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신자들은 그날을 소망하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정작 그날이 왔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기는커녕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저버리는 일이 먼저 일어나고, 자신을 하나님으로 높이는 불법의 사람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후대 독자들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 곧 불법의 사람이 누구인지, 그를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일들이 정확히 언제 일어날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런 이야기를 했을까요?
바울의 관심은 미래의 비밀을 모두 밝혀 주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거짓된 주장에 속아 믿음을 잃지 않도록 하는 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설명의 한가운데에서 뜻밖의 대조가 나타납니다. 불법의 사람도 오고, 예수 그리스도도 오십니다. 불법의 사람도 드러나고, 예수 그리스도도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그러나 둘의 오심은 전혀 다른 결말을 맞이합니다.
이 대조를 발견하면 데살로니가후서 2장은 막연한 종말의 공포를 이야기하는 장이 아니라, 무엇이 참된 권위이며 누구의 오심이 마지막까지 남는가를 밝히는 장으로 읽히기 시작합니다.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는 소문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일과 우리가 그분께 함께 모이는 일에 관해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데살로니가후서 2:1 · 두루새김
「오시는 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파루시아(παρουσία)는 누군가의 도착이나 함께 있는 상태를 가리키며, 왕이나 높은 지위에 있는 인물의 방문에도 사용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권위를 가지고 나타나신다는 의미와 잘 어울립니다.
바울이 말하는 미래에는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일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분께 속한 사람들이 그분께 모이는 일도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6–17에서 바울은 죽은 신자들과 살아 있는 신자들이 함께 주님을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제 바로잡으려는 것은 단순한 날짜에 관한 착오가 아닙니다. 교회가 기다리는 소망 자체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주장입니다.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는 주장을 듣더라도 쉽게 생각이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영에게서 받았다는 말이든, 누군가가 전하는 말이든, 우리가 보냈다는 편지든 마찬가지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2:2 · 두루새김
「이미 왔다」는 곧 올 것이라는 말과 다릅니다. 원어는 어떤 때나 상태가 이미 시작되어 현재에 이르렀음을 나타냅니다. 문제의 주장은 주님의 날이 가까웠다는 예측을 넘어, 그날이 이미 현실이 되었다는 주장입니다. 바울은 앞선 편지에서 주님의 날이 밤에 찾아오는 도둑처럼 올 것이라고 가르쳤지만(데살로니가전서 5:2), 신자들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날을 놓쳤다고 가르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세 가지 전달 경로를 언급합니다. 영적 계시나 예언을 받았다는 말, 입으로 전해지는 가르침, 기록된 편지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어떤 전달 방식도 그 자체로 진실을 보증하지 않는다고 경고합니다. 영적 권위를 내세운다고, 사도가 가르쳤다고 말한다고, 편지에 사도의 이름이 등장한다고 해서 그 내용까지 자동으로 참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더 특별한 계시를 찾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미 받은 가르침을 기억하도록 이끕니다. 종말에 대한 혼란은 단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의 마음과 삶을 실제로 뒤흔드는 문제였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는 것 자체를 문제 삼지 않습니다. 그 기다림을 이용하여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들고,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을 이미 이루어진 것처럼 선언하는 주장을 문제 삼습니다.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믿음과 그리스도의 오심에 관한 모든 주장을 쉽게 받아들이는 태도는 같은 것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는 바울 일행에게서 온 것 같다는 표현이 편지만 꾸미는지, 세 가지 모두에 걸리는지 문법적으로 갈릴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이를 「우리가 보냈다는 편지」로 풀어 옮겼습니다. 어느 쪽이든 실제로 바울을 사칭한 위조 편지가 발견되었다는 뜻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앉으려는 사람
누구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속지 마십시오. 그날이 오려면 먼저 하나님을 저버리는 일이 일어나고, 불법의 사람, 곧 멸망할 사람이 드러나야 합니다.데살로니가후서 2:3 · 두루새김
「하나님을 저버리는 일」(ἀποστασία)에 해당하는 말은 반역이나 이탈, 믿음을 저버리는 일을 나타낼 수 있습니다. 정치적인 반란을 가리킬 수도 있지만, 이 문맥에서는 하나님과 진리에서 돌아서는 종교적 반역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돌아서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 일이 불법의 사람과 어떤 순서로 연결되는지는 본문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불법의 사람은 불법으로 특징지어지는 사람이며, 멸망할 사람은 결국 멸망에 이를 사람입니다. 원문은 그를 멸망의 아들이라고 부르는데, 두루새김은 그 뜻을 「멸망할 사람」(ἀπώλεια)으로 풀었습니다. 그는 엄청난 권력을 행사할 존재로 묘사되지만, 독자는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듣기 전에 이미 그의 결말을 듣습니다.
그를 부르는 말에 멸망이 새겨져 있는 것입니다.
그자는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나 사람들이 받들어 섬기는 모든 대상에 맞서고, 그 모든 것 위에 자신을 높입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내세웁니다.데살로니가후서 2:4 · 두루새김
그는 단순히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신성하다고 여기는 모든 대상 위로 자신을 높입니다.
이 장면에는 구약의 오랜 배경이 있습니다. 다니엘 11:36은 모든 신 위로 자신을 높이며 신들의 하나님을 거슬러 놀라운 말을 하는 왕을 묘사하고, 에스겔 28:2에서는 두로의 통치자가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지만 하나님께서 그가 인간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두 본문은 인간의 권력이 자신을 신의 위치로 끌어올린다는 공통된 주제를 보여 줍니다.
바울이 묘사하는 악의 중심에는 단순한 폭력이나 법률 위반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리를 인간이 차지하려는 것입니다.
그가 앉는다는 「하나님의 성전」이 어디인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한 읽기는 예루살렘 성전 또는 장차 존재할 성전으로 봅니다. 원문의 낱말이 성전 구역 전체보다 성소 자체를 가리키는 말이라는 점에서, 실제 건물의 가장 거룩한 자리를 불법의 사람이 차지한다는 읽기입니다. 다른 읽기는 이 성전을 하나님의 백성, 곧 교회와 연결합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3:16–17에서 공동체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부르는 점이 근거입니다. 본문이 성전의 위치나 형태를 밝히지 않기 때문에 어느 해석도 단정하기 어렵지만, 두 해석 모두 하나님께 속한 자리를 침범한다는 점을 공유합니다.
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을 때 이런 이야기를 하곤 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합니까?데살로니가후서 2:5 · 두루새김
바울은 지금 처음으로 모든 내용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직접 가르쳤던 내용을 다시 떠올리게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독자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무엇을 얼마나 자세히 설명했는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알고 있었을 내용을 본문에 남은 몇 마디만으로 완벽하게 되살리는 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가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곳이 바로 다음 두 절입니다.
조금 더 깊이
다니엘서의 역사적 배경에서 오만한 왕의 모습은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박해와 성전 모독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다니엘 11장의 앞부분은 그 통치자의 행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지만, 후반부가 어디까지 그를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4의 묘사는 특히 다니엘 11:36의 표현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당시 로마 제국의 황제 숭배도 역사적 배경이 됩니다. 서기 40년 무렵 칼리굴라 황제가 예루살렘 성전에 자신의 신상을 세우려 했던 시도는 이런 일이 얼마나 실제적인 위협이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사건이 곧 바울이 예언한 일의 성취라고 단정할 근거는 없습니다.
이미 활동하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은 불법
지금 그자가 드러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막는 것은 그자가 자기에게 정해진 때가 되어서야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2:6 · 두루새김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무엇인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두고 로마 제국의 질서와 황제, 복음의 전파와 그것을 전하는 사람, 성령의 활동,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천사 등 여러 해석이 제시되어 왔습니다. 바울이 대상을 직접 밝히지 않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분명하게 말하는 것이 있습니다.
불법의 사람이 마음대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에게는 「자기에게 정해진 때」가 있고, 그때까지 그의 출현을 제한하는 무엇인가가 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역사를 주관하신다는 더 넓은 성경의 관점과 연결할 수 있지만, 바울이 여기서 막고 있는 존재를 하나님이라고 밝힌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사실 불법은 이미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 다만 지금 막고 있는 이는 물러날 때까지 계속 막을 것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2:7 · 두루새김
불법의 사람은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불법은 이미 활동하고 있습니다. 원문은 이를 불법의 비밀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비밀은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가 아니라 감추어져 있거나 아직 충분히 드러나지 않은 현실을 뜻할 수 있어서, 두루새김은 「불법은 이미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습니다」로 풀어 옮겼습니다.
바울은 주님의 날이 이미 왔다는 주장을 반박하면서도, 모든 것이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불법의 활동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인정하고, 그 활동과 불법의 사람이 최종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을 구별합니다.
이 구별을 놓치면 두 가지 잘못된 결론에 이를 수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악한 일을 볼 때마다 불법의 사람이 나타났고 주님의 날도 시작되었다고 선언할 수 있습니다. 다른 쪽에서는 불법의 활동이 현재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악은 이미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악의 활동이 존재한다는 사실과 악의 최종적인 출현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물러날 때까지」가 스스로 떠나는 것인지, 외부의 힘으로 제거되는 것인지도 이 문장만으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불확실한 내용이 잇따르다가, 8절에서 바울의 말은 갑자기 분명해집니다.
그때 그 불법의 사람이 드러날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는 입에서 나오는 숨으로 그를 죽이시고, 오실 때 모습을 드러내셔서 그를 없애실 것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2:8 · 두루새김
바울은 그자가 나타난 뒤 무엇을 얼마나 오래 하는지부터 설명하지 않습니다. 곧바로 그의 결말을 이야기합니다. 불법의 사람에 관한 이야기는 그가 등장하는 순간 이미 그의 패배를 향해 나아갑니다.
「입에서 나오는 숨」이라는 표현은 이사야 11:4와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이사야 11장은 이새의 뿌리에서 나와 하나님의 영을 받아 가난한 사람들을 의롭게 판단하고, 입의 막대기와 입술의 숨으로 악인을 심판할 통치자를 기대합니다. 데살로니가후서 2:8은 바로 이 표현을 주 예수님께 적용합니다.
불법의 사람은 신의 지위를 주장하고, 사탄의 힘으로 표징과 놀라운 일을 일으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신적 권위를 증명하기 위해 그와 경쟁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의 숨만으로 충분합니다.
이것은 대등한 두 세력이 맞서 싸우는 장면이 아닙니다. 불법의 사람의 모든 과시가 그리스도의 실제 권위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심 자체가 그의 권력을 끝내는 사건입니다.
바울은 먼저 그의 최후를 알려 준 뒤, 다시 시간을 거슬러 그가 어떻게 사람들을 속이는지 설명합니다. 독자는 이제 그가 얼마나 강력한 표징을 행한다는 말을 듣더라도 그 결말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6절은 막고 있는 것을 중성 형태로, 7절은 「막고 있는 이」라는 남성 형태로 씁니다. 이 때문에 막는 것이 어떤 제도나 권력이고 그 일을 하는 존재가 어떤 인물일 수 있다는 해석이 나왔지만, 문법적인 성의 차이만으로 정체를 결정할 수는 없습니다. 「막고 있는」에 해당하는 동사도 억제한다는 의미로 읽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붙잡고 있거나 차지한다는 의미로 읽을 가능성도 제기됩니다. 두루새김은 「드러나지 못하게 막고 있는」으로 옮겨 현재 막고 있다는 뜻을 분명하게 드러냈습니다. 이사야의 본래 문맥에서 4절은 다윗 왕조에서 나올 이상적인 통치자가 억눌린 이들을 위해 정의를 세우는 장면입니다.
진짜처럼 보이는 거짓, 거짓을 사랑하게 되는 사람들
그자는 사탄의 힘으로 와서, 사람을 속이는 온갖 능력과 표징과 놀라운 일을 보일 것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2:9 · 두루새김
1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시는 일」을 가리킨 파루시아가, 원문에서는 9절에서 불법의 사람이 「와서」에도 똑같이 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도 오십니다. 불법의 사람도 옵니다.
불법의 사람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맞서는 듯한 자신의 오심을 가지고 등장합니다. 능력과 표징과 놀라운 일은 사도행전 2:22에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행하신 일을 묘사할 때도 쓰인 표현입니다. 그의 활동은 신의 권위를 가진 것처럼 보이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본문은 그 기이한 현상들이 실제로 어떻게 일어나는지 모두 밝히지 않지만, 사탄의 힘으로 이루어지고 사람들을 속이는 데 사용된다는 것은 분명히 말합니다. 따라서 기준은 어떤 일이 얼마나 놀라운가가 아닙니다.
그 일이 무엇을 믿게 만드는가입니다.
하나님 대신 다른 존재를 높이게 하고 진리에서 떠나게 한다면, 그 현상이 아무리 놀라워도 진리를 보증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마태복음 24:24에서 거짓된 그리스도들과 거짓 예언자들이 큰 표징과 놀라운 일로 사람들을 속이려 할 것이라고 경고하셨습니다.
또 멸망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온갖 악한 속임수를 쓸 것입니다. 그들이 멸망으로 가는 것은 구원으로 이끄는 진리를 사랑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2:10 · 두루새김
바울은 그들이 진리를 몰랐기 때문이라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진리와 사랑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에게 불편한 진실보다 자신을 높여 주는 거짓을, 실제로 참인 설명보다 자신이 원하는 일을 옳다고 해 주는 설명을 더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12절의 「진리를 믿지 않고 오히려 악한 일을 좋아한」 사람들과 이 절이 서로를 설명합니다. 거짓에 속는 일이 언제나 순진함이나 지식 부족에서만 비롯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것을 모든 잘못된 믿음에 무차별적으로 적용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이 묘사하는 사람들은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이 아니라, 악한 속임수 속에서 진리를 거부하고 악한 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잘못된 길로 이끄는 힘을 보내셔서 그 거짓을 믿게 하십니다. 이는 진리를 믿지 않고 오히려 악한 일을 좋아한 사람들이 모두 심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2:11–12 · 두루새김
이 구절을 약화해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그들을 내버려 두셨다고만 말하지 않고, 적극적인 행동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순서를 살펴야 합니다. 먼저 사람들이 진리를 사랑하려 하지 않고 악한 일을 좋아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잘못된 길로 이끄는 힘을 보내십니다. 하나님이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을 거짓에 빠뜨리신다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거부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구조입니다. 로마서 1:24–28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과 바꾼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그 욕망과 뒤틀린 생각에 내어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내신다는 표현을 하나님이 그 거짓말을 만들어 내신다는 뜻으로 바꾸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속임의 활동을 사탄에게 연결하면서, 동시에 그 거짓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말합니다. 이 둘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의 모든 과정을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9절의 「사탄의 힘」과 11절의 「잘못된 길로 이끄는 힘」에는 원문에서 모두 에네르게이아(ἐνέργεια)라는 단어가 쓰입니다. 사탄과 하나님이 동일한 방식으로 행동한다는 뜻은 아니지만, 사탄의 속임과 하나님의 심판이 모두 실제로 작용하는 힘으로 묘사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바울이 보여 주는 세계에서 거짓은 해가 없는 착각이 아닙니다. 사람의 사랑과 기쁨을 사로잡고, 마침내 무엇이 참인지 판단하는 능력까지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속임이 활동하는 세상에서 신자들은 어떻게 믿음을 지킬 수 있을까요?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 거짓이라는 말이 표징과 놀라운 일 전체를 꾸미는지, 바로 앞의 놀라운 일만을 꾸미는지에 대해서는 논의가 있습니다. 또 그 현상들이 조작된 가짜인지, 실제로 일어나지만 사람들을 거짓으로 이끄는 것인지도 별개의 문제입니다.
불법의 비밀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구원에 속한 사람들
그러나 주님께 사랑받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는 여러분을 생각하며 언제나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구원받을 첫 열매로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은 성령께서 여러분을 거룩하게 하시는 일과 여러분이 진리를 믿는 일을 통해 이루어집니다.데살로니가후서 2:13 · 두루새김
멸망하는 이들에 관한 설명을 마치자마자, 「그러나」라는 말과 함께 감사가 시작됩니다.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진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사람들이 주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바울은 그들의 특별한 지식이나 분별력을 먼저 칭찬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이라고 부르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받도록 택하셨다고 말합니다. 그 구원은 「성령께서 여러분을 거룩하게 하시는 일과 여러분이 진리를 믿는 일」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구원은 미래의 심판을 피하는 일만이 아니라, 지금 삶을 거룩하게 만드는 일과 연결됩니다.
두루새김은 원문의 「영의 거룩하게 하심」을 「성령께서 여러분을 거룩하게 하시는 일」로 풀어 옮겼습니다. 사람의 영이 거룩하게 되는 상태로 이해할 가능성도 있지만, 하나님이 구원을 이루시는 분으로 등장한다는 점에서 성령의 활동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앞의 사람들이 진리를 거부한 것과 달리, 데살로니가 교회는 진리를 믿은 사람들입니다.
「첫 열매」에는 사본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이 본문이 따른 사본은 첫 열매라고 읽어, 데살로니가 교회를 뒤따를 수확을 떠올리게 하는 시작으로 그립니다. 다른 사본은 「처음부터」라고 읽어, 하나님이 그들을 선택하신 시점을 강조합니다. 어느 읽기를 따르든 데살로니가 교회의 구원은 불법의 사람이나 거짓된 표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행하신 구원의 일에 근거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전한 복음을 통해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여러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시려는 것입니다.데살로니가후서 2:14 · 두루새김
앞에서는 영적 계시를 주장하는 말이나 사도에게서 왔다는 편지가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습니다. 여기서는 바울 일행이 실제로 전한 복음을 통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들을 구원으로 부른 것은 놀라운 표징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멸망하지 않는 데서 멈추지 않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불법의 사람은 스스로를 높여 하나님께 속한 자리를 차지하려 했습니다. 신자들은 하나님이 부르시고 구원하심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됩니다.
한쪽은 빼앗으려 하고, 다른 한쪽은 선물로 받습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 여러분, 굳게 서십시오. 우리가 말로든 편지로든 전해 주어 여러분이 배운 가르침을 굳게 붙드십시오.데살로니가후서 2:15 · 두루새김
2절에서 말과 편지는 거짓된 주장이 퍼지는 통로였습니다. 15절에서는 믿음을 지키는 통로입니다. 차이는 전달 방식이 아니라, 무엇이 가르쳐졌으며 그것이 실제 사도의 가르침과 일치하는가입니다.
「전해 주어 여러분이 배운 가르침」은 전통으로 옮길 수도 있는 말이지만, 이곳에서는 오래된 관습이나 형식이 아니라 바울 일행이 신자들에게 가르쳐 전달한 내용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이 권면은 오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종교적 관습을 지키라는 말이 아닙니다. 복음을 받아들일 때 실제로 배웠던 사도의 가르침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요청입니다.
바울은 새로운 비밀을 알아내라고도, 더 강력한 계시를 찾으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이미 받은 복음을 굳게 붙들라고 합니다. 불법의 사람의 정체를 모두 밝혀야만 신앙을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 이야기한 미래의 사건들은 신자들의 마음을 붙들어 두기 위한 것이지, 그들의 관심을 끝없이 미래의 비밀로 끌고 가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에서 가장 먼저 복음을 받은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사도행전 16–17장의 선교 순서에서는 빌립보가 앞섭니다. 따라서 「첫 열매」를 마케도니아에서 가장 먼저 믿게 된 사람들이라는 정확한 시간상의 지위로 해석하기는 어렵습니다. 두 읽기 가운데 어느 것이 원래의 문장인지는 사본을 비교하는 연구에서 논의가 계속되는 지점입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굳게 하시는 분
이 장은 기도로 끝납니다.
2절에서 바울은 그들이 쉽게 흔들리거나 불안해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마지막 절에서는 그들의 마음이 위로받고 굳세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런데 그들이 스스로 마음을 굳게 만들라고 명령하는 것으로 마치지 않습니다.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은혜로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주셨습니다.데살로니가후서 2:16 · 두루새김
바울은 그들이 강해져야 한다고 말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무엇을 주셨는지를 이야기합니다. 사랑도, 위로도, 소망도 신자들이 만들어 내야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베푸신 것입니다. 불법의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내거나 주님의 날을 계산한다고 불안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소망은 아직 완성되지 않은 미래를 향하지만, 그 위로는 현재의 삶 가운데 이미 주어졌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아버지 하나님께서 몸소 여러분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온갖 좋은 일과 말을 하도록 굳세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데살로니가후서 2:17 · 두루새김
이 장에는 하나님을 저버리는 일, 하나님을 자칭하는 사람, 사탄의 표징,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오심 같은 거대한 사건들이 등장했습니다.
그런데 그 장의 마지막은 좋은 일과 말입니다.
2절에서는 사람을 흔드는 잘못된 말이, 15절에서는 굳게 붙들어야 할 사도의 가르침이, 17절에서는 신자들 자신의 좋은 말이 등장합니다. 이 장에서 말은 사람을 속이고 흔들 수도 있고, 진리를 전달하고 서로를 굳게 세울 수도 있습니다. 진리를 믿는 사람은 진리를 말하는 삶으로 부름받습니다.
드러나는 두 존재, 서로 다른 두 결말
데살로니가후서 2장의 중심에는 두 번의 드러남이 있습니다. 불법의 사람은 하나님이 아님에도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며 표징으로 사람들을 속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권위를 빼앗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이 나타나실 때 이미 그분께 속한 참된 권위가 드러나고, 그 오심으로 모든 거짓된 권력이 끝납니다. 신자들의 미래가 보장되는 근거도 악의 정체를 꿰뚫어 보는 특별한 지식이 아니라, 복음을 통해 그들을 부르신 하나님과 그들이 믿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도시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울의 편지를 읽고 나서도 불법의 사람이 정확히 누구인지, 그를 막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든 것을 알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다리는 분은 자신이 하나님이라고 주장하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은 불법의 모든 과시를 자신의 오심으로 끝내실 분이십니다.
그런데 바울은 마지막 문장에서 굳세게 서라고 다시 명령하지 않습니다. 그들을 사랑하시고 은혜로 위로와 소망을 주신 하나님께서 몸소 그들의 마음을 굳세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한때 두려운 소문 때문에 흔들렸던 그 마음이 이제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를, 그리고 내일도 서로에게 좋은 말을 건네고 좋은 일을 할 수 있도록 굳게 세워지기를.
바울의 마지막 기도는 바로 그들의 마음과 일상의 말과 행동 위에 머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