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27장

이 장의 자리 · 27–28장 · 로마로 가는 길

배는 잃어도 사람은 잃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7장에는 배를 살리려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항로를 바꾸고, 바람을 피하고, 선체를 밧줄로 동여맵니다. 폭풍이 거세지자 짐을 바다에 던지고 배의 장비까지 내버립니다. 배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시도합니다.

그런데 배는 결국 부서집니다.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배가 좌초하고, 이물은 움직이지 않으며, 고물은 거센 물결에 부서져 갑니다. 그렇다면 이 항해는 실패한 것일까요? 누가는 마지막에 「모두가 무사히 뭍에 닿게 되었다」고 기록합니다(27:44).

배는 잃었습니다. 실었던 짐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한 명도 잃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폭풍 한가운데서 바울이 전한 말 그대로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목숨을 잃을 사람은 하나도 없고 배만 잃을 것이기 때문입니다」(27:22). 바울은 배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지키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배가 아니라 배에 탄 사람들의 생명입니다.

그런데 처음에는 아무도 바울의 말을 따르지 않습니다. 백부장은 바울보다 선장과 배 임자의 말을 더 신뢰합니다. 선원들은 자기들만 살려고 배에서 달아나려 합니다. 마지막에는 군인들이 죄수들을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그런데도 결국 276명 모두가 살아남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사도행전 27장은 단순한 해상 모험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의 판단, 두려움과 책임, 자기 보존과 다른 사람의 생명을 돌보는 일이 한 배 위에서 맞부딪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 명의 죄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배를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항로를 결정할 권한도 없었고, 배를 조종할 기술을 책임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항해가 끝날 무렵, 그 배에 탄 모든 사람의 생존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말을 하는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는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되었을까요?

읽는 시간 25분소단락 827장 본문 읽기 →

「우리가 이탈리아로 배를 타고 가기로 정해지자」 — 죄수와 동행자들

사도행전 27:1–8 본문 →

27장은 한동안 등장하지 않았던 「우리」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이탈리아로 배를 타고 가기로 정해지자, 사람들이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존엄한 부대」의 율리오라는 백부장에게 넘겼다.사도행전 27:1 · 본디새김

서술자는 16:10, 20:5 이후의 여행 기록에서도 「그들」이 아니라 「우리」라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바울이 로마로 향하는 항해가 「우리」의 이야기로 기록됩니다. 배가 움직일 때도, 바람에 밀릴 때도, 구조받을 소망을 잃을 때도 서술자는 「우리」라고 말합니다.

독자는 바울을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배를 타고 위험을 겪는 사람들의 자리에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 배에는 다른 죄수들과 백부장 율리오, 그가 지휘하는 군인들이 있습니다. 아리스다고도 함께합니다. 그는 마케도니아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19:29에서 에베소의 소동에 휘말렸고 20:4에서는 바울의 동행자 가운데 하나로 등장했습니다. 바울은 완전히 혼자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이튿날 우리는 시돈에 닿았다. 율리오가 바울을 너그럽게 대해, 바울이 벗들에게 가서 돌봄을 받도록 허락했다.사도행전 27:3 · 본디새김

바울은 여전히 죄수입니다. 다만 백부장의 허락 아래 자신을 돌봐 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율리오는 처음부터 바울에게 적대적인 사람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호의를 베푼다는 것과 바울의 말을 신뢰한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곧 항해가 위험해졌을 때 율리오는 바울이 아니라 선장과 배 임자의 판단을 따릅니다. 이 차이가 이 장 전체에서 중요해집니다.

바람이 막아선 항로

바울 일행은 아드라뮈티온 배를 타고 출발했다가 루기아의 미라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 배로 갈아탑니다. 로마 제국은 이집트의 곡물을 주요 식량 공급원으로 활용했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이탈리아로 항해하는 대형 곡물 운반선들이 있었습니다. 뒤에 밀을 바다에 내던지는 장면(27:38)으로 보아 이 배도 곡물을 실은 상선이었습니다.

그런데 항해는 처음부터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4절의 「바람이 거슬러 불었기 때문이다」, 7절의 「바람이 우리를 막았으므로」처럼 누가는 바람 때문에 항로를 바꾸어야 했다는 사실을 반복합니다. 「겨우」라는 표현도 반복됩니다.

배를 조종하는 사람들은 가고 싶은 방향을 알고 있었지만, 그 방향으로 마음대로 갈 수 없었습니다. 고대의 범선 항해에서 바람은 항로와 속도, 항구에 도착할 가능성 자체를 좌우하는 조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느린 항해 때문에 더 중대한 문제가 생깁니다.

계절이 바뀌고 있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우리」라는 표현만으로 사도행전의 최종 저자가 모든 항해를 직접 경험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직접적인 동행의 기록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지만, 여행 자료의 활용이나 고대 항해 서술의 문학적 관습과 관련해 설명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안에서 이 일인칭 복수가 만드는 효과는 분명합니다.

「금식일도 이미 지나」 — 누구의 판단을 따라야 하는가

사도행전 27:9–13 본문 →

9절은 여행이 위험해진 이유를 설명합니다.

오랜 시간이 흐르고 금식일도 이미 지나 뱃길이 위태로워졌으므로, 바울이 타이르며사도행전 27:9 · 본디새김

「금식일」은 일반적으로 레위기 16:29-31에 규정된 유대교의 속죄일을 가리키며, 오늘날의 달력에서는 대체로 9월 말에서 10월 사이에 해당합니다. 고대 지중해의 범선 항해는 가을이 깊어질수록 위험해졌고, 겨울철의 장거리 항해에는 큰 제약이 있었습니다. 누가는 그날이 이미 지났다는 사실로 항해하기 위험한 계절이 되었음을 알려 줍니다.

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 내가 보기에 이 뱃길은 짐과 배만이 아니라 우리 목숨에도 피해와 큰 손실을 가져올 것입니다.」사도행전 27:10 · 본디새김

뒤에 바울은 천사가 자신에게 전해 준 하나님의 말씀을 밝힙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내가 보기에」라고 말할 뿐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10절은 바울이 항해 상황과 위험을 판단하여 경고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5에서 밝히듯 그는 세 번 파선한 경험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이 하는 말보다 키잡이와 배 임자의 말에 더 마음이 기울었다.사도행전 27:11 · 본디새김

이 결정은 무조건 어리석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배를 조종하는 전문가는 키잡이와 선원들이고, 항해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은 배 임자입니다. 바울은 배에 탄 죄수입니다.

누가는 오히려 그들의 실제 고민을 설명합니다. 아름다운 항구는 겨울을 나기에 적합하지 않았고, 그래서 다수는 뵈닉스에 이를 수 있다면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기로 합니다. 이들은 겨울철의 위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더 나은 겨울 정박지를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항구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위험을 감수하고 더 나은 항구까지 갈 것인가? 바울은 남는 편이 낫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다수는 출항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13절에서 마치 그들의 선택이 옳았던 것처럼 보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남풍이 약하게 불자 그들은 뜻한 대로 되었다고 여기고 닻을 올려 크레타 해안을 바싹 끼고 따라갔다.사도행전 27:13 · 본디새김

그들은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계획을 실행하기에 좋은 조건이 나타나자 「뜻한 대로 되었다고」 여겼습니다. 사람은 어떤 조건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뀌면, 그것이 앞으로의 결과까지 보장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온화한 남풍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배를 내맡기고 떠밀려 갔다」 — 모든 통제력을 잃어버리다

사도행전 27:14–20 본문 →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에우라퀼론이라 불리는 회오리치는 거센 바람이 크레타 쪽에서 몰아쳤다.사도행전 27:14 · 본디새김

남풍이 불어 계획대로 될 것이라고 생각한 순간부터 거센 폭풍이 몰아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북동쪽 계열에서 불어오는, 항로를 크게 벗어나게 할 만한 위험한 바람이었습니다.

배가 휩쓸려 바람을 맞받아 나아갈 수 없게 되자 우리는 배를 내맡기고 떠밀려 갔다.사도행전 27:15 · 본디새김

그들은 처음에는 항로를 선택했습니다. 바람막이가 될 섬을 찾아가고, 해안을 따라 항해하고, 어느 항구에서 겨울을 보낼지 의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배를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이것은 통제력의 상실입니다.

그래도 선원들은 배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합니다. 가우다라는 작은 섬을 바람막이 삼아 거룻배를 겨우 붙들어 올리고, 배 밑으로 밧줄을 둘러 선체를 동여맵니다. 북아프리카 해안의 넓고 얕은 모래톱 지대인 시르티스에 걸릴까 두려워 배의 장비를 내리고, 가능한 한 위험을 줄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폭풍은 계속됩니다. 이튿날에는 짐을 바다에 던지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배의 장비까지 자기 손으로 내버립니다. 목적지까지 가져가려던 짐이 이제 생존을 위협하는 무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하면 얻을 수 있었던 것을 포기하고, 지금 당장 살아남을 가능성을 붙듭니다.

그런데 이런 조치들을 취하고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여러 날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거센 폭풍이 몰아치자, 우리가 구원받으리라는 소망이 끝내 다 빼앗겨 갔다.사도행전 27:20 · 본디새김

고대의 선원들에게 해와 별은 방향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여러 날 하늘을 볼 수 없으니 배가 어느 위치까지 떠밀려 왔는지 알기 어렵고, 항해 기술도 한계에 부딪힙니다. 누가는 단순히 배가 위험했다고 말하지 않고, 사람들이 더 이상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죄수든 군인이든, 선원이든 승객이든 폭풍은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같은 배에 타고, 같은 바다 위에서 생존의 소망을 잃어 갑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바울이 그들 가운데 일어섭니다.

조금 더 깊이

「에우라퀼론」이라는 이름은 그리스어의 동풍을 뜻하는 말과 라틴어의 북풍을 뜻하는 aquilo가 결합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17절의 「돛을 내리고」에는 본래 장비나 기구를 가리키는 표현(토 스케우오스)이 쓰였는데, 정확히 무엇을 내렸는지는 논쟁이 있습니다. 돛 자체를 내렸다는 읽기와 특정한 범장 장비를 내렸다는 읽기가 있으며, 해상 닻과 관련된 조치로 이해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이 불확실성을 남겨 두더라도, 선원들이 배의 속도와 방향을 조절하고 선체가 부서지는 것을 막기 위해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이야기의 의미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속해 있고 내가 예배하는 그 하나님」 — 폭풍 속에서 드러난 바울의 소속

사도행전 27:21–26 본문 →

바울은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서서 말합니다.

오래 먹지 못하고 있을 때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 서서 말했다. 「여러분, 내 말을 따라 크레타에서 출항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이 피해와 손실을 겪지 않았을 것입니다.」사도행전 27:21 · 본디새김

이 말을 단순히 ‘내 말이 맞았지 않느냐’는 비난으로만 이해하면 이어지는 말씀을 놓치게 됩니다. 바울은 경고했던 피해가 실제로 닥쳤다는 점을 상기시킨 다음, 이제 새로운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이제 여러분에게 기운을 내라고 당부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목숨을 잃을 사람은 하나도 없고 배만 잃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7:22 · 본디새김

10절에서 바울은 배와 짐뿐 아니라 사람들의 목숨까지 큰 손실을 입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목숨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전날 밤 하나님의 천사가 바울 곁에 서서 말씀했기 때문입니다(23-24절).

처음에는 「내가 보기에」라고 말했지만, 이번에는 자신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판단하여 위험을 경고했던 일과 하나님에게서 생명의 보존을 약속받은 일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내가 속해 있고 내가 예배하는 그 하나님의 천사가 이 밤에 내 곁에 서서」사도행전 27:23 · 본디새김

바울은 단순히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났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그는 로마의 죄수이고, 법적으로는 백부장 율리오의 감독 아래 있으며, 항해의 중요한 결정도 다른 사람들이 내립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가장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관계가 따로 있다고 밝힙니다.

「속해 있고」와 「예배하는」이라는 두 표현은 서로를 보완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소유하신 분이라는 고백과, 자신이 그 하나님을 섬긴다는 고백이 함께 있습니다. 바울에게 신앙은 자신의 삶이 누구에게 속해 있고, 누구를 섬기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 고백은 성전이나 회당이 아니라 로마로 향하는 상선 위에서, 생존의 소망을 잃은 군인과 죄수와 선원과 승객 가운데서 나옵니다. 배가 안전하다는 주장도, 자신이 더 나은 항해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이 이 상황에서도 말씀하셨다는 고백입니다.

「너는 카이사르 앞에 서야 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바울아. 너는 카이사르 앞에 서야 한다. 그리고 보아라, 하나님이 너와 함께 배를 탄 모든 이를 너에게 주셨다.』」사도행전 27:24 · 본디새김

여기에 두 개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카이사르 앞에 서야 한다는 것으로, 23:11에서 예수님께서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일과 이어집니다. 다른 하나는 바울에게 주어진 약속이 함께 배를 탄 사람들에게까지 확장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누구입니까? 바울의 말을 무시했던 백부장, 배를 출항시킨 선원들과 배 임자, 그리스도인이라고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생명 보존 약속 안에 포함됩니다.

「주셨다」(χαρίζομαι)로 옮긴 동사는 호의나 은혜로 베풀어 주었다는 의미를 담은 완료형입니다. 이 표현 때문에 바울이 그들을 위해 기도했고 하나님이 응답하셨을 가능성을 생각하는 해석이 있지만, 본문은 바울이 어떤 기도를 드렸는지 직접 기록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의 생명이 바울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로운 선물처럼 표현된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이 배를 책임지는 선장도, 선원들의 고용주도, 다른 죄수들의 대표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에게 함께 배를 탄 사람들의 생명이 보존될 것이라는 소식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사명을 계속 이루어 가시면서, 그 사람과 함께 있는 다른 사람들의 생명도 돌보십니다.

배에 탄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나중에 자기들만 살려고 달아나려 하고, 군인들은 죄수들을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그들 사이의 구별보다 넓습니다.

「우리는 어느 섬에 좌초하게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그러므로 여러분, 기운을 내십시오. 나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25절)라고 말한 뒤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우리는 어느 섬에 좌초하게 되어 있습니다.」사도행전 27:26 · 본디새김

하나님은 폭풍이 즉시 그칠 것이라고도, 배가 정상적인 항구에 도착할 것이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좌초하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약속과 배가 부서질 것이라는 예고가 함께 있습니다.

이 대목을 읽을 때 하나님의 구원을 모든 피해의 방지와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이 약속은 이 배에 탄 사람들의 생명에 관한 구체적인 말씀이며, 이것을 근거로 모든 위험에서 반드시 물리적인 구원이 보장된다고 일반화해서도 안 됩니다.

배는 잃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제 배에 탄 사람들은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아직 알지 못한 채 밤바다를 떠밀려 갑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장을 읽으면 누가복음 8:22-25의 바다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고, 폭풍이 그치고 잔잔해집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27장에서는 폭풍이 그치지 않습니다. 바울은 바람을 꾸짖지 않고, 폭풍은 계속되며, 배는 마침내 부서집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모두 살아남습니다. 두 이야기는 직접적인 인용 관계에 있지 않지만, 누가의 두 책을 함께 읽으면 하나님이 한 가지 방식으로만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라는 주제적 연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위협이 사라지고, 때로는 위협이 사라지지 않은 채로 살아갈 길이 열립니다.

「이 사람들이 배에 남아 있지 않으면」 — 약속이 있다고 해서 손을 놓을 수는 없다

사도행전 27:27–32 본문 →

열나흘째 밤이 되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여전히 아드리아 바다에서 떠밀려 다니고 있습니다. 한밤중에 선원들은 육지가 가까워진다고 짐작하고 물 깊이를 잽니다. 스무 길이던 수심이 조금 더 가자 열다섯 길이 됩니다. 그들은 바위에 부딪힐까 두려워 고물에서 닻 넷을 내리고 날이 밝기를 빕니다.

앞에서는 넓은 바다에서 어디로 떠밀려 가는지 알 수 없어 두려웠습니다. 이제는 육지가 가까워졌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벗어날 가능성이 생겼지만, 동시에 육지 가까이에서 배가 부서질 위험도 커졌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일부 선원들이 다른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데 뱃사람들이 배에서 달아나려고, 이물에서 닻을 멀리 내려놓으려는 척하며 거룻배를 바다로 내리자,사도행전 27:30 · 본디새김

누가는 그들이 달아나려 했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폭풍 속에서 배를 보호하려고 겨우 끌어 올렸던 거룻배(27:16-17)를 이제 자기들만 달아나는 데 쓰려 합니다. 함께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장비가 일부 사람들의 탈출 수단으로 바뀐 것입니다.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말했다. 「이 사람들이 배에 남아 있지 않으면 여러분은 구조될 수 없습니다.」사도행전 27:31 · 본디새김

이 말은 조금 전의 약속과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함께 배에 탄 모든 사람의 생명을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본문은 두 진술을 모두 그대로 기록합니다. 선원들은 배를 조종할 기술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군인들이 좌초 직전의 배를 안전하게 해안으로 이끌 항해 기술까지 갖추었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위험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보존하실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해서 필요한 사람들이 자기 역할을 버려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약속을 믿는 바울이 가장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 줍니다.

그때 군인들이 거룻배의 밧줄을 끊어 거룻배가 떨어져 나가게 두었다.사도행전 27:32 · 본디새김

처음에 백부장은 바울보다 항해 전문가들의 말을 더 신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군인들은 바울의 경고에 따라 선원들이 달아날 수단을 끊어 버립니다. 그들이 바울의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바울의 판단을 실제 행동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배를 조종할 공식적인 권한이 없는 바울의 말이 이제 생존을 위한 결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일부 사람만 빠져나갈 수 있는 수단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같은 배에 남아 함께 해안을 향해야 합니다. 그들은 아직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선원들만 따로 달아날 수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아드리아 바다」는 오늘날의 아드리아해보다 넓은 해역을 가리킬 수 있었던 고대의 이름입니다. 당시에는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크레타 사이의 지중해 해역까지 이 이름으로 부르는 용례가 있었으므로, 현대의 아드리아해 위치만을 기준으로 항해 경로를 이해하면 안 됩니다.

「빵을 들어 모두 앞에서 하나님에게 감사한 뒤」 — 절망 속에서 다시 시작된 식사

사도행전 27:33–38 본문 →

날이 밝아 올 무렵, 바울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합니다.

날이 밝아 올 무렵에 바울이 모두에게 음식을 몫으로 받아 먹으라고 권하며 말했다. 「여러분은 오늘로 열나흘째 아무것도 먹지 않고 굶은 채 기다리며 지내고 있습니다.」사도행전 27:33 · 본디새김

이것을 반드시 모든 사람이 열나흘 동안 물 한 모금이나 음식 한 입도 먹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폭풍과 불안 속에서 정상적인 식사를 하지 못한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일까요? 그들은 아직 육지에 도착하지 못했고, 해안에 접근하는 위험한 조치가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음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음식을 몫으로 받아 먹으라고 권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의 생명을 구원하는 데에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아무도 머리카락 하나 잃지 않을 것입니다.」사도행전 27:34 · 본디새김

음식을 먹는 일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행동입니다. 바울은 약속이 있으니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구원」은 폭풍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 일을 가리키며, 「머리카락 하나 잃지 않을 것」은 온전한 보호를 나타내는 관용적인 말입니다.

이 말을 하고 그는 빵을 들어 모두 앞에서 하나님에게 감사한 뒤, 빵을 떼고 먹기 시작했다.사도행전 27:35 · 본디새김

이 장면은 뜻밖에도 조용합니다.

폭풍이 계속되는 배입니다. 날이 밝으면 좌초를 시도해야 합니다. 빵을 들고 감사하고 떼는 이 언어는 예수님의 식사 장면을 떠올리게 하지만, 실제 사건으로는 생존을 위한 공동 식사입니다.

바울은 아직 살아남지 않았습니다. 해안에 도착하지도 않았습니다. 이 감사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 뒤에 드리는 감사가 아니라, 아직 위험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드리는 감사입니다.

그러자 「그들도 모두 기운을 내어 음식을 먹었」습니다(36절). 앞서 바울은 기운을 내라고 말했지만, 이번에는 자신의 행동으로 그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누가는 바울이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냈다고도, 폭풍을 멈추게 했다고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빵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먹기 시작한 평범한 행동이 배에 탄 사람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줍니다.

이백일흔여섯 목숨

배에 탄 우리는 다 해서 이백일흔여섯 목숨이었다.사도행전 27:37 · 본디새김

왜 이 시점에 숫자를 알려줄까요? 하나님이 바울에게 약속하신 것은 「너와 함께 배를 탄 모든 이」의 생명 보존이었습니다. 이제 독자는 그 ‘모든 이’가 몇 명인지 알게 됩니다. 과연 그 많은 사람 가운데 한 명도 잃지 않을 것인가?

배부르게 먹은 뒤에 그들은 밀을 바다에 내던져 배를 가볍게 했다.사도행전 27:38 · 본디새김

먼저 먹고, 그다음 남은 밀을 버립니다. 원래 목적지까지 가져가야 할 짐이었지만, 지금은 배를 가볍게 만드는 일이 중요합니다. 아직 배는 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는 배 자체까지 잃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빵을 들고 감사하고 떼는 언어는 누가복음 9:16(오병이어), 22:19(마지막 식사), 24:30(엠마오)의 예수님의 식사 장면과 닮았습니다. 이 때문에 이 장면을 성찬의 의미와 연결하여 읽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배에 탄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본문은 성찬을 거행했다고 설명하지 않으므로 정식 성찬 예식이었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제 사건의 차원에서는 생존을 위한 공동 식사로 이해하면서, 그 언어가 예수님의 식사 장면과 신학적 공명을 일으킨다고 볼 수 있습니다. 「머리카락 하나」라는 표현은 누가복음 21:18에도 나오지만, 거기서는 어떤 이들이 죽임당할 것이라는 말씀(21:16) 뒤에 궁극적으로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의 문맥에 놓여 있고, 여기서는 모든 사람이 물리적인 죽음에서 보존될 것이라는 구체적인 약속입니다. 또한 이 장에서 「구원받다」(20절), 「구조되다」(31절), 「구원하다」(34절)에 쓰인 같은 동사는 사도행전에서 위험에서 벗어나는 일과 죄와 죽음으로부터 얻는 하나님의 구원 모두에 쓰입니다. 그러나 배에서 살아남은 276명이 모두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 구원을 사도행전 4:12가 말하는 구원과 완전히 같은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37절의 숫자는 일부 고대 사본에 다른 숫자의 이문이 전해지며, 채택한 본문은 276명을 기록합니다.

「죄수들을 죽이자고」 — 마지막 위험은 바다가 아니었다

사도행전 27:39–44 본문 →

드디어 날이 밝습니다.

날이 밝자 그들은 그 뭍이 어디인지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나 모래 해변을 지닌 후미를 보고 될 수만 있으면 그리로 배를 밀어 올리기로 뜻을 모았다.사도행전 27:39 · 본디새김

그들은 육지에 도착할 가능성을 발견했지만, 아직 안전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닻줄을 끊어 닻을 버리고, 키를 매어 둔 줄을 풀고, 앞돛을 올려 해변으로 향합니다. 선원들은 끝까지 배를 조종하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두 물살이 만나는 곳에 이르러 배를 좌초시키고 말았다. 이물은 박혀 움직이지 않았고 고물은 거센 물결의 힘에 부서져 갔다.사도행전 27:41 · 본디새김

바울이 예고한 좌초가 일어났습니다. 선원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제 배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새로운 위험이 등장합니다.

폭풍이 아닙니다.

바위도 아닙니다.

배에 함께 타고 있던 군인들입니다.

군인들은 헤엄쳐 달아나는 이가 없도록 죄수들을 죽이자고 뜻을 모았다.사도행전 27:42 · 본디새김

그들은 방금까지 같은 배에서 같은 폭풍을 견뎠고, 하나님이 바울에게 약속하신 생명 보존 대상에도 함께 포함되었습니다. 그런데 육지에 도착할 가능성이 생기자, 군인들은 죄수들의 생명을 희생시켜 자기들에게 닥칠 위험을 피하려 합니다.

자기들만 달아나려던 선원들처럼, 두려움 속에서 다른 사람의 생존보다 자기 안전을 먼저 확보하려는 행동입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느낀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킬 정당한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에는 죄수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약속을 가로막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위험은 바다가 아니라 군인들의 결정입니다.

바로 그때 율리오가 개입합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을 살리려고 그들이 뜻을 실행하지 못하게 막았다. 그리고 헤엄칠 수 있는 이들에게 먼저 뛰어내려 뭍으로 헤엄쳐 가라고 명했다.사도행전 27:43 · 본디새김

누가는 그가 바울을 살리려 했다는 동기를 명시하지만, 바울의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율리오는 처음에 바울을 너그럽게 대했고, 그다음에는 바울보다 키잡이와 배 임자의 말을 더 신뢰했으며, 폭풍 가운데서 바울의 경고가 실제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그런데 율리오의 결정은 바울 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가 군인들의 살해 계획을 막았기 때문에 다른 죄수들도 살아남을 수 있게 됩니다.

나머지 가운데 더러는 널빤지에, 더러는 배에서 나온 것들에 의지해 가게 했다. 그렇게 해서 모두가 무사히 뭍에 닿게 되었다.사도행전 27:44 · 본디새김

배는 더 이상 사람들을 목적지까지 실어 나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서진 배의 조각들은 헤엄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육지에 도착하는 데 쓰입니다. 바울이 특별한 힘으로 바다를 잠잠하게 했다고도, 천사가 다시 나타나 사람들을 들어 올렸다고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헤엄쳤고, 널빤지를 붙잡았고, 부서진 배의 조각들에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육지에 도착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두 물살이 만나는 곳」(토폰 디탈라손)은 두 바다가 만나는 곳, 양쪽으로 물이 흐르는 곳, 혹은 두 물살의 영향을 받는 지형을 가리킬 수 있어, 이 표현만으로 특정한 해안이나 암초의 위치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군인들의 판단에 대해서는, 죄수의 탈출이 지키던 이들에게 심각한 일이었다는 점이 다른 본문에서도 드러납니다. 사도행전 12:19에서는 베드로가 사라지자 헤롯이 경비병들을 심문하고 끌고 가도록 명하고, 16:27에서는 빌립보의 간수가 죄수들이 달아난 줄 알고 자결하려 합니다. 그러나 본문은 군인들이 어떤 처벌 규정을 염두에 두었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부서진 배의 조각들을 붙잡고

사도행전 27:1–44 본문 →

부서진 배의 조각들을 붙잡고 모두가 뭍에 닿기까지, 24절의 약속과 44절의 성취 사이에는 수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선원들이 달아나려 했고, 군인들이 거룻배를 끊었고, 사람들이 음식을 먹었고, 배가 좌초했고, 백부장이 죄수들을 죽이려는 계획을 막았습니다. 누가는 이 모든 과정을 생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행동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았고, 아무도 혼자서 그 배의 모든 사람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도, 이미 생존의 소망을 잃었던 선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분리시키는 근거가 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생명을 돌보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는 위험을 정확히 바라보면서도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신뢰했고, 그래서 자기만 살아남을 길을 찾지 않고 모든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바울에게 주어진 약속은 그가 혼자 살아남는 것으로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그와 함께 배에 탄 모든 사람이 살아남았을 때 성취되었습니다.

사도행전 27장의 마지막 장면에는 더 이상 온전한 배가 없습니다. 이물은 얕은 곳에 박혀 움직이지 않고, 고물은 거센 물결에 부서지고 있습니다. 헤엄칠 수 있는 이들은 바다로 뛰어들고, 헤엄치지 못하는 이들은 널빤지와 배에서 떨어져 나온 조각들을 붙잡습니다.

누가는 바울 한 사람의 극적인 구조 장면을 따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대신 모두가 육지에 도착했다고 말합니다. 바울에게 주어진 말씀은 배가 부서지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이 아니라, 「너와 함께 배를 탄 모든 이」의 생명을 보존하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바다에는 부서진 배의 조각들이 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각들에 의지해 뭍으로 올라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전했던 말씀 그대로, 배는 잃었지만 사람은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