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20장
이 장의 자리 · 13–20장 · 여러 도시로 떠난 길
떠난 뒤에 누가 돌볼 것인가
사도행전 20장의 마지막 장면에서 사람들이 울고 있습니다.
바울은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목을 끌어안고 거듭 입을 맞춥니다. 그들이 무엇보다 마음 아파한 것은 「여러분 모두가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바울의 한마디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람들에게 자신이 평생 그들과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리고 있습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떠난 뒤 교회에 사나운 이리들이 들어올 것이며, 심지어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사람들을 자기 뒤로 끌어가려는 이들이 일어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들을 누구에게 맡기고 떠납니까?
더 강한 지도자를 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없는 동안 교회를 완벽하게 지킬 제도를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이제 나는 여러분을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를 전하는 말에 맡깁니다」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사도행전 20장의 중심이 드러납니다.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훌륭하게 사역했는지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떠난 뒤에도 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바울 자신의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을 얻으신 하나님, 그들을 감독하도록 거룩한 영이 세우신 지도자들, 그리고 그들을 계속 세울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에 있습니다.
이 장에는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드로아에서는 밤새 말씀을 나눈 뒤 떠나고, 밀레도에서는 에베소의 장로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눕니다.
그런데 떠남의 이야기 한가운데에 뜻밖의 사건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유두고라는 젊은이가 삼층 창문에서 떨어집니다. 사람들은 그를 죽은 채로 들어 올립니다. 바울이 내려가 그를 껴안고, 얼마 뒤 사람들은 그를 살아 있는 채로 데려옵니다. 이 장면은 긴 설교를 듣다가 잠든 청년의 재미있는 일화가 아니라,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일을 보여 주며 이어지는 바울의 작별 인사를 다른 눈으로 읽게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목숨을 조금도 값진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유두고를 껴안았고, 장로들에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얻으신 양 떼를 아끼라고 당부합니다.
자기 목숨을 붙들지 않겠다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생명은 끝까지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 긴장이 사도행전 20장 전체를 관통합니다.
예루살렘을 향하는 길 — 바울은 왜 다시 여러 교회를 찾아가는가
에베소에서 소동이 그친 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권하고 작별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로 떠납니다.
그리고 그 지방을 지나가며 많은 말로 그들을 권한 뒤에 그리스로 갔다.사도행전 20:2 · 본디새김
바울은 새로운 지역을 개척하기보다 이미 복음을 전했던 지역들을 다시 찾아가고 있습니다. 마케도니아에는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베뢰아가 있었고, 그리스로 내려가면 고린도가 있는 아가야에 이르게 됩니다. 바울에게 복음 전파는 한 도시에서 사람들을 믿게 하고 다른 곳으로 떠나는 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미 믿게 된 사람들을 다시 찾아가 격려하고 굳게 하는 일도 그의 사역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누가는 그가 마케도니아에서 무슨 말을 했는지 기록하지 않고, 다만 「많은 말로 그들을 권했다」고 합니다. 이 장에서 바울은 계속 사람들을 격려하고, 가르치고, 타이릅니다. 드로아에서는 한밤중까지 이야기하고, 밀레도에서는 장로들에게 자신이 밤낮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타일렀다고 회상합니다.
이 장에서 바울의 말은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떠난 뒤에도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행동입니다.
그는 그리스에서 석 달을 지냅니다. 그런데 시리아로 배를 타고 떠나려던 순간, 유대 사람들이 그를 해치려고 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마케도니아를 거쳐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누가는 그 음모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바울은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들 앞에 일부러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위험을 피할 수 있을 때에는 경로를 바꾸었습니다. 그가 자신의 생명을 최종적인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는 것과, 그 생명을 함부로 취급한다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의 목적은 무조건 위험 속에 뛰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님에게서 받은 사역을 끝까지 감당하는 것입니다.
여러 도시에서 온 동역자들
4절에는 갑자기 여러 사람의 이름이 길게 등장합니다. 소바더, 아리스다고, 세군도, 가이오, 디모데, 두기고, 드로비모. 누가는 그들의 출신 지역까지 적어, 베뢰아와 데살로니가, 더베, 아시아 속주에 속한 사람들이 바울의 여정에 함께했음을 알립니다.
본문은 각 사람에게 어떤 임무가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지금 여러 지역의 신자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여정이 더 이상 그 혼자만의 여행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복음은 여러 도시에서 흩어져 살아가던 사람들을 하나의 관계망 안으로 연결하고 있었습니다.
한 도시의 교회가 다른 도시의 신자들을 생각하고, 서로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함께 길을 걷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통해 자신이 전한 복음이 단지 각 도시 안에 머무르지 않고 서로를 향해 움직이는 모습을 보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들」에서 「우리」로
이들은 와서 드로아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사도행전 20:5 · 본디새김
앞서 16장에서 드로아를 떠나 마케도니아로 건너갈 때 처음 나타났던 일인칭 복수 서술이 여기서 다시 시작됩니다. 누가는 이 「우리」가 누구를 포함하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저자가 직접 여행에 참여했다는 흔적으로 읽는 해석과, 동행자의 여행 기록을 자료로 사용했다는 해석이 모두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독자는 다시 바울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이동하는 듯한 서술 속으로 들어갑니다. 누룩 없는 빵을 먹는 절기가 지난 뒤, 일행은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도착해 이레를 지냅니다.
이제 누가는 여러 도시를 빠르게 지나던 여정을 잠시 멈추고, 드로아의 어느 다락방에서 보낸 하룻밤을 자세히 기록합니다.
그곳에 유두고라는 젊은이가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바울의 편지들을 읽으면 이 시기에 그가 다른 지역의 어려운 신자들을 위한 연보를 모으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고린도전서 16:1–4에서 바울은 예루살렘의 성도들을 위한 연보를 언급하며, 고린도 교회가 인정한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갈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로마서 15:25–27에서도 마케도니아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기꺼이 연보를 마련했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4절의 동행을 그러한 연보 전달과 연결해서 이해하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다만 사도행전 20:4 자체는 이 사람들이 모두 연보 전달을 위해 선택된 대표들이었다고 말하지 않으므로, 그들의 동행 목적을 하나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삼층 창문에서 떨어진 유두고 — 밤새 말씀을 듣던 공동체
한 주의 첫날에 우리가 빵을 떼려고 모였는데, 바울이 이튿날 떠나려던 참이라 그들에게 강론했고 한밤중까지 말을 이어 갔다.사도행전 20:7 · 본디새김
이 장면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입니다. 사람들은 한 주의 첫날, 곧 오늘날의 일요일에 해당하는 날에 모였고, 누가는 그 모임의 목적이 「빵을 떼려고」였다고 기록합니다. 드로아의 모임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공동 식사와 주의 만찬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들이 모인 목적은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라고 소개되지 않습니다. 「빵을 떼려고」 모였는데, 바울이 다음 날 떠나게 되었기 때문에 이야기가 길어집니다. 그리고 그 모임이 한밤중까지 이어집니다.
누가는 그 방에 등불이 여럿 있었다고도 기록합니다. 이야기가 어두운 밤에 벌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곳에서 유두고라는 젊은이가 창턱에 앉아 있었습니다.
유두고라는 젊은이가 창턱에 앉아 있다가 바울이 오래 강론하는 동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에 눌려 삼층에서 아래로 떨어졌고, 죽은 채로 들어 올려졌다.사도행전 20:9 · 본디새김
이 장면은 가끔 바울의 설교가 너무 길어서 청년이 잠들었다는 우스운 이야기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누가의 서술은 그렇게 가볍지 않습니다.
유두고가 왜 창턱에 앉아 있었는지, 낮 동안 얼마나 일을 했는지, 그가 얼마나 피곤한 상태였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울의 긴 강론이 사고의 상황을 형성한 것은 분명하지만, 유두고가 부주의한 사람이었다거나 예배 시간에 잠든 잘못 때문에 벌을 받았다고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누가는 「죽은 채로 들어 올려졌다」고 사고의 심각함을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바울이 내려가 그 위에 엎드려 껴안고 말했다. 「소란 피우지 마십시오. 그에게 목숨이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0:10 · 본디새김
9절의 「죽은 채로」와 10절의 「목숨이 붙어 있다」 사이에서, 유두고가 실제로 죽었다가 살아났는지, 아니면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살아 있었는지 해석이 갈립니다. 어느 쪽이든 바울이 취한 행동은 같습니다.
바울은 위층에 머물며 사람들에게 진정하라고 소리치지 않습니다.
아래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젊은이 위에 엎드려 그를 껴안습니다.
이 장면은 구약에서 죽은 아이를 위해 몸을 굽혀 엎드렸던 예언자들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열왕기상 17:17–24에서 엘리야는 죽은 아이를 위해 기도하며 그의 몸 위에 몸을 뻗고, 열왕기하 4:32–37에서도 엘리사는 죽은 아이 위에 몸을 굽혀 아이가 다시 살아나는 사건을 경험합니다. 누가는 바울이 그 예언자들의 행동을 의식적으로 모방했다고 설명하지 않지만, 죽음의 위기에 놓인 사람 위로 하나님의 사람이 몸을 굽혀 생명의 회복에 참여한다는 서사적 유사성은 분명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이미 베드로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뒤 죽은 다비다를 살리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9:36–42). 이제 바울의 사역에서도 죽음 앞에 놓였던 사람에게 생명이 회복되는 일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건들을 단순히 베드로와 바울이 예수님처럼 큰 능력을 지닌 인물이라는 증거로만 읽으면 중요한 차이를 놓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을 살리실 때 자신의 권위로 말씀하셨습니다(누가복음 7:11–17; 8:49–56). 반면 사도행전의 사도들은 살아나신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이 자신들의 사역 가운데 나타나는 사람들입니다.
누가가 보여 주는 것은 사도들이 예수님을 대신하는 또 다른 구원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생명 주시는 일이 그분의 증인들을 통해 계속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의 소동 뒤에 이어진 빵과 이야기
그리고 올라가서 빵을 떼어 먹고, 날이 밝을 때까지 오래 이야기한 뒤에 그렇게 떠났다.사도행전 20:11 · 본디새김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모임의 목적은 「빵을 떼려고」였습니다. 그리고 사고가 있은 뒤 실제로 빵을 떼어 먹었습니다. 중간에 심각한 사건이 있었지만, 그들이 모인 일이 완전히 중단된 채 끝나지는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한밤중까지 강론했고, 이제는 날이 밝을 때까지 오래 이야기합니다. 그들은 밤을 새우며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냅니다.
사람들은 그 아이를 살아 있는 채로 데려왔고 적잖이 위로를 받았다.사도행전 20:12 · 본디새김
마지막에 강조되는 것은 바울의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 아니라, 살아 있는 아이와 그를 보고 위로받은 사람들입니다. 처음에 바울은 여러 도시를 지나며 많은 말로 사람들을 권했습니다. 그런데 드로아에서는 말뿐 아니라 한 생명의 회복이 공동체에 위로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떠나지만, 유두고는 살아 있는 채로 공동체 안에 남습니다.
죽음의 위기가 있었던 밤은 생명의 회복과 함께 끝납니다.
조금 더 깊이
모임이 현대 시간 기준으로 토요일 저녁에 시작되었는지 일요일 저녁에 시작되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유대식 날짜 계산에서는 해가 진 뒤부터 다음 날이 시작되었고, 로마식 날짜 계산에서는 자정이 경계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42에서는 예루살렘의 신자들이 빵을 떼는 일에 힘썼다고 기록하고, 고린도전서 10:16–17과 11:23–26에서는 빵과 잔을 나누는 일이 예수님의 죽음을 기억하는 주의 만찬과 연결됩니다. 다만 7절만으로 당시의 예배 순서나 성찬의 정확한 진행 방식을 모두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등불 때문에 방이 덥거나 답답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지만, 본문은 그 원인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유두고에 관해서는, 첫 번째 해석은 9절의 「죽은 채로」를 그대로 받아들여 바울이 그를 껴안았을 때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셨다고 이해합니다(그리스어는 죽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을 씁니다). 두 번째 해석은 「그에게 목숨이 붙어 있다」는 바울의 말에 주목해, 사람들은 그가 죽었다고 판단했지만 바울은 아직 생명이 남아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이해합니다. 9절의 진술이 단순히 사람들의 오판이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실제 죽음과 회복의 사건으로 읽는 것이 서술의 흐름과 잘 어울리지만, 누가는 생명이 회복된 정확한 순간이나 의학적인 상태를 설명하지 않으므로 두 구절의 긴장을 모두 살려 읽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7절의 「강론하다」(디알레고마이)는 토론하거나 강론한다는 뜻이고, 11절의 「이야기하다」(호밀레오)는 함께 어울려 대화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이 차이만으로 공식적인 설교가 끝나고 사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모임이 한 사람이 계속 말하고 다른 사람들은 듣기만 하는 자리에 머물지 않았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에베소를 지나쳐 밀레도로 — 떠나는 사람에게 남은 시간
바울은 드로아를 떠나 앗소스까지 걸어가기로 합니다. 다른 동역자들은 배를 타고 먼저 출발합니다. 왜 바울이 혼자 육로를 선택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조용히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는 해석도 있지만, 본문이 그의 동기를 밝히지 않으므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누가는 일행이 다시 합류한 뒤 지나간 지역들을 차례로 기록합니다. 앗소스, 미틸레네, 키오스 맞은편, 사모스, 밀레도. 그런데 이 여행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습니다.
바울은 아시아 속주에서 지체하지 않으려고 배로 에베소를 지나쳐 가기로 정해 두었던 것이다. 될 수만 있다면 오순절 날에는 예루살렘에 가 있으려고 서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사도행전 20:16 · 본디새김
그는 에베소에서 오랫동안 사역했습니다. 회당에서 석 달 동안 토론했고, 두란노의 강의실에서는 두 해 동안 가르쳤습니다.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주의 말씀을 들었고, 어려운 일도 겪었습니다. 그런 도시를 다시 찾지 않고 지나갑니다.
그러나 에베소 사람들을 만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 교회의 장로들을 부릅니다.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일정 때문에 에베소에 직접 머무를 수는 없지만, 아무 말 없이 떠나지도 않습니다.
이 장면은 이제까지 사도행전에서 반복된 공개적인 설교와 다릅니다. 바울은 불신자들에게 복음을 처음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과 그 공동체를 돌보는 지도자들에게 말합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처음부터 논증하지 않습니다. 대신 자신이 그들 가운데서 어떻게 살았는지 회상하고, 앞으로 교회에 어떤 위험이 닥칠지 경고하며, 그들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당부합니다.
과거의 사역을 회상하는 이유는 지나간 일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떠난 뒤의 교회를 준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보다 먼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아십니다」 — 말보다 먼저 제시된 삶
그들이 그에게 오자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은 내가 아시아 속주에 발을 들인 첫날부터 줄곧 여러분과 함께 어떻게 지냈는지 아십니다.」사도행전 20:18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설득했는지, 얼마나 큰 기적을 행했는지, 몇 개의 교회를 세웠는지부터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청중이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장로들은 바울과 함께 지냈던 사람들이고, 바울은 이제 그들이 보아 온 삶의 의미를 다시 설명합니다.
「나는 온전히 낮은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며, 그리고 유대 사람들의 꾀로 나에게 닥친 시험을 겪으며 노예로서 주를 섬겼습니다.」사도행전 20:19 · 본디새김
낮은 마음, 눈물, 시험이 나란히 놓이고, 바울은 이 모든 일을 「노예로서 주를 섬겼습니다」라는 표현 안에 묶습니다. 이 말은 노예로 섬기거나 노예의 처지에서 일한다는 뜻을 지닙니다. 바울은 자신을 자유롭게 자신의 목적을 실현하는 독립적인 종교 지도자로 소개하지 않고, 자신이 주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그의 낮은 마음은 겸손한 척하는 태도가 아니라, 그가 섬기는 분이 자신보다 크신 주님이라는 데서 나옵니다.
그런데 주님을 섬기는 삶에 눈물이 함께 있었습니다.
연설의 뒤쪽에서 바울은 장로들에게 자신이 세 해 동안 밤낮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일렀다고 말합니다(20:31). 따라서 여기서 눈물은 자신이 겪은 고통의 흔적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염려와 돌봄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바울은 위험 속에서도 사역을 계속했지만, 그 사역을 감정과 관계가 없는 임무처럼 수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람들을 위해 울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로운 것이라면 무엇 하나 감추지 않고 알렸고, 공개적으로도 집집에서도 여러분을 가르쳤습니다.」사도행전 20:20 · 본디새김
바울은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빠짐없이 말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실제로 유익한 것을 감추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가르침의 목적은 얼마나 많은 지식을 전달했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지 않고, 듣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전하는 데 있습니다.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여러 사람이 함께 말씀을 들었을 것이고, 집집에서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과 상황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본문은 가정마다 어떤 방식으로 가르쳤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바울의 사역이 공식적인 강론의 자리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나는 유대 사람들에게도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엄히 증언했습니다.」사도행전 20:21 · 본디새김
이것을 두 단계로 나누어 먼저 회개를 완성해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돌아서는 일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은 복음에 대한 응답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을 떠나 있었던 삶의 방향을 그분께로 돌리는 일이고, 믿음은 그분을 주로 신뢰하는 일입니다.
바울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사람들의 배경에 따라 서로 다른 구원의 길을 제공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같은 하나님과 같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이었습니다.
여기서 바울의 연설은 새로운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어떻게 살았고 무엇을 가르쳤는지 이야기했습니다. 이제는 앞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미래를 그는 자세히 알고 있지 않습니다.
「영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 고난을 알지만 앞일은 모르는 사람
「이제 보십시오, 나는 영에 매여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거기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알지 못합니다.」사도행전 20:22 · 본디새김
「매여」는 묶이거나 결박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바울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여행하고 있다고만 설명하지 않고, 무엇인가에 붙들린 사람처럼 말합니다.
「영에」라는 표현은 거룩한 영에게 매여(δέω)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바울의 내적인 영 또는 강한 결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바로 다음 절에 거룩한 영이 명시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성령의 인도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견해가 있고, 22절 자체에서는 거룩한 영을 분명하게 지칭하지 않으므로 바울 자신의 내적인 결단으로 보는 해석도 가능합니다. 본문은 어느 한쪽을 확정하도록 모든 정보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향해야 한다는 강한 확신 속에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거기서 나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알지 못합니다」라고 말합니다.
가야 한다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모릅니다.
바울의 확신은 미래의 모든 사건을 미리 알고 있다는 확신이 아닙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이 보여 주실 땅으로 떠났고, 그 길의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알지는 못했습니다(창세기 12:1–4; 히브리서 11:8).
그런데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다만 거룩한 영이 도시마다 나에게 엄히 증언합니다. 사슬과 고난이 나를 기다린다는 것입니다.」사도행전 20:23 · 본디새김
바울은 미래를 자세히 모르지만, 고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은 압니다. 그것도 추측이 아니라 거룩한 영이 도시마다 증언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라면 위험이 줄어드는 방향을 예상하지만, 바울은 정반대의 상황에 있습니다. 거룩한 영의 경고가 언제나 위험을 피하라는 명령과 같지는 않으며, 앞으로 닥칠 일을 알게 하심으로써 그 일을 맞을 준비를 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신자가 위험한 일을 선택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규칙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본문은 바울에게 주어진 특별한 사명과 그 여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는 앞에서 자신을 해치려는 음모를 알았을 때 여행 경로를 바꾸었습니다. 두 행동 사이에 모순이 없는 것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기준이 위험의 유무가 아니라 자신이 맡은 사역을 감당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나는 내 목숨을 나에게 조금도 값진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내가 달릴 길을 다 달리고 주 예수에게서 받은 섬김을 완성하려는 것뿐입니다. 그 섬김은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복음을 엄히 증언하는 일입니다.」사도행전 20:24 · 본디새김
그러나 이 말을 생명을 하찮게 여긴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이미 드로아에서 죽음의 위기에 놓인 유두고를 위해 아래로 내려가 그를 껴안았고, 뒤에서는 약한 이들을 붙들어 주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가 가볍게 여기는 것은 생명 그 자체가 아니라, 자기 생명을 보존하는 일을 자신이 맡은 사명보다 더 중요한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놓치면 바울의 말을, 신앙을 위해서라면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아도 된다거나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에서도 무조건 희생해야 한다는 뜻으로 위험하게 오해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바울은 자신의 사명과 목숨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사용하는 이미지는 경주입니다. 「달릴 길」(δρόμος)은 달리는 길, 경주 또는 경주의 과정을 가리키며, 사도행전 13:25에서 세례자 요한이 자기 달릴 길을 마쳐 갈 때를 이야기할 때도 같은 낱말이 등장합니다. 요한은 자신이 가리키던 분이 오셨을 때 자기 역할을 마쳐 갔고, 이제 바울도 주 예수님에게서 받은 사역을 끝까지 감당하려 합니다. 두 사람의 사명은 같지 않지만, 자신의 삶을 하나님이 맡기신 일과 연결하여 이해한다는 점에서 닮았습니다.
그 사역은 바울이 스스로 만들어 낸 일이 아니라 「주 예수에게서 받은 섬김」, 곧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맡기신 일입니다. 그리고 그가 전해야 할 소식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위험에 내놓습니다.
그의 희생이 은혜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는 이미 하나님이 예수님 안에서 베푸신 일이고, 바울은 그 은혜를 전하라는 사명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얼마나 담대한가만이 아니라, 그를 붙들고 있는 복음이 무엇인가입니다.
「나는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에서 깨끗합니다」 — 가르치는 사람의 책임과 한계
「이제 보십시오,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내가 여러분 가운데서 두루 다니며 그 나라를 선포했는데, 여러분 모두가 다시는 내 얼굴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사도행전 20:25 · 본디새김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했고, 사슬과 고난이 기다린다는 사실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자신이 앞으로 죽을 것이라는 정확한 예언이라기보다, 당시 바울이 자신의 미래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는지를 보여 줍니다. 그는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작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증언합니다. 나는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에서 깨끗합니다.」사도행전 20:26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에스겔 3장과 33장의 파수꾼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예언자에게 악한 사람이 자신의 길에서 돌아서도록 경고할 책임을 맡기십니다. 경고해야 할 사람이 침묵하면 그 책임을 묻지만, 경고를 들은 사람이 돌이키지 않으면 그 선택까지 파수꾼에게 책임지우지는 않으십니다. 바울은 자신이 받은 복음 증언의 사명을 같은 책임의 언어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하나도 빠짐없이 여러분에게 감추지 않고 알렸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0:27 · 본디새김
여기서 「하나님의 뜻」은 뜻, 계획, 결정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이 표현은 예수님께 일어난 일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정해진 뜻과 미리 아심에 따라 넘겨지셨다고 말했고(2:23), 기도하는 공동체는 예수님에 대한 대적들의 행동까지도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계획과 연결하여 이해했습니다(4:27–28). 따라서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알렸다는 말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이루셨으며 그 일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전했다는 뜻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의 책임은 사람들이 모두 자기 말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전해야 할 진리를 감추지 않고 전하는 일입니다.
물론 이 말을 모든 설교자가 자신은 할 말을 다했으니 사람들의 상태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면책 선언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바로 다음에 장로들에게 양 떼를 돌보라고 명합니다. 사람의 믿음과 삶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은 지도자의 책임이 아니지만, 유익한 말씀을 감추지 않고 전하며 위험을 경고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돌보는 것은 지도자의 책임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 책임을 감당했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깁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목자로서 돌보게 했습니다」 — 양 떼는 누구의 것인가
「여러분 자신과 온 양 떼를 살피십시오. 거룩한 영이 그 양 떼 가운데 여러분을 감독으로 세워, 하나님의 교회를 목자로서 돌보게 했습니다. 그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얻으신 것입니다.」사도행전 20:28 · 본디새김
바울의 권면은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장로들 자신에게서 시작됩니다. 이어서 바울은 교회 안으로 들어올 위험뿐 아니라 지도자들 자신 가운데서도 일어날 위험을 경고하므로, 자신을 살피라는 명령은 실제적인 필요가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돌보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 그 사람을 위험에서 자동으로 보호해 주지는 않습니다.
지도자도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장로와 감독은 서로 다른 사람들인가
17절에서 바울이 밀레도로 부른 사람들은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28절에서는 그들을 살피고 감독하는 사람들, 곧 「감독」이라고 부릅니다. 두 명칭은 서로 다른 집단을 가리키지 않으며, 적어도 이 장면에서는 같은 지도자들의 역할을 설명하는 데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만 이것만으로 이후 교회사에서 발전한 모든 장로직과 감독직의 관계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이 장의 초점은 직분의 위계가 아니라 그 직분이 무엇을 위해 주어졌는가에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감독으로 세우신 분이 거룩한 영이라고 말하고, 그들이 해야 할 일을 목자로서 돌보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감독은 살피는 사람이고, 목자는 양 떼를 돌보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이 둘은 모두 양 떼를 자기 뜻대로 지배하기 위해 주어진 자리가 아닙니다.
그 양 떼가 지도자들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얻으신 교회
바울은 이어서 이 장에서 가장 무거운 말을 합니다. 「그 교회는 하나님이 자기 피로 얻으신 것입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이 자신의 피로 교회를 얻으셨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고, 하나님이 자기에게 속한 분, 곧 자기 아들의 피로 교회를 얻으셨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두 읽기 모두 언어적 논의의 대상이며, 이 구절만으로 하나를 의심의 여지 없이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해석을 택하든 교회는 하나님의 구원 행위로 얻어진 공동체이며, 그 구원은 예수님의 피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얻으신」은 하나님이 교회를 자신의 것으로 삼으셨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오랫동안 가르쳤고, 여러 사람이 복음을 듣고 믿었으며, 장로들이 그들을 돌보는 역할을 맡았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사람은 바울의 소유도, 장로들의 소유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것으로 얻으신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교회를 떠날 수 있는 이유와, 장로들이 교회를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이유가 같은 곳에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께 속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는 자신이 없으면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이유가 되고, 장로들에게는 자신들이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맡겨진 양 떼를 돌보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이유가 됩니다.
목자는 양 떼를 돌볼 책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양 떼를 소유한 것은 아닙니다.
이 사실을 잊는 순간, 돌봄은 쉽게 지배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리들은 밖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나는 알고 있습니다.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 들어와 양 떼를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사도행전 20:29 · 본디새김
이리는 양 떼를 돌보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해치기 위해 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위험이 외부에서만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여러분 자신 가운데서도 사람들이 일어나 뒤틀린 말을 하며 제자들을 자기들 뒤로 끌어가려 할 것입니다.」사도행전 20:30 · 본디새김
바울은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가르침이 사람들을 어디로 이끄는가의 문제를 함께 말합니다. 뒤틀린 말의 결과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대신 특정한 사람의 뒤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돌봄을 맡은 사람이 소유하려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 위험을 경고하는 이유는 모든 의견 차이를 거짓 가르침으로 규정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초대 교회 안에도 여러 실제적인 판단 차이가 있었고, 바울 자신도 동역자와 갈라선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경고하는 것은 사람들을 자신에게 종속시키기 위해 가르침을 왜곡하는 태도입니다. 따라서 교회의 가르침을 분별할 때는 그 말이 성경과 복음에 합당한지뿐 아니라, 그 말이 사람들을 예수님을 따르게 하는지, 아니면 가르치는 사람 자신에게 묶어 두려 하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으십시오. 내가 세 해 동안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한 사람 한 사람을 타이르기를 그치지 않은 것을 기억하십시오.」사도행전 20:31 · 본디새김
처음에 등장했던 눈물이 다시 나오고, 이번에는 그 눈물이 누구를 향한 것이었는지 더욱 분명합니다. 바울은 사람들을 막연한 집단으로만 대하지 않고 각 사람을 타일렀습니다. 바울이 장로들에게 기억하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강력한 설교 능력이 아니라, 자신이 사람들을 어떻게 돌보았는가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 사람들을 다른 분에게 맡깁니다.
조금 더 깊이
28절에는 문법적·본문비평적 쟁점이 있습니다. 여러 사본이 지지하는 읽기는 「하나님의 교회」이지만, 일부 그리스어 사본에는 「주의 교회」라는 읽기도 있으며 두 형태 모두 오래된 사본들의 지지를 받습니다. 또 「자기 피로」에 해당하는 디아 투 하이마토스 투 이디우는 두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의 피를 통해」로, 하나님이 자신의 피로 교회를 얻으셨다는 강한 표현이 됩니다. 기독교의 그리스도론에서는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을 함께 고백한다는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자기에게 속한 분의 피를 통해」로, 「자기에게 속한 분」을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피로 교회를 얻으셨다는 뜻이 됩니다. 이 해석에서는 원문에 직접 적혀 있지 않은 「아들」을 문맥에 따라 보충하여 이해합니다. 장로와 감독의 관계에 관해서는, 교회의 조직과 직분이 시대와 지역에 따라 어떻게 발전했는지는 별도의 역사적 연구가 필요한 문제입니다.
「여러분을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를 전하는 말에 맡깁니다」 — 떠나는 사람이 남기는 것
「이제 나는 여러분을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를 전하는 말에 맡깁니다. 그 말이 여러분을 세우고, 여러분에게 거룩해진 모든 이와 함께 누릴 유업을 줄 수 있습니다.」사도행전 20:32 · 본디새김
지금까지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이야기했고, 무엇을 가르쳤는지 설명했고, 앞으로 어떤 위험이 올 것인지 경고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이 무엇을 의지해야 합니까?
바울은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떠나더라도 과거에 했던 말을 하나하나 기억하여 완벽하게 재현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맡깁니다」는 누군가를 다른 이의 보호와 돌봄에 맡긴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교회를 혼자 남겨 두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맡깁니다.
바울은 자신의 역할과 하나님의 역할을 구별하고 있습니다. 그는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가르쳤지만, 사람들을 끝까지 세우고 완성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교회의 마지막 안전장치로 남겨 놓지 않습니다. 그가 떠난 뒤에도 남아 있는 것은 바울의 권위보다 더 깊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 말씀은 그들을 세우고, 거룩해진 모든 이와 함께 누릴 유업을 줍니다. 「세우다」는 공동체가 자라고 굳게 세워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바울은 자신이 떠난 뒤 교회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 소망을 지도자들의 능력에만 두지 않습니다.
유업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몫과 약속된 기업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약속의 땅이 중요한 유업이었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면서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누릴 유업이 더욱 넓은 의미로 나타납니다. 「거룩해진 모든 이와 함께」라는 표현처럼, 그 유업은 특정한 지도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모든 이와 함께 누릴 몫입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바울의 부재로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말씀은 여전히 그들을 세울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믿기 때문에 사람들을 맡기고 떠날 수 있습니다.
「이 두 손이 필요한 것을 마련했습니다」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바울은 작별 연설의 마지막에서 다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이번에 그가 보여 주는 것은 설교나 가르침이 아닙니다.
자신의 두 손입니다.
「나는 누구의 은도 금도 옷도 탐내지 않았습니다.」사도행전 20:33 · 본디새김
「여러분 자신이 아십니다. 이 두 손이 나 자신과 나와 함께 있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했습니다.」사도행전 20:34 · 본디새김
그가 어떤 일을 했는지 사도행전 18장은 이미 알려 주었습니다. 그는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천막을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이번에 바울은 생계를 유지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 있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까지 마련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함께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도 일했습니다.
네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예수님의 말씀
「나는 이렇게 애써 일해 약한 이들을 붙들어 주어야 하고 주 예수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을 모든 일에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분 자신이 말씀하셨습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사도행전 20:35 · 본디새김
「약한 이들」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킬 수도 있고, 몸이 약하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포함할 수도 있습니다. 문맥에서 바울은 자신의 노동과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연결하고 있으므로 경제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그 범위를 경제적 빈곤에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를 돌보라는 당부와 이리들에 대한 경고 끝에 돈과 노동의 문제가 등장하는 것은, 교회를 돌보는 사람에게 돈이 그저 사적인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돌보아야 할 지도자가 오히려 사람들의 재산을 탐낼 수 있고, 섬김을 맡은 사람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이익을 얻으려 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지도자가 언제나 무보수로 일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규칙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9:3–14에서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생활할 권리가 있다는 사실도 설명합니다. 그는 자신이 맡은 사람들을 이용해 부를 쌓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을 돕기 위해 일했다는 사실을 본보기로 제시합니다.
양 떼는 목자의 소유가 아닙니다.
목자는 양 떼를 통해 자기 이익을 얻기 위해 세워진 사람이 아니라, 양 떼를 돌보도록 세워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설명의 마지막에 바울은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어디에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 말을 주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라고 소개합니다. 사도행전 20:35는 네 복음서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신약성경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으로 전해지는 특별한 사례입니다.
이 말은 단순히 다른 사람에게 물건을 많이 나누어 주라는 교훈이 아닙니다. 바울은 두 손으로 일해 필요한 것을 마련하고 약한 이들을 붙들어 주는 삶의 마지막 근거로 이 말씀을 제시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주는 것’은 자신의 시간과 노동, 재산과 능력을 다른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데 사용하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반대로 ‘받는 것’이 언제나 잘못된 행동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약한 사람은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수도 있고, 바울 자신도 다른 교회들로부터 지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받는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기 위한 말이 아니라, 주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는 선언입니다.
양 떼를 얻으신 분과 양 떼를 돌보는 사람
바울은 28절에서 하나님이 교회를 자기 피로 얻으셨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는 예수님께서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고 말씀하셨다고 전합니다. 두 구절은 직접적인 인용 관계는 아니지만, 하나님이 교회를 얻으신 일이 예수님의 피를 통해 이루어졌으므로 교회를 돌보는 사람의 섬김도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방향이어야 한다는 연결을 이룹니다.
물론 장로들이 예수님과 동일한 방식으로 교회를 구원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교회를 얻으신 구원의 사건이고, 장로들의 돌봄은 그 은혜로 얻어진 사람들을 섬기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사건이 돌봄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양 떼를 얻으신 분은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양 떼를 돌보는 사람도 자기 것을 얻으려 하기보다 사람들을 위해 내어 주어야 합니다.
그 손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손이었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의 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손은 마지막 장면에서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는 바울의 손이 됩니다.
조금 더 깊이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문서뿐 아니라 구전으로도 전해졌을 것이며,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되다」 역시 그러한 전승을 통해 알려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바울이 정확히 누구에게서 이 말씀을 들었는지, 예수님께서 어떤 자리에서 이 말씀을 하셨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또 요한복음 10:11에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좋은 목자라고 부르시며, 좋은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사도행전 20장의 목자 이미지와 주제적으로 이어집니다.
무릎을 꿇고 함께 우는 사람들
바울의 연설은 여기서 끝납니다.
누가는 장로들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앞으로 교회를 어떻게 운영하기로 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말을 하고 바울은 그들 모두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사도행전 20:36 · 본디새김
바울은 장로들보다 높은 자리에 서 있지 않습니다. 그는 그들을 가르쳤지만, 이제는 그들과 함께 기도합니다. 그가 맡았던 책임과 그들이 앞으로 맡아야 할 책임은 다르지만, 기도하는 자리에서는 모두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이제 실제로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모두가 크게 울었다. 그리고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거듭 입을 맞추었다.사도행전 20:37 · 본디새김
바울은 에베소에서 눈물로 주를 섬겼고, 세 해 동안 밤낮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로 타일렀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지막 인사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은 바울만이 아닙니다.
처음에는 그가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는 그 사람들이 그와 헤어지며 눈물을 흘립니다.
사람들은 다시는 바울의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고 한 그 말 때문에 무엇보다 마음 아파했다. 그리고 그를 배까지 배웅했다.사도행전 20:38 · 본디새김
그들이 가장 슬퍼한 것은 이리들이 들어온다는 경고가 아니라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한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함께 시간을 보냈고, 그의 가르침을 들었으며, 그의 눈물과 노동을 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가 떠난다는 것은 설교자가 바뀌는 일이 아니라, 함께 살아온 한 사람과 헤어지는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장로들에게 「여러분은 내가 어떻게 지냈는지 아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눈물은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마지막 대답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붙잡아 두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사랑했지만, 그를 자신들의 곁에 영원히 머물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바울도 그들을 사랑했지만, 자신의 사명을 버리고 그곳에 계속 머물 수는 없었습니다. 깊은 관계였기 때문에 눈물이 있었고, 그 관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울면서도 그를 배까지 배웅합니다.
배까지 배웅한 사람들
사도행전 20장에는 서로 다른 두 이별이 등장합니다. 드로아에서는 바울이 공동체와 밤을 새운 뒤 떠나고, 밀레도에서는 에베소의 장로들과 함께 울고 기도한 뒤 떠납니다. 드로아에는 유두고가 살아 있는 채로 남고, 에베소에는 양 떼를 돌보도록 세워진 장로들이 남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다는 것이 하나님도 떠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회는 특정한 지도자가 계속 곁에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것으로 얻으신 공동체이며, 그 안에는 거룩한 영이 세우신 지도자들과 그들을 계속 세울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의 돌봄이 중요했던 것도 그가 대단해서만이 아니라, 그가 돌본 사람들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지도자는 사람들이 자기 없이는 살아갈 수 없도록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신이 떠난 뒤에도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 안에 설 수 있도록 돕는 사람입니다.
밀레도의 바닷가로 사람들이 걸어갑니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사람들은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거듭 입을 맞춥니다. 누가는 그들이 얼마나 오래 울었는지, 바울이 어떤 마지막 말을 더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이 장의 처음부터 바울은 계속 길을 떠났습니다. 위험 때문에 경로를 바꾸기도 했고, 여러 도시의 신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머물기도 했습니다. 드로아에서는 유두고가 살아 있는 것을 보고 사람들이 위로받았지만, 바울은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이제 밀레도에서도 떠나야 합니다.
바울이 이들에게 맡기고 가는 것은 자신의 부재를 채울 또 다른 사람만이 아닙니다. 그는 그들을 하나님께 맡겼고, 그들이 돌보아야 할 양 떼 역시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일러 주었습니다.
바울은 배를 향해 갑니다.
장로들은 그를 배까지 배웅합니다.
그들이 이제부터 살아가야 할 곳은 배 위가 아니라, 바울이 없는 에베소입니다. 그곳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교회가 있고, 그들이 살피고 돌보아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떠납니다.
그리고 그들은 돌아가서 양 떼를 돌보아야 합니다.
그 양 떼는 바울이 남기고 가는 자기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얻으신 사람들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