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9장

이 장의 자리 · 8–12장 · 유대와 사마리아로

예수님께서 붙잡으신 사람들

사도행전 9장은 누군가를 붙잡으러 가던 사람의 이야기로 시작합니다. 사울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찾아내 묶고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다마스쿠스로 향합니다. 그런데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는 오히려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를 찾아오는 사람은 다름 아닌 예수님의 제자입니다.

이 이야기를 흔히 ‘사울의 회심’이라고 부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게만 읽으면 본문에서 놓치는 것이 생깁니다. 사울이 예수님을 믿게 된 일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그를 어떻게 대하시는지, 그리고 사울 때문에 두려워하던 제자들에게 어떤 일을 요구하시는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울을 쓰러뜨리시지만 그를 버려두지 않으십니다. 사울에게 나타나셨지만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직접 해결해 주지는 않으십니다. 대신 사울이 박해하던 공동체의 한 사람을 그에게 보내십니다.

사울에게 맡겨질 사명도 뜻밖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내 이름을 전하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라고 부르십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없애려고 길을 나섰던 사람이 이제 바로 그 이름을 전하며 살아갈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면 이 장은 사울의 극적인 변화만을 보여 주는 것일까요?

후반부로 가면 이야기는 사울을 떠나 베드로에게로 옮겨갑니다. 베드로는 오랫동안 몸이 마비되어 있던 애니아를 만나고, 죽은 다비다를 위해 기도합니다. 두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 역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지금도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사울은 앞을 볼 수 없게 되었다가 다시 봅니다. 애니아는 일어나지 못하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다비다는 죽음에서 일으켜집니다.

서로 다른 세 이야기의 중심에는 같은 분이 계십니다.

사도행전 9장의 주인공은 새로운 사람이 된 사울도, 기적을 행하는 베드로도 아닙니다. 자신을 박해하던 사람을 부르시고, 고통받는 사람을 일으키시는 살아나신 예수님이십니다.

읽는 시간 29분소단락 79장 본문 읽기 →

사울이 알지 못했던 박해의 대상

사도행전 9:1–9 본문 →

9장은 사울에 관한 불편한 묘사로 시작합니다.

사울은 여전히 주님의 제자들을 위협하며 그들을 죽일 기세였습니다. 그는 대제사장에게 가서,사도행전 9:1 · 두루새김

「여전히」는 스데반이 죽고 신자들이 흩어진 뒤에도 사울의 박해가 멈추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오히려 그는 예루살렘 밖에 있는 신자들까지 찾아내려 합니다. 그가 대제사장에게 요청한 편지는 로마의 시리아 지역에 속한 중요한 도시 다마스쿠스의 회당들을 향한 것이었고, 누가는 사울이 회당들의 협조를 얻어 신자들을 붙잡으려 했다고 기록합니다.

그런데 그가 찾는 사람들을 부르는 이름이 낯섭니다. 「‘그 길’을 따르는 사람」입니다. 여기서 「길」로 번역된 호도스(ὁδός)는 실제로 사람이 다니는 길을 뜻하기도 하지만, 살아가는 방식이나 따르는 길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속한 신앙 운동을 부르는 명칭으로 반복해서 등장합니다(19:9, 19:23, 22:4, 24:14).

누가는 이 표현을 사용한 직후, 실제 길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기록합니다. 사울은 「그 길」을 따르는 사람들을 붙잡으려고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길 위에서 자신이 알지 못했던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인생은 다른 방향으로 향하게 됩니다.

「왜 내 제자들을 박해하느냐?」가 아닙니다

하늘에서 빛이 번쩍이고 사울은 땅에 쓰러집니다. 그때 한 음성이 들려옵니다.

그는 땅에 쓰러졌고, 자기에게 말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행전 9:4 · 두루새김

사울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직접 붙잡으러 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가 찾는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신자들이었고, 예수님께서는 이미 십자가에서 죽으신 분으로 알려져 계셨습니다.

그런데 들려온 질문은 「왜 그들을 박해하느냐?」가 아니라 「왜 나를 박해하느냐?」입니다.

사울이 물었습니다. 「주님, 누구십니까?」 대답이 들려왔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행전 9:5 · 두루새김

이 대답에는 두 가지 사실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첫째, 사울이 죽으셨다고 알고 있던 예수님께서 살아 계십니다. 그가 없애야 한다고 생각했던 신앙 운동은 죽은 사람을 잘못 따르는 집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둘째,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제자들을 분리하지 않으십니다. 사울이 제자들에게 한 일을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한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신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빌려 활동하는 독립된 집단이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에게 속한 사람들입니다.

교회를 공격하던 사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대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 옳은 일을 한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믿으며 하던 일이 실제로는 하나님이 살리신 예수님을 대적하는 일이었습니다.

사울에게 필요한 것은 종교적 열심을 조금 더 갖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를 대적하고 있었는지 깨닫는 일이었습니다.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사람

「자, 일어나 그 도시로 들어가라. 거기서 네가 해야 할 일을 듣게 될 것이다.」사도행전 9:6 · 두루새김

사울은 이제 자신의 계획을 따라 다마스쿠스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기다려야 합니다.

사울은 땅에서 일어나 눈을 떴지만 아무도 볼 수 없었습니다. 함께 가던 사람들이 그의 손을 잡고 다마스쿠스로 데리고 들어갔습니다.사도행전 9:8 · 두루새김

사울은 조금 전까지 자신이 누구를 붙잡아야 하는지, 누구를 묶어 어디로 데려가야 하는지 정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누구를 향해 걸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습니다. 그가 들어가는 도시는 원래부터 가려던 다마스쿠스이지만, 들어가는 모습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남들을 묶어서 끌고 오려던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손을 맡긴 채 들어갑니다.

사울이 휘두르려던 권한은 무너지고, 그는 온전히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자리에 놓였습니다. 다만 그가 앞을 보지 못하게 된 일을 하나님이 교만한 사람에게 내리시는 일반적인 벌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울은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마시지도 않지만, 그 시간에 어떤 마음이었는지나 먹지 않은 구체적인 이유를 누가는 알려 주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사울의 여정이 여기서 멈추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다마스쿠스에 도착했지만 원래 하려던 일을 시작하지 못합니다. 그 대신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제 이야기의 시선은 사울에게서 다른 한 사람에게로 옮겨갑니다.

조금 더 깊이

예루살렘 대제사장의 권한이 다마스쿠스에서 어느 범위까지 직접 행사될 수 있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훗날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으로 설명합니다(고린도전서 12:12–27). 사도행전 9장이 그 비유를 직접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왜 나를 박해하느냐?」는 그 비유에 담긴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사건을 보여 줍니다. 사흘이라는 기간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떠올리게 한다고 읽을 수는 있지만, 누가는 이 기간을 예수님께서 무덤에 계셨던 시간과 직접 연결하지 않으므로 의도적인 상징이라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아나니아를 보내셨을까요?

사도행전 9:10–19 본문 →

다마스쿠스에는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이 이야기에서 처음 등장합니다. 누가는 그가 어떤 직책을 맡았는지, 교회에서 얼마나 중요한 사람이었는지 설명하지 않고, 예수님의 제자였다고만 소개합니다.

다마스쿠스에는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환상 속에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나니아야.」 아나니아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사도행전 9:10 · 두루새김

이 대답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누군가를 부르실 때 등장하던 장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했고(창세기 22:1), 모세 역시 불타는 떨기나무 가운데서 부르시는 하나님께 응답했습니다(출애굽기 3:4). 부르심이라는 주제가 닮았다는 것이며, 누가가 그 장면들을 직접 인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아나니아에게 맡겨진 일은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곧은 거리」로 가서 다소 사람 사울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나니아가 사울을 모를 리 없었습니다.

아나니아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저는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많은 악한 일을 저질렀는지 여러 사람에게 들었습니다.」사도행전 9:13 · 두루새김

아나니아의 대답에는 망설임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믿음이 부족해서 나온 불순종이라고 간단히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정보는 사실입니다. 사울은 실제로 신자들을 박해했고, 다마스쿠스에 온 목적도 그들을 묶기 위해서였습니다.

아나니아가 두려워하는 데는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울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으십니다. 대신 아나니아가 아직 알지 못하는 새로운 사실을 알려 주십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곧은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을 찾아라. 지금 그가 기도하고 있다.」사도행전 9:11 · 두루새김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사울도 아나니아가 와서 자신에게 손을 얹는 모습을 보았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가라는 말씀을 듣고, 사울은 아나니아가 자신에게 오는 모습을 봅니다. 서로 만나기 전에 예수님께서 양쪽에서 일하고 계십니다.

이 만남은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계획한 일이 아닙니다.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두 사람을 만나게 하십니다.

박해자가 선택받은 그릇이 됩니다

주님께서 아나니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가라. 이 사람은 다른 민족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 이름을 전하도록 내가 선택한 그릇이다.」사도행전 9:15 · 두루새김

「그릇」은 물건을 담거나 옮기는 용기를 비롯하여 어떤 목적에 사용하는 도구를 가리킬 수 있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울을 단순히 구원받은 한 사람으로만 남겨 두지 않으십니다. 자신이 박해하던 바로 그 이름을 세상에 전하도록 부르십니다.

그가 향할 대상은 다른 민족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전통을 지키려는 열심으로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이스라엘 바깥의 사람들에게도 보내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의 사명은 자신이 지키려 했던 종교적 경계 안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이후 사도행전 전체에 걸쳐 펼쳐질 그의 활동을 미리 보여 줍니다.

「그가 내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도 내가 보여 주겠다.」사도행전 9:16 · 두루새김

6절의 「거기서 네가 해야 할(δέω) 일을 듣게 될 것이다」와 16절의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하는지」에서, 「해야 할」과 「겪어야 하는지」에는 원문에서 같은 그리스어 동사가 쓰입니다. 어떤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울이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것이고, 그 일을 하는 삶에는 고난이 따르게 됩니다.

그렇다고 사울의 고난을 과거에 저지른 잘못에 대한 벌이나 죗값으로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고난받는 이유는 「내 이름을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고통을 주던 사람이 이제 자신이 전하는 예수님의 이름 때문에 고통을 겪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복수라기보다 그가 맡게 될 사명이 어떤 것인지 보여 줍니다.

「사울 형제」

마침내 아나니아가 사울을 찾아갑니다.

아나니아는 그 집으로 가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사울에게 손을 얹고 말했습니다. 「사울 형제, 형제가 여기로 오던 길에 형제에게 나타나신 주 예수께서 저를 보내셨어요. 형제가 다시 보고 성령으로 가득 차게 하시려는 거예요.」사도행전 9:17 · 두루새김

「사울 형제」는 이야기 전체에서 가장 뜻밖의 호칭 가운데 하나입니다. 아나니아는 조금 전까지 사울이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얼마나 많은 악한 일을 저질렀는지 예수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그가 다마스쿠스에도 사람들을 묶을 권한을 가지고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사람을 형제라고 부릅니다.

이 호칭은 사울이 다시 보게 되거나 세례를 받기 전에 등장합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의 변화가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 확인하지 못했고, 그가 훌륭한 전도자가 되는 모습도 아직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자신을 보내셨다는 말씀을 따라 사울에게 다가가 그를 형제라고 부릅니다.

이 장면은 사람이 변화되는 과정에 다른 사람이 따뜻하게 맞아 주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지 드러냅니다. 사울은 예수님을 만나 자신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박해하던 공동체 안으로 들어오는 일에는 아나니아라는 제자가 필요했습니다.

곧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지고 그는 다시 보게 됩니다. 누가는 그것이 실제 비늘이었다고 단정하지 않고, 「비늘 같은 것」이라는 비유적 묘사로 그 순간을 기록합니다. 사울은 일어나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으며 기운을 되찾습니다. 자신이 박해하던 사람들과 이제 같은 주님을 믿는 공동체에 속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사울에게 직접 나타나셨지만, 그가 회복되는 자리에는 아나니아의 손이 있고, 그의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자리에는 제자들과의 교제가 있습니다.

사울의 변화는 한 개인의 마음속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붙잡으러 온 사람이 사람들에게 쫓깁니다

사도행전 9:20–30 본문 →

세례를 받은 사울은 다마스쿠스의 제자들과 며칠을 지냅니다. 그리고 곧 회당들에서 예수님을 전하기 시작합니다.

사울은 곧바로 회당들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전하기 시작했습니다.사도행전 9:20 · 두루새김

누가는 사울이 이전에 어떤 신앙적 논리로 판단했는지 자세하게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공격했다는 사실은 반복해서 알려 줍니다. 그런 사울이 이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전합니다. 이것은 이전 지식에 새로운 교리를 하나 덧붙이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거부했던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새롭게 인정하는 일입니다.

22절에서는 사울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을 「밝혀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는 서로 무관한 두 칭호가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왕을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는 전통이 있고(시편 2:7, 사무엘기하 7:14),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메시아를 가리킵니다.

물론 초기 그리스도교에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말은 왕의 칭호를 넘어 예수님과 하나님 사이의 독특한 관계를 나타내는 의미로도 발전합니다. 하지만 이 장에서 사울이 전하는 주장의 핵심은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께서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메시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신지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 말을 듣는 사람들은 모두 놀라며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을 짓밟던 사람이 아니야? 여기 온 것도 그 사람들을 묶어서 대제사장들에게 끌고 가려던 것 아니야?」사도행전 9:21 · 두루새김

누가는 「이름」이라는 말을 되풀이합니다. 사울이 잡으려 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울을 자신의 이름을 전할 그릇으로 선택하셨고, 사울은 이제 예수님의 이름으로 거리낌 없이 말합니다.

성경에서 어떤 사람의 이름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권위와 그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일에 관계된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사울의 변화는 그가 입으로 말하는 이름이 달라진 정도가 아닙니다. 그 이름을 대하는 관계 자체가 바뀐 것입니다.

사울의 이야기는 여기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요?

여러 날이 지난 뒤, 유대 사람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함께 계획을 세웠습니다.사도행전 9:23 · 두루새김

누가는 이 기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울 자신이 갈라디아서 1장 17–18절에서 돌아보며 쓴 내용을 보면, 그는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마스쿠스로 돌아왔으며, 삼 년 뒤에 예루살렘으로 갔다고 말합니다. 이 장의 다마스쿠스 활동과 예루살렘 방문 사이에는 누가가 생략한 이동과 시간이 있는 것입니다. 누가가 강조하는 것은 정확한 시간 순서보다 사울에게 일어난 변화와 그 결과입니다.

사울은 사람들을 묶으러 왔지만, 이제 자신이 죽임당할 위험에 처합니다.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이 성문들을 밤낮으로 지켜봅니다. 그러자 사울의 제자들은 밤에 그를 광주리에 담아 성벽 밖으로 달아 내립니다.

다마스쿠스로 향하던 사울은 대제사장의 편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자들을 찾아내 묶을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그 도시에서 살아 나가기 위해 제자들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그는 당당히 성문을 지나 도시를 떠나지 못합니다. 밤에 광주리에 담겨 성벽 아래로 내려갑니다.

이것은 사울이 사명에 실패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고난이 실제로 그의 삶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훗날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32–33절에서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지 않고 약함과 고난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이 탈출 사건을 언급합니다. 한때 다른 사람들을 끌고 갈 권한을 얻으려 했던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몸을 맡겨야 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생겼다고 신뢰가 즉시 회복되지는 않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을 때 새로운 어려움이 생깁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사울은 제자들 무리에 들어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사울을 두려워했습니다. 그가 제자가 되었다는 것을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9:26 · 두루새김

사울 자신에게는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만났고, 세례를 받았으며,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고 전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의 제자들에게 사울은 여전히 두려운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는 제자들의 반응을 비난하지 않고, 그들이 사울을 무서워했다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합니다.

사람은 실제로 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과거에 다른 사람에게 남긴 상처와 두려움은 그가 변했다고 말하는 순간 자동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 변화는 공동체가 겪었던 고통을 무시하면서 받아들이라고 강요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때 바나바가 등장합니다.

그러자 바나바가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갔습니다. 바나바는 사울이 길에서 주님을 본 일과 주님께서 사울에게 말씀하신 일을 사도들에게 자세히 이야기했습니다. 또 사울이 다마스쿠스에서 예수의 이름으로 거리낌 없이 말한 일도 전했습니다.사도행전 9:27 · 두루새김

바나바가 하는 일은 단순한 소개가 아닙니다. 사울은 자신의 이야기를 말할 수 있었겠지만, 그의 말을 믿기 어려워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그를 신뢰하는 다른 사람의 증언이 필요했습니다. 바나바는 바로 그 역할을 합니다. 그의 이름은 사도행전 4장 36절에서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소개되는데, 누가가 여기서 그 뜻을 다시 언급하지는 않지만 바나바가 사울과 제자들 사이를 이어 주는 모습은 그 이름과 잘 어울립니다.

아나니아가 다마스쿠스에서 사울을 형제라고 불렀다면, 바나바는 예루살렘에서 사울이 형제들 가운데 들어갈 수 있도록 돕습니다.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그를 찾아갔고, 바나바는 제자들 앞에서 그에 대해 증언했습니다. 두 사람 모두 사울이 새롭게 속하게 된 공동체와 실제 관계를 맺도록 돕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사울은 예루살렘의 제자들과 함께 다니며 주님의 이름으로 거리낌 없이 말하기 시작합니다.

스데반이 서 있던 자리에 사울이 섭니다

29절에서 사울은 「그리스 말을 쓰는 유대 사람들」에게 말하며 그들과 논쟁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사울을 죽이려 합니다. 앞서 사도행전 6장 9–10절에서 스데반은 그리스 말을 쓰는 유대인들이 속한 회당 사람들과 논쟁했고, 그 논쟁과 이어진 고발은 결국 스데반이 죽임당하는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그 스데반의 죽음에 찬성했던 사람이 사울입니다.

두 장면에 등장하는 사람들이 모두 동일한 집단이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가 비슷한 상황을 사울에게 다시 경험하게 하며 두 장면을 서로 이어 보여 주는 것은 분명합니다. 스데반이 예수님을 증언했던 자리에 사울이 서 있고, 스데반을 죽이려 했던 사람들의 편에 섰던 사울이 이제 예수님을 증언한다는 이유로 죽임당할 위험을 겪습니다.

그는 과거의 행동을 그만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과거에 자신이 공격했던 사람들과 같은 편에 서게 되었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살해 시도를 알아채고 사울을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간 뒤 다소로 보냅니다. 사울이 떠나는 모습 역시 혼자가 아닙니다. 그를 보호하고 이동시키는 사람들은 이제 예수님의 제자들입니다.

그리고 누가는 여기서 사울의 이야기를 잠시 멈춥니다.

조금 더 깊이

아라비아 방문을 이 장의 어느 구절 사이에 놓아야 하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고린도후서 11장 32–33절에서 바울은 아레다 왕 아래의 관리가 도시를 지키고 있었다고 말하고, 사도행전은 유대 사람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성문들을 지켜보았다고 기록합니다. 두 기록에 나오는 사람들의 정치적 관계나 일이 벌어진 구체적인 과정을 완전히 되짚을 수는 없지만, 사울이 붙잡힐 위험을 피해 광주리를 타고 성벽에서 내려왔다는 점은 같습니다. 또 이 장 전체에서 누가는 그를 계속 「사울」이라고 부릅니다. 「바울」이라는 이름은 사도행전 13장 9절에서 「사울, 곧 바울」이라는 표현으로 소개되므로, 사울이 회심하면서 곧바로 바울이라는 새 이름을 받았다는 흔한 설명은 사도행전 본문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평화 속에서도 계속 일하시는 주님

사도행전 9:31 본문 →

31절은 지금까지의 격렬한 사건들을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그리하여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온 지역의 교회는 평안을 누리며 든든히 세워져 갔습니다. 교회는 주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갔고, 성령의 위로를 받으며 믿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났습니다.사도행전 9:31 · 두루새김

8장은 예루살렘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나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9장의 이 자리에서는 교회가 평안을 누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단순히 박해자가 사라졌으므로 교회가 평안해졌다는 뜻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사울의 활동이 중단된 것이 평안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누가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고, 모든 지역에서 박해가 완전히 끝났다고 선언하지도 않습니다.

그리스어 본문은 이 지역 전체에 걸친 교회를 단수형으로 표현합니다. 지역마다 믿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누가는 그 전체를 하나의 교회로 묘사할 수 있었습니다. 복음으로 연결된 공동체의 범위가 이미 예루살렘을 넘어섰음을 보여 줍니다.

누가는 단지 사람이 많아졌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는 「주님을 두려워하며」 살아갔고, 「성령의 위로를 받으며」 자랐습니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것은 예수님을 향한 경외를 가리키고, 성령의 위로는 그 공동체가 홀로 버려져 있지 않다는 사실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을 두려워한다고 해서 예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주시는 위로도 경험합니다. 교회는 박해받을 때만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평안을 누리는 동안에도 예수님을 경외하며 성령의 위로 가운데 자라 갑니다.

이렇게 한 시대의 긴장이 잠시 가라앉은 뒤, 누가는 베드로의 이야기로 시선을 옮깁니다.

조금 더 깊이

일부 다른 그리스어 사본 전승에는 복수형 「교회들」이라는 읽기도 있습니다. 단수형 읽기도 지역의 구별이 무의미해졌다는 선언이라기보다, 여러 지역의 공동체가 복음으로 이어져 있음을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애니아를 낫게 하시는 분은 누구인가

사도행전 9:32–35 본문 →

베드로는 여러 곳을 두루 다니다가 룻다에 이릅니다.

그곳에는 애니아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팔 년 동안 몸이 마비되어 침상에 누워 지냈습니다. 누가는 그가 왜 마비되었는지, 언제 어떻게 병을 얻었는지 설명하지 않고, 팔 년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는 사실만 알려 줍니다.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애니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낫게 하시는 거예요. 일어나서 잠자리를 정돈하세요.」 그러자 애니아가 곧 일어났습니다.사도행전 9:34 · 두루새김

베드로는 자신에게 특별히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애니아를 낫게 하신다고 선포합니다. 이 장면은 누가복음 5장 17–26절에서 예수님께서 마비된 사람에게 일어나 자기 침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말씀하시던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다만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병자를 고치시고, 여기서는 베드로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낫게 하시는 거예요」라고 선포합니다.

베드로가 증언하는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잠자리를 정돈하세요」(στρώννυμι)로 옮긴 그리스어 동사는 펴거나 깔고 자리를 마련한다는 뜻이어서, 두루새김은 문맥에 맞게 잠자리를 정돈하라는 말로 옮겼습니다. 팔 년 동안 침상에 누워 있던 사람에게 이제 자기 잠자리를 스스로 정돈하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누가는 애니아의 이후 삶을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지만, 이 짧은 표현으로 한 사람의 생활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보여 줍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예수님께 돌아옵니다. 누가는 사람들이 베드로를 따르기 시작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애니아를 낫게 하신 분도, 사람들이 돌아온 대상도 예수님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일을 증언하는 사람입니다.

다비다가 남긴 것은 무엇이었을까?

사도행전 9:36–43 본문 →

이제 사도행전 9장의 마지막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욥바에는 다비다라는 여자 제자가 있었습니다. 이 이름을 그리스 말로 옮기면 도르가입니다. 그는 좋은 일을 많이 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꾸준히 도왔습니다.사도행전 9:36 · 두루새김

다비다와 도르가는 모두 영양이나 노루를 뜻하는 이름입니다. 「여자 제자」(μαθήτρια)로 옮긴 원문의 여성형 명사는 신약성경에서 이 형태가 등장하는 유일한 자리입니다. 누가는 다비다를 단지 좋은 일을 많이 하는 여성이나 제자들의 도움을 받는 사람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 자신이 제자입니다.

누가는 다비다의 성격을 길게 묘사하거나 그가 말한 가르침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했는지는 그가 죽은 뒤 사람들의 행동을 통해 드러납니다.

과부들이 보여 준 옷

다비다가 병들어 죽자 사람들이 그의 시신을 씻어 위층 방에 눕힙니다. 룻다에 베드로가 있다는 소식을 들은 제자들은 사람을 보내 그에게 빨리 와 달라고 요청합니다.

베드로는 일어나 두 사람과 함께 갔습니다. 그가 도착하자 사람들은 그를 위층 방으로 데리고 올라갔습니다. 과부들은 모두 울면서 베드로 곁에 서서, 도르가가 자기들과 함께 지낼 때 만든 속옷과 겉옷을 보여 주었습니다.사도행전 9:39 · 두루새김

사람들은 다비다가 얼마나 훌륭한 신앙인이었는지 긴 설명을 늘어놓지 않습니다. 그가 만든 옷을 내보입니다. 그 옷들이 누구에게 얼마나 많이 주어졌는지는 본문이 모두 알려 주지 않지만, 과부들이 울며 그의 손으로 만든 물건들을 보여 주는 장면은 다비다가 그들의 삶에 실제적인 흔적을 남겼음을 보여 줍니다.

그녀가 한 좋은 일은 막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이 입을 수 있는 옷을 만들었고, 그 옷은 그가 죽은 뒤에도 남아 있었습니다.

다비다는 베드로처럼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복음을 선포한 사람으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사울처럼 큰 논쟁을 벌인 사람도 아닙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의 삶을 사도행전의 중요한 이야기로 남겨 놓았습니다.

사울은 회당에서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고 전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사람을 낫게 하신다고 말합니다. 다비다는 자기 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며 가난한 사람들을 꾸준히 도왔습니다.

누가는 이 세 사람의 활동을 똑같은 종류의 사역이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살아나신 예수님의 공동체 안에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도 있고, 아픈 사람을 돌보는 사람도 있으며, 자신의 손으로 다른 사람의 삶을 돕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공동체 안에서 한 사람의 삶이 지닌 의미는 그가 얼마나 유명해졌는지만으로 헤아릴 수 없습니다.

과부들이 다비다의 옷을 보여 주는 장면은 그 사실을 말없이 드러냅니다.

베드로는 먼저 기도합니다

베드로는 모든 사람을 밖으로 내보냅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이 행동은 누가복음 8장 49–56절에서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두 이야기 모두 사람들이 죽음을 슬퍼하고 있고, 주변 사람들을 물러나게 한 뒤 죽은 사람에게 일어나라고 말하며, 죽었던 사람이 일어나 사람들이 그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누가는 두 사건을 완전히 똑같이 기록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아이에게 직접 일어나라고 말씀하십니다(누가복음 8:54). 사도행전에서는 베드로가 다비다에게 말하기 전에 먼저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베드로는 모두 밖으로 내보내고 무릎을 꿇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시신 쪽으로 돌아서서 말했습니다. 「다비다, 일어나세요.」 다비다는 눈을 뜨고 베드로를 보더니 일어나 앉았습니다.사도행전 9:40 · 두루새김

베드로는 예수님을 대신하여 혼자 힘으로 기적을 일으키는 또 다른 사람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누가는 베드로가 어떤 말로 기도했는지 기록하지 않지만, 그가 기도했다는 사실은 분명히 기록합니다. 사도행전의 중심에는 베드로가 얼마나 큰 능력을 갖게 되었느냐보다,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통해 계속해서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세 사람에게 들려온 「일어나」

사도행전 9장의 앞부분과 마지막 부분을 나란히 놓아 봅시다.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쓰러진 사울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자, 일어나 그 도시로 들어가라.」

팔 년 동안 몸이 마비되었던 애니아에게 베드로가 말합니다. 「일어나서 잠자리를 정돈하세요.」

다비다의 죽음 앞에서 베드로가 말합니다. 「다비다, 일어나세요.」

두루새김에서는 각각 「일어나」, 「일어나서」, 「일어나세요」라고 옮겼지만, 원문에서는 이 세 구절의 명령에 같은 그리스어 아나스테티(ἀνίστημι), 일어나라는 말이 사용됩니다. 번역자가 우연히 비슷한 한국어 표현을 고른 것이 아니라, 누가가 실제로 같은 동사를 반복합니다.

물론 세 사람이 처한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사울은 죽었다가 살아난 것이 아니고, 애니아에게 일어난 일은 병에서의 회복이며, 다비다에게 일어난 사건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일입니다. 이 세 사건을 모두 같은 의미의 부활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이 서로 다른 사건을 하나의 표현으로 연결합니다.

사울은 자신이 가려던 길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알려 주시는 길로 향합니다. 애니아는 오랫동안 누워 있던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다비다는 죽음에서 일어나 다시 공동체 앞에 섭니다.

예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나 그 일들은 모두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에도 예수님의 생명이 사람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다는 사도행전의 증언 안에 놓여 있습니다.

다비다는 누구에게 돌아왔는가?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 다비다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살아 있는 다비다를 그들 앞에 세웠습니다.사도행전 9:41 · 두루새김

누가는 다비다 앞에 선 사람들을 그냥 구경꾼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성도들과 과부들」입니다. 조금 전 다비다가 만든 옷을 보여 주며 울고 있던 사람들이 이제 살아 있는 다비다를 봅니다.

다비다의 회복은 그 한 사람에게만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왔던 사람들에게도 기쁨이 되는 사건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고치실 때에도, 병든 사람이나 죽은 사람이 회복될 뿐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하고 함께 살아가던 이들의 삶에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누가는 다비다가 다시 얼마나 오래 살았는지, 어떤 좋은 일을 계속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단지 기적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공동체가 깊이 사랑하고 그리워하던 제자였습니다.

가죽을 손질하는 시몬의 집에서

사도행전 9장은 베드로가 욥바에 있는 가죽을 손질하는 시몬의 집에 여러 날 머무는 것으로 끝납니다. 당시 이 직업은 냄새와 작업 환경 때문에 사람들이 꺼리기도 했습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의 성전도 아니고 특별한 종교적 건물도 아닌, 가죽을 손질하는 사람의 집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그가 그곳에서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누가는 말하지 않습니다. 바로 그곳이 다음 장의 이야기가 시작될 배경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39절의 속옷과 겉옷은 오늘날의 구분과 완전히 같지는 않습니다. 당시의 속옷은 몸에 가까이 입는 기본적인 옷이었고, 겉옷은 그 위에 걸치는 옷이었습니다. 또 가죽을 다룬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이 언제나 종교 의식의 기준에서 부정한 사람이었다고 단정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시몬의 집에 머물렀다는 사실만으로 그가 이미 유대교의 모든 정결 규정을 버렸다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행전 9장이 드러내는 예수님의 일

사도행전 9:1–43 본문 →

사도행전 9장은 사람의 변화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보여 줍니다.

사울은 스스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마음먹고 다마스쿠스로 향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생각을 고쳐먹기 전에 예수님의 음성이 들려왔고, 그가 자신을 믿어 달라고 요청하기 전에 예수님께서는 아나니아를 보내셨으며, 그가 위대한 전도자로 인정받기 전에 아나니아는 그를 형제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르심은 사울의 과거를 없는 일로 만들지 않습니다. 은혜는 사울이 과거에 행한 악을 정당화하지 않으며, 과거에 악을 저지른 사람은 결코 달라질 수 없다는 판단에 그를 가두지도 않습니다.

같은 예수님께서 애니아의 마비된 몸을 일으키시고, 다비다를 잃고 슬퍼하던 공동체 앞에 다비다를 다시 세우십니다. 다만 누가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즉시 병에서 낫거나 죽음에서 되살아난다고 약속하지 않고, 이 장의 특별한 기적들을 모든 시대에 반드시 되풀이될 사건으로 제시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죽은 스승을 추억하기 위해 부르는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살아 계신 주님으로 증언되고 계셨습니다.

마지막으로 다비다가 누워 있던 위층 방을 떠올려 봅시다. 조금 전까지 그곳에는 울고 있는 과부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다비다가 살아 있을 때 만든 옷들을 하나씩 보여 주고 있었습니다. 다비다의 손길이 남아 있는 물건들이었지만, 정작 그 물건들을 만든 사람은 그들 곁에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무릎을 꿇어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다비다를 향해 「다비다, 일어나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녀가 눈을 뜨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베드로는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울고 있던 사람들을 다시 불렀습니다.

그들 앞에, 다비다가 살아서 서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