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23장

이 장의 자리 · 21–26장 · 붙잡힌 바울

곁에 서신 주님

사도행전 23장에서 바울은 거듭 죽을 위험에 처합니다.

처음에는 공회에서 다툼이 격해져 사람들이 그를 찢어 놓을까 두려운 상황에 이릅니다. 다음에는 마흔 명이 넘는 사람들이 그를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맹세합니다. 그 암살 계획이 실패하지 않았다면, 바울은 로마 군인들의 보호 아래서도 목숨을 잃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장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은 바울이 안전한 곳으로 옮겨진 뒤에 나오지 않습니다. 첫 번째 소동이 끝나고, 두 번째 위험이 시작되기 직전에 나옵니다. 그날 밤 주가 바울 곁에 서서 「굳세어라」 하고, 예루살렘에서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어떻게 위험을 피할지 알려 주지 않으십니다. 암살 계획도 미리 설명하지 않으십니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두 알려 주지 않으시지만, 그가 어디를 향해 가야 하는지는 알려 주십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23장을 읽는 열쇠입니다.

그 말씀 이후에도 바울은 여전히 죄수입니다. 이 장은 예수님께서 바울을 어떻게 위험에서 건져 내시는지, 그 구원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독자가 자세히 바라보게 합니다. 눈에 띄는 기적은 한 번의 말씀뿐입니다. 나머지는 한 젊은이의 제보, 군인들의 판단, 밤중의 행군, 그리고 로마 관리의 공식 편지입니다.

그 평범하고 복잡한 일들 사이에서 예수님의 약속은 앞으로 나아갑니다.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923장 본문 읽기 →

「선한 양심으로 살아왔습니다」 — 재판하는 사람이 먼저 율법을 어기다

사도행전 23:1–5 본문 →

바울이 공회원들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형제 여러분, 나는 오늘까지 어떤 일에서나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왔습니다.」사도행전 23:1 · 본디새김

이 말은 뜻밖입니다.

바울은 이미 자신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했고,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찬동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선한 양심으로 살아왔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 잘못된 과거까지 포함하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믿는 것을 따라 살아왔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행동이 옳다고 믿는 것과 실제로 옳은 것은 같은 일이 아닙니다. 그는 과거에 하나님을 섬긴다는 확신으로 사람들을 박해했고, 지금은 같은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을 증언합니다. 그 사이에 변화한 것은 양심의 중요성이 아니라,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에 대한 이해입니다. 그러므로 1절은 양심이 언제나 옳다는 선언이라기보다, 바울이 자신의 삶을 하나님 앞에 놓고 있다는 진술로 읽는 편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그 말을 듣고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합니다.

아직 바울의 말이 제대로 검토되지도, 고발의 구체적인 내용이 가려지지도 않았습니다. 율법에 따라 재판해야 할 자리에 앉은 사람이 먼저 폭력을 명령합니다.

그때 바울이 그에게 말했다. 「하나님이 그대를 치실 것입니다, 회칠이 된 담이여. 그대는 앉아서 율법에 따라 나를 재판하면서, 율법을 어기며 내가 매 맞도록 명하는 것입니까?」사도행전 23:3 · 본디새김

회칠한 담은 겉으로는 반듯하고 깨끗하게 보일 수 있지만, 회칠이 담의 실제 상태를 바꾸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율법의 권위를 내세우면서 그 율법을 어기는 재판관의 모순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을 때렸다는 사실만으로 항의하지 않습니다. 재판하는 자가 자기 재판의 근거인 율법을 어겼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그런데 곁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욕하느냐?」 하고 꾸짖습니다. 이 말로 상황이 뒤집힙니다. 대제사장이 율법을 어겼다고 항의한 바울이, 이제 자신이 율법을 어긴 사람처럼 지적받습니다.

바울이 말했다. 「형제 여러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몰랐습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은 『네 백성의 지도자를 욕하지 마라』고 적혀 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3:5 · 본디새김

바울은 정말 아나니아가 대제사장인 줄 몰랐을까요?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수도 있고, 그 자리에 누가 대제사장으로 앉아 있는지 몰랐을 수도 있습니다. 또는 그런 행동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대제사장일 수 있겠느냐는 반어적 표현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본문은 어느 경우인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바울이 출애굽기 22:28을 인용한다는 사실입니다. 그가 지나친 표현을 거두어들이는 것인지, 직책에 대한 존중을 밝히는 것인지, 반어적인 대답인지를 완전히 결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가 율법의 권위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대답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율법을 근거로 부당한 권력을 비판하면서, 동시에 그 율법이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이 장면의 핵심은 바울이 언제나 침착하고 완벽하게 행동했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선한 양심을 말하는 사람조차 자신의 발언을 율법의 말씀 아래 놓아야 한다는 데 있습니다.

바울은 이제 공회 내부의 더 근본적인 갈림을 드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에스겔 13:10-15에는 부실한 담을 회칠하여 안전한 것처럼 보이게 하는 거짓 예언자들이, 마태복음 23:27에는 겉은 아름답지만 속은 죽음으로 가득한 회칠한 무덤이 나옵니다. 두 본문은 겉모습과 실제 상태의 차이라는 점에서 바울의 말과 연결될 수 있지만, 23:3이 어느 본문을 직접 인용한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고 「회칠이 된 담」이라는 모욕적 표현의 정확한 배경에도 해석상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5절을 두고 바울의 시력에 문제가 있어서 알아보지 못했다는 견해도 있으나, 이 구절만으로 입증할 수 없습니다.

「나는 소망과 죽은 이들의 부활을 두고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 — 공회를 갈라놓은 한마디

사도행전 23:6–10 본문 →

바울은 공회원들 가운데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립니다.

바울은 한쪽이 사두개파이고 다른 쪽이 바리새파인 것을 알고 공회에서 외쳤다. 「형제 여러분, 나는 바리새파 사람이고 바리새파 사람들의 아들입니다. 나는 소망과 죽은 이들의 부활을 두고 재판을 받고 있습니다.」사도행전 23:6 · 본디새김

이 말은 즉시 효과를 일으킵니다. 두 파 사이에 다툼이 일어나고, 공회가 갈라집니다.

앞서 바울이 받았던 고발의 중심에는 율법과 성전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자신이 재판받는 이유를 죽은 사람들의 부활이라고 규정합니다. 이 발언에는 전략적인 성격이 있습니다. 6절은 바울이 공회의 구성을 알고 말했다고 명시하며, 그가 두 파가 서로 다투게 되리라는 사실을 예상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부활이 바울의 사건과 무관한 구실이라고 볼 수는 없습니다. 바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만났다고 증언한 분은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입니다. 바울에게 부활은 많은 종교적 주장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그의 증언 전체가 서 있는 기초입니다.

「소망」이라는 단어도 그래서 중요합니다. 바울은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철학적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이 죽음으로 끝난 것처럼 보이는 인간의 삶에 다시 행동하실 것이라는 이스라엘의 소망을 이야기합니다. 다니엘 12:2는 땅의 티끌 가운데 잠든 많은 사람이 깨어나 어떤 이는 영원한 생명으로, 어떤 이는 수치와 영원한 부끄러움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부활은 죽음과 폭력이 마지막 판결을 내리도록 하나님이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소망과 연결됩니다.

바울은 그 소망이 예수님 안에서 결정적으로 드러났다고 증언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죽은 이들의 부활을 믿었지만, 나사렛 예수님께서 이미 살아나셨다는 주장까지 받아들였던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같은 부활의 소망을 말하면서, 그 중심에 예수님의 부활을 놓습니다. 이 점에서 바울의 말은 재판을 피하기 위한 술책으로만 환원할 수 없습니다. 이후의 변론에서도 바울은 부활을 자기 재판의 핵심 문제로 다시 제시합니다(24:15, 21; 26:6-8).

부활을 둘러싸고 갈라진 공회

사두개파는 부활도 천사도 영도 없다고 말하고, 바리새파는 둘 다 고백하기 때문이다.사도행전 23:8 · 본디새김

부활과 천사와 영, 세 가지를 언급했는데 왜 「둘 다」라고 했을까요? 부활과 천사·영이라는 두 범주로 묶었다고 볼 수도 있고, 언급한 것들을 통틀어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두 집단이 죽음 이후의 소망과 영적 존재에 관해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은 분명합니다.

큰 고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바리새파 쪽 서기관 몇이 일어나 거세게 다투며 말했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지 못하겠습니다. 영이나 천사가 그에게 말한 것이라면 ——」사도행전 23:9 · 본디새김

그런데 바울은 자신에게 말씀하신 분이 영인지 천사인지 모른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분이 나사렛 사람 예수님이라고 분명히 밝혔습니다. 서기관들의 말은 바울의 증언을 자신들이 받아들일 수 있는 범주 안에서 이해하려는 시도로 읽을 수 있습니다. 같은 부활의 소망을 이야기한다고 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해 같은 결론에 이르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을 판단하려고 모인 사람들이 이제 바울보다 서로를 향해 더 크게 다투고 있습니다. 결국 천부장은 바울이 그들에게 찢길까 두려워 군인들에게 그를 데려오라고 명합니다. 논쟁을 넘어 실제 신체적 위험이 닥친 것입니다.

율법에 따라 판단해야 할 공회가 한 사람의 안전조차 보장하지 못하는 자리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다시 병영으로 돌아갑니다. 무리는 그의 말을 거부했고, 공회는 다툼으로 끝났습니다.

바로 그날 밤, 뜻밖의 방문이 이루어집니다.

조금 더 깊이

8절의 「둘 다」는 원문으로 타 암포테라(ἀμφότεροι)입니다. 통상적으로 ‘둘 다’라는 뜻을 지닌 표현이어서 부활과 천사·영이라는 두 범주로 묶는 읽기가 나오고, 이 표현이 여기서는 언급한 것들을 통틀어 가리킨다고 보는 읽기도 있습니다. 다니엘 12:2의 말씀은 고난과 박해 속에서도 하나님의 최종적인 판단과 구원을 기대하도록 하는 문맥에 놓여 있습니다.

「굳세어라」 — 바울의 증언을 인정하시는 주님

사도행전 23:11 본문 →

그날 밤에 주가 그의 곁에 서서 말했다. 「굳세어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를 두고 엄숙히 증언한 것처럼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하기 때문이다.」사도행전 23:11 · 본디새김

이 말씀은 사도행전 23장의 중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의 변론이 성공했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이 곧 그의 말을 받아들일 것이라고도, 공회에서의 혼란이 아무 문제가 없었다고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그가 예수님에 대해 증언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증언이 받아들여졌는가 하는 문제와, 증인이 맡은 일을 수행했는가 하는 문제는 같지 않습니다. 청중의 거부가 그 증언 자체를 없애지는 못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증언이 예루살렘에서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해야 한다」는 단순한 권유가 아니라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필요를 나타내는 표현입니다. 바울이 로마에 가고 싶어 했다는 사실은 이미 19:21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울 자신의 계획을 넘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의 미래를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로마에 가기로 마음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반드시 그곳에 도착할 수 있도록 모든 위험을 통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약속의 내용은 분명하고 제한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서도 예수님을 증언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고난을 겪지 않으리라거나 죄수 신분에서 곧 풀려날 것이라는 약속은 없습니다. 그곳까지 어떻게 가게 될지, 누구의 도움을 받을지, 어떤 일을 견뎌야 할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이 장에서 바울의 곁에 서 있던 사람들은 그의 입을 치라는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23:2). 공회는 그를 보호해 주지 못했고, 군인들이 그를 사람들 사이에서 낚아채어 데려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병영의 밤에 바울 곁에 서 계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누가는 예수님께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나셨는지 묘사하지 않습니다. 곁에 서셔서 말씀하셨다고만 기록합니다. 공회에서는 부활이 논쟁의 대상이었지만, 병영에서는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분으로 등장하십니다. 바울에게 부활은 언젠가 경험할 일을 기다리는 신앙만이 아니라, 이미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지금 자신의 삶과 미래에 관여하고 계시다는 사실이기도 합니다.

바울에게 필요한 것은 모든 위험을 없애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아직 끝나지 않은 사명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아는 일이었습니다.

이 말씀 다음에 누가는 곧바로 날이 밝았다고 기록합니다.

조금 더 깊이

「해야 한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데이(δέω)입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는 이 말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들을 설명할 때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누가복음 24:26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시고 영광에 들어가셔야 하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셨고, 사도행전 9:16에서는 아나니아에게 바울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보여 주겠다고 하십니다. 또 이 장면은 사도행전 18:9-10에서 고린도에 있던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말하라고 하시며 함께 계시다고 말씀하신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때는 그곳에서 계속 증언할 수 있도록 함께하시겠다고 하셨다면, 이제는 예루살렘에서 로마까지 이어지는 새로운 길을 말씀하십니다. 11절은 예수님의 부활을 다시 논증하려는 구절은 아니지만, 사도행전의 독자는 바울에게 말씀하시는 분이 죽음에서 살아나신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 — 종교적 맹세가 살인 계획이 되다

사도행전 23:12–15 본문 →

밤에는 예수님께서 바울의 미래를 말씀하셨습니다.

날이 밝자 다른 사람들이 바울의 미래를 끝내기로 맹세합니다.

날이 밝자 유대 사람들이 한패를 이루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자기 자신에게 저주를 걸어 맹세했다.사도행전 23:12 · 본디새김

이 모의에 참여한 사람은 마흔 명이 넘었습니다. 그들은 화가 나서 위협적인 말을 한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저주를 걸어 자기들의 계획에 종교적 맹세의 무게를 실었습니다.

누가는 그들의 맹세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동한다고 해도, 그 행동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그들은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을 찾아가, 공회가 바울의 사건을 더 자세히 조사하려는 것처럼 꾸며 다시 데려오게 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이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요청하여, 그의 일을 더 꼼꼼히 조사하려는 것처럼 그를 여러분에게 데려오게 하십시오.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그를 죽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사도행전 23:15 · 본디새김

진실을 알아보는 절차가 진실을 없애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앞에서 대제사장은 율법에 따라 재판하는 자리에서 불법적인 폭력을 명령했습니다. 이제는 암살을 모의하는 사람들이 공회의 조사 절차를 이용하려 합니다. 정의를 세우기 위한 제도가 본래의 목적을 잃을 때, 그 제도는 오히려 부정의를 실행하는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본문이 모든 대제사장과 장로가 이 계획에 동의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여기 등장하는 모의자들을 모든 유대 사람의 대표로 읽어서는 안 됩니다. 사도행전 자체가 유대인 바울과 유대인 아나니아, 유대인 신자들, 그리고 바울을 공격하는 사람들을 함께 보여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장에서 갈리는 것은 민족적 혈통이 아니라 예수님과 예수님의 증언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암살자들이 준비를 마쳤을 때, 뜻밖의 사람이 그 계획을 듣게 됩니다.

「바울의 자매 아들이」 — 이름 없는 젊은이가 바꾼 이야기의 방향

사도행전 23:16–22 본문 →

바울의 자매 아들이 그 매복 소식을 듣고, 병영으로 찾아 들어가 바울에게 알렸다.사도행전 23:16 · 본디새김

바울의 가족이 갑자기 등장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의 이 조카가 등장하는 곳은 이 장면뿐입니다. 그의 이름도, 나이도, 예루살렘에 왜 있었는지, 어떻게 암살 계획을 듣게 되었는지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었는지조차 본문은 말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그의 행동은 자세히 기록합니다. 그가 소식을 들었습니다. 병영에 들어갔습니다. 바울에게 알렸습니다.

바울은 백부장 한 사람을 불러 그를 천부장에게 데려가 달라고 청하고, 백부장은 그를 천부장에게 데려갑니다. 본문은 암살 계획이 드러난 뒤에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셔서 모든 것을 해결해 주셨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실제로 위험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한 젊은이의 행동과 로마 군대의 절차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바울의 조카는 자기가 들은 사실을 알립니다.

바울은 그 정보를 무시하지 않고 백부장에게 전달하도록 합니다.

백부장은 죄수의 부탁을 받아들여 젊은이를 천부장에게 데려갑니다.

천부장은 그 말을 실제로 듣고 판단합니다.

모두 자기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을 합니다. 누가는 조카가 어떻게 음모에 접근할 수 있었는지, 백부장이 왜 바울의 부탁을 들어주었는지 설명하지 않지만, 기록된 행동만으로도 충분합니다. 바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군가 소식을 듣고, 누군가 전달하고, 누군가 그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천부장이 그의 손을 잡고 그를 데리고 따로 물러가 물었다. 「나에게 알릴 무슨 말을 가지고 있느냐?」사도행전 23:19 · 본디새김

로마 군대의 높은 지휘관이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젊은이의 손을 잡고 다른 사람들과 떨어진 곳으로 데려갑니다. 이 행동이 어떤 감정이나 의도에서 나왔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젊은이의 말을 사적으로 듣기 위한 자리를 마련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러니 그대는 그들에게 설득당하지 마십시오. 그들 가운데 마흔 명이 넘는 사람이 그를 숨어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그를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겠다고 자기 자신에게 저주를 걸어 맹세했고, 이제 준비를 갖추고 그대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사도행전 23:21 · 본디새김

「그대의 약속을 기다리고 있습니다」라는 마지막 표현대로, 암살자들은 바울을 죽일 수 있는 조건이 천부장의 결정에 달려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젊은이의 제보는 바로 그 결정이 내려지기 전에 이루어집니다.

천부장은 그에게 아무에게도 이 일을 알리지 말라고 명령합니다. 음모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지 않게 하려는 조치로 이해할 수 있으며, 곧바로 군대를 동원하는 것으로 보아 그 제보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한 젊은이가 전한 몇 마디가 수백 명의 군인을 움직이게 합니다.

「군인 이백 명과 기병 일흔 명과 창잡이 이백 명」 — 한 사람을 위한 밤의 행군

사도행전 23:23–24 본문 →

백부장 둘을 불러 말했다. 「군인 이백 명과 기병 일흔 명과 창잡이 이백 명을 밤 셋째 시에 출발해 가이사랴까지 가도록 준비시켜라.」사도행전 23:23 · 본디새김

모두 470명입니다. 암살 계획에 참여한 사람은 마흔 명이 넘었고, 천부장은 그 위협에 대응하여 470명을 동원합니다. 상대가 정확히 몇 명인지, 어디서 매복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압도적인 병력으로 안전한 이송을 준비한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힘으로 예루살렘을 떠날 수 없는 죄수입니다.

그런데 470명의 군인이 그의 이동을 위해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은 그가 병영에서 공회로 내려오는 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길로 가지 않고, 밤에 로마 군대의 호위를 받아 가이사랴로 향합니다. 군대의 규모나 출발 시간, 목적지를 정한 사람은 바울이 아니라 천부장이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약속이 있으니 암살 계획을 무시해도 된다고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조카가 전해 준 정보를 활용해 가능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천부장은 예수님의 약속을 들었다고 기록되지 않습니다. 그는 로마 시민인 죄수를 보호하고, 자신이 맡은 사건에서 더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고 해서 사람의 판단과 행동이 불필요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 장에서 약속은 사람들이 실제로 행동하는 과정을 통해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리고 이제 천부장은 총독에게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이 편지에는 앞에서 읽었던 사건과 맞지 않는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본문은 이 병력이 바울 한 사람만을 위해 새로 조직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천부장이 자기 휘하의 병력에서 동원한 것입니다. 「창잡이」에 해당하는 덱시올라보스(δεξιολάβος)는 신약에서 여기 한 번 등장하는 단어로, 창이나 투창 등 무기를 사용하는 병사로 이해하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지만 정확한 병종과 무장은 확인할 수 없습니다. 「밤 셋째 시」는 당시의 일반적인 시간 계산으로 해가 진 뒤 약 세 시간이 지난 때, 대략 밤 아홉 시에 해당하지만 실제 해가 지는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밤중에 이동하는 것은 매복을 피하기 위한 조치로 이해할 수 있으나, 천부장이 그 시간대를 선택한 구체적인 이유는 본문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로마 시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 천부장이 다시 쓴 사건의 이야기

사도행전 23:25–30 본문 →

천부장은 클라우디우스 루시아스라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벨릭스 총독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이 사람이 유대 사람들에게 붙잡혀 그들에게 죽임을 당하려던 참에, 내가 군대와 함께 가서 그를 건져 냈습니다. 그가 로마 시민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3:27 · 본디새김

앞의 기록을 기억하는 독자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21:31-33에서 천부장은 소동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고 내려와 바울을 결박합니다. 22:24에서는 채찍질로 심문하려 하고, 22:25-29에 이르러서야 바울이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무슨 까닭으로 그를 고발하는지 알아내려고 그들의 공회로 데려갔습니다.」사도행전 23:28 · 본디새김

공회를 소집한 목적은 설명하지만, 그 전에 채찍질로 바울을 심문하려 했던 사실은 전혀 언급하지 않습니다. 편지만 읽으면 루시아스는 위험에 빠진 로마 시민을 발견하고 즉시 구출했으며, 신중하게 고발 내용을 조사한 뒤 총독에게 사건을 넘기는 책임감 있는 지휘관처럼 보입니다.

그가 바울을 구한 것도, 암살 계획을 알아내고 신속히 보호 조치를 취한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차이를 근거로 천부장이 자기 조치를 상관에게 유리하게 서술했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만 누가는 그의 의도를 직접 설명하지 않으므로, 그가 어떤 마음으로 사실관계를 바꾸어 적었는지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누가는 편지가 사실과 다르다고 독자에게 직접 알려 주지 않습니다. 앞에서 일어난 일을 자세히 기록한 다음, 편지를 그대로 제시합니다. 독자는 두 기록을 비교하며 차이를 발견하게 됩니다.

처음에 공회는 율법에 따라 재판한다면서 율법을 어겼습니다. 다음에는 암살자들이 더 정확히 조사하겠다는 말을 살인 계획의 구실로 사용했습니다. 이제 천부장은 자신이 실제로 한 일을 보고하면서 불편한 부분을 생략합니다. 세 경우가 동일한 정도의 잘못은 아니지만, 모두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공식적인 언어와 실제 행동 사이에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재판의 언어가 언제나 정의를 보장하지는 않습니다. 조사라는 명분이 언제나 진실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 공식적인 보고도 언제나 사건의 모든 모습을 보여 주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편지에는 바울에게 중요한 내용도 들어 있습니다.

「그가 그들의 율법에 관한 논쟁으로 고발당한 것을 알았고, 사형이나 사슬에 묶일 만한 혐의는 하나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사도행전 23:29 · 본디새김

이것은 총독의 최종 판결이 아니라 사건을 조사한 천부장의 판단입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증언하는 사람들이 소란을 일으켰다는 비난을 받는 가운데, 로마 관리가 사형이나 구금을 정당화할 혐의를 찾지 못하는 장면은 사도행전에서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그러나 로마의 관리들이 언제나 정의로운 인물로 묘사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을 구출한 사람과 불법적인 폭력을 가하려 했던 사람은 동일한 인물입니다. 누가는 이 모순을 없애지 않습니다. 로마의 권력이 바울을 보호하는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의를 완전하게 실현하는 제도는 아니라는 사실을 이야기 속에 남겨 둡니다.

조금 더 깊이

갈리오는 고린도에서 바울에 대한 고발을 유대 사람들의 율법 문제로 판단하고 재판을 거부했습니다(18:14-16). 이러한 장면들은 예수님의 증언이 반드시 로마 제국에 대한 반란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드러냅니다.

「너를 고발하는 이들도 오면」 — 안전하게 도착했지만 아직 자유롭지 않은 사람

사도행전 23:31–35 본문 →

군인들은 명령에 따라 밤에 바울을 데리고 안티파트리스로 갑니다. 이튿날에는 기병들만 바울과 함께 가이사랴로 향하고, 나머지 병력은 병영으로 돌아갑니다. 누가는 왜 나머지 병력이 돌아갔는지 직접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도착하자 총독은 편지를 읽고 그가 어느 속주 출신인지 묻습니다. 바울이 길리기아 출신임을 알게 된 벨릭스는 그를 다른 곳으로 돌려보내지 않습니다.

말했다. 「너를 고발하는 이들도 오면 네 말을 다 듣겠다.」 헤롯의 관저에서 바울이 감시를 받도록 명했다.사도행전 23:35 · 본디새김

「다 듣겠다」는 이 문맥에서 사건을 정식으로 심리하겠다는 말입니다. 그가 어떤 법적 판단으로 관할을 인정했는지 설명은 없지만, 총독이 바울의 사건을 받아들였다는 점은 확실합니다.

공회에서는 바울이 선한 양심으로 살아왔다고 말하자마자 입을 치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총독은 고발자들이 오면 바울의 말을 듣겠다고 합니다.

이것만으로 벨릭스가 공정한 재판을 끝까지 보장할 사람이라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바울에게는 자신의 이야기를 할 새로운 기회가 열립니다.

바울은 자유인이 되지 않았습니다.

죽음의 위험을 피했고, 안전하게 가이사랴에 도착했으며, 총독 앞에 설 기회를 얻었지만, 여전히 구금 상태에 있습니다. 그래도 그의 사건은 이제 예루살렘의 소동을 넘어 로마 총독의 관할 아래 놓였습니다.

조금 더 깊이

「다 듣겠다」에 쓰인 디아쿠오는 이 문맥에서 사건을 정식으로 심리하거나 충분히 듣는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가이사랴는 예루살렘과 달리 로마 총독의 행정 활동이 이루어지던 지중해 연안의 주요 도시로, 헤롯 대왕의 건축 사업으로 발전했으며 헤롯의 궁전은 이후 로마 총독의 관저로 사용되었습니다. 본문의 「헤롯의 관저」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과 연결됩니다.

헤롯의 관저에서

사도행전 23:1–35 본문 →

하나님이 바울을 로마까지 보내시기로 하셨다면, 왜 그렇게 복잡한 과정이 필요했을까요? 본문은 이 질문에 직접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장면을 기록한 뒤,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 사람들의 행동이 어떻게 이어지는지를 자세히 보여줍니다.

바울은 암살 계획을 알자 그대로 전달했고, 조카는 위험한 소식을 숨기지 않았으며, 천부장은 자신의 책임과 판단에 따라 군사적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들은 동일한 신앙적 동기로 행동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섭리를 말한다면, 그것은 인간의 선택과 책임을 지워 버리는 방식이 아니라 그 선택과 행동을 통해 예수님의 약속이 앞으로 나아간다는 해석이어야 합니다. 군대는 바울을 옮겼지만 그가 누구를 증언해야 하는지를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의 몸을 구금할 수 있는 권력과 바울의 사명을 정하시는 분은 서로 다릅니다.

그렇다고 이 장을 ‘어려운 일이 있어도 하나님이 반드시 구해 주신다’는 교훈으로 정리하는 것은 조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신 것은 로마에서 증언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사명이었습니다. 이 약속을 모든 신자에게 똑같은 방식으로 적용하여, 어떤 위험에서도 반드시 살아남거나 원하는 목적지에 도착할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장은 예수님께서 바울이 혼자 힘으로 사명을 지켜 낼 수 있을 때에만 그를 사용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이름 없는 한 사람의 평범한 행동이 한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데 실제로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바울은 이제 헤롯의 관저에 머뭅니다. 그를 죽이겠다고 맹세한 사람들은 더 등장하지 않고, 그들의 계획이 어떻게 끝났는지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수백 명의 군인이 그를 호위했던 밤의 행군은 끝났고, 그를 총독에게 데려온 기병들도 임무를 마쳤습니다.

관저의 문이 닫히고 바울은 다시 감시받는 사람이 됩니다.

그의 눈앞에 있는 것은 로마가 아닙니다. 가이사랴의 관저입니다. 그러나 이곳에 도착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미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을 가둔 사람들은 그가 어디까지 가게 될지 알지 못했습니다. 바울도 그 길을 어떻게 가게 될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날 밤 그의 곁에 서셨던 예수님만이 그에게 로마를 말씀하셨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