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22장

이 장의 자리 · 21–26장 · 붙잡힌 바울

자기 백성에게 들려준 낯선 하나님의 뜻

사도행전 22장에는 이상한 침묵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들 앞에 서 있습니다. 불과 얼마 전, 이들은 바울이 자기 민족과 율법과 성전을 거슬러 가르친다고 비난하며 그를 붙잡았습니다(21:27-36). 그런데 바울이 입을 열자 소란이 잦아듭니다. 그가 자기들의 말로 이야기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들이 낯설어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유대 사람으로 태어나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존경받는 율법 교사에게 배웠으며,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다했습니다. 그들이 지금 바울을 미워하는 바로 그 이유로, 바울도 한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미워했습니다.

그런 바울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이야기합니다. 하늘에서 빛이 비쳤고, 죽으셨다고 여겼던 나사렛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셨으며, 경건한 유대 사람 아나니아가 그 일을 확인해 주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하다가 다시 예수님을 만난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청중은 여기까지 듣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가거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 사람들에게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자, 그들은 갑자기 소리를 지릅니다. 22절은 「그들은 이 말까지는 그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라고 기록합니다. 바울이 자신이 박해하던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보다, 그 예수님께서 자신을 이방 사람들에게 보내셨다는 이야기가 청중의 격렬한 반응을 불러온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 질문을 따라가면 사도행전 22장은 한 사람의 극적인 회심담을 넘어섭니다. 이 장은 하나님을 위해 열심을 내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있는지, 그리고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그 잘못된 열심을 어떻게 새로운 증언으로 바꾸시는지를 보여줍니다.

바울은 자기 민족을 떠나 새로운 하나님을 찾은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가 섬긴다고 믿었던 하나님이 실제로 어떤 일을 하고 계신지, 예수님을 만나고서야 새롭게 알게 된 사람입니다. 그의 종교적 열심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열심이 향하는 방향을 예수님께서 바꾸셨습니다.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722장 본문 읽기 →

「오늘 여러분이 다 그러한 것처럼」 — 바울이 청중과 자신을 나란히 놓다

사도행전 22:1–5 본문 →

바울의 첫마디는 뜻밖에도 존중으로 시작합니다.

「형제 여러분, 그리고 아버지 여러분, 이제 여러분에게 하는 내 변론을 들으십시오.」사도행전 22:1 · 본디새김

자신을 죽이려던 사람들을 형제와 아버지라고 부르며, 바울은 자기와 청중 사이에 여전히 공유하는 역사가 있음을 인정합니다. 자신이 그들보다 우월한 위치에서 그들의 무지를 꾸짖으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 인사는 사도행전 7:2에서 스데반이 공회 앞에서 사용했던 인사를 떠올리게 합니다. 스데반도 자기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조상들의 하나님이 이루신 일을 설명했습니다. 그리고 지금 바울이 비슷한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때 스데반의 죽음에 찬동했던 바로 그 사람이 말입니다.

21:37에서 바울은 로마 천부장에게 그리스 말로 대답했지만, 무리에게는 「히브리 말」로 이야기합니다. 그 말을 듣자 무리는 더 조용해집니다. 그 언어는 청중과 바울 사이의 소속감과 공통된 정체성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이어 자신의 이력을 말합니다.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지만 예루살렘에서 자랐고, 사도행전 5:34에도 등장하는 율법 교사 가말리엘의 발 앞에서 율법을 배웠습니다. 「가말리엘의 발 앞에서」라는 표현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 제자의 자리를 나타냅니다. 바울은 유대 전통을 바깥에서 어렴풋이 배운 사람이 아니라, 그 전통 안에서 엄격하게 교육받았습니다.

「나는 유대 사람이고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도시에서 가말리엘의 발 앞에서 길러졌으며 조상들의 율법을 엄격하게 배웠고, 오늘 여러분이 다 그러한 것처럼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있는 사람이었습니다.」사도행전 22:3 · 본디새김

바울은 「여러분이 다 그러한 것처럼」이라고 말하며 청중의 열심 자체를 거짓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열심이 하나님을 향한 것이라고 인정하면서, 자신에게도 똑같은 열심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4절에서 그 열심이 어떤 행동으로 나타났는지를 밝힙니다.

「나는 이 길을 죽음에 이르도록 박해하여, 남자와 여자 모두를 묶어 옥에 넘겼습니다.」사도행전 22:4 · 본디새김

바울은 어떤 사람들만 박해했다고 말하지 않고, 그들이 걸어가는 「길」 자체를 박해했다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에서 「그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공동체와 그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사용됩니다(9:2; 19:9, 23). 바울은 당시의 자기 행동을 단순한 악의나 개인적 증오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위한 열심 때문에 그렇게 행동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불편한 가능성이 드러납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거역하려는 의도가 없어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확신이, 자신이 실제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지 못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추상적인 원리로 가르치지 않고 자기 과거를 보여 줍니다.

그는 그 과거를 입증할 사람들까지 제시합니다. 대제사장과 장로회가 자신의 박해 활동을 증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철저히 그 공동체의 사람이었는지 밝히는 동시에, 그 공동체의 권위를 받아 행했던 일이 얼마나 끔찍했는지도 숨기지 않습니다. 그는 조상들의 전통에 깊이 속해 있었으며, 바로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잘못 판단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런 사람이 달라질 수 있었을까요?

조금 더 깊이

원문의 표현은 테 헤브라이디 디알렉토, 곧 「히브리 말로」입니다. 여기서 실제 사용된 언어가 히브리어인지 아람어인지는 견해가 갈리며, 본문 자체만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사람 예수다」 — 하나님을 향한 열심이 멈춰 선 자리

사도행전 22:6–11 본문 →

바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던 일을 이야기합니다.

그때 그는 새로운 신앙을 찾고 있지 않았습니다. 자기 생각을 의심하며 길을 걷던 것도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잡아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고 다마스쿠스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바울은 변화의 주도자가 아닙니다.

22:6은 「한낮쯤」이라고 시간을 명시합니다. 이미 밝은 낮에 하늘에서 환한 빛이 그의 둘레를 비춥니다. 바울은 그 빛 때문에 땅에 쓰러지고, 나중에는 앞을 볼 수 없게 됩니다.

「나는 땅바닥에 쓰러졌고 나에게 말하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사도행전 22:7 · 본디새김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박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음성은 「왜 그들을 박해하느냐?」고 묻지 않고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묻습니다. 바울이 박해하는 사람들과 지금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분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다는 뜻입니다.

「내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누구십니까?』 그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사람 예수다.』」사도행전 22:8 · 본디새김

바울이 부르는 「주님」을 이미 예수님에 대한 완성된 신앙고백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는 자신에게 나타난 분이 누구인지 아직 묻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이 이름은 역사 속에서 이미 활동하셨던 한 사람의 이름이었고,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을 체포하는 것이 자신의 임무였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께서 지금 하늘의 빛 가운데서 바울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부활을 별도의 논증으로 설명하지 않고, 살아 계신 예수님께서 직접 말씀하시는 장면을 제시합니다.

바울은 죽음을 맞으셨다고 여겼던 예수님의 운동을 없애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박해를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십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가해진 폭력이 예수님 자신을 향한 폭력으로 드러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겪는 일을 멀리서 지켜보시는 분으로 등장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바울에게 즉시 어떤 벌을 내리시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이 두 번째 질문을 하자, 예수님께서는 그의 다음 길을 알려주십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주님, 무엇을 해야 합니까?』 주님이 나에게 말했습니다.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가거라. 네가 하도록 정해진 모든 일이 거기서 너에게 알려질 것이다.』」사도행전 22:10 · 본디새김

처음에 바울은 자기에게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다마스쿠스에 가서 사람들을 체포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는 자신이 누구의 명령을 따라 무엇을 해야 하는지 다시 물어야 합니다. 목적지는 바뀌지 않습니다. 그곳에 가는 이유가 완전히 바뀝니다.

「그 빛의 영광 때문에 내가 보지 못하게 되어, 함께 있던 이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쿠스로 갔습니다.」사도행전 22:11 · 본디새김

사람들을 묶어 끌고 오려고 떠난 사람이 이제 다른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갑니다.

바울이 잃은 것은 시력만이 아닙니다. 자기 행동의 정당성을 판단하던 확신도 무너졌습니다. 자신이 모든 것을 분명하게 보고 있다고 여겼던 사람이 사실은 가장 중요한 것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동행자들이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는 9장과 서술이 다르지만, 두 서술이 공통으로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바울이 그 음성을 통해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는 점입니다. 이제 그가 받은 경험의 의미를 설명해 줄 사람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사도행전 9:7은 동행자들이 음성을 들었지만 아무도 보지 못했다고 서술하는 반면, 22:9은 빛을 보았으나 바울에게 말씀하시는 분의 음성은 듣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전자는 「음성」을 속격으로, 후자는 대격으로 사용합니다. 이를 근거로 소리는 들었지만 말의 의미는 이해하지 못했다는 조화를 시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리스어의 격 차이만으로 두 기록의 표현상 긴장이 확실하게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사울 형제」 — 박해자를 형제로 받아들이는 공동체

사도행전 22:12–16 본문 →

바울은 아나니아를 소개하면서 먼저 그의 신앙과 평판을 이야기합니다.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율법을 따라 경건하고 거기 사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좋은 증언을 받으며,」사도행전 22:12 · 본디새김

9장에서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제자로 소개됩니다(9:10). 그런데 여기서는 율법을 따라 경건하게 사는 사람이라는 사실이 강조됩니다. 바울은 자신이 조상들의 율법을 버리고 낯선 종교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이해하도록 도운 사람도 유대 공동체에서 좋은 평판을 얻은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나에게 와서 곁에 서서 말했습니다. 『사울 형제, 시력을 되찾으십시오.』 나는 바로 그때 시력을 되찾아 그를 보았습니다.」사도행전 22:13 · 본디새김

‘형제.’

조금 전까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바울은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실제로 9:13-14에서 아나니아는 예수님의 명령을 듣고 바울이 예루살렘의 성도들에게 행한 악한 일과 다마스쿠스로 온 목적을 언급합니다. 그러나 이 장에서 바울이 전하는 아나니아의 첫마디는 고발이나 심문이 아닙니다.

자신이 무너뜨리려고 했던 공동체 안에서 이제 형제라고 불리는 것입니다.

바울이 먼저 그 공동체에 받아들여질 자격을 증명한 뒤에 형제로 불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그를 만나셨고, 아나니아가 그 부르심에 응답해 그를 찾아왔습니다. 예수님께서 부르신 사람이 이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가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자기 뜻을 알고 의로우신 분을 보고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도록 그대를 미리 뽑으셨습니다.』」사도행전 22:14 · 본디새김

아나니아는 「새로운 하나님」을 소개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말씀하셨던 바로 그 하나님이 바울을 선택하셨다는 것입니다.

「의로우신 분」이라는 표현도 사도행전 안에서 이미 들려온 말입니다. 3:14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의롭고 거룩한 분이라고 말했습니다. 7:52에서 스데반은 자기 조상들이 「의로우신 분」의 오심을 미리 알린 예언자들을 박해했으며, 자기 앞에 선 사람들은 그 의로우신 분을 넘겨주고 죽였다고 고발했습니다.

바울은 스데반의 죽음에 찬동했습니다. 그런데 스데반이 증언했던 바로 그 의로우신 분을 이제 자신이 보았다고 말합니다. 스데반의 주장을 없애려던 사람이 스데반이 증언한 분을 만났고, 이제 같은 분의 증인이 됩니다.

「『그대가 보고 들은 것에 대해 모든 사람에게 그분의 증인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2:15 · 본디새김

여기서는 증인의 본래 의미인 「증언하는 사람」이 중요합니다. 바울의 사명은 자기가 고안한 사상을 널리 퍼뜨리는 일이 아니라, 자기가 보고 들은 예수님에 대해 증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선택하시고, 바울이 예수님을 보고 들었으며, 그 결과로 증인이 됩니다.

바울의 증언은 자신의 자격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를 만나 주신 예수님에게서 시작됩니다.

「『이제 왜 머뭇거립니까? 일어나 세례를 받고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그대의 죄를 씻으십시오.』」사도행전 22:16 · 본디새김

바울은 예수님을 만났지만, 그 사실이 그의 과거를 아무 일도 아닌 것으로 만들지는 않습니다. 그는 실제로 사람들을 박해했고, 감옥에 넘겼으며,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일에 가담했습니다. 그런 바울에게 아나니아는 죄를 씻으라고 말합니다.

세례와 죄 씻음과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이 한 문장에 함께 등장합니다. 어떤 전통은 이 표현에서 세례와 죄 용서의 긴밀한 결합을 강조하고, 다른 전통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믿음과 세례가 나타내는 씻음의 의미를 구별합니다. 그리스어 문법만으로 그 관계를 완전히 판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이 무엇을 강조하는지는 분명합니다.

바울은 자기 과거를 스스로 깨끗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가 내세웠던 율법 교육이나 열심이나 종교적 경력도 그 죄를 없애 주지 못합니다. 그가 박해했던 바로 그 예수님의 이름을 이제 부르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바울을 단지 용서받는 사람으로 남겨 두지 않으시고 증인으로 세우십니다. 증인은 남들보다 먼저 옳았던 사람이 아니라, 자신도 예수님의 은혜를 받아야 했던 사람입니다.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 성전에서 듣게 된 예루살렘을 떠나라는 명령

사도행전 22:17–21 본문 →

이제 바울의 이야기는 다마스쿠스에서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옵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돌아와 성전에서 기도하는 동안 황홀경에 빠졌습니다.」사도행전 22:17 · 본디새김

이 장소는 지금 그가 받고 있는 고발과 직접 연결됩니다. 앞 장에서 사람들은 바울이 율법과 성전을 거슬러 가르친다고 비난했습니다(21:28). 그러나 바울은 예수님을 만난 이후에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했다고 증언합니다. 그는 여전히 조상들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성전에서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이 나에게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서둘러라. 빨리 예루살렘에서 나가거라. 나에 대한 네 증언을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사도행전 22:18 · 본디새김

바울이 성전을 버렸기 때문에 예루살렘을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성전에서 기도하는 중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떠나라고 명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말했습니다. 『주님, 내가 회당마다 다니며 당신을 믿는 이들을 가두고 때리곤 했다는 것을 그들 자신이 압니다.』」사도행전 22:19 · 본디새김

이어서 스데반의 죽음에 자신이 찬동했고, 그를 죽이는 사람들의 겉옷을 지켰다고 이야기합니다. 앞뒤 문맥에서 볼 때, 바울은 자신의 과거를 아는 사람들이 자신의 변화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듯합니다. 그토록 열렬하게 박해했던 사람이 이제 같은 예수님을 증언한다면, 그것이 오히려 강력한 증거가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다만 이것은 문맥에 근거한 해석이며, 바울이 자신의 속생각을 직접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이름이 등장합니다.

스데반.

22:20에서 바울은 스데반을 「당신의 증인」이라고 부릅니다. 아나니아는 조금 전에 바울도 예수님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22:15). 스데반은 죽기 전에 예수님을 증언했고, 바울은 그 증언을 거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나타나신 뒤에는 그 거부자가 증인의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누가는 스데반의 죽음이 바울의 회심을 직접 일으켰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더 분명한 사실은, 바울이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찬동했음에도 예수님께서 바울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기억하면서도 그 과거가 결정하지 못하는 미래로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예상 밖입니다.

「그가 나에게 말했습니다. 『가거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 사람들에게 보낼 것이기 때문이다.』」사도행전 22:21 · 본디새김

바울은 예루살렘에 남아 자기 민족에게 증언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멀리 보내십니다. 「멀리」는 이어지는 「이방 사람들」과 결합하여, 바울의 사명이 예루살렘의 경계를 넘어 다른 민족들에게까지 향한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본문은 바울이 자기 민족에게 실망해서 새로운 청중을 찾아 나섰다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를 보내신 분은 예수님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자신의 구원을 누구에게 전할 것인지 정하시고, 그 일을 위해 한 사람을 보내셨다는 것이 바울의 설명입니다.

이제 이 말이 청중에게 어떤 의미로 들렸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이방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전해진다는 생각은 이스라엘의 성경에 전혀 없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사야 49:6에서 여호와야훼는 자기 종에게 야곱의 지파를 일으키고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회복시키는 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며, 그 종을 민족들의 빛으로 삼아 구원이 땅끝까지 이르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사야 본래 문맥에서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회복과 함께 여호와야훼의 구원이 민족들에게까지 미치는 사명을 다루며, 이스라엘의 회복을 폐기하고 다른 민족으로 대체한다는 선언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13:47에서 바울과 바나바는 이사야 49:6을 직접 인용하여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설명합니다. 22:21은 이사야를 직접 인용하지 않지만, 사도행전 안에서는 같은 구원의 확장이라는 흐름에 놓여 있습니다. 또한 이 사명은 사도행전 1:8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방향, 곧 예루살렘에서 시작한 증언이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땅끝까지 이르는 것과 맞닿습니다.

「이 말까지는」 — 듣고 있던 사람들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다

사도행전 22:22–24 본문 →

22절은 매우 짧지만, 이 장 전체에서 가장 날카로운 전환점입니다.

그들은 이 말까지는 그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다가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이런 자는 살아 있어서는 안 되니 땅에서 없애 버려라.」사도행전 22:22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의 죄를 고백했고, 예수님을 만났다는 이야기도,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는 이야기도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동안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방 사람들에게 보내졌다는 말에 이르자 더는 듣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유대 사람들은 모두 이방인의 구원을 싫어했다’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본문은 이 자리에 모인 무리의 반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또 유대교 전통 안에도 이방 사람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는 다양한 이해가 있었습니다.

이 무리가 구체적으로 어느 지점에서 가장 큰 반감을 느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방 사람들에게 구원을 베푸신다는 주장 자체였을 수도 있고, 그 구원이 바울을 통해 전해진다는 사실이 문제였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자기들이 반대하는 나사렛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권위로 바울을 보내셨다는 주장이 결정적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21장의 고발과 22장의 발언을 함께 읽으면 문제의 성격이 좀 더 분명해집니다. 21:28에서 사람들은 바울이 유대 백성과 율법과 성전을 거슬러 가르친다고 비난했고, 그리스 사람들을 성전 안에 들였다고 주장했지만, 이 마지막 주장은 추정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21:29). 그런데 바울은 율법이나 성전을 미워한다고 변론하지 않고, 오히려 율법을 엄격히 배웠으며 성전에서 기도했다고 밝힙니다.

그렇다면 남는 문제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이방 사람들을 향해 여신 길입니다.

바울의 증언에 따르면 그 길을 여신 분은 조상들의 하나님이 세우신 의로우신 분입니다. 바울이 스스로 성전과 이스라엘의 전통을 버리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이방 사람들에게 보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자신들이 기대한 경계 안에서만 이루어져야 하는가, 아니면 그 경계를 넘어서는 예수님의 행동을 받아들여야 하는가가 청중 앞에 놓인 가장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누가는 청중의 긴 설명이나 반론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그들이 바울을 제거하라고 외쳤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한때 예루살렘 사람들이 자기 말을 들어 줄 가능성을 생각했던 듯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서 18절의 「나에 대한 네 증언을 그들이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이 거절하는 대상은 바울만이 아니라, 바울이 증언하는 예수님의 권위이기도 합니다.

23절에서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던지고 먼지를 공중에 뿌립니다. 본문은 그 몸짓의 정확한 관습적 의미를 설명하지 않지만, 이야기 안에서 그 행동이 격렬한 분노를 나타낸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사도행전 7:58에서 스데반을 돌로 치던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사울이라는 젊은이의 발 앞에 놓았습니다. 바울도 조금 전에 자신이 그 겉옷을 지켰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바울을 향해 고함치는 사람들이 겉옷을 벗어 던지고 있습니다.

한때 증인을 죽이는 사람들의 겉옷을 지키던 바울이 이제 증언 때문에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로마 군인들이 개입합니다.

천부장은 왜 사람들이 그토록 소리치는지 알아내려고 바울을 병영으로 끌고 가 채찍질로 심문하라고 명합니다. 무엇이 문제인지 알고자 하면서, 진실을 알아내는 방법으로 채찍질을 택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히브리 말로 한 변론을 천부장이 실제로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인할 수 없습니다. 다만 이제 그는 바울의 설명을 더 듣기보다 폭력을 통해 이유를 알아내려고 합니다.

소란을 멈추게 하려고 개입했던 권력이 또 다른 폭력을 준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바울은 자신이 지닌 또 다른 신분을 드러냅니다.

조금 더 깊이

두 사건에서 겉옷을 벗는 행동의 목적과 사용된 그리스어는 서로 다르므로 똑같은 행위로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이야기의 장면이 서로 겹쳐 보이는 것은 분명합니다.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입니다」 — 결박 앞에서 드러나는 또 다른 정체성

사도행전 22:25–30 본문 →

바울이 가죽끈으로 묶여 채찍질을 당할 준비가 되었을 때, 그는 곁에 선 백부장에게 묻습니다.

그들이 그를 가죽끈으로 묶어 뻗쳐 놓았을 때에 바울이 곁에 선 백부장에게 말했다. 「유죄 판결도 받지 않은 로마 시민을 여러분이 채찍질해도 됩니까?」사도행전 22:25 · 본디새김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단지 자신이 로마 시민이라는 사실만이 아니라, 「유죄 판결도 받지 않은」 사람에게 정당한 법적 절차 없이 채찍질을 가하려 한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이전에도 같은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6:37에서 그는 빌립보 관리들에게 자신들이 로마 시민인데도 유죄 판결 없이 매를 맞았다고 항의했습니다. 빌립보에서는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힌 다음에 시민권을 밝혔지만, 이번에는 채찍질이 시작되기 전에 밝힙니다. 그 이유는 본문이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여기서는 그 말이 즉시 효과를 발휘합니다.

백부장이 천부장에게 보고하자 천부장은 직접 확인하러 옵니다.

천부장이 다가와 그에게 말했다. 「나에게 말해 보아라. 네가 로마 시민이냐?」 그가 말했다. 「그렇습니다.」사도행전 22:27 · 본디새김
천부장이 대답했다. 「나는 큰돈을 들여 이 시민권을 얻었다.」 바울이 말했다. 「저는 태어나면서부터 로마 시민입니다.」사도행전 22:28 · 본디새김

바울에게 시민권이 어떻게 전해졌는지, 부모나 조상이 어떤 경위로 그 권리를 얻었는지는 본문이 알려주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은 바울이 태어날 때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는 점입니다.

이 대화가 끝나자 심문하려던 사람들이 즉시 물러나고, 천부장도 두려워합니다. 조금 전까지 바울을 채찍질할 수 있는 권력을 행사하던 그 권력이 법의 제한 아래에 있다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시민권을 자신의 최종적인 정체성으로 내세우지 않습니다. 이 장 앞부분에서 그는 자신이 유대 사람이고, 가말리엘에게 배웠으며, 조상들의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제는 로마 시민이기도 하다고 말합니다.

이 정체성들은 서로 지워지지 않습니다.

바울은 유대 사람인 채로 예수님을 증언하고, 로마 시민인 채로 그 증언 때문에 고발당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로마 시민권으로 자기 안전을 보호받을 수 있는 자리에서 그 권리를 사용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박해하던 바울에게 예수님의 은혜가 베풀어졌다는 이야기와 모순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이 불법적인 폭력까지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기 과거에 대해서는 죄를 인정하지만, 현재의 고발에 대해서는 정당한 판단을 요구합니다.

마지막 절에서 천부장은 바울을 결박에서 풀어 주고 대제사장들과 공회 의원들을 모으게 합니다. 바울이 모든 혐의에서 풀려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제 천부장은 고발의 정확한 내용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유죄 판결도 받지 않은」으로 옮긴 그리스어 아카타크리토스(ἀκατάκριτος)는 유죄 판결을 받지 않은 상태를 뜻합니다. 당시 로마 시민권에는 신체형과 형사 절차에 관한 중요한 법적 보호가 수반되었습니다. 시민권이 모든 구속이나 처벌에서 무조건적인 면책을 보장한 것은 아니지만, 이 사건처럼 유죄 판결 없이 채찍질하려는 조치는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었습니다.

아직 끝나지 않은 변론

사도행전 22:1–30 본문 →

이 장의 변론은 판결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변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이끄는 것은 바울의 극적인 인생 변화만이 아니라, 그 변화를 가능하게 하신 예수님의 행동입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사렛 사람 예수다」라는 말씀은 바울이 누구를 잘못 알고 있었는지를 드러냈고, 「일어나 다마스쿠스로 가거라」라는 말씀은 자기 확신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심판하던 그를 예수님의 뜻을 들어야 하는 사람으로 바꾸었으며, 「가거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 사람들에게 보낼 것이다」라는 말씀은 그의 열심이 향할 곳을 정했습니다. 청중이 소리를 지른 것은 바로 이 마지막 말씀, 예수님께서 이방 사람들을 향해 여신 길 때문이었습니다.

증언이 계속되는 이유는 증인들이 언제나 올바르게 판단하거나 사람들을 설득하는 데 성공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적 판단이 옳다고 확신하면서도 실제로는 예수님을 박해했고, 이 장에서 그의 증언은 청중의 분노 속에 중단됩니다.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만나시고, 용서하시고, 보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 장을 자기 확신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누군가를 배제하고 정죄하는 일이 하나님에 대한 충성으로 느껴질 때에도, 자신이 실제로 누구의 뜻을 따르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바울이 이방 사람들에게 간 근거도 자신의 관용이나 개방성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었습니다.

바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처음으로 「주님, 무엇을 해야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을 할 수 있게 된 것이 그의 변화였습니다.

이튿날 천부장은 대제사장들과 공회 의원들을 모이게 합니다. 그는 여전히 바울이 왜 고발당했는지 정확히 알고 싶어 합니다.

과거에 바울은 자신의 손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묶어 예루살렘으로 끌고 오려 했습니다. 이제 자신이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하고, 같은 예수님을 증언한다는 이유로 고발받고 있습니다. 그의 앞에는 대제사장들과 공회 의원들이 앉아 있고, 그들 중 어떤 사람도 바울을 유죄라고 판결한 상태는 아닙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그들 앞에 세웁니다.

바울이 한때 누구를 위해 열심을 다했는지 잘 알고 있던 바로 그 세상 앞에, 이제 그는 자신이 박해했던 나사렛 사람 예수님의 증인으로 서 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