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풀어 읽기 · 3장
이 장의 자리 · 3장 · 마지막 날들의 어려움
언제나 배우면서도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
디모데후서 3장은 섬뜩한 예고로 시작합니다.
마지막 날들에 힘겨운 때가 닥칠 것임을 알아 두십시오.디모데후서 3:1 · 본디새김
이어지는 구절에는 인간의 온갖 악한 모습이 쏟아집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오만하고 감사하지 않고, 정이 없고 사납고 배신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사랑합니다. 세상이 얼마나 악해질 것인지를 예고하는 종말의 목록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그 목록을 마친 직후에 하는 말은 뜻밖입니다.
「이런 이들을 피하십시오」(3:5). 아직 나타나지 않은 미래의 사람들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요?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은 「이런 자들 가운데는 집에 몰래 파고들어」 사람들을 포로로 잡는 이들이 있다고 말합니다(3:6).
이것은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입니다.
마지막 날들에 나타날 사람들은 완전히 낯선 미래의 인물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모습은 이미 공동체 안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바울의 목적은 디모데에게 미래의 재난을 예측할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를 분별하고 그 시대 속에서 어떻게 진리에 충실할 것인지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모른다고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경건의 모양은 지녔으나 그 능력은 부인한」 사람들입니다(3:5). 경건한 사람처럼 보이고 배우고 가르치는 일에도 관여하지만, 그들의 삶과 가르침은 사람들을 진리로 이끌지 못합니다.
그리고 이 장에는 서로 대조되는 두 종류의 배움이 등장합니다.
한쪽에는 「언제나 배우면서도 진리를 온전히 아는 데는 결코 이를 수 없는」 사람들이 있습니다(3:7). 다른 한쪽에는 어린 시절부터 거룩한 글들을 알아 왔으며, 그 글들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얻도록 권면받는 디모데가 있습니다(3:14–15). 두 경우 모두 배움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릅니까? 왜 어떤 배움은 사람을 진리에서 멀어지게 하고, 어떤 배움은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으로 이끕니까?
바울은 먼저 경건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모습을 드러냅니다(1–9절). 그런 다음 디모데가 직접 보고 배운 바울의 삶을 제시합니다(10–13절). 마지막으로 디모데가 무엇에 머물러야 하는지, 그가 어려서부터 배운 성경이 어떤 목적을 위해 주어졌는지 설명합니다(14–17절). 그 흐름의 끝에는 단순히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선한 일을 위해 온전히 갖추어져」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을 사랑하는지가 사람을 드러낸다
마지막 날들은 언제인가
구약의 예언서들은 하나님이 장차 자신의 구원과 심판을 결정적으로 드러내실 때를 바라봅니다. 이사야 2:2와 미가 4:1은 훗날 여호와야훼의 집이 있는 산이 굳게 세워지고 여러 민족이 그곳으로 몰려올 것을 말합니다. 이러한 예언에서 마지막 때는 단순히 역사의 파국이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통치를 드러내시고 역사를 바로잡으실 때와 관련됩니다.
신약에서는 예수님의 오심으로 그 약속의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인식이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2:16–17에서 베드로는 요엘의 예언을 인용하여 「마지막 날들」에 하나님이 자신의 영을 부어 주실 것이라고 말하고, 히브리서 1:2도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들에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고 선언합니다. 따라서 디모데후서의 「마지막 날들」을 먼 미래의 짧은 기간으로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3:1은 앞으로 힘겨운 때가 닥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5–6절은 그 시대의 특징이 이미 디모데의 현실에도 나타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마지막 시대 속에서 악이 여전히 활동하고 있으며, 그 악의 모습을 분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지막 날들이 힘겨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전쟁이나 지진, 기근을 열거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설명합니다.
목록을 열고 닫는 것은 사랑이다
2–4절의 긴 목록은 처음 읽으면 무질서하게 나열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목록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로 시작하고, 끝부분에서는 「선한 것을 사랑하지 않고」를 거쳐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쾌락을 사랑하고」로 닫힙니다.
이 반복이 드러내는 것은 단순한 사랑의 결핍이 아니라 사랑의 방향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무언가를 강하게 사랑합니다.
자기를 사랑합니다. 돈을 사랑합니다. 쾌락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그 사랑의 방향이 하나님과 이웃, 선한 것에서 멀어져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쾌락을 사랑하고」라는 말이 목록의 결정적인 표현입니다. 바울은 무엇이 더 우선적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문제 삼습니다. 모든 즐거움 자체를 악하다고 선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삶의 질서를 문제 삼는 것입니다.
목록의 다른 행동들도 이 관점에서 다시 읽힙니다. 자신을 지나치게 높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모욕하기 쉽고, 돈을 삶의 중심에 놓으면 감사보다 탐욕이 자라기 쉬우며, 자신의 욕망을 최우선에 두면 화해를 거부하거나 절제를 잃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행동들 사이에 엄격한 인과관계를 제시하지는 않지만, 목록의 처음과 끝에 사랑의 대상을 배치함으로써 악한 행동들이 인간의 욕망과 충성의 방향에 관계된 문제임을 보여 줍니다.
무엇을 가장 사랑하는가가 결국 어떤 사람이 되어 가는가를 드러냅니다.
관계를 무너뜨리는 악
목록 가운데에는 특별히 관계를 파괴하는 행동들이 많습니다. 「부모의 말을 듣지 않고, 감사하지 않고」는 가장 가까운 관계에서의 불순종과 무감각을, 「정이 없고」는 자연스러운 가족적 애정의 결핍을 가리킵니다. 「화해하려 하지 않고」는 깨어진 관계를 회복하려는 태도가 없다는 뜻이고, 「중상하고」는 다른 사람을 해치는 말을 하는 행위입니다.
바울은 마지막 날들의 악을 개인의 내면에만 가두지 않습니다. 그 악은 인간관계를 통해 드러납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개인 사이의 문제이므로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든 상관없다는 생각은 이 목록과 양립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악한 행동을 설명한 뒤 바울은 종교적인 삶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경건의 모양은 지녔으나 그 능력은 부인한 채로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이들을 피하십시오.디모데후서 3:5 · 본디새김
바울이 말한 사람들은 종교적 형태를 완전히 버린 사람들이 아닐 수 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경건한 모습으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경건의 모양과 경건의 능력
「모양」은 어떤 것의 형태나 모습을, 「능력」은 경건이 실제로 지니는 힘과 효력을 가리킵니다. 경건의 능력을 부인한다는 것이 정확히 어떤 교리적 주장을 뜻하는지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앞의 행동 목록을 고려하면, 그들의 종교적 모습과 실제 삶 사이에 심각한 불일치가 있다는 점이 분명합니다.
그들은 경건을 나타내는 외형을 지니고 있지만, 경건이 삶을 변화시키고 이웃을 사랑하도록 이끄는 힘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 해석은 종교적인 가르침을 내세우면서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이용하는 뒤의 거짓 교사들의 행실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기적을 포함할 수 있다는 사실과는 별개로, 이 문맥이 강조하는 것은 삶의 실재입니다.
종교적인 말을 능숙하게 하고 경건한 형식을 갖추고 신앙에 관한 지식을 드러낸다고 해도, 그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삶을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종교적 형식이 자신의 욕망을 감추는 수단이 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런 이들을 피하십시오」라는 명령은 신앙이 없는 사람들을 모두 멀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경건을 내세우면서 그 경건의 실재를 부정하고, 다른 사람을 해치는 영향력을 행사하는 이들에게 자신과 공동체를 내맡기지 말라는 경고입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에서도 사랑의 대상을 나타내는 말들이 반복됩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필라우토이, 「돈을 사랑하는」 필라르귀로이, 「쾌락을 사랑하는」 필레도노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필로테오이가 그 예입니다.
집 안으로 파고든 사람들 — 배움이 포로 생활이 될 때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사로잡는다
6절은 불편한 장면을 보여 줍니다.
이런 자들 가운데는 집에 몰래 파고들어, 죄가 켜켜이 쌓여 있고 온갖 욕망에 이끌리는 나약한 여자들을 포로로 잡는 이들이 있기 때문입니다.디모데후서 3:6 · 본디새김
바울은 거짓된 가르침의 내용을 먼저 설명하지 않고, 그 가르침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접근하는지 보여 줍니다. 「포로로 잡다」는 사로잡아 포로로 만드는 것을 뜻하며, 여기서는 사람에 대한 지배와 속박을 비유적으로 표현합니다. 거짓된 가르침은 누군가의 생각을 사로잡고, 그 사람이 독립적으로 진리를 판단하거나 바르게 살아가는 것을 어렵게 만드는 영향력이 될 수 있습니다.
본문은 그들이 「나약한 여자들」을 포로로 잡는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여자를 뜻하는 말에서 나온 축소형으로, 이 문맥에서는 경멸적이거나 낮추어 보는 뉘앙스를 지닙니다. 그렇다고 이 표현을 여성 일반의 지적 능력이나 신앙적 판단력이 부족하다는 선언으로 확장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특정한 상황에서 거짓 교사들에게 사로잡힌 여성들을 묘사하면서 「죄가 켜켜이 쌓여 있고」 「온갖 욕망에 이끌리는」 상태를 구체적으로 덧붙입니다. 따라서 본문의 비판은 여성이라는 성별 자체보다, 잘못된 가르침에 취약하게 된 특정한 사람들의 상태와 그들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 읽어야 합니다.
그 여성들이 어떤 사회적 계층에 속했는지, 거짓 교사들이 어떤 말을 내세워 접근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거짓 교사들이 집 안으로 접근하여 사람들을 사로잡는 방식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가르침이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대신 그 사람을 지배하는 수단이 된 것입니다.
왜 언제나 배우면서도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가
그 여자들은 언제나 배우면서도 진리를 온전히 아는 데는 결코 이를 수 없습니다.디모데후서 3:7 · 본디새김
그들은 배우지 않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언제나 배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리에 이르지 못합니다.
바울은 그들이 어떤 종류의 지식을 습득했는지 설명하지 않지만, 앞뒤 문맥에서 문제의 성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거짓된 가르침에 사로잡혀 있고, 그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들은 진리에 맞서는 사람들입니다(3:8). 배움이 지속된다고 해도 그것을 이끄는 가르침이 진리에서 벗어나 있다면 그 배움은 올바른 목적지에 이를 수 없습니다.
「진리를 온전히 아는」(ἐπίγνωσις) 데 쓰인 표현은 어떤 사실을 처음 듣거나 표면적으로 이해하는 것 이상의 인식을 나타냅니다. 바울은 지식 자체를 반대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배움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사람은 끊임없이 새로운 설명을 듣고 새로운 교사를 찾아다니면서도, 정작 자신이 무엇을 믿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더 혼란스러워질 수 있습니다. 특히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는 사람의 불안이나 욕망을 이용한다면, 포로의 비유처럼 배움이 깊어질수록 오히려 가르치는 사람에게 더 종속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지적인 탐구나 질문을 의심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장의 마지막에서 디모데에게도 배운 것을 기억하라고 말하며, 그 배움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지혜와 연결합니다. 두 배움은 지식의 분량으로 대조되지 않습니다.
그 배움이 어디로 사람을 이끄는가로 대조됩니다.
얀네와 얌브레는 누구인가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에게 맞선 그대로, 그 여자들을 포로로 잡는 이들도 진리에 맞섭니다. 정신이 부패해 있고, 믿음에 관해서는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입니다.디모데후서 3:8 · 본디새김
출애굽기 7:10–12에서 아론이 지팡이를 뱀으로 변하게 하자 파라오의 마술사들도 비슷한 일을 행합니다. 이어지는 재앙 이야기에서도 그들은 표징을 흉내 내려 하지만, 결국 모세와 아론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따라가지 못합니다(출애굽기 7:22; 8:18–19). 고대 유대 전승은 얀네와 얌브레라는 이름을 이 마술사들과 연결합니다.
바울이 이 전승을 끌어오는 이유는 두 인물의 역사적 신원을 설명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의 행동과 현재의 거짓 교사들의 행동을 비교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모세에게 맞섰고, 현재의 거짓 교사들은 진리에 맞섭니다.
이집트의 마술사들도 처음에는 겉으로 보이는 비슷한 일을 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모세를 통해 드러나는 여호와야훼의 권위와 동일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점에서 얀네와 얌브레의 이야기는 앞의 「경건의 모양」과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흉내 내는 것과 하나님의 뜻에 충실한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바울은 이 사람들을 「믿음에 관해서는 인정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부릅니다. 2:15에서 디모데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꾼이 되라는 권면을 받았고, 그리스어에서도 두 표현은 같은 낱말 계열을 사용합니다. 겉으로는 가르치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 참된 일꾼으로 인정받는 일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더는 나아가지 못한다는 약속
그러나 그들은 더는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의 어리석음이 모두에게 훤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 두 사람의 어리석음도 드러났듯이 말입니다.디모데후서 3:9 · 본디새김
거짓 교사들은 지금 실제로 사람들을 사로잡고 믿음을 뒤흔들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들이 더는 나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출애굽기 8:18–19에서 이집트의 마술사들이 같은 일을 해내지 못하고 결국 그것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듯이, 거짓 교사들의 어리석음도 그렇게 드러날 것입니다.
이것을 거짓된 가르침이 즉시 사라지거나 아무런 피해도 일으키지 못할 것이라는 약속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13절에서는 악한 사람들과 남을 홀리는 자들이 더욱 나쁜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9절은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나면서 더는 나아가지 못할 것을, 13절은 그들이 악한 방향으로 계속 나아갈 것을 말합니다.
악은 더욱 악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악이 더욱 악해진다는 사실이 곧 진리가 패배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거짓된 가르침은 한동안 사람들을 사로잡을 수 있지만,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역사 안에서 그것의 어리석음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바울의 확신입니다.
그렇다면 그런 시대 속에서 디모데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바울은 디모데 자신이 직접 보아 온 한 사람의 삶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조금 더 깊이
얀네와 얌브레라는 이름은 구약성경의 출애굽기 본문에는 등장하지 않고, 이집트 마술사들에 관한 성경 밖의 유대 전승과 고대의 여러 문헌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그 두 사람이 누구였는지 독립적으로 확정할 수 있는 자료는 없습니다. 또한 9절과 13절의 「나아가다」에는 같은 그리스어 동사 프로콥토가 사용됩니다. 바울은 서로 모순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방향의 진전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 디모데가 직접 본 한 사람의 삶
가르침만 배운 것이 아니다
10절은 편지의 흐름을 바꾸는 전환점입니다.
그러나 그대는 나의 가르침을, 행실을, 품은 뜻을, 믿음을, 오래 참음을, 사랑을, 끝까지 견딤을, 박해와 고난도 가까이서 지켜보며 배웠습니다. 안디옥에서,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에서 나에게 어떤 고난이 닥쳤는지, 내가 어떤 박해를 겪어 냈는지 말입니다. 그런데도 그 모든 것에서 주님께서 나를 건져 내셨습니다.디모데후서 3:10–11 · 본디새김
「그러나 그대는」이라는 말은 디모데를 앞의 사람들과 대조하며, 14절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디모데가 알고 있는 것은 단지 바울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행실, 품은 뜻, 믿음, 오래 참음, 사랑, 끝까지 견딤, 박해와 고난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과 삶을 분리하지 않습니다.
「가까이서 지켜보며 배웠습니다」는 주의 깊게 따라가거나 살펴본다는 의미로, 디모데가 바울의 가르침과 행실을 가까이에서 알고 익혀 왔다는 뜻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경건의 모양을 가지고 있지만 그 능력을 부인합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서 어떤 주장을 배웠을 뿐 아니라, 그 주장을 믿고 사는 사람이 어떤 모습인지 보아 왔습니다.
이것을 바울이 자신의 도덕적 완전함을 주장하는 것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그가 열거하는 항목 가운데에는 박해와 고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바울의 삶이 진실하다는 증거는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전한 복음 때문에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그 복음을 버리지 않았다는 데 있습니다.
오래 참음과 끝까지 견딤은 어떻게 다른가
「오래 참음」은 화를 쉽게 터뜨리거나 조급하게 반응하지 않는 태도로, 특히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 필요한 인내를 표현합니다. 반면 「끝까지 견딤」은 압박과 고난 아래에서도 물러서지 않고 버티는 인내를 강조합니다. 둘을 기계적으로 완전히 분리할 수는 없지만, 바울의 충실함은 고난을 견디는 것에만 나타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도 나타납니다.
그는 사람을 오래 참았고, 어려운 상황을 끝까지 견뎠습니다.
3절에서 악한 사람들은 「절제하지 못하고」 「사납고」 「선한 것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의 삶에는 오래 참음과 사랑이 있습니다. 그의 가르침이 참되다는 사실은 그가 어떤 명제를 정확하게 설명했느냐와만이 아니라, 그 복음이 그의 삶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었는가와도 관련됩니다.
물론 좋은 성품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가르침이 자동으로 참이라고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가르침과 삶의 심각한 불일치는 그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이 실제로 무엇을 믿고 있는지 의심하게 만듭니다.
왜 하필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인가
이 지명들은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초기 선교 여정과 연결됩니다. 피시디아 지역의 안디옥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을 전했고, 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모였지만 반대가 일어나 결국 그 지역에서 쫓겨났습니다(사도행전 13:14–52). 이고니온에서도 많은 사람이 믿었지만 도시가 갈라졌고, 바울 일행을 해치려는 움직임이 생겼습니다(사도행전 14:1–6).
루스드라에서는 더욱 극적인 일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걷지 못하던 사람을 고치자 사람들은 처음에 바울과 바나바를 신들처럼 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지역에서 온 반대자들이 무리를 설득했고, 사람들은 바울에게 돌을 던진 뒤 죽은 줄 알고 도시 밖으로 끌어냈습니다(사도행전 14:8–20).
바울이 많은 선교 지역 가운데 이 세 도시를 부르는 것은 디모데와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6:1–2는 디모데를 루스드라에서 바울이 만난 제자로 소개하며,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의 형제들이 그를 좋게 평가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추상적으로 고난을 견디라고 말하지 않고, 디모데가 알고 있는 사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디모데에게는 이 지명들이 단순한 지리 정보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자신이 따르고 배운 사도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알려 주는 구체적인 기억이었습니다.
건져 내셨다는 말은 고난이 없었다는 뜻이 아니다
바울은 주님께서 자신을 모든 박해에서 건져 내셨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았던 일은 무엇입니까?
바울은 박해를 당하지 않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4:20에서 제자들이 둘러서자 바울은 일어나 다시 도시로 들어갑니다. 그는 고난을 피한 것이 아니라 고난을 겪고도 선교를 계속할 수 있었습니다.
「건져 내다」라는 표현을 모든 신자가 박해 중에 반드시 신체적으로 구조된다는 약속으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바울이 자신이 겪은 구체적인 사건들을 돌아보며 주님의 도우심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는 사람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디모데후서 3:12 · 본디새김
바울은 경건하게 살면 박해를 피할 수 있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경건하게 살아가는 일이 세상의 반대와 충돌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이 말씀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동일한 강도의 박해를 매 순간 경험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박해의 형태와 정도는 역사적·사회적 상황에 따라 다르며, 어떤 사람이 박해받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그 사람의 신앙이 거짓되다고 판정할 수도 없습니다. 그때 필요한 것은 박해를 즐기거나 영웅적으로 행동하려는 마음이 아니라, 자신이 믿는 예수님을 버리지 않는 충실함입니다.
남을 속이다가 자신도 속는 사람들
악한 사람들과 남을 홀리는 자들은 남을 속이고 자신도 속으면서 점점 더 나쁜 쪽으로 나아갈 것입니다.디모데후서 3:13 · 본디새김
원문에서도 속이는 행동과 자신도 미혹되는 상태가 같은 어근으로 연결됩니다.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리는 사람이 언제나 자신이 거짓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는 것은 아닐 수 있습니다. 누군가는 다른 사람을 속이면서도 자기 주장에 점점 더 깊이 사로잡히고, 자신이 옳다는 확신은 커지지만 진리에 대한 이해는 오히려 왜곡될 수 있습니다.
9절의 「더는 나아가지 못할 것」과 13절의 「점점 더 나쁜 쪽으로 나아갈 것」은 잘못된 가르침에 대한 바울의 두 판단을 함께 보여 줍니다. 그것은 실제로 더 악화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악화가 곧 거짓의 승리로 이어지지는 않습니다.
「그대는 배우고 굳게 믿게 된 것들 안에 머무르십시오」
점점 나아가는 사람들과 머무르는 사람
14절에는 앞의 흐름을 뒤집는 명령이 등장합니다.
거짓 교사들은 점점 더 나쁜 쪽으로 나아갑니다. 디모데는 이미 배우고 굳게 믿게 된 것들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한쪽은 움직이고, 다른 쪽은 머뭅니다.
그러나 움직이는 쪽이 반드시 발전하는 것은 아니고, 머무르는 쪽이 반드시 정체되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모든 변화를 거부하라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서 벗어나는 움직임을 발전이라고 착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계속 새로운 가르침으로 갈아타야 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배운 진리의 가치를 알고 그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사람입니다.
「머무르십시오」는 계속 남아 있거나 지속하라는 명령입니다. 이것은 맹목적인 고집과 다릅니다. 바울은 처음 배운 것이니 무조건 붙들라고 말하지 않고, 그 안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그러나 그대는 배우고 굳게 믿게 된 것들 안에 머무르십시오. 그대가 어떤 이들에게서 배웠는지, 또 젖먹이 때부터 거룩한 글들을 알아 왔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글들은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그대를 지혜롭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습니다.디모데후서 3:14–15 · 본디새김
누구에게서 배웠습니까. 그리고 무엇을 배웠습니까.
진리는 사람을 통해 전달되지만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는다
디모데는 바울의 가르침과 삶을 가까이서 배웠습니다. 또한 1:5에서 바울은 디모데의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가 지녔던 믿음을 기억했습니다. 디모데의 신앙은 여러 사람의 가르침과 삶을 통해 형성되었습니다. 다만 3:14의 「어떤 이들」이 정확히 누구를 모두 포함하는지는 본문이 명시하지 않으므로, 그 이름을 이 구절에 직접 대입해 확정해서는 안 됩니다.
거짓 교사들은 집 안으로 파고들어 사람들을 사로잡습니다. 반면 디모데에게는 가르침의 내용을 살펴볼 근거가 있고, 그 가르침이 어떤 삶으로 나타났는지 돌아볼 근거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사람들의 권위만을 강조하며 끝내지 않습니다. 그보다 더 오래된 배움, 「젖먹이 때부터 거룩한 글들을 알아 왔다」는 사실로 시선을 돌립니다. 영아 시기부터 성경을 독해했다는 말이 아니라, 매우 어린 시절부터 거룩한 글들에 익숙해져 왔다는 것을 강조하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거룩한 글들」은 디모데가 어려서부터 배우던 이스라엘의 성경, 곧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성경이라고 부르는 성경입니다. 디모데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시작한 뒤에야 존재하게 된 문서들이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읽히고 가르쳐져 온 성경입니다. 그 성경이 이제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연결됩니다.
구원에 이르게 하는 지혜
거룩한 글들은 지혜롭게 할 수 있습니다. 그 지혜의 목적은 구원에 이르는 것입니다.
거짓 교사들에게 사로잡힌 사람들은 언제나 배우지만 진리에 이르지 못합니다. 반면 거룩한 글들은 디모데를 구원에 이르는 지혜로 이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지혜는 지식의 양이나 사고의 날카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이해하고 그 구원에 참여하도록 이끄는 지혜입니다.
바울은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성경이라는 책이 그것을 소유하거나 읽는 행위 자체만으로 사람을 자동적으로 구원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아는 것과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것은 분리되지 않지만, 동일한 행위도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성경과 그리스도 예수님
어떻게 이스라엘의 옛 성경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으로 사람을 이끌 수 있습니까? 누가복음 24:27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에 기록된 자신에 관한 것들을 설명하십니다. 요한복음 5:39에서도 성경이 자신에 대해 증언한다고 말씀하시고, 바울은 로마서 3:21에서 율법과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의를 증언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모든 구절이 본래부터 예수 그리스도만을 직접 가리키는 암호처럼 쓰였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스라엘의 성경에는 창조와 인간의 죄,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 이집트에서의 해방, 시내산의 언약, 왕국과 포로 생활, 예언자들의 책망과 회복의 약속, 지혜문학의 성찰이 담겨 있으며, 각 본문은 먼저 자신의 역사적·문학적 문맥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신약은 그 긴 역사 속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약속과 구원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결정적으로 밝혀졌다고 증언합니다.
바울은 성경을 그리스도로부터 독립된 구원의 수단으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는 글들로 제시합니다. 디모데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비밀 지식이 아니라, 이미 배워 온 거룩한 글들을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바르게 이해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예를 들어 사무엘하 7:12–16의 다윗 왕조에 대한 약속은 처음에는 다윗의 후손과 왕조의 지속에 관한 말씀입니다. 신약은 그 왕권의 약속을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아적 정체성과 연결합니다(누가복음 1:32–33; 로마서 1:3–4). 이것은 구약 본문의 본래 의미를 지워 버리는 일이 아니라, 그 약속이 이후 성경의 역사 속에서 어떻게 이해되고 발전했는지를 살펴보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숨으로 내신 글은 사람을 무엇으로 만드는가
성경의 기원을 말하는 문장
16절은 디모데후서 전체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구절 가운데 하나입니다.
성경의 모든 글은 하나님께서 숨으로 내신 것이고, 가르치는 데에, 잘못을 짚어 책망하는 데에, 어긋난 것을 곧게 세우는 데에, 의에 따라 기르는 데에 유익합니다.디모데후서 3:16 · 본디새김
이 구절은 흔히 성경의 영감에 관한 교리적 근거로 사용됩니다. 그런데 문맥을 따라 읽으면, 바울은 거룩한 글들이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줄 수 있다고 말한 뒤 그 글들이 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는지, 디모데에게 어떤 유익을 주는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단순히 오래되고 존경받는 책이기 때문에 권위를 지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숨으로 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숨으로 내신」에 해당하는 테오프뉴스토스(θεόπνευστος)는 하나님을 뜻하는 말과 숨을 쉬거나 불어낸다는 뜻의 말이 결합한 형용사로, 신약에서는 이 구절에만 나타납니다. 이 표현을 성경 저자들이 종교적인 감동을 받았다는 뜻으로 축소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 하나에서 하나님이 성경의 모든 문장을 어떤 방식으로 인간 저자에게 전달하셨는지에 관한 완전한 이론을 도출할 수는 없습니다.
인간 저자들의 언어와 문체, 역사적 상황이 어떻게 하나님의 영감과 관계되는지는 이 구절이 직접 설명하지 않는 문제입니다. 바울이 여기서 분명하게 주장하는 것은 성경의 신적 기원과 그 성경이 지닌 유익입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숨으로 나왔다」와 「하나님의 숨으로 나온 모든 성경은 유익하다」
16절의 그리스어 문장에는 우리말의 「이다」에 해당하는 동사가 명시되어 있지 않아, 문장의 관계를 두 가지 방식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성경의 모든 글은 하나님께서 숨으로 내신 것이며 유익하다는 읽기로, 두 형용사를 병렬적인 서술어로 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 숨으로 내신 모든 성경이 또한 유익하다는 읽기로, 첫 형용사를 성경의 성격을 설명하는 수식어로 보고 직접적인 서술은 유익함에 놓습니다.
두 읽기 모두 문법적으로 가능하며, 성경 번역과 주석의 역사에서 실제로 논의되어 왔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든 바울의 논증에서 중요한 것은 성경의 신적 기원과 실제적인 유익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15절에서 디모데가 알아 온 거룩한 글들은 이스라엘의 성경이었으므로, 이 문장의 직접적인 역사적 배경에는 오늘날의 구약성경에 해당하는 문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 말씀이 후대의 신약 정경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디모데후서 3:16 자체가 훗날 확정될 신약 27권의 목록을 직접 제시하거나 그 범위를 정의한다고 말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이 하는 네 가지 일
가르치는 일, 잘못을 짚어 책망하는 일, 어긋난 것을 곧게 세우는 일, 의에 따라 기르는 일. 이 목록은 한 사람이 진리를 배우고 그 진리에 따라 살아가도록 형성되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먼저 가르침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무엇을 행하셨는지, 인간이 어떤 삶으로 부름받았는지를 배워야 합니다.
그런데 가르침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책망은 상대방에게 수치심을 주기 위한 공격이 아니라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드러내는 일입니다. 거짓 교사들은 진리에 맞서면서도 자신들이 옳다고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런 자기 확신을 점검하는 기준이 됩니다.
「어긋난 것을 곧게 세우는 데에」는 잘못되거나 어긋난 것을 바로잡는다는 의미입니다. 책망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드러낸다면, 바로잡음은 그것을 올바른 상태로 돌려놓는 일을 강조합니다. 성경의 목적은 인간의 잘못을 끝없이 지적하여 사람을 좌절시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의에 따라 기르는 데에」의 「기르다」는 사람을 교육하고 훈련하여 성장시키는 일을 뜻합니다. 단번에 지적하고 바로잡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인 교육과 훈련을 통해 의로운 삶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참된 것을 가르칩니다. 잘못된 것을 드러냅니다. 어긋난 것을 바로잡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의에 따라 살아가도록 기릅니다.
2:25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맞서는 이들을 온유하게 바로잡아 주라고 했고, 이제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수단이 성경임을 밝힙니다. 그러나 성경의 역할은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책망하는 데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말씀을 맡은 디모데 자신이 먼저 그 말씀 아래에서 가르침받고 바로잡혀야 합니다.
왜 하나님은 성경으로 사람을 기르시는가
하나님의 사람이 온전하고, 모든 선한 일을 위해 온전히 갖추어져 있도록 하려는 것입니다.디모데후서 3:17 · 본디새김
「온전하다」는 성경을 읽는 사람이 모든 것을 알게 되거나 더는 어떤 잘못도 저지르지 않는 완전무결한 사람이 된다는 보장이 아닙니다. 이 말은 어떤 역할을 감당하기에 충분하고 적합하게 갖추어진 상태를 나타내며, 「온전히 갖추어져」도 필요한 것을 충분히 준비한다는 뜻입니다. 두 표현이 함께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 맡겨진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준비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성경을 통해 형성된 사람은 지식만 가득한 사람이 아닙니다.
선한 일을 할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의 사람」은 모세와 예언자들처럼 하나님을 섬기고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사용되곤 하며(신명기 33:1; 열왕기상 17:24), 디모데전서 6:11에서도 디모데를 부르는 표현으로 등장합니다. 따라서 이 문맥에서는 우선 디모데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사역자를 염두에 두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다만 성경이 하나님의 백성을 선한 삶으로 준비시킨다는 원리를 교회의 다른 신자들과 무관한 것으로 제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디모데는 거짓된 가르침이 퍼지는 시대 속에서 사람들을 가르치고, 진리에서 벗어나는 사람들을 바로잡고, 박해를 겪더라도 그리스도께 충실해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서는 성경에 관한 풍부한 정보를 소유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디모데의 논쟁 실력을 높이기 위한 참고서가 아닙니다. 그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기르기 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조금 더 깊이
16절의 원문은 파사 그라페 테오프뉴스토스 카이 오펠리모스입니다. 또한 신약 안에서도 사도들의 가르침과 문서들이 권위 있는 증언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이 나타납니다. 베드로후서 3:15–16은 바울의 편지들을 언급하면서 그것을 다른 성경들과 함께 다룹니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글들
이 장의 처음에는 경건의 모양을 지녔으나 그 능력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며, 화해하지 않고, 하나님을 사랑하기보다 쾌락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마지막에는 하나님의 숨으로 나온 성경을 통해 선한 일을 하도록 준비되는 하나님의 사람이 있습니다. 앞부분에서 악은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존재로 만들고, 뒷부분에서 성경은 사람을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존재로 준비시킵니다.
그렇기에 성경이 사람을 책망하는 일도 절망의 마지막 말일 필요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이 올바른 삶을 완성하여 구원을 얻는다고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고 그 빛 아래서 하나님의 뜻을 배우며 살아갑니다.
결국 두 배움의 차이는 얼마나 많이 배우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그 배움이 누구에게서 비롯되었으며, 무엇을 진리로 가르치고, 사람을 어떤 삶으로 이끄는가에 있습니다.
디모데 앞에는 어려운 현실이 놓여 있습니다. 경건한 모습을 하고 있지만 다른 사람을 속이는 이들이 있고, 언제나 배우면서도 진리에 이르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으며, 진리를 전하는 사람들에게는 박해가 닥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디모데에게 끝없이 새로운 정보를 찾아다니라고 하지 않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던 거룩한 글들 안에 머물라고 합니다.
그 글들은 디모데에게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글들이 단지 지난날의 소중한 기억이 아니라, 지금도 디모데를 지혜롭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에 이르도록 이끌 수 있다고 말합니다. 오래 알고 있었다고 해서 그 진리의 일이 끝난 것은 아닙니다.
어린 시절부터 알고 있던 글들이 이제 디모데를 모든 선한 일에 준비시킵니다.
성경을 펼친 사람은 마침내 그 성경을 따라 살아가야 할 자신의 삶 앞에 서게 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