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후서 풀어 읽기 · 1장
이 장의 자리 · 1장 · 인사와 부끄러워하지 않기
쇠사슬에 매이지 않는 생명
디모데후서는 뜻밖의 말로 시작합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이 생명을 이야기합니다.
편지를 쓰는 바울은 자유롭지 않습니다. 그의 손에는 쇠사슬이 있고, 가까웠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그에게서 등을 돌렸습니다. 그가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부탁하는 것도 편안한 삶이 아니라 복음 때문에 함께 고난을 겪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편지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것은 고난도, 죽음도, 배신도 아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입니다.
바울은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기 전에 자신이 누구의 약속 안에 있는지를 밝힙니다. 로마의 감옥이 그가 지금 있는 장소라면, 예수님 안의 생명은 그의 삶 전체가 놓인 자리입니다.
1장에는 이 두 현실이 나란히 놓여 있습니다. 바울은 쇠사슬에 묶여 있으면서 죽음이 이미 그 힘을 잃었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으면서도 하나님이 맡겨진 것을 지키실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디모데에게 용기를 내라고 권하면서도, 그 용기의 근거를 디모데의 강한 성격에서 찾지 않습니다.
이 장을 관통하는 질문은 단순히 어떻게 두려움을 이겨 낼 것인가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의 힘을 없애셨다면, 여전히 죽음의 위협 아래 살아가는 사람의 삶은 어떻게 달라집니까?
편지는 이 질문에 하나의 교훈으로 답하지 않고 서로 연결된 장면들을 보여 줍니다. 바울이 디모데의 믿음과 눈물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선물에 다시 불을 붙이라고 권하고, 예수님 안에서 이루신 구원과 그 때문에 겪는 고난을 밝힙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바울에게 등을 돌린 사람들과, 그가 쇠사슬에 묶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찾아온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편지의 중심에는 두 가지 반복되는 행동이 있습니다. 하나는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맡겨진 것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두 행동의 근거가 바로 9–10절의 복음입니다.
디모데후서는 전통적으로 바울의 마지막 시기에 쓰인 편지로 읽혀 왔습니다. 실제로 누가 언제 썼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지만, 편지 자체는 로마에 갇힌 바울이 디모데에게 자신의 사역을 이어 가도록 당부하는 상황을 제시합니다. 이 해설은 편지가 보여 주는 그 상황을 따라 읽습니다.
「생명의 약속에 따라」 — 편지의 첫 문장이 정하는 방향
나는 하나님의 뜻으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된 바울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에 따라 이 일을 맡았습니다.디모데후서 1:1 · 두루새김
여기에는 바울이 사도로 맡은 일을 설명하는 두 표현, 「하나님의 뜻으로」와 「생명의 약속에 따라」가 있습니다. 사도란 단순히 특별한 권위를 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바울이 맡은 일은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약속하신 생명을 알리는 일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바울을 본다면 무엇을 보겠습니까. 한때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던 사람이 이제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의 사역은 겉으로 보기에는 실패하거나 적어도 크게 가로막힌 듯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사도로 맡은 일을 현재의 성과나 사회적 지위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생명의 약속으로 설명합니다. 고난 자체가 성공의 증거라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을 현재의 형편만으로 평가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2절에서 바울은 디모데를 「사랑하는 자녀」라고 부릅니다. 디모데는 지시를 전달받는 부하가 아니라 바울이 믿음 안에서 특별한 관계를 맺어 온 사람입니다. 그래서 「은혜와 자비와 평화」라는 인사는 흔히 쓰는 문구이면서도 이 편지에서는 구체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디모데에게 필요한 것은 일을 감당할 능력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와 평화입니다.
특히 「자비」는 이 장의 마지막에 다시 등장합니다. 바울은 오네시보로의 집안을 위해 자비를 구하고, 오네시보로 자신이 「그날」에 자비를 받기를 기도합니다(1:16, 18).
편지의 시작과 끝을 자비가 감싸고 있습니다. 그 안에서 사람들은 믿음을 지키고, 고난을 견디며, 서로를 찾아갑니다.
조금 더 깊이
원문에서 「생명의 약속에 따라」는 사도로 맡은 일을 꾸미는 것으로도, 편지의 사명 전체를 설명하는 것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바울의 사역이 생명의 약속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은 같습니다.
조상에게서 이어진 믿음, 다시 살려야 할 불꽃
두 사람의 조상이 한 문장 안에서 만나다
3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조상을 이야기합니다.
나는 조상들의 뒤를 이어 깨끗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깁니다. 밤낮으로 기도하며 끊임없이 디모데를 기억하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디모데후서 1:3 · 두루새김
그다음 5절에서는 디모데의 할머니와 어머니를 이야기합니다.
디모데 안에 있는 거짓 없는 믿음이 생각납니다. 그 믿음은 먼저 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안에 있었으며, 디모데 안에도 있다고 나는 확신합니다.디모데후서 1:5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을 조상들과 관계없는 새로운 신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가 예배해 온 하나님은 조상 때부터 이어져 온 예배의 대상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의 신앙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버리는 일이 아니라, 그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신 구원을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이어지는 디모데의 가족 이야기는 그 연속성을 개인의 삶으로 가져옵니다. 바울에게는 조상들로부터 이어진 하나님 예배의 전통이 있고, 디모데에게는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먼저 자리 잡았던 믿음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왔지만 같은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디모데의 믿음을 혈통의 결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로이스의 믿음이 유니게에게, 다시 디모데에게 자동으로 상속되었다고 말하지 않고, 그 믿음이 로이스와 유니게 「안에 있었으며」 디모데 「안에도 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 쓰인 동사는 안에 살거나 머문다는 뜻으로, 믿음이 각 사람 안에 실제로 자리 잡은 상태를 나타냅니다.
원문에서 같은 동사가 14절의 「우리 안에 계시는」(ἐνοικέω) 성령을 설명할 때도 쓰입니다. 디모데가 받은 것은 가족의 가치관이나 종교적 습관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삶이 그의 안에 실제로 자리 잡았고, 이제 그 삶은 성령을 통해 지탱되어야 합니다.
바울이 기억하는 것은 디모데의 눈물이다
그런데 이 가족 이야기 앞에는 의외의 표현이 있습니다.
디모데가 흘린 눈물을 기억하며 몹시 보고 싶습니다. 만나서 기쁨으로 가득해지기를 바랍니다.디모데후서 1:4 · 두루새김
바울은 디모데의 업적이나 능력을 먼저 떠올리지 않습니다. 디모데가 언제, 어떤 이유로 울었는지는 본문에 나오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헤어지던 때의 눈물일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을 역사적 사실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바울이 그 눈물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디모데의 눈물을 기억하면서 동시에 그의 「거짓 없는 믿음」을 확신합니다. 한 사람 안에 진실한 믿음과 깊은 마음의 고통이 함께 있을 수 있습니다. 바울 역시 디모데를 그리워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확신하는 사도의 믿음은 구체적인 사람을 향한 사랑 속에서 표현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강해지라고 말하기 전에 그를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줍니다. 그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그의 믿음이 얼마나 진실한지 먼저 말합니다.
이 순서가 뒤따르는 권면을 다르게 들리게 합니다.
불꽃은 이미 있다
6절에서 바울은 비로소 명령합니다.
그러므로 디모데 안에 있는 하나님의 선물에 다시 불을 붙이라고 일깨웁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손을 얹어 주는 일을 통해 그 선물을 주셨습니다.디모데후서 1:6 · 두루새김
「그러므로」는 앞의 믿음에 대한 확신을 받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하지 않고, 그에게 이미 하나님의 선물이 있음을 전제합니다. 「다시 불을 붙이다」는 불길을 다시 일으킨다는 뜻으로, 장작이 남아 있고 불씨가 살아 있는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본문이 디모데의 열정이 실제로 식어 있었다고 단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선물은 손을 얹는 행위와 연결되어 있으므로 디모데가 맡은 사역과 관련된 은사로 이해할 근거가 있습니다. 더 중요한 사실은 선물이 누구에게서 왔는가입니다. 디모데가 다시 불을 붙여야 하는 것은 자기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래서 7절이 이어집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겁내는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이기 때문입니다.디모데후서 1:7 · 두루새김
이 구절은 흔히 두려워하지 말라는 일반적인 격려로 쓰입니다. 그러나 「겁내는」에 해당하는 원어(δειλία)는 위험 앞에서 용기를 잃고 물러서는 비겁함이나 소심함을 가리킵니다. 곧이어 바울이 주님을 증언하는 일과 자신의 투옥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하는 것을 보면, 이 두려움은 특별히 복음 때문에 겪을 수 있는 고난과 관련됩니다.
여기서 「영」이 성령인지, 하나님이 주시는 내적 태도인지는 견해가 나뉘지만, 어느 쪽이든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근원이 하나님이라는 점은 같습니다.
능력만 있었다면 디모데는 두려움을 이기는 강인함만을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능력 곁에 사랑이 있어, 그 능력은 다른 사람을 지배하거나 자기 체면을 지키는 힘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랑 곁에는 자기 자신을 다스리고 바르게 판단하는 절제가 있어, 사랑이나 용기라는 이름으로 무모하거나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경계하게 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담대함은 두려움이 전혀 없는 상태도, 무조건 앞장서는 성격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주신 능력으로 버티고, 사랑으로 행동하며, 절제로 자신을 다스리는 삶입니다.
이제 그 능력과 사랑과 절제가 왜 필요한지가 드러납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말하려 합니다.
조금 더 깊이
두루새김이 「조상들의 뒤를 이어」로 옮긴 원문 표현은 조상들로부터 이어받았다는 뜻과 조상 때부터 계속해 왔다는 뜻을 모두 허용합니다. 사도행전 16:1은 디모데의 어머니가 믿는 유대 여자였고 아버지는 그리스 사람이었다고 전하며, 디모데후서는 그 어머니의 이름이 유니게였음을 알려 줍니다. 디모데전서 4:14도 장로회의 안수와 함께 주어진 은사를 언급하지만, 두 본문의 안수 사건이 같은 사건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7절의 「영」은 14절에서 성령이 명시되므로 성령을 가리킨다는 읽기가 가능하지만, 문법만으로 확정되지는 않습니다.
무엇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하는가
주님의 증언과 주님의 죄수
8절은 이 장의 중심적인 권면을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을 증언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주님 때문에 갇힌 나도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에 힘입어 기쁜 소식인 복음을 위해 함께 고난을 겪으십시오.디모데후서 1:8 · 두루새김
첫째는 복음의 내용과 관련되고, 둘째는 그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처지와 관련됩니다. 예수님에 관한 증언을 받아들이면서도, 그 증언 때문에 감옥에 갇힌 사도와의 관계는 부담스러워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이 두 가지를 분리하지 말라고 요청합니다.
고대 로마 사회에서 죄수라는 신분은 명예롭지 않았습니다. 감옥에 갇혔다는 사실만으로도 사회적 신뢰와 관계에 손상을 입을 수 있었고, 죄수와 가까이 지내는 일 역시 부담을 동반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자신을 로마의 죄수라고 소개하지 않습니다. 「주님 때문에 갇힌 나」라고 부릅니다.
원문은 예수님께 속한 죄수라는 뜻의 표현을 쓰고, 두루새김은 그 관계를 주님 때문에 갇혔다는 말로 풀어 옮겼습니다. 실제로 바울을 가둔 권력은 로마이고, 쇠사슬은 실제로 존재합니다. 다만 그 쇠사슬이 바울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최종적으로 결정하지는 못합니다.
이 표현은 뒤에 나오는 오네시보로의 행동을 이해하는 열쇠이기도 합니다. 그는 바울이 쇠사슬에 묶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1:16). 바울이 디모데에게 요구하는 일이 실제로 어떤 모습인지는 그 한 사람의 행동을 통해 드러날 것입니다.
고난받으라는 명령 뒤에 구원의 역사가 놓인다
8절의 명령은 상당히 무겁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명령 다음에 고난이 사람을 성장시킨다는 이야기로 넘어가지 않습니다. 대신 하나님이 무엇을 하셨는지 이야기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우리가 한 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의 계획과 은혜에 따라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 은혜는 시간이 시작되기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디모데후서 1:9 · 두루새김
바울은 우리가 고난을 견디어야 구원받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구원받고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이 복음 때문에 고난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순서가 반대입니다.
구원은 인간이 한 일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계획」은 목적이나 미리 세워 둔 계획을 가리키는 말로, 하나님의 구원이 우연히 일어난 일이거나 인간의 공로에 따라 뒤늦게 결정된 일이 아님을 보여 줍니다.
바울은 현재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설명은 갑자기 시간이 시작되기 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은혜는 디모데가 사역에 성공했을 때 생긴 것도, 바울이 고난을 감수했기 때문에 비로소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 자신의 계획에 따라, 예수님 안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다만 「시간이 시작되기 전부터」를 인간에게 은혜가 실제로 적용된 시점까지 그때로 옮기는 말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계획과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그 계획의 드러남을 구별하고, 그 구별을 만들어 주는 말이 10절의 「이제」입니다. 기독교 신앙은 그 계획이 한 사람, 예수님의 삶과 사역 안에서 실제로 드러났다고 고백합니다.
죽음을 없애신 분의 사도가 죽음의 위협을 받는다
10절은 이 편지에서 가장 대담한 선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은혜가 이제 우리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분은 죽음의 힘을 없애시고, 복음을 통해 생명과 불멸을 환히 드러내셨습니다.디모데후서 1:10 · 두루새김
죽음의 힘을 없애셨다면, 왜 바울은 여전히 죽음의 위협 아래 있습니까? 왜 신자들은 계속 죽습니까? 왜 예수님의 사도조차 감옥에서 구원받지 못할 가능성을 마주해야 합니까?
「없애다」에 해당하는 원어(καταργέω)는 어떤 것의 힘을 무력하게 하거나 효력을 잃게 한다는 뜻으로 쓰일 수 있어, 두루새김은 「죽음의 힘을 없애시고」로 옮겼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육체의 죽음이 더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일 필요가 없습니다. 죽음이 행사하던 지배력이 예수님의 구원 사건을 통해 결정적으로 무너졌다는 선언입니다.
함께 언급된 「불멸」은 썩거나 사라지지 않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현재의 수명을 끝없이 연장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과 썩어 없어지는 힘을 넘어서는 생명입니다.
바울은 죽을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의 몸은 쇠사슬에 묶일 수 있고, 그의 활동은 제한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믿는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힘을 없애셨고, 그의 현재 상황이 그 구원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에게 죽음이 닥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끝낼 수 없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이 차이가 바울의 담대함을 설명합니다.
고난 자체에 특별한 구원의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죽음의 힘을 꺾으신 예수님께 속했기 때문에, 고난을 피하는 일을 삶의 최종 목적으로 삼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11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바로 그 복음을 널리 알리는 사람으로, 사도로, 또 가르치는 사람으로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12절에서 덧붙입니다.
이 때문에 나는 이런 고난도 겪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믿어 온 분이 누구신지 알고, 내가 맡긴 것을 그분께서 그날까지 지키실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디모데후서 1:12 · 두루새김
디모데에게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했던 사람이 이제 8절의 명령을 자기 자신에게 적용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옳았다는 증거나 사역의 성과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그가 아는 것은 자신이 신뢰해 온 분입니다.
지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에 관한 복음의 내용이 예수님을 향한 신뢰와 분리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바울은 복음에 자신을 맡겨 왔고, 이제 자신의 처지가 그 복음과 어긋나는 것처럼 보일 때에도 그분의 신실함을 신뢰합니다.
「내가 맡긴 것」에는 중요한 번역상 갈림이 있습니다. 원어 파라테케(παραθήκη)는 다른 사람에게 보관하도록 맡긴 것을 뜻하는데, 한 읽기는 바울이 자기 자신이나 삶을 하나님께 맡겼다고 보고, 다른 읽기는 하나님이 바울에게 복음을 맡기셨다고 봅니다. 「내가 믿어 온 분이 누구신지 알고」라는 개인적 고백은 첫째 읽기와 이어지고, 14절에서 디모데에게 맡겨진 것을 지키라고 한다는 점은 둘째 읽기를 뒷받침합니다. 두루새김은 첫째 읽기를 문면에 드러냈지만, 원문에서 어느 한쪽을 확정할 문법적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두 읽기가 공유하는 중심은 분명합니다. 바울의 확신은 자신의 지키는 능력에 있지 않고, 하나님이 지키실 수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날」은 예수님께서 구원을 최종적으로 드러내시고 인간의 삶을 판단하시는 날로, 18절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현재에는 쇠사슬이 있고 사람들의 평가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지막 판단은 아닙니다.
바울의 삶을 최종적으로 판단하실 분은 그가 믿어 온 예수님입니다.
조금 더 깊이
9절의 「계획」은 1절에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낸 말과는 다른 낱말입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26에서 죽음을 마지막으로 멸망할 원수라고 부르고, 15:54–57에서 죽음에 대한 승리를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여기에는 이미 이루어진 승리와 장차 완전히 드러날 승리가 함께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54가 인용하는 이사야 25:8의 문맥에서 하나님은 여러 민족을 위한 잔치를 베푸시고 죽음을 없애시며 눈물을 씻어 주시는 분입니다(이사야 25:6–9). 디모데후서 1:10은 이사야서를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죽음의 힘이 하나님의 구원으로 꺾인다는 같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지켜야 할 것은 무엇인가
앞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지키실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디모데에게 지키라고 명령합니다.
나에게서 들은 바른 말씀을 본보기로 삼으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 그렇게 하십시오.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맡겨진 좋은 것을 지키십시오.디모데후서 1:13–14 · 두루새김
하나님이 지키신다면 왜 디모데에게 지키라고 명령합니까? 바울은 하나님의 역할과 인간의 역할을 반씩 나누지 않습니다. 디모데에게 복음을 지키라고 명령하면서, 그 일을 가능하게 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함께 말합니다.
「본보기」는 어떤 것을 나타내는 모형이나 윤곽을 뜻합니다. 바울에게서 들은 가르침이 디모데의 신앙과 가르침을 형성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바른」(ὑγιαίνω)으로 옮긴 원문 표현은 건강하다는 뜻의 동사에서 왔습니다. 가르침을 건강과 질병의 언어로 설명하는 것이어서, 복음의 진리가 공동체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까지 생각하게 합니다.
바울은 믿음과 사랑을 그 가르침을 붙드는 방식으로 제시합니다. 믿음과 사랑은 나중에 덧붙이는 장식이 아니라, 디모데가 배운 가르침을 붙드는 방식 자체를 정합니다. 올바른 가르침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사랑한다는 이유로 복음의 내용을 마음대로 바꾸는 것도 바울이 요구한 일이 아닙니다.
14절은 그 가르침을 「맡겨진 좋은 것」이라고 부릅니다. 13절의 바른 말씀과 이어지고 8–12절의 복음을 받아 설명하므로, 디모데에게 맡겨진 복음의 진리와 사명을 가리킨다고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문장은 더 열심히 노력하라는 명령으로 끝나지 않고, 지키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성령을 밝힙니다. 5절에서 로이스와 유니게와 디모데 안에 믿음이 자리 잡았던 것처럼, 이제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한쪽에는 세대를 거쳐 이어진 믿음이 있고, 다른 쪽에는 그 믿음을 지키도록 함께하시는 성령이 계십니다.
디모데는 가족에게서 믿음을 배웠고, 바울에게서 복음의 가르침을 들었고, 손을 얹어 주는 일을 통해 하나님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를 가르쳐 온 사도가 감옥에 갇혀 있다는 이유로 디모데의 믿음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그에게는 여전히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사람을 통해 전달됩니다. 그러나 그것을 살아 있는 믿음으로 지탱하는 근원은 사람 자체가 아닙니다. 로이스와 유니게, 바울과 디모데가 맡은 것은 귀하지만, 그들 자신이 복음을 끝까지 보장하는 사람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확신과 디모데가 지키는 일은 서로 경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지키신다는 확신은 인간의 충실함을 불필요하게 하지 않고, 오히려 인간이 충실할 수 있는 근거가 됩니다.
이제 편지의 마지막 부분은 그 충실함이 실제 삶에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는지 보여 줍니다.
모두가 돌아섰을 때, 한 사람이 찾아왔다
「아시아에 있는 이들이 모두 나에게 등을 돌렸다」
15절은 분위기가 급격히 달라지는 지점입니다.
아시아에 있는 이들이 모두 나에게 등을 돌렸다는 것을 디모데도 알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는 부겔로와 허모게네도 있습니다.디모데후서 1:15 · 두루새김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다는 확신 바로 뒤에 사람들이 등을 돌린 이야기가 옵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신다고 해서 모든 인간관계가 안정되지는 않습니다. 복음이 참되다고 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언제나 환영받는 것도 아닙니다.
여기서 아시아는 오늘날의 아시아 대륙이 아니라 에베소가 중심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로마 제국의 아시아 속주입니다. 같은 장에서 오네시보로가 에베소에서 바울을 섬겼다고 말하므로, 「모두」는 바울과 관련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가 떠났다는 강한 표현으로 읽는 것이 문맥에 맞습니다.
또 본문은 그들이 예수님을 부인했다거나 복음을 버렸다고 직접 말하지 않고, 「나에게 등을 돌렸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와 경위는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의 투옥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각 사람의 동기라고 단정할 수는 없고, 부겔로와 허모게네에 대해서도 본문은 이름 외에 다른 정보를 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새로운 이름, 오네시보로가 등장합니다.
오네시보로는 쇠사슬을 보았다
주님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안에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를 빕니다. 그는 여러 번 나에게 힘을 북돋워 주었고, 내가 쇠사슬에 묶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디모데후서 1:16 · 두루새김
바울이 디모데에게 자신의 투옥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했던 8절의 권면을, 오네시보로는 실제로 살아 냈습니다. 그는 바울의 고난을 부정하지도, 감추지도 않았습니다. 그에게 도움을 주려면 먼저 그가 감옥에 있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앞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오네시보로가 여러 번 힘을 북돋워 준 일은 그 사랑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모습으로 전달되는지 보여 줍니다.
그는 쇠사슬에 묶인 사람을 외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로마에 왔을 때 나를 열심히 찾다가 마침내 만났습니다.디모데후서 1:17 · 두루새김
본문은 자세한 경위를 말하지 않습니다. 당시의 구금 환경이나 바울이 갇힌 장소를 이 구절만으로 재구성할 수는 없지만, 바울을 찾는 데 적극적인 노력이 필요했다는 사실은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찾아왔습니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대단한 기적도, 놀라운 설교도 없습니다. 사람 하나가 다른 사람을 찾아가는 행동이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행동이 8절에서 말한 복음을 위해 함께 고난을 겪는 삶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제시됩니다.
바울을 찾아낸 사람에게 바울이 구하는 것
18절은 이 장의 마지막 기도입니다.
주님께서 그날에 그가 주님의 자비를 받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그가 에베소에서 얼마나 많이 섬겼는지는 디모데가 더 잘 압니다.디모데후서 1:18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17절의 「마침내 만났습니다」(εὑρίσκω)와 18절의 「자비를 받게」에 찾아내거나 얻는다는 뜻의 같은 동사가 쓰입니다. 두루새김은 각각 만남과 자비를 받는 일로 풀어 옮겼습니다. 오네시보로는 로마에서 바울을 찾아냈고, 바울은 그가 「그날」에 예수님의 자비를 찾아 얻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은 오네시보로의 선행이 구원의 대가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이미 9절에서 구원이 우리가 한 일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따른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습니다. 그의 행동은 예수님 안에서 받은 은혜와 사랑에 어울리는 행동이고, 바울은 그 섬김에 인간적인 보상을 약속하는 대신 예수님의 자비를 구합니다.
편지의 시작에서 디모데에게 자비가 있기를 빌었던 바울이, 마지막에는 오네시보로의 집안과 오네시보로 자신을 위해 자비를 구합니다. 두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비입니다.
4절에서 디모데의 눈물을 기억하던 바울이, 18절에서는 오네시보로의 섬김을 기억합니다. 로마에서 바울을 찾아낸 일과 에베소에서의 많은 섬김입니다.
조금 더 깊이
오네시보로의 집안과 오네시보로 자신을 따로 언급한 것이 그의 사망을 암시한다는 해석도 있지만, 본문은 그가 살아 있는지 직접 밝히지 않으므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찾아낸 사람
바울은 디모데에게 복음을 위해 함께 고난을 겪으라고 권했고, 그 근거로 예수님께서 죽음의 힘을 없애셨다고 선포했습니다. 이 장의 모든 명령에서 하나님의 행동이 앞섭니다. 하나님이 구원하셨고, 선물을 주셨고, 우리 안에 계시는 성령을 주셨기 때문에 인간은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은혜는 인간의 책임을 지워 버리지 않고, 그 책임을 새로운 토대 위에 세웁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위협을 가할 수 있는 권력이 한 인간의 최종적인 가치를 결정할 수 없고, 복음을 위해 고난받는 사람을 그 고난만으로 실패자라고 판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고난이 복음을 위한 고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자신의 잘못이나 무모함 때문에 겪는 고난까지 이 구절로 정당화할 수는 없으며, 사람들의 평가를 무시하라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들의 평가가 자기 삶의 최종적인 진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로마에 바울이 있습니다.
그는 갇혀 있습니다. 쇠사슬에 묶여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보로라는 사람이 로마에 옵니다. 그는 바울을 찾습니다. 열심히 찾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만납니다.
본문은 두 사람이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 얼마나 오래 함께 있었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다만 바울이 기억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 사람은 내가 쇠사슬에 묶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은 나를 열심히 찾다가 마침내 만났습니다.
그 사람은 여러 번 나에게 힘을 북돋워 주었습니다.
죽음의 힘을 없애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죽음의 위협을 받는 다른 사람을 외면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약속받은 사람은 쇠사슬에 묶인 사람에게도 사랑으로 다가갈 수 있습니다.
그날 로마의 감옥 문이 열렸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쇠사슬이 풀렸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를 찾아온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제 그 사람이 「그날에」 「주님의 자비를 받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생명의 약속으로 시작한 편지는 이렇게 한 사람을 향한 자비의 기도로 첫 장을 마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