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21장

이 장의 자리 · 21–26장 · 붙잡힌 바울

닫힌 성전 문, 남아 있는 바울의 말

예루살렘의 성전에서 한 사람이 끌려 나옵니다.

사람들은 그를 붙잡아 때리고, 죽이려 합니다. 그가 이방 사람을 성전 안에 데리고 들어와 거룩한 곳을 더럽혔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 고발의 근거를 미리 알려 줍니다. 그들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갔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21:29).

그들이 본 것은 하나이고, 그것으로부터 내린 결론은 다른 것입니다.

그날 바울은 율법을 무시하기 위해 성전에 들어간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의 형제들이 권한 대로 정결 예식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자신이 유대 사람들에게 모세의 관습을 버리라고 가르친다는 소문을 바로잡기 위해서였습니다.

율법과 성전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고 성전에 들어간 사람이, 율법과 성전을 모독했다는 혐의로 붙잡힌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행전 21장의 가장 쓰라린 역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전부터 자신에게 사슬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여러 도시의 신자들은 그를 말렸고, 예언자 아가보는 바울의 띠로 자신의 손발을 묶으며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여 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울면서 가지 말라고 간청했지만,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죽을 각오까지 되어 있다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실제로 쇠사슬에 묶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간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고난을 피하는 것입니까, 고난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길을 걷는 것입니까?

누가는 이 질문에 단순한 규칙으로 대답하지 않습니다. 성령을 통해 경고받은 사람들과 예루살렘으로 가겠다고 결심한 바울 사이의 긴장을 그대로 남겨 둡니다. 그 긴장 속에서 우리는 사람의 미래를 아시는 하나님과, 그 미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서로를 사랑하고 염려하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읽는 시간 26분소단락 921장 본문 읽기 →

「영을 통해 가지 말라고」 — 서로 다른 방향을 가리키는 것처럼 보이는 말씀

사도행전 21:1–6 본문 →

사도행전 21장은 배를 타고 떠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억지로 떼어져 배를 타고 떠났다. 그리고 곧장 고스로, 이튿날 로도로, 거기서 바다라로 갔다.사도행전 21:1 · 본디새김

「억지로 떼어져」(ἀποσπάω)로 옮긴 동사는 본래 어떤 것을 잡아당겨 떼어 낸다는 뜻입니다. 앞 장의 마지막에서 에베소 장로들은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울며 배까지 배웅했습니다. 이 동사는 물리적인 출항만이 아니라, 서로 헤어지기 어려웠던 사람들의 이별을 생생하게 전달합니다.

그들은 쉽게 작별하지 못했습니다. 떨어져 나와야 했습니다.

바울 일행은 바다라에서 페니키아로 가는 배에 올라, 구브로를 왼쪽에 두고 항해하다가 두로에 도착합니다. 누가는 배가 그곳에서 짐을 부리기로 되어 있었다고까지 기록합니다. 바울은 실제 항해와 상업 활동의 조건 속에서 여행하고 있었고, 배가 머무는 동안 제자들을 찾아내 이레를 지냅니다.

제자들을 찾아내어 거기서 이레를 지냈다. 그들은 영을 통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발을 들이지 말라고 거듭 말했다.사도행전 21:4 · 본디새김

바울은 앞 장에서 자신이 「영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간다고 말했습니다. 거룩한 영이 도시마다 사슬과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고 증언한다고도 했습니다(20:22–23). 그런데 이제 두로의 제자들은 영을 통해 가지 말라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거룩한 영의 인도에 순종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거룩한 영의 경고를 무시하고 있습니까?

성령이 알리신 것은 고난인가, 가지 말라는 명령인가

한 해석은 성령이 제자들에게 바울에게 닥칠 고난을 알려 주셨고, 제자들은 그 계시를 근거로 가지 말라고 권했다고 이해합니다. 영이 알려 주신 사실과 사람들이 내린 판단을 구별하는 읽기입니다. 뒤이어 아가보가 바울의 결박을 예언하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가지 말라고 간청하는 장면(21:11–12)이 이 해석의 근거가 됩니다.

반면 4절은 제자들이 「영을 통해」 가지 말라고 말했다고 기록하므로, 이를 단순히 인간적인 만류로만 돌릴 수 없다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이 견해에서는 바울이 자신의 결심을 지나치게 강하게 붙잡았을 가능성까지 검토합니다.

두 해석 모두 본문에 근거를 가지고 있고, 누가는 이 긴장을 직접 풀어 주지 않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무조건 옳았다고 선언하거나, 반대로 성령의 뜻을 거슬러 예루살렘으로 갔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모두가 그 위험을 심각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대하는 방식이 달랐다는 사실입니다. 제자들은 그가 가지 않기를 바랐고, 바울은 위험을 알면서도 가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사랑했고, 그가 다치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이 갈등은 신앙이 부족한 사람과 신앙이 훌륭한 사람의 단순한 대립으로 정리되지 않습니다. 같은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같은 위험을 바라보면서도 다른 판단을 내리는 장면입니다.

아이들까지 바닷가로 나온 작별

그 날들을 다 채우고 나서 우리는 제자들 모두가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도시 밖까지 배웅하는 가운데 길을 떠났다. 그리고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사도행전 21:5 · 본디새김

앞 장에서는 에베소의 장로들이 바울을 배까지 배웅했습니다. 이번에는 두로의 제자들이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바닷가까지 나옵니다. 복음으로 형성된 공동체가 몇몇 지도자만의 모임이 아니었음을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제자들은 바울이 가지 않기를 바랐고, 바울은 가기로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들은 함께 무릎을 꿇습니다. 생각이 같아졌기 때문에 함께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같은 주님을 의지하기 때문에 서로 다른 판단 속에서도 함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뒤 바울 일행은 배에 오르고, 제자들은 각자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바울이 마음을 바꾸지 않았다는 사실은 이후의 여정에서 분명해집니다.

그런데 가이사랴에 도착했을 때,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은 더욱 구체적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빌립의 집과 아가보의 띠 — 예언은 미래를 알려 주지만, 판단은 여전히 어렵다

사도행전 21:7–14 본문 →

바울 일행은 돌레마이를 거쳐 가이사랴에 도착합니다.

이튿날 떠나 가이사랴로 갔다. 그리고 복음을 전하는 빌립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지냈는데, 그는 일곱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사도행전 21:8 · 본디새김

빌립은 사도행전 6장에서 예루살렘 공동체가 세운 일곱 사람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이후 사마리아에서 그리스도를 전했고(8:5–13), 에티오피아 내시에게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전한 뒤(8:26–39) 가이사랴에 이르렀습니다(8:40). 한때 흩어지면서 복음을 전했던 빌립이, 이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바울을 자기 집에 맞아들이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혼인하지 않은 딸 넷이 있었는데, 모두 예언하곤 했다.사도행전 21:9 · 본디새김

사도행전 2장에서 베드로는 요엘의 예언을 인용하며 하나님이 자기 영을 부어 주실 때 아들들과 딸들이 예언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2:17–18; 요엘 2:28–29). 이제 빌립의 집에는 실제로 예언하는 딸들이 있습니다. 오순절의 약속이 예루살렘의 특별한 사건으로만 남아 있지 않습니다. 다만 누가가 기록한 것은 그들이 예언하는 사람들이었다는 것까지이고, 그들이 바울의 미래에 대해 예언했다고는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 날을 지내는 동안 아가보가 유대에서 내려옵니다. 사도행전 11:27–28에서 큰 기근을 예언했던 그 사람입니다. 그가 이번에는 말만 하지 않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와서 바울의 띠를 집어 자기 손발을 묶고 말했다. 「거룩한 영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 띠의 임자를 예루살렘에서 유대 사람들이 이렇게 묶어 이방 사람들의 손에 넘길 것이다.』」사도행전 21:11 · 본디새김

이사야는 몸으로 행한 상징적인 행동으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보여 주었고(이사야 20:2–4), 예레미야는 멍에를 자기 목에 걸었으며(예레미야 27:1–11), 에스겔도 상징적인 행동으로 예루살렘의 운명을 보여 주었습니다(에스겔 4–5장). 아가보도 같은 방식으로 다가올 일을 눈앞에 펼쳐 보입니다. 그는 바울이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유대 사람들이 그를 묶어 이방 사람들의 손에 넘길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듣고 우리도 그곳 사람들도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계속 간청했다.사도행전 21:12 · 본디새김

「우리도」라는 말은 바울의 동행자들까지 그를 말리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와 함께 여행하고 그의 사역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도 가지 말라고 간청합니다.

그때 바울이 대답했다. 「왜 울면서 내 마음을 무너뜨립니까?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 예루살렘에서 묶일 각오뿐 아니라 죽을 각오까지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1:13 · 본디새김

이 말은 바울을 감정이 없는 사람처럼 묘사하지 않습니다. 「무너뜨리다」(συνθρύπτω)는 부수거나 산산이 깨뜨린다는 뜻의 낱말로, 여기서는 사람의 마음과 결심을 약하게 만드는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물은 그의 결심을 흔들 만큼 무겁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 눈물 앞에서 자신의 확신을 다시 말합니다.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해」라는 말은 그의 결심이 개인적인 자존심이나 완고함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그의 자기 이해를 보여 줍니다.

그러나 이 대답만으로 예루살렘으로 가는 구체적인 판단이 모든 면에서 옳았다고 누가가 확정했다고 말할 필요는 없습니다. 본문은 바울의 결심을 진지하게 전달하면서도, 성령의 경고와 만류 사이의 긴장을 완전히 해소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의 결심이 무엇을 중심에 두고 있는지는 분명합니다.

자신의 안전보다 주 예수님의 이름입니다.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그가 설득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 하고 말하며 잠잠해졌다.사도행전 21:14 · 본디새김

이 말은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드리신 기도를 떠올리게 합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누가복음 22:42) 직접 인용이라고 명시되어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뜻 앞에 자기 뜻을 내려놓는다는 점에서 분명한 주제적 연결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바울의 판단을 완전히 이해하거나 모든 의문이 사라졌다고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바울을 설득할 수 없었고, 그래서 자기들이 통제할 수 없는 결과를 주님의 뜻에 맡깁니다.

말이 멎습니다. 그러나 아직 길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이 장에서 바울의 여정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행로와 여러 면에서 닮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고난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아시고도 그곳으로 향하셨고(누가복음 9:51; 18:31–33), 바울도 사슬과 고난이 기다린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붙잡히신 뒤 로마 총독 앞에서 고발당하셨듯 바울도 로마 군인들의 구금 아래 들어갑니다. 그러나 바울을 예수님과 같은 자리에 놓아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다른 사람들의 죄와 구원을 위한 독특한 사건이고, 바울의 고난은 그 구원을 증언하는 사도가 겪는 고난입니다. 그는 자신의 고난으로 사람들을 구원하는 분이 아니라 주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증인입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한 이방인의 사도 — 기쁨과 불안이 함께 있는 교회

사도행전 21:15–22 본문 →

가이사랴의 제자들 가운데 몇 사람이 바울 일행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구브로 출신으로 오래전부터 제자였던 나손에게 일행을 데려갑니다. 바울은 혼자 돌아오지 않습니다. 여러 지역의 동역자들이 함께하고, 오래전부터 예수님을 믿어 온 사람들의 환대를 받습니다.

예루살렘에는 바울을 반대하는 사람들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를 반갑게 맞아들이는 형제들이 있습니다.

다음 날 바울은 야고보와 장로들을 만납니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앞서 죽임당했으므로(12:2), 이 야고보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로 등장하는 다른 야고보입니다.

그는 그들에게 문안하고, 하나님이 바울의 섬김을 통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한 일을 하나하나 이야기했다.사도행전 21:19 · 본디새김

주어는 하나님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여러 도시를 여행하고 고난을 겪었지만, 이방 사람들 가운데 구원이 이루어진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행동이었습니다.

그들은 그 말을 듣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렸다. 그리고 그에게 말했다. 「형제여, 그대가 보다시피 유대 사람 가운데 믿게 된 이가 수만 명이나 됩니다. 그들이 다 율법에 열심입니다.」사도행전 21:20 · 본디새김

이방 사람들의 회심은 예루살렘 교회와 분리된 사건처럼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문장에 긴장이 나타납니다. 예수님을 믿는 유대 사람들이 매우 많았고, 그들은 율법에 열심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것과 모세의 율법을 소중히 여기는 일은 서로 반대되는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 그대를 두고 이런 말이 전해졌습니다. 그대가 이방 사람들 가운데 있는 모든 유대 사람에게 모세를 저버리라고 가르치고, 자녀에게 할례를 베풀지도 말고 관습대로 걷지도 말라고 한다는 것입니다.」사도행전 21:21 · 본디새김

소문의 대상을 정확히 보아야 합니다. 이방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지 말라고 가르친다는 것이 아니라, 이방 지역에 사는 유대 사람들에게 모세를 버리라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방 출신 신자들에게 율법 전체를 구원의 조건으로 요구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은 사도행전 15장에서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곧 유대 출신 신자들에게 자녀의 할례를 금지하고 모든 유대 관습을 버리라고 가르쳤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로 이 차이가 소문 속에서 사라진 것입니다.

야고보와 장로들은 바울이 왔다는 소식이 알려지면 문제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한 가지 방법을 제안하는데, 그것은 뜻밖에도 성전의 정결 예식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수만 명」은 매우 많은 수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정확한 신자 수를 알려 주는 통계로 사용할 수는 없습니다. 바울의 편지에서도 위의 구별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갈라디아서 5:2–6에서 그는 할례를 구원에 필요한 조건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강하게 반대하지만, 고린도전서 9:19–23에서는 유대 사람들을 얻기 위해 유대 사람처럼 되었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바울이 할례를 구원의 조건으로 삼는 데 반대한 것은 분명하지만, 모든 유대 사람이 유대적 관습을 행하는 것 자체를 언제나 금지했다고 말할 근거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왜 정결 예식에 참여했을까?

사도행전 21:23–26 본문 →

예루살렘의 장로들은 바울에게 서원을 지닌 사람 넷이 있다고 말하고, 제안합니다.

「그들을 데리고 함께 정결하게 되십시오. 그들이 머리를 밀 수 있도록 비용을 대 주십시오. 그러면 그대를 두고 들은 말에 아무 근거가 없고 그대 자신도 율법을 지키며 바르게 걷고 있다는 것을 모두가 알게 될 것입니다.」사도행전 21:24 · 본디새김

바울이 모세의 율법을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보여 주자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서원은 민수기 6:1–21의 나실인 서원과 연결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다른 사람이 서원의 제물 비용을 대신 부담하는 일도 경건한 행동으로 여겨질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자신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던 율법의 행위를 다시 행하는 것일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바울이 반대했던 것은 율법 준수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만드는 일이었습니다. 장로들이 제안하는 것은 바울이 유대 사람으로서 율법과 관습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행동입니다.

「믿게 된 이방 사람들을 두고는 우리가 이미 판단해서 글을 보냈습니다. 우상에게 바친 제물과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의 고기와 음행을 삼가라는 것이었습니다.」사도행전 21:25 · 본디새김

장로들은 사도행전 15장의 결정을 철회하지 않고, 그것이 여전히 유효하다고 말합니다. 지금 제시되는 방법은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진 유대 출신 신자들과 이방 출신 신자들이 같은 주 예수님을 믿는 공동체로 살아가려는 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9:20에서 말한 대로, 유대 사람들을 얻기 위해 유대 사람처럼 되는 것은 율법의 구원 능력 아래 들어가는 일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자유를 사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자유로운 배려인가, 위험한 타협인가

한 해석은 바울이 복음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에서 유대 출신 신자들을 배려했다고 봅니다. 정결 예식 참여는 율법으로 구원받으려는 시도가 아니라, 불필요한 오해를 풀고 예루살렘 교회와의 관계를 지키려는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해석은 이 행동에 위험한 타협의 요소가 있었다고 봅니다. 소문을 해결하기 위해 외적인 율법 준수 행위를 제시하는 것이 오히려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었고, 실제로 그 방법이 갈등을 해결하지 못하고 바울의 체포로 이어졌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러나 바울이 정결 예식에 참여했기 때문에 붙잡혔다는 것과, 그 행동이 잘못이어서 하나님이 그를 벌하셨다는 것은 전혀 다른 주장입니다. 누가는 후자를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장로들의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도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때 바울이 그 사람들을 데리고 이튿날 그들과 함께 정결하게 되어 성전에 들어갔다. 그리고 정결하게 하는 날들이 언제 다 차는지 알렸다. 그 기간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바침이 바쳐질 때까지였다.사도행전 21:26 · 본디새김

그는 성전 밖에서 율법의 모든 관습이 무의미하다고 외치고 있지 않았습니다. 성전 안에서 유대 사람들의 정결 예식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 장면을 다른 사람들이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해석합니다.

조금 더 깊이

나실인 서원은 일정 기간 하나님께 자신을 특별히 구별하여 드리는 행위였습니다. 서원하는 동안 머리카락을 자르지 않고 특정한 음식과 접촉에 관한 규정을 지키며, 서원이 끝날 때 제물을 바치고 머리를 깎았습니다. 고대 유대 역사가도 서원과 관련된 비용을 부담하는 관습을 기록합니다. 다만 이 네 사람이 정확히 어떤 서원을 했는지, 바울이 참여한 정결 예식의 세부 과정이 무엇이었는지는 사도행전이 모두 설명하지 않습니다.

드로비모는 성전에 들어갔는가? — 본 것과 믿어 버린 것 사이의 거리

사도행전 21:27–29 본문 →

이레가 다 차 갈 무렵에 아시아에서 온 유대 사람들이 성전에서 그를 보고 온 무리를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에게 손을 대어 붙잡았다.사도행전 21:27 · 본디새김

아시아 속주는 바울이 에베소를 중심으로 오랫동안 복음을 전했던 지역입니다. 그들이 바울에 관해 이미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만, 직접 어떤 갈등을 겪었는지는 이 장이 밝히지 않습니다.

그들이 외쳤다. 「이스라엘 사람 여러분, 도와주십시오. 이 사람은 이 백성과 율법과 이곳을 거슬러 어디서나 모두를 가르치는 자입니다. 게다가 그리스 사람들까지 성전에 데리고 들어와 이 거룩한 곳을 속되게 했습니다.」사도행전 21:28 · 본디새김

이스라엘 백성, 율법, 성전. 이 고발은 스데반 사건을 떠올리게 합니다. 스데반도 모세와 하나님, 성전과 율법을 거스르는 말을 했다는 고발을 받았습니다(6:11–14). 두 사건이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신앙적 전통을 무너뜨리는 사람으로 고발되는 양상은 닮았습니다.

그런데 바울에게는 더 구체적인 혐의가 있습니다. 이방 사람들을 성전 안에 데리고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이것은 심각한 성전 모독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누가가 기록한 사건의 실제 근거는 무엇입니까?

그들이 전에 도시에서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가 그와 함께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그를 성전에 데리고 들어갔다고 여겼기 때문이다.사도행전 21:29 · 본디새김

드로비모는 앞 장에서 바울의 동행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소개되었습니다(20:4). 그러니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 바울과 그가 함께 있는 것을 보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다음입니다. 그들이 보았다는 말과 그들이 그렇게 생각했다는 말이 구별되어 있습니다. 본문은 드로비모가 성전에 들어갔다고 확정하지 않습니다. 고발은 심각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실제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방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복음을 전했고, 그들이 유대 사람의 관습을 모두 따라야 구원받는 것은 아니라고 가르쳤으며, 이방 출신 신자들이 실제로 그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관계 자체가 그를 의심하게 만드는 근거로 사용됩니다.

이방 사람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곧 거룩한 것을 더럽혔다는 의혹으로 발전한 것입니다.

조금 더 깊이

헤롯 시대에 확장된 성전 구역에는 이방 사람들도 들어갈 수 있는 바깥 공간이 있었지만, 더 안쪽 거룩한 구역으로 들어가는 것은 제한되었습니다. 그 경계에는 이방인이 더 들어가면 죽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경고가 적힌 비석들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이 경고문은 문헌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리스어 경고 비문의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그 문구는 이방인이 금지된 구역에 들어갈 경우 죽음에 대한 책임을 지게 된다는 취지였습니다.

「곧 문이 닫혔다」 — 성전 밖으로 끌려 나오는 바울

사도행전 21:30–36 본문 →

온 도시가 소란에 휩싸였고 백성이 몰려들었다. 그들은 바울을 붙잡아 성전 밖으로 끌어냈고, 곧 문이 닫혔다.사도행전 21:30 · 본디새김

도시가 소란에 휩싸이고, 사람들이 몰려들고, 바울이 끌려 나옵니다. 「온 도시」는 모든 주민이 빠짐없이 참여했다는 통계가 아니라 사건이 얼마나 빠르게 확대되었는지를 묘사하는 말입니다.

그리고 문이 닫힙니다.

누가는 누가 문을 닫았는지 말하지 않습니다. 성전을 지키던 사람들이 소란이 안쪽으로 번지지 않게 하려고 닫았을 가능성이 있지만, 이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또한 문이 닫힌 사건을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리셨다는 상징으로 곧바로 해석해서도 안 됩니다. 본문은 그렇게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이야기의 장면으로서 이 문장은 매우 강렬합니다. 바울은 율법을 존중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려고 성전에 들어갔다가, 성전을 모독했다는 혐의를 받고 밖으로 끌려 나옵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성전에 들어가는 마지막 장면입니다. 공동체 사이의 오해를 풀려던 시도는 군중의 폭력 속에서 끝납니다.

바울을 구한 것은 로마 군인들이었다

군중이 바울을 죽이려 할 때, 로마 부대의 천부장에게 소식이 올라갑니다. 천부장은 군인들과 백부장들을 데리고 달려 내려오고, 무리는 바울을 때리기를 멈춥니다.

바울을 죽이려 한 것은 그가 성전을 더럽혔다고 여겨 분노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를 구해 낸 사람들은 이방 통치자인 로마 군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복음을 믿어서가 아니라 소동을 진압하려고 개입했을 뿐인데, 그 과정에서 바울은 생명을 건집니다.

그리고 곧바로 쇠사슬에 묶입니다.

그때 천부장이 다가가 그를 붙잡고 두 쇠사슬로 묶이도록 명했다. 그리고 그가 누구이며 무엇을 했는지 물었다.사도행전 21:33 · 본디새김

아가보가 띠로 보여 준 일이 이제 현실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유대 사람들의 손에서 로마 군인들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다만 그를 묶으라고 명령한 것은 로마의 천부장이었습니다. 예언의 큰 방향은 실제 사건과 맞닿아 있지만, 세부 행동의 주체는 정확히 일치하지 않고, 누가는 이 차이를 해설하지 않습니다.

무리 가운데서 저마다 다른 것을 외쳤다. 천부장은 소동 때문에 확실한 사실을 알 수 없었으므로 바울이 병영으로 끌려가도록 명했다.사도행전 21:34 · 본디새김

에베소의 극장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것을 외쳤고, 대다수는 왜 모였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19:32). 많은 사람이 함께 소리치고 있지만, 그 소리만으로는 사건의 진실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군중의 확신과 실제 사실이 반드시 같은 것은 아닙니다.

폭력은 더욱 심해져, 층계에서는 군인들이 바울을 들어 옮겨야 합니다.

백성의 무리가 따라오며 「그자를 없애 버려라」 하고 외쳤기 때문이다.사도행전 21:36 · 본디새김

누가복음 23:18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없애 버리라고 외쳤던 소리가 들립니다. 예수님을 죽이라고 외쳤던 장면과,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을 죽이라고 외치는 장면이 겹쳐 보입니다. 예수님의 증인이 그분이 걸으신 길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군인들에게 들려 병영으로 끌려가던 바울이 뜻밖의 행동을 합니다.

조금 더 깊이

아가보의 예언에서는 유대 사람들이 바울을 묶어 이방 사람들의 손에 넘길 것이라고 했지만, 실제로는 무리가 바울을 때리고 죽이려 했고 로마의 천부장이 그를 두 쇠사슬로 묶으라고 명령합니다(21:30–33). 한 해석은 아가보의 상징적 행동이 세부 절차까지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유대 사람들의 적대적인 행동 때문에 바울이 로마의 구금 아래 들어가리라는 핵심을 보여 준 예언이라고 봅니다. 다른 해석은 누가가 예언과 사건 사이의 세부 차이를 그대로 남겨 두었다고 봅니다. 그러나 21장만으로 아가보가 예언을 잘못했다고 확정할 수도 없고, 기록되지 않은 사건을 덧붙여 차이를 없앨 수도 없습니다. 성전 구역 북서쪽에는 로마군이 주둔하던 안토니아 요새가 있어, 성전의 소요에 군대가 빠르게 개입할 수 있었습니다. 에베소의 소동은 아르테미스 숭배와 장인들의 경제적 이해가, 예루살렘의 소동은 성전의 정결과 율법에 관한 고발이 중심이므로 두 사건을 완전히 같은 종류로 볼 수는 없습니다. 36절의 외침은 누가복음 23:18과 같은 그리스어 동사를 사용합니다.

「그리스 말을 아느냐?」 — 군인이 생각한 바울과 실제 바울

사도행전 21:37–39 본문 →

바울이 병영으로 끌려 들어가려 할 때에 천부장에게 말했다. 「제가 천부장님께 한마디 해도 되겠습니까?」 천부장이 말했다. 「그리스 말을 아느냐?」사도행전 21:37 · 본디새김

조금 전까지 맞아 죽을 위험에 놓였던 사람이, 허락을 구하는 정중한 말로 천부장에게 말을 겁니다. 천부장이 놀란 이유는 다음 질문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면 너는 얼마 전에 소요를 일으켜 자객 사천 명을 이끌고 광야로 나간 그 이집트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냐?」사도행전 21:38 · 본디새김

1세기 중엽 유대 지역에는 로마의 통치에 반대하거나 예언자적 권위를 주장하며 사람들을 모으는 움직임들이 있었습니다. 고대 유대 역사가는 이집트 출신의 한 인물이 많은 사람을 올리브산으로 이끌고 예루살렘을 공격하려다 총독 벨릭스의 군대에 제압당한 사건을 기록합니다. 천부장은 군중의 소동을 보고 바울을 그런 위험한 반란 지도자로 의심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말했다. 「저는 유대 사람이고 길리기아 다소 사람이며, 이름나지 않은 도시의 시민이 아닙니다. 부탁드리니 백성에게 말하도록 허락해 주십시오.」사도행전 21:39 · 본디새김

다소는 길리기아의 중요한 도시였고, 그리스 문화와 학문 전통을 지닌 도시로도 알려져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배경을 밝혀 천부장의 잘못된 추정을 바로잡습니다.

그런데 그가 원하는 것은 신분을 확인하고 감옥에 들어가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을 죽이려던 바로 그 백성에게 다시 말하고 싶어 합니다. 사도행전에서 바울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할 때에는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일을 증언하는 일이 중심에 놓입니다. 독자는 그가 무죄를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이 전하는 예수님에 관해 말할 것이라고 예상하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자객」은 짧은 단검을 사용하던 암살자들을 가리키는 말로, 단검을 뜻하는 라틴어 sica와 연결됩니다. 고대 유대 역사가의 기록에는 그 이집트 사람의 추종자가 약 삼만 명이었다고 나와 사도행전의 사천 명과 다릅니다. 두 숫자가 각각 전체 추종자와 무장한 자객 집단을 가리켰을 가능성도 제시되지만, 차이를 정확히 설명할 자료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어로 요청하고 히브리 말로 이야기하다

사도행전 21:40 본문 →

천부장은 바울에게 허락합니다.

그가 허락하자 바울이 층계에 서서 백성에게 손을 저었다. 아주 조용해지자 그가 히브리 말로 그들에게 말했다.사도행전 21:40 · 본디새김

천부장에게는 그리스어로 말했던 바울이, 군중에게는 「히브리 말」로 말합니다. 그는 자신이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유대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감추지 않고, 그들의 언어로 이야기하려 합니다.

모세의 관습을 버리라고 가르친다는 소문을 바로잡으려다 성전을 더럽혔다는 혐의로 붙잡힌 그가, 이제 자기 백성의 언어로 직접 이야기하려 합니다. 그 말이 무엇인지는 다음 장에서 비로소 펼쳐집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원문은 테 헤브라이디 디알렉토, 곧 히브리어 또는 히브리계 언어라는 표현입니다. 이것이 당시의 히브리어를 가리키는지, 유대 지역에서 사용되던 아람어를 가리키는지에는 논쟁이 있습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두 언어가 모두 사용되었고, 고대 문헌에서 두 언어를 지칭하는 표현이 오늘날의 분류처럼 항상 명확하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히브리 말」이라는 표현을 존중하되, 그가 사용한 언어의 세부 형태까지 확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닫힌 성전 문 밖에서

사도행전 21:1–40 본문 →

닫힌 성전 문 밖에서 돌아보면, 이 장에는 두 종류의 갈등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을 사랑해서 가지 말라고 말리는 사람들과의 갈등이고, 다른 하나는 바울을 의심하고 적대하는 사람들과의 갈등입니다. 바울을 사랑해서 말리는 일과, 충분한 증거 없이 그를 고발하고 폭력을 행사하는 일을 같은 수준에 놓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두 이야기 모두 인간이 자신의 판단을 하나님의 뜻이나 실제 사실과 쉽게 동일시할 수 없다는 문제를 드러냅니다.

사도행전 21장은 하나님의 뜻을 알면 모든 사람이 같은 결론을 내린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영을 통해 경고를 받은 사람들과, 주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고난을 감당하려는 바울이 서로 다른 행동을 주장합니다. 누가는 그 긴장을 다 설명하지 않은 채 「주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는 고백을 기록합니다. 그 고백은 판단의 차이가 해소되었다는 뜻이라기보다, 자기들이 알 수 없고 통제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태도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고난을 감당하려는 이유는 자신의 용기를 증명하는 데 있지 않고 「주 예수의 이름」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한 구원을 이스라엘의 역사와 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복음은 유대적 정체성을 버리고 다른 종교적 정체성으로 갈아타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약속이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새롭게 이해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장에서 복음의 진리가 잘못되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진리를 서로 다른 배경의 사람들이 함께 살아 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가 드러납니다.

14절에서는 사람들이 바울을 설득하지 못해 잠잠해졌습니다. 40절에서는 바울이 말하려 하자 군중이 아주 조용해졌습니다. 첫 번째 침묵은 더 이상 바울을 설득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침묵이고, 두 번째 침묵은 바울이 이제 말할 수 있게 된 침묵입니다.

바울은 군인들에게 들려 층계 위로 옮겨졌습니다. 조금 전까지 사람들은 「그자를 없애 버려라」 하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그 아래에는 자신을 죽이려 했던 군중이 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 손을 저어 보입니다.

그러자 아주 조용해집니다.

그의 혐의가 벗겨진 것도 아니고, 그가 풀려난 것도 아닙니다. 성전의 문은 닫혔고, 그의 손에는 쇠사슬이 채워져 있습니다.

그러나 아주 조용해진 군중 앞에서, 바울은 자기 백성의 언어로 말을 시작하려 합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