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24장

이 장의 자리 · 21–26장 · 붙잡힌 바울

심판을 미루는 재판관

사도행전 24장에는 두 개의 시간이 등장합니다.

하나는 열이틀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지 열이틀이 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 짧은 기간에 자신이 소요를 일으키거나 성전을 더럽혔다는 고발을 입증할 증거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실제로 고발자들은 바울의 잘못을 입증할 직접적인 증인을 제시하지 못합니다.

다른 하나는 두 해입니다.

장의 마지막에서 누가는 두 해가 흘렀다고 기록합니다. 벨릭스는 바울의 사건을 해결하지 않은 채 후임자에게 넘기고, 바울은 여전히 결박된 사람으로 남습니다.

열이틀 동안 저질렀다고 주장되는 죄를 두고, 두 해가 지나도록 제대로 된 결론이 내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 긴 시간의 한가운데에는 로마 총독 벨릭스가 있습니다.

그는 고발하는 사람들의 말도, 바울의 변론도 듣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그 길」에 대해서도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고, 나중에는 아내와 함께 바울을 불러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를 듣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바울이 의와 절제와 앞으로 올 심판에 대해 이야기하자 벨릭스는 겁을 먹고 「지금은 가거라. 틈이 나면 너를 다시 부르겠다」고 대답합니다.

이 말은 이 장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가 됩니다.

벨릭스는 다른 사람의 사건을 심리하고 판단해야 하는 재판관입니다. 그러나 그는 바울에게서 자신도 언젠가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때 벨릭스가 내린 결정은 무엇일까요?

판단을 미루는 것입니다.

그는 이후에도 바울을 여러 번 불러 이야기를 나눕니다. 시간이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들은 이야기에 합당하게 응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장의 가장 깊은 역설은 다른 사람을 재판할 권력을 가진 사람이 정작 자신에게 들려온 진실 앞에서는 판단을 미루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 앞에 서 있는 바울은 죄수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 죄수뿐 아니라 재판관의 삶까지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세웁니다.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924장 본문 읽기 →

「이 사람은 돌림병 같은 자이고」 — 고발자들이 만들어 낸 바울의 모습

사도행전 24:1–9 본문 →

바울이 가이사랴로 옮겨진 뒤 닷새가 지나자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장로 몇 사람과 더둘로라는 변론가를 데리고 내려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분노를 그대로 쏟아 내지 않고, 변론가를 앞세워 로마의 재판 절차에 맞는 고발을 준비합니다.

더둘로가 처음 꺼낸 말은 바울에 대한 고발이 아닙니다.

벨릭스에 대한 찬사입니다.

바울이 불려 나오자 더둘로가 고발하기 시작하며 말했다. 「우리는 그대 덕분에 큰 평화를 누리고 있고, 그대의 살핌으로 이 민족을 위한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사도행전 24:2 · 본디새김

이러한 서두는 권력자 앞에서 호의를 얻기 위한 법정 수사의 성격을 지닙니다. 고발의 내용을 제시하기 전에 재판관의 업적을 칭송하여 우호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찬사를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나란히 놓으면 묘한 긴장이 생깁니다. 「큰 평화」라는 말은 당시의 현실을 객관적으로 평가한 진술이라기보다 재판관의 호의를 얻으려는 표현으로 읽는 것이 적절합니다.

더둘로는 본론으로 들어가 바울을 세 가지로 고발합니다. 그는 온 세상의 유대 사람들 사이에 소요를 일으키는 사람이고, 나사렛 사람들로 이루어진 갈래의 우두머리이며, 성전까지 더럽히려 했다는 것입니다.

소요를 일으킨다는 고발은 로마의 질서에 대한 위협입니다. 지역의 안정과 치안은 로마 총독에게 중요한 통치 문제였으므로 이 혐의는 특별한 무게를 지닙니다. 갈래의 우두머리라는 말은 바울을 유대 공동체 안에서 논쟁적인 종교 집단의 지도자로 규정하고, 성전을 더럽히려 했다는 고발은 유대 사람들에게 신앙적으로 중대한 문제입니다. 더둘로는 이렇게 로마의 정치적 관심과 유대 공동체의 종교적 관심을 하나의 고발 속에 묶습니다.

특히 5절의 첫 표현이 강렬합니다. 「이 사람은 돌림병 같은 자이고.」 본래 역병을 뜻하는 이 말은 사람을 가리킬 때 공동체에 해악을 끼치는 위험한 인물이라는 모욕이 됩니다. 더둘로는 바울이 어떤 구체적인 범죄를 저질렀는지 입증하기 전에, 그 사람 자체를 사회에 해로운 존재로 규정합니다. 「온 세상의 모든 유대 사람들 사이에」라는 표현도 바울의 활동 범위를 과장하여 광범위한 정치적 위험을 암시합니다.

누가는 바울이 실제로 여러 도시에서 소동에 휘말렸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는 빌립보와 데살로니가와 에베소 등에서 일어난 갈등이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소동이 일어났다는 사실과 바울이 그 소동을 일으킨 범죄자라는 주장은 구별해야 합니다.

더둘로의 고발은 바로 그 구별을 흐리게 만듭니다.

「나사렛 사람들로 이루어진 갈래」

5절의 「갈래」는 어떤 사상이나 입장을 따르는 집단, 분파를 가리킬 수 있는 말입니다. 더둘로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유대 공동체 안의 한 갈래로 규정합니다. 그렇게 하면 바울의 활동을 종교적 분파의 문제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뒤 바울은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다른 이름으로 부릅니다. 「그 길.」 이 두 이름의 차이는 이 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성전을 더럽히려 했다는 고발에서도 더둘로는 바울이 무엇을 구체적으로 했는지, 누가 그것을 목격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앞서 기록된 사건에서도 바울이 이방 사람을 성전 안으로 데려왔다는 고발은 확인된 사실이 아니라 추정에서 출발했습니다(21:28-29). 대신 더둘로는 「우리가 그를 붙잡았다」는 사실을 제시합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붙잡았다는 사실은 그가 실제로 범죄를 저질렀다는 증거가 아닙니다.

9절에서 다른 고발자들이 함께 그의 말이 사실이라고 주장합니다. 이제 바울의 차례입니다.

조금 더 깊이

1세기 유대 역사가는 《유대 고대사》 20권 8장에서 벨릭스가 다스리던 시기의 폭력과 소요를 기록하고, 대제사장 요나단의 암살에 벨릭스가 관여했다는 이야기도 전합니다. 다만 이 서술 역시 고대 역사가의 기록이라는 성격을 고려해야 합니다. 「돌림병」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로이모스(λοιμός)입니다. 「갈래」는 그리스어 하이레시스(αἵρεσις)인데, 이 단어 자체가 언제나 현대적인 의미의 ‘이단’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은 바리새파와 사두개파를 가리킬 때에도 같은 계열의 표현을 사용합니다(5:17; 15:5; 26:5). 중요한 것은 누가 그 이름을 붙였는가 하는 점입니다. 또 6절의 「우리 율법에 따라 그를 재판하려 했습니다」와 8절의 진술은 사본 전승에 차이가 있는 곳입니다. 일부 사본에는 6절 후반부터 8절 전반까지 덧붙은 대목이 있지만, 주요 알렉산드리아 사본과 비평본은 그 전체를 싣지 않습니다. 제공된 본문은 그 가운데 특정 본문 형태를 따르되 7절을 싣지 않았고, 이 차이 때문에 고발이 중단되는 경위에 대한 문장 연결도 전승마다 다릅니다. 그러나 어느 본문 형태를 따르든, 더둘로가 로마 총독에게 바울을 위험한 인물로 보이게 하려 한다는 고발의 성격은 분명합니다.

「증거를 제시하지도 못합니다」 — 바울은 무엇을 변론하는가

사도행전 24:10–13 본문 →

바울은 더둘로처럼 총독의 업적을 길게 칭송하지 않습니다.

총독이 말하라고 고갯짓하자 바울이 대답했다. 「저는 그대가 여러 해 동안 이 민족의 재판관으로 있어 온 것을 알기에 기꺼이 저에 관한 일을 두고 변론합니다.」사도행전 24:10 · 본디새김

바울도 총독의 지위와 경험을 인정하지만, 그의 말은 확인 가능한 사실에 근거를 둔 짧은 서두입니다. 그런 다음 곧바로 시간과 장소와 증거의 문제로 들어갑니다.

「그대가 확인할 수 있겠지만, 내가 예루살렘에 절하러 올라간 지 열이틀이 넘지 않았습니다.」사도행전 24:11 · 본디새김

이 말은 단순한 일정 소개가 아닙니다.

더둘로는 바울을 온 세상에 소요를 일으키는 사람이라고 고발했습니다. 이에 대해 바울은 지금 재판받는 사건이 일어난 예루살렘에서 자신이 무엇을 했는지부터 따져 보자고 합니다.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막연한 평가를 반박하기보다, 고발한 행동이 실제로 일어났는지 입증하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12절에서 그는 장소를 하나씩 열거합니다. 성전에서도, 회당에서도, 도시 안에서도. 예루살렘에서 종교적 활동과 공적 갈등이 일어날 수 있는 주요 공간들 어디에서도 무리를 모아 소요를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13절에서 고발자들의 가장 큰 약점을 지적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 나를 두고 고발하는 일에 대한 증거를 그대에게 제시하지도 못합니다.」사도행전 24:13 · 본디새김

어떤 사람에 대해 강한 반감을 품고 있다는 사실은 그 사람의 범죄를 입증하지 못합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고발한다는 사실만으로 그 고발이 진실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고발자들은 바울이 어떤 사람인지 규정하려 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 확인하자고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모든 것을 부인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것은 그대에게 시인합니다」 — 부인하지 않는 믿음

사도행전 24:14–16 본문 →

「다만 이것은 그대에게 시인합니다. 그들이 갈래라고 부르는 그 길을 따라 나는 조상들의 하나님을 예배하고, 율법에 따른 모든 것과 예언서에 적힌 모든 것을 믿습니다.」사도행전 24:14 · 본디새김

바울은 소요를 일으켰다는 혐의는 부인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는 사실은 숨기지 않습니다. 더둘로가 사용한 「갈래」와 바울이 사용하는 「그 길」이 한 문장 안에서 만납니다. 다른 사람들이 붙인 이름과 자신이 인정하는 이름을 구별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따르는 길이 조상들의 하나님을 예배하고 율법과 예언서를 믿는 삶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이스라엘의 하나님에게서 분리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자신이 성전과 율법을 거스른다는 고발에 대한 중요한 대답입니다.

다만 바울의 주장이 곧 모든 유대 사람이 예수님에 대한 그의 해석에 동의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스라엘의 성경을 믿는다고 주장하지만, 그 성경이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이루어졌는가에 대해서는 다른 사람들과 근본적인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차이가 15절에서 나타납니다.

「나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의로운 이들과 의롭지 않은 이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소망입니다. 이 사람들 자신도 이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립니다.」사도행전 24:15 · 본디새김

이번에는 앞 장의 공회에서처럼 단순히 죽은 이들의 부활만 말하지 않습니다. 부활은 의로운 사람들이 다시 살아나 상을 받는 일만이 아니라, 의롭지 않은 사람들까지 하나님의 판단 앞에 서게 되는 미래와도 연결됩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소망에는 하나님이 죽음을 넘어 인간의 삶을 판단하신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불의한 사람이 이 세상에서 권력을 누리다가 죽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억울하게 고난받은 사람이 죽었다는 이유로 그의 삶이 의미 없이 사라지는 것도 아닙니다.

「의로운 이들과 의롭지 않은 이들」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판단이 바울 자신과 그를 고발하는 사람들, 그리고 지금 재판관으로 앉아 있는 벨릭스까지 모두에게 관련된다는 사실을 생각하게 합니다. 법정에서 누가 누구를 재판하고 있는지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마지막 판단 앞에서는 누구도 예외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 부활의 소망이 양심으로 이어지다

「그래서 나 자신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늘 거리낌 없는 양심을 지니려고 힘씁니다.」사도행전 24:16 · 본디새김

‘그래서’라는 연결을 놓치면 이 말씀을 일반적인 윤리적 다짐으로 읽기 쉽습니다. 바울은 의로운 이들과 의롭지 않은 이들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거리낌 없는 양심을 지니려고 힘쓴다고 말합니다. 부활의 소망은 먼 미래에 대한 기대에 머무르지 않고, 현재의 삶을 바꾸는 이유가 됩니다.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라는 두 관계를 함께 말합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신앙과 사람들 앞에서의 행동을 나누지 않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바울은 동시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살펴야 하는 사람입니다.

부활의 소망은 현재의 삶을 가볍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삶에 더욱 깊은 책임을 부여합니다.

그런데 이 말이 재판관 벨릭스 앞에서 선포되고 있습니다. 지금은 벨릭스가 바울의 사건을 심리하지만, 바울이 고백하는 부활의 소망 안에서는 벨릭스도 하나님의 공의 밖에 있지 않습니다. 이 의미는 조금 뒤, 그가 의와 절제와 앞으로 올 심판에 관한 말씀을 들었을 때 비로소 선명해집니다.

조금 더 깊이

15절의 소망은 다니엘 12:2의 부활 본문과 주제적으로 이어집니다. 다니엘은 땅의 티끌 가운데 잠든 사람들이 깨어나 어떤 이는 영원한 생명으로, 어떤 이는 수치와 영원한 부끄러움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다니엘서의 본래 문맥은 박해와 고난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최종적인 구원과 공의로운 판단을 기다리는 자리입니다.

「내 민족에게 자선을 베풀고」 — 고발 내용과 정반대의 행동

사도행전 24:17–21 본문 →

바울은 이제 자신이 예루살렘에 온 이유를 설명합니다.

「여러 해 만에 나는 내 민족에게 자선을 베풀고 바침을 드리려고 왔습니다.」사도행전 24:17 · 본디새김

고발자들은 바울이 유대 사람들 사이에 소요를 일으키고 성전을 더럽히려 했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기 민족을 해치려고 온 것이 아니라, 그들을 돕고 하나님께 바침을 드리려고 왔다고 말합니다.

이 자선이 바울 서신에 나오는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한 연보를 가리키는지는 충분히 가능한 해석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본문은 이 자선이 정확히 누구에게 전달되었는지, 어떤 과정을 통해 모였는지 설명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가 성전에서 행한 일도 고발 내용과 다릅니다.

「그 일을 하고 있을 때에 어떤 이들이 성전에서 정결하게 된 나를 보았습니다. 나는 무리와 함께 있지 않았고, 소동도 없었습니다.」사도행전 24:18 · 본디새김

정결하게 되었다는 표현은 앞서 21:26에 기록된 성전 정결 의식과 연결됩니다. 바울은 성전을 모독하기 위해 그곳에 들어간 것이 아니라, 정결 의식에 참여한 상태로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그가 성전을 더럽혔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그 장면을 실제로 목격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들은 아시아에서 온 몇몇 유대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나를 상대로 고발할 거리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대 앞에 와서 고발해야 마땅했습니다.」사도행전 24:19 · 본디새김

이들은 21:27에서 바울을 성전에서 보고 무리를 선동했던 아시아 출신 유대 사람들과 연결됩니다. 처음 사건을 직접 보았다고 주장할 수 있는 사람들이 정작 총독 앞에 나와 고발 내용을 입증하고 있지 않습니다. 더둘로가 바울을 위험한 인물이라고 부른 것과 달리, 바울은 고발이 시작된 구체적인 사건으로 재판의 초점을 돌립니다.

그리고 20절에서 여기 있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공회 앞에 섰을 때 무슨 잘못을 찾아냈는지 말해 보라고 합니다. 공회는 부활 문제를 두고 갈라졌을 뿐입니다.

「내가 그들 가운데 서서 외친 이 한마디 말고는 그들이 찾아낸 잘못이 없습니다. 『죽은 이들의 부활 문제로 내가 오늘 여러분 앞에서 재판을 받습니다.』」사도행전 24:21 · 본디새김

바울은 성전 모독 혐의를 반박하고, 소요를 일으켰다는 주장에 증거가 없음을 지적한 뒤, 마지막에 부활의 문제로 돌아옵니다. 그가 예루살렘에서 소동에 휘말렸다는 사실과 로마 법정에서 처벌받아야 할 범죄를 저질렀다는 주장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갈등의 한가운데에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자신의 증언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지도 않습니다.

그에게 부활은 재판을 피하기 위한 변명이 아닙니다. 고발자들과 자신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제 판단해야 할 사람은 벨릭스입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은 다른 서신에서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돕기 위한 연보를 이야기합니다. 로마서 15:25-27에서는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기쁘게 기여했다고 말하고, 고린도전서 16:1-4에서는 예루살렘으로 보낼 연보를 준비하도록 지시합니다. 이방 사람들 가운데 세워진 교회들이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돕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다른 민족의 사람들이 하나의 공동체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 주는 행동이었고, 바울은 로마서 15:27에서 이방 사람들이 유대 사람들의 영적인 것에 참여했으므로 물질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다고 설명합니다. 사도행전 24:17의 자선을 이 연보와 동일한 사건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널리 있지만, 사도행전의 서술만으로 동일성을 입증하기 어렵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 길에 관하여 더 자세히 알고 있었으므로」 — 알고도 미루는 재판관

사도행전 24:22–23 본문 →

벨릭스는 재판을 미룹니다.

벨릭스는 그 길에 관하여 더 자세히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재판을 미루어 두었다. 그가 말했다. 「천부장 루시아스가 내려오면 너희 사건을 판정하겠다.」사도행전 24:22 · 본디새김

벨릭스는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즉시 재판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길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면서도 사건을 연기합니다.

이 결정에는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천부장 루시아스는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붙잡혔을 때 개입한 사람이므로, 그의 설명을 듣는 것은 적절한 절차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벨릭스가 여기서 단지 악의적으로 재판을 미뤘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루시아스가 실제로 내려와 증언했는지, 정식 재판이 다시 열렸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대신 벨릭스가 바울을 여러 번 불렀고, 돈을 받기를 바랐으며, 결국 바울을 결박된 상태로 남겨 두었다고 설명합니다. 처음의 재판 연기는 결국 오랫동안 해결되지 않는 사건으로 이어졌습니다.

벨릭스는 백부장에게 바울을 구금하되 얼마쯤 자유를 허용하고, 바울의 사람들이 그를 돌보는 일을 막지 말라고 명합니다. 바울은 외부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하고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가이사랴를 떠날 수 있는 자유인은 아니었습니다.

편의를 허용하는 것과 정당한 판단을 내리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벨릭스는 바울을 어느 정도 배려하면서도, 그 사건을 해결할 책임에서는 물러나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더 자세히’는 비교급이지만, 누구보다 더 자세히 알고 있었다는 것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고발자들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는 뜻일 수도 있고, 이 사건을 처음 접하는 일반적인 사람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그런 지식을 얻게 되었는지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아내 드루실라가 유대 사람이었다는 사실과 연결하는 견해도 있지만, 본문은 그 둘 사이의 인과관계를 직접 밝히지 않습니다.

「의와 절제와 앞으로 올 심판」 — 재판관이 두려워하기 시작하다

사도행전 24:24–25 본문 →

24절에서 법정의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벨릭스가 아내 드루실라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부릅니다. 그는 더 이상 바울에게 제기된 혐의만 심리하지 않고, 바울이 믿는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에 관하여 듣습니다. 누가는 바울이 복음을 어떤 순서로 설명했는지 기록하지 않고, 그의 가르침에서 세 가지 주제를 골라 남깁니다.

그가 의와 절제와 앞으로 올 심판을 두고 논하자 벨릭스는 겁이 나서 대답했다. 「지금은 가거라. 틈이 나면 너를 다시 부르겠다.」사도행전 24:25 · 본디새김

이 세 가지는 단순한 도덕 강연의 목록으로 보기 어렵습니다. 이 주제들은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등장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인간의 삶과 하나님의 판단에 어떤 관계를 맺는지 보여 주는 말씀으로 읽어야 합니다.

의 — 재판관도 공의 앞에 섭니다

바울이 이 자리에서 의를 어떻게 설명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듣는 사람이 누구인지는 분명합니다. 벨릭스는 다른 사람에게 정의로운 판단을 내려야 하는 재판관이고, 그가 심리하는 바울의 사건은 증거 없이 연기된 채 아직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의에 관한 말씀은 그에게 추상적인 종교적 개념으로만 들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절제 — 권력을 가진 사람도 자신의 욕망을 다스려야 합니다

절제는 자기 자신을 제어하는 능력, 특히 욕망과 충동을 다스리는 것을 가리킵니다. 벨릭스와 드루실라의 결혼 배경 때문에 바울이 절제를 말했을 때 벨릭스가 특별히 불편했으리라고 이해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충분히 가능한 해석이지만, 바울이 정확히 어떤 말을 했는지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가 결혼 문제를 직접 지적했다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절제라는 말은 성적인 문제에만 한정되지 않습니다. 돈에 대한 욕망, 권력의 사용, 자신의 이익을 앞세우는 행동도 절제의 문제와 연결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은 바로 다음 절에서 벨릭스가 바울에게 돈을 받기를 바랐다고 말합니다.

앞으로 올 심판 — 재판관보다 높은 재판

이 표현에서 앞의 두 주제가 하나로 모입니다. 벨릭스는 바울을 풀어 줄 수도, 계속 구금할 수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벨릭스의 권력이 최종적이지 않다고 말합니다.

그에게도 판단받을 날이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벨릭스를 위협할 수 있는 군대도, 정치적 권력도 없습니다. 그가 가진 것은 자신이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뿐입니다. 그럼에도 벨릭스는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곧 회개는 아닙니다.

그는 말씀을 더 듣지 않기로 결정합니다. ‘지금’은 아니고,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다시 부르겠다는 것입니다. 벨릭스는 재판관으로서 바울에게 지금 가라고 명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돌려보낸다고 해서 바울이 전한 앞으로 올 심판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벨릭스는 사람을 물러가게 할 수는 있지만, 하나님의 판단을 자신의 편의에 맞춰 미룰 수는 없습니다.

그가 겁을 먹은 정확한 이유를 누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불의한 행동을 떠올렸을 수도 있고, 하나님의 심판 자체를 두려워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느꼈음에도 말씀을 중단시켰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법정의 주제는 어느새 바울의 유무죄를 넘어 벨릭스 자신의 삶으로 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의’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ύνη)는 문맥에 따라 의로움, 올바름, 정의를 뜻할 수 있습니다. ‘절제’는 엥크라테이아입니다. 드루실라는 헤롯 아그립바 1세의 딸로, 원래 에메사의 왕 아지주스와 결혼한 사람이었습니다. 이후 벨릭스는 사람을 보내 드루실라가 남편을 떠나 자신과 결혼하도록 설득했고, 고대 유대 역사가는 이 결혼이 드루실라의 조상들이 지켜 온 법을 거스르는 일이었다고 평가합니다. 앞으로 올 심판은 사도행전 17:31과 연결됩니다. 거기서 바울은 하나님이 한 사람을 정하여 세상을 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으며, 그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확증을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24장은 그 연결을 같은 방식으로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그리스도 예수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하는 가운데 심판을 선포한다는 점에서 두 본문 사이에는 분명한 신학적 연결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을 단순히 심판의 위협으로 축소해서는 안 됩니다. 사도행전 13:38-39에서 바울은 예수님을 통해 죄 용서가 선포되며 믿는 사람이 그분 안에서 의롭게 된다고 전했습니다. 벨릭스에게 전해진 심판의 말씀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구원과 분리하여 이해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 장이 벨릭스에게 구원의 초청이 어떤 말로 전해졌는지까지 알려 주는 것은 아닙니다.

「돈을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 여러 번 들었지만 달라지지 않은 사람

사도행전 24:26 본문 →

벨릭스는 바울에게 나중에 다시 부르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합니다.

그러면서 바울이 자기에게 돈을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래서 더 자주 그를 불러 이야기를 나누었다.사도행전 24:26 · 본디새김

이 절은 앞의 장면을 다시 읽게 만듭니다. 잦은 만남을 순수한 종교적 관심의 결과로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벨릭스가 바울에게서 얻기를 기대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돈이었습니다.

절제에 대한 말씀을 들은 사람이 자신의 금전적 욕망을 드러내고, 의에 대한 말씀을 들은 사람이 자기에게 맡겨진 사건을 사적인 이익과 연결하려 합니다. 누가는 벨릭스가 실제로 뇌물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고, 돈을 받기를 바랐다고 말합니다. 실제 금품 수수 여부를 확정할 수는 없지만, 그 기대가 바울을 자주 불러들이는 이유였다는 것은 본문에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후 대화의 구체적인 내용도 본문은 알려 주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벨릭스가 매번 복음을 자세히 들었다거나, 반복해서 회개를 거부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만남들의 결과는 알 수 있습니다. 결국 그는 바울을 풀어 주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듣는 기회의 부족이 아니었습니다.

그에게는 바울의 사건을 판단해야 할 책임이 있었지만, 자신의 이익과 정치적 관계가 그 판단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누가는 바로 그 사실을 마지막 절에서 드러냅니다.

「유대 사람들의 환심을 사 두려고」 — 두 해가 지나도 내려지지 않은 판결

사도행전 24:27 본문 →

두 해가 찼을 때 벨릭스는 후임으로 보르기오 베스도를 맞았다. 그리고 유대 사람들의 환심을 사 두려고 바울을 묶인 채로 남겨 두었다.사도행전 24:27 · 본디새김

이 한 절에 긴 시간이 들어 있습니다.

두 해 동안 바울이 누구를 만났는지, 무엇을 가르쳤는지, 어떤 편지를 썼는지 이 장은 알려 주지 않습니다. 「두 해가 찼을 때」가 어디서부터 센 시간인지도 본문은 밝히지 않지만, 어느 쪽으로 읽든 사건이 해결되지 않은 채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벨릭스는 바울에게 어떤 죄가 있는지 새로운 증거를 발견했기 때문에 계속 구금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신이 다스리는 유대 사람들 가운데 영향력 있는 이들에게 호의를 얻으려 했습니다. 여기서 「유대 사람들」을 모든 유대인의 일치된 요구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야기의 문맥에서는 바울을 고발하는 유대 측 세력과 그들과 연결된 정치적 이해관계를 고려해야 합니다.

이 장의 첫머리에서 더둘로는 벨릭스의 훌륭한 통치와 평화를 칭송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누가가 보여주는 총독은 돈을 기대하며 바울을 자주 불렀고, 정치적 호의를 얻기 위해 바울을 결박된 상태로 남겨 둡니다. 그 결과 바울은 무죄 판결도, 유죄 판결도 받지 못한 채 후임 총독에게 넘겨집니다.

정의를 행하지 않기로 결정하는 것만이 불의는 아닙니다. 정의로운 판단을 계속 미루는 일도 한 사람의 삶을 부당하게 묶어 둘 수 있습니다.

재판관에게는 미뤄 둔 사건이었지만, 죄수에게는 계속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두 해가 찼을 때」는 바울이 구금된 뒤의 기간을 가리킨다는 해석이 일반적이지만, 벨릭스의 통치 기간과 연결하려는 견해도 있습니다. 본문의 표현 자체는 그 기산점을 명시하지 않습니다.

벨릭스가 떠난 뒤에도 — 누가 누구를 판단하는가

사도행전 24:1–27 본문 →

벨릭스가 떠나는 순간까지 바울에 대한 판결은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표면적으로는 벨릭스가 바울을 재판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의로운 이들과 의롭지 않은 이들의 부활을 고백하고 의와 절제와 앞으로 올 심판을 이야기하자, 재판관 자신이 더 높은 판단 앞에 서야 할 사람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바울이 벨릭스의 자리를 빼앗아 그를 심판하려 한 것은 아닙니다. 그가 한 일은 자신을 묶어 둘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 것이었습니다. 벨릭스는 진실을 들었지만 판단을 미루었고, 그가 미루는 동안 바울이 묶여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24장의 마지막 장면에는 떠나는 사람과 남겨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떠나는 사람은 벨릭스입니다. 그는 두 해가 찼을 때 후임 총독 보르기오 베스도를 맞고, 자신이 맡았던 권한을 내려놓고 그 자리를 떠납니다. 남겨지는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는 여전히 결박된 사람입니다.

누가는 벨릭스가 그 모든 시간을 어떻게 기억했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가 마지막으로 무엇을 했는지 기록합니다. 유대 사람들의 환심을 사 두려고 바울을 묶인 채로 남겨 둔 것입니다.

벨릭스에게 바울은 이제 다음 총독이 처리할 사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도, 그를 부르신 주님의 사명도 벨릭스의 임기와 함께 끝나지 않았습니다.

재판관은 떠났고, 죄수는 남았습니다.

가이사랴의 관저에는 새 총독이 들어옵니다. 바울은 여전히 그곳에 있습니다. 그를 묶어 두었던 사람이 떠난 뒤에도 결박은 풀리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직 아무도 최종적인 판결을 내리지 않은 그 사건이, 다음 재판관 앞에 놓여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