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8장

이 장의 자리 · 8–12장 · 유대와 사마리아로

예루살렘 밖에서 열리는 길

사도행전 8장은 교회가 무너지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스데반이 죽임을 당했고, 박해가 일어났으며, 신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 흩어졌습니다. 그런데 장이 끝날 때 사마리아의 한 도시에는 큰 기쁨이 생겼고, 아프리카에서 온 한 사람은 기뻐하며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빌립은 또 다른 도시들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 변화는 어떻게 일어났을까요? 누가는 박해가 끝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울이 붙잡혔다거나 예루살렘의 교회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는 소식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 박해 때문에 흩어진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기 시작합니다.

박해가 복음을 위해 필요했다거나, 하나님이 교회를 성장시키려고 스데반의 죽음을 일으키셨다고 본문이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스데반의 죽음은 악한 폭력의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그 폭력이 복음의 길까지 막지는 못했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까지 이르러 자신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8장은 그 말씀이 예루살렘 밖에서 현실이 되는 첫 장면입니다. 다만 그 시작은 우리가 기대하는 승리의 행진과 거리가 멉니다.

교회는 쫓겨나고 있었지만, 말씀은 갇혀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장은 한 가지 질문을 향해 나아갑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데 무엇이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까? 먼 나라에서 온 사람이 예수님의 사람이 되는 것을 무엇이 막을 수 있습니까? 장의 후반부에서 한 사람이 직접 「제가 세례를 받는 것을 무엇이 막습니까?」라고 그 질문을 입 밖에 냅니다.

읽는 시간 22분소단락 78장 본문 읽기 →

흩어진 사람들, 흩어지지 않은 말씀

사도행전 8:1–4 본문 →

8장은 스데반의 죽음을 다시 언급하면서 시작합니다.

사울은 그를 죽이는 일에 찬성하고 있었다.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대한 큰 박해가 일어났다.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 곳곳으로 흩어졌다.사도행전 8:1 · 본디새김

사울은 단지 처형 현장에 있었던 구경꾼이 아닙니다. 누가는 그가 스데반의 죽음에 동의했으며, 이후에는 직접 교회를 박해했다고 기록합니다. 3절에서 그는 집집이 들어가 남자와 여자를 끌어내 감옥에 넘깁니다. 신자들이 모이는 공적인 장소만이 아니라 그들이 살아가는 집 안까지, 일상의 가장 기본적인 안전마저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그 사이에 누가는 스데반의 장례를 기록합니다.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거두어 장사 지내고 그를 두고 크게 통곡했다.사도행전 8:2 · 본디새김

스데반의 죽음 이후 곧바로 복음이 확장되는 이야기로 넘어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 사이에 슬퍼하는 사람들을 남겨 놓습니다. 그들에게 스데반의 죽음은 새로운 선교 시대를 여는 역사적 사건이기 이전에, 사랑하고 존경하던 한 사람을 잃은 비극이었습니다.

이 장에서 처음 등장하는 큰 감정은 기쁨이 아니라 통곡입니다. 누가는 스데반의 희생을 교회의 성장이라는 결과로 간단히 정당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4절에서 예상하지 못한 변화가 일어납니다.

흩어진 이들은 두루 다니며 말씀을 복음으로 전했다.사도행전 8:4 · 본디새김

1절에 따르면 사도들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 따라서 여러 지역을 다니며 복음을 전한 이들은 사도들이 아니라 박해를 피해 흩어진 신자들이었습니다. 복음은 사도들에게만 맡겨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박해자들의 눈에는 신자들이 흩어진다는 것이 교회가 약해진다는 뜻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 흩어짐이 오히려 말씀을 새로운 지역으로 가져가는 통로가 되었음을 보여 줍니다. 예수님의 증인들은 자신들이 세운 계획을 따라 언제나 순조롭게 전진하지 않습니다. 때로는 원하지 않았던 상황 속에서 새로운 길을 발견합니다.

그 첫 번째 목적지가 사마리아입니다.

사마리아에서 바뀐 것은 누구의 마음인가

사도행전 8:5–13 본문 →

빌립이 사마리아의 한 도시로 내려가 그리스도를 선포합니다.

이 빌립은 열두 사도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라, 사도행전 6장 5절에서 스데반과 함께 선택된 일곱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이해됩니다. 사도행전 21장 8절도 그를 일곱 사람 가운데 하나라고 소개합니다.

사마리아는 단순히 예루살렘에서 조금 떨어진 지역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들은 자신들이 이스라엘의 신앙을 어떻게 계승하고 있는지, 어디에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하는지를 두고 오랫동안 갈등을 겪어 왔습니다. 요한복음 4장 20절에는 그리심산과 예루살렘을 둘러싼 이견이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이런 갈등에서 자유롭지 않았습니다. 누가복음 9장 52–54절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던 예수님을 사마리아의 한 마을이 받아들이지 않자, 야고보와 요한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그들을 없애 버리도록 명할지 물었습니다. 그때 제자들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기대했던 것은 환대가 아니라 심판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8장에서는 정반대의 일이 일어납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예수님에 관한 말씀을 듣고 받아들입니다. 더러운 영들이 나가고, 마비된 사람들과 다리를 저는 사람들이 고침을 받습니다.

그 도시에 큰 기쁨이 생겼다.사도행전 8:8 · 본디새김

이 기쁨은 단지 사람들이 신기한 현상을 구경하며 흥분했다는 뜻으로만 읽기 어렵습니다. 그동안 움직이지 못하던 사람들이 움직이고,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이 자유롭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소식은 그곳 사람들의 삶에서 실제적인 회복으로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일을 일으키는 중심에는 빌립 자신이 아니라 그가 선포하는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사람들을 사로잡던 시몬도 사로잡히다

사마리아에는 이미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던 인물이 있었습니다. 마술을 행하던 시몬입니다. 그는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말했고, 사람들은 그를 두고 「이 사람은 위대하다고 불리는 하나님의 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6절에서는 사람들이 빌립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고 합니다. 10절과 11절에서는 사람들이 시몬에게 「주의를 기울였다」는 말이 반복됩니다. 원문에서도 같은 동사가 사용됩니다.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이는 대상이 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시몬 자신에게서는 또 다른 반전이 일어납니다. 9절에서 시몬은 사람들을 「넋 잃게」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13절에서는 시몬이 빌립 곁에 머물면서 표징과 큰 힘을 나타내는 일들을 보고 「넋을 잃었다」고 합니다. 원문에서도 두 표현은 놀라거나 정신을 잃을 만큼 압도된다는 같은 동사에서 나옵니다.

시몬은 사람들을 놀라게 하던 사람에서 놀라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누가는 사람들이 무엇을 믿고, 무엇 때문에 놀라며, 누구에게 관심을 집중하는지를 세심하게 구별합니다. 12절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은 빌립이 전하는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한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습니다. 반면 13절에서 시몬은 표징과 큰 힘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넋을 잃습니다.

물론 누가는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았다고 분명히 기록합니다. 따라서 처음부터 그의 믿음이 거짓이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자신보다 훨씬 큰 힘을 발견했다는 것과 그 힘이 드러내는 하나님을 바르게 이해했다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그 차이가 곧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선물은 누구의 소유도 아니다

사도행전 8:14–25 본문 →

사마리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다는 소식을 듣고,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보냅니다.

한때 사마리아의 한 마을을 향해 하늘의 불을 내리기를 원했던 요한이, 이제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거룩한 영이 임하도록 기도하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그들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도 예수님의 생명을 나누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는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이 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지만 아직 거룩한 영을 받지 못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기도하고 손을 얹은 뒤에야 그들이 영을 받습니다.

사도행전 전체를 보면 세례와 성령을 받는 순서는 한 가지로 고정되어 있지 않습니다. 2장 38절에서는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10장 44–48절에서는 고넬료의 집에 모인 사람들이 세례를 받기도 전에 성령이 임합니다. 19장 5–6절에서는 세례 후에 바울이 손을 얹습니다.

한 가지 해석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의 관계에 주목합니다. 오랫동안 갈라져 있던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인 일이었으므로, 예루살렘의 사도들이 직접 와서 그들에게도 같은 성령이 주어졌음을 확인하고 함께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읽기는 사마리아라는 지역의 역사적 의미와 사도들의 방문을 잘 설명합니다.

다른 해석은 믿음과 세례 이후에도 별도로 경험되는 성령의 역사를 강조합니다. 이 읽기는 본문이 실제로 세례와 성령을 받는 사건을 구별하여 기록한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왜 성령이 그때까지 임하지 않았는지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 한 사건으로 모든 신자가 반드시 따라야 할 순서를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더 이상 복음의 바깥에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예루살렘의 사도들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은 그들에게도 거룩한 영을 주십니다.

시몬은 무엇을 사려고 했을까?

바로 이때 시몬이 돈을 내밉니다.

그가 말했다. 「나에게도 이 권한을 주십시오. 내가 손을 얹는 사람마다 거룩한 영을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사도행전 8:19 · 본디새김

시몬이 사고 싶어 하는 것은 성령 그 자체라기보다, 다른 사람에게 성령을 받게 할 수 있는 권한입니다. 그는 자신이 보았던 일을 하나의 능력으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능력이 자신의 영향력을 만들어 주는 세계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이제 더 큰 힘을 발견하자 그것을 얻고 싶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에게 말했다.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으로 얻을 수 있다고 여겼으니, 네 은돈이 너와 함께 멸망하기를 바란다.」사도행전 8:20 · 본디새김

여기서 가장 중요한 말은 「선물」입니다. 원문의 낱말은 주는 이의 호의에서 비롯되는 선물을 뜻합니다. 시몬이 원하는 것은 자신이 행사할 수 있는 힘이지만, 베드로가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입니다.

힘을 소유하려는 사람은 그것을 어떻게 얻고, 어떻게 사용하며, 그 결과로 어떤 자리를 차지할지 생각합니다. 그러나 선물을 받는 사람은 그 선물이 자기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사도들에게도 성령은 소유물이 아닙니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하나님은 주십니다.

베드로의 말은 시몬의 행동보다 마음을 겨냥합니다.

「이 일에는 너에게 몫도 없고 자리도 없다. 네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곧지 않기 때문이다.」사도행전 8:21 · 본디새김

시몬은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영향력을 얻고 싶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문제를 사람들 앞에서의 위상과 연결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의 마음과 연결합니다.

그렇다면 시몬에게는 더 이상 기회가 없는 것일까요? 베드로는 곧바로 회개하고 주께 간구하라고 말합니다. 20절의 엄중한 말은 돌이킬 수 없는 최종 판결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그의 잘못을 드러내면서도 그가 돌이킬 길을 가리킵니다.

시몬도 사도들에게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나 그가 정말로 자신의 생각을 바꾸었는지, 단지 닥칠 심판을 두려워했는지는 본문이 알려 주지 않습니다. 누가는 시몬의 이야기를 여기서 멈춥니다.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도, 기적을 목격했다는 사실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 마음을 돌아보는 일을 대신해 주지는 못합니다.

반면 베드로와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길에 사마리아의 여러 마을에서 복음을 전합니다. 한때 그 지역 사람들을 거부했던 제자들이 이제 그곳의 마을들을 찾아가 주의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황량한 길에서 만난 한 사람

사도행전 8:26–31 본문 →

사마리아의 이야기가 끝나자 누가는 갑자기 장면을 바꿉니다.

주의 천사가 빌립에게 말했다. 「일어나서 남쪽으로,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내려가는 길로 가거라.」 그 길은 황량하다.사도행전 8:26 · 본디새김

앞 장면에는 도시가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모였고, 표징이 일어났으며, 큰 기쁨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이제 빌립은 그 도시를 떠나 황량한 길로 향합니다. 그곳에서 빌립에게 맡겨지는 일은 한 사람과의 만남입니다.

누가는 복음의 확장을 숫자의 증가로만 설명하지 않습니다. 한 도시가 복음을 받아들이는 일도 중요하지만, 한 사람이 성경의 뜻을 깨닫고 예수님의 이름을 받아들이는 일 역시 같은 무게로 다루어집니다.

권력은 있었지만 이름은 없는 사람

그 사람은 에티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재물을 관리하는 고관입니다. 그는 여왕의 재정을 맡을 만큼 높은 지위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의 개인 이름을 알려 주지 않습니다. 계속해서 그를 에티오피아 사람, 고자라고 부릅니다.

그의 높은 사회적 지위와 신체적 정체성이 당시 사회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졌을지는 구별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높은 관직에 있었다고 해서 그가 아무런 사회적 경계도 경험하지 않았으리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반대로 본문에 기록되지 않은 구체적인 차별 경험을 지어내어서도 안 됩니다.

그에 관해 확실히 알 수 있는 사실은 그가 예루살렘에 경배하러 왔다가 돌아가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그가 태어날 때부터 유대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이방인이었는지, 이미 유대교로 개종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그는 돌아가는 길에 예언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는 경배하러 왔지만, 아직 이해하지 못한 말씀이 있었습니다.

빌립이 수레 곁으로 달려가 「읽으시는 글의 뜻을 정말 아십니까?」라고 묻습니다.

그가 말했다. 「누가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그 뜻을 알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빌립에게 수레에 올라 자기와 함께 앉아 달라고 간청했다.사도행전 8:31 · 본디새김

이 사람은 여왕의 재정을 책임지는 고위 관리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이해하는 문제 앞에서 자신의 지위를 내세우지 않습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시몬은 사도들에게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성령을 받게 할 권한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반면 이 사람은 빌립에게 자신이 말씀을 이해하도록 이끌어 달라고 요청합니다. 시몬은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행할 수 있을지에 관심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이 아직 무엇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지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빌립은 이 사람의 요청을 받아들입니다. 자신이 아는 것을 일방적으로 선언하기 전에 상대방이 읽고 있는 말씀을 듣고, 그가 품고 있는 질문에서 대화를 시작합니다.

조금 더 깊이

여기서 에티오피아는 오늘날의 에티오피아 국가와 곧바로 동일시하면 안 됩니다. 고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이 명칭은 이집트 남쪽의 아프리카 지역을 넓게 가리켰으며, 이 이야기의 왕실은 오늘날 수단 지역의 쿠시 왕국, 특히 메로에와 연결됩니다. 간다게 역시 한 개인의 이름이라기보다 왕실 여성을 가리키는 칭호로 알려져 있습니다. 「고자」(εὐνοῦχος)로 번역된 낱말은 고대에 궁정의 관리나 내시를 가리킬 수 있었고, 신체적으로 거세된 사람을 뜻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 구절은 그가 고위 관리였다는 사실과 고자였다는 사실을 함께 기록하므로 신체적 의미를 포함한다고 읽을 근거가 있지만, 그 단어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입을 열지 않은 사람, 입을 여는 사람

사도행전 8:32–35 본문 →

이제 사도행전 8장의 중심이라고 할 만한 장면이 나옵니다.

에티오피아 사람이 읽고 있던 말씀은 이사야 53장 7–8절입니다.

그가 읽던 성경의 대목은 이러했다. 「양처럼 도살당하러 끌려갔고, 털 깎는 이 앞에서 소리를 내지 않는 어린 양처럼 그가 입을 열지 않는다.」사도행전 8:32 · 본디새김
「낮아짐 가운데서 그의 판결이 거두어졌다. 누가 그의 세대를 이야기하겠는가? 그의 생명이 땅에서 거두어지기 때문이다.」사도행전 8:33 · 본디새김
고자가 빌립에게 대답했다. 「청하건대, 예언자가 누구를 두고 이 말을 하는 것입니까? 자기를 두고 하는 것입니까, 아니면 다른 누구를 두고 하는 것입니까?」사도행전 8:34 · 본디새김

이것은 본문을 제대로 읽은 사람이 던지는 질문입니다.

이사야가 말하는 종은 누구인가?

이사야 52장 13절부터 53장 12절까지에는 고난받는 종이 등장합니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받고 버림받지만,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죄를 짊어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가 겪은 고난을 마지막 말로 남겨 두지 않으십니다.

그런데 이사야서에서 종의 정체성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이사야 49장 3절에서는 종이 이스라엘이라고 불리지만, 49장 5–6절에서는 그 종이 이스라엘을 다시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는 사명을 맡은 인물로도 묘사됩니다. 따라서 이사야서의 종을 이스라엘 공동체와 연결해서 읽는 관점과, 이스라엘을 대표하거나 회복시키는 인물로 이해하는 관점이 함께 논의되어 왔습니다. 에티오피아 사람의 질문은 이런 문맥에서 매우 자연스럽습니다.

누가는 그 질문에 대한 빌립의 설명을 자세히 기록하지 않습니다. 다만 빌립이 어떻게 답했는지는 분명히 알려 줍니다.

빌립이 입을 열어 이 성경 대목에서 시작해 그에게 예수를 복음으로 전했다.사도행전 8:35 · 본디새김

빌립은 이사야의 글을 무시하고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지 않습니다. 그가 읽고 있던 고난받는 종의 말씀에서 출발하여 예수님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사도들이 선포하는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하신 분인 동시에 하나님이 다시 살리신 주님이십니다(사도행전 2:23–24, 3:15).

따라서 빌립이 이사야의 말씀에서 예수님을 전했다는 것은, 이사야가 묘사한 종의 고난을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하여 읽었다는 뜻입니다. 이사야가 본래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직접 명시했다고 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누가는 이스라엘의 성경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새롭게 이해되는 장면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는 누가복음 24장에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자신의 고난과 영광을 성경에 비추어 설명하시던 장면과도 연결됩니다(누가복음 24:25–27). 이제 빌립은 그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다른 사람에게 같은 방식으로 성경을 풀어 줍니다.

이사야의 글에서 고난받는 종은 「입을 열지 않는다」고 묘사됩니다. 그런데 바로 그 말씀을 설명하는 장면에서 누가는 「빌립이 입을 열어」라고 기록합니다.

어린 양처럼 끌려간 종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종의 이야기를 전하는 빌립은 이제 입을 엽니다.

스데반은 그 예수님을 증언하다 죽임을 당했습니다. 빌립은 박해를 피해 흩어졌지만 같은 예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먼 나라에서 온 한 사람은 이제 그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끝났어야 할 것처럼 보였던 이야기가, 예수님의 부활 때문에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고난받는 종의 이야기를 듣는 고자

이 사람이 하필 이사야서를 읽고 있었다는 사실은 또 다른 의미를 갖습니다.

신명기 23장 1절에는 신체가 훼손된 남성이 여호와야훼의 모임에 들어오는 것을 제한하는 규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56장 3–5절에서는 고자들이 자신을 열매 맺지 못하는 나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며,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는 이들에게 아들딸보다 나은 이름과 영원한 이름이 주어질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이어지는 56장 6–8절에서는 이방인들까지 하나님의 집에서 받아들여지는 미래를 말합니다.

이사야 56장은 본래 포로기 이후 하나님의 공동체가 누구에게 열려 있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됩니다. 출신이나 자녀를 남길 수 있는 능력 때문에 자신을 공동체 밖에 있다고 여길 수 있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새로운 소속과 이름을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에티오피아 사람이 읽고 있던 것은 이사야 56장이 아니라 53장입니다. 누가도 두 본문을 직접 연결해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그가 이사야 56장의 약속을 알고 있었거나, 자신에게 적용하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사야서 전체를 함께 읽는 독자에게는 고난받는 종의 이야기와 외국인과 고자에게 주어지는 환대의 약속이 같은 예언서 안에 있다는 사실이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신 분이 아닙니다. 거부당하고 낮아지셨으며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로 그 예수님을 살리시고 주님으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주어지는 구원을 이해할 때, 사람의 출신과 지위와 신체적 조건을 그 사람이 받아들여질 수 있는지를 결정하는 궁극적인 기준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이사야 53장과 56장을 함께 읽을 때 더욱 분명해지는 신학적 의미입니다. 그러나 누가가 이 모든 논증을 빌립의 입에 넣었다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사도행전이 직접 알려 주는 것은 빌립이 이사야의 글에서 출발하여 그에게 예수님을 전했고, 그 사람이 곧바로 세례를 요청했다는 사실입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원문에서도 32절의 「입을 열지 않는다」와 35절의 「입을 열어」에는 입을 연다는 같은 표현이 사용됩니다. 이 대조는 문자 그대로 확인할 수 있으며, 고난받는 종의 침묵과 복음 전도자의 말하기를 연결하여 읽을 수 있게 합니다.

무엇이 나를 막습니까?

사도행전 8:36–40 본문 →

두 사람은 계속 길을 갑니다.

빌립이 어떤 말로 설명을 끝냈는지 누가는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얼마 후 그들은 물이 있는 곳에 이르고, 에티오피아 사람이 먼저 입을 엽니다.

그들이 길을 가다가 물이 있는 데에 이르렀다. 고자가 말했다. 「보십시오, 물이 있습니다. 제가 세례를 받는 것을 무엇이 막습니까?」사도행전 8:36 · 본디새김

그는 세례를 받을 자격이 자신에게 있는지 설명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어떤 복잡한 절차를 밟아야 하는지부터 묻지도 않습니다. 그가 묻는 것은 자신이 세례를 받는 데 무엇이 장애물이 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 질문을 당시 그가 겪었을지도 모르는 사회적 배제에 대한 직접적인 항의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그가 예루살렘에서 실제로 예배를 거절당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외국인이며 고자라는 사실을 알고 읽는 독자는 그 질문을 가볍게 지나가기 어렵습니다.

본문의 대답은 장황한 설명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고자가 수레를 세우라고 명했다. 빌립과 고자 둘이 물속으로 내려갔고, 빌립이 그에게 세례를 주었다.사도행전 8:38 · 본디새김

높은 지위에 있는 궁정 관리와 박해 때문에 흩어진 복음 전도자가, 이제 같은 물속에 서 있습니다. 그의 출신도, 궁정에서의 지위도, 고자라는 신체적 조건도 이 장면에서 세례를 가로막지 않습니다.

10장 47절에서 베드로는 성령을 받은 이방인들에게 물로 세례를 베푸는 것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11장 17절에서는 하나님이 그들에게 같은 선물을 주셨는데 자신이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막을 수 있겠느냐고 말합니다. 8장의 에티오피아 사람이 제기한 질문은 이후 사도들이 마주할 문제와 주제적으로 이어집니다.

빌립이 사라져도 기쁨은 남는다

세례 후에는 또 하나의 뜻밖의 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들이 물에서 올라왔을 때 주의 영이 빌립을 낚아채 갔다. 고자는 그를 더는 보지 못했다. 고자는 기뻐하며 가던 길을 계속 가고 있었던 것이다.사도행전 8:39 · 본디새김

처음에 그는 빌립에게 수레에 올라 함께 앉아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마지막에서는 빌립이 사라지고, 그 사람만 길을 계속 갑니다. 누가는 그가 당황하거나 슬퍼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시몬은 빌립 곁에 머물며 계속해서 표징과 큰 힘이 나타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에티오피아 사람은 빌립과 오래 함께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에서 예수님을 알게 되었고, 그의 기쁨은 빌립이라는 사람의 지속적인 동행에 매여 있지 않습니다. 복음 전도자는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지만, 자신이 그 사람의 신앙을 영원히 붙들어 주는 중심이 되지는 않습니다.

한편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고, 가이사랴에 이르기까지 여러 도시를 지나며 복음을 전합니다. 사마리아에서는 도시 전체에, 황량한 길에서는 한 사람에게, 그리고 다시 여러 도시에 복음이 전해집니다. 그가 어디에 있든 전하는 소식은 같습니다.

조금 더 깊이

36절 다음이 38절입니다. 일부 전통적인 성경 본문에는 그 사이에 빌립이 믿음의 조건을 말하고 에티오피아 사람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37절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된 주요 그리스어 사본들에는 그 구절이 없으므로 현대 비평본문에서는 원문에 포함하지 않습니다. 이 신앙고백의 전승 자체는 오래되었지만, 원래 사도행전 본문에 있었던 것으로 판단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실린 본문에서는 에티오피아 사람의 질문에서 곧장 세례 장면으로 넘어갑니다.

사도행전 8장이 보여 주는 하나님의 나라

사도행전 8:1–40 본문 →

사울은 교회를 짓밟지만 복음이 전해지는 것을 막지 못합니다. 시몬은 성령을 돈으로 얻으려 하지만, 성령은 사람의 소유물이 될 수 없습니다. 에티오피아 사람은 자신이 세례를 받는 데 무엇이 장애물이 되는지 묻고, 마침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사도행전 8장은 예수님께서 직접 등장하여 말씀하시는 장은 아니지만, 이 장면들을 하나로 잇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사람들이 죽인 예수님을 하나님이 살리셨듯이, 스데반을 죽이고 신자들을 흩어 놓은 폭력도 예수님에 관한 증언을 끝내지 못합니다. 물론 스데반의 죽음과 예수님의 죽음은 같은 사건이 아니며, 박해받는 모든 사람의 고통이 자동으로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그 말씀은 사마리아에서 오랫동안 소외와 갈등의 대상이었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훨씬 먼 곳에서 온 한 사람에게도 들립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사람들에게 익숙한 경계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오가는 가운데 마지막까지 기억에 남는 사람은 이름조차 기록되지 않은 에티오피아의 한 고관입니다. 누군가 자신을 이끌어 주지 않으면 그 뜻을 알 수 없다고 말했던 그는, 이제 그 말씀에서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길에서 만난 물을 보고 수레를 세웠으며, 빌립과 함께 물속으로 내려갔다가 올라왔습니다.

잠시 후 빌립은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더 이상 누군가를 찾아 헤매지 않습니다. 수레는 다시 움직이고, 길은 여전히 이어져 있습니다.

그는 기뻐하며 가던 길을 계속 갑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