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26장
이 장의 자리 · 21–26장 · 붙잡힌 바울
이 쇠사슬 말고는 나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사도행전 26장에서 가장 놀라운 말은 바울이 자기 결백을 주장하는 대목이 아닙니다.
오히려 변론의 마지막에 나옵니다. 바울은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이가 이 쇠사슬 말고는 나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에게 빕니다」라고 말합니다(26:29).
바울은 왕과 총독과 고관들 앞에 서 있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말을 들을지 결정할 수 있고, 그가 어떤 처지에 놓여 있는지 판단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반면 바울은 쇠사슬에 묶인 죄수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이 저들처럼 되기를 바란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저들이 자기처럼 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할까요?
바울은 자신의 처지를 부러워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쇠사슬은 분명히 제외합니다. 그가 함께 누리기를 바라는 것은 살아나신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에게서 죄 용서와 새로운 삶을 얻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한마디를 이해하려면 바울의 긴 변론을 처음부터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긴다고 믿으며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했던 사람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살아나신 예수님을 만나 일꾼과 증인으로 선택받고, 다른 사람들의 눈을 열어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게 하라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29절의 기도는 바울 자신에게 일어났던 일이 이제 왕과 총독과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사람에게도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소망을 말하는 바울은 여전히 죄수입니다.
이 장은 바울이 어떻게 죄수가 되었는가보다, 그가 어째서 쇠사슬에 묶인 상태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다고 믿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그를 박해자에서 증인으로 바꾸신 예수님이 계십니다.
「나는 스스로를 복된 사람으로 여깁니다」 — 쇠사슬에 묶인 사람의 첫마디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말했다. 「스스로 변론하는 것이 너에게 허락되었다.」 그때 바울이 손을 뻗어 변론했다.사도행전 26:1 · 본디새김
손을 뻗는 동작은 당시 연설이나 공식적인 발언의 시작을 알리는 몸짓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군중에게 둘러싸여 소리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허락된 발언의 기회를 사용해 차분하게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첫마디가 뜻밖입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내가 유대 사람들에게 고발당한 모든 문제를 두고 오늘 왕 앞에서 변론하게 되었으니 나는 스스로를 복된 사람으로 여깁니다.」사도행전 26:2 · 본디새김
죄수가 자신을 복된 사람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바울이 가리키는 것은 왕 앞에서 변론할 수 있게 된 상황이지, 쇠사슬에 묶인 처지 자체가 아닙니다.
그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곧이어 나옵니다.
「특히 왕께서 유대 사람들의 관습과 그들이 따지는 일들을 모두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래 참고 내 말을 들어 주시기를 청합니다.」사도행전 26:3 · 본디새김
그를 고발한 사람들은 그가 유대 사람들의 율법과 전통을 거스른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건의 배경에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주신 약속과 부활의 소망,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놓여 있었습니다. 아그립바는 그 종교적·역사적 배경을 이해할 수 있는 왕이었기에, 바울은 자신이 겪은 일들을 처음부터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의 변론은 로마법의 세부 조항으로 시작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와 소망으로 시작됩니다.
그에게 지금의 재판은 단지 자신이 법을 어겼는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가 하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 바울이 재판받는 이유는 소망이다
바울은 먼저 자신의 젊은 시절을 이야기합니다.
그는 자신이 유대 사람들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어려서부터 예루살렘에서 살아왔고, 바리새파 사람으로서 엄격한 신앙생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지금 전하는 신앙이 조상들의 하나님과 무관한 새로운 종교에서 갑자기 생겨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6절에서 변론의 방향이 뚜렷해집니다.
「그런데 이제 나는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에 대한 소망 때문에 서서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사도행전 26:6 · 본디새김
이 표현에는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약속하셨고, 그의 자손을 통해 민족들에게 복이 미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창세기 12:1-3; 22:17-18).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는 여호와야훼께서 자신의 백성을 회복하시고 정의를 이루실 것이라는 약속이 반복되었습니다.
그 약속들은 각각의 본래 문맥에서 구체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고, 모든 약속이 처음부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직접적으로 설명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스라엘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들이 예수님 안에서 결정적인 성취를 맞았다고 믿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자신이 이스라엘의 소망을 버린 사람이 아니라, 그 소망의 성취를 증언하는 사람이라고 주장합니다.
「우리 열두 지파가 밤낮으로 간절히 예배하며 그 약속의 성취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왕이여, 나는 그 소망 때문에 유대 사람들에게 고발당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26:7 · 본디새김
열두 지파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이스라엘 전체를 가리키는 상징적이고 역사적인 표현입니다. 바울이 그 열두 지파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린다고 말할 때, 이 표현에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향한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절에서 바울은 그 소망을 죽은 이들의 부활과 연결합니다.
「하나님이 죽은 이들을 일으키신다는 것이 여러분에게 어찌하여 믿을 수 없는 일로 여겨집니까?」사도행전 26:8 · 본디새김
바울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을 주셨고, 그 약속을 성취하실 능력이 있는 분이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죽은 사람을 다시 일으키시는 일도 하나님의 능력 밖에 있는 것으로 여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유대 사람들의 관습과 신앙적 논쟁을 잘 아는 아그립바에게 특히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유대 사람이라면 누구나 부활을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당시 유대교 안에서도 부활에 대한 견해는 서로 달랐습니다. 바울의 초점은 하나님이 죽은 이들을 일으키실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그리고 곧이어 자신이 왜 그 사실을 믿게 되었는지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이야기는 그가 처음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잘 알아보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그는 누구보다 철저히 그 예수님의 이름을 대적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열두 지파」를 1세기 당시 열두 지파가 모두 독립적인 정치·행정 조직으로 온전하게 존재했다는 뜻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에스겔 37:15-28에서 여호와야훼는 갈라진 이스라엘을 다시 하나로 모으시고 한 왕 아래 두시며, 그들 가운데 자신의 거처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그 본문의 핵심은 흩어지고 분열된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 하나가 되고 여호와야훼와의 언약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26장은 에스겔의 이 말씀을 직접 인용하지 않습니다. 다만 바울이 열두 지파의 소망을 말한다는 점에서 이스라엘 전체의 회복이라는 주제와 연결해 읽을 수 있습니다.
「그들이 죽임을 당할 때에 나도 찬성표를 던졌습니다」 — 박해자의 입에서 나온 가장 무거운 고백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이렇게 시작합니다.
「나 자신은 나사렛 사람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사도행전 26:9 · 본디새김
바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박해하면서 자신이 악한 일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렇게 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는 단순한 개인적 분노가 아니라 종교적 의무감의 언어입니다.
이 표현을 조금 뒤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말씀과 비교해 보면 역전이 일어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이름을 대적해야 한다고 여겼지만, 예수님께서는 바울을 자신의 이름을 증언할 일꾼으로 선택하셨습니다.
같은 이름을 두고 바울의 삶이 정반대 방향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 장의 고백은 특히 가혹합니다.
「예루살렘에서 그렇게 했습니다. 대제사장들에게서 권한을 받아 많은 성도를 옥에 가두었고, 그들이 죽임을 당할 때에 나도 찬성표를 던졌습니다.」사도행전 26:10 · 본디새김
바울은 「그들이」 죽임을 당할 때라고 말합니다. 복수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스데반의 죽음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바울의 고백을 스데반 한 사람의 죽음으로만 제한하면 본문의 표현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합니다. 다만 그들이 누구였으며 어떤 절차로 죽임을 당했는지는 본문이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11절에서는 더욱 충격적인 행동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회당마다 자주 그들을 벌하며 모독하게 하려고 몰아붙였습니다. 그들을 향해 너무나 미쳐 날뛰어 나라 밖 도시들까지 가서 그들을 박해했습니다.」사도행전 26:11 · 본디새김
바울은 그들의 신앙 자체를 꺾으려 했습니다.
「모독하게 하려고」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지는 않지만, 문맥상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모독하도록 강요하는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외적인 자유를 빼앗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들이 자기 입으로 믿음을 부인하게 만들려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행동을 「너무나 미쳐 날뛰어」라고 묘사합니다. 이 장의 후반부에서 베스도는 바울을 향해 「네가 미쳤다」고 외칩니다. 바울은 과거의 자신을 미쳐 날뛰던 사람으로 묘사하는데, 살아나신 예수님을 증언하는 현재의 바울을 보고 로마 총독은 미쳤다고 판단합니다. 누가는 이 두 표현을 같은 장 안에 놓았습니다.
그러나 먼저 바울의 이야기를 끝까지 따라가 보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마스쿠스로 가고 있었습니다. 그가 해야 한다고 믿었던 일을 실제로 실행하던 도중이었습니다.
그때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10절의 「찬성표를 던졌다」는 그리스어 표현에는 표결에 사용되는 조약돌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어, 실제 표결 행위에서 유래한 표현입니다. 이 때문에 바울이 당시 공회의 정식 구성원이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표현만으로 그가 공회원이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표결에 참여했다는 뜻일 수도 있고, 처형 결정에 적극적으로 찬성했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또 11절의 「미쳐 날뛰어」와 24절의 「미쳤다」는 그리스어로 모두 광분하거나 미쳤다는 뜻과 관련된 같은 어근의 말입니다.
「일어나 네 발로 서라」 — 박해자를 일으켜 세우신 예수님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던 길에서 일어난 일은 사도행전에서 이미 두 차례 서술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야기의 초점이 다릅니다. 9장은 사건이 벌어지는 과정을 서술하고, 22장은 예루살렘의 유대 사람들에게 바울이 자신의 변화를 설명하는 장면입니다. 26장은 아그립바 왕 앞에서 그 일이 왜 일어났으며 바울에게 어떤 사명이 주어졌는지를 집중적으로 보여줍니다.
「왕이여, 한낮에 길에서 나는 햇빛보다 밝은 빛이 하늘에서 비쳐 와, 나와 함께 가던 이들과 나를 둘러 비추는 것을 보았습니다.」사도행전 26:13 · 본디새김
바울은 한낮의 햇빛보다 더 강렬한 하늘의 빛을 보았다고 증언합니다. 자신이 경험한 일이 일상적인 시각 경험의 범위를 넘어섰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모두 땅에 쓰러졌을 때 나는 히브리 말로 나에게 말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끝이 뾰족한 소몰이 막대를 발로 차기는 너에게 괴로운 일이다.』」사도행전 26:14 · 본디새김
소몰이 막대 비유는 이전 두 서술에서 나타나지 않았던 표현입니다. 소를 몰 때 사용하는 막대에는 뾰족한 끝이 달려 있었습니다. 소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으려고 뒷발로 막대를 걷어차면, 오히려 자신이 찔려 고통을 겪게 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대제사장들의 권한을 받아 다마스쿠스로 가고 있었으며, 예수님의 제자들을 붙잡는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행동이 결국 바울 자신에게도 괴로운 저항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비유를 근거로 바울이 회심하기 전부터 마음속으로 예수님께서 참되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거나, 오랫동안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그런 내면의 갈등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다만 비유의 방향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대적함으로써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여겼지만, 실제로는 거역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일에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누구이신지 밝히십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주님, 누구십니까?』 주가 말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사도행전 26:15 · 본디새김
「『도리어 일어나 네 발로 서라. 네가 나를 본 일과 내가 너에게 보이게 될 일을 두고 너를 일꾼과 증인으로 미리 뽑으려고 내가 너에게 나타났다.』」사도행전 26:16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박해하던 바울을 찾아오셔서 그 행동을 드러내셨지만, 그 만남은 고발과 정죄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도리어」 일어나라고 말씀하시고, 그를 선택하신 목적을 알려주십니다.
「일꾼」과 「증인」, 이 두 단어는 바울의 새로운 삶을 설명합니다. 그는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만들어 내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본 것과 앞으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실 것을 증언하도록 선택된 사람입니다.
「내가 너에게 보이게 될 일」이라는 미래의 표현처럼, 바울의 증언은 다마스쿠스에서 경험한 한 번의 사건에만 묶여 있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은 실제로 이후 바울이 예수님의 인도와 말씀을 경험하는 여러 장면을 기록합니다(18:9-10; 23:11).
다마스쿠스에서의 만남은 바울의 모든 것을 완성한 종착점이 아니라, 새로운 사명의 시작이었습니다.
일어나 서라는 말씀의 구약적 배경
16절의 「일어나 네 발로 서라」는 표현은 에스겔 2:1을 떠올리게 합니다. 에스겔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일어나 두 발로 서라고 말씀하시며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낼 사명을 주십니다. 바울도 하늘에서 나타난 영광 앞에 쓰러지고, 일어서라는 명령을 들으며, 이어서 증언할 사명을 받습니다.
두 본문은 단어와 장면의 배열에서 상당히 가까운 관계를 보여 줍니다. 다만 사도행전 26장이 에스겔 2:1을 직접 인용한다고 명시하지는 않으므로, 예언자 소명 장면의 언어와 구조를 반영하는 문학적 연결로 보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 연결은 바울의 경험을 단순히 개인적인 종교 체험으로만 이해하지 않게 합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에스겔에게 사명을 맡기신 분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에게 나타나시어 일으켜 세우시고 사명을 맡기시는 분은 살아나신 예수님이십니다. 누가는 이 장면을 통해 예수님께서 단지 하나님께 관한 소식을 전해 주시는 과거의 교사가 아니라, 사람을 부르시고 보내시는 살아 계신 예수님이심을 보여줍니다.
조금 더 깊이
소몰이 막대를 발로 차는 비유는 고대 그리스 문학에도 나타나는 관용적 표현이었습니다. 《피티아 승리가》 2편과 《바쿠스의 여신도들》에도 이 이미지가 사용됩니다. 따라서 누가가 그리스어로 기록한 이 말씀에는 당시 독자들도 이해할 수 있는 속담적 표현이 담겨 있습니다. 다만 바울이 들었다고 증언하는 히브리 말의 정확한 원형까지 복원할 수는 없습니다. 또 「일꾼」으로 옮긴 그리스어는 다른 사람을 위해 일하거나 맡겨진 일을 수행하는 사람을 뜻하며, 누가복음 1:2에서도 처음부터 말씀을 목격하고 그 말씀의 일꾼이 된 사람들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그들의 눈을 열어」 — 예수님이 바울을 보내신 목적
「『나는 너를 이 백성과 이방 사람들에게서 건져 낼 것이다. 내가 너를 그들에게 보낸다.』」사도행전 26:17 · 본디새김
「이 백성」은 문맥상 이스라엘 백성을 가리키고, 바울은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 사람들 모두에게 보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을 그들에게서 건져 내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동시에 그들에게 보내십니다. 위험을 피하도록 보내시는 것이 아니라, 위험이 있을 사람들에게 보내시는 것입니다.
이 표현은 예언자들의 소명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예레미야 1:8에서 여호와야훼는 예레미야에게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며, 그를 건져 내기 위해 함께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바울에게도 보호의 약속과 보내심의 명령이 함께 주어집니다.
그러나 이 약속을 모든 박해와 죽음에서 영원히 면제받는다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이 이미 겪은 일들만 보아도 그의 사명은 고난을 피하는 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사명은 무엇입니까?
「『그들의 눈을 열어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서게 하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죄 용서를 받고, 나를 믿는 믿음으로 거룩해진 이들 가운데서 몫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사도행전 26:18 · 본디새김
이 한 절에는 예수님께서 바울을 보내신 목적이 압축되어 있습니다.
눈을 엽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섭니다.
죄 용서를 받습니다.
거룩해진 사람들 가운데서 몫을 얻습니다.
이것을 반드시 시간순으로 하나씩 일어나는 구원의 단계라고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보내심의 목적과 결과를 서로 연결하여 설명합니다.
눈을 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여기서 눈은 단지 물리적인 시력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이어지는 「어둠에서 빛으로」라는 표현이 보여주듯이, 사람들이 하나님과 자신의 삶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이미지는 이사야 42장의 종에 관한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이사야의 종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사람들의 눈을 여는 능력을 자기 안에 지녔다는 뜻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를 보내시고 그를 통해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을 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18절은 선교의 목적만이 아니라 선교의 주도권이 누구에게 있는지도 보여줍니다.
바울이 사람들을 자기에게 속하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예수님께서 여신 빛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에게로
두 대조는 서로 병행하면서 같은 변화를 다른 측면에서 설명합니다.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선다는 것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상태에서 하나님의 구원을 알게 되는 변화입니다.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선다는 것은 자신을 지배하던 악의 권세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속하게 되는 변화입니다.
여기서 사탄은 단순히 인간 내면의 무지나 불안만을 가리키는 표현이 아닙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사탄은 하나님의 구원에 맞서는 실제적인 악의 권세로 등장합니다(누가복음 4:1-13; 13:16; 사도행전 10:38).
그러나 이 표현을 근거로 특정 민족이나 집단을 사탄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을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 사람들에게 보내시어 그들 가운데서 구원의 소식이 필요한 사람들을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십니다. 이것은 어떤 민족을 본질적으로 악하다고 규정하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구원의 길을 여셨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에 바울 자신의 이야기가 겹쳐집니다. 그는 한때 자신이 빛 가운데 있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늘에서 그에게 빛이 비쳤을 때, 그는 자신이 누구를 대적하고 있었는지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던 사람이, 이제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도록 돕는 증인이 됩니다.
죄 용서와 거룩해진 이들 가운데서의 몫
어둠에서 빛으로 돌아서는 변화의 목적은 죄 용서와 새로운 소속에 있습니다. 「몫」은 분배받는 몫이나 할당된 부분을 뜻하는 말로, 어떤 공동체에 속하며 그 공동체가 누리는 것을 함께 나누어 받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이 죄 용서를 받고, 바울이 전하는 새로운 사상에 동의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 가운데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몫은 「나를 믿는 믿음으로」 주어집니다. 바울의 종교적 권위 때문도,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서 어떤 혈통을 물려받았기 때문만도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연결됩니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약속과 이방 사람들의 구원이 만납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버리지 않았고, 예수님 안에서 그 약속이 민족들의 구원까지 열어 놓는다고 이해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42:6-7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종을 백성의 언약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우시며, 그가 눈먼 사람들의 눈을 열고 갇힌 사람들을 어둠에서 이끌어 내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사도행전 26:18은 직접 인용이라고 표시되지는 않았지만 「눈을 열어」와 「어둠에서 빛으로」의 결합으로 그 언어를 뚜렷하게 반영합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의 흐름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시는 중심 인물이시고 사도들은 그 구원을 증언하는 사람들이므로, 이사야의 종에 관한 말씀은 신약에서 그리스도론적으로 읽히며 바울의 사명은 그 구원을 민족들에게 전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몫」으로 옮긴 그리스어는 사도행전 1:17에서 유다가 사도의 직무 가운데 받은 몫, 8:21에서 시몬이 하나님의 일에 아무 몫도 없다는 말에 쓰였고, 20:32에서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거룩해진 이들 가운데 유업을 주실 수 있다고 말합니다.
「나는 하늘에서 온 그 환상을 거스르지 않았습니다」 — 회개는 새로운 행동을 낳는다
「그러므로 아그립바 왕이여, 나는 하늘에서 온 그 환상을 거스르지 않았습니다.」사도행전 26:19 · 본디새김
「그러므로」로 바울은 자신이 왜 다마스쿠스와 예루살렘과 유대 지방과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복음을 전했는지 설명합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고안한 새로운 종교적 계획이 아니라, 예수님에게서 받은 사명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도리어 다마스쿠스에 있는 이들에게 먼저, 그다음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 지방에 있는 이들에게, 그리고 이방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하나님에게로 돌아서서 회개에 걸맞은 일을 하라고 전했습니다.」사도행전 26:20 · 본디새김
여기에는 하나님에게로 돌아서는 것과 그 돌아섬에 걸맞게 행동하는 것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회개는 단순히 죄를 후회하는 감정이 아니라 방향을 바꾸는 일입니다. 앞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에게로 돌아서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고, 이제 바울은 실제로 그렇게 선포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의 명령과 바울의 선포가 서로 맞물리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요구하는 것은 행동을 통해 먼저 구원을 얻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18절에서 죄 용서와 새로운 몫은 예수님을 믿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었고, 20절의 행동은 그 믿음과 회개가 삶에서 나타나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3:8에서 세례자 요한이 회개에 걸맞은 열매를 맺으라고 선포한 것과도 이어집니다. 요한은 회개를 가진 것을 나누고, 정해진 것보다 더 거두지 않고, 폭력을 사용해 돈을 빼앗지 않는 구체적인 삶의 변화로 설명했습니다(누가복음 3:10-14). 하나님께 돌아섰다면 삶의 방향도 달라져야 합니다.
바울 자신이 그렇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름을 대적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믿고 사람들을 감옥에 가두고 박해했지만, 예수님을 만난 뒤에는 다른 사람들에게 죄 용서와 새로운 삶을 전합니다. 그는 단지 예수님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이 아니라, 그 사실 때문에 살아가는 방향이 달라진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행동 때문에 그는 고발당했습니다.
「이런 일들 때문에 유대 사람들이 성전에서 나를 붙잡아 죽이려 했습니다.」사도행전 26:21 · 본디새김
바울은 자기에게 일어난 일을 예수님께서 맡기신 사명과 직접 연결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그가 경험한 모든 갈등을 무조건 자신의 옳음에 대한 증거로 삼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가 박해받은 것은 회개와 하나님께로 돌아섬,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통한 죄 용서, 이스라엘과 이방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구원의 소식을 계속 증언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의 주장입니다.
이제 바울은 그 증언이 어떤 근거 위에 서 있는지 마지막으로 밝힙니다.
「예언자들과 모세가 앞으로 일어나리라고 말한 것」 —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이 여는 빛
「그러므로 나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도움을 얻어 오늘까지 서 있으며 낮은 이에게도 높은 이에게도 증언합니다. 예언자들과 모세가 앞으로 일어나리라고 말한 것 말고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사도행전 26:22 · 본디새김
바울은 이미 여러 차례 죽음의 위협을 받았고, 감옥에 갇혔으며, 이제 왕과 총독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능력과 끈기 덕분에 「오늘까지 서 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실제로 그는 사람들의 도움과 로마 군대의 보호, 법적 절차를 통해 이 자리에 이르렀습니다. 그는 그런 구체적인 과정들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그 모든 시간 속에서 하나님이 자신을 도우셨다고 고백합니다.
「낮은 이에게도 높은 이에게도 증언합니다」라는 표현은 지금 그가 서 있는 장면과 정확히 맞아떨어집니다. 아그립바는 여전히 왕이고 바울은 죄수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에 대한 증언을 들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그 지위가 결정적인 차이를 만들지 않습니다.
왕에게도 예수님에 대한 소식이 필요합니다.
이름 없는 사람에게도 같은 소식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선포가 이스라엘의 성경과 단절되어 있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6절의 「우리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과 연결됩니다. 그가 말하려는 것은 새로운 하나님이 나타났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하나님이 그 약속을 이루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약의 어느 구절에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처음으로 부활하실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적혀 있을까요? 하나의 구절을 제시하여 이 문제가 해결된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바울은 특정한 구약 구절을 직접 인용하지 않고, 모세와 예언자들의 증언 전체를 예수님의 사건과 연결해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누가복음 24장과 닮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에게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자신에 관한 일을 설명하시고(누가복음 24:25-27), 이후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고난받으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시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 용서를 얻게 하는 회개가 모든 민족에게 선포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4:44-47).
예수님의 고난.
예수님의 부활.
이스라엘과 이방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빛.
이 세 가지가 23절에서 하나로 모입니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아야 하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처음으로 부활하여 이 백성과 이방 사람들에게 빛을 선포하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사도행전 26:23 · 본디새김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받으셔야 한다
구약의 대표적인 연결 본문은 이사야 52:13-53:12입니다. 거기서 여호와야훼의 종은 멸시와 거부를 당하고, 다른 사람들의 죄와 고통을 짊어지며, 죽음에까지 이릅니다. 그러나 그 종의 이야기는 죽음과 굴욕에서 끝나지 않고 하나님이 그를 높이시며 그의 수고가 헛되지 않게 하시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신약은 이 종의 고난을 예수님의 죽음과 연결하여 읽습니다. 사도행전 8:32-35에서 빌립은 이사야 53장의 말씀으로부터 시작하여 에티오피아 관리에게 예수님을 전합니다. 바울의 26:23도 그런 그리스도론적 해석의 흐름 안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만 구약의 모든 고난받는 의인 본문이 처음부터 메시아의 십자가 처형을 직접적으로 예언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이 증언하는 것은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통해 이스라엘 성경의 의미가 새롭게 드러났다는 것입니다.
죽은 이들 가운데서 처음으로 부활하신다
예수님보다 먼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 성경에 등장합니다. 엘리야를 통해 살아난 과부의 아들(열왕기상 17:17-24), 예수님께서 살리신 나인성 과부의 아들(누가복음 7:11-17), 나사로(요한복음 11장)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시 이 세상의 삶으로 돌아왔고,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의 권세를 넘어서는 새로운 생명의 시작으로 선포됩니다.
로마서 6:9에서 바울은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다시 죽지 않으시며, 죽음이 더 이상 예수님을 지배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고린도전서 15:20-23에서는 예수님을 죽은 이들의 「첫 열매」라고 부릅니다.
첫 열매는 뒤이어 올 수확의 시작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처음으로 부활」하셨다는 말은, 예수님의 부활이 앞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구원과 부활의 시작이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하나님의 약속은 아직 모든 면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지만, 그 약속의 결정적인 시작이 예수님의 부활 안에서 이루어졌다고 바울은 믿습니다.
이 백성과 이방 사람들에게 빛을 선포하신다
23절의 마지막 표현은 다시 빛으로 돌아옵니다. 이 말은 이사야 49:6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여호와야훼는 자신의 종을 민족들의 빛으로 삼아 자신의 구원이 땅끝까지 이르게 하겠다고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회복과 민족들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구원이 함께 등장합니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버리고 이방 사람들만 구원하겠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구원 목적이 민족들에게까지 뻗어 나간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바울은 열두 지파가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린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그 약속이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통해 이방 사람들에게까지 빛을 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소망을 포기했기 때문에 이방 사람들에게 간 것이 아닙니다. 그 소망이 예수님 안에서 민족들에게까지 열렸다고 믿기 때문에 이방 사람들에게 보내진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주장을 하던 도중, 베스도가 참지 못하고 큰 소리로 외칩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의 본래 문맥에서는 고난받는 종의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에 관해 다양한 해석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와 연결하는 읽기, 이스라엘 안의 의로운 남은 자나 특정한 대표 인물로 이해하는 읽기 등이 존재합니다. 23절의 「처음으로 부활하여」에도 해석의 차이가 있습니다. 그리스어 문장 구조상 ‘부활에서 첫째가 되시어 빛을 선포하신다’는 연결을 강조하는 읽기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질 빛의 선포와 연결된다는 점은 공통적입니다.
「네가 미쳤다」 — 누가 진실을 제대로 보고 있는가
그가 이렇게 변론하는데 베스도가 큰 소리로 말했다. 「바울아, 네가 미쳤다. 많이 배운 것이 너를 미치게 만든다.」사도행전 26:24 · 본디새김
바울은 조상들의 약속과 부활의 소망,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일, 모세와 예언자들의 말씀이 예수님의 고난과 부활을 통해 성취되었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베스도는 바울이 무지해서 그런 말을 한다고 꾸짖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이 배웠기 때문에 미쳤다고 말합니다. 학식은 인정하면서도, 그가 내리는 결론은 정상적인 판단을 벗어났다고 보는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박해하던 자신을 「너무나 미쳐 날뛰어」 행동했다고 묘사했습니다(26:11). 그때 그가 미쳐 날뛰며 한 일은 사람들을 박해하고 신앙을 강제로 부인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베스도가 미쳤다고 판단하는 것은 왕과 총독에게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하는 바울입니다.
이 대조는 무엇을 정상적인 행동으로 판단할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들을 박해했던 바울은 자기 행동이 옳다고 확신했고, 지금의 바울은 자신이 경험한 예수님의 부활을 진실이라고 확신합니다. 두 확신 가운데 어느 것이 실제로 옳았는지는 그가 얼마나 강하게 믿었는지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사건과 예수님의 부활을 근거로 자신의 이전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지금 베스도에게 자신의 말이 왜 진실인지 설명합니다.
바울이 말했다. 「존귀하신 베스도님, 나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진리와 분별이 담긴 말을 또렷이 하고 있습니다.」사도행전 26:25 · 본디새김
바울은 베스도를 모욕하지 않고 정중하게 대답합니다. 여기서 「분별」은 건전한 정신, 절제된 판단, 신중함과 관련된 말로, 베스도가 말한 「미쳤다」와 정면으로 맞섭니다.
「왕께서 이 일을 아시기에 나는 그분에게 거리낌 없이 말합니다. 이 가운데 어느 하나라도 그분이 모르신다고는 믿어지지 않습니다. 이 일이 구석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6:26 · 본디새김
「이 일이 구석에서 행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라는 말로 바울은 예수님에 관한 사건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이루어진 일이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예수님의 활동과 죽음,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운동이 역사 속에서 공개적으로 알려졌다는 것입니다.
물론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바울이 경험한 모든 일이 대중 앞에서 일어났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님이라는 인물과 예수님의 죽음, 그리고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고 증언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아그립바가 전혀 모를 만한 비밀스러운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믿는 사실을 역사적 세계와 분리된 개인적 체험으로만 설명하지 않고, 왕이 알고 있는 역사와 이스라엘의 성경을 함께 근거로 제시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는 왕이 무엇을 알고 있는지 이야기하다가, 왕이 무엇을 믿고 있는지 직접 묻습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예언자들을 믿으십니까?」 — 변론이 질문으로 바뀌는 순간
「아그립바 왕이여, 예언자들을 믿으십니까? 나는 왕께서 믿으시는 줄 알고 있습니다.」사도행전 26:27 · 본디새김
처음에 아그립바는 바울에게 변론할 기회를 허락했습니다. 이제 바울이 아그립바에게 직접 질문합니다. 예언자들의 존재를 알고 있는지가 아니라, 그들의 말씀을 믿는지 묻는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까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이 모세와 예언자들이 전한 소망의 성취라고 주장했습니다. 따라서 왕이 예언자들을 믿는다고 대답한다면, 그 말씀들이 예수님에게 어떻게 연결되는지 살펴보아야 하는 자리에 놓이게 됩니다. 예언자들을 믿는다고 해서 반드시 바울의 해석에 동의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바울은 아그립바가 예언자들의 말씀을 인정한다면 자신이 전하는 메시지를 단순한 광기로 치부할 수 없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여기서 재판의 역할이 역전됩니다.
아그립바는 바울이 무슨 말을 하는지 판단하기 위해 이 자리에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예언자들의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대답해야 하는 사람이 됩니다. 바울은 왕을 모욕하거나 위협하지 않고, 왕이 이미 중요하게 여기는 성경의 권위 앞에 그를 세웁니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말했다. 「짧은 말로 나를 설득해 그리스도 사람으로 만들려 하는구나.」사도행전 26:28 · 본디새김
이 대답은 오래전부터 두 방향으로 읽혀 왔습니다. 아그립바가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만큼 설득되었다는 읽기와, 그렇게 짧은 말로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만들 수 있겠느냐는 반어적인 대답이라는 읽기입니다. 원문의 엔 올리고(ὀλίγος)가 ‘짧은 시간에’, ‘적은 말로’, ‘조금으로’ 등 문맥에 따라 여러 방향으로 이해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이 실제로 마음이 움직인 사람의 고백인지, 바울의 설득을 비웃거나 피하려는 발언인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확실한 것은, 아그립바가 바울이 자기를 그리스도인으로 설득하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그것을 직접 말했다는 점입니다. 그가 「그리스도 사람」이라는 이름을 어떤 감정으로 사용했는지는 불확실하지만, 바울의 말이 단지 자신에 대한 법적 변론이 아니라는 사실은 정확하게 알아들었습니다.
왕은 죄수의 이야기를 들어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죄수가 자신이 믿는 예수님을 왕도 믿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아그립바의 대답 다음에 바울이 남긴 한마디는 이 장 전체를 새롭게 보게 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도 사람」은 예수님에게 속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사도행전 11:26에서는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처음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렸다고 기록하는데, 26장에서는 이 명칭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닌 아그립바의 입에서 등장합니다.
「이 쇠사슬 말고는」 — 자유를 빼앗긴 사람이 나누고 싶었던 것
바울이 말했다. 「나는 말이 짧든 길든 왕만이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이가 이 쇠사슬 말고는 나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하나님에게 빕니다.」사도행전 26:29 · 본디새김
바울은 아그립바의 대답이 진심 어린 관심인지, 반어적인 거절인지 따지지 않습니다. 그는 아그립바의 말에 담긴 ‘짧음’이라는 표현을 받아 자신의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기에게서 무엇을 본받으라고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자신의 종교적 경력도, 학식도 아닙니다. 자기가 겪은 고난을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겪으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마지막에 쇠사슬을 분명하게 제외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증인으로 살아가면서 겪는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다른 사람들이 그 고난을 겪어야만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바라는 것은 쇠사슬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믿음입니다.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께 돌아서고, 거룩해진 사람들 가운데서 몫을 얻는 것입니다.
18절에서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맡기신 사명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그 사명을 지금 이 자리에서도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는 죄수로서 왕 앞에 서 있지만, 그 왕을 단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권력자로만 바라보지 않고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한 한 사람으로 바라봅니다.
그의 소망은 왕을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왕이 자신과 같은 믿음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깊은 역전이 일어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벌하고 모독하게 하려고 몰아붙였던 과거를 고백했습니다. 이제 그는 왕과 고관들에게 자기와 같은 사람이 되라고 강제로 요구하지 않고, 그들이 그렇게 되기를 하나님께 빈다고 말합니다.
과거에는 다른 사람의 신앙을 강제로 꺾으려 했습니다.
이제는 다른 사람도 믿음의 기쁨을 누리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에게 일어난 변화는 그가 믿는 대상이 달라진 데서 끝나지 않고, 다른 사람을 대하는 방식까지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는 자신의 구원을 다른 사람보다 우월해지는 근거로 삼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도 같은 은혜가 주어지기를 바라는 이유로 삼습니다.
이 장의 처음에 바울이 자신을 복된 사람으로 여긴다고 말한 이유도 여기서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쇠사슬을 찬 채로도 왕과 모든 청중에게 예수님을 증언할 수 있었고, 자신이 받은 은혜를 다른 사람도 누리기를 바랄 수 있었습니다.
「풀려날 수 있었다」 — 무죄에 가까운 판단과 남겨진 쇠사슬
바울의 말이 끝나자 왕과 총독과 버니게, 그리고 함께 앉아 있던 사람들이 일어납니다.
누가는 그들이 바울에게 무슨 말을 더 했는지 기록하지 않고, 물러가서 서로 나눈 말을 전합니다.
그리고 물러가서 서로 말했다. 「이 사람은 사형을 당하거나 사슬에 묶일 만한 일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사도행전 26:31 · 본디새김
아그립바 앞의 청문은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한 사건의 내용을 좀 더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왕과 총독과 참석자들은 바울이 사형이나 구금을 정당화할 일을 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립니다. 그의 증언은 종교적으로 논쟁적이고 정치적·사회적 갈등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지만, 그 사실만으로 사형이나 구금이 정당화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그립바가 말합니다.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말했다. 「이 사람은 카이사르에게 상소하지 않았더라면 풀려날 수 있었다.」사도행전 26:32 · 본디새김
그렇다면 바울은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일까요? 그렇게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누가는 바울의 상소를 잘못된 선택이라고 비판하지 않고, 바울이 처음부터 로마로 가기 위해 모든 법적 절차를 치밀하게 계산했다고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바울의 선택과 그 결과를 기록합니다.
이제 왕과 총독까지 바울의 구금이 정당하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바울의 무죄를 인정하는 판단은 거듭 쌓이지만, 그의 쇠사슬은 아직 풀리지 않습니다. 누가는 이 모순을 해소하는 설명을 붙이지 않습니다.
하지만 풀려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제 황제에게 보내질 사람으로 남아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아그립바의 말은 현재의 상황을 평가한 것이며, 실제로 바울이 상소하지 않았다면 언제 어떤 조건으로 석방되었을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죽임을 당할 위험에 처해 있었고, 베스도는 유대 사람들에게 호의를 얻으려고 재판 장소를 바꾸려 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상황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법적 권리를 행사했습니다. 그 선택이 당시의 위험을 고려할 때 합리적이었다는 평가와, 상소가 없었다면 석방될 수 있었다는 아그립바의 평가는 반드시 모순되지 않습니다.
왕이 일어선 뒤에
왕이 일어서고, 총독도, 버니게와 함께 앉아 있던 사람들도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그들은 바울이 죽거나 갇힐 만한 죄를 저지르지 않았다고 판단했지만, 바울을 풀어 주는 장면은 나오지 않습니다. 바울이 다시 무슨 말을 했는지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장면은 그를 판단하던 사람들이 물러가는 것으로 끝납니다.
이 장의 중심은 바울이라는 위대한 인물의 용기나 설득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바울을 박해자에서 증인으로 바꾸신 예수님,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바울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자신의 구원을 전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맡기신 일은 선교 여행의 현장에서만이 아니라, 바울이 죄수로 서 있는 청문실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신체적 자유를 되찾기 위해 정당한 재판을 요구했고 황제에게 상소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쇠사슬로 빼앗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만난 예수님에 대한 믿음, 그리고 그 믿음으로 받은 죄 용서와 새로운 삶입니다. 그래서 그는 쇠사슬에 묶인 채로도 다른 사람에게 나누어 줄 것이 있었습니다.
왕과 총독은 일어나 청문실을 떠납니다. 그들에게는 권력이 있고, 지위가 있고, 자유가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아직 쇠사슬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가진 것을 부러워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자신에게 없는 자유를 누리되, 자신이 예수님에게서 받은 은혜도 함께 누리기를 바랐습니다.
왕은 떠났고, 죄수는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날 청문실에서 다른 사람이 자기처럼 되기를 바란 사람은 왕이 아니라 바울이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