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11장
이 장의 자리 · 8–12장 · 유대와 사마리아로
누가 하나님의 일을 막겠습니까?
사도행전 11장은 뜻밖의 항의로 시작합니다.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도 성령이 임했고, 베드로는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신자들에게는 놀라운 소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돌아오자 사람들이 따지고 듭니다.
그들이 말했다. 「그대가 포피를 지닌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그들과 함께 먹었습니다.」사도행전 11:3 · 본디새김
이방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사람들은 베드로가 그들과 함께 식사했다는 사실을 문제 삼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단지 사소한 예절 때문에 화를 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당시 유대인에게 누구와 함께 먹고 교제하는지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게 살아가는 문제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고, 신앙을 지키는 일과 공동체의 경계를 지키는 일이 쉽게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경계 밖에 있던 사람들에게도 같은 성령을 주셨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질문이 사도행전 11장의 첫 번째 이야기를 이끕니다. 후반부에서는 무대가 안디옥으로 옮겨갑니다. 그곳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복음을 듣고 주님께 돌아오며, 유대와 다른 민족의 사람들이 함께하는 공동체가 성장합니다. 그리고 그 공동체는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지역의 형제들이 어려움을 겪게 되리라는 말을 듣자, 그들을 돕기 위해 물질을 보내기로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말씀이 전해졌습니다. 이제 안디옥에서 유대로 도움이 전해집니다.
이 장에는 거대한 기적이나 극적인 치유 장면이 없습니다. 대신 사람들이 서로를 받아들이고, 가르치고, 돌보는 일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사람들 사이의 경계를 넘어서 행하신 일은, 마침내 서로 다른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고 서로를 돌보는 공동체로 나타납니다.
사도행전 11장은 그 과정이 결코 자동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누군가는 반대했고, 누군가는 설명해야 했으며, 누군가는 자신이 익숙하게 알고 있던 신앙의 경계를 다시 생각해야 했습니다.
복음은 받아들여도 함께 식사할 수는 없는가?
사도들과 유대에 있는 형제들이 이방 사람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고 들었다.사도행전 11:1 · 본디새김
누가는 이 소식 자체에 대해서는 아무런 부정적인 평가를 붙이지 않습니다. 이방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할례받은 이들이 그에게 따지고 듭니다.
이들은 문맥상 유대인 신자들 가운데 베드로의 행동에 이의를 제기한 사람들입니다. 나중에 등장하는 조직적인 특정 당파와 반드시 동일한 집단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들이 문제 삼는 것은 베드로가 이방 사람들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는 사실입니다. 사도행전 10장에는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들어갔고 그곳 사람들이 며칠 더 머물러 달라고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지만, 함께 식사했다는 사실은 명시적으로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11장에서 그 일이 드러납니다.
베드로는 세례를 받으라고 명했고, 반대자들은 그가 함께 먹었다고 탓했습니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한 식탁에 앉으면 어떤 음식을 먹어야 하는지, 그 음식이 어떻게 준비되었는지, 율법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 등 여러 문제가 생길 수 있었습니다. 물론 모세 율법이 함께 식사하는 모든 경우를 명시적으로 금지한 것은 아니며, 당시의 식탁 교제에 적용되는 관습과 해석도 다양했습니다. 따라서 반대자들의 주장을 곧바로 성경 율법 자체와 동일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되어 살아가려는 신앙적 열심 때문에 베드로의 행동을 문제 삼았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충실하려는 마음과, 하나님이 실제로 행하고 계신 일을 바르게 알아보는 능력은 언제나 일치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는 신앙의 기준을 따라 베드로를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기준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을 직접 보았습니다.
하나님이 이방 사람들에게도 성령을 주셨던 것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자신이 그 일을 어떻게 이해하게 되었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왜 같은 이야기를 다시 들려주는가?
베드로가 그들에게 차례대로 설명하기 시작했다.사도행전 11:4 · 본디새김
베드로는 자신의 사도적 권위를 내세워 반대하는 사람들을 침묵시키지 않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의 사도이므로 자신의 결정에 따르라고 명령하지도 않습니다.
대신 일어난 일을 차례대로 설명합니다.
「차례대로」는 사건이나 내용을 순서에 따라 설명한다는 뜻으로, 누가복음 1장 3절에서도 누가는 자신이 조사한 일을 차례대로 기록하려 한다고 밝힙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는 대신, 자신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고, 하나님이 무엇을 말씀하셨으며, 그 결과 무엇을 보았는지를 들려줍니다. 듣는 사람들이 판단해야 할 것은 베드로의 개인적인 호감이나 취향이 아니라, 하나님이 정말로 이방 사람들에게도 같은 성령을 주셨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반복되는 이야기에서 달라지는 강조점
베드로는 욥바에서 기도하던 중 보았던 환상을 다시 설명합니다. 하늘에서 내려온 그릇, 그 안에 담긴 짐승들, 잡아먹으라는 명령, 베드로의 거절, 그리고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왜 누가는 독자들이 아는 이야기를 다시 길게 기록했을까요? 이번에는 이 사건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 설명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10장에서 독자는 베드로가 경험한 일을 직접 따라갔지만, 11장에서는 예루살렘의 신자들이 베드로의 말을 통해 그 사건을 듣습니다.
앞 장에서는 베드로가 하나님의 뜻을 배우는 과정이었습니다. 이제는 그가 배운 것을 공동체가 받아들일 수 있도록 증언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바로 그때 세 사람이 우리가 있던 집에 이르렀습니다. 가이사랴에서 나에게 보내진 이들이었습니다.」사도행전 11:11 · 본디새김
환상만 있었다면 베드로는 그 의미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여전히 고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 시각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도착했고, 두 사건은 서로를 설명해 주는 경험이 되었습니다.
하늘에서 들린 말씀과 대문 앞에 나타난 사람들.
그는 환상의 뜻을 자신의 생각만으로 결정한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실제로 일어난 일들을 통해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영이 나에게 아무런 구별도 두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말했습니다. 여기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갔고, 우리는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갔습니다.」사도행전 11:12 · 본디새김
10장 20절에서는 「조금도 가리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거라」라고 했는데, 같은 그리스어 동사의 의미에는 망설이거나 의심한다는 뜻과 구별한다는 뜻이 함께 관련되어 있습니다. 베드로가 이방인들과 함께한 일을 해명하는 11장의 자리에서 「아무런 구별도 두지 말고」(διακρίνω)라는 표현은 특별한 울림을 갖습니다. 그의 행동은 단순한 개인적 판단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이 그들과 함께 가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여섯 명의 증인이 있었다
베드로는 같은 절에서 한 가지 사실을 덧붙입니다. 10장에서는 욥바의 형제들 가운데 몇 사람이 함께 갔다고만 기록했는데, 이제 그 수가 밝혀집니다. 여섯 명입니다.
베드로가 「여기 이 여섯 형제」라고 말한다는 것은, 그들이 지금 베드로와 함께 이 자리에 있다는 뜻입니다.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일을 확인할 수 있는 사람은 베드로 혼자가 아닙니다. 베드로의 말은 개인적인 환상 체험에만 근거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함께 목격한 사건에 근거합니다.
누가는 교회가 중대한 문제를 판단하는 과정에서 증언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보여 줍니다. 그렇다면 그들이 함께 목격한 결정적인 사건은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환상 자체가 아니라 고넬료의 집에서 성령이 임한 일이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베드로를 포함하면 일곱 명이 그 사건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일곱이라는 숫자에 반드시 특별한 상징을 부여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 숫자가 완전함이나 신적 확증을 뜻한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일어났던 일도 전합니다. 그런데 이번 설명에는 앞 장에서 명시되지 않았던 말씀이 등장합니다.
「『그가 너에게 말을 전할 것이고, 그 말로 너와 네 온 집안이 구원받을 것이다.』」사도행전 11:14 · 본디새김
여기서 처음으로 베드로를 불러와야 했던 목적이 구원이라는 말로 명시됩니다. 고넬료는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고, 자선을 베풀고, 늘 기도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고넬료의 경건함이 아무 의미 없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가는 그의 기도와 자선이 하나님 앞에 기억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록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의 경건한 삶 자체가 베드로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불필요하게 만들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의 기도를 들으셨고, 그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할 사람을 보내셨습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전한 것은, 나사렛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셨고, 사람들에게 죽임당하셨지만 하나님이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재판관으로 세우셨으며, 예수님을 믿는 이마다 그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복음이었습니다(10:38–43). 11장에서는 그 모든 내용이 「그 말」이라는 짧은 표현 안에 담겨 있습니다. 베드로가 지금 설명해야 하는 것은 복음의 내용 자체보다, 그 복음을 듣던 이방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무엇을 행하셨는가 하는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우리에게 내린 것과 똑같이」
「내가 말하기 시작했을 때 거룩한 영이 처음에 우리에게 내린 것과 똑같이 그들에게 내렸습니다.」사도행전 11:15 · 본디새김
앞 장에서는 베드로가 상당한 내용을 전한 뒤 성령이 임했는데, 여기서는 「말하기 시작했을 때」 성령이 내렸다고 합니다. 두 설명이 서로 어긋난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10장 44절은 「베드로가 아직 이 말을 하고 있을 때」라고 기록하므로, 11장의 설명도 설교가 진행되는 도중에 성령이 임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11장에서는 베드로가 이방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기 위해 어떤 별도의 절차를 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욱 두드러집니다.
베드로는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사건을 사마리아에서 일어났던 일과 비교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서 예루살렘의 제자들에게 처음 성령이 임했던 일을 떠올리며,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일이 바로 그때와 같았다고 증언합니다. 그들이 조금 낮은 수준의 선물을 받았다고도, 특별한 예외로 성령을 받았다고도 하지 않습니다.
「똑같이」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가 지금 논쟁하는 사람들은 할례받은 유대인 신자들입니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선물이 자신들에게만 속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줍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새롭게 이해되다
「주께서 이렇게 하신 말씀이 기억났습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거룩한 영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사도행전 11:16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사도행전 1장 5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며, 오순절에 성령이 임했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사건이 그때와 같았기 때문에 그 약속을 다시 떠올립니다.
예수님의 말씀 자체가 바뀐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그 말씀의 범위를 새롭게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신들에게 주어진 약속으로 들었던 말씀이, 이방 사람들에게도 같은 선물이 주어지는 사건을 통해 더 넓은 의미로 드러납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처음부터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완전히 이해했다고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그 말씀에 비추어 지금 일어나는 일을 이해하며, 새로운 사건 속에서 자신들이 미처 알지 못했던 의미를 발견합니다. 베드로는 바로 그 과정을 겪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막는 사람이 될 수 있는가?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다면,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사도행전 11:17 · 본디새김
앞 장(10:47)에서 베드로는 이방 사람들이 세례를 받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막으려는 대상이 달라진 것입니다.
베드로가 고넬료와 그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면, 그것은 단지 사람들의 요구를 거절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성령을 주신 사람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질문은 사도적 권위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라, 사도의 권위가 무엇을 위해 주어졌는지 드러내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통제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증언하고, 그 일에 합당하게 응답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이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다고 설명하지 않고,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가로막을 수 없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논증은 끝납니다.
반대하던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잠잠해졌다.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며 말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방 사람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셨다.」사도행전 11:18 · 본디새김
처음에 그들은 베드로에게 따지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반박하지 않고,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일을 인정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립니다.
우리는 흔히 회개를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돌이키는 행동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회개에는 사람이 자신의 생각과 삶의 방향을 바꾸는 일이 포함됩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그 회개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생명에 이르는 회개」는 단순한 후회나 감정적 반성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이켜 생명에 참여하는 변화입니다.
그들이 이스라엘의 모든 전통을 먼저 받아들이고 유대인이 된 뒤에야 회개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방 사람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들이 처음 문제 삼은 것은 베드로가 이방 사람들과 함께 먹었다는 사실이었지만, 이야기가 끝날 때 그들은 하나님이 이방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시는 일을 인정합니다.
처음에는 식탁의 경계를 지키려 했던 사람들이, 이제 그 경계를 넘어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찬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결론에 머무르지 않고, 곧바로 다른 지역에서 벌어진 일을 들려줍니다. 이번에는 한 사람의 집이 아니라, 새로운 도시 전체가 복음의 이야기에 들어옵니다.
조금 더 깊이
「잠잠해졌다」는 말은 더 이상 반박하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 표현만으로 그들의 모든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거나 이후에 어떤 이견도 남지 않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실제로 사도행전 15장에서는 이방인 신자들에게 할례와 모세의 율법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를 둘러싸고 다시 큰 논쟁이 일어납니다. 따라서 11장의 이 장면은 모든 신학적 문제가 영구히 해결된 순간이라기보다, 예루살렘 신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인정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린 순간입니다.
안디옥 — 이름 없는 사람들이 시작한 일
19절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갑니다.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고난 때문에 흩어진 이들은 페니키아와 키프로스와 안디옥까지 두루 다녔다. 그러나 유대 사람 말고는 아무에게도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사도행전 11:19 · 본디새김
누가는 사도행전 8장으로 돌아갑니다. 스데반이 죽임당하고 예루살렘에 박해가 일어났을 때 신자들은 여러 지역으로 흩어졌습니다. 10장과 11장 앞부분의 사건이 끝난 뒤에야 이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 아니라, 누가는 앞서 시작된 흩어짐을 다시 가져와 그때부터 다른 지역에서 진행되고 있던 복음의 확장을 보여 줍니다.
독자는 조금 전까지 베드로가 이방인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두고 예루살렘에서 설명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안디옥에서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루살렘의 논쟁이 끝날 때까지 멈추어 있지 않았습니다.
왜 안디옥이었을까?
여기서 말하는 안디옥은 로마 제국의 시리아 속주에 있던 큰 도시로, 사도행전 13장에 등장하는 비시디아 지역의 안디옥과는 다른 곳입니다. 오론테스강 인근의 이 도시는 동지중해 세계에서 상업과 행정, 문화가 만나는 중심지였습니다. 그리스어가 널리 사용되었고 유대인 공동체도 자리 잡고 있어,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 복음을 접할 수 있는 환경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안디옥이 중요한 대도시였기 때문에 복음이 성공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복음을 전한 사람들의 이름조차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키프로스 사람과 구레네 사람 몇이 있었다. 그들은 안디옥에 와서 주 예수를 복음으로 전하며 그리스 말을 쓰는 이들에게도 말하고 있었다.사도행전 11:20 · 본디새김
키프로스는 지중해의 섬이고, 구레네는 북아프리카의 도시입니다. 복음을 전한 사람들 자신이 이미 여러 지역에서 살아온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가는 그들의 이름이나 직책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새로운 지역에 복음이 전해지는 결정적인 일을 반드시 사도들만 시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름 없는 신자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도착한 도시에서 자신들이 믿는 예수님의 소식을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 말을 쓰는 이들」은 누구인가?
19절은 흩어진 신자들이 「유대 사람 말고는 아무에게도 말씀을 전하지 않았다」고 기록하는데, 20절에서는 일부 사람들이 「그리스 말을 쓰는 이들에게도」 주 예수님을 전했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본문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스어 읽기는 헬레니스타스(Ἑλληνιστής)입니다. 이 낱말은 사도행전 6장 1절과 9장 29절에서 일반적으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다른 사본 전승에는 헬레나스, 곧 「그리스 사람들」이라는 읽기도 있으며, 이 표현은 이 문맥에서 이방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사도행전의 용례를 종합하여 11장 20절에서는 이방인 청중을 가리킬 수 있다고 보는 해석도 가능하고, 같은 낱말이 앞선 두 자리에서 그리스어권 유대인을 뜻했다는 점을 중시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 말을 쓰는 이들」을 곧바로 이방인이라고 확정하거나, 반대로 반드시 유대인이라고 한정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누가는 먼저 신자들이 유대 사람들에게만 말씀을 전했다고 말한 뒤, 「그런데」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새로운 청중에게 복음을 전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대조는 유대인 밖의 사람들에게도 복음이 전해지는 새로운 국면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을 때 자연스럽습니다. 이 구절을 이방인 선교의 중요한 전환으로 이해할 근거는 충분하지만, 사본과 낱말의 의미가 갈리는 사실까지 지워 버릴 필요는 없습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있었고, 많은 사람이 믿고 주에게로 돌아섰다.사도행전 11:21 · 본디새김
구약성경에서 여호와야훼의 손은 그분의 능력과 역사하심을 나타냅니다. 출애굽기에서는 여호와야훼의 강한 손이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시는 일과 연결되고(출애굽기 13:3), 이사야 59장 1절은 여호와야훼의 손이 짧아서 구원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있었다」는 표현 역시 복음이 전해지는 일에 주님의 능력과 도우심이 함께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가는 익명의 전도자들이 얼마나 설득력이 뛰어났는지, 어떤 전략을 사용했는지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실제로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을 전했지만, 누가는 많은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선 일을 전도자들의 능력만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주님의 손이 함께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소식도 예루살렘에 전해집니다.
바나바는 무엇을 보았는가?
안디옥에서 많은 사람이 주께 돌아섰다는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지자, 교회는 바나바를 보냅니다. 고넬료의 집 소식이 전해졌을 때 일부 신자들이 베드로의 행동을 문제 삼았던 앞부분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입니다.
누가는 바나바를 보낸 목적을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새로운 공동체에서 일어난 일을 확인하고 그들을 도우려는 목적이 있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반드시 그들의 믿음을 심사하거나 감독하기 위해 보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했다. 그리고 모두에게 마음을 굳게 먹고 주 곁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했다.사도행전 11:23 · 본디새김
은혜는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눈에 직접 보이는 형체도 아닙니다. 누가는 바나바가 무엇을 보고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보았는지 설명하지 않지만, 바로 앞에는 많은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섰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바나바는 그곳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고 새로운 공동체가 형성된 일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지 않은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가 자라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위협이나 경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알아보고 기뻐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바나바가 성격이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라고만 설명할 수 없습니다. 누가는 곧바로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알려 줍니다.
그가 선한 사람이었고 거룩한 영과 믿음으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많은 무리가 주에게 더해졌다.사도행전 11:24 · 본디새김
바나바의 기쁨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아보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곳을 알아보는 사람은 반드시 그 일을 처음 시작한 사람이 아닐 수 있습니다.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처음 복음을 전한 사람도, 그 공동체를 세운 사람도 아니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시작한 하나님의 일 앞에서 자신의 위치를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계속 주님 곁에 머물도록 돕습니다.
「주 곁에 머물러 있으라」
바나바는 자신을 따르라고 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자신에게 충성하라고도 하지 않습니다. 23절에서 그가 권한 것은 「주 곁에 머물러 있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표현은 단지 지금의 상태를 유지하라는 뜻보다 지속적으로 주님께 붙어 있으라는 의미를 지닙니다. 앞서 누가는 사람들이 「주에게로 돌아섰다」고 말했고, 이제 바나바는 그들에게 「주 곁에 머물러 있으라」고 권합니다.
처음 돌아서는 것과 계속 머무는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지만 같은 일이 아닙니다.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는 일은 중요한 시작이지만, 그 뒤에도 그 신앙 안에서 배우고 자라며 삶을 형성해 가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바나바는 바로 그 일을 돕습니다.
24절에서 누가는 사람들이 바나바에게 더해졌다거나 예루살렘 교회의 영향력 아래 들어왔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주께 더해졌다고 말합니다.
안디옥 공동체의 중심은 바나바가 아닙니다. 살아나신 주 예수님이십니다.
바나바는 왜 사울을 찾으러 갔을까?
그는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떠났다.사도행전 11:25 · 본디새김
그곳에 머물며 자신이 계속 가르치면 되지 않았을까요? 그런데 그는 안디옥을 떠나 사울을 찾으러 갑니다. 사도행전 9장 30절에서 형제들은 사울을 죽이려는 시도를 알아채고 그를 가이사랴로 데려간 뒤 다소로 보냈습니다. 누가는 그 뒤 사울이 다소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자세히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바나바의 행동은 두 가지를 보여 줍니다. 첫째, 그는 안디옥의 공동체를 자신의 영향력 아래 독점하려 하지 않습니다. 둘째, 사울이 이 공동체를 돕는 데 필요한 사람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게 이해할 만한 문맥상의 근거가 있습니다. 사울은 이미 예수님의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지고 갈 사람으로 부름받았고(9:15), 바나바는 예루살렘에서 다른 제자들이 사울을 두려워했을 때 그를 사도들에게 소개한 사람이었습니다(9:27). 다만 누가는 바나바가 왜 사울을 선택했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것은 문맥에 근거한 해석으로 남겨 두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는 사울을 찾아내어 안디옥으로 데려왔다. 그들은 꼬박 한 해 동안 교회 공동체에서 함께 모여 많은 무리를 가르쳤다. 그리고 안디옥에서 제자들이 처음으로 「그리스도 사람」이라 불리게 되었다.사도행전 11:26 · 본디새김
여기서 시간이 갑자기 길어집니다. 앞 장에서는 성령이 임하고 세례를 받는 일이 한순간에 일어났지만, 안디옥의 공동체가 배우고 자라나는 데에는 긴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어떤 내용을 얼마나 자주 가르쳤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은 초기 교회의 삶에서 가르침이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 줍니다.
복음이 전해지고 많은 사람이 주께 돌아온 것으로 모든 일이 끝나지 않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배우는 시간이 이어집니다.
「그리스도 사람」이라는 이름이 생기다
우리가 오늘날 익숙하게 사용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사도행전의 이야기 속에서 처음 등장하는 순간입니다. 「그리스도 사람」이라는 번역은 이 명칭이 누구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는지 잘 드러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
이 이름을 그리스도인들이 스스로 선택했는지, 주변 사람들이 그들을 구별하기 위해 붙였는지 본문은 명시하지 않습니다. 이 명칭이 초기 신자들의 자기 호칭보다는 주변 사람들이 붙인 별명으로 보인다는 견해가 있지만, 그 이름이 처음부터 조롱이나 멸시의 의미였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왜 하필 안디옥에서 이 이름이 등장할까요? 예루살렘의 초기 제자들은 유대인들이었고,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 예수님을 따르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안디옥에서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같은 주님께 돌아오고 있었으므로, 그들을 단지 유대인 공동체의 한 집단으로만 구별하기 어려워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 해석은 안디옥의 사회적 환경과 본문의 흐름을 함께 고려한 것이지만, 누가가 이름의 발생 이유를 직접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더 이상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신앙 운동의 소식을 듣기만 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이며 배우고 살아가는 공동체를 이루었고, 그들이 누구에게 속한 사람들인지를 나타내는 이름까지 생겼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 이름을 기록한 뒤 곧바로 공동체의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줍니다. 이번에는 가르침이 아니라 기근과 구제의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깊이
사도행전 4장 36절에서 바나바의 이름은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풀이됩니다. 그리스어 파라클레시스는 위로와 격려, 권면을 함께 가리킬 수 있는 말이고, 11장 23절에서 바나바가 「권했다」는 말에는 같은 어근의 동사 파라칼레오(παρακαλέω)가 사용됩니다. 이것이 바나바라는 이름을 붙인 이유라고 누가가 직접 설명하지는 않지만, 그의 이름과 행동이 자연스럽게 어울립니다. 또 「그리스도 사람」으로 옮긴 그리스어 크리스티아노이(Χριστιανός)는 그리스도를 따르거나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들을 가리키는 명칭이며, 여기에 붙은 -이아노스 계열의 어미는 로마 세계에서 어떤 인물의 추종자나 집단을 나타낼 때 사용되던 라틴어식 표현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소식, 안디옥에서 보내는 도움
그 무렵에 예언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내려왔다.사도행전 11:27 · 본디새김
사도행전 11장의 마지막 장면은 예루살렘과 안디옥 사이를 오가는 사람들로 시작합니다. 앞서 예루살렘에서는 바나바를 안디옥으로 보냈고, 이제 예언자들도 내려옵니다.
그 가운데 아가보라는 한 사람이 일어나 영을 통해 사람 사는 온 땅에 큰 기근이 닥칠 것이라고 알렸다. 그 기근이 클라우디우스가 다스리던 때에 일어났다.사도행전 11:28 · 본디새김
「사람 사는 온 땅」은 사람이 거주하는 세계를 뜻하며, 당시 문맥에서는 로마 제국의 세계를 가리키는 표현으로도 사용됩니다. 지구 전체의 모든 지역에 동시에 기근이 발생한다는 현대적인 의미로만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클라우디우스는 서기 41년부터 54년까지 로마를 다스렸습니다.
본문을 읽는 데 중요한 것은 아가보가 앞으로 일어날 어려움을 알렸고, 안디옥의 제자들이 그 말을 듣고 행동했다는 사실입니다.
기근이 닥친다는 말을 듣고 무엇을 했는가?
기근에 관한 예언을 들었다면 사람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거나, 자신들의 몫을 먼저 확보하려 하거나, 언제 어느 지역에서 기근이 일어날지 더 자세히 알고 싶어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안디옥 제자들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제자들은 저마다 형편이 되는 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섬김에 쓸 것을 보내기로 정했다.사도행전 11:29 · 본디새김
누가는 모든 사람이 동일한 액수를 내기로 했다거나, 가진 것을 전부 내놓았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저마다 형편이 되는 대로」는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의 형편이 서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어려움을 겪는 형제들을 돕는 일에는 함께 참여하려는 태도입니다.
그들이 돕기로 한 것은 유대에 사는 형제들입니다.
예루살렘의 일부 신자들은 베드로가 이방 사람들과 함께 식사한 일을 문제 삼았다가,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가 주어졌음을 인정했습니다. 이제 이방 세계의 큰 도시에서 성장한 교회가 유대 지역의 형제들을 자기 형제로 여기며 그들의 어려움을 돌봅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하나의 공동체로 묶으셨다는 사실이 단순한 선언에 머무르지 않고 물질적인 도움으로 나타납니다.
교회는 받기만 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이 장에서 고넬료의 집 소식도, 안디옥의 소식도 예루살렘에 전해졌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보냈고, 예루살렘에서 온 예언자들이 기근을 알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흐름이 반대로 향합니다.
안디옥은 예루살렘의 가르침만 받아야 하는 수동적인 공동체로 남지 않습니다. 복음을 먼저 받아들인 공동체가 언제나 도움을 주는 쪽에 서고, 나중에 받아들인 공동체가 언제나 도움을 받는 쪽에 서는 것이 아닙니다. 형제들이 어려움을 겪으면 다른 형제들이 자신들의 형편에 따라 돕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2장 44–45절과 4장 32–35절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재산 나눔을 기록했던 장면과도 연결됩니다. 그때에는 예루살렘 안에서 나누었지만, 이제 그 나눔이 도시와 지역의 경계를 넘습니다. 서로 멀리 떨어져 있고, 문화와 언어의 배경이 다른 사람들이 같은 주님께 속한 형제들로서 서로의 필요를 돌봅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다시 예루살렘으로
그들은 그렇게 하여 바나바와 사울 편에 장로들에게 그것을 보냈다.사도행전 11:30 · 본디새김
29절의 결심이 30절의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그들은 돕기로 결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실제로 보냈습니다. 처음에는 가르침을 위해 안디옥에 모였던 바나바와 사울이, 이제는 섬김에 쓸 것을 가지고 유대 지역으로 향합니다.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이 「장로」라는 명칭으로 등장하는 첫 자리입니다. 이들이 어떻게 선출되었는지, 사도들과 어떤 방식으로 역할을 나누었는지는 여기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구제에 쓸 물질을 장로들에게 보냈다는 사실은 공동체가 도움을 전달하기 위한 책임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조금 더 깊이
클라우디우스 시대의 기근에 관해서는 성경 밖의 자료도 있습니다. 1세기 유대 역사가는 《유대 고대사》 20권 2장과 5장에서 유대 지역의 심각한 기근을 기록하며, 아디아베네의 헬레나 여왕이 이집트에서 곡식을 구입하여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전합니다. 그 기근은 40년대 중후반의 유대 지역 상황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이 기록만으로 아가보가 예언한 기근과 이 역사가가 기록한 기근의 정확한 범위와 시점을 모두 동일하다고 확정할 수는 없고, 로마 제국 전체에 같은 시각에 동일한 규모의 기근이 발생했다고 입증되는 것도 아닙니다. 한편 이런 나눔은 훗날 바울이 여러 교회의 연보를 설명할 때 더욱 깊은 신학적 의미를 갖게 됩니다. 로마서 15장 25–27절에서 바울은 이방인 신자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는 일을 영적인 것을 나눈 이들이 물질적인 것으로 섬기는 관계와 연결합니다. 사도행전 11장의 구제가 그 뒤의 모든 연보와 동일한 사건은 아니지만, 서로 다른 지역의 공동체가 물질을 나누고 서로의 필요를 돌본다는 점에서 중요한 주제적 연결을 이룹니다.
사도행전 11장이 보여 주는 복음의 변화
처음에는 이방 사람들과 같은 식탁에 앉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지역과 문화가 다른 신자들이 자신의 물질을 다른 형제들에게 보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누가가 의도한 정교한 문학적 대조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 사건이 같은 장에 놓이면서 드러나는 의미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서로 다른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공동체로 부르셨다는 사실은 실제 생활의 관계를 바꿉니다.
하나님이 같은 성령을 주신 사람들에게 다른 기준을 적용할 수 있느냐는 물음 앞에서, 베드로는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막을 수 있었겠습니까?」라고 답했고, 반대하던 이들은 잠잠해져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이 장면은 모든 새로운 주장을 무조건 하나님의 역사로 인정하라는 가르침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감정이나 직감만을 근거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의 말씀, 성령의 역사, 함께 목격한 증인들의 경험을 차례대로 설명했고, 반대하던 사람들 역시 그 설명을 듣고 판단했습니다. 새로운 일을 분별하려는 진지한 노력과, 자신의 기존 판단을 수정할 수 있는 태도는 서로 대립하지 않습니다.
이 모든 변화는 사람들이 먼저 새로운 이상을 세웠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방 사람들에게도 성령을 주셨고, 주님의 손이 안디옥의 복음 전도자들과 함께하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은혜를 보고 기뻐했고, 주님께 돌아왔으며, 배우면서 서로를 형제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 사람들의 관계 안에서 열매를 맺고 있습니다.
이제 안디옥에서는 바나바와 사울이 다시 길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새로운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가는 것도 아니고, 예루살렘에서 자신들의 권위를 인정받으러 가는 것도 아닙니다.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보낼 섬김의 몫을 맡았기 때문입니다.
안디옥의 제자들은 저마다 형편이 되는 대로 그것을 마련했습니다. 그들이 모은 것의 양은 기록되지 않았고, 누가 얼마를 냈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분명합니다.
바나바와 사울의 손에 맡겨진 그 도움은, 이제 유대에 있는 형제들에게 보내집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