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풀어 읽기 · 2장
이 장의 자리 · 2장 · 함께 겪는 고난
묶인 사람과 묶이지 않은 말씀
디모데후서 2장에는 얼핏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 명령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진리를 끝까지 지키라는 것입니다. 디모데는 훌륭한 군인처럼 고난을 견디고, 경기에 나선 사람처럼 규칙을 지키며, 수고하는 농부처럼 자기 일에 힘써야 합니다.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다루고, 잘못된 가르침이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지 못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런데 다른 하나는 다투지 말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종은 다투어서는 안 됩니다」(2:24). 맞서는 사람들조차 「온화하게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2:25).
바울은 진리를 조금도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잘못된 가르침을 살이 썩어 들어가는 병에 비유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진리를 지키는 사람에게 요구하는 태도는 공격성이나 논쟁에서의 승리가 아니라 부드러움과 인내입니다.
어째서 그럴까요?
진리를 지키는 것과 논쟁에서 이기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려면 2장의 한가운데 있는 장면부터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혀 「범죄자처럼 쇠사슬에 묶이는 고난까지」 겪으면서도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묶여 있지 않습니다」라고 선언합니다(2:9). 이 문장이 장 전체를 읽는 방향을 정해 줍니다. 사람은 묶일 수 있지만, 복음의 능력을 사람의 처지와 같게 볼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장의 마지막에는 또 다른 방식으로 사로잡힌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잘못된 가르침에 빠진 이들은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 덫에 걸린 사람들로 묘사됩니다(2:26).
처음에는 바울이 쇠사슬에 묶여 있고, 마지막에는 진리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마귀의 덫에 걸려 있습니다.
그 사이에서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충실하게 전하고, 고난을 견디며, 사람을 무너뜨리는 논쟁을 피하고, 잘못된 길에 들어선 사람들이 진리로 돌아오도록 온화하게 도우라고 가르칩니다. 그 목적은 자신이 옳다는 것을 뽐내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구원을 얻도록 하는 것입니다(2:10).
한 사람에게 맡긴 말이 다른 사람에게 건너가다
강해지라는 명령의 출발점은 은혜다
바울은 디모데를 직접 부르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자녀인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로 힘을 얻으십시오.디모데후서 2:1 · 두루새김
「그러므로」는 앞 장과 연결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맡겨진 것을 지키라고 권했고, 이제 그 일을 어떻게 이어 갈 것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자기 안에서 힘을 짜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로 힘을 얻으라고 말합니다. 곧이어 바울은 디모데에게 매우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고난을 견디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거짓된 가르침에 맞서며,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요구에 앞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놓여 있습니다.
그 은혜는 한 번 받아 두었다가 자기 힘으로 소진해 가는 자원이 아니라, 계속해서 그 안에서 힘을 얻어야 하는 토대입니다.
복음은 디모데에게서 멈추면 안 된다
많은 증인 앞에서 나에게 들은 것을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맡기십시오.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가르칠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합니다.디모데후서 2:2 · 두루새김
바울이 디모데에게 전한 것을 디모데는 믿음직한 사람들에게 맡겨야 하고, 그들은 다시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한 사람에게서 다음 사람에게 넘어갑니다.
이 연쇄는 유명한 지도자나 특별한 권위를 가진 사람의 명단으로 제시되지 않습니다. 바울이 언급한 기준은 두 가지입니다. 그들은 믿음직해야 하고, 다른 이들을 가르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직한」은 신뢰할 수 있고 충실하다는 의미로, 맡겨진 것을 책임 있게 다룰 사람이라는 뜻이 강조됩니다. 가르칠 능력 역시 필요합니다. 아무리 말솜씨가 뛰어나도 신뢰할 수 없는 사람에게 복음을 맡기는 것은 위험하고, 아무리 성실해도 가르칠 능력이 부족하다면 이 구절이 요구하는 역할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증인 앞에서」는 여러 증인을 거쳐서 들었다는 뜻으로도, 여러 증인이 있는 자리에서 들었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루새김은 바울의 가르침이 여러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전달되었다는 뒤의 뜻을 따랐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디모데가 받은 가르침을 다음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만이 알고 있는 지식으로 영향력을 유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그 지식을 충실하게 이어받도록 만드는 사람이 좋은 교사입니다.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어도 복음 전파가 끝나지 않는 이유가 여기서부터 나타납니다. 그의 말을 들은 디모데가 있고, 디모데에게서 가르침을 받을 사람들이 있으며, 그들로부터 또 다른 사람들이 배울 수 있습니다. 바울의 몸은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가 맡은 복음은 다른 사람들의 입을 통해 계속 전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과정이 결코 쉽지만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1절의 「힘을 얻으십시오」는 강하게 된다는 뜻의 동사로 현재 명령형입니다. 중간태와 수동태가 형태상 같아서 문법만으로 둘을 완전히 구분할 수는 없지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로」라는 표현이 힘의 근원을 분명하게 합니다. 2절의 증인들이 구체적으로 누구인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군인과 경기에 나선 사람과 농부 — 왜 세 사람이 필요한가
바울은 디모데에게 세 가지 비유를 연이어 제시합니다.
군인은 누구를 기쁘게 하려는지 생각합니다. 경기에 나선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경기해야 하는지 생각합니다. 농부는 수고와 결실의 관계를 보여 줍니다. 이 세 가지가 함께 있어야 복음을 맡은 사람의 삶이 균형 있게 설명됩니다.
군인 — 무엇에 얽혀 있는가
그리스도 예수의 훌륭한 군인으로서 함께 고난을 겪으십시오. 군인으로 복무하는 사람은 자기를 군인으로 뽑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고 일상생활의 여러 일에 얽매이지 않습니다.디모데후서 2:3–4 · 두루새김
군인의 특징은 고난을 좋아한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자신을 군인으로 뽑은 사람의 명령을 우선한다는 데 있습니다. 다른 일에 지나치게 얽매여 본래의 임무를 감당하지 못한다면 군인으로서 충실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세상의 모든 일에서 손을 떼라는 명령으로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바울은 생업이나 가족관계 자체를 죄악으로 규정하지 않습니다. 디모데전서 5:8에서도 자기 가족을 돌보는 책임을 강조합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일상생활 그 자체가 아니라, 삶의 여러 문제가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좌우하게 되는 「얽매인」 상태입니다.
군인은 누구를 기쁘게 하려는지 알고 있어야 합니다. 디모데 역시 자기 성공이나 사람들의 인정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예수의 훌륭한 군인」으로서 고난을 함께 겪으라고 합니다.
이 비유의 중심은 군대식 권위주의가 아니라 충성의 대상입니다.
경기에 나선 사람 — 결과뿐 아니라 방식도 중요하다
경기에 나선 사람도 규칙대로 경기하지 않으면 승리의 관을 받지 못합니다.디모데후서 2:5 · 두루새김
군인의 비유가 헌신의 대상을 강조한다면, 경기에 나선 사람의 비유는 그 헌신의 방식을 강조합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의 운동경기에서 승리의 관은 명예의 상징이었지만, 승리하기 위해 규칙을 무시할 수는 없었습니다.
이 말은 2장의 뒷부분을 읽을 때 새로운 의미를 얻습니다. 디모데는 잘못된 가르침에 맞서야 합니다. 그런데 진리를 지킨다는 이유로 분별없는 말다툼에 빠지거나 상대를 공격하는 데 몰두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결과가 옳다고 여기는 것만으로 모든 방법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뒤에서 바울이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다루라고 하고, 맞서는 사람들을 온화하게 바로잡으라고 명령하는 것은 바로 이 원리와 연결됩니다.
농부 — 수고하는 사람이 결실에 참여한다
수고하는 농부가 수확한 것을 먼저 나누어 받아야 합니다.디모데후서 2:6 · 두루새김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수고하는」 농부입니다. 「먼저」(πρῶτος)는 농부가 수고한 다음에야 결실을 얻는다는 시간적 순서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그리스어 문장의 자연스러운 읽기는 열심히 일한 농부가 수확한 것의 첫 몫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결실 없이 끝없이 희생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수고하는 사람에게는 그 수고에 합당한 몫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비유를 당장의 성공이나 물질적 보상을 보장하는 약속으로 바꿀 수는 없습니다.
세 비유를 함께 놓으면, 군인처럼 자신을 부르신 분께 충실하고, 경기에 나선 사람처럼 올바른 방식으로 일하며, 농부처럼 수고를 감당하는 삶이 드러납니다. 그런데 바울은 비유를 하나하나 해설해 주지 않습니다.
내가 하는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께서 모든 면에서 깨달음을 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디모데후서 2:7 · 두루새김
바울은 생각하지 말고 믿으라고 하지 않습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라고 명령하면서, 동시에 깨달음은 주님께서 주신다고 말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깨우침이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깨달음을 주시므로 디모데는 더욱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을 가장 깊이 생각해야 합니까?
조금 더 깊이
고린도전서 9:7에서도 바울은 군인과 농부의 비유를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생활에 필요한 지원을 받는 것이 정당하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디모데후서 2장의 강조점은 그보다 넓어서, 고난을 견디며 맡은 일을 충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에게 결실의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 — 모든 권면의 중심
부활을 먼저 말하고, 다윗의 후손임을 덧붙이다
내가 전하는 복음대로, 다윗의 후손이시며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십시오.디모데후서 2:8 · 두루새김
바울은 군인이나 경기에 나선 사람의 관, 농부의 수고를 기억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합니다.
「기억하십시오」는 잊어버린 정보를 떠올리라는 말에 그치지 않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일과 고난을 판단할 때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과 생각의 중심에 두라는 명령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에 대해 두 가지를 말합니다.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과 다윗의 후손이시라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신 일이 먼저이지만,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바울이 부활을 먼저 말합니다.
다윗의 후손이라는 표현은 단순한 족보 정보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왕권과 하나님이 다윗에게 주신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디모데가 기억해야 할 주님은 단지 고난을 잘 견디신 위대한 인물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왕권과 연결되어 있으시며, 죽음을 통과하여 부활하신 메시아이십니다.
그분의 왕권은 고난과 죽음을 피해 가는 방식으로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디모데가 그리스도를 섬기며 고난받는 일이 이해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바울은 묶였지만 말씀은 묶이지 않았다
이 복음 때문에 나는 범죄자처럼 쇠사슬에 묶이는 고난까지 겪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묶여 있지 않습니다.디모데후서 2:9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의 처지를 숨기지 않습니다. 「범죄자처럼」은 그가 실제로 범죄를 저질렀다고 인정하는 말이 아니라, 범죄자와 같은 취급을 받는 처지에 놓였다는 뜻입니다.
이 문장에서 묶인다는 말은 두 번 나타납니다. 바울은 「쇠사슬에 묶이는 고난」을 겪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묶여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이 무능하시다는 증거로 보지 않습니다.
그의 몸은 묶일 수 있고, 그의 이동도 막힐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그렇게 가둘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말씀은 하나님이 언제나 복음 전파자들을 감옥에서 구출하신다는 약속도, 복음을 전하는 모든 일이 눈에 보이는 성공을 거둔다는 보장도 아닙니다. 바울은 실제로 쇠사슬에 매여 있고, 이 장의 뒤에서는 거짓된 가르침 때문에 몇몇 사람의 믿음이 무너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이 선언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과 진실성이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의 현재 처지에 갇혀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감옥에 갇힌 사람이 디모데에게 계속 가르치고 다른 사람들에게 복음을 맡기라고 권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이 구원을 얻도록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을 위해 모든 것을 견딥니다. 그들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디모데후서 2:10 · 두루새김
그들이 이미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이라면 왜 바울이 고난을 견디며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과 복음을 전하는 일을 서로 반대되는 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있기 때문에 그 목적에 참여하는 자신의 수고가 의미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사람들의 명단을 알고 있다고 주장하지 않고, 누구는 구원받고 누구는 그렇지 못할 것이라고 판정하지도 않습니다. 그가 밝히는 것은 자신이 복음을 전하는 목적입니다.
그가 추구하는 결실은 자기 명예의 회복도,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숫자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이 구원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의 「다시 살아나신」은 완료 수동 분사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일으켜지신 사건과 그 결과가 계속됨을 함께 나타냅니다. 다윗에게 주신 약속은 사무엘하 7:12–16에 나옵니다. 그 약속은 처음에는 다윗의 아들과 왕조의 계승을 향하지만, 이후 장차 올 이상적인 통치자에 대한 기대를 형성하는 본문이 되었습니다. 로마서 1:3–4도 예수님께서 다윗의 후손으로 나셨고 부활하셨다는 내용을 함께 제시합니다. 9절에서 사슬을 뜻하는 낱말과 묶는다는 동사는 그리스어에서도 같은 어근에 속해, 바울이 묶인 상태와 말씀의 자유를 말 자체로 대조합니다.
우리가 흔들릴 때도 믿을 만한 분 — 그러나 무엇에 신실하신가
바울은 이제 구원의 소망과 경고를 네 개의 짧은 조건문으로 된 신앙 고백으로 제시합니다.
함께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말은 믿을 만합니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다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것입니다.」디모데후서 2:11 · 두루새김
함께 죽는다는 말은 두 가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분의 죽음에 참여한 신앙의 현실로 읽을 수 있는데, 로마서 6:3–8에서 바울이 세례와 관련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사는 것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또 디모데후서 2장의 직접적인 문맥이 복음을 위한 고난과 인내이므로, 그리스도를 위해 죽음까지 감수하는 충실함으로 읽을 여지도 있습니다. 두 읽기는 서로를 완전히 배제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죽음 자체를 아름답게 꾸미지 않습니다. 죽음은 목적지가 아닙니다. 생명이 약속의 중심입니다.
「우리가 견디면, 또한 그분과 함께 왕으로 다스릴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부인하면, 그분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입니다.」디모데후서 2:12 · 두루새김
견딘다는 것은 시간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신뢰를 버리지 않고 고난 가운데 머무는 충실함입니다. 그 결과는 다윗의 후손으로 소개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왕으로 다스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난과 소망을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부인하면」 — 경고를 지우지 말아야 한다
12절 뒷부분은 분위기를 바꿉니다. 함께 살고 함께 왕으로 다스린다는 약속 뒤에, 부인에 대한 엄중한 경고가 나타납니다. 이 경고는 바울이 디모데에게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했던 권면과 이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일이 불이익을 가져올 때 사람은 그분과의 관계를 부인하고 싶어질 수 있고, 바울은 그 선택을 사소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곧바로 나오는 넷째 문장이 독자를 멈추게 합니다.
「우리가 믿음을 저버려도, 그분은 한결같이 믿을 만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디모데후서 2:13 · 두루새김
그분의 신실하심은 무조건적인 면죄부인가
「우리가 믿음을 저버려도」에 해당하는 에이 아피스투멘(ἀπιστέω)은 믿지 않는다는 뜻으로도, 신실하지 못하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로 뒤에 그리스도를 「한결같이 믿을 만한 분」이라고 하므로, 사람의 신실하지 못함과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을 대조하는 표현으로 읽는 해석도 강한 근거를 가집니다.
문제는 그분이 무엇에 신실하신가입니다.
한쪽 해석은 이 말씀을 위로로 읽습니다. 우리는 연약하여 믿음이 흔들리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구원 약속에 신실하시므로 사람의 불완전함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무효로 만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해석은 앞의 경고를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약속뿐 아니라 경고에도 신실하시므로, 그분을 지속적으로 부인하는 일이 아무런 결과 없이 끝나리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두 해석 모두 문맥과 연결되는 근거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13절을 12절과 떼어 내어,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하든 구원은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선언으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고 오직 심판의 위협으로만 줄여 읽는 것도 조심해야 합니다.
가장 확실한 것은 마지막 문장, 「그분은 자신을 부인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입니다. 그리스도의 신실하심은 사람의 행동에 따라 변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분 자신이 누구이신가에 근거합니다.
사람은 자신이 고백한 것을 부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누구이신지를 부인하실 수 없습니다.
이 고백은 막연한 낙관주의를 허락하지도, 사람의 실패를 그리스도보다 더 강한 최종적 현실로 만들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약속과 사람을 향한 경고를 모두 그리스도의 신실하심 아래 놓습니다.
조금 더 깊이
12절의 부인에 관한 경고는 마태복음 10:32–33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인정하거나 부인하는 일에 관해 하신 말씀과 긴밀하게 연결됩니다. 디모데후서가 그 말씀을 직접 인용한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같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다룬다는 것
모든 말다툼이 진리를 위한 것은 아니다
사람들에게 이 말들을 기억하게 하십시오. 말을 두고 다투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하게 당부하십시오. 그런 다툼은 아무 쓸모가 없고 듣는 사람들을 무너뜨릴 뿐입니다.디모데후서 2:14 · 두루새김
바울은 말로 하는 모든 논쟁을 금지하지 않습니다. 디모데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다루고, 거짓된 가르침을 가려내며, 맞서는 사람들을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바울이 금지하는 것은 「말을 두고 다투」는 일이고, 그 기준은 아무 쓸모가 없고 듣는 사람들을 무너뜨린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논쟁 당사자들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다툼을 듣는 사람들은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논쟁의 결과를 떠안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은 누가 더 날카롭게 반박했는지보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봅니다.
이것은 진리의 중요성을 낮추는 태도가 아니라, 진리가 사람을 살리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태도입니다.
「바르게 다루는」 것은 정확히 무엇인가
하나님께 인정받은 사람, 곧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다루는 부끄러울 것 없는 일꾼으로 자신을 보여 드리는 데 힘쓰십시오.디모데후서 2:15 · 두루새김
「바르게 다루는」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오르토토메오(ὀρθοτομέω)로, 신약에서 이곳에만 나타납니다. 이 낱말을 이루는 말들은 「곧다」와 「자르다」라는 의미를 가지지만, 바울이 진리의 말씀을 칼로 여러 부분으로 잘라 나누라고 명령한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문맥상 의미는 진리의 말씀을 비틀거나 그릇되게 다루지 않고 정확하고 바르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경기에 나선 사람은 규칙대로 경기해야 하고, 진리의 말씀을 맡은 일꾼은 말씀을 바르게 다루어야 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얻기 위해 말씀의 의미를 비틀어서는 안 됩니다.
말다툼에서는 다른 사람 앞에서 이기는 일이 목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자신을 보여 드리는 일꾼에게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이 자신의 주장에 굴복했는지가 아니라, 자신이 말씀을 충실하게 다루었는가입니다.
진리를 바르게 다루는 사람은 자기 말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말보다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않는 사람입니다.
괴저처럼 퍼지는 말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헛된 말은 멀리하십시오.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삶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그들의 말은 살이 썩어 들어가는 병처럼 퍼져 나갈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 가운데 휘메나이오스와 빌레도가 있습니다.디모데후서 2:16–17 · 두루새김
두루새김의 「살이 썩어 들어가는 병」은 몸의 조직이 죽어 가는 괴저를 풀어 쓴 말입니다. 바울은 잘못된 말을 듣기 불편한 소음이나 생각의 오류로 설명하지 않고, 건강한 조직을 해치며 퍼지는 질병에 비유합니다.
어떤 말은 사람의 믿음을 세웁니다. 어떤 말은 사람의 믿음을 무너뜨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삶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합니다. 잘못된 가르침은 삶과 무관한 사소한 생각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하는 태도와 삶의 방향에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진리에서 벗어났습니다.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말하면서 몇몇 사람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있습니다.디모데후서 2:18 · 두루새김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는 말의 위험
그들은 부활이 없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부활이 이미 일어났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부활은 8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니라, 신자들이 참여할 부활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들은 믿음을 갖게 되는 영적인 변화를 부활의 전부로 이해했을 수도 있고, 미래에 실제로 일어날 부활을 부정하고 현재의 영적 상태만 중요하게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어떤 생각의 배경에서 그렇게 가르쳤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신자가 이미 부활의 생명에 참여하고 있다는 표현 자체가 문제인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그 현재의 참여가 부활에 대한 미래의 소망을 완전히 대신한다고 주장하는 경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이미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신자들에게 여전히 부활의 소망이 있다는 사실은 함께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8절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한 뒤, 18절에서 부활을 잘못 가르치는 일을 경계합니다. 부활을 말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가르침이 복음에 충실한 것은 아닙니다. 부활을 무엇이라고 말하는지가 중요합니다.
이제 바울은 그 무너짐과 대조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조금 더 깊이
「바르게 다루다」와 관련된 표현은 그리스어 구약성경의 잠언 3:6과 11:5에서 길을 곧게 한다는 뜻으로 나타납니다. 부활에 관해서는, 로마서 6:4–5에서 바울이 신자가 이미 새로운 삶을 살면서도 장차 예수님의 부활에 참여할 소망을 말하고, 골로새서 3:1은 신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일으켜졌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12–23에서 바울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지만 신자들의 부활은 없다고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무너지지 않는 기초에 새겨진 두 문장
그러나 하나님의 튼튼한 기초는 굳게 서 있습니다. 거기에는 보증의 표로 이런 말이 새겨져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자신에게 속한 사람들을 아신다.」 또 이런 말도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악한 일에서 떠나라.」디모데후서 2:19 · 두루새김
18절에서는 몇몇 사람의 믿음이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19절에서는 하나님의 기초가 굳게 서 있습니다.
바울은 잘못된 가르침이 실제로 해를 끼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 때문에 하나님의 일이 뿌리부터 무너졌다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그 기초가 예수님 자신인지, 복음의 진리인지, 하나님께 속한 공동체인지는 논의가 있고, 본문이 대상을 밝히지 않으므로 하나로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거기에 새겨진 두 문장입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을 아신다는 선언이고, 둘째는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악한 일에서 떠나야 한다는 명령입니다.
고라의 반역을 떠올리게 하는 첫 번째 인장
첫째 문장의 배경은 민수기 16장입니다. 고라와 그 무리는 공동체 전체가 거룩하다고 주장하며 모세와 아론의 권위에 도전합니다(민수기 16:3). 그때 모세는 누가 하나님께 속한 사람인지를 하나님께서 드러내실 것이라고 말하고(민수기 16:5), 디모데후서 2:19의 첫 문장은 그리스어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바로 그 선언을 인용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을 아신다는 교훈만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와 권위를 두고 다투는 상황에서 누가 실제로 하나님께 속했는가를 하나님 자신이 밝히신다는 이야기입니다. 디모데후서에서도 거짓된 가르침이 공동체를 흔들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기편이 옳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누가 참으로 자신에게 속한 사람인지 끝내 아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이 말은 공동체가 진리를 가려낼 필요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둘째 문장,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누구나 악한 일에서 떠나라」가 그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자기에게 속한 사람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은 악한 일에서 떠나야 합니다.
첫째 문장은 하나님의 판단을 인간이 대신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깨우고, 둘째 문장은 하나님이 아신다는 사실을 핑계로 자신의 삶을 내버려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잃어버린 채 아무 힘 없이 계신 분이 아니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진리에서 분리할 수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민수기 16:26에서도 모세는 백성에게 반역한 사람들의 장막에서 떠나라고 명령합니다. 디모데후서의 두 번째 문장은 그 구절을 그대로 인용한 것은 아니지만, 악에서 떠나라는 점에서 민수기 16장의 문맥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금그릇이 되는 것보다 중요한 일
큰 집에는 여러 종류의 그릇이 있다
큰 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무그릇과 흙으로 빚은 그릇도 있습니다. 어떤 것은 귀한 용도로 쓰이고, 어떤 것은 천한 용도로 쓰입니다.디모데후서 2:20 · 두루새김
이 비유는 얼핏 사람들의 등급을 구분하는 이야기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은 본래부터 귀하고 어떤 사람은 본래부터 천하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결론짓기 전에 다음 절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들을 멀리하여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귀한 용도로 쓰이는 그릇이 될 것입니다. 거룩하게 되어 주인에게 쓸모가 있고, 모든 선한 일을 할 준비가 된 그릇이 되는 것입니다.디모데후서 2:21 · 두루새김
결정적인 말은 「누구든지」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깨끗하게 하면 귀한 용도로 쓰이는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릇의 비유는 인간이 본래 지닌 가치나 사회적 신분을 구분하는 데 있지 않습니다. 중심은 그릇의 재질이 아니라 그릇이 어떤 용도로 쓰일 수 있는가입니다.
거룩하게 되어 주인에게 쓸모가 있고, 모든 선한 일을 할 준비가 된 그릇. 세 표현은 모두 그릇 자체의 명예보다 주인과의 관계를 강조합니다.
그릇은 자신을 전시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인이 사용하기 위해 존재합니다.
무엇으로부터 깨끗해져야 하는가
「이런 것들」은 앞에 언급된 것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직접적으로는 천한 용도의 그릇들과 연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비유가 가리키는 대상은 해석이 나뉩니다. 잘못된 가르침을 퍼뜨리는 사람들에게서 자신을 구별하라는 뜻일 수도 있고,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는 말과 악한 행실을 없애라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문맥상 두 문제는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 구절을 특정한 사람들과 모든 관계를 끊으라는 명령으로 만드는 것은 지나칩니다. 장의 마지막에서 바울은 반대하는 사람들을 온화하게 바로잡아 주라고 명령합니다. 깨끗하게 된다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과 악한 일을 멀리하는 것이지, 오류에 빠진 사람들의 회복 가능성까지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금그릇이 되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주인에게 쓸모 있는 그릇이 되라고 합니다.
군인은 자신을 군인으로 뽑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하고, 그릇은 주인에게 쓸모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의 목적은 자신이 얼마나 귀한 사람인지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부르신 분의 뜻에 맞게 준비되는 것입니다.
달아나야 할 것과 뒤쫓아야 할 것
젊은 시절의 욕심을 피하십시오.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사람들과 함께 올바른 삶과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힘써 추구하십시오.디모데후서 2:22 · 두루새김
여기에는 피하는 것과 힘써 추구하는 것, 두 가지 움직임이 있습니다. 「젊은 시절의 욕심」은 흔히 성적 욕망만을 가리키는 말로 이해되지만, 문맥을 고려하면 거기에만 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바울은 계속해서 말다툼과 논쟁을 경계하고 있으므로, 성급함, 인정받으려는 욕심, 논쟁에서 이기려는 충동도 이 문맥에서 적용할 수 있습니다. 다만 본문이 이런 항목들을 하나하나 밝히는 것은 아닙니다.
추구할 것 가운데 이 장의 흐름에서 특별히 눈에 띄는 것은 평화입니다. 바울은 진리를 바르게 다루라고 명령한 뒤 평화를 힘써 추구하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평화를 위해 진리를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진리를 붙든다는 이유로 평화를 파괴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디모데는 혼자가 아니라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부르는 사람들과 함께」 추구하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목적은 자기만 깨끗한 사람이라고 선언하는 데 있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는 데 있습니다.
이제 바울은 그 삶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 어떻게 나타나야 하는지 설명합니다. 자신에게 맞서는 사람을 만났을 때입니다.
「주님의 종은 다투어서는 안 됩니다」
논쟁은 피하되,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다
어리석고 분별없는 논쟁이 다툼을 일으킨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런 논쟁은 피하십시오.디모데후서 2:23 · 두루새김
진리를 지켜야 하는 사람에게 다툼은 왜 그렇게 위험합니까? 그 이유는 다음 절에 있습니다.
주님의 종은 다투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고, 잘 가르치며,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참아야 합니다.디모데후서 2:24 · 두루새김
「종」(δοῦλος)은 고대 사회에서 다른 사람에게 속한 법적 신분인 노예를 가리키던 낱말입니다. 이 비유를 역사적 노예제도 자체에 대한 승인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강조되는 것은 주님의 종이 자신의 뜻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따라 행동해야 한다는 관계입니다.
그는 자기 명예를 위해 싸우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리가 자기 소유이기 때문에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주님께 속한 사람이고, 주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행동해야 합니다.
바울은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는 태도와 가르치는 능력을 나란히 놓습니다. 온화하다는 이유로 가르치지 않아도 되는 것도, 가르칠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온화하지 않아도 되는 것도 아닙니다.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참아야 합니다」는 악을 묵인하거나 악한 행동을 옳다고 인정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해를 견딜 수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교사가 상대방을 바로잡으면서도 자기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공격적으로 행동한다면, 그 가르침의 좋은 목적을 자신의 행동으로 해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온화함이 침묵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분명히 「맞서는 사람들을 온화하게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라고 말합니다(2:25). 「바로잡아 주어야」는 가르치고 훈육하며 기르는 의미를 가진 말로, 틀린 주장에 반박하는 것보다 넓습니다. 잘못을 지적하는 일이 목적이 아니라, 잘못된 길에 들어선 사람이 돌아오도록 돕는 것이 목적입니다.
회개는 논쟁에서 패배한 사람이 하는 일이 아니다
맞서는 사람들을 온화하게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회개하는 마음을 주셔서 진리를 깨닫게 하실지도 모릅니다.디모데후서 2:25 · 두루새김
디모데가 상대방에게 회개하는 마음을 만들어 준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마음을 주신다고 말합니다. 디모데는 가르치고 바로잡을 수 있지만, 상대방의 마음을 끝내 변화시키는 일은 통제할 수 없습니다.
「하실지도 모릅니다」도 같은 방향입니다. 바울은 온화하게 가르치기만 하면 상대방이 반드시 회개할 것이라고 보장하지 않습니다. 진리를 분명하게 말하는 책임감과, 자신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지배할 수 없다는 겸손을 함께 요구합니다.
이것은 논쟁에서의 승리와 회개 사이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어떤 사람은 논쟁에서 패배했다고 인정하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진리로 돌아오는 사람은 생각의 싸움에서 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진리를 안다는 것은 정확한 정보를 얻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생각과 삶이 바뀌는 것과 연결됩니다.
올무에 사로잡힌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또 그들은 마귀의 뜻을 따르도록 마귀에게 사로잡혀 있지만, 정신을 차리고 그 덫에서 벗어날지도 모릅니다.디모데후서 2:26 · 두루새김
앞에서는 그릇된 가르침을 퍼뜨리는 사람들이 공동체에 주는 피해를 설명했습니다. 이제는 그 사람들 자신도 사로잡혀 있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잘못된 가르침의 위험을 조금도 가볍게 여기지 않지만, 그 가르침에 빠진 사람들을 제거해야 할 대상으로만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덫에서 벗어나야 할 사람들입니다. 사로잡힌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새로운 종류의 속박이 아니라 자유입니다.
26절의 대명사들은 읽기가 갈립니다. 두 대명사 모두 마귀를 가리킨다고 보는 읽기(두루새김), 두 번째 대명사가 하나님의 뜻을 가리킨다고 보는 읽기, 사로잡는 행위의 주체를 주님의 종과 연결하는 읽기가 있습니다. 문법과 문맥에 따라 견해가 갈리므로 하나의 읽기만 절대적인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이든 본문의 중심 메시지는 분명합니다. 그릇된 가르침에 빠진 사람들이 정신을 차리고 마귀의 덫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가르침을 하는 사람을 회복의 가능성이 없는 적으로만 규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는 진리를 알게 되어야 할 사람이고, 회개가 필요한 사람이며, 덫에서 벗어나야 할 사람입니다.
온화함은 진리에 대한 확신이 부족해서 선택하는 타협이 아닙니다.
상대방을 향한 목적이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회복이기 때문에 요구되는 태도입니다.
조금 더 깊이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참아야」에 해당하는 낱말은 신약에서 이곳에만 등장하며, 다른 사람에게서 받는 해를 참아 내는 태도를 나타냅니다. 26절의 원문은 사로잡은 이를 나타내는 대명사와 누구의 뜻을 따르는지를 나타내는 대명사를 서로 다른 형태로 씁니다. 두 대명사 모두 마귀를 가리킨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해석이고 두루새김도 「마귀의 뜻을 따르도록 마귀에게 사로잡혀」로 이를 따릅니다. 두 번째 대명사를 하나님으로 읽으면 마귀의 덫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된다는 의미가 됩니다.
올무 앞에 선 교사
디모데후서 2장은 처음에 군인처럼 견디고, 경기에 나선 사람처럼 규칙을 지키며, 농부처럼 수고하라는 강인함을 요구합니다. 그런데 마지막에 이르면 그 강인함이 모든 사람을 부드럽게 대하고, 부당한 대우를 참으며, 맞서는 사람을 온화하게 바로잡는 모습으로 구체화됩니다. 둘은 모순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은혜로 힘을 얻으라는 1절의 명령이 마지막까지 이어진 결과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갈등을 피하기 위해 진리를 희생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진리는 자신이 소유한 무기가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으로 누군가를 바로잡을 때에도 상대방이 진리 안에서 회복되기를 바라야 합니다.
장의 마지막 장면에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잘못된 가르침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는 자신이 옳다고 확신할 수도 있고, 자신의 주장이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주님의 종입니다. 그는 진리의 말씀을 맡았고, 잘못된 가르침이 얼마나 위험한지도 알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상대방을 공격할 이유가 충분해 보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에게 다투지 말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는 그가 상대방보다 약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섬기는 주님이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덫에 사로잡힌 사람이 정신을 차리고 진리를 깨닫기를 바라지만, 그것을 자신이 강제로 이루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교사는 가르칩니다.
온화하게 바로잡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회개하는 마음을 주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은 그 사람이 실제로 덫에서 벗어났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 가능성을 열어 둔 채 끝납니다.
바울은 쇠사슬에 묶여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묶여 있지 않습니다. 디모데가 그 자유로운 말씀을 바르게 다루어야 하는 이유는, 사로잡힌 또 다른 사람이 그 말씀을 통해 자유를 얻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진리를 지키는 일은 끝내 사람을 포기하지 않는 일과 만납니다.
그래서 이 장은 한 사람에게 맡겨진 복음을 이어 전하는 일로 시작하여, 덫에 사로잡힌 다른 한 사람이 그 덫에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