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8–12장 · 유대와 사마리아로

예수님께서 붙잡으신 사람들

사도행전 9장은 누군가를 붙잡으러 가던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사울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내 결박하고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다마스쿠스로 향합니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오히려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이 이야기를 흔히 ‘사울의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만 읽으면 본문에서 놓치는 것이 생깁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믿게 된 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그를 어떻게 대하시는지, 그리고 사울 때문에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어떤 일을 요구하시는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울을 쓰러뜨리시지만 그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직접 해결해 주지는 않으시고, 사울이 박해하던 공동체의 한 사람을 그에게 보내십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없애려고 길을 나섰던 사울은,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지고 가도록 내가 고른 그릇」(15절)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장은 사울의 극적인 변화만을 보여 주는 것일까요?

후반부로 가면 이야기는 베드로에게로 옮겨갑니다. 베드로는 오랫동안 몸이 마비되어 있던 애니아를 만나고, 죽은 다비다를 위해 기도합니다. 사울은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가 다시 봅니다. 애니아는 일어나지 못하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다비다는 죽음에서 일으켜집니다.

서로 다른 세 이야기의 중심에는 같은 분이 계십니다.

사도행전 9장의 주인공은 새로운 사람이 된 사울도, 기적을 행하는 베드로도 아닙니다. 자신을 박해하던 사람을 부르시고, 고통받는 사람을 일으키시는 살아나신 예수님이십니다.

읽는 시간 27분소단락 79장 본문 읽기 →

사울이 알지 못했던 박해의 대상

사도행전 9:1–9 본문 →

9장은 사울에 관한 불편한 묘사로 시작합니다.

사울은 아직도 주의 제자들을 향해 위협과 살기를 뿜으며 대제사장에게 가서,사도행전 9:1 · 본디새김

스데반이 죽고 신자들이 흩어진 뒤에도 사울의 박해는 「아직도」 멈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예루살렘 밖에 있는 신자들까지 찾아내려 합니다. 그가 대제사장에게 요청한 편지는 다마스쿠스의 회당들을 향한 것이었고, 누가가 분명히 기록하는 것은 사울이 회당들의 협조를 얻어 신자들을 붙잡으려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그가 찾는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이 낯섭니다.

「그 길」에 속한 사람들.

여기서 「길」은 실제로 사람이 다니는 길을 뜻하기도 하지만, 살아가는 방식이나 따르는 길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속한 신앙 운동을 부르는 명칭으로 반복해서 등장합니다(19:9, 19:23, 22:4, 24:14).

누가는 이 표현을 사용한 직후, 실제 길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기록합니다. 사울은 「그 길」에 속한 사람들을 붙잡으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 위에서 자신이 알지 못했던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인생은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됩니다. 단순한 단어의 우연한 반복이라고만 보기는 어렵습니다.

「왜 내 제자들을 박해하느냐?」가 아닙니다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고 사울은 땅에 쓰러집니다.

그는 땅에 쓰러졌고, 자기에게 말하는 음성을 들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행전 9:4 · 본디새김

사울은 예수님을 직접 붙잡으러 다마스쿠스로 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찾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신자들이었고,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으로 알려져 계셨습니다.

그런데 들려온 질문은 「왜 그들을 박해하느냐?」가 아니라 「왜 나를 박해하느냐?」입니다.

그가 말했다. 「주님, 누구십니까?」 상대가 말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행전 9:5 · 본디새김

여기에는 두 가지 사실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첫째, 사울이 죽으셨다고 알고 있던 예수님께서 살아 계십니다. 그가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던 신앙 운동은 죽은 사람을 잘못 추종하는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제자들을 분리하지 않으십니다. 사울이 제자들에게 행한 일을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행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 활동하는 독립된 집단이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

훗날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설명합니다(고린도전서 12:12–27). 사도행전 9장이 그 비유를 직접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 신학적 의미를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을 보여 줍니다.

교회를 공격하던 사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대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믿으며 행하던 일이 실제로는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님을 대적하는 일이었습니다. 사울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적 열심을 조금 더 갖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를 대적하고 있었는지 깨닫는 일이었습니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

예수님께서는 사울에게 일어나 도시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일어나 그 도시로 들어가거라. 네가 해야 할 일이 너에게 알려질 것이다.」사도행전 9:6 · 본디새김

사울은 이제 자신의 계획을 따라 다마스쿠스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고, 예수님의 말씀을 기다려야 합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났다. 눈이 열려 있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다.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아 이끌어 다마스쿠스로 데리고 들어갔다.사도행전 9:8 · 본디새김

사울은 조금 전까지 누구를 결박해야 하며 어디로 데려가야 하는지 정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누구를 향해 걸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가 들어가는 도시는 원래부터 가려던 다마스쿠스이지만, 들어가는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남들을 결박하여 끌고 오려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손을 맡긴 채 들어갑니다.

다만 그의 시력 상실을 하나님이 교만한 사람에게 내리시는 일반적인 징벌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지만, 그 시간의 심리적 상태나 금식의 구체적인 동기를 누가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울의 여정이 여기서 멈추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다마스쿠스에 도착했지만 원래 하려던 일을 시작하지 못합니다. 그 대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야기의 시선은 다른 한 사람에게로 옮겨갑니다.

조금 더 깊이

다마스쿠스는 당시 로마의 시리아 지역에 속한 중요한 도시였고, 유대인 공동체도 있었습니다. 다만 예루살렘 대제사장의 권한이 그 도시에서 어느 범위까지 직접 행사될 수 있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또 사흘이라는 기간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연상시킨다고 읽을 수는 있지만, 누가는 이 기간을 예수님께서 무덤에 계셨던 시간과 직접 연결하지 않으므로 이를 의도적인 상징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아나니아를 보내셨을까요?

사도행전 9:10–19 본문 →

다마스쿠스에는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누가는 그가 어떤 직책을 맡았는지, 교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예수님의 제자였다고 소개합니다.

다마스쿠스에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다. 주가 환상 가운데 그에게 말했다. 「아나니아야.」 그가 말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사도행전 9:10 · 본디새김

이 대답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누군가를 부르실 때 등장하던 장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고(창세기 22:1), 모세 역시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부르시는 하나님께 응답했습니다(출애굽기 3:4). 이 연결은 주제적 유사성이며, 누가가 그 장면들을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에게 맡겨진 일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곧은」이라는 거리로 가서 다소 사람 사울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했다. 「주님, 저는 이 사람에 관해 많은 이에게서 들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당신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많은 악행을 저질렀는지 말입니다.」사도행전 9:13 · 본디새김

아나니아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음이 부족해서 나온 불순종이라고 간단히 평가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알고 있는 정보는 사실입니다. 사울은 실제로 신자들을 박해했고, 다마스쿠스에 온 목적도 그들을 결박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울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아나니아가 아직 알지 못하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 주십니다.

주가 그에게 말했다. 「일어나 『곧은』이라 불리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을 찾아라. 보아라, 그가 기도하고 있다.」사도행전 9:11 · 본디새김

사울이 더 이상 신자들을 잡으러 돌아다니지 않고 기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울도 아나니아가 와서 자신에게 손을 얹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가라는 말씀을 듣고, 사울은 아나니아가 자신에게 오는 모습을 봅니다. 서로 만나기 전에 예수님께서 양쪽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이 만남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계획한 일이 아닙니다.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박해자가 선택받은 그릇이 됩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의 악행을 말하자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주가 그에게 말했다. 「가거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 앞에 지고 가도록 내가 고른 그릇이기 때문이다.」사도행전 9:15 · 본디새김

「그릇」(σκεῦος)으로 번역된 말은 물건을 담거나 옮기는 용기를 비롯하여 어떤 목적에 사용하는 도구를 가리킬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울을 단순히 구원받은 한 사람으로만 남겨 두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박해하던 바로 그 이름을 세상에 전하도록 부르십니다.

사울의 열심과 능력이 향할 방향은 이전과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지우려던 사람이 그 이름을 전하게 됩니다.

그가 향할 대상은 이방 사람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전통을 지키려는 열심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를 이스라엘 바깥의 사람들에게도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이후 사도행전 전체에 걸쳐 펼쳐질 그의 사역을 미리 보여 줍니다.

「실제로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내가 그에게 보여 줄 것이다.」사도행전 9:16 · 본디새김

6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사울에게 「네가 해야 할 일이 너에게 알려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6절의 「해야 한다」(δέω)와 16절의 「받아야 한다」에는 같은 그리스어 동사가 사용됩니다. 어떤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울이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것이고, 그 일을 수행하는 삶에는 고난이 따르게 됩니다.

그렇다고 사울의 고난을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한 형벌이나 죗값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울이 이전에 박해자였으므로 이제 똑같이 고통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고난받는 이유는 「내 이름을 위해」서입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자신이 전하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복수라기보다 그가 맡게 될 사명의 성격을 보여 줍니다.

「사울 형제」

마침내 아나니아가 사울을 찾아갑니다.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에게 손을 얹고 말했다. 「사울 형제, 그대가 오던 길에서 그대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님이 나를 보내셨습니다. 그대가 다시 보고 거룩한 영으로 가득 채워지게 하려는 것입니다.」사도행전 9:17 · 본디새김

이야기 전체에서 가장 뜻밖의 호칭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나니아는 조금 전까지 사울이 성도들에게 저지른 악행을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사람을 형제라고 부릅니다. 이 호칭은 사울의 시력이 회복되거나 세례를 받기 전에 등장합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이 훌륭한 전도자가 되는 모습을 아직 보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을 보내셨다는 말씀을 따라 그에게 다가갑니다.

물론 이것이 신뢰를 무조건 요구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뒤에서 예루살렘의 제자들이 사울을 두려워하는 모습은 그들이 겪었던 피해와 불안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사람이 변화되는 과정에 다른 사람의 환대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지 드러냅니다.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고 그는 다시 보게 됩니다. 누가는 그것이 실제 비늘이었다고 단정하지 않고, 「비늘 같은 것」이라는 비유적 묘사로 눈이 회복되는 순간을 기록합니다. 사울은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며 기운을 차립니다. 자신이 박해하던 사람들과 이제 같은 주님을 믿는 공동체에 속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직접 나타나셨지만, 그가 회복되는 자리에는 아나니아의 손이 있고, 그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자리에는 제자들과의 교제가 있습니다.

사울의 변화는 한 개인의 마음속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붙잡으러 온 사람이 사람들에게 쫓깁니다

사도행전 9:20–30 본문 →

세례를 받은 사울은 다마스쿠스의 제자들과 며칠을 지냅니다. 그리고 곧 회당들에서 예수님을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곧 회당들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했다.사도행전 9:20 · 본디새김

누가는 사울의 이전 신학적 논리를 자세하게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공격했다는 사실은 반복해서 알려 줍니다. 그런 사울이 이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선포합니다. 이전 지식에 새로운 교리를 하나 덧붙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거부했던 예수님의 정체성을 새롭게 인정하는 일입니다.

22절에서는 사울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입증」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는 서로 무관한 두 칭호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왕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는 전통이 있고(시편 2:7, 사무엘기하 7:14),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말은 왕의 칭호를 넘어 예수님의 독특한 신적 관계를 나타내는 의미로도 발전합니다. 하지만 이 장에서 사울이 전하는 주장의 핵심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메시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듣는 이들이 모두 넋을 잃고 말했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이들을 유린한 자가 아닌가? 여기에도 그들을 묶인 채로 대제사장들에게 끌고 가려는 바로 그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닌가?」사도행전 9:21 · 본디새김

여기에서 누가는 「이름」이라는 표현을 반복합니다. 사울이 잡으려 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울을 자신의 이름을 지고 갈 그릇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사울은 이제 예수님의 이름으로 거리낌 없이 말합니다.

성경에서 어떤 사람의 이름으로 행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권위와 그가 나타내는 정체성에 관계된 일을 뜻할 수 있습니다. 사울의 변화는 그가 발음하는 이름이 달라진 정도가 아닙니다. 그 이름을 대하는 관계 자체가 바뀐 것입니다.

사울의 이야기는 여기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여러 날이 찼을 때에 유대 사람들이 그를 죽이려고 함께 꾀했다.사도행전 9:23 · 본디새김

누가는 이 기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장의 다마스쿠스 활동과 예루살렘 방문 사이에는 누가가 생략한 이동과 시간이 있지만, 누가가 강조하는 것은 정확한 연표보다 사울에게 일어난 변화와 그 결과입니다.

사울은 사람들을 결박하러 왔지만, 이제 자신이 죽임당할 위험에 처합니다.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성문을 밤낮으로 지킵니다.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사울은 대제사장의 편지를 가지고 있었고, 신자들을 결박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 도시에서 살아 나가기 위해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는 당당히 성문을 지나 도시를 떠나지 못합니다. 밤에 광주리에 담겨 성벽 아래로 내려갑니다.

이것은 사울이 자신의 사명 수행에 실패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고난이 실제로 그의 삶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훗날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에서 자신의 강함이 아니라 약함과 고난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이 사건을 언급합니다. 한때 다른 사람들을 끌고 갈 권한을 얻으려 했던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몸을 맡겨야 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생겼다고 신뢰가 즉시 회복되지는 않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새로운 어려움이 생깁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이르러 제자들 무리에 들어가 보려 했다. 그러나 모두가 그를 무서워했다. 그가 제자라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사도행전 9:26 · 본디새김

사울 자신에게는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제자들에게 사울은 여전히 두려운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는 제자들의 반응을 비난하지 않고, 그들이 사울을 무서워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합니다.

사람은 실제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과거에 다른 사람에게 남긴 상처와 두려움은 그가 변했다고 말하는 순간 자동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때 바나바가 등장합니다.

바나바가 그를 붙들어 사도들에게 데려갔다. 그리고 사울이 길에서 주를 본 일과 주가 그에게 말한 일과 다마스쿠스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거리낌 없이 말한 일을 그들에게 낱낱이 이야기했다.사도행전 9:27 · 본디새김

사울은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울의 말을 믿기 어려워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그를 신뢰하는 다른 사람의 증언이 필요했습니다. 바나바의 이름은 사도행전 4장 36절에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소개됩니다. 누가가 이 장면에서 그 뜻을 다시 언급하지는 않지만, 바나바가 사울과 제자들 사이를 이어 주는 모습은 그 이름과 잘 어울립니다.

아나니아가 다마스쿠스에서 사울을 형제라고 불렀다면, 바나바는 예루살렘에서 사울이 형제들 가운데 들어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를 찾아갔고, 바나바는 제자들 앞에서 그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사울은 예루살렘의 제자들과 함께 드나들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거리낌 없이 말하기 시작합니다.

스데반이 서 있던 자리에 사울이 섭니다

29절에서 사울은 「그리스 말을 쓰는 유대 사람들」과 말하고 따져 다툽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울을 죽이려 합니다.

앞서 사도행전 6장 9–10절에서 스데반은 그리스어권 유대인들이 속한 회당 사람들과 논쟁했고, 그 논쟁과 이어진 고발은 결국 스데반이 죽임당하는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스데반의 죽음에 찬성했던 사람이 사울입니다.

두 장면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모두 동일한 집단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가 비슷한 상황을 사울에게 다시 경험하게 하는 서술상의 대응은 분명합니다. 스데반을 죽이려 했던 사람들의 편에 섰던 사울이 이제 예수님을 증언한다는 이유로 죽임당할 위험을 겪습니다.

그는 과거의 행동을 그만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과거에 자신이 공격했던 사람들과 같은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형제들은 살해 시도를 알아채고 사울을 가이사랴로 데려간 뒤 다소로 보냅니다. 그를 보호하고 이동시키는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누가는 여기서 사울의 이야기를 잠시 멈춥니다.

조금 더 깊이

사울 자신은 갈라디아서 1장 17–18절에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왔으며, 삼 년 뒤에 예루살렘으로 갔다고 회고합니다. 아라비아 방문을 이 장의 어느 구절 사이에 배치해야 하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11장 32–33절에서 바울은 아레다 왕 아래의 관리가 도시를 지키고 있었다고 말하는 반면, 사도행전은 유대 사람들이 성문을 지켰다고 기록합니다. 두 기록의 정치적 관계나 구체적인 경위를 완전히 재구성할 수는 없지만, 사울이 체포의 위험을 피해 광주리를 타고 성벽에서 내려왔다는 점은 공통됩니다. 덧붙여 이 장 전체에서 누가는 그를 계속 「사울」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이라는 이름은 사도행전 13장 9절에서 「사울, 곧 바울」이라는 표현으로 소개되므로, 사울이 회심하면서 곧바로 바울이라는 새 이름을 받았다는 흔한 설명은 사도행전 본문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평화 속에서도 계속 일하시는 주님

사도행전 9:31 본문 →

31절은 지금까지의 격렬한 사건들을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그래서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에 걸쳐 교회는 평화를 지니고 있었다. 교회는 세워져 가면서 주를 두려워하는 마음과 거룩한 영의 위로 가운데 살아갔고, 그렇게 그 수가 늘어 갔다.사도행전 9:31 · 본디새김

8장은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9장의 이 자리에서는 교회가 평화를 누리고 있습니다. 다만 사울의 활동이 중단된 것이 평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누가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며, 모든 지역에서 박해가 완전히 끝났다는 선언도 아닙니다.

누가는 이 지역 전체에 걸친 신자들을 하나의 「교회」로 묘사합니다. 복음으로 연결된 공동체의 범위가 이미 예루살렘을 넘어섰음을 보여 줍니다.

또 누가는 단지 사람이 많아졌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주를 두려워하는 마음과 거룩한 영의 위로 가운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주를 두려워하는 마음은 예수님을 향한 경외를 가리키고, 거룩한 영의 위로는 그 공동체가 홀로 버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주시는 위로도 경험합니다.

교회는 박해받을 때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이 아닙니다. 평화를 누리는 동안에도 예수님을 경외하며 성령의 위로 가운데 자라 갑니다.

이렇게 한 시대의 긴장이 잠시 가라앉은 뒤, 누가는 베드로의 이야기로 시선을 옮깁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본문은 이 지역 전체에 걸친 교회를 단수형 에클레시아로 표현합니다. 일부 다른 그리스어 사본 전승에는 복수형 「교회들」이라는 읽기도 있습니다. 단수형은 지역의 구별이 무의미해졌다는 선언이라기보다, 지역마다 있던 신자들을 하나의 교회로 묘사할 수 있었음을 보여 줍니다.

애니아를 낫게 하시는 분은 누구인가

사도행전 9:32–35 본문 →

베드로는 여러 지역을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이릅니다.

그곳에는 여덟 해 동안 몸이 마비되어 자리에 누워 있던 애니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누가는 그가 왜, 언제 어떻게 병을 얻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말했다.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 일어나서 네 자리를 펴라.」 그러자 곧 그가 일어났다.사도행전 9:34 · 본디새김

베드로는 자신에게 특별한 치유 능력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애니아를 낫게 하신다고 선포합니다. 그리고 그 말이 끝나자 애니아는 곧 일어납니다.

이 장면은 누가복음 5장 17–26절에서 예수님께서 마비된 사람에게 일어나 자기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병자를 고치십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신다」고 선포합니다.

베드로가 증언하는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네 자리를 펴라」(στρώννυμι)의 동사는 펴거나 깔고 자리를 마련한다는 뜻으로, 문맥에서는 잠자리를 정돈하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덟 해 동안 자리에 누워 있던 사람에게 이제 자기 자리를 스스로 마련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애니아의 이후 삶을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지만, 한 사람의 생활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 주는 짧은 표현을 남겨 놓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주에게로 돌아섭니다. 누가는 사람들이 베드로를 따르기 시작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애니아를 낫게 하신 분은 예수님이시며, 사람들이 돌아선 대상도 예수님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일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다비다가 남긴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도행전 9:36–43 본문 →

이제 사도행전 9장의 마지막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욥바에 다비다라는 이름의 여자 제자가 있었다. 그 이름은 옮겨져 「도르가」라고 불린다. 이 여자는 선한 일과 자선을 풍성히 행하며 지냈다.사도행전 9:36 · 본디새김

다비다와 도르가, 두 이름은 모두 영양이나 노루를 뜻하는 말입니다. 「여자 제자」(μαθήτρια)로 옮긴 말은 여성형 명사로, 신약성경에서 이 형태가 등장하는 유일한 자리입니다. 누가는 다비다를 단지 선행을 많이 하는 여성이나 제자들의 도움을 받는 사람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 자신이 제자입니다.

누가가 다비다의 성격을 길게 묘사하거나 그가 말한 가르침을 소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했는지는 그가 죽은 뒤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 드러납니다.

과부들이 보여 준 옷

다비다가 병들어 죽자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씻어 다락방에 둡니다. 룻다에 베드로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제자들은 사람을 보내 그에게 빨리 와 달라고 요청합니다.

베드로가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갔다. 그가 이르자 사람들이 그를 다락방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과부들이 모두 울면서 베드로의 곁에 서서, 도르가가 그들과 함께 있을 때 만든 속옷과 겉옷을 모두 내보였다.사도행전 9:39 · 본디새김

사람들은 다비다가 얼마나 훌륭한 신앙인이었는지 긴 설명을 늘어놓지 않습니다. 그가 만든 옷을 내보입니다. 그 옷들이 누구에게 얼마나 많이 주어졌는지는 본문이 모두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나 과부들이 그의 손으로 만든 물건들을 보여 주며 우는 장면은 다비다가 그들의 삶에 실제적인 흔적을 남겼음을 보여 줍니다.

그녀의 선행은 추상적인 선행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었고, 그 옷은 그가 죽은 뒤에도 남아 있었습니다.

다비다는 베드로처럼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선포한 사람으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사울처럼 큰 논쟁을 벌인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의 삶을 사도행전의 중요한 이야기로 남겨 놓았습니다.

사울은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고 선포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람을 낫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다비다는 자기 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선한 일을 하고 자선을 베풀며 살아왔습니다. 누가는 이 세 사람의 활동을 똑같은 종류의 사역이라고 규정하지 않지만, 살아나신 예수님의 공동체 안에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있고, 아픈 사람을 돌보는 사람도 있으며, 자신의 손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돕는 사람도 있습니다.

과부들이 다비다의 옷을 보여 주는 장면은 그 사실을 말없이 드러냅니다.

베드로는 먼저 기도합니다

베드로는 모든 사람을 밖으로 내보냅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베드로는 모두를 밖으로 내쫓고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그리고 그 여자의 몸을 향해 돌아서서 말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그 여자가 눈을 떴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았다.사도행전 9:40 · 본디새김

이 장면은 누가복음 8장 49–56절에서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들이 죽음을 슬퍼하고 있고, 주변 사람들을 물러나게 한 뒤 죽은 사람에게 일어나라고 말하며, 죽었던 사람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아이에게 직접 「아이야, 일어나라」(누가복음 8:54)고 말씀하시는 반면,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가 다비다에게 말하기 전에 먼저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대신하는 또 하나의 독립적인 기적 행위자가 아닙니다. 그는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누가는 그가 어떤 말로 기도했는지 기록하지 않지만, 기도했다는 사실은 분명히 기록합니다.

세 사람에게 들려온 「일어나라」

사울에게 예수님께서 하신 「일어나 그 도시로 들어가거라」(6절), 애니아에게 베드로가 한 「일어나서 네 자리를 펴라」(34절), 다비다에게 한 「다비다야, 일어나라」(40절)에는 같은 그리스어 명령, 일어나라가 사용됩니다. 번역자가 우연히 같은 한국어 표현을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누가가 실제로 같은 동사를 반복합니다.

물론 세 사건을 모두 같은 의미의 부활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울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고, 애니아에게 일어난 일은 질병에서의 회복이며, 다비다에게 일어난 사건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 서로 다른 사건을 하나의 표현으로 연결합니다.

사울은 자신이 가려던 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알려 주시는 길로 향합니다. 애니아는 오랫동안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다비다는 죽음에서 일어나 다시 공동체 앞에 섭니다. 예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일을 행하시지만, 그 일들은 모두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도 예수님의 생명이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다는 사도행전의 증언 안에 놓여 있습니다.

다비다는 누구에게 돌아왔는가?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그 여자를 일으켰다. 그리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살아 있는 그 여자를 그들 앞에 세웠다.사도행전 9:41 · 본디새김

누가는 그들을 그냥 구경꾼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성도들과 과부들」입니다. 조금 전 다비다가 만든 옷을 보여 주며 울고 있던 사람들이 이제 살아 있는 다비다를 봅니다. 다비다의 회복은 그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던 사람들에게도 기쁨이 되는 사건입니다.

누가는 다비다가 다시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어떤 선행을 계속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녀가 죽었을 때 사람들이 옷을 들고 울었고, 그녀가 살아나자 사람들이 다시 그녀를 만났습니다.

그녀는 단지 기적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공동체가 깊이 사랑하고 그리워하던 제자였습니다.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서

사도행전 9장은 베드로가 욥바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여러 날 머무는 것으로 끝납니다. 무두장이는 동물의 가죽을 가공하는 사람으로, 당시 이 직업은 냄새와 작업 환경 때문에 사회적으로 기피되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의 성전도 아니고 특별한 종교적 건물도 아닌, 한 무두장이의 집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바로 그곳이 다음 장의 이야기가 시작될 배경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당시의 속옷은 몸에 가까이 입는 기본적인 옷이었고, 겉옷은 그 위에 걸치는 의복으로, 오늘날의 구분과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또 가죽을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무두장이가 언제나 의례적으로 부정한 사람이었다고 단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으므로, 베드로가 그 집에 머물렀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이미 유대교의 모든 정결 규정을 폐기했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행전 9장이 드러내는 예수님의 일

사도행전 9:1–43 본문 →

사도행전 9장은 사람의 변화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보여 줍니다. 사울이 생각을 고쳐먹기 전에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오고, 그가 자신을 믿어 달라고 요청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아나니아를 보내시며, 그가 위대한 전도자로 인정받기 전에 아나니아는 그를 형제라고 부릅니다. 그는 자격을 증명한 뒤 부름받은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부르셨고, 그 부르심이 그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은 사울의 과거를 없는 일로 만들지 않습니다. 은혜는 사울이 과거에 행한 악을 정당화하지 않고, 과거에 악을 저지른 사람은 결코 달라질 수 없다는 판단에 그를 가두지도 않습니다. 변화할 가능성이 없다고 여겼던 사람에게도 새로운 길이 열릴 수 있지만, 그 변화는 공동체가 겪었던 고통을 무시하면서 받아들이라고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나니아와 바나바의 모습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신뢰하는 일과 사람들 사이에서 관계를 세워 가는 일이 함께 필요함을 보여 줍니다.

애니아와 다비다에게 필요한 것은 사울과 달랐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모든 사람을 동일한 방식으로 변화시키신다는 주장이 아닙니다. 누가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즉시 병에서 낫거나 죽음에서 되살아난다고 약속하지 않으며, 이 장의 특별한 기적들을 모든 시대에 반드시 되풀이될 사건으로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이름은 죽은 스승을 추억하기 위해 부르는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신 주님으로 증언되고 계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비다의 다락방을 떠올려 봅시다.

조금 전까지 그곳에는 울고 있는 과부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비다가 살아 있을 때 만든 옷들을 하나씩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다비다의 손길이 남아 있는 물건들이었지만, 정작 그 물건들을 만든 사람은 그들 곁에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무릎을 꿇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다비다야, 일어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키고, 조금 전까지 울고 있던 사람들을 다시 불렀습니다.

그들 앞에, 다비다가 살아서 서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