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25장
이 장의 자리 · 21–26장 · 붙잡힌 바울
죽으신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다는 주장
사도행전 25장은 이상한 곤경에 빠진 로마 총독의 말로 끝납니다.
「갇힌 사람을 보내면서 그를 두고 하는 고발을 함께 적지 않는 것은 나에게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27절) 벨릭스의 뒤를 이어 총독이 된 베스도는 바울을 로마 황제에게 보내야 합니다.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했고, 베스도가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황제에게 보낼 죄수는 있는데, 그가 어떤 죄를 저질렀는지 적을 수가 없습니다.
고발하는 사람들은 많았습니다. 예루살렘의 대제사장들과 지도자들이 찾아와 바울을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를 죽이려는 계획까지 세웠습니다. 그러나 정작 재판에서 그들은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고, 베스도 자신도 바울이 죽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판단합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풀려나지 않고, 오히려 로마 황제에게 보내질 죄수가 됩니다.
베스도는 고발자들과 바울 사이의 실제 쟁점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도리어 자기들의 종교를 두고, 그리고 죽은 예수라는 사람을 두고 바울과 따지는 일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가 살아 있다고 주장했습니다.」(19절) 정치적 반란이나 중대한 범죄를 예상했는데, 실제로는 죽으신 예수님이라는 사람이 살아 계시다는 주장을 두고 다투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스도에게 예수님은 ‘죽으신 사람’이십니다. 바울에게 예수님은 ‘살아 계신 주님’이십니다.
이 차이가 바울을 황제의 재판석으로 향하게 하는 사건의 중심에 놓여 있습니다. 그리고 독자는 베스도가 알지 못하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미 바울에게 로마에서도 자신을 증언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23:11).
그러므로 이 장에는 서로 다른 두 가지 이야기가 겹쳐 있습니다.
하나는 로마 총독이 죄목을 확정하지 못한 채 황제에게 죄수를 보내게 되는 법적 이야기입니다. 다른 하나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증언이 예루살렘과 가이사랴를 지나 로마로 향하는 이야기입니다. 누가는 이 두 이야기를 억지로 하나로 합치지 않고, 나란히 놓아 독자가 그 차이를 발견하게 합니다.
이 장의 전개도 그에 맞추어 이루어집니다. 처음에는 실제 재판이 열리고, 중간에는 베스도가 아그립바 왕에게 그 재판을 설명하며, 마지막에는 왕과 고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죄수를 소개합니다. 사건은 세 번 이야기되지만, 거듭 말할수록 바울의 죄목이 선명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죄목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이 더욱 뚜렷해집니다.
「바울에게 불리한 호의를 구하며」 — 새 총독에게 찾아온 오래된 음모
베스도가 속주에 부임한 지 사흘 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새 총독이 부임하자마자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을 만나는 것은 정치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예루살렘은 유대 사람들의 종교적 중심지였고, 로마 총독은 이 지역의 갈등과 질서 문제를 관리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유대 사람들의 우두머리들은 새 총독이 오자 곧바로 바울을 고발하고 간청합니다. 바울은 이미 오랫동안 구금되어 있었고 총독도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향한 적대감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요청만 놓고 보면 재판 장소를 변경해 달라는 청원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즉시 그들의 실제 계획을 밝힙니다.
그들은 베스도에게 바울에게 불리한 호의를 구하며,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불러 달라고 했다. 길에서 그를 없애려고 숨어 기다릴 셈이었다.사도행전 25:3 · 본디새김
그들은 바울이 재판받으러 이동하는 길을 이용해 그를 죽이려 합니다. 23장에서도 비슷한 암살 계획이 있었지만, 이번 모의에 참여한 사람들이 앞서 맹세했던 마흔 명과 동일한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호의’라는 말이 이상하게 들리지 않습니까? 원래 호의는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친절이나 도움을 뜻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고발자들이 요청한 호의는 바울을 죽일 기회를 얻는 일입니다.
이 표현은 이 장에서 다시 등장합니다. 9절에서 베스도는 유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바울에게 예루살렘에서 재판받을 것인지 묻고, 11절에서 바울은 아무도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자신을 넘겨줄 수 없다고 항의합니다.
이 세 장면은 같은 문제를 향합니다.
누군가에게 호의를 베푼다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는 불의가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새로 부임한 베스도에게 예루살렘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은 정치적으로 유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기 위해 바울의 안전이나 정당한 재판 절차를 희생한다면, 그 호의는 정의와 충돌합니다.
처음에 베스도는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바울이 가이사랴에 구금되어 있고 자신도 곧 그곳으로 돌아갈 것이므로, 유력한 사람들이 함께 내려와 고발하라고 말합니다. 본문은 그가 음모를 알았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결과적으로 그의 결정은 바울을 보호합니다.
그런데 잠시 후 베스도 자신이 다시 예루살렘에서 재판받겠느냐고 제안합니다.
처음에는 예루살렘 지도자들의 요청을 거절했던 사람이, 이제는 그들에게 호의를 얻으려고 재판 장소를 바꾸려 합니다. 이 변화를 통해 누가는 재판관이 정치적 관계와 정의 사이에서 어떤 선택을 하는지 보여줍니다.
「많고 중대한 죄목을 제기했으나」 — 재판석에서 드러난 고발의 빈자리
베스도는 예루살렘에서 여드레나 열흘을 넘지 않게 머문 뒤 가이사랴로 돌아와, 이튿날 곧바로 재판석에 앉습니다. 바울은 이제 자신을 고발하는 사람들과 마주 서서 자기 사건을 변론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가 나오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 사람들이 그를 둘러섰다. 그리고 많고 중대한 죄목을 제기했으나 입증하지는 못했다.사도행전 25:7 · 본디새김
많았습니다.
중대했습니다.
그러나 입증하지 못했습니다.
이 짧은 문장 안에서 고발의 외형과 실질이 서로 갈라집니다. 고발이 많다는 것은 그중 하나라도 진실이라는 뜻이 아니며, 혐의가 중대하다는 것도 증거가 충분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세 가지를 부인합니다.
바울이 변론했다. 「나는 유대 사람들의 율법이나 성전이나 카이사르를 거슬러 아무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사도행전 25:8 · 본디새김
율법과 성전은 유대 공동체의 종교적 질서에 관한 문제이고, 카이사르는 로마의 정치적 권위와 법적 질서에 관한 문제입니다. 이 세 단어가 고발의 범위를 보여줍니다. 특히 이번에는 카이사르가 명시적으로 등장합니다. 바울은 이제 로마 제국의 법적 판단 아래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자신의 모든 행동이 누구에게도 갈등을 일으킨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갈등과 범죄는 구별되어야 합니다. 바울의 증언 때문에 논쟁이 일어났을 수 있지만, 그 사실만으로 그가 불법행위를 했다는 결론에 이를 수는 없습니다.
재판관으로서 베스도가 해야 할 일은 확인된 사실에 근거하여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베스도는 다른 선택지를 제시합니다.
이때 바울의 응답이 이 장의 방향을 바꾸어 놓습니다.
조금 더 깊이
누가는 6절에서 재판관이 앉아 사건을 심리하고 판단하는 공적인 자리를 뜻하는 그리스어 낱말을 쓰는데, 이 단어는 10절과 17절에도 등장합니다. 같은 사건을 두고 재판석이 세 번 언급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8:12-17에서 바울이 갈리오 총독 앞에 섰을 때에도 같은 단어가 사용됩니다.
「저는 카이사르의 재판석 앞에 서 있습니다」 — 재판관의 호의를 거절하다
9절은 베스도의 행동을 설명하면서 그 동기를 직접 밝힙니다.
그러나 베스도는 유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바울에게 대답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거기서 내 앞에서 이 일들을 두고 재판받겠느냐?」사도행전 25:9 · 본디새김
베스도는 바울을 곧바로 유대 공회에 넘겨주겠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더라도 「내 앞에서」 재판받겠느냐고 묻습니다. 그러나 재판 장소를 예루살렘으로 옮기는 일은 이미 암살 계획의 핵심이었습니다. 베스도가 그 계획을 알고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독자는 알고 있습니다.
더욱이 누가는 그 동기를 「유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라고 명시합니다. 재판관이 사건의 공정성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쪽의 호의를 얻기 위해 절차를 바꾸려는 것입니다.
바울은 즉시 대답합니다.
바울이 말했다. 「저는 카이사르의 재판석 앞에 서 있습니다. 제가 재판받아야 할 자리가 여기입니다. 총독께서도 더 잘 아시는 대로 저는 유대 사람들에게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습니다.」사도행전 25:10 · 본디새김
바울이 서 있는 곳은 로마가 아니라 가이사랴이고, 재판석에 앉은 사람도 베스도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신이 이미 로마의 정당한 재판권 아래 있으며, 자기 사건을 판단할 권한이 베스도에게 있다고 강조합니다. 베스도는 그 책임을 다하는 대신 정치적 호의를 고려해 재판 장소를 바꾸려 합니다.
바울은 또 베스도가 자신의 결백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고발자들이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다는 기록과 맞물리는 말이지만, 베스도가 마음속으로 어디까지 확신하고 있었는지는 여기서 직접 확인되지 않습니다. 이는 바울이 재판관을 향해 제기한 주장입니다.
「그러니 내가 잘못을 저지르고 있고 죽을 만한 일을 했다면 죽기를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이 나를 고발하는 것이 하나도 사실이 아니라면 아무도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어 나를 넘겨줄 수 없습니다. 나는 카이사르에게 상소합니다.」사도행전 25:11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이 특별한 종교적 사명을 받았으므로 세상의 모든 법과 처벌에서 면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가 거부하는 것은 처벌 자체가 아니라, 죄가 입증되지 않았는데도 정치적 호의를 위해 다른 사람에게 넘겨지는 일입니다.
처음에 예루살렘 지도자들은 총독에게 호의를 요청했습니다. 베스도는 그들에게 잘 보이려 했습니다. 이제 바울은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호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고 선언합니다.
한쪽에게 호의를 베푸는 일이 다른 사람의 권리를 침해한다면, 그것은 정당한 판단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런 호의를 거부할 수 있는 절차를 사용해 더 높은 재판권자의 판단을 요청합니다. 베스도는 자문단과 의논한 뒤 짧게 대답합니다. 「네가 카이사르에게 상소했으니 카이사르에게 갈 것이다.」(12절)
여기서 앞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하신 말씀이 떠오릅니다.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하기 때문이다.」(23:11) 바울이 로마로 가야 한다는 사실은 이미 예수님의 말씀으로 주어졌지만, 어떻게 가게 될지는 그때 설명되지 않았습니다. 이번 장에서 바울은 자신의 법적 권리를 행사하고, 그 결과 로마로 가는 길이 열립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상소한 목적이 오직 로마 선교였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명시한 이유는 부당하게 넘겨지는 것을 막고 정당한 재판을 받으려는 것이었습니다. 다만 누가는 독자가 그 선택을 예수님의 약속과 연결해 읽을 수 있도록 두 사건을 이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판단을 서로 경쟁하는 설명으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했고, 그 선택으로 열리게 된 길은 이미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방향과 일치합니다.
조금 더 깊이
당시 속주의 총독은 황제에게서 위임받은 권한으로 재판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10절의 「카이사르의 재판석」은 지금 당장 로마에 있는 황제 앞에 서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11절의 「호의를 베풀어」는 문맥에 따라 호의로 주거나 베푼다는 의미의 말입니다. 로마 시민이 황제에게 상소할 수 있는 제도가 있었지만, 그 권리가 구체적으로 어느 사건과 절차에 어떻게 적용되었는지는 로마 법의 역사적 발전을 함께 고려해야 하며, 현대적인 의미의 항소심 제도를 그대로 대입하기는 어렵습니다. 이 사건에서 확실한 것은 베스도가 자문단과 의논한 뒤 상소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이 상소는 예루살렘에서 출발한 증언(1:8)이 제국의 중심을 향하게 되는 이야기의 중요한 한 지점이기도 합니다.
「벨릭스가 남겨 둔 갇힌 사람」 — 한 사람의 사건이 다시 이야기되다
며칠 뒤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가이사랴에 도착합니다.
베스도는 로마의 행정과 법적 질서를 책임지는 총독이고, 아그립바는 유대의 종교적 사정과 왕가의 역사에 익숙한 통치자입니다. 베스도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을 아그립바가 더 잘 파악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황제 상소는 이미 받아들여졌으므로, 아그립바가 정식 재판권을 넘겨받는 것은 아닙니다. 베스도는 그에게 사건을 설명하고 의견을 구하려는 것입니다.
그들이 거기서 여러 날 지내는 동안 베스도가 왕에게 바울의 일을 꺼내며 말했다. 「벨릭스가 남겨 둔 갇힌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사도행전 25:14 · 본디새김
‘바울’이라는 이름보다 먼저 등장하는 것은 그가 전임 총독에게서 물려받은 죄수라는 사실입니다. 베스도에게 바울은 이전 총독이 해결하지 못하고 남겨 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죄수 때문에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새 총독에게 찾아와 유죄 판결을 내려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고발당한 사람이 고발하는 이들과 대면할 기회를 가지고 그 고발을 두고 변론할 자리를 얻기 전에는, 누구를 넘겨주는 것이 로마 사람의 관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사도행전 25:16 · 본디새김
바울에 대한 적대감이 얼마나 강한지와 관계없이, 그를 처벌하려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밝히고 변론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원칙입니다.
그런데 독자는 베스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조금 전의 재판을 기억합니다. 그는 실제로 고발자들을 불러 바울과 대면하게 했고, 이튿날 지체 없이 재판석에 앉았습니다. 하지만 고발자들이 혐의를 입증하지 못하자, 유대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고 예루살렘에서 재판받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이 사실은 아그립바에게 들려주는 설명에서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반드시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가 언급한 절차는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한 사건을 어떻게 설명하느냐에 따라, 사실인 말들만으로도 자신의 행동을 유리하게 보이게 할 수 있습니다.
누가는 베스도의 보고를 들려주기 전에 실제 재판 장면을 먼저 보여주었습니다. 그 덕분에 독자는 무엇이 강조되고 무엇이 빠져 있는지 살필 수 있습니다. 누가는 재판관의 판단을 곧바로 최종적인 진실로 제시하지 않습니다. 재판관 역시 제한된 지식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베스도가 자신에게 불리할 수도 있는 중요한 사실을 인정합니다.
「고발하는 이들이 일어섰으나, 내가 짐작하던 나쁜 일에 관한 죄목은 하나도 내놓지 않았습니다.」사도행전 25:18 · 본디새김
베스도는 그토록 강력하게 고발당한 사람에게서 중대한 범죄를 예상했던 듯합니다. 그런데 실제 재판에서 드러난 쟁점은 그의 예상과 달랐습니다. 그가 무엇을 이해하지 못했는지를 19절이 보여줍니다.
조금 더 깊이
아그립바는 헤롯 아그립바 2세입니다. 사도행전 12장에서 예루살렘 교회를 박해했던 헤롯 아그립바 1세의 아들이며, 버니게는 그의 누이입니다. 앞 장에 등장한 벨릭스의 아내 드루실라 역시 그의 누이였습니다. 그는 로마의 후원을 받는 통치자로, 유대 지역 전체를 다스리는 총독은 아니었지만 성전과 대제사장 임명에 관련된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유대 고대사》 20권은 그가 대제사장을 임명하거나 교체한 일들을 기록합니다.
「죽은 예수라는 사람」 — 로마 총독이 이해한 복음의 핵심
사도행전 25장에서 가장 깊이 살펴볼 문장은 19절입니다.
「도리어 자기들의 종교를 두고, 그리고 죽은 예수라는 사람을 두고 바울과 따지는 일이 몇 가지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가 살아 있다고 주장했습니다.」사도행전 25:19 · 본디새김
베스도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 부활이 무엇을 뜻하는지 길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사건을 외부인의 관점에서 요약할 뿐입니다. 그가 이 논쟁을 자기 영역 밖의 종교 문제로 보고, 로마 법정에서 판단할 만한 정치적 범죄로 파악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그의 설명에는 이상하리만큼 정확한 대목이 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은 이미 죽으신 한 사람이십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께서 살아 계시다고 주장합니다. 이 짧은 문장에 바울이 증언하는 복음의 핵심이 들어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이 훌륭한 교사이셨다고만, 좋은 가르침을 남기셨으므로 따라야 한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죽으셨던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살아 있다’는 주장은 예수님이 실제로 죽지 않으셨다는 뜻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의 앞선 증언들은 예수님이 죽임을 당하셨으며 하나님이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고 선포합니다(2:23-24; 3:15; 13:28-30). 바울이 주장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누가는 이 대조를 길게 해설하지 않고 한 문장에 두 입장을 나란히 놓습니다. 베스도에게 예수님은 과거에 죽으신 사람이십니다. 바울에게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자신의 삶을 이끄시는 분이십니다.
이 차이는 단순한 의견 차이로 끝나지 않습니다.
만약 바울이 잘못 알고 있다면,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이방 사람들에게 보내졌다는 증언도 그 근거를 잃습니다. 반대로 예수님이 실제로 살아나셨다면, 바울의 메시지는 죽으신 한 사람을 기념하는 종교적 운동의 가르침이 아니라 살아 계신 주님이 역사 속에서 행동하고 계신다는 증언입니다. 로마 총독에게는 사소한 종교적 논쟁처럼 보이는 것이 바울에게는 자신의 모든 사명과 연결된 문제입니다.
총독은 ‘살아 있다’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베스도가 바울의 주장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해서, 부활이라는 개념 자체를 전혀 몰랐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바울이 무엇을 주장하는지는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주장을 로마의 법적 사건으로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지는 확신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나는 이런 일을 어떻게 조사해야 할지 몰라, 그에게 예루살렘으로 가서 거기서 이 일을 두고 재판받을 뜻이 있는지 물었습니다.」사도행전 25:20 · 본디새김
이 난처함은 법적 판단 능력의 전반적인 부족이라기보다, 그가 예상했던 범죄 혐의와 실제 쟁점 사이의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가 기대한 것은 처벌할 수 있는 구체적인 불법행위였지만, 그가 마주한 것은 죽으신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베드로와 스데반과 바울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증언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로마 총독의 입에서 그 증언의 핵심이 간접적으로 전달됩니다. 베스도 자신은 부활을 믿는다고 말하지 않지만, 부활의 소식이 로마의 행정과 재판을 담당하는 사람들의 대화 속에도 등장한 것입니다.
베스도가 바울을 황제의 판단 때까지 구금하도록 했다고 설명하자, 아그립바가 뜻밖의 말을 합니다. 「나도 그 사람의 말을 들어 보고 싶다.」(22절) 베스도는 내일 들으실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에게 또 하나의 증언 기회가 열립니다. 이번에는 총독뿐 아니라 왕도 그의 말을 듣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19절의 「자기들의 종교」에 해당하는 단어(δεισιδαιμονία)는 데이시다이모니아입니다. 이 단어는 신들에 대한 경외와 종교적 행위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문맥에 따라 지나친 종교적 두려움이나 미신을 뜻하기도 하며, 고대 그리스어에서 그 평가적 뉘앙스는 일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베스도가 유대교를 경멸하며 미신이라고 불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유대의 종교적 사정에 익숙한 아그립바 왕에게 설명하는 자리라는 점을 고려하면, 비교적 중립적인 표현으로 이해할 여지도 있습니다.
「한껏 위세를 갖추고」 — 왕들과 고관들 앞에 선 죄수
이튿날의 장면은 이전 재판과 분위기가 다릅니다.
그래서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한껏 위세를 갖추고 와서, 천부장들과 도시의 이름난 이들과 함께 청문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베스도가 명하자 바울이 끌려 나왔다.사도행전 25:23 · 본디새김
왕과 고관들은 위세를 갖추어 들어옵니다.
바울은 명령에 따라 끌려 나옵니다.
같은 청문실에 있지만, 한쪽에는 정치적 권력과 사회적 명예가 있고 다른 쪽에는 구금된 한 사람이 있습니다. 「한껏 위세를 갖추고」는 외적으로 드러나는 모습이나 화려한 과시를 뜻할 수 있는 말로, 왕과 버니게가 위엄과 화려함을 갖추어 등장했다는 의미입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이 아나니아에게 하신 말씀(9:15)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 주님은 바울이 자신의 이름을 이방 사람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도록 선택된 그릇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바울은 왕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왕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왕이 그의 말을 듣고 싶어 했고 총독이 명령했기에 죄수로서 끌려 나온 것입니다.
바울을 억압하는 제도가 동시에 그의 증언을 더 높은 권력의 자리로 가져가는 통로가 됩니다.
물론 이것이 로마의 구금 제도가 선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이 부당하게 구금되어 있다는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 부당한 상황 속에서 바울이 이전에는 쉽게 만날 수 없었을 사람들 앞에 서게 되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한때 도시와 회당에서 들리던 그의 이야기가 이제 왕과 총독과 군 지휘관들이 모인 청문실에서 들리게 됩니다.
그런데 바울이 입을 열기 전에 베스도가 먼저 사람들에게 설명합니다. 그 설명은 이 장의 마지막 역설을 드러냅니다.
「적어 보낼 확실한 것이 나에게 없습니다」 — 황제에게 보내야 하지만 설명할 수 없는 사건
베스도는 먼저 모인 사람들에게 바울을 소개합니다.
베스도가 말했다. 「아그립바 왕이여,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신 여러분 모두, 여러분이 보시는 이 사람을 두고 유대 사람들의 온 무리가 예루살렘에서도 여기서도 나에게 호소했습니다. 그가 더는 살아 있어서는 안 된다고 소리쳤습니다.」사도행전 25:24 · 본디새김
「유대 사람들의 온 무리」라는 표현을 모든 유대 사람이 바울의 죽음을 요구했다는 역사적 진술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베스도의 말은 자신에게 가해진 고발과 압박을 요약하는 발언입니다. 바울의 죽음을 요구했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모든 유대 사람이 동일한 입장을 가졌다고 사도행전이 말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가 죽을 만한 일을 하나도 하지 않은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이 존엄하신 분에게 상소했으므로 그를 보내기로 정했습니다.」사도행전 25:25 · 본디새김
이 말에는 앞의 모든 장면이 집약되어 있습니다. 고발자들은 많고 중대한 죄목을 제기했지만, 베스도는 사형에 해당할 만한 죄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상소했으므로 이제 그를 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문제가 드러납니다.
「그를 두고 주인님께 적어 보낼 확실한 것이 나에게 없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앞에, 무엇보다 아그립바 왕이시여, 왕 앞에 그를 데려왔습니다. 따져 물은 뒤에 적을 내용을 가지려는 것입니다.」사도행전 25:26 · 본디새김
「주인님」은 로마 황제를 가리킵니다. 총독이 황제에게 죄수를 보내려면 그가 어떤 혐의로 재판을 받아야 하는지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고발은 있었지만 입증되지 않았고, 종교적 논쟁은 있었지만 그것이 어떤 로마법상의 범죄인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는 새로운 재판이라기보다, 황제에게 보낼 사건 보고에 필요한 내용을 확보하려는 청문의 성격을 지닙니다.
그는 총독입니다. 바울을 재판석에 세웠고, 고발자들의 말과 바울의 변론을 들었고, 아그립바 왕에게 사건을 설명할 만큼 내용을 파악했습니다. 그러나 황제에게 적어 보낼 확실한 죄목이 없습니다.
「갇힌 사람을 보내면서 그를 두고 하는 고발을 함께 적지 않는 것은 나에게 이치에 맞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5:27 · 본디새김
누가는 베스도를 무능한 인물로 조롱하는 데 집중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난처함을 통해 바울의 사건이 어떤 성격을 지니는지 보여줍니다. 고발자들은 바울이 죽어야 한다고 주장하고, 총독은 그가 죽을 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고 판단하면서도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고 황제에게 넘깁니다.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세상의 법적 판단 사이의 긴장이 여기서 드러납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지점에서 누가복음의 한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유죄 사유를 찾지 못했다고 말하고(눅 23:4), 헤롯에게 보낸 뒤에도 예수님이 죽을 만한 일을 하지 않으셨다고 판단하지만(23:14-15, 22), 무리의 계속된 요구에 따라 결국 예수님을 넘겨줍니다(23:23-25). 두 장면은 서로 직접 인용 관계에 있지는 않지만, 누가의 두 책을 함께 읽는 독자에게 분명한 주제적 연결을 보여줍니다. 다만 차이도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유죄를 입증할 수 없다는 판단에도 죽음에 넘겨지셨지만, 바울은 로마 시민권과 상소 절차를 통해 황제에게 보내질 길을 확보합니다. 그래도 두 이야기에서 같은 질문이 반복됩니다. 사람들이 강하게 요구한다고 해서 그 요구가 정의로운가, 죄가 없음을 아는 재판관이 정치적 압박 앞에서 어떻게 행동하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 가운데 이루신 구원은 그분의 부활을 증언하는 사도들의 삶을 통해 권력자들의 판단을 받는 자리까지 들어갑니다.
무엇이라고 적어 보내야 하는가
이 장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직접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이 장의 중심에 계십니다.
로마 총독은 바울의 믿음을 공유하지 않지만, 바울의 사건을 설명하려면 예수님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발자들은 바울을 처벌하려 하고, 베스도는 사건을 정리하려 하며, 아그립바는 바울의 말을 들어 보고 싶어 합니다. 그 모든 행동 속에서 계속 제기되는 질문은 죽으신 예수님이 정말 살아 계시냐는 것입니다.
이 장에는 카이사르가 여러 번 등장합니다. 바울은 로마의 법적 질서를 이용하고 황제에게 상소하는 절차를 거부하지 않지만, 그 질서가 자신의 사명을 부여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로마 황제와 예수님이 같은 종류의 권력을 놓고 경쟁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로마의 재판은 바울이 법을 어겼는지 판단할 수 있지만, 베스도의 무죄 판단이 예수님의 부활을 입증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는 그 구별을 유지하면서도, 부활의 증언이 제국의 중심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위해 고난받으면서도 불공정한 절차를 당연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자신을 다른 사람의 정치적 이익을 위한 수단으로 넘겨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공회 앞에서도, 총독 앞에서도, 이제 왕 앞에서도 같은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합니다. 청중에 따라 설명은 달라질 수 있어도, 그가 증언하는 예수님은 달라지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좋은 가치와 윤리적 교훈만으로 다 설명됩니까, 아니면 실제로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에 대한 증언이 그 중심에 있습니까? 사도행전 25장에서 바울의 사건을 끝내 설명하기 어렵게 만드는 것은 바로 후자의 주장입니다.
청문실에는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 로마 총독 베스도와 천부장들, 도시의 이름난 인사들이 화려한 위세를 갖추고 모여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바울을 심문할 권한이 있지만, 그가 죽을 만한 죄를 지었다는 근거는 찾지 못했습니다. 반면 바울에게는 자신을 풀어 줄 권력이 없습니다. 그는 명령에 따라 청문실로 끌려 나온 사람입니다.
베스도의 말이 끝납니다. 아그립바 왕은 이제 바울의 이야기를 직접 들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아직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왕과 총독과 고관들이 기다리는 청문실 한가운데, 자신이 왜 죽어야 하는지 설명할 죄목조차 확정되지 않은 한 사람이 서 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의 입에서 다시 이야기될 이름은, 베스도가 이미 언급했던 바로 그 이름입니다.
죽으신 예수님.
바울이 살아 계신다고 증언하는 그분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