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장 · 함께 겪는 고난
묶인 사람과 묶이지 않은 말씀
디모데후서 2장에는 얼핏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명령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진리를 끝까지 지키라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훌륭한 병사처럼 고난을 견디고, 경기하는 사람처럼 규칙을 지키며, 수고하는 농부처럼 자기 일에 힘써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다루고, 잘못된 가르침이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하나는 다투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의 노예는 다투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며, 바울은 맞서는 이들까지 온유하게 바로잡아 주라고 합니다(2:24–25). 바울은 진리를 조금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잘못된 가르침을 괴저에 비유할 정도로 심각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를 지키는 사람에게 요구하는 태도는 공격성이나 논쟁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온유함과 인내입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진리를 지키는 것과 논쟁에서 이기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2장의 한가운데 있는 장면부터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복음 때문에 「범죄자처럼 사슬에 묶이기까지」 고난을 겪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에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묶여 있지 않습니다」라고 선언합니다(2:9). 이 선언이 장 전체를 읽는 방향을 정해 줍니다.
사람은 묶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도 묶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의 능력을 사람의 처지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장의 마지막에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사로잡힌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잘못된 가르침에 빠진 이들은 마귀의 올무에 사로잡힌 사람들로 묘사됩니다(2:26). 처음에는 바울이 사슬에 묶여 있고, 마지막에는 진리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올무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하고, 고난을 견디며, 사람을 무너뜨리는 논쟁을 피하고, 잘못된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 진리로 돌아오도록 온유하게 도우라고 가르칩니다. 그 목적은 자신의 정당성을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2:10). 이 목적을 놓치지 않으면 2장의 다양한 권면들이 하나의 이야기로 연결됩니다.
한 사람에게 맡긴 말이 다른 사람에게 건너가다
강해지라는 명령의 출발점은 은혜다
바울은 디모데를 직접 부르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자녀인 그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힘을 얻으십시오.디모데후서 2:1 · 본디새김
「그러므로」는 앞 장과 연결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맡겨진 것을 지키라고 권했고, 이제 그 일을 어떻게 이어 갈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강하게 되라는 첫 명령 뒤에 오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라는 표현은 힘의 근원이 어디인지를 분명하게 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기 안에서 힘을 짜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가 그를 강하게 하는 자리라고 말합니다.
곧이어 바울은 디모데에게 매우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고난을 견디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거짓된 가르침에 맞서며,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요구에 앞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놓여 있습니다.
그 은혜는 사역을 시작할 때 한 번 받아 두었다가 자기 힘으로 소진해 가는 자원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그 안에서 힘을 얻어야 하는 토대입니다.
복음은 디모데에게서 멈추면 안 된다
2절에서는 그 힘이 필요한 첫 번째 이유가 등장합니다.
많은 증인을 통하여 나에게서 들은 것, 그것을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맡기십시오. 그들은 다른 이들도 가르칠 능력이 있을 것입니다.디모데후서 2:2 · 본디새김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한 것을 디모데는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맡기고, 그들은 다시 다른 사람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복음은 한 사람에게서 다음 사람에게 넘어갑니다.
이 연쇄는 유명한 지도자나 특별한 권위를 가진 사람의 명단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바울이 언급한 기준은 두 가지입니다. 그들은 믿음직해야 하고, 다른 이들을 가르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직한」은 신뢰할 수 있고 충실하다는 의미로, 맡겨진 것을 책임 있게 다룰 사람이라는 뜻이 강조됩니다. 가르칠 능력은 자신이 아는 것을 다른 사람이 이해하도록 전달하는 데 필요합니다. 아무리 말솜씨가 뛰어나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에게 복음을 맡기는 것은 위험하고, 아무리 성실해도 가르칠 능력이 부족하다면 이 구절이 요구하는 역할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자기 말을 잘 기억하는 추종자만이 아닙니다. 자신이 받은 진리를 또 다른 사람에게 충실하게 전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많은 증인을 통하여」는 여러 증인을 거쳐서 들었다는 뜻으로도, 여러 증인이 있는 자리에서 들었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디모데가 받은 가르침을 다음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영향력을 유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 지식을 충실하게 이어받도록 만드는 사람이 좋은 교사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어도 복음 전파가 끝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서부터 나타납니다. 그의 말을 들은 디모데가 있고, 디모데에게서 가르침을 받을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로부터 또 다른 사람들이 배울 수 있습니다. 바울의 신체적 자유는 제한되어 있지만, 그가 맡은 복음은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계속 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세 사람의 모습을 차례로 보여 줍니다. 병사와 경기하는 사람, 그리고 농부입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의 동사 「강하게 되다」(엔뒤나무)는 현재 명령형이며, 중간태와 수동태가 형태상 같아서 문법만으로 둘을 완전히 구분할 수는 없습니다. 2절의 「많은 증인을 통하여」(디아 폴론 마르튀론)를 여러 증인이 있는 자리에서 들었다는 뜻으로 읽으면, 바울의 가르침이 여러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전달되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증인들의 구체적인 신원은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병사와 경기하는 사람과 농부 — 왜 세 사람이 필요한가
세 사람 모두 자신의 일에 헌신하고 수고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굳이 세 가지를 구별해서 말하는 것은 각각 다른 측면을 보여 주기 때문입니다. 병사는 누구를 기쁘게 하려는지 생각하고, 경기하는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경기해야 하는지 생각하며, 농부는 수고와 결실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병사 — 무엇에 얽혀 있는가
그리스도 예수의 훌륭한 병사로서 함께 고난을 받으십시오. 병사로 복무하는 사람은 아무도 일상생활의 여러 일에 얽혀들지 않습니다. 자기를 병사로 뽑은 이를 기쁘게 하려는 것입니다.디모데후서 2:3–4 · 본디새김
병사의 특징은 고난을 좋아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병사로 뽑은 사람의 명령을 우선한다는 데 있습니다. 다른 일에 지나치게 얽혀 본래의 임무를 감당하지 못한다면 병사로서 충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세상의 모든 일에서 손을 떼라는 명령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바울은 생업이나 가족관계 자체를 죄악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5:8에서도 자기 가족을 돌보는 책임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일상생활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일들에 「얽혀드는」 상태, 곧 삶의 여러 문제가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좌우하게 되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자기 성공이나 사람들의 인정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단순히 훌륭한 병사가 되라고 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님의 훌륭한 병사」가 되라고 합니다.
이 비유의 중심은 군대식 권위주의가 아니라 충성의 대상입니다.
경기하는 사람 — 결과뿐 아니라 방식도 중요하다
또 누가 경기에 나선다 해도, 규칙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승리의 관을 받지 못합니다.디모데후서 2:5 · 본디새김
병사의 비유가 헌신의 대상을 강조한다면, 경기하는 사람의 비유는 그 헌신의 방식을 강조합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의 운동경기에서는 승리의 관이 명예의 상징이었지만, 승리하기 위해 경기의 규칙을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말은 2장의 뒷부분을 읽을 때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디모데는 잘못된 가르침에 맞서야 합니다. 그런데 진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무분별한 말다툼에 빠지거나, 상대를 공격하는 데 몰두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결과가 옳다고 여기는 것만으로 모든 방법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뒤에서 바울이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다루라고 하고, 반대하는 사람을 온유하게 바로잡으라고 명령하는 것은 바로 이 원리와 연결됩니다.
농부 — 수고하는 사람이 결실에 참여한다
수고하는 농부가 소출 가운데 자기 몫을 먼저 나누어 받아야 합니다.디모데후서 2:6 · 본디새김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수고하는」 농부입니다. 「먼저」는 농부가 수고한 다음에야 결실을 얻는다는 시간적 순서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그리스어 문장의 자연스러운 읽기는 열심히 일한 농부가 소출의 첫 몫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결실 없이 무한히 희생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수고하는 사람에게는 그 수고에 합당한 몫이 있다는 사실도 인정합니다. 다만 이 비유가 당장의 성공이나 물질적 보상을 보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세 비유를 함께 놓으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원하는 삶이 드러납니다. 병사처럼 자신을 부르신 분께 충실하고, 경기하는 사람처럼 올바른 방식으로 일하며, 농부처럼 수고를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비유를 하나하나 해설해 주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말을 곰곰이 헤아려 알아차리십시오. 주님께서 그대에게 모든 면에서 깨달음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디모데후서 2:7 · 본디새김
바울은 디모데에게 생각하지 말고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곰곰이 헤아려 보라고 명령하면서, 동시에 깨달음은 주님께서 주신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사유와 하나님의 깨우침이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시므로 디모데는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가장 깊이 생각해야 합니까?
바울은 곧바로 그 대상을 밝힙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조금 더 깊이
고린도전서 9:7에서도 바울은 병사와 농부의 비유를 사용하여 복음 사역자가 생활의 지원을 받을 정당성을 설명합니다. 다만 디모데후서 2장의 강조점은 그보다 넓습니다. 고난을 견디며 맡은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에게 결실의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 모든 권면의 중심
부활을 먼저 말하고, 다윗의 후손임을 덧붙이다
8절은 지금까지의 비유와 뒤따르는 고난의 이야기를 연결하는 중심 문장입니다.
내 복음이 전하는 대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고 다윗의 후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디모데후서 2:8 · 본디새김
바울은 병사나 경기하는 사람의 관이나 농부의 수고를 계속 생각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기억하십시오」는 잊어버린 정보를 떠올리라는 말이 아니라, 사역과 고난을 판단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과 생각의 중심에 두라는 명령입니다.
역사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일이 먼저이고 부활은 나중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부활을 먼저 말합니다. 본문의 초점은 지나간 사건만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윗의 후손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족보 정보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왕권과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디모데가 기억해야 할 주님은 단지 고난을 잘 견디신 위대한 인물이 아니십니다. 약속된 왕권과 연결되어 있으시며,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하신 메시아이십니다.
앞에서 경기하는 사람에게 승리의 관이 언급되었고, 뒤에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왕으로 다스리는 일이 언급됩니다(2:12). 그러나 바울이 기억하라고 명령하는 왕은 먼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의 왕권은 고난과 죽음을 피해 가는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디모데가 그리스도를 섬기며 고난받는 일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바울은 묶였지만 말씀은 묶이지 않았다
그 복음 때문에 나는 범죄자처럼 사슬에 묶이기까지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묶여 있지 않습니다.디모데후서 2:9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의 처지를 숨기지 않습니다. 「범죄자처럼」은 그가 실제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인정하는 말이 아니라, 범죄자와 같은 취급을 받는 처지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이 문장에서 「묶이다」라는 말은 두 번 나타납니다. 바울이 사슬에 묶여 있다는 진술과 하나님의 말씀이 묶여 있지 않다는 진술입니다. 바울의 구속 상태와 하나님의 말씀의 자유가 언어 자체로 대조됩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사실로부터 하나님이 패배하셨다거나 복음이 실패했다고 결론짓지 않습니다.
바울의 사역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그의 몸은 묶일 수 있습니다. 그의 이동도 막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그렇게 구금할 수는 없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언제나 복음 전파자들을 감옥에서 구출하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바울은 실제로 사슬에 매여 있습니다. 또한 모든 복음 사역이 반드시 눈에 보이는 성공을 거둔다는 보장도 아닙니다. 이 장의 뒤에서는 거짓된 가르침 때문에 실제로 몇몇 사람의 믿음이 무너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선언하는 것은 더 근본적인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진실성은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현재 처지에 갇혀 있지 않습니다. 이것이 감옥에 갇힌 사람이 디모데에게 계속 가르치고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맡기라고 권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택함을 받은 이들이 구원을 얻도록
그러기에 나는 택함을 받은 이들을 위하여 모든 것을 견딥니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원한 영광이 따르는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디모데후서 2:10 · 본디새김
그들이 이미 택함을 받은 사람들이라면 왜 바울이 고난을 견디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과 복음 전파를 서로 반대되는 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 목적에 참여하는 자신의 수고가 의미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택함받은 사람들의 명단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고, 누가 구원받을지 판정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밝히는 것은 자신의 사역이 지향하는 목적입니다.
그가 추구하는 결실은 자기 명예의 회복이 아닙니다.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숫자를 늘리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구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제 그 구원의 소망과 경고를 짧은 신앙 고백의 형식으로 제시합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의 그리스어 원문에서도 부활을 나타내는 말이 앞에 놓입니다. 「다시 살아나셨고」에 해당하는 에게게르메논은 완료 수동 분사로, 일으켜지신 사건과 그 결과의 지속성을 함께 나타냅니다. 사무엘하 7:12–16에서 여호와야훼는 다윗의 뒤를 이을 후손과 왕조에 관한 약속을 주시는데, 그 약속은 처음에는 다윗의 아들과 왕조의 계승을 향하지만 이후 장차 올 이상적인 통치자에 대한 기대를 형성하는 본문이 되었습니다. 신약은 예수님을 그 다윗 계열의 메시아로 선포하며, 로마서 1:3–4 역시 다윗의 후손으로 나심과 부활을 함께 제시합니다. 9절에서는 사슬을 뜻하는 데스모스와 묶는다는 동사 데오가 같은 어근에 속합니다.
우리가 흔들릴 때도 믿음직한 분 — 그러나 무엇에 신실하신가
바울은 네 개의 짧은 조건문을 제시합니다.
함께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믿음직한 말입니다. 곧, 우리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입니다.디모데후서 2:11 · 본디새김
여기서 함께 죽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죽음에 참여한 신앙의 현실을 뜻한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로마서 6:3–8에서 바울은 세례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을 설명합니다. 반면 디모데후서 2장의 직접적인 문맥은 복음을 위한 고난과 인내이므로,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까지 감수하는 충실함과 관련해서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두 읽기는 완전히 배타적이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신앙의 고백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감당하는 삶의 토대가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죽음 자체를 미화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것에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목적지가 아닙니다. 생명이 약속의 중심입니다.
우리가 견디면 또한 함께 왕으로 다스릴 것입니다. 우리가 부인하면 그분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입니다.디모데후서 2:12 · 본디새김
견딘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신뢰를 버리지 않고 고난 가운데 머무는 충실함입니다. 그 결과는 앞서 다윗의 후손으로 소개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으로 다스리는 것으로 표현됩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소망을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인하면」 — 경고를 지우지 말아야 한다
12절의 둘째 문장은 분위기를 바꿉니다.
함께 살고 함께 왕으로 다스린다는 약속 뒤에 부인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나타납니다. 이 표현은 마태복음 10:32–33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인정하거나 부인하는 일에 관해 하신 말씀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직접 인용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와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거나 거부하는 일이 중요하다는 동일한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이 경고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했던 권면과도 이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 불이익을 가져올 때, 사람은 그분과의 관계를 부인하고 싶어질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 선택을 사소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나오는 넷째 문장이 독자를 멈추게 합니다.
우리가 믿지 않으면 그분은 믿음직한 분으로 남아 계십니다. 그분은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디모데후서 2:13 · 본디새김
그분의 신실하심은 무조건적인 면죄부인가
「우리가 믿지 않으면」(에이 아피스투멘)은 믿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신실하지 못하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뒤에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믿음직한」이라는 말이 나오므로, 인간의 신실하지 못함과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대조하는 표현으로 읽는 해석도 강한 근거를 가집니다.
문제는 그분이 무엇에 신실하신가입니다.
한쪽 해석은 이 말씀을 위로로 읽습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때로 신실하지 못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구원 약속에 신실하시므로 인간의 불완전함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무효로 만들지는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해석은 앞의 경고를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약속뿐 아니라 경고에도 신실하시므로, 그분을 지속적으로 부인하는 일이 아무런 결과 없이 끝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해석 모두 문맥과 연결되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13절을 12절과 떼어 내어,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하든 구원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선언으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이 구절을 오직 심판의 위협으로만 축소하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바울은 분명히 인간의 불신실함과 대비하여 그리스도의 변하지 않는 신실하심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가장 확실한 것은 마지막 문장, 「그분은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은 인간의 행동에 따라 임의로 변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분 자신이 누구이신가에 근거합니다.
인간은 자신이 고백한 것을 부인할 수 있습니다. 신뢰했던 것을 저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따라서 이 고백은 막연한 낙관주의를 허락하지도, 인간의 실패를 그리스도보다 더 강한 최종적 현실로 만들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약속과 인간을 향한 경고를 모두 그리스도의 신실하심 아래 놓습니다.
디모데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그리스도를 기억하는 일입니다.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다룬다는 것
모든 말다툼이 진리를 위한 것은 아니다
14절부터 바울은 공동체 안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문제를 다룹니다.
하나님 앞에서 말을 두고 다투지 말라고 엄히 이르며, 이것들을 일깨워 주십시오. 그런 다툼은 아무 유익도 주지 못하고 듣는 이들을 무너뜨릴 뿐입니다.디모데후서 2:14 · 본디새김
바울은 말로 하는 모든 논쟁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읽으면 곧이어 나오는 명령, 곧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다루고 거짓된 가르침을 분별하며 맞서는 사람들을 바로잡으라는 명령과 충돌합니다. 바울이 금지하는 것은 「말을 두고 다투는」 일이며, 그 기준은 유익이 없고 듣는 사람들을 무너뜨린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논쟁 당사자들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르치는 사람들이 서로 다투는 동안 그 다툼을 듣는 공동체의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습니다. 이들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논쟁의 결과를 떠안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은 진리의 중요성을 낮추는 태도가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가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바르게 다루다」는 정확히 무엇인가
그대 자신을 인정받은 사람, 곧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다루는 부끄러울 것 없는 일꾼으로 하나님께 내보이기에 힘쓰십시오.디모데후서 2:15 · 본디새김
「바르게 다루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오르토토메오(ὀρθοτομέω)는 신약에서 이곳에만 나타납니다. 그 구성 요소는 「곧다」와 「자르다」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바울이 진리의 말씀을 칼로 여러 부분으로 잘라 나누라고 명령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문맥상 의미는 진리의 말씀을 왜곡하지 않고 정확하고 바르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앞의 비유들과 어울립니다. 경기하는 사람은 규칙대로 경기해야 하고, 진리의 말씀을 맡은 일꾼은 말씀을 바르게 다루어야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얻기 위해 말씀의 의미를 비틀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그 일꾼의 인정은 하나님께 받아야 합니다. 말다툼에서는 다른 사람 앞에서 이기는 일이 목적이 되기 쉽지만,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보이는 일꾼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논증에 굴복했는지가 아니라 자신이 말씀을 충실하게 다루었는가입니다.
진리를 바르게 다루는 사람은 자기 말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말보다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않는 사람입니다.
괴저처럼 퍼지는 말
속된 빈말은 멀리하십시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은 불경건으로 더 나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말은 괴저처럼 퍼져 나갈 것입니다. 그런 이들 가운데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습니다.디모데후서 2:16–17 · 본디새김
괴저는 신체 조직이 죽어 가는 심각한 병적 상태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잘못된 말을 듣기 불편한 소음이나 지적인 오류가 아니라, 건강한 조직을 훼손하며 퍼지는 질병에 비유합니다.
어떤 말은 사람의 믿음을 세웁니다. 어떤 말은 사람의 믿음을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말을 하는 사람들이 「불경건으로 더 나아갈 것」이라고 합니다. 잘못된 가르침은 사소한 지적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 삶의 방향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에서 빗나갔고,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말하면서 몇몇 사람의 믿음을 뒤엎고 있습니다.디모데후서 2:18 · 본디새김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는 말의 위험
처음에는 이 주장이 오히려 부활을 긍정하는 말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들은 부활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부활은 8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니라, 신자들이 참여할 부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들이 믿음을 갖게 되는 영적인 변화를 부활의 전부로 이해했을 가능성도, 미래의 실제적인 부활을 부정하고 현재의 영적 상태만을 중요하게 여겼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을 정확하게 재구성할 자료는 부족하고, 어떤 사상적 배경에서 그렇게 가르쳤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신자가 이미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고 있다는 표현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현재의 참여가 부활에 대한 미래의 소망을 완전히 대체한다고 주장하는 경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신자들에게 여전히 부활의 소망이 있다는 사실은 함께 있어야 하며, 18절의 가르침은 그 균형을 무너뜨리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8절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한 뒤 18절에서 이 가르침을 경계하는 것도 그래서입니다. 부활을 말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가르침이 복음에 충실한 것은 아닙니다. 부활을 무엇이라고 말하는지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문제가 몇몇 사람의 믿음을 「뒤엎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제 바울은 그 무너짐과 대조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무너지지 않는 기초입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구약성경의 잠언 3:6과 11:5에서는 길을 곧게 한다는 의미로 「바르게 다루다」와 관련된 용법이 나타납니다. 부활에 관해서는 로마서 6:4–5에서 바울이 예수님과 연합한 신자가 이미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고 말하면서도 장차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할 소망을 이야기하고, 골로새서 3:1에서는 신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일으켜졌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12–23에서는 예수님께서 살아나셨지만 신자들의 부활은 없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논증의 핵심입니다.
무너지지 않는 기초에 새겨진 두 문장
그렇지만 하나님의 견고한 기초는 다음과 같은 인장을 지니고 굳게 서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에게 속한 이들을 아신다.」 그리고 「주의 이름을 일컫는 사람은 모두 불의에서 떠나라.」디모데후서 2:19 · 본디새김
18절에서는 몇몇 사람의 믿음이 뒤엎어지고 있었습니다.
19절에서는 하나님의 기초가 굳게 서 있습니다.
바울은 잘못된 가르침이 실제로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근본적으로 무너졌다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그 기초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논의가 있습니다. 예수님 자신, 복음의 진리,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를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이 있지만, 본문은 대상을 명시하지 않으므로 하나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바울은 그 기초의 재료나 형태보다 거기에 새겨진 두 문장을 강조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아신다는 선언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불의에서 떠나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과 하나님의 백성에게 요구되는 일이 함께 새겨져 있습니다.
고라의 반역을 떠올리게 하는 첫 번째 인장
첫째 문장의 배경은 민수기 16장입니다.
고라와 그 무리는 공동체 전체가 거룩하다고 주장하면서 왜 모세와 아론이 자신들을 높이느냐고 항의합니다(민수기 16:3). 그때 모세는 누가 여호와야훼께 속한 사람이며 누구를 가까이 오게 하실 것인지를 여호와야훼께서 드러내실 것이라고 말합니다(민수기 16:5). 디모데후서 2:19의 첫 문장은 그리스어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바로 그 선언을 인용합니다.
민수기 16장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을 아신다는 일반적인 교훈만을 담은 장면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와 권위가 다투어지는 상황에서 누가 실제로 하나님께 속했는가를 하나님 자신이 밝히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디모데후서에서도 거짓된 가르침이 공동체를 흔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서로의 신앙을 공격하거나 자기편이 옳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누가 참으로 자신에게 속한 사람인지 궁극적으로 아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 말은 공동체가 진리를 분별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둘째 문장 「주의 이름을 일컫는 사람은 모두 불의에서 떠나라」가 그 사실을 보여 줍니다. 민수기 16:26에서도 모세는 백성에게 반역한 사람들의 장막에서 떠나라고 명령합니다. 그 구절을 그대로 인용한 문장은 아니지만, 악에서 떠나라는 점에서 민수기 16장의 문맥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속한 사람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불의에서 떠나야 합니다.
첫째 문장은 하나님의 판단을 인간이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웁니다. 둘째 문장은 하나님이 아신다는 사실을 핑계로 인간이 자신의 삶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잃어버린 채 무력하게 계신 분이 아닙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진리에서 분리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이제 이 원리를 집 안의 그릇들에 관한 비유로 발전시킵니다.
금그릇이 되는 것보다 중요한 일
큰 집에는 여러 종류의 그릇이 있다
그런데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습니다. 어떤 것은 귀한 용도로 쓰이고 어떤 것은 천한 용도로 쓰입니다.디모데후서 2:20 · 본디새김
이 비유는 얼핏 사람들의 등급을 구분하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어떤 사람은 본래부터 귀하고 어떤 사람은 본래부터 천하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결론짓기 전에 다음 절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들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한 용도로 쓰이는 그릇, 곧 거룩해졌으며 주인에게 쓸모 있는, 모든 선한 일을 위해 준비된 그릇이 될 것입니다.디모데후서 2:21 · 본디새김
결정적인 말은 「누구든지」입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귀한 용도로 쓰이는 그릇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릇의 비유는 인간의 본래적인 가치나 사회적 신분을 구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중심은 그릇의 재질이 아니라 그릇이 어떤 용도로 쓰일 수 있는가입니다. 거룩해졌으며, 주인에게 쓸모 있고, 모든 선한 일을 위해 준비된 그릇이라는 세 표현은 모두 그릇 자체의 명예보다 주인과의 관계를 강조합니다.
그릇은 자신을 전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사용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무엇으로부터 깨끗해져야 하는가
21절의 「이런 것들에서」는 앞에 언급된 것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직접적으로는 천한 용도의 그릇들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유가 실제로 지시하는 대상에 대해서는 해석이 나뉩니다.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리는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구별하라는 뜻일 수 있고, 앞에서 언급한 불경건한 말과 악한 행실을 제거하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문맥상 두 문제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무조건 특정한 사람들과 모든 관계를 끊으라는 명령으로 만드는 것은 지나칩니다. 장의 마지막에서 바울은 반대하는 사람들을 온유하게 바로잡아 주라고 명령합니다. 깨끗하게 된다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과 불의를 멀리하는 것이지, 오류에 빠진 사람들의 회복 가능성까지 포기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금그릇이 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주인에게 쓸모 있는」 그릇이 되라고 합니다.
이것은 4절의 병사 비유와도 연결됩니다. 병사는 자신을 병사로 뽑은 이를 기쁘게 하려 하고, 그릇은 주인에게 쓸모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의 목적은 자신이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부르신 분의 뜻에 합당하게 준비되는 것입니다.
달아나야 할 것과 뒤쫓아야 할 것
젊은이 특유의 욕망에서 달아나십시오. 도리어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이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뒤쫓으십시오.디모데후서 2:22 · 본디새김
여기에는 두 가지 움직임이 있습니다. 달아나는 것과 뒤쫓는 것입니다.
「젊은이 특유의 욕망」은 흔히 성적 욕망만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됩니다. 그것도 포함될 수 있지만, 바울이 계속해서 말다툼과 논쟁을 경계하고 있으므로 성급함, 자기주장, 인정받으려는 욕망, 논쟁에서 이기려는 충동 등도 이 문맥에서 경계해야 할 욕망으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이 이런 항목들을 하나하나 명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추구하라고 하는 것은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입니다. 이 장의 흐름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평화입니다. 바울은 진리를 바르게 다루라고 명령한 뒤, 잘못된 가르침을 경계하면서 평화를 뒤쫓으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평화를 위해 진리를 포기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진리를 붙든다는 이유로 평화를 파괴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디모데는 이것들을 혼자서가 아니라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이들과 함께」 추구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릇 비유는 개인적인 자기 정결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복음을 맡은 사람이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목적은 자기만 깨끗한 사람이라고 선언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진리를 지키는 일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고립된 자기 확신이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추구하는 삶이어야 합니다.
이제 바울은 그 삶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자신에게 맞서는 사람을 만났을 때입니다.
「주의 노예는 다투어서는 안 됩니다」
논쟁은 피하되,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리석고 무지한 논쟁거리는 물리치십시오. 그런 논쟁거리가 다툼을 낳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디모데후서 2:23 · 본디새김
이 구절은 앞에서 여러 번 등장한 경고를 되받습니다. 진리를 지켜야 하는 사람에게 다툼은 왜 그렇게 위험합니까?
그 이유는 다음 절에 있습니다.
주의 노예는 다투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모든 사람을 온화하게 대하고, 가르치기를 잘하고, 당하는 악을 참아 내고, 맞서는 이들을 온유하게 바로잡아 주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진리를 온전히 알게 하는 회개를 주시고,디모데후서 2:24–25 · 본디새김
「노예」(δοῦλος)는 실제 고대 사회에서 다른 사람에게 속한 법적 신분을 가리키던 낱말이며, 본문은 그 표현을 주님께 속하여 주님의 뜻을 수행하는 사람에게 적용합니다. 이 비유를 역사적 노예제도 자체에 대한 승인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주의 노예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관계입니다.
그는 자기 명예를 위해 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리가 자기 소유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주님께 속한 사람이며, 주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바울은 온유함과 가르치는 능력을 나란히 놓습니다. 온유하다는 이유로 가르치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니고, 가르칠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온유하지 않아도 되는 것도 아닙니다.
「당하는 악을 참아 내고」는 악을 묵인하거나 악한 행동을 옳다고 인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부당한 대우를 받을 때 그것을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사가 상대방을 바로잡으면서도 자기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공격적으로 행동한다면, 그 가르침이 지닌 좋은 목적을 자신의 행동으로 훼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온유함이 침묵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로잡아 주다」는 가르치고 훈육하며 기르는 의미를 가진 말로, 틀린 주장에 반박하는 것보다 넓습니다. 잘못된 길에 들어선 사람을 가르쳐 올바른 길로 돌아오게 하는 것입니다.
잘못을 지적하는 일이 목적이 아니라, 잘못된 길에 들어선 사람이 돌아오도록 돕는 것이 목적입니다.
회개는 논쟁에서 패배한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
25절의 뒷부분은 그 목적을 더욱 분명하게 합니다.
디모데가 상대방에게 회개를 만들어 낸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회개를 주신다고 말합니다. 디모데는 가르치고 바로잡을 수 있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일은 그가 통제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바울은 온유하게 가르치기만 하면 상대방이 반드시 회개할 것이라고 보장하지 않습니다. 회개의 가능성을 바라보며 가르치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진리를 분명하게 말하는 책임감과, 자신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지배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겸손을 동시에 요구합니다.
이것은 논쟁에서의 승리와 회개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어떤 사람은 논쟁에서 패배했다고 인정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진리로 돌아오는 사람은 지적인 패배를 경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회개는 「진리를 온전히 알게 하는」 것으로 설명됩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정확한 정보를 얻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생각과 삶이 바뀌는 것과 연결됩니다.
올무에 사로잡힌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마귀에게 산 채로 사로잡혀 그의 뜻을 따르게 된 그들이 정신을 차리고 그 올무에서 벗어날지도 모릅니다.디모데후서 2:26 · 본디새김
여기에는 시점의 전환이 있습니다. 앞에서는 그릇된 가르침을 퍼뜨리는 사람들의 말이 괴저처럼 퍼지고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뒤엎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그들 자신도 사로잡혀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잘못된 가르침의 위험을 조금도 가볍게 여기지 않지만, 그 가르침에 빠진 사람들을 단순히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올무에서 벗어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잘못된 가르침에 사로잡힌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종류의 속박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26절의 대명사들은 읽기가 갈립니다. 두 대명사 모두 마귀를 가리킨다고 보는 읽기, 두 번째 대명사가 하나님의 뜻을 가리킨다고 보는 읽기, 사로잡는 행위의 주체를 주의 노예와 연결하는 읽기가 있습니다.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그들이 누구의 뜻을 따르게 되는지가 달라지지만, 문법과 문맥에 따라 견해가 갈리므로 하나의 읽기만 절대적인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의 중심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그릇된 가르침에 빠진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가르침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고, 그것이 가져오는 해악도 실제적입니다. 그러나 잘못된 가르침을 하는 사람을 회복의 가능성이 없는 적으로만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진리를 알게 되어야 할 사람입니다. 회개가 필요한 사람입니다. 올무에서 벗어나야 할 사람입니다.
상대방을 짓눌러 침묵시키려는 사람과, 상대방이 진리를 깨닫고 올무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사람은 같은 말을 하더라도 그 태도와 목적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온유함은 진리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서 선택하는 타협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향한 목적이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회복이기 때문에 요구되는 태도입니다.
조금 더 깊이
「당하는 악을 참아 내는」에 해당하는 아넥시카코스는 신약에서 이곳에만 등장하며,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해를 참아 내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바로잡아 주다」는 파이듀오입니다. 26절의 원문은 사로잡은 이를 나타내는 대명사와 누구의 뜻을 따르는지를 나타내는 대명사를 서로 다른 형태로 사용합니다. 두 대명사 모두 마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이지만, 두 번째 대명사를 하나님으로 읽으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올무 앞에 선 교사
디모데후서 2장의 마지막 장면에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 앞에서 바울이 요구한 강인함은 뜻밖의 방향으로 구체화됩니다. 병사처럼 견디고, 경기하는 사람처럼 규칙을 지키며, 농부처럼 수고하라던 명령이 마지막에는 모든 사람을 온화하게 대하고 맞서는 사람을 온유하게 바로잡아 주라는 명령에 이릅니다. 처음의 강인함과 마지막의 온유함은 서로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힘을 얻으라는 1절의 명령이 마지막까지 이어진 결과입니다.
바울은 가르침의 내용을 조금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사람의 믿음을 뒤엎는 잘못된 가르침을 경계하고 바로잡아야 한다는 요구는 그대로 남습니다. 그러나 내용만 옳으면 어떤 방식으로 전달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거부합니다.
진리는 자신이 소유한 무기가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한 사람은 잘못된 가르침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확신할 수도 있고, 자신의 주장이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의 상태를 올무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주의 노예입니다. 그는 진리의 말씀을 맡았고, 잘못된 가르침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상대방을 공격할 이유가 충분해 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에게 다투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상대방보다 약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가 섬기는 주님이 누구이신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주님은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교사는 올무에 사로잡힌 사람 앞에서 논쟁의 승리를 최종 목표로 삼지 않고, 그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진리를 깨닫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이 강제로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교사는 가르칩니다.
온유하게 바로잡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회개를 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그 사람이 실제로 올무에서 벗어났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 가능성을 열어 둔 채 끝납니다.
바울은 사슬에 묶여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묶여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디모데가 그 자유로운 말씀을 바르게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사로잡힌 또 다른 사람이 그 말씀을 통해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진리를 지키는 일은 끝내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일과 만납니다.
그래서 이 장은 한 사람에게 맡겨진 복음의 전승으로 시작하여, 올무에 사로잡힌 다른 한 사람이 그 올무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