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10장

이 장의 자리 · 8–12장 · 유대와 사마리아로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사람들

사도행전 10장은 한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가는 이야기처럼 시작합니다. 로마 군대의 백부장 고넬료는 늘 기도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며, 온 집안과 함께 하나님을 경외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천사를 보내어 베드로를 불러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고넬료에게 아직 들어야 할 말씀이 있다는 뜻입니다.

한편 베드로에게도 하나님이 가르쳐 주셔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고, 부활의 증인이었으며, 이미 많은 사람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에게 이상한 환상을 보여 주십니다. 온갖 짐승이 담긴 그릇이 하늘에서 내려오고, 그것들을 잡아먹으라는 음성이 들립니다.

베드로는 「저는 속되거나 더러운 것을 한 번도 먹은 적이 없습니다」 하며 거절합니다. 그러자 다시 음성이 들립니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너는 속되다고 하지 마라.」

이 말씀은 과연 음식에 관한 것일까요?

베드로 자신도 처음에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환상의 의미를 고민하는 동안,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가 묵고 있는 집을 찾아옵니다. 하나님이 두 사람에게 각각 다른 경험을 허락하셨고, 이제 그 경험들이 하나의 만남으로 이어집니다.

고넬료는 복음을 들어야 하는 사람이지만, 베드로도 배워야 하는 사람입니다. 고넬료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님에 관한 소식이고, 베드로에게 필요한 것은 그 예수님의 복음이 누구에게까지 열려 있는지 깨닫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야기의 결말은 베드로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놀랍습니다. 그가 아직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 성령이 이방 사람들에게 내려오십니다. 그들은 무엇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결정하기도 전에, 하나님이 이미 행하신 일을 목격합니다.

이 장에서 바뀌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받아들이시는 기준이 아닙니다. 그 기준을 이해하는 베드로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의 중심에는 모든 사람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읽는 시간 26분소단락 710장 본문 읽기 →

하나님이 기억하신 사람

사도행전 10:1–8 본문 →

이야기는 가이사랴에서 시작합니다.

가이사랴는 지중해 연안의 항구 도시로, 당시 유대 지역에서 로마 행정의 중심지였고 로마의 통치와 권력을 상징하는 장소였습니다. 그곳에 「이탈리아 부대」에 속한 고넬료라는 백부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고넬료의 군사적 권한이나 전투 경력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를 소개하면서 오히려 전혀 다른 특징들을 열거합니다.

경건하고 온 집안과 함께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고, 백성에게 자선을 많이 베풀고 늘 하나님에게 간구했는데,사도행전 10:2 · 본디새김

당시 이방인 중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하고 유대교의 신앙과 관습에 관심을 가지면서도 정식으로 개종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고, 고넬료는 대체로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로 이해됩니다. 그의 신앙은 가족들에게도 영향을 미치고, 유대 백성을 돕는 자선으로도 나타납니다.

그런 그에게 천사가 나타납니다.

그는 천사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두려움에 사로잡혀 말했다. 「무슨 일입니까, 주님?」 천사가 그에게 말했다. 「네 기도와 네 자선이 하나님 앞에 기억거리로 올라갔다.」사도행전 10:4 · 본디새김

하나님이 고넬료의 기도와 자선을 잊고 계시다가 이제야 기억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기억거리」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제물의 일부를 가리키는 말로도 쓰였고, 기도와 자선이 하나님 앞에 「올라갔다」는 표현에는 예배와 제물의 이미지가 겹쳐 보입니다. 유대인이 아닌 로마 장교가 드려 온 기도와 자선이 하나님 앞에서 받아들여졌다고 누가는 기록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유대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그의 기도를 듣지 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물론 이것을 고넬료가 많은 자선을 베풀었으므로 구원을 살 자격을 얻었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천사는 그의 선행을 칭찬한 다음 모든 일이 끝났다고 선언하지 않고, 베드로를 불러오라고 명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드려 온 기도와 자선을 외면하지 않으시면서, 그를 더 깊은 앎으로 이끌기 위해 사람을 보내게 하십니다.

천사는 왜 직접 복음을 전하지 않았을까?

천사가 직접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설명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누가는 그 이유를 명시적으로 해설하지 않지만, 이야기 전체에 실마리가 있습니다.

이 만남은 고넬료가 복음을 듣는 사건인 동시에, 베드로가 고넬료를 만나야 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도 하나님이 이방 사람들에게 무엇을 행하고 계신지 직접 보아야 합니다. 천사가 고넬료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났다면 베드로에게 일어나야 할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고넬료는 하인 둘과 경건한 군인 하나를 욥바로 보냅니다. 그들은 어떤 말씀을 듣게 될지 정확히 알지 못한 채 길을 떠납니다.

조금 더 깊이

「이탈리아 부대」가 이 시기에 어떤 형태로 가이사랴에 주둔했는지는 역사적으로 논의가 있습니다. 그 부대의 당시 주둔을 직접 입증하기는 어렵지만, 고넬료와 같은 백부장이 그 지역에서 활동하는 것은 로마 군대의 관행에 비추어 가능하다고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모두 동일한 절차와 지위를 가진 공식 집단을 이루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기억거리」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므네모쉬논(μνημόσυνον)은 어떤 사람이나 일을 기억하게 하는 것을 뜻하며, 그리스어 구약성경 레위기 2장 2절에서 곡식 제물의 일부를 태워 바치는 장면에 같은 낱말이 등장합니다.

베드로는 무엇을 잘못 알고 있었을까?

사도행전 10:9–16 본문 →

이튿날,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욥바에 가까이 왔을 때 베드로는 기도하려고 옥상에 올라갑니다.

그때는 정오 무렵이었고, 고넬료가 환상을 본 것은 오후 세 시 무렵이었습니다. 두 사람 모두 기도하는 가운데 특별한 경험을 하지만, 고넬료는 구체적인 지시를 받고 베드로는 뜻을 알 수 없는 환상을 봅니다.

그는 배가 고파 무엇인가 먹고 싶었고, 사람들이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황홀경에 빠집니다.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내려오는데, 그 안에는 온갖 네발짐승과 기는 것과 새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서 먹어라」 하는 음성이 들립니다.

베드로가 말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주님. 저는 속되거나 더러운 것을 한 번도 먹은 적이 없습니다.」사도행전 10:14 · 본디새김

그에게는 율법과 자신의 신앙적 정체성이 걸린 문제였습니다.

깨끗한 동물과 더러운 동물

레위기 11장과 신명기 14장에는 먹을 수 있는 동물과 먹어서는 안 되는 동물을 구별하는 규정이 나옵니다. 이 규정은 하나님께 거룩하게 구별된 백성으로 살아가는 생활 방식의 일부였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먹지 않는가는 자신들이 어떤 백성인지를 드러내는 일이었습니다. 「속된」은 거룩하게 구별되지 않은 일반적인 상태를, 「더러운」은 의례적인 부정함을 가리킬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자신이 지켜 온 정결의 구별에 어긋나는 음식을 먹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늘에서 들려온 두 번째 말씀은 베드로의 판단을 뒤흔듭니다.

다시 두 번째로 그에게 음성이 들려왔다.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너는 속되다고 하지 마라.」사도행전 10:15 · 본디새김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셨고, 베드로에게는 그것을 속되다고 부르지 말라는 명령이 주어집니다. 문제의 중심은 베드로가 어떤 것을 깨끗하게 만들 수 있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미 깨끗하게 하신 것을 베드로가 어떻게 판단하느냐입니다.

이 일이 세 번 반복되고 그릇은 다시 하늘로 올라갑니다. 베드로가 실제로 그 동물들을 잡아먹었다는 기록은 없고, 그는 환상을 보고도 그 뜻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다음 장면은 그가 진지하게 환상의 의미를 고민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음식 규정이 폐지되었다는 뜻일까?

이 대목은 해석이 갈리는 자리입니다.

전통적인 기독교 해석 가운데 하나는 이 환상이 이방인을 향한 복음의 개방과 함께, 율법의 음식 정결 규정이 더 이상 그리스도인들을 구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이해합니다. 마가복음 7장 18–19절, 로마서 14장 14절 등과 연결하여 읽는 해석입니다. 반면 다른 해석은 사도행전 10장의 직접적인 관심이 음식 규정의 폐지가 아니라 이방인을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하지 말라는 데 있다고 봅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뒤에서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사람도 속되거나 더럽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28절) 하며 환상을 음식이 아니라 사람에게 적용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10장만 놓고 읽을 때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환상을 본 뒤에 음식에 대한 새로운 규정을 발표하지 않습니다. 그는 사람을 더럽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 우선 따라가야 할 것은 베드로의 식단이 아니라, 그가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이 어떻게 바뀌었느냐는 문제입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진지하게 지켜 온 베드로에게 단순히 기존의 신앙을 버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하나님을 향한 충실함이라고 여겼던 구별이 사람을 대하는 문제에서 어떤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는지 보게 하십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아직 그 사실을 모릅니다.

그가 환상을 두고 고민하고 있을 때, 대문 앞에서 누군가가 그의 이름을 부릅니다.

조금 더 깊이

「속되거나 더러운 것」에 쓰인 두 낱말은 코이노스(κοινός)와 아카타르토스(ἀκάθαρτος)입니다. 두 낱말은 서로 구별되지만 이 문맥에서 언제나 명확하게 분리되는 범주인지는 논의가 있습니다. 음식 규정을 둘러싼 두 해석의 차이는 역사적·신학적으로 중요합니다. 성경의 정결 규정과 당시의 사회적 관습을 구별해야 한다고 보면서 이 환상을 음식 율법의 폐지를 선언하는 사건으로 보지 않는 해석도 있고, 반대로 이방인과의 교제를 가능하게 만드는 변화가 음식 규정의 효력에도 영향을 준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환상의 뜻은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사도행전 10:17–23 본문 →

누가는 장면의 시간을 절묘하게 맞춥니다.

베드로는 방금 본 환상이 무슨 뜻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와 대문 앞에 섭니다. 독자는 서로 연결된 두 사건을 보고 있지만, 베드로는 자신에게 일어난 일의 절반밖에 알지 못합니다. 따로 진행되던 두 이야기가 이제 대문 앞에서 만납니다.

베드로가 그 환상을 두고 곰곰이 생각하는 동안 영이 그에게 말했다. 「보아라, 세 사람이 너를 찾고 있다.」 「그러니 일어나 내려가서 조금도 가리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거라. 내가 그들을 보냈기 때문이다.」사도행전 10:19–20 · 본디새김

「조금도 가리지 말고」(메덴 디아크리노메노스)는 의심하거나 망설이지 말라는 뜻으로도, 구별하거나 차이를 두지 말라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문법적으로 이 자리에서는 「주저하지 말고」가 유력하지만, 이야기 전체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을 구별하는 문제와 연결될 여지도 있습니다.

베드로는 환상의 의미를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그에게 당장 해야 할 일을 알려 주십니다. 모든 것을 이해한 뒤에야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내려가 「무슨 까닭으로 오셨습니까?」 하고 묻습니다. 그들이 고넬료가 어떤 사람이며 왜 베드로를 찾는지 설명하자, 베드로는 그들을 불러들여 묵게 합니다. 아직 고넬료의 집에 들어가지도, 환상의 의미를 설명하지도 못했지만, 자신을 찾아온 이방인 일행을 받아들여 하룻밤 묵게 한 것입니다.

이튿날 그는 그들과 함께 떠나고, 욥바의 형제들 가운데 몇 사람도 동행합니다.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 성령을 주실 때 그 현장을 목격할 유대인 신자들이 함께 가고 있는 것입니다. 베드로 자신은 이 여정이 어디까지 이어질지 아직 모릅니다. 하지만 그가 고민하던 환상은 이미 사람과의 만남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가리다」로 옮긴 동사의 기본적인 의미에는 구별하고 분리한다는 뜻이 있으며, 11장 12절에서 베드로가 같은 사건을 다시 이야기할 때에도 이 동사가 사용됩니다.

두 사람이 만났지만, 하나님이 준비하신 것은 더 큰 만남이었다

사도행전 10:24–33 본문 →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도착했을 때 고넬료는 혼자 기다리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다음 날 베드로는 가이사랴에 들어갔다. 고넬료는 친척들과 가까운 벗들을 불러 모아 놓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사도행전 10:24 · 본디새김

천사가 명한 것은 베드로를 불러오라는 일이었지만, 고넬료는 자신이 들어야 할 말씀을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듣고 싶었습니다. 그 모습은 그에게 신앙적 열심뿐 아니라 배우려는 자세도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들어설 때 고넬료가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합니다. 이 행동이 베드로를 신적인 존재처럼 숭배하려는 것이었는지, 높은 존경을 표시하는 행위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높은 사람 앞에 엎드리는 행동이 다양한 의미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그를 일으키며 말했다. 「일어나십시오. 나 자신도 사람입니다.」사도행전 10:26 · 본디새김

베드로는 로마 군대의 백부장 앞에 서 있지만, 그에게 굴복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를 지배할 신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도 아닙니다.

두 사람은 모두 사람입니다.

고넬료에게는 로마 군대의 지위가, 베드로에게는 사도의 사명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이들의 가치는 그런 지위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고넬료를 일으킨 뒤 이야기하며 집 안으로 들어가, 많은 사람이 모여 있는 것을 봅니다.

베드로가 넘어선 경계

베드로가 모인 사람들에게 가장 먼저 말하는 것은 복음의 내용이 아니라 자신이 왜 이곳에 왔는지입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유대 사람이 다른 겨레 사람과 어울리거나 그에게 다가가는 것이 법도에 어긋난다는 것을 여러분은 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에게 어떤 사람도 속되거나 더럽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보여 주셨습니다.」사도행전 10:28 · 본디새김

환상에는 동물들이 등장했지만, 베드로는 사람에 관해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법도」를 곧바로 모세 율법의 명시적인 금지 명령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이방인을 본질적으로 부정하다고 규정하거나 이방인의 집에 들어가는 모든 행위를 금하는 명시적 규정이 율법에 있는 것은 아니고, 이방인과의 교제를 조심하는 관습과 해석들이 있었을 뿐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경계가, 다른 사람을 속되거나 더러운 존재로 판단하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렇다면 왜 음식에 관한 환상을 통해 이것을 배워야 했을까요?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같은 장소에 머물고, 서로의 음식을 받아들이며, 일상의 일부를 나누는 일입니다. 음식을 둘러싼 정결의 구별은 사람들 사이의 교제에도 영향을 줄 수 있었고, 하나님은 그 익숙한 이미지를 통해 베드로가 사람을 구별하는 방식 자체를 돌아보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고넬료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아보고 예외적으로 받아들인 것이 아닙니다. 그는 「어떤 사람도」 그렇게 부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고넬료의 선행이 베드로의 판단을 바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가 베드로의 판단을 바꾼 것입니다.

베드로가 「무슨 까닭으로 나를 부르셨습니까?」 하고 묻자, 고넬료는 자신에게 나타난 천사의 이야기를 다시 들려줍니다. 독자에게는 이미 알려진 내용이지만, 이제는 베드로가 그 이야기를 듣습니다. 서로 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사건들이 두 사람의 대화를 통해 하나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곧바로 그대에게 사람을 보냈고, 그대가 와 주셔서 고맙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가 주께서 그대에게 명하신 것을 다 들으려고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사도행전 10:33 · 본디새김

고넬료는 천사를 다시 불러 달라고 하지도, 환상을 더 설명해 달라고 하지도 않습니다. 사람들이 베드로 앞에 모여 있지만, 그는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있다고 말합니다.

이 장면에서 베드로도 배우는 사람이고 고넬료도 배우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베드로가 입을 엽니다.

조금 더 깊이

이방인과의 음식 교제나 친밀한 관계를 조심하던 관행들은 유대인 공동체가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방식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모든 유대인 집단에서 동일하게 적용되었다고 보기도 어렵습니다.

「이분은 모두의 주인이십니다」

사도행전 10:34–43 본문 →

베드로의 설교는 뜻밖의 고백으로 시작합니다.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했다. 「참으로 나는 하나님이 얼굴을 보고 사람을 차별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사도행전 10:34 · 본디새김

예수님과 함께 다녔던 사람, 그분의 부활을 증언하던 사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던 사람이 이제야 깨닫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처음부터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다

「얼굴을 보고 사람을 차별하는 분」이라는 표현은 신명기 10장 17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여호와야훼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며 뇌물을 받지 않으시는 하나님이고, 이어지는 18–19절은 하나님이 고아와 과부를 위해 정의를 행하시고 외국인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근거로 이스라엘에게도 외국인을 사랑하라고 명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지위나 영향력에 매이지 않으시며, 보호받기 어려운 이들의 정의와 생존에도 관심을 기울이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새롭게 깨달은 것은 하나님이 공정하시다는 사실 자체가 아닙니다. 그 공정하심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방 사람들을 받아들이시는 일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하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알고 있었던 하나님의 성품이, 베드로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받아들이시는 사람은 누구인가?

「도리어 어느 민족에서나 그분을 두려워하고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분에게 받아들여집니다.」사도행전 10:35 · 본디새김

이 말씀을 읽을 때 두 가지를 함께 생각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이 사람을 받아들이시는 데 민족적 출신이 결정적인 장애물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 민족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둘째,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의를 행한다는 표현을 예수 그리스도와 무관한 독립적인 구원 조건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던 고넬료에게 천사는 베드로를 불러오라고 했고, 43절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고 말합니다. 35절 한 구절만 떼어 내어 예수님의 복음을 듣거나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한편 「받아들여진다」는 말을 이미 구원을 완성했다는 뜻보다, 하나님의 호의와 받아들임의 대상이 된다는 의미로 읽는 견해도 있습니다. 이 해석은 고넬료가 경건한 사람이면서도 여전히 복음을 들어야 했다는 이야기의 흐름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평화가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다

「그분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신 말씀,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평화를 복음으로 전하신 말씀을 여러분은 알고 계십니다. 이분은 모두의 주인이십니다.」사도행전 10:36 · 본디새김

이 문장에는 복음의 출발점과 도달 범위가 함께 들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역사와 동떨어진 곳에서 나타나신 분이 아니시며, 그분의 사역은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유대와 예루살렘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복음이 이스라엘에게만 속한 것은 아닙니다. 누가는 이스라엘의 특별한 역사를 부정하지 않고, 그 역사를 통해 예수님의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는 길을 보여 줍니다.

그런데 가이사랴에서 이 선언을 듣고 있는 사람은 로마 군대의 백부장입니다.

로마의 권력에 속한 장교의 집에서 갈릴리 출신의 유대인 베드로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나사렛 예수님을 「모두의 주인」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고넬료가 로마 장교라는 신분을 먼저 버려야 했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가 들어야 하는 복음은 어떤 인간의 권력보다도 예수님의 주권이 궁극적이라는 선언을 담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전하는 평화도 그런 예수님을 통해 주어집니다. 이 평화는 서로 다른 민족이 그저 갈등 없이 지내자는 약속에 머무르지 않고, 사람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고 죄를 용서받게 하는 예수님의 사역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무엇을 증언하는가?

베드로는 요한이 선포한 세례 이후 갈릴리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사역을 짧게 말합니다.

「나사렛에서 온 예수의 일입니다. 하나님이 그분에게 거룩한 영과 능력으로 기름을 부으셨고, 그분은 두루 다니며 선을 베풀고 마귀에게 짓눌린 이들을 모두 낫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분과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10:38 · 본디새김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능력을 자신의 명성을 쌓는 데 쓰지 않으셨습니다. 그 능력은 악한 힘에 짓눌린 사람들을 회복시키는 일로 나타났습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증언은 여기서 뜻밖의 방향으로 전개됩니다.

「우리는 그분이 유대 사람들이 사는 지방과 예루살렘에서 하신 모든 일의 증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분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습니다.」사도행전 10:39 · 본디새김
「하나님이 이분을 사흘째 되는 날에 일으키셨고 나타나게 하셨습니다.」사도행전 10:40 · 본디새김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수님을 살리셨습니다.

이 대조는 사도행전에서 사도들이 예수님을 선포할 때 반복해서 등장하는 핵심적인 증언입니다. 인간이 예수님에게 내린 판결이 마지막 판결이 되지 않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신 사람들

「온 백성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미리 뽑아 두신 증인들, 곧 우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우리는 그분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어나신 뒤에 그분과 함께 먹고 마셨습니다.」사도행전 10:41 · 본디새김

그들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다고 막연히 느꼈다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먹고 마셨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그 부활을 증언하도록 선택받았다고 강조합니다.

이 증언은 고넬료가 왜 베드로에게서 말씀을 들어야 하는지를 설명해 줍니다. 천사는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설명하지 않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증인을 불러오게 했습니다.

모든 사람의 주님이시며 재판관이신 예수님

베드로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의 재판관」으로 세우셨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에게 재판받으시고 죽임당하신 분을,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재판관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분은 인간의 판단으로 규정되시는 분이 아니라 인간의 삶과 죽음에 대한 궁극적인 판단을 맡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바로 이어서 죄의 용서를 선포합니다.

「모든 예언자가 이분을 두고 증언합니다. 그분을 믿는 이마다 그분의 이름으로 죄를 용서받는다는 것입니다.」사도행전 10:43 · 본디새김

「모든 예언자」는 예언서의 모든 구절이 예수님의 이름을 직접 언급한다는 뜻이 아니라, 예언자들이 증언해 온 구원과 용서의 약속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된다는 신학적 주장입니다. 그리고 그 결론인 「그분을 믿는 이마다」에는 민족이나 출신에 관한 제한이 없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말씀의 결론이 이제 고넬료의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도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민족에 따라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나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섬기기만 하면 예수 그리스도와는 무관하게 동일한 결과에 이른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이 누구에게나 열어 주시는 길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는 죄의 용서와 생명의 길임을 전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베드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납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49장 6절에서 여호와야훼의 종은 이스라엘의 회복뿐 아니라 민족들의 빛이 되어 하나님의 구원이 땅끝까지 이르게 하는 사명을 맡습니다. 그 본문은 원래 이스라엘의 회복과 하나님의 종의 사명을 말하는 문맥에 있고, 사도행전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 여러 민족에게 전해지는 과정을 통해 그 주제가 새롭게 펼쳐집니다. 이는 직접 인용이라기보다 정경 전체에서 발전하는 주제적 연결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성령으로 기름을 부으셨다는 38절의 표현은 이사야 61장 1절과 연결됩니다. 그곳에서 기름 부음 받은 사람은 가난한 이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고 억눌린 이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도록 보냄을 받으며, 누가복음 4장 18–21절에서 예수님은 이 말씀이 자신에게서 이루어졌다고 선언하셨습니다. 41절의 「함께 먹고 마셨다」는 누가복음 24장 36–43절과 맞닿아 있습니다. 제자들이 영을 보고 있다고 생각하며 두려워하자, 예수님은 손과 발을 보여 주시고 그들 앞에서 구운 물고기를 드셨습니다. 그 이야기는 예수님의 부활이 제자들의 내면에서 일어난 깨달음이나, 돌아가신 스승이 영적으로 살아 계시다는 확신만을 뜻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베드로가 허락하기 전에 하나님이 주셨다

사도행전 10:44–48 본문 →

누가는 성령이 임한 시점을 매우 정확하게 기록합니다.

베드로가 아직 이 말을 하고 있을 때에 거룩한 영이 그 말을 듣는 모든 이에게 내렸다.사도행전 10:44 · 본디새김

베드로는 설교를 끝내지 않았습니다.

그가 세례를 받으라고 권하는 장면도, 성령을 받기 위해 손을 얹는 장면도 없습니다. 그가 여전히 말씀을 전하고 있을 때, 거룩한 영이 그 말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십니다.

성령은 누구의 허락을 기다리셨는가?

베드로는 처음에 환상을 이해하지 못했고, 고넬료의 집에 들어간 뒤에야 어떤 사람도 속되거나 더럽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하나님이 자신보다 먼저 행하신 일을 직접 목격합니다. 성령은 베드로의 소유가 아니며, 베드로가 누군가를 자격 있는 사람으로 판정했을 때 비로소 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할례를 받은 믿는 이들 가운데 베드로와 함께 온 이들은 모두 몹시 놀랐다. 이방 사람들에게도 거룩한 영의 선물이 부어졌기 때문이다.사도행전 10:45 · 본디새김

누가는 그들을 그냥 유대인이라 하지 않고 「할례를 받은 믿는 이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이미 예수님을 믿었고, 이방인이 말씀을 듣는 자리에 함께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이 자신들과 같은 성령의 선물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은 그들의 예상을 넘어섰습니다.

이것은 이방인들이 유대인처럼 된 뒤에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들은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고, 그들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먼저 성령이 임했고, 그다음에 베드로가 세례를 베풀도록 명합니다. 사도행전의 다른 장면들에서는 세례와 성령을 받는 순서가 다르게 나타나지만, 이 장에서는 그 순서가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받아들이셨다는 사실을 사도들이 부정하기 어렵게 만듭니다.

이방 사람들의 입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찬양

그들은 이방 사람들이 혀로 말하며 하나님을 드높이는 것을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베드로가 대답했다.사도행전 10:46 · 본디새김

혀로 말한다는 표현은 사도행전 2장에서 성령이 임한 뒤 제자들이 여러 언어로 말하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두 장면 모두 성령이 임한 사람들의 말이 하나님을 증언하고 찬양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성령은 예루살렘의 유대인 신자들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던 사람들의 입에서 이제 살아나신 예수님의 복음을 통해 주어지는 새 찬양이 흘러나옵니다.

「우리처럼 거룩한 영을 받은 이 사람들이 세례를 받지 못하도록 누가 세례에 쓸 물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사도행전 10:47 · 본디새김

누가 물을 막을 수 있습니까?

앞서 베드로는 어떤 사람도 속되거나 더럽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웠다고 말했습니다. 47절에서는 더 나아가, 성령을 받은 이 사람들이 세례받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베드로가 세례를 허락하는 이유는 단지 자신이 그들을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미 그들에게 성령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질문은 인간의 관대함을 선언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행동 앞에서 인간이 어떤 판단을 해야 하는지를 묻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고넬료의 기도와 자선을 기억하셨고, 베드로에게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고, 이제 모인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셨습니다. 베드로에게 남은 일은 사람들을 구별하는 기준을 새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인정하고 그에 합당하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이야기를 세례 장면에서 끝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라고 명했다. 그때 그들은 그에게 며칠 더 머물러 달라고 청했다.사도행전 10:48 · 본디새김

한 집에 함께 머무는 사람들

베드로는 고넬료의 집에 들어오는 일 자체를 중요한 변화로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그 집에 모인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러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제 그들은 말씀을 들은 낯선 사람들이 아니라,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같은 성령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조금 더 깊이

사도행전 10장은 이방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언어를 말했는지, 주변 사람들이 각자의 모국어로 알아들었는지를 설명하지 않으므로 2장과 모든 세부 사항이 동일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막다」로 번역된 동사 콜뤼오(κωλύω)는 8장 36절에서 에티오피아 고자가 「세례를 받는 것을 무엇이 막습니까?」 하고 물을 때에도 쓰여, 두 질문이 서로를 비춥니다. 다만 8장에서는 한 사람이 복음을 듣고 세례를 요청하고, 10장에서는 성령이 먼저 임한 사실을 목격한 사도가 세례를 베풀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선언하므로 두 장면의 의미를 완전히 동일하게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가 실제로 얼마나 머물렀는지는 48절에서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한 집에서 만난 두 사람

사도행전 10:1–48 본문 →

이 장에서 바뀐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받아들이시는 기준이 아니라 베드로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사도였지만 여전히 새로운 것을 깨달아야 했고, 그것을 배우는 데에는 낯선 사람의 집으로 들어가는 일이 필요했습니다.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아직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서로 다른 민족의 사람들이 하나가 되는 것은 차이를 무시하자는 추상적인 이상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물론 모든 차이를 무시하거나 모든 행동이 동일하게 옳다고 선언하는 것이 이 본문의 메시지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 복음을 누구에게 전하고, 누가 그 복음 안에서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를 결정할 때 인간이 만든 경계가 하나님의 행동보다 앞서서는 안 됩니다.

이야기의 마지막 장면은 특별한 환상도,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도 아닙니다.

로마 군대의 백부장이 살던 집에 갈릴리 출신의 베드로가 들어와 있습니다. 그의 곁에는 욥바에서 함께 온 형제들이 있고, 그 집에는 고넬료의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들은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성령이 임하시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그리고 이제 베드로에게 말합니다.

며칠 더 머물러 달라고요.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