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19장
이 장의 자리 · 13–20장 · 여러 도시로 떠난 길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과 아는 사람
에베소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바울을 통해 예사롭지 않은 기적들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퍼지자, 떠돌아다니며 영을 쫓아내던 사람들이 그 방법을 흉내 내기 시작합니다. 그들은 「바울이 선포하는 그 예수의 이름으로」 나쁜 영에게 명령합니다. 그런데 나쁜 영이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예수는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안다. 그런데 너희는 누구냐?」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정확히 불렀습니다. 하지만 바울에게 일어났던 일은 그들에게 일어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은 공격당하고 벌거벗고 다친 채 달아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몰랐던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을 자기들이 부리던 다른 영적 능력처럼 사용하려 했습니다.
이 장에서 누가는 반복해서 같은 질문을 던지는 듯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이름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그 이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속한다는 뜻입니까?
이 질문은 에베소의 마지막 장면까지 이어집니다. 마술을 부리던 사람들은 값비싼 책들을 가져와 불태웁니다. 반면 은장이 데메드리오는 아르테미스 여신을 위한 물건으로 벌던 수입이 바울의 복음 때문에 위협받자 사람들을 선동합니다.
한쪽에서는 자신이 의지하던 마술의 책들을 버리고, 다른 쪽에서는 자신이 의지하던 신상의 시장을 지키려고 싸웁니다.
그 사이에 예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에베소에서 누가가 보여 주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의 능력이 다른 종교의 능력보다 강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신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이용하려는 방식 자체가 살아나신 예수님 앞에서 어떻게 흔들리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장의 마지막에는 온 도시가 모여 두 시간 동안 「에베소 사람들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다」고 외칩니다. 그러나 그 앞에서 누가는 이미 「주 예수의 이름이 높임을 받았다」고 기록했습니다. 두 이름을 높이는 두 장면 사이에서, 에베소라는 도시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요한의 세례만 알던 사람들 — 기다리던 분이 이미 오셨다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 아볼로는 고린도에 있었습니다.
앞 장에서 아볼로는 예수님에 관해 정확하게 가르치면서도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사람들 역시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누가는 두 이야기를 나란히 놓지만, 이들이 아볼로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이 믿게 되었을 때에 거룩한 영을 받았습니까?」 그들이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거룩한 영이 있다는 말조차 듣지 못했습니다.」사도행전 19:2 · 본디새김
바울이 그들에게 부족한 것을 어떤 방식으로 알아차렸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이 대답을 곧바로 그들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영이라는 개념 자체를 몰랐다는 뜻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뒤에 오시는 분이 거룩한 영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선포했기 때문입니다(누가복음 3:16).
그래서 이 대답에는 두 가능성을 열어 두어야 합니다. 거룩한 영 자체에 관한 지식이 부족했을 수도 있고, 예수님을 통해 거룩한 영이 주어지는 새로운 때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원문은 문자적으로 거룩한 영이 있는가 하는 표현이지만, 요한복음 7:39가 거룩한 영의 선물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비슷한 표현으로 나타내듯 뒤의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말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 그들이 말했다. 「요한의 세례입니다.」사도행전 19:3 · 본디새김
여기서 질문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바울은 거룩한 영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계속 시험하지 않고, 그들이 어떤 세례를 받았는지 묻습니다.
바울이 말했다. 「요한은 자기 뒤에 오시는 분, 곧 예수를 믿으라고 백성에게 말하면서,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사도행전 19:4 · 본디새김
바울은 요한의 세례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하나님께 돌아서라는 회개의 세례였습니다. 그러나 요한의 사역은 자기 자신에게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이 부족하게 알고 있었던 것은 세례의 방법이나 형식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이 가리키던 분이 누구인지, 그분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셨는지가 문제였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앞으로 오실 분을 기다리게 했고, 이제 바울은 그 기다림의 대상이 이미 오셨다고 선포합니다.
이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이어서 바울이 손을 얹자 거룩한 영이 그들 위에 임하고, 그들은 혀로 말하며 예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제자들은 거룩한 영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도행전 1:5). 오순절에는 제자들이(2:1–4), 사마리아에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8:14–17), 고넬료의 집에서는 이방 사람들이(10:44–48) 영을 받았습니다. 이제 예루살렘을 멀리 떠나온 에베소에서 요한의 세례만 알던 사람들도 거룩한 영을 받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는 과정이 언제나 동일하게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고넬료의 집에서는 세례를 받기 전에 거룩한 영이 임했고, 여기서는 세례를 받은 뒤 바울이 손을 얹자 영이 임합니다. 따라서 이 순서를 모든 신자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보편적인 단계로 규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은 그들의 이전 믿음을 세세하게 정의하지 않고, 지금 일어난 변화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도시에서 계속 하나님의 나라를 전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들이 예수님을 믿기 전에 어느 수준의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지, 사도행전이 그들을 어떤 의미에서 「제자」라고 부르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그들이 이미 그리스도인이었지만 성령을 받는 경험이 뒤따른 것으로 보는 해석이 있고, 아직 요한의 세례 단계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또 누가는 그들이 「남자 열두 명쯤」이었다고 기록합니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 예수님의 열두 사도를 떠올리게 하지만, 누가는 그 상징적인 의미를 설명하지 않고 「열두 명쯤」이라고 말하므로, 이 숫자만으로 새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상징하도록 의도했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회당에서 두란노의 강의실로 — 말씀은 장소를 옮기며 퍼져 나간다
그는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거리낌 없이 말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두고 토론하고 설득했다.사도행전 19:8 · 본디새김
이전 장들에서 누가는 바울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증언했다고 반복해서 기록했습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두고 토론하고 설득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에 관한 복음은 서로 분리된 주제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자신이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일을 말씀하셨고(1:3), 바울과 바나바도 많은 환난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14:22).
그러나 몇 사람이 완고해져 믿기를 거부하고 무리 앞에서 그 길을 헐뜯었다. 그래서 그는 그들에게서 떠나 제자들을 따로 떼어 놓고, 날마다 두란노의 강의실에서 토론했다.사도행전 19:9 · 본디새김
「그 길」은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과 그 공동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바울은 회당을 떠나지만, 도시를 떠나지는 않습니다.
회당에서는 석 달 동안 토론했습니다. 이제는 두란노의 강의실에서 날마다 토론합니다.
다른 도시에서는 반대가 심해지면 떠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에서처럼 에베소에서도 바울은 장소를 옮겨 가르칩니다.
이 일이 두 해 동안 이어졌다. 그래서 아시아 속주에 사는 이들이 유대 사람이든 그리스 사람이든 모두 주의 말씀을 들었다.사도행전 19:10 · 본디새김
누가는 한 번의 놀라운 설교나 한순간의 기적으로 아시아 전역에 복음이 퍼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이어진 말씀의 가르침이 있었습니다.
에베소는 로마의 아시아 속주에서 중요한 항구이자 행정·상업 중심지였습니다. 사람들이 모이고 다시 흩어지는 곳이었으므로, 그곳에서 지속적으로 가르친 말씀이 다른 지역에 전해졌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아시아 속주는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 일행이 말씀을 전하려다 거룩한 영에게 막혔던 지역이기도 합니다. 그때에는 들어가려는 길이 막혔습니다. 이제는 그 지역에서 주의 말씀이 널리 들립니다.
기적과 소동이 이어질 에베소 이야기의 중심에, 날마다 한 강의실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 놓여 있습니다. 누가는 그 지속적인 가르침의 결과를 이야기한 뒤에야 예사롭지 않은 기적들을 소개합니다.
조금 더 깊이
「강의실」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낱말은 본래 여가나 한가한 시간을 뜻하다가 학문적 토론이나 교육이 이루어지는 장소를 가리키게 된 말이며, 오늘날 영어의 school도 이 낱말과 어원적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두란노가 누구였는지, 이 강의실의 소유자였는지 교사였는지 다른 방식으로 관련되어 있었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또 10절의 「모두」를 아시아 속주 주민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바울의 설교를 직접 들었다는 통계적인 진술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과정에 어떤 사람들이 참여했고 각 도시의 공동체가 언제 형성되었는지도 이 장은 자세히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몸에 닿았던 수건 — 능력을 행사하시는 분은 누구인가
하나님이 바울의 손을 통해 예사롭지 않은 기적들을 행하고 있었다.사도행전 19:11 · 본디새김
바울이 기적을 행하고 있었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행하고 계셨습니다.
바울의 손은 그 일이 이루어지는 통로입니다.
그래서 수건이나 앞치마가 그의 몸에서 병든 이들에게 옮겨지기까지 했다. 그러면 병이 그들에게서 물러가고 나쁜 영들이 나갔다.사도행전 19:12 · 본디새김
수건과 앞치마는 평범한 물건입니다. 이 물건들이 바울의 노동과 관련된 것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는 앞 장에서 천막을 만드는 일에 종사했던 사람으로 소개되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이 바울의 몸에 닿았던 물건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여자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누가복음 8:43–48). 그러나 거기서는 한 여자가 직접 그분의 옷에 손을 댔고, 여기서는 바울의 몸에 닿았던 천이 다른 사람들에게 옮겨집니다.
누가는 이 물건들이 본래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그것을 사용해 기적을 행하는 방법을 가르쳤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이 사건을 특정한 사람에게 닿았던 물건을 가져다 놓으면 병이 낫는다는 보편적인 원리로 바꾸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본문의 설명은 처음부터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바울을 통해 예사롭지 않은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
누가는 이 사건을 소개한 직후, 누군가가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해 같은 능력을 얻으려다가 실패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바울의 몸에 닿은 천이 옮겨졌을 때에는 하나님이 기적을 행하셨는데, 다른 사람들이 바울이 선포하는 예수님의 이름을 입으로 불렀을 때에는 아무런 권위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조금 더 깊이
수건으로 옮긴 낱말은 라틴어 sudarium에서 온 말로 땀을 닦는 천이나 작은 수건을 가리키고, 앞치마로 옮긴 낱말 역시 라틴어 계통으로 몸에 두르는 작업용 천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다만 이 절이 이 천들이 반드시 바울의 노동 현장에서 쓰이던 물건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너희는 누구냐?」 — 예수의 이름은 부릴 수 있는 주문이 아니다
에베소에는 영을 쫓아내는 일을 하던 유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고대 유대 세계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모두 알려져 있었으며, 신적인 이름을 부르거나 특정한 말과 의식을 사용하는 방식도 있었습니다.
떠돌아다니는 유대 사람 가운데 영을 쫓아내는 이 몇도 나쁜 영을 지닌 이들에게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보려 했다. 그들이 말했다. 「바울이 선포하는 그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엄히 명한다.」사도행전 19:13 · 본디새김
바울은 16장에서 여종을 얽매고 있던 영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에게 명한다」고 말했습니다(16:18). 에베소의 사람들은 「바울이 선포하는 그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자신들이 알고 믿으며 따르는 분이 아니라, 바울이 선포하는 분입니다. 그들은 바울이 사용하는 이름을 자신들도 사용해 보려 합니다.
누가는 스게와라는 유대 사람 대제사장의 일곱 아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사건은 예상 밖으로 흘러갑니다.
나쁜 영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했다. 「예수는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안다. 그런데 너희는 누구냐?」사도행전 19:15 · 본디새김
두 이름이 인정된 뒤 세 번째 사람들의 권위가 거부됩니다. 나쁜 영은 이름을 부른다는 사실 자체를 권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어서 그 영이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둘을 눌러 이기고, 그들은 벌거벗고 다친 채 집에서 달아납니다. 남의 몸에 있는 영을 쫓아내려고 들어간 사람들이 오히려 쫓겨나고, 영을 제압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그 영에게 제압당합니다.
이 일이 에베소에 사는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 모두에게 알려졌다. 그리고 두려움이 그들 모두를 덮쳤고 주 예수의 이름이 높임을 받았다.사도행전 19:17 · 본디새김
왜 이런 실패가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졌을까요? 예수님의 이름을 다른 영적 기술처럼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은 단지 소리 내어 부르면 원하는 결과를 얻는 주문이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이름은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주님의 권위를 가리킵니다. 사도들이 그분의 이름으로 행동한다는 것은 그분의 권위 아래에서 그분을 증언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성전 문 앞에서 걷지 못하던 사람을 일으킬 때 자신들의 능력이나 경건함으로 그를 걷게 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사도행전 3:12–16).
예수님의 이름을 아는 것과 그 이름을 자기 소유물처럼 사용하는 것은 다릅니다.
이 장면을 지나면 바울의 몸에 닿았던 천을 통해 기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도 달리 보입니다. 그 천에 특별한 영적 힘이 저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병이 나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기적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기적을 인간이 조종할 수 있는 기술로 바꾸는 일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조금 더 깊이
스게와는 「대제사장」으로 소개되지만,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예루살렘 대제사장 명단에서 그와 같은 인물을 확실하게 찾을 수는 없습니다. 이 표현이 실제 대제사장 직무를 가리키는지, 대제사장 가문이나 고위 제사장 신분을 넓게 가리키는지, 주장된 지위를 반영하는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으며, 본문만으로 그가 거짓으로 직함을 사용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15절의 두 「안다」는 서로 다른 동사로 표현되지만, 그것을 근거로 예수님과 바울에 관한 지식의 수준에 정교한 차이가 있다고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16절에서 「둘」로 옮긴 낱말은 당시 「모두」라는 뜻으로도 쓰였습니다. 일곱 아들이 이런 활동을 했다는 일반적인 설명 뒤에 그 가운데 두 사람이 겪은 사건이 기록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서술이 압축되어 있어 구체적인 참여 인원과 과정은 완전히 밝혀지지 않습니다.
불타는 마술책 — 믿게 된 사람들이 자기 삶을 드러내다
스게와의 아들들에게 일어난 사건이 에베소에 알려진 뒤, 뜻밖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믿게 된 이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잇따라 와서 자기가 한 일을 고백하고 알렸다.사도행전 19:18 · 본디새김
누가는 이들이 이제 처음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믿게 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가 찾아와 자신의 행위를 고백했습니다. 그들이 한 일을 하나하나 밝히지는 않지만, 이어지는 19절을 보면 마술과 관련된 행위가 중요한 문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술을 부리던 이들 가운데 적지 않은 사람이 책을 모아 와 모두 앞에서 태웠다. 그리고 그 값을 셈해 보니 은전 오만 닢에 해당했다.사도행전 19:19 · 본디새김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마술은 오늘날의 무대 마술과 달랐습니다. 특정한 신적 이름이나 주문, 의식과 부적 등을 통해 초자연적인 힘을 얻거나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는 행위였고, 사람들은 병을 고치거나 자신을 보호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기 위해 그러한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책에는 주문이나 의식을 행하는 방법, 신적인 이름을 사용하는 방식 등이 적혀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책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습니다.
모두 앞에서 불태웁니다.
다른 사람에게 팔아서 돈을 회수하지도 않습니다. 자신들이 의지하던 방식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끊어 내는 것입니다. 그 책들이 담고 있던 지식과 기술을 더 이상 자신들이 의지할 힘으로 삼지 않겠다는 행동입니다.
스게와의 아들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주문처럼 사용하려다 실패했습니다. 이미 믿게 된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여전히 과거의 마술적 관습에 의지하고 있던 사람들이 있었다면, 그 사건은 자신들이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가는지 다시 돌아보게 했을 것입니다.
회심은 단순히 종교적 소속을 바꾸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자신에게 실제로 안전과 능력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는 다른 수단을 계속 붙잡고 있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이 이제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로 이어진 것입니다.
은전 오만 닢이라는 숫자
누가는 불태운 책들의 값을 따로 셈했다고 기록합니다. 본문이 의도적으로 커다란 액수를 기록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들이 포기한 것은 거의 가치가 없는 물건들이 아니라, 상당한 경제적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던 책들이었습니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은장이 데메드리오가 등장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 숫자는 더욱 의미심장해집니다. 한쪽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자신들이 가진 것을 버립니다. 다른 쪽에서는 자신들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신의 이름을 높입니다.
그렇게 주의 말씀이 힘차게 자라고 세력을 얻었다.사도행전 19:20 · 본디새김
이 표현은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고 퍼져 간다는 반복적인 주제와 이어집니다(6:7; 12:24). 누가는 교회가 재산을 얻게 되었다고도, 마술책을 불태운 사람들이 그 가치를 교회에 헌금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가치가 사라졌는데, 주의 말씀은 자라고 강해졌습니다.
여기서 말씀의 능력은 돈이나 물건을 더 많이 소유하는 것으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는지가 바뀌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에베소는 고대 세계에서 마술과 관련된 전통으로도 알려져 있었고, 「에베소의 글자들」이라고 불리던 주술적 문구들은 고대 문헌에서도 언급됩니다. 다만 19장의 책들이 바로 그 문구들만을 담고 있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은전 오만 닢」의 원문은 은의 가치가 오만 단위였다는 뜻의 표현일 뿐 구체적인 화폐 종류를 명시하지 않습니다. 드라크마로 이해하는 해석이 흔하지만, 그 해석을 전제로 오늘날의 화폐 가치로 환산한 금액을 확정할 수는 없으므로, 이 숫자를 현대의 원화로 바꾸어 제시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지나 로마까지 — 바울의 시선이 다시 멀어지다
이 일이 다 이루어진 뒤에 바울은 영 안에서 마케도니아와 아가야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정했다. 그리고 말했다. 「내가 거기 간 뒤에 로마에도 가 보아야 한다.」사도행전 19:21 · 본디새김
에베소에서 말씀이 널리 전해지고 사람들이 과거의 마술적 관습에서 돌아선 뒤, 바울은 다음 여정을 결정합니다. 마케도니아에는 빌립보와 데살로니가가 있었고, 아가야에는 고린도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계획한 여정은 이미 복음을 전한 공동체들을 다시 찾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영 안에서」라는 표현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바울 자신의 영 또는 내적인 결심을 가리키는 것으로 읽어 바울의 의지를 강조할 수도 있고, 거룩한 영의 인도를 받는 상황을 나타내는 것으로 읽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은 어느 하나를 명시적으로 설명하지 않으므로, 바울이 영 안에서 자신의 길을 정했다는 표현을 살리되 그 결정의 과정까지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은 이제 로마를 이야기합니다.
사도행전 첫머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까지 자신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8). 「가 보아야 한다」(δέω)에 쓰인 동사는 「해야 한다」 「필요하다」라는 뜻으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종종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은 단순한 여행 희망 이상의 의미를 가진 것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로마 방문이 왜 반드시 필요한지, 그가 어떤 방식으로 그곳에 도착할 것인지까지 이 구절에서 밝혀지지는 않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머물러 있지만 그의 시선은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로 향합니다. 그는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먼저 마케도니아로 보내고, 자신은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머뭅니다.
그리고 그가 아직 에베소에 머물고 있을 때, 도시 전체를 흔드는 소동이 일어납니다.
데메드리오 — 아르테미스의 위엄인가, 장인들의 수입인가
그 무렵에 그 길을 두고 적지 않은 소동이 일어났다.사도행전 19:23 · 본디새김
누가는 이 사건을 「그 길」과 관련된 소동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다음 절에서 등장하는 사람은 철학자도,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도 아닙니다.
은장이 데메드리오입니다.
그 사정은 이러했다. 데메드리오라는 이름의 은장이가 은으로 아르테미스의 신전 모형을 만들어 장인들에게 적지 않은 벌이를 안겨 주고 있었다.사도행전 19:24 · 본디새김
에베소에서 아르테미스는 도시의 종교적 정체성과 깊이 연결된 여신이었습니다. 에베소의 거대한 아르테미스 신전은 고대 세계의 일곱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었으며, 종교적인 장소일 뿐 아니라 에베소의 명성과 자부심을 나타내는 건축물이기도 했습니다. 데메드리오는 이 신전의 모형을 은으로 만들어 장인들에게 상당한 수입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가 그들과 그런 일을 하는 일꾼들을 모아 놓고 말했다. 「여러분, 이 벌이로 우리가 넉넉히 사는 것을 아시지요.」사도행전 19:25 · 본디새김
그의 연설은 여기서 시작됩니다.
여신의 위대함이 아닙니다.
자신들의 수입입니다.
「그런데 여러분이 보고 듣는 대로, 이 바울이라는 자가 에베소만이 아니라 거의 온 아시아에서 많은 무리를 구슬려 돌려놓았습니다.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사도행전 19:26 · 본디새김
이 말은 바울이 아테네에서 전했던 내용과 매우 가깝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거하지 않으시며, 하나님의 존재를 금이나 은이나 돌을 새겨 만든 것과 같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17:24–29). 데메드리오가 바울의 가르침을 우상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으로 이해한 것은 그 핵심을 완전히 벗어난 반응이 아닙니다.
사람이 만든 것이 신이 아니라면, 은으로 만든 신전 모형이나 신상도 신적인 권위를 보장해 주는 물건이 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이 그 생각을 받아들이면 아르테미스 숭배에 사용되는 물건들의 종교적 의미가 흔들리고, 그러한 물건을 만드는 장인들의 수입도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복음은 사람들의 내면적인 믿음만이 아니라, 그 믿음에 기대어 형성된 경제적인 활동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는 이 일이 나쁜 평을 받을 위험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위대한 여신 아르테미스의 신전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겨지고, 온 아시아와 사람 사는 온 땅이 받드는 그 여신도 위엄을 빼앗기게 될 위험이 있습니다.」사도행전 19:27 · 본디새김
처음에는 장인들의 수입이 문제였습니다. 다음에는 생업이 평판을 잃을 위험을, 이제는 아르테미스 신전의 가치와 여신의 위엄 자체가 위협받는다고 말합니다. 직업 집단의 이익에 관한 문제가 도시 전체의 종교적 자부심에 관한 문제로 확장됩니다.
물론 데메드리오가 아르테미스를 전혀 믿지 않았고 돈에만 관심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종교와 경제는 오늘날처럼 쉽게 분리되는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의 연설이 「이 벌이로 우리가 넉넉히 사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그는 바울의 복음이 자기들의 생업을 위협한다고 느꼈고, 그 위협을 아르테미스의 위엄이 위협받는 문제로 제시합니다.
마술을 부리던 사람들과 은장이들은 모두 돈과 종교를 연결하고 있지만, 그 방향은 서로 반대입니다. 이것이 돈을 버리는 사람은 선하고 돈을 버는 사람은 악하다는 뜻은 아닙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생업에 종사했고 바울도 그들과 함께 일했습니다(18:3). 여기서 문제 되는 것은 사람이 만든 물건을 신적인 권위의 대상으로 삼는 일입니다.
한쪽에서는 자신이 의지하던 것을 버립니다.
다른 쪽에서는 자신이 의지하던 것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모읍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 세계에서 아르테미스는 일반적으로 사냥과 야생 동물, 출산 등과 연결되었지만, 에베소의 아르테미스 숭배는 고유한 지역적 전통을 지녔습니다. 오늘날 에베소 유적과 박물관에도 아르테미스 숭배와 관련된 유물들이 남아 있습니다. 은 모형이 실제로 어떤 크기와 형태였는지는 본문만으로 확정할 수 없습니다. 신전 자체를 나타내는 작은 모형이었을 수도 있고, 신전과 여신의 형상을 결합한 물건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데메드리오가 말하는 「거의 온 아시아」에서 바울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직접 설득했는지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위기를 강조하는 연설 속 표현일 수 있지만, 사도행전은 앞서 아시아 속주의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이 주의 말씀을 들었다고 기록했으므로(19:10) 이야기 안에서 근거가 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다」 — 이유를 모르는 군중의 외침
그들은 이 말을 듣고 분노로 가득 차 외쳤다. 「에베소 사람들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다.」사도행전 19:28 · 본디새김
그들이 외치는 것은 수입을 지켜 달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아르테미스의 위대함입니다.
장인들의 생업을 지키기 위해 시작된 일이 이제 도시의 여신을 지키기 위한 집단적인 행동으로 확대됩니다. 도시가 혼란으로 가득 차고, 사람들은 바울의 동역자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극장으로 몰려갑니다.
바울은 그 무리 안으로 들어가려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그를 막고, 아시아의 관리들 가운데 바울의 벗이었던 사람들까지 사람을 보내 극장에 들어가지 말라고 간청합니다. 아르테미스 숭배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던 도시에서도 모든 지도자가 바울을 적대적으로 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는지까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장면에서 누가는 바울이 모든 위험 앞에 무조건 뛰어들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용기와 주변 사람들의 신중한 판단이 서로 충돌하는 순간을 보여 줍니다.
한편 저마다 다른 것을 외쳤다. 모임이 뒤엉켜 있었고, 대다수가 왜 모였는지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사도행전 19:32 · 본디새김
대다수가 왜 모였는지조차 알지 못했는데, 모두 큰 소리로 외치고 있습니다. 특정한 장인들의 수입 문제가 도시의 종교적 자부심을 건드리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인 결과입니다. 많은 사람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동 이유를 충분히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때 유대 사람들이 알렉산더라는 사람을 앞으로 내세웁니다. 알렉산더는 손짓을 하며 무리에게 변론하려 합니다. 그가 누구를 위해 변론하려 했는지는 본문이 밝히지 않습니다. 유대 공동체가 바울 일행과 자신들을 구별하려 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 역시 확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리는 그가 유대 사람인 줄 알아채고, 모두 한 소리로 두 시간쯤 외쳤다. 「에베소 사람들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다.」사도행전 19:34 · 본디새김
처음에는 저마다 다른 것을 외치던 사람들이 이제 한 소리를 냅니다. 그러나 문제를 정확히 이해하게 되어서가 아닙니다. 그들은 알렉산더의 말을 듣기도 전에, 그가 유대 사람이라는 사실만으로 하나의 외침을 반복합니다.
그들의 외침은 설명이나 논증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누구이며, 자신들의 도시가 어떤 여신을 받들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구호입니다. 그들은 왜 바울의 가르침이 틀렸는지, 사람이 만든 신상이 어떻게 참된 신의 존재를 나타낼 수 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17절에서 주 예수님의 이름이 높임받은 것은 그 이름을 주문처럼 사용하려던 사람들이 실패한 뒤였습니다. 28절과 34절에서 아르테미스의 위대함이 외쳐지는 것은 신전 모형으로 수입을 얻던 사람들이 자기들의 이익과 여신의 위엄이 위협받는다고 주장한 뒤입니다. 누가는 두 장면을 나란히 보여 주면서 독자가 스스로 비교하게 합니다.
많은 사람이 큰 소리로 외치면 그 이름이 위대해지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사람들이 깨닫고 자신이 의지하던 것을 내려놓을 때 그 이름이 높임받는 것입니까?
에베소의 군중은 두 시간 동안 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그 외침은 도시의 혼란을 끝내지 못합니다.
마침내 시의 서기관이 나섭니다.
조금 더 깊이
에베소의 대극장은 도시의 주요 공공장소였으며 대규모 군중이 모일 수 있는 장소였고, 오늘날 남아 있는 유적도 그 규모를 보여 줍니다. 다만 현재의 유적에는 이후 로마 시대에 이루어진 증축과 개조가 반영되어 있으므로, 지금의 형태와 수용 인원을 바울 당시의 것과 그대로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아시아의 관리들」은 로마 아시아 속주에서 종교적 행사와 공적인 활동에 관련된 지위를 가진 사람들로 이해되며, 그들이 정확히 어떤 공식적인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는지는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시의 서기관 —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변호한 것은 누구인가
시의 서기관이 무리를 가라앉히고 말했다. 「에베소 사람 여러분, 에베소 사람들의 도시가 위대한 아르테미스와 하늘에서 떨어진 것을 지키는 곳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사도행전 19:35 · 본디새김
시의 서기관은 단순히 문서를 작성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 도시의 공적 행정과 시민들의 모임에 관련된 중요한 직무를 맡은 인물입니다. 그는 군중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들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실부터 확인합니다.
「지키는 곳」이라는 표현은 도시가 신전과 신성한 대상을 보호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가리킵니다. 고대 도시들은 특정 신의 신전을 관리하는 지위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시의 서기관은 그 믿음의 진위를 논증하려 하지 않고, 에베소 사람들이 그것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인다는 점을 이용해 군중을 진정시킵니다.
「여러분이 데려온 이 사람들은 신전 도둑도 아니고 우리 여신을 모독하는 사람들도 아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19:37 · 본디새김
이 말만으로 바울이 아르테미스 숭배에 대한 비판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는 가르침은 우상 숭배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신전을 도둑질하거나 특정 여신을 직접 모독하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주장은 구별해야 하고, 시의 서기관은 그 구별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있는 장인들이 누구를 상대로 따질 말을 가지고 있다면, 재판이 열리는 날이 있고 총독들이 있으니 서로 고발해야 합니다.」사도행전 19:38 · 본디새김
군중의 분노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말고, 더 큰 문제가 있다면 법에 따라 소집된 모임에서 해결하라는 것입니다.
32절에서 혼란에 빠진 「모임」(ἐκκλησία), 39절에서 법에 따라 소집되는 「모임」, 40절 끝에서 해산되는 「모임」에는 모두 같은 낱말이 쓰이는데, 이 낱말은 사도행전의 다른 곳에서 흔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교회」를 가리킵니다. 두 집회를 구별하는 것은 낱말 자체가 아니라 그 집회의 성격과 문맥입니다. 에베소의 극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였지만 대다수는 왜 모였는지도 알지 못했습니다. 반면 바울은 두란노의 강의실에서 날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두고 토론했고, 그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자신이 의지하던 과거의 방식을 버리기 시작했습니다.
두 모임의 차이는 규모나 소리의 크기가 아니었습니다. 그 모임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가에 있었습니다.
로마의 처벌을 두려워하는 도시
「오늘 일로 우리가 소요죄로 고발당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몰려든 데 대해 우리가 내세울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 말을 하고 그는 모임을 해산시켰다.사도행전 19:40 · 본디새김
아르테미스의 위엄을 지키려고 모였다고 생각한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들의 행동 때문에 로마 당국으로부터 소요를 일으켰다는 혐의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도시의 공적인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은 가볍게 다루어지지 않았고, 도시의 지도자들에게도 정치적인 부담이 될 수 있었습니다.
시의 서기관은 바울의 신학에 동의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이 참되다고 고백하지도 않습니다. 정당한 근거 없이 소동을 일으키고 있다고 지적할 뿐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고발되지만, 때로는 관리들이 그 고발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앞 장에서 갈리오는 바울에 대한 고발을 유대 사람들 내부의 논쟁으로 보고 재판하지 않았습니다(18:14–16). 그러나 갈리오는 자기 앞에서 소스데네가 맞는 일을 방치했고, 에베소의 서기관은 더 큰 소요를 막기 위해 군중을 해산시킵니다. 누가는 관리들이 모두 정의롭거나 기독교에 우호적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각각의 장면에서 그들이 어떤 판단을 내리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를 기록합니다.
조금 더 깊이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갈립니다. 원문의 표현은 제우스 또는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뜻으로 이해되어 왔고, 아르테미스의 신성한 형상과 연결하는 해석이 유력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물체였는지와 실제로 하늘에서 떨어진 물건이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모임」으로 옮긴 낱말은 에클레시아입니다. 이 낱말 자체가 언제나 기독교 공동체를 의미하는 특별한 종교 용어였던 것은 아니며, 본래 소집된 집회를 가리킬 수 있었고 그리스 도시에서는 시민들의 공적인 집회를 나타냈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누가가 의도적으로 에베소의 군중을 기독교 교회와 대조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모임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도 단순히 사람들이 모였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의 이름 아래 무엇을 위해 모였는가에 달려 있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맺으며 — 극장의 외침이 멎은 뒤
바울을 통해 기적이 일어난 것은 그가 다른 사람보다 더 뛰어난 주문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 이름의 권위는 바울에게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스게와의 아들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 이름이 나타내는 권위에 참여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에베소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이름을 부리는 일이 아니라, 그 이름의 주인께 속하여 자신이 의지하던 것을 내려놓는 일이었습니다.
에베소의 극장은 수많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알렉산더가 무리 앞에서 말하려 했을 때에도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고, 모두 한 소리로 두 시간쯤 아르테미스의 위대함을 외쳤습니다.
그런데 결국 군중을 가라앉힌 사람은 바울도 아니었고, 극장에 모인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또 다른 설교자도 아니었습니다.
시의 서기관이었습니다.
그는 모임을 해산시켰습니다. 누가는 그 뒤에 바울이 극장에 들어가 설교했다고 덧붙이지 않습니다. 군중이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극장은 비워지고, 이야기는 그 자리에서 끝납니다.
하지만 독자는 이미 이 도시에서 일어난 다른 장면들을 보았습니다. 두란노의 강의실에서는 날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졌습니다. 남자 열두 명쯤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거룩한 영을 받았으며, 어떤 이들은 자신의 삶을 고백하고 은전 오만 닢의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던 마술책들을 사람들 앞에서 불태웠습니다.
에베소의 극장에서는 아르테미스의 위대함을 외치는 소리가 멎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강의실에서 전해지고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던 주의 말씀은, 이 장에서 이미 힘차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