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풀어 읽기 · 4장
이 장의 자리 · 4장 · 달려갈 길의 끝
겨울이 오기 전에
디모데후서의 마지막 장에는 뜻밖의 두 문장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하나는 「나는 훌륭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경주를 다 마쳤습니다. 믿음을 지켰습니다」라는 장엄한 고백입니다. 다른 하나는 「속히 나에게 오도록 서두르십시오」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부탁입니다.
첫 번째 문장만 읽으면 바울은 모든 일을 마친 사람처럼 보입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완수했고, 이제 의로운 심판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더는 누구에게도 의지할 필요가 없는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그런데 불과 두 절 뒤에서 그는 디모데를 찾습니다.
누가만 자기 곁에 있다고 말하고, 마가도 데려오라고 부탁합니다. 드로아에 두고 온 겉옷과 책과 양피지를 가져오라고 하고, 편지의 끝부분에서 「겨울이 오기 전에 서둘러 오십시오」라고 다시 한번 부탁합니다.
왜 이처럼 위대한 신앙 고백 뒤에 일상적인 부탁들이 이어지는 것일까요? 바울이 완벽한 담대함에서 잠시 인간적인 연약함으로 내려온 것일까요? 아니면 이 두 모습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온전하게 보여 주는 것일까요?
디모데후서 4장을 깊이 읽으려면 이 두 모습을 분리하지 않아야 합니다.
예수님께 자신의 삶을 맡길 수 있는 사람도 다른 사람의 방문을 기다릴 수 있습니다. 죽음을 앞두고 소망을 고백하는 사람도 추위를 막을 겉옷을 필요로 합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 나라에 이르게 하실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그 확신 때문에 디모데가 찾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을 감추지 않습니다.
4장의 전반부에는 하나님과 예수님 앞에서 이루어지는 엄숙한 명령이 있습니다. 디모데는 말씀을 선포하고, 고난을 받으며, 자기에게 맡겨진 섬김을 남김없이 해내야 합니다. 그다음 바울은 싸움을 싸웠고, 경주를 마쳤으며, 믿음을 지켰다고 자신의 삶을 돌아봅니다.
그러나 편지는 그 고백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떠난 사람도 있고, 곁에 남은 사람도 있으며, 해를 끼친 사람도 있습니다. 바울은 법정에서 아무도 자신의 곁에 서 주지 않았다고 회상하지만, 바로 그때 예수님께서 곁에 서 주셨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다시 사람들에게 문안하고 디모데에게 겨울이 오기 전에 와 달라고 부탁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사라진 뒤에도 복음이 계속 선포되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 사명을 이어 갈 디모데를 단순히 자신의 후계자로만 대하지 않습니다.
그를 보고 싶어 합니다.
이 장에서 복음의 사명과 인간적인 사랑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바울은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안의 소망을 안다는 이유로 살아 있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가볍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그 긴장이 디모데후서의 마지막 장을 특별하게 만듭니다.
누구 앞에서 말씀을 전하는가
디모데의 청중보다 먼저 등장하는 심판자
4장은 매우 엄숙한 명령으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과,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을 장차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분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나라를 걸고 엄히 명합니다:디모데후서 4:1 · 본디새김
앞 장의 마지막에서 바울은 성경이 하나님의 사람을 모든 선한 일을 위해 준비시킨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 준비된 사람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밝힙니다.
그런데 바울은 곧바로 말씀을 선포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먼저 디모데가 하나님과,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을 장차 심판하실」 예수님 앞에 서 있음을 일깨웁니다.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는 동안 디모데는 사람들의 반응을 마주할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환영하고, 어떤 사람은 거부할 것입니다. 그의 가르침을 좋게 평가하는 사람도 있고, 비판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평가보다 더 근본적인 판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판단입니다.
본문이 강조하는 것은 말씀을 전하는 사람 자신도 그 심판자 앞에서 자기 일을 감당한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디모데는 청중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만 말씀을 전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권위를 내세워 청중을 마음대로 지배할 수도 없습니다. 그 자신도 예수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여기에 「그분의 나타나심과 그분의 나라」를 덧붙입니다. 「나타나심」은 예수님께서 장차 나타나셔서 심판과 통치의 권위를 드러내시는 일을 가리킵니다. 이 표현은 8절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바울은 자신뿐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해 온 모든 이」가 의의 관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1절에서 예수님의 나타나심은 엄숙한 명령의 근거이고, 8절에서는 신자들이 사랑하며 기다리는 소망입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날은 인간의 삶이 판단받는 날이면서, 예수님을 사랑해 온 사람들에게는 기다리던 예수님을 만나는 소망의 날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사역을 바로 이 두 현실 사이에 놓습니다.
예수님의 심판은 사역을 가볍게 할 수 없게 만들고, 예수님의 나타나심에 대한 소망은 사역이 헛되지 않음을 확신하게 합니다.
「때가 맞든 맞지 않든」
2절에는 짧고 강한 명령들이 연이어 나옵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때가 맞든 맞지 않든 나서십시오. 잘못을 짚으십시오. 꾸짖으십시오. 권하십시오. 온갖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그리하십시오.디모데후서 4:2 · 본디새김
「선포하십시오」(κηρύσσω)는 소식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행위와 관련된 동사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이 좋아하는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에게 맡겨진 말씀을 선포하라고 합니다.
「때가 맞든 맞지 않든」은 흔히 언제 어디서나 쉬지 않고 말을 해야 한다는 명령으로 이해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원문은 적절한 때와 적절하지 않은 때를 대조합니다. 디모데는 사람들이 환영할 때만 말씀을 전해서는 안 되며, 반응이 좋지 않거나 상황이 불리하더라도 자기 사명을 소홀히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상대방의 상황을 무시하고 무조건 말을 쏟아 놓으라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바로 다음에 그 일을 「온갖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하라고 명령하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때가 불리하다고 사명을 포기해서는 안 되지만, 사명이 중요하다는 이유로 사람을 거칠게 대해서도 안 됩니다.
잘못을 짚고, 꾸짖고, 권하는 일이 함께 등장합니다. 어떤 때에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분명히 밝혀야 합니다. 어떤 때에는 그 잘못의 심각성을 엄중하게 말해야 합니다. 또 어떤 때에는 낙심한 사람이 올바른 길을 계속 걸어가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를 하나로 묶는 말이 「오래 참음과 가르침」입니다. 바울은 꾸짖는 것만 잘하는 교사도, 사람들의 기분을 좋게 하는 말만 하는 교사도 원하지 않습니다.
참된 말씀을 가르치면서 사람을 오래 참을 줄 아는 교사를 원합니다.
사람들이 가르침을 선택하는 기준
그렇다면 왜 이처럼 엄숙하게 명령해야 할까요? 3절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사람들이 건전한 가르침을 참아 내지 못할 때가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그때 그들은 귀가 가려워 제 욕망을 따라, 자기들을 위해 선생들을 쌓아 놓듯 잔뜩 모을 것입니다.디모데후서 4:3 · 본디새김
바울은 가르치는 사람들만이 아니라 가르침을 듣는 사람들의 태도도 문제 삼습니다. 그들은 선생이 없어서 잘못된 가르침에 빠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선생들을 잔뜩 모읍니다. 그런데 「제 욕망을 따라」 고릅니다.
「귀가 가려워」라는 표현은 듣고 싶은 말을 계속 듣고자 하는 욕구를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다만 이 표현을 새로운 지식을 배우려는 모든 호기심에 대한 비판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진리를 판단 기준으로 삼지 않고 자기 욕망에 맞는 가르침을 찾는 태도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는 교사, 자신의 욕망을 정당화해 주는 교사,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결론만 반복하는 교사를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가르침의 목적이 뒤집힙니다. 원래는 진리가 사람을 가르치고 바로잡아야 하는데, 이제는 사람의 욕망이 어떤 가르침을 받아들일지 결정합니다.
진리가 자신을 바꾸도록 허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바꾸지 않아도 되는 진리를 찾아다니는 것입니다.
4절에서는 이 선택의 결과가 드러납니다.
그리고 진리에서는 귀를 돌리고, 꾸며 낸 이야기 쪽으로 돌아서게 될 것입니다.디모데후서 4:4 · 본디새김
바울은 단순히 잘못된 정보를 듣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진리에서 멀어지고 다른 쪽으로 방향을 바꾼다고 합니다. 「꾸며 낸 이야기」는 신뢰할 만한 복음의 진리와 대조되는 근거 없는 이야기를 가리키며, 모든 비유나 문학적 이야기를 거부하는 말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이야기가 진리의 자리를 대신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상황에서도 말씀을 선포하라고 명령합니다. 사람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과 실제로 들어야 할 것이 서로 다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5절에서는 앞 장에서도 중요했던 전환의 표현이 등장합니다.
그러나 그대는 모든 일에 늘 정신을 차리십시오. 고난을 받으십시오. 복음 전하는 사람이 할 일을 하십시오. 그대의 섬김을 남김없이 해내십시오.디모데후서 4:5 · 본디새김
사람들은 자기 욕망에 맞는 선생들을 모을 것입니다.
그러나 디모데는 그 욕망을 따라 움직여서는 안 됩니다.
정신을 차린다는 것은 무엇보다 판단력을 잃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의 칭찬이나 비난, 자기 자신의 감정과 욕망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분별해야 합니다. 고난을 받으라는 말도 고난을 일부러 찾아다니라는 명령이 아니라, 복음을 충실하게 전하다가 고난을 만나더라도 맡은 일을 버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라거나 자신의 명성을 이어받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고, 자기에게 맡겨진 섬김을 온전히 감당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남김없이 해내십시오」라는 표현은 17절에서 다시 나타납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힘을 주신 이유를 「나를 통하여 선포가 남김없이 이루어지고 모든 민족이 듣기 위함」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원문에서도 두 절은 충분히 수행하거나 완수한다는 뜻의 같은 동사를 씁니다.
바울은 자신이 무엇을 이루었는지 자랑하려고 디모데에게 명령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끝까지 감당해 온 사람이 이제 디모데에게도 그 일을 충실하게 해내라고 당부합니다. 그리고 왜 그 당부가 이토록 절박한지 밝힙니다.
바울 자신에게 떠날 때가 닥쳤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미 제물로 부어지고 있습니다」 — 떠날 준비를 하는 사람
자신을 제물로 묘사하는 이유
나는 이미 제물로 부어지고 있으며, 내가 떠날 때가 닥쳤기 때문입니다.디모데후서 4:6 · 본디새김
이 문장은 5절의 명령에 대한 이유입니다. 디모데가 자기에게 맡겨진 섬김을 남김없이 해내야 하는 것은 바울이 더는 그 일을 지금까지와 같은 방식으로 계속할 수 없으리라고 예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가오는 죽음을 「제물로 부어지고」 있다고 표현합니다. 고대의 제사에서는 포도주와 같은 액체를 제물과 함께 부어 드리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생명이 그렇게 하나님께 드려지고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빌립보서 2:17에서도 바울은 빌립보 신자들의 믿음과 섬김이라는 제사 위에 자신이 제물로 부어지더라도 기뻐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디모데후서에서는 그 비유가 더욱 절박해집니다. 바울은 자신이 이미 부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을 바울의 죽음 자체가 사람들의 죄를 속죄하는 제사가 된다는 뜻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신약은 죄를 위한 결정적인 희생을 예수님의 죽음에서 찾습니다(히브리서 9:26–28; 10:10–14). 바울이 자기 삶을 제물에 비유하는 것은 예수님의 구원 사역에 무엇을 보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예수님께 속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려 온 사역의 마지막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로마의 권력이 그를 구금하고 그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 삶의 궁극적인 의미를 그 권력의 판결에 맡기지 않습니다.
그의 삶은 하나님께 드려진 삶입니다.
떠난다는 말에 담긴 뜻
바울은 이어서 「내가 떠날 때가 닥쳤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합니다. 「떠남」(ἀνάλυσις)은 풀거나 떠나는 일을 가리키는 낱말로, 이 문맥에서는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합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죽음이 자신에 대한 마지막 진술이 될 것처럼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떠난다고 말합니다.
디모데후서 4장의 관심은 죽음 이후에 무슨 장면이 펼쳐질지를 상세하게 묘사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바울이 자신에게 다가온 시간을 어떻게 맞이하는가에 있습니다.
2절에서 디모데는 「나서야」 하고, 6절에서 바울에게는 떠날 때가 「닥쳤습니다」. 디모데에게는 맡은 일을 계속 감당해야 할 시간이 있고, 바울에게는 자신의 사역을 마무리할 때가 다가왔습니다. 바울은 그 차이를 알기 때문에 디모데에게 더욱 엄숙하게 당부합니다.
세 문장으로 돌아본 삶
7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삶을 세 문장으로 요약합니다.
나는 훌륭한 싸움을 싸웠습니다. 경주를 다 마쳤습니다. 믿음을 지켰습니다.디모데후서 4:7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일을 이루었는지 나열하지 않습니다. 그가 세운 교회의 숫자도, 회심시킨 사람의 수도, 여행한 거리도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는 무엇을 끝까지 감당했는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훌륭한 싸움을 싸웠다는 것입니다. 「싸움」은 투쟁이나 경기를 나타내는 말이어서, 반드시 전쟁터에서 적을 죽이는 싸움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앞에서 바울이 경기하는 사람의 비유를 사용했던 것을 기억하면, 충실하게 경기를 치른 사람의 모습도 함께 떠올릴 수 있습니다.
둘째는 경주를 다 마쳤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보다 빨리 달렸다는 뜻이 아니라 끝까지 달렸다는 뜻입니다.
셋째는 믿음을 지켰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믿음」은 바울이 예수님을 향해 지닌 신뢰를 가리킬 수 있고, 그에게 맡겨진 믿음의 내용이나 예수님을 향한 충실함을 포함하는 표현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한 의미만을 배타적으로 선택하기보다는, 예수님과 복음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않았다는 고백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바울은 한 번도 흔들리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무런 실수도 하지 않았다고, 모든 계획을 성공적으로 이루었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길을 끝까지 걸어왔다고 말합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보다 얼마나 앞서갔는지가 아니라, 예수님께서 맡기신 길을 끝까지 걸었는가입니다.
이제 그 경주의 끝에서 바울이 바라보는 것이 등장합니다. 의의 관입니다.
조금 더 깊이
「제물로 부어지고」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스펜도마이는 제사에서 액체를 부어 드리는 행위와 관련되며, 현재형으로 쓰여 이 일을 지금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표현합니다. 「떠남」(아날뤼시스)을 고대의 용법과 연결하여 닻을 올리고 떠나는 배나 묶어 둔 천막을 걷는 모습을 떠올리는 해석도 있지만, 바울이 어느 하나의 구체적인 이미지를 의도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표현은 빌립보서 1:23에서 예수님과 함께하기 위해 떠나는 것을 바란다고 한 말과도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두 본문의 그리스어 단어 형태는 다르지만, 죽음을 단순한 소멸이 아닌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한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또 2절의 「나서십시오」와 6절의 「닥쳤기」에는 같은 동사 에피스테미가 쓰였습니다. 형태와 문맥상 의미는 다르지만, 디모데는 나서야 하고 바울에게는 떠날 때가 이미 닥쳐 있다는 대비를 읽을 수 있습니다. 7절의 세 동사는 모두 완료형으로, 싸웠고 마쳤고 지켰다는 사실을 현재의 자리에서 돌아보는 표현입니다.
의의 관을 주시는 심판자
이제 남은 것은 나를 위해 간직되어 있는 의의 관입니다. 그날에 의로운 심판자이신 주님께서 그것을 나에게만이 아니라 그분의 나타나심을 사랑해 온 모든 이에게도 갚아 주실 것입니다.디모데후서 4:8 · 본디새김
이 구절에서는 두 세계가 겹쳐집니다. 하나는 바울이 실제로 경험하고 있는 로마의 재판이고, 다른 하나는 예수님께서 심판자로 나타나실 날입니다. 바울은 현재 인간의 법정에서 심판받는 사람이지만, 자신의 삶에 대한 최종적인 판단이 그 법정에서 끝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에게는 또 다른 심판자가 있습니다. 「의로운 심판자이신 주님」입니다.
「의의 관」이 어떤 의미인지는 간단하지 않습니다. 의로움이라는 성격을 지닌 관으로,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것과 관련된 상으로, 또는 의로운 삶에 대한 합당한 보상을 강조하는 표현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맥상 확실한 것은 그 관을 수여하시는 분이 의로운 심판자라는 사실입니다. 지금 바울을 심판하는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평가하든, 예수님의 판단은 의롭습니다.
「갚아 주실」(ἀποδίδωμι)은 마땅히 돌려줄 것을 돌려준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입니다. 이 표현이 사용되었다고 해서 바울의 구원이 자신의 공로로 구매한 보상이라는 결론을 내려서는 안 됩니다. 그는 이 편지에서 구원이 하나님의 은혜에 근거한다는 사실을 이미 밝혔습니다. 여기서는 그 은혜로 부름받은 사람의 충실함을 하나님이 의롭게 판단하신다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그런데 바울은 즉시 자기 자신에게서 시선을 넓힙니다. 자신의 사도직 때문에 자기에게만 특별한 관이 주어진다고 말하지 않고,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사랑해 온 모든 이에게도 주어진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날을 단지 견뎌야 할 사건으로만 말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대상으로 말합니다.
그리고 바로 이어서 「데마가 이 시대를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떠났다고 말합니다. 한쪽은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사랑하고, 다른 한쪽은 이 시대를 사랑합니다. 이 짧은 대비는 바울의 고난과 데마의 이탈을 하나의 질문 아래 놓습니다.
사람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것을 향해 삶의 방향을 정합니다.
사랑하는 것이 달라지면 함께 걷는 길도 달라진다
데마는 왜 떠났는가
속히 나에게 오도록 서두르십시오. 데마가 이 시대를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기 때문입니다.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습니다.디모데후서 4:9–10 · 본디새김
8절과 9절 사이에는 거의 설명할 수 없을 만큼 큰 정서적 변화가 있습니다. 바울은 방금 의의 관과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말했는데, 곧바로 디모데에게 빨리 와 달라고 부탁하고 그 이유로 데마가 자신을 버리고 떠났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데마는 완전히 낯선 인물이 아닙니다. 골로새서 4:14에서는 누가와 함께 문안하는 사람으로, 빌레몬서 1:24에서는 바울의 동역자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언급됩니다. 그랬던 사람이 이제 바울을 떠났습니다.
바울은 그 이유를 「이 시대를 사랑하여」라고 설명합니다. 본문은 데마가 어떤 행동이나 욕망 때문에 떠났는지 상세히 말하지 않으므로, 이를 돈이나 쾌락을 추구했기 때문이라고 구체화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현재의 시대에 속한 삶과 가치에 마음을 둔 것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바울은 데마가 그리스도 신앙 자체를 완전히 버렸는지까지 명시하지 않으므로, 그의 최종적인 신앙 상태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바울과 함께 고난을 감당하는 자리에서는 물러났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나를 버리고」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레스게와 디도에게는 같은 표현을 쓰지 않습니다.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다고 할 뿐이며 그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기 곁에 없는 모든 사람을 배신자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과 관계를 저버렸다는 사실을 구분합니다.
누가만 남았고, 마가를 불러 달라고 한다
누가만 나와 함께 있습니다. 마가를 데리고 함께 오십시오. 그가 섬김을 위해 나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디모데후서 4:11 · 본디새김
「누가만」이라는 말은 바울에게 현재 누가 외에는 아무런 인간관계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같은 장 마지막에는 여러 사람이 디모데에게 문안합니다. 누가는 바울 곁에 남아 있는 동역자로 특별히 언급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5:37–39에서는 바울과 바나바가 요한이라고도 하는 마가를 다시 데리고 갈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갈라집니다. 마가는 이전 선교 여행에서 두 사람을 떠난 적이 있었고, 바울은 그를 다시 데리고 가는 것에 반대했으며,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서로 다른 길을 갔습니다.
디모데후서의 마가를 그 인물과 동일하게 보는 전통적인 이해를 따르면, 한때 함께 일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이제는 바울에게 「섬김을 위해 나에게 쓸모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가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회복되었는지는 성경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이 편지에서 바울이 마가를 필요로 하고, 그를 불러 달라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데마는 바울과 함께 일했던 사람이지만 이제 그를 떠났습니다. 마가는 과거에 바울과 갈등을 겪었던 사람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제 바울이 다시 함께 일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한순간의 사건만으로 영원히 결정되지 않습니다.
이 구절을 모든 깨어진 관계가 반드시 회복된다는 약속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갈등이 한 사람의 모든 가능성을 영원히 규정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장면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떠나간 사람의 이름을 기록하면서도, 다시 함께할 사람의 이름을 부릅니다.
두기고는 왜 에베소로 갔는가
두기고는 내가 에베소로 보냈습니다.디모데후서 4:12 · 본디새김
디모데전서 1:3에 따르면 바울은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머물며 잘못된 가르침을 막도록 요청한 바 있습니다. 그렇다면 두기고는 디모데가 바울에게 올 수 있도록 에베소에서 그의 일을 대신하기 위해 파송된 것일까요? 그렇게 추론할 수는 있지만, 12절 자체는 두기고를 보낸 목적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사람들을 자기 곁에 무조건 붙잡아 두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누군가는 다른 지역으로 보내고, 누군가는 자기 곁으로 오라고 요청합니다. 자신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여기면서도 여전히 복음의 사역을 생각하며 사람들의 이동과 역할을 살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에서 디모데에게 부탁합니다. 어서 와 달라고.
겉옷과 책과 양피지 — 믿음은 인간의 필요를 지우지 않는다
내가 드로아에서 가보에게 두고 온 겉옷을, 또 책도, 무엇보다 양피지도 올 때 가져오십시오.디모데후서 4:13 · 본디새김
바울은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말하고, 의의 관을 바라보며, 자신이 떠날 때가 닥쳤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부탁하는 것은 겉옷과 책과 양피지입니다.
이 세 물건은 바울이 여전히 살아 있는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왜 겉옷이 필요한가
바울은 자신의 몸을 보호할 옷이 필요했습니다. 21절에서 겨울이 오기 전에 디모데가 도착하기를 바라는 것을 고려하면, 추위와 관련된 필요가 있었을 가능성도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정확히 어떤 감옥에 있었는지, 어느 계절에 이 편지를 쓰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겉옷을 원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늘 나라에 이르게 하실 것을 확신했지만, 그 확신 때문에 지금 자신의 몸을 돌보는 일을 불필요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영광을 바라보면서도 현재의 몸을 가진 사람으로 살고 있었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인간의 물질적 필요를 지워 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보다 더 자연스럽게 보여 주는 장면도 드뭅니다.
책과 양피지에는 무엇이 들어 있었을까
바울은 책도 부탁하고, 특별히 양피지를 가져오라고 합니다. 둘이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바울이 왜 양피지를 특별히 강조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양피지에 성경 본문이 기록되어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도, 바울 자신의 기록이나 편지였을 가능성을 제시하는 견해도 있지만, 본문은 그 내용이 무엇인지 밝히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바울이 사역을 마무리하는 시점에도 그 기록물들을 필요로 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자기 혼자 그것들을 가져올 수 없습니다. 디모데가 와서, 드로아에 있는 가보에게 맡겨 둔 물건을 찾아, 바울에게 가져다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깊은 확신을 지닌 사람의 삶도 다른 사람들의 구체적인 도움에 의존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성숙함은 모든 것을 혼자 해낼 수 있는 상태를 뜻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자신에게 필요한 것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부탁할 수 있는 것도 성숙함의 일부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위대한 신앙 고백을 지키기 위해 인간적인 필요를 감추지 않습니다.
그는 디모데에게 겉옷을 가져와 달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 요청은 조금도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조금 더 깊이
「겉옷」에 해당하는 파이로네스는 일반적으로 여행할 때 사용하는 두꺼운 겉옷으로 이해되어 왔지만, 책이나 물품을 담는 보관 용기와 관련된 표현으로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책」에 해당하는 비블리아는 당시의 두루마리나 기록물을 가리킬 수 있고, 「양피지」에 해당하는 멤브라나이는 동물 가죽으로 만든 기록 재료를 뜻하는 라틴어 계통의 차용어입니다. 그래서 책은 파피루스에 기록된 문서이고 양피지는 다른 종류의 기록물이었다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양피지가 특별히 어떤 성경 사본이었다거나 바울의 미완성 원고였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해를 끼친 사람에게는 갚으심을, 떠난 사람에게는 용서를
구리 세공인 알렉산더
14절에서 바울은 갑자기 경고합니다.
구리 세공인 알렉산더가 나에게 많은 해를 끼쳤습니다. 주님께서 그가 한 일대로 그에게 갚으실 것입니다.디모데후서 4:14 · 본디새김
알렉산더가 구체적으로 어떤 해를 끼쳤는지는 설명되지 않습니다. 15절에서 그가 바울 일행의 말에 몹시 맞섰다고 하므로 복음의 가르침에 대한 강한 반대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지만, 그가 바울을 고발했는지, 재판에 직접 관여했는지, 다른 방식으로 해를 끼쳤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갚으실 것입니다」는 8절에서 의의 관을 갚아 주실 것이라고 할 때와 같은 동사입니다. 8절에서는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의의 관을 갚으시고, 14절에서는 알렉산더에게 그가 한 일대로 갚으십니다. 두 사람 모두 예수님의 판단 아래 있습니다. 한 사람의 충실함도, 다른 사람의 악한 행동도 예수님 앞에서 의미 없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손으로 알렉산더에게 보복하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갚으시는 일을 예수님께 맡깁니다. 이것은 로마서 12:19에서 바울이 신자들에게 직접 복수하지 말라고 권하면서 하나님의 갚으심을 말하는 것과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해가 실제적이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그리고 그 일을 예수님께 맡깁니다.
조심하라는 경고와 용서를 비는 기도
그대도 그를 조심하십시오. 그가 우리의 말에 몹시 맞섰기 때문입니다.디모데후서 4:15 · 본디새김
바울은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니 아무런 경계도 하지 말라고 하지 않습니다. 디모데에게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조심하라고 구체적인 위험을 알려 줍니다. 이것은 앞서 나온 온유함에 대한 권면과 모순되지 않습니다.
온유함은 악을 알아보지 못하는 순진함이 아닙니다. 악을 분별하면서도 그 악에 똑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그런데 16절로 넘어가면 다른 장면이 나옵니다.
나의 첫 변론 때에 아무도 내 곁에 서 주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모두 나를 버렸습니다. 나를 버린 일이 그들의 탓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빕니다.디모데후서 4:16 · 본디새김
알렉산더에 대해서는 예수님께서 그가 한 일대로 갚으실 것이라고 말했지만, 자신을 버린 사람들을 위해서는 그 일이 그들의 탓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기도합니다.
왜 반응이 다릅니까?
본문은 바울이 각 사람의 동기를 얼마나 알고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알렉산더는 고의적인 악인이고 다른 사람들은 단지 두려워한 사람들이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알렉산더는 바울 일행의 말에 적극적으로 맞섰고, 첫 변론 때 바울을 떠난 사람들은 그의 곁에 서 주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적극적으로 해를 끼친 일과 위험한 상황에서 도움을 주지 못한 일을 구별하여 기록합니다.
아무도 곁에 서 주지 않았던 법정
「첫 변론」이라는 표현은 법적 절차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 변론이 정확히 어느 재판의 어떤 단계였는지, 로마 황제 앞에서 이루어졌는지, 누가 재판을 주관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바울이 자기 입장을 변호해야 할 상황에서 인간적인 지원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훌륭한 싸움을 싸웠고 믿음을 지켰다는 말은 사람들이 모두 그를 지지해 주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누구도 곁에 서 주지 않았던 상황에서도 그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버림받았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자신의 상처를 없는 일로 만들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다음에는 그 사람들의 탓으로 돌아가지 않기를 빕니다.
이 기도는 사도행전 7:60에서 스데반이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위해 죄를 돌리지 말아 달라고 기도한 장면과 주제적으로 연결되며, 누가복음 23:34에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시는 전승과도 연결해 읽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악을 악이라고 말하면서도, 자신의 곁에 서 주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 용서를 구합니다.
용서는 일어난 일을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이 최종적으로 어떤 판단을 받을지를 자신이 독점하지 않는 것입니다.
바울은 알렉산더의 행동에 대해 경고하고, 자신을 버린 사람들을 위해서는 용서를 빕니다. 두 경우 모두 마지막 판단을 자신이 차지하지 않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맡깁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이 그를 「구리 세공인」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을 구별하기 위한 직업 표시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직업 이상의 상세한 신상을 알 수는 없습니다. 디모데전서 1:20이나 사도행전 19:33에도 알렉산더라는 이름이 등장하지만, 당시 흔히 사용되던 이름이므로 동일 인물이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또 누가복음 23:34의 해당 기도문은 일부 고대 사본에서 빠져 있어 본문비평상의 논의가 있다는 점은 구별해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서 주셨고」
아무도 없었던 자리에 서 계신 분
17절은 앞 절의 첫 문장을 정면으로 뒤집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곁에 서 주셨고 나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이는 나를 통하여 선포가 남김없이 이루어지고 모든 민족이 듣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디모데후서 4:17 · 본디새김
16절의 「내 곁에 서 주지 않았습니다」(παραγίνομαι)와 17절의 「내 곁에 서 주셨고」(παρίστημι)는 원문에서도 서로 관련된 동사 표현으로, 사람들의 부재와 예수님의 임재를 맞세웁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힘을 주셨습니다. 바울이 절망하지 않도록 위로하시는 일도 포함될 수 있지만, 본문이 직접 제시하는 그 힘의 목적은 복음의 선포입니다. 법정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일을 통해 복음을 증언할 기회가 있었음을 떠올리게 하는 문장입니다.
사도행전 26장에서도 바울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면서 예수님과 부활에 대해 증언합니다. 4:17이 그 사건을 직접 가리키는 것은 아니지만, 법적 변론이 복음 선포의 자리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결됩니다. 다만 「모든 민족이 듣기 위함」을 그 법정의 특정한 청중이 인류 전체를 대표했다는 식으로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바울의 증언이 이방 민족들을 향한 복음 선포의 사명과 연결되어 있음을 말하지만, 누가 그 자리에 있었는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선포하고 자신의 섬김을 남김없이 해내라고 했습니다. 이제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돌아보며 예수님께서 선포가 남김없이 이루어지도록 힘을 주셨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관심은 자기 목숨만을 보존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는 데 있습니다.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다
17절의 마지막에서 바울은 「나는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합니다. 로마의 원형경기장에서 맹수에게 던져지는 형벌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이 구절만으로 바울이 실제로 사자와 마주했다고 판단할 근거는 없습니다. 사자의 입은 극심한 위험이나 죽음의 위협을 비유적으로 나타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실제로 어떤 위험에서 벗어났다고 증언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앞으로도 모든 사형 선고와 죽음의 위협에서 신체적으로 구출될 것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다음 절이 그 사실을 분명하게 합니다.
앞으로도 건져 내실 것이라는 확신
주님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 내시고 구원하여 그분의 하늘 나라에 이르게 하실 것입니다. 그분께 영광이 영원히 또 영원히 있기를 빕니다. 아멘.디모데후서 4:18 · 본디새김
6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떠날 때가 이미 닥쳤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 내실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입니까, 죽음에서 구출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까?
답은 바울이 말하는 구원이 반드시 현재의 육체적 생존을 뜻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분의 하늘 나라에 이르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기대하는 건짐은 단순히 지금의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보다 큽니다.
바울은 이미 사람들에게 버림받았고, 해를 입었으며, 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그럼에도 그 악한 일들이 예수님께서 그를 자신의 나라에 이르게 하시는 목적을 좌절시킬 수 없다고 확신합니다.
1절에서 바울은 예수님의 나라를 걸고 디모데에게 엄히 명했습니다. 18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 나라에 이르게 하실 것이라고 고백합니다. 처음에는 디모데에게 맡겨진 사역을 엄숙하게 만드는 근거였던 그 나라가, 이제는 바울의 마지막 소망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광송으로 이 고백을 마칩니다.
그런데 편지는 여기서도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다시 사람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조금 더 깊이
시편 22:21에서는 원수들에게 둘러싸인 고난받는 시인이 사자의 입에서 자신을 구해 달라고 여호와야훼께 부르짖습니다. 바울의 표현은 이 시편의 언어와 연결해 읽을 수 있습니다. 신약은 이 시편을 예수님의 수난과도 연결하여, 마태복음 27:46에서 예수님께서는 시편 22:1의 말씀으로 부르짖으십니다. 그러나 4:17의 사자의 입을 반드시 예수님의 수난을 직접 인용한 표현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도움으로 치명적인 위험에서 건짐받았다는 성경적 언어입니다.
마지막 인사에 남겨진 사람들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오네시보로의 집안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오네시보로의 집안 사람들에게 문안해 주십시오.디모데후서 4:19 · 본디새김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신약성경의 다른 곳에서도 함께 등장하는 부부입니다. 사도행전 18:1–3에서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이들과 함께 지내며 일했고, 18:24–26에서는 이들이 아볼로에게 하나님의 길을 더욱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로마서 16:3–4에서 바울은 이들을 예수님 안의 동역자라고 부르며, 그들이 자신의 목숨을 위해 위험을 감수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사역은 처음부터 끝까지 수많은 사람의 도움과 협력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혼자 모든 일을 이룬 영웅으로 자신을 소개하지 않고, 자신을 도운 사람들을 기억합니다.
오네시보로의 집안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이 편지의 앞부분에서 오네시보로가 로마에 있을 때 자신을 애써 찾아냈고, 자신의 쇠사슬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고 말했습니다. 오네시보로가 이때 살아 있었는지, 왜 그의 집안만 특별히 언급되었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바울이 그와 그의 집안에 대한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바울에게 복음은 단지 널리 전해진 메시지가 아니었습니다. 그 복음은 자신과 함께 일하고, 자신을 찾아와 위로하며, 어려움 가운데서도 관계를 이어 온 사람들의 삶 안에 존재했습니다.
병든 드로비모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렀고, 드로비모는 병든 채로 내가 밀레도에 두고 왔습니다.디모데후서 4:20 · 본디새김
사도행전 19:22에는 바울이 에라스도와 디모데를 마케도니아로 보냈다는 기록이 있고, 사도행전 20:4과 21:29에는 에베소 출신의 드로비모가 등장합니다. 사도행전에는 바울을 통해 병든 사람들이 고침받는 장면도 기록되어 있습니다(사도행전 19:11–12; 28:8–9). 그런데 여기서는 바울이 병든 동역자를 두고 왔습니다.
왜 그를 고쳐 주지 않았습니까?
본문은 그 이유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그를 위해 기도했는지, 치료를 시도했는지, 병이 얼마나 심각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을 근거로 바울이 치유의 능력을 완전히 잃었다고 주장할 수도 없고, 반대로 드로비모가 특별한 이유로 병들었다고 해석할 수도 없습니다.
이 짧은 문장은 사도들의 사역이 인간의 질병과 연약함을 모두 즉각적으로 제거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복음의 사역자도 아플 수 있고, 동역자가 병들어 더는 함께 여행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감추지 않고, 드로비모를 병든 채로 두고 왔다고 담담하게 기록합니다.
이것은 앞에서 자신이 겉옷을 필요로 한다고 말한 것과도 어울립니다. 예수님 안의 구원을 확신한다고 해서 인간이 더는 육체적인 필요나 한계를 지니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21절에서 바울은 다시 디모데에게 부탁합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서둘러 오십시오.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그대에게 문안합니다.디모데후서 4:21 · 본디새김
9절의 「속히 나에게 오도록 서두르십시오」에 이제는 「겨울이 오기 전에」라는 시간이 덧붙습니다.
왜 겨울이어야 합니까?
고대 지중해에서는 겨울철의 항해가 다른 계절보다 어렵고 위험할 수 있었으므로, 실제 여행상의 이유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말을 한 정확한 이유를 하나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항해의 어려움 때문일 수도 있고, 겉옷이 필요한 계절이 다가오기 때문일 수도 있으며, 무엇보다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고 여겼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본문이 분명히 말하는 것은 하나입니다. 바울은 디모데가 서둘러 오기를 원합니다.
이미 9절에서 바울은 「나에게 오도록」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사역을 이어 갈 사람이 필요할 뿐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곁에 오기를 바랍니다.
바울은 경주를 다 마쳤습니다. 그렇다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까지 끝난 것은 아닙니다.
믿음을 지켰습니다. 그렇다고 인간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이 된 것도 아닙니다.
의의 관을 바라봅니다. 그러나 겨울이 오기 전에 디모데가 와 주기를 바랍니다.
그의 확신과 그리움은 함께 존재합니다.
그대에서 여러분으로
마지막 절은 짧은 축복입니다.
주님께서 그대의 영과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은혜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디모데후서 4:22 · 본디새김
첫 문장의 「그대의」는 단수이고, 둘째 문장의 「여러분」은 복수입니다. 이 편지는 처음부터 디모데 한 사람에게 쓰인 편지이지만, 마지막 축복은 디모데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이 「여러분」의 정확한 범위를 명시하지는 않지만, 디모데와 함께 이 편지를 듣거나 그 가르침에 참여할 공동체를 포함하는 인사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디모데 개인에게 주어진 책임은 공동체와 분리되지 않습니다. 그가 말씀을 전하고, 사람들을 가르치며, 자신의 섬김을 감당해야 하는 이유도 공동체를 위해서입니다.
첫 문장의 축복도 중요합니다. 바울은 실제로 멀리 떨어져 있고, 자신의 떠날 때가 닥쳤다고 생각합니다. 디모데에게 자기 자신이 언제나 함께하겠다고 약속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께서 디모데와 함께하시기를 기도할 수는 있습니다.
아무도 자기 곁에 서 주지 않았을 때 예수님께서 곁에 서 주셨습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예수님의 신실함을 디모데를 위한 축복으로 돌려줍니다.
그날과 겨울 사이에서
디모데후서 4장에는 바울이 자기 삶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간 지평이 나타납니다.
하나는 「그날」입니다. 예수님께서 나타나시고, 의로운 심판자로서 사람들의 삶을 판단하시며, 자신의 나라를 온전히 드러내실 날입니다. 다른 하나는 「겨울이 오기 전」입니다. 디모데가 와 주기를 바라는 구체적인 시간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날을 바라보며 살지만, 동시에 겨울이 오기 전의 시간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때때로 성숙한 신앙이란 인간적인 감정이나 필요를 초월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 4장의 바울은 사람들에게 버림받았다고, 자신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 있다고, 마가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겉옷과 책을 가져오라고 하고, 디모데에게 빨리 와 달라고 합니다. 이 모든 말은 그가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잃었다는 증거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인간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 주는 증언입니다.
4장의 처음에는 예수님께서 심판자로 나타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중간에는 바울 자신이 그 심판자에게 의의 관을 받을 소망을 고백합니다. 마지막에는 예수님께서 자기 곁에 서 주셨다고 증언하고, 디모데에게도 함께하시기를 빕니다. 바울의 담대함은 자신이 얼마나 강한 사람인지 아는 데서 오지 않습니다. 자신이 누구 앞에 서 있으며 누가 자기 곁에 서 계시는지를 아는 데서 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경주를 마쳤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디모데가 아직 감당해야 할 섬김을 엄숙하게 당부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곁에 사람이 필요하다는 사실도 감출 필요가 없습니다.
편지를 끝내기 전에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오네시보로의 집안에 문안하고, 고린도에 머문 에라스도와 밀레도에 병든 채 남겨 둔 드로비모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다시 「겨울이 오기 전에 서둘러 오십시오」라고 디모데를 부릅니다. 디모데가 실제로 제때 도착했는지 이 편지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기 삶의 마지막을 어떻게 맞게 될지 모든 세부 사항을 알지 못하지만, 자신이 누구를 신뢰하는지는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나타나심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디모데를 기다립니다.
그 두 기다림 사이에는 모순이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마지막 인사는 디모데가 자신에게 도착하는 장면이 아니라, 「주님께서 그대의 영과 함께하시기를 빕니다」라는 기도입니다. 겨울이 오기 전에 사랑하는 사람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그에게 마지막으로 들려주는 말은 자신의 용기나 업적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은혜가 그들 모두와 함께하기를 비는 축복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