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18장
이 장의 자리 · 13–20장 · 여러 도시로 떠난 길
내가 너와 함께 있다
고린도에서 바울은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일하고,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에 부딪칩니다. 그는 겉옷을 털며 이제부터 이방 사람들에게 가겠다고 선언합니다. 또다시 한 도시를 떠나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어느 밤,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계속 말하고 잠잠하지 마라.」 그리고 그 까닭을 이렇게 밝히십니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바울이 눈앞의 반대에 부딪쳐 더 이상 전할 수 없다고 생각할 만한 순간, 예수님께서는 이 도시에서 자신의 일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씀하십니다. 바울에게는 반대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 도시의 「내 백성」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곳에 일 년 육 개월을 머뭅니다. 지금까지 선교 여행에서 도시를 옮겨 다니던 바울에게는 상당히 긴 체류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8장의 독특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장의 첫머리에서 바울은 로마에서 쫓겨난 한 부부를 만나 그들과 함께 천막을 만들며 살아갑니다. 그 부부는 나중에 바울과 함께 에베소로 가지만, 바울이 떠난 뒤에도 그곳에 남습니다. 그리고 성경에 능하고 예수님을 정확하게 가르치는 아볼로라는 사람을 만나, 그에게 하나님의 길을 더 정확하게 설명해 줍니다.
이 장은 바울이 고린도에서 얼마나 많은 성과를 거두었는지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이 없는 에베소에서 두 사람이 다른 설교자를 가르치는 장면을 거쳐, 그 설교자가 다시 다른 지역의 신자들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한 사람을 통해 전해진 복음이 다른 사람들의 손에 맡겨지고, 그들을 통해 더욱 넓어지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8장을 읽으며 따라가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울과 함께하신다는 약속은, 바울이 모든 일을 직접 이룬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바울이 떠난 뒤에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일을 보게 하는 약속일까요?
로마에서 쫓겨난 부부와 천막을 만드는 사도
바울은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로 갑니다.
고린도는 로마 속주 아가야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잇는 지협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두 방향의 항구를 통해 사람들이 모여드는 상업 도시였습니다. 로마의 행정과 그리스의 문화, 다양한 지역의 상업과 종교가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바울이 고린도에 도착하자마자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한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습니다. 먼저 한 부부를 소개합니다.
바울은 거기서 아굴라라는 이름의 유대 사람과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를 찾아내어 그들에게 다가갔다. 아굴라는 본도 태생이었다. 클라우디우스가 유대 사람 모두에게 로마를 떠나도록 명령했기 때문에 얼마 전에 이탈리아에서 왔다.사도행전 18:2 · 본디새김
누가는 황제의 명령이 지닌 정치적 배경이나 목적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왜 고린도에 와 있는지를 알려 줄 뿐입니다. 그들은 고린도에 정착하기 위해 로마를 떠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적어도 사도행전의 설명에 따르면, 황제의 명령 때문에 로마를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아굴라는 본도에서 태어났고, 로마에 살다가 이제 고린도에 와 있습니다. 그의 삶에는 이미 여러 지역의 이동이 있었습니다. 누가는 이 부부가 로마에서 이미 신자였는지, 고린도에서 바울을 통해 믿게 되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후의 이야기에서 그들이 바울과 가까운 동역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두 사람을 바울과 연결한 계기는 매우 일상적입니다.
바울도 같은 생업에 종사했으므로 그들과 함께 지내며 일했다. 그들의 생업은 천막을 만드는 일이었다.사도행전 18:3 · 본디새김
바울이 어떤 세부 공정을 맡았는지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바울은 자기 손으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습니다.
그는 도시마다 설교단에 서는 사람으로만 살지 않았습니다. 함께 일할 사람을 찾아가고, 일터에서 시간을 보내고, 숙식을 해결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전서 4:12에서 바울은 자신들이 손수 일한다고 말하고, 데살로니가전서 2:9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했던 일을 회상합니다.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겠지만, 이야기를 따라가면 그 이상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바울은 같은 일을 하는 부부와 함께 지내게 되었고, 그 부부는 이후 에베소에서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더 정확하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됩니다. 누가는 바울이 그들에게 무엇을 언제 얼마나 가르쳤는지 기록하지 않으므로, 일터 자체가 정기적인 신학 교육의 장소였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관계는 회당에서 한 번 만나는 관계가 아니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과 후원자의 관계라기보다, 삶의 공간과 노동을 함께 나누는 동료들의 관계였습니다. 안식일에는 바울이 회당에서 유대 사람들과 그리스 사람들을 설득하려 했지만, 나머지 날에는 천막을 만드는 일이 그의 삶을 채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회당에서 전해졌지만,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의 삶은 회당 밖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전해지는 길은 때로 같은 생업을 가진 사람을 만나 함께 일하는 것에서 열렸습니다.
조금 더 깊이
로마 역사가 수에토니우스의 글에도 클라우디우스의 추방 명령에 관한 기록이 나옵니다. ‘크레스투스’라는 이름과 관련된 소요를 언급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지, 예수님을 둘러싼 유대인들 사이의 갈등을 가리키는지는 논쟁이 있습니다. 추방 명령의 시기도 흔히 기원후 49년 무렵으로 추정하지만 정확한 날짜는 확정되지 않습니다. 또 「천막을 만드는 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스케노포이오스(σκηνοποιός)는 신약에서 이곳에만 나옵니다. 천막을 제작하는 일을 뜻하는지, 천막에 쓰이는 가죽이나 직물을 다루는 기술까지 포함하는지에는 견해 차이가 있습니다. 고대 천막은 여러 재료로 만들 수 있었고, 그 제작에는 상당한 수공업 기술이 필요했습니다.
회당 바로 옆집으로 옮겨 가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옵니다.
앞 장에서 바울은 아테네에 도착한 뒤 두 사람이 되도록 빨리 자기에게 오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들의 도착을 곧바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이제 고린도에서 두 사람이 다시 등장합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왔을 때, 바울은 말씀을 전하는 일에 온통 사로잡혀 유대 사람들에게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엄숙히 증언했다.사도행전 18:5 · 본디새김
「온통 사로잡혀」는 바울이 말씀에 붙들려 있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가져온 지원 덕분에 바울이 생업에 쓰는 시간을 줄이고 복음 전파에 더욱 집중할 수 있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본문에서 확실한 것은 이 고린도 사역에서도 복음의 핵심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그들이 맞서며 모독적인 말을 하자 그는 겉옷을 털고 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의 피는 여러분 머리 위에 있습니다. 나는 깨끗합니다. 이제부터 이방 사람들에게 가겠습니다.」사도행전 18:6 · 본디새김
겉옷을 터는 것은 자신이 그들과 관계를 끊고, 그들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더 이상 지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피는 여러분 머리 위에 있습니다」라는 말도 단순한 분노의 말이 아닙니다.
에스겔 3:16–21과 33:1–9에서 하나님은 예언자를 파수꾼으로 세우십니다. 파수꾼이 경고하지 않으면 그 피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되지만, 경고를 들은 사람이 돌이키지 않으면 그 책임은 경고를 거부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바울의 말은 이러한 예언자적 책임의 언어와 주제적으로 연결됩니다. 그는 자신이 전해야 할 말씀을 전했고, 그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선택까지 책임질 수는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모든 유대 사람에게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고 최종적으로 선언했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뒤의 이야기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거기서 자리를 옮겨 티토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는 하나님을 받드는 사람이었고, 그의 집은 회당과 맞붙어 있었다.사도행전 18:7 · 본디새김
바울은 회당에서 거절당한 뒤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지 않습니다. 새롭게 복음을 전할 장소가 바로 옆집입니다. 집이 회당과 실제로 어느 정도 붙어 있었는지까지는 알 수 없지만, 바울은 그 도시의 유대 공동체와 완전히 단절된 곳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회당장 그리스보가 온 집안과 함께 주를 믿었다. 그리고 고린도 사람 가운데 많은 이가 듣고 믿었으며 세례를 받았다.사도행전 18:8 · 본디새김
회당에서 반대를 받았는데 회당장이 믿습니다.
바울은 이제부터 이방 사람들에게 가겠다고 선언했는데, 그다음에 이름이 등장하는 사람은 유대 회당의 지도자입니다. 그는 자신을 거부한 회당의 청중에게 같은 방식으로 매달리지는 않겠다고 말했지만, 유대 사람이라는 이유로 누군가를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하지는 않았습니다.
듣습니다. 믿습니다. 세례를 받습니다.
반대는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가 도시 전체의 반응을 결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바로 이 지점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합니다. 많은 사람이 믿고 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조금 더 깊이
5절에서 바울의 활동을 표현한 동사 쉬네코(συνέχω)는 붙들다, 사로잡다, 얽매다는 뜻을 가집니다. 이 표현이 말씀을 전하는 일에 더욱 전념했다는 뜻인지, 말씀 자체가 그를 강하게 사로잡았다는 의미에 더 무게가 있는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9에서 바울은 마케도니아에서 온 형제들이 자신의 부족한 것을 채워 주었다고 회상하지만, 그 지원과 18:5의 활동 변화가 직접적인 인과 관계에 있었는지는 누가가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 고린도전서 1:14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보와 가이오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회상하는데, 사도행전의 그리스보와 같은 인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 바울이 아직 보지 못한 사람들
주가 밤에 환상으로 바울에게 말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계속 말하고 잠잠하지 마라.」사도행전 18:9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단지 복음을 더 열심히 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본문은 바울이 그날 밤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설명하지 않지만, 그가 겪어 온 일들을 생각하면 그 말이 뜻밖의 것은 아닙니다.
빌립보에서는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소요가 일어나 밤중에 도시를 떠나야 했습니다. 베뢰아에서도 반대자들이 찾아와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고린도에서는 다시 회당의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을 두려움과 무관한 영웅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할 만한 상황 속에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 뒤에 계속 말하고 잠잠하지 말라는 명령이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바울의 불안한 마음을 달래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두려움 때문에 그가 해야 할 일을 멈추지 않도록 하십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계속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내가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너를 해치려고 덮치지 않을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사도행전 18:10 · 본디새김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말씀은 성경의 오래된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이야기했을 때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셨고(출애굽기 3:12), 여호수아가 모세의 뒤를 이을 때에도 함께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여호수아 1:5). 새로운 사명을 맡은 사람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그 일을 감당하지 않는다는 약속입니다.
여기서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은 「주」, 곧 살아나신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이제 고린도에서 두려워하는 사도에게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약속의 근거는 바울의 용기가 아닙니다.
바울이 두려움 없이 강한 사람이기 때문에 계속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계속 말하라고 명령받습니다.
그렇다면 「내 백성」은 이미 고린도에서 예수님을 믿게 된 사람들을 가리킬까요, 아직 복음을 듣지 않았지만 앞으로 믿게 될 사람들까지 가리킬까요? 앞 절에서 그리스보와 많은 고린도 사람이 믿었다고 기록했으므로 이미 형성된 공동체를 염두에 둔 말씀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말하고 잠잠하지 말라고 명하시는 문맥에서는 앞으로 믿게 될 사람들까지 예수님의 시야에 들어 있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 구절을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에 관한 신학적 논의와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누가가 설명하려는 것은 그 선택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가 아닙니다. 이 말씀은 바울이 고린도에 머물며 계속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로 주어졌습니다.
바울의 시야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는 눈앞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지만, 누가 앞으로 복음을 듣고 믿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그 도시에서 자신의 일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 약속을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바울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읽으면 본문의 방향을 거꾸로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많다고 말씀하시면서 바울에게 잠잠히 있으라고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계속 말하라고 명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루실 일에 대한 약속이 인간의 행동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을 계속할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그는 일 년 육 개월 동안 그곳에 머물며 고린도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사도행전 18:11 · 본디새김
예수님께서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은 바울을 고린도에서 떠나게 한 것이 아니라 머물게 했습니다.
하지만 이 장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다시 한번 사람들이 바울을 고발하고 재판석 앞으로 끌고 갑니다. 그렇다면 아무도 그를 해치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조금 더 깊이
누가는 이 환상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자세히 설명하거나 이름을 다시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 전체에서 바울에게 나타나 말씀하시는 분은 살아나신 예수님이십니다. 9장에서는 예수님께서 직접 바울에게 말씀하셨고, 23:11에서도 예수님께서 그의 곁에 서셔서 담대하라고 격려하십니다.
갈리오의 재판석 — 바울은 보호받았지만, 다른 사람은 맞았다
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으로 있을 때에 유대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바울에게 맞서 들고일어나 그를 재판석 앞으로 끌고 갔다.사도행전 18:12 · 본디새김
갈리오라는 이름은 바울의 고린도 체류를 1세기 중엽에 놓을 수 있게 하는 중요한 단서입니다. 그러나 누가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연대가 아니라 다시 법정에 서게 된 바울입니다.
그들이 말했다. 「이 사람이 율법에 어긋나게 하나님을 받들도록 사람들을 꾀고 있습니다.」사도행전 18:13 · 본디새김
유대 사람들이 고발하고 있으므로 모세의 율법과 관련된 종교적 논쟁이 배경에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 총독 앞에서 고발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이 유대 공동체 내부의 율법 해석 문제를 넘어 공적으로 처벌받아야 할 문제인 것처럼 제시하는 셈입니다.
바울이 입을 열려는데 갈리오가 유대 사람들에게 말했다. 「유대 사람들아, 무슨 불법 행위나 악한 범행이 있었다면 내가 마땅히 너희 말을 들어주었을 것이다.」사도행전 18:14 · 본디새김
「그러나 말과 이름과 너희 율법을 두고 따지는 것이라면 너희가 알아서 하여라. 나는 그런 일을 다루는 재판관이 될 마음이 없다.」사도행전 18:15 · 본디새김
갈리오가 판단한 것은 예수님께서 정말 그리스도이신가 하는 신학적 문제의 진위가 아닙니다. 그는 로마 총독으로서 다루어야 할 범죄와, 유대 사람들 내부에서 다투는 종교적 문제를 구별합니다. 고발자들은 예수님과 율법의 문제를 범죄로 다루게 하려 했지만, 갈리오는 그 문제를 재판하지 않겠다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로마 제국 전체가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합법 종교로 인정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갈리오는 자신 앞에 제기된 고발이 자신의 재판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뿐이고, 다른 지역의 관리들이 항상 같은 판단을 한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바울은 재판석 앞으로 끌려왔지만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이 재판에서는 아무도 그를 해치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약속과 일치하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독자가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마지막 절이 있습니다.
그러자 모두가 회당장 소스데네를 붙잡아 재판석 앞에서 계속 때렸다. 갈리오는 그런 일에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사도행전 18:17 · 본디새김
바울은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스데네가 맞았습니다.
조금 전까지 바울을 고발하던 사람들이 재판석 앞에 있었는데, 이제 회당장이 폭행당합니다. 누가는 소스데네를 때린 「모두」가 정확히 누구인지, 왜 그가 맞았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고발이 실패한 데 대한 분노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회당 지도자를 향한 다른 갈등이 작용했을 수도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갈리오가 그 폭행을 막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바울을 향한 고발에서는 자신이 다룰 수 없는 문제를 구별해 냈지만, 바로 자기 앞에서 한 사람이 폭행당하는 일에는 무관심했습니다. 누가는 갈리오를 칭찬하지도 책망하지도 않고, 그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고 기록할 뿐입니다.
이 문장을 앞선 예수님의 약속과 나란히 읽으면 생각할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바울을 해치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약속은 이 도시에 있는 모든 사람이 폭력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편적인 약속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단순히 모든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막아 주시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동시에 누가는 소스데네의 고통을 통해 어떤 숨겨진 신학적 목적이 이루어졌다고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고통을 다른 사람의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저 한 사람은 보호받았고, 다른 사람은 재판석 앞에서 맞았으며, 총독은 무관심했다는 사실이 남습니다.
누가는 소스데네의 이야기를 더 이어가지 않습니다. 대신 바울이 고린도에 여러 날을 더 머물렀다고 기록합니다. 다시 위험에 부딪쳤지만, 바울의 사역은 이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고린도를 떠날 준비를 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 델포이에서 발견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서신을 담은 비문에 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으로 언급됩니다. 이 자료를 통해 그의 재임 시기를 대체로 기원후 51–52년 무렵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세부 연대에는 논의가 있지만 중요한 외부 증거입니다. 소스데네는 앞서 등장한 회당장 그리스보와는 다른 이름입니다. 그리스보가 믿게 된 뒤 소스데네가 그 자리를 맡았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지만, 회당에 지도자가 여럿 있었을 수도 있으므로 두 사람의 정확한 직무 관계는 알 수 없습니다. 일부 사본에서는 그리스 사람들이 때렸다고 명시하지만, 본문은 가해자 집단을 그렇게 한정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폭행한 이들이 반드시 어떤 민족이나 종교 집단에 속했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이 소스데네가 고린도전서 1:1에서 바울과 함께 인사를 전하는 「소스데네 형제」와 같은 사람일 가능성도 오래전부터 제기되어 왔지만, 사도행전은 그가 이후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기록하지 않으며 두 인물의 동일성도 확인할 수 없습니다.
겐그레아의 서원과 에베소에서의 작별 — 바울의 계획보다 하나님의 뜻
바울은 여러 날 더 머물다가 형제들과 작별하고 배를 타고 시리아로 떠났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도 그와 함께 배를 타고 갔다. 바울은 떠나기 전에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는데, 서원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사도행전 18:18 · 본디새김
처음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 그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이제 고린도를 떠날 때도 그들이 함께합니다. 잠시 머물 집과 일터를 얻는 것에서 시작된 만남이, 도시를 함께 이동하는 동역 관계로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의 동쪽 항구 겐그레아에서 바울은 서원 때문에 머리를 깎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전하며 유대인과 이방인에게 구원을 선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왜 여전히 서원과 관련된 행위를 하고 있습니까?
누가는 그가 어떤 서원을 했는지, 언제 시작했는지, 무엇을 위해 서원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큰 흐름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가운데서도 유대적 신앙 관습과의 관계를 모두 끊어 버린 사람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이 점은 앞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사건과도 연결됩니다(16:3).
바울에게 중요한 것은 어떤 관습이 유대적이라는 이유만으로 반드시 버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관습이 구원의 필수 조건으로 요구되는지, 또는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삶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가 문제였습니다. 그는 율법의 의식이 사람을 구원하는 근거라고 가르치지 않았지만, 그것이 곧 유대인의 모든 관습과 개인적인 경건 행위를 금지한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오래 머물기를 청하는 사람들 앞에서
바울 일행은 에베소에 도착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에베소에 남고,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 유대 사람들과 따져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뜻밖에도 그곳 사람들은 바울에게 더 오래 머물기를 청합니다. 고린도에서는 회당에서 반대에 부딪쳐 자리를 옮겨야 했는데, 에베소에서는 더 오래 머물러 달라는 요청을 받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작별하며 말했다. 「하나님이 뜻하시면 여러분에게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에서 배를 타고 떠났다.사도행전 18:21 · 본디새김
바울은 좋은 기회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반드시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앞서 사도행전 16장에서는 거룩한 영이 바울 일행이 가려던 길을 막고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여기서는 특별한 환상이나 금지 명령이 등장하지 않지만, 바울은 여전히 자신의 계획이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의 말에는 다시 오고 싶다는 자신의 의지와, 그 일이 실제로 이루어질지를 하나님께 맡기는 태도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누가는 왜 그가 에베소에 더 머물지 않기로 했는지 자세히 밝히지 않습니다. 다만 바울은 열린 기회를 반드시 자신의 손으로 끝까지 붙잡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떠납니다.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남습니다.
이 작은 인물 배치가 장의 마지막 부분을 준비합니다. 바울이 떠났어도 에베소에서의 사역은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가이사랴에 내린 뒤 교회에 문안하고 안디옥으로 내려갑니다. 얼마 동안 머문 뒤에는 다시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방을 지나가며 제자들을 굳게 세웁니다. 앞에서는 한 도시에서 일 년 육 개월을 머문 이야기가 비교적 자세히 나왔는데, 이제는 여러 도시를 지나는 긴 여행이 몇 문장으로 정리됩니다.
누가는 독자의 시선을 다시 에베소로 돌릴 준비를 합니다. 그곳에는 바울이 남겨 두고 온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나게 될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민수기 6:1–21에는 나실인 서원과 관련하여 머리카락을 자르는 규정이 나오므로, 바울의 행동을 나실인 서원과 연결하는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본문이 서원의 내용을 설명하지 않으므로 민수기 6장의 나실인 서원과 정확히 동일한 것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또한 그리스어 문장 구조상 머리를 깎은 사람이 바울인지 아굴라인지 논의의 여지가 있습니다. 본문은 바울을 주어로 선택했습니다. 22절의 「올라가 교회에 문안한 뒤」라는 표현은 예루살렘 교회를 방문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으로 갈 때는 흔히 올라간다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절은 도시 이름을 직접 기록하지 않으므로, 그 방문을 본문의 명시적인 진술과 동일시해서는 안 됩니다.
아볼로 — 정확하게 가르치는 사람에게도 더 정확한 가르침이 필요했다
아볼로라는 이름의 유대 사람이 에베소에 이르렀다. 알렉산드리아 태생이고 말에 밝은 사람이었으며 성경에 능했다.사도행전 18:24 · 본디새김
누가는 아볼로를 매우 긍정적으로 소개합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의 중요한 도시였고, 헬레니즘 시대부터 큰 유대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었으며,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의 성경 연구와 해석 전통도 발달했던 곳입니다. 다만 아볼로가 그곳의 어떤 교육기관에서, 어떤 스승에게 배웠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문맥상 그는 말과 성경을 다루는 능력을 함께 갖춘 사람으로 묘사됩니다.
이 사람은 주의 길을 배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영이 뜨겁게 끓는 가운데 예수를 두고 정확하게 말하고 가르쳤으나,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사도행전 18:25 · 본디새김
아볼로는 주의 길을 배워 알고 있었고, 예수님을 정확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습니다. 이 세 가지를 어떻게 함께 이해해야 할까요?
먼저 본문은 그를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누가는 아볼로가 예수님에 관해 신중하고 「정확하게」 말했다고 분명히 기록합니다. 아볼로의 문제는 그가 알고 있는 것이 모두 틀렸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그가 알고 있는 내용에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그 부족함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는 표현으로 나타납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했고, 자기 뒤에 오실 분을 가리켰습니다. 누가복음 3:16에서 요한은 자신이 물로 세례를 주지만 자기보다 능력 있는 분은 거룩한 영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아볼로는 예수님과 관련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고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가 예수님의 죽음이나 부활을 모르고 있었다고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거룩한 영의 선물과 그리스도인의 세례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무엇을 더 배워야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영이 뜨겁게 끓는 가운데」의 「영」이 아볼로 자신의 마음이든 거룩한 영이든, 그가 열정적으로 예수님에 관해 가르쳤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이 사람이 회당에서 거리낌 없이 말하기 시작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길을 더 정확하게 풀어 주었다.사도행전 18:26 · 본디새김
25절에서는 아볼로가 「정확하게」 가르쳤다고 했고, 26절에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에게 「더 정확하게」 설명했다고 합니다. 그리스어에서도 두 표현은 같은 어근의 낱말이며, 뒤의 것은 앞의 것의 비교급입니다. 아볼로의 가르침은 정확했지만, 그것이 더 정확해질 여지가 없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가르침을 옳은 가르침과 틀린 가르침, 두 가지로만 나누기 쉽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이미 상당 부분 정확하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은 가르침입니다.
아볼로가 가지고 있던 지식은 무가치하지 않았고, 그가 성경에 능하다는 사실도 부정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더 배워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누구에게서 옵니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서 옵니다.
천막을 만들던 부부가 성경에 능한 설교자를 가르치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로마에서 쫓겨나 고린도에 왔던 사람들입니다. 바울과 같은 생업을 가지고 함께 지내며 일했고, 바울과 함께 에베소까지 왔다가 바울이 떠난 뒤에도 남았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이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성경에 능하고 말에도 밝은 아볼로를 가르칩니다.
이 장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학력이나 공식적인 교사 자격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누가는 아볼로가 유명한 도시 출신이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이해하고 있었다고 보지 않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손으로 일하는 사람들이었다고 해서 가르칠 수 있는 자리에 서지 못한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이 부부가 어떤 과정을 통해 그런 이해를 갖추게 되었는지는 본문이 알려 주지 않지만, 적어도 그들은 아볼로의 설명에서 부족한 부분을 알아보고 채워 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장에서 두 사람의 이름은 세 번 등장하는데, 처음에는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라고 소개하고(18:2), 배를 타는 장면(18:18)과 아볼로를 가르치는 장면(18:26)에서는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이 순서가 브리스길라가 남편보다 더 뛰어난 교사였다는 사실을 증명하지는 않으며, 누가는 이름의 순서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브리스길라는 단순히 아굴라의 아내로만 언급되는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는 일에 함께 참여한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누가는 그들이 회당에서 공개적으로 아볼로를 반박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를 「데려다가」 설명했다고 기록합니다. 이 말만으로 가르침이 반드시 비공개로 이루어졌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공개적인 논쟁에서 아볼로를 무너뜨렸다는 묘사는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전하고 있는 사람을 데려다가, 그가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것을 설명해 준 것입니다.
누가는 아볼로가 어떻게 반응했는지 자세히 설명하지 않지만, 이후에도 그가 복음을 전하며 다른 신자들에게 도움이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배움은 그의 사역을 가로막은 것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게 했습니다. 그 관계는 누가 더 높은 지위에 있는지를 결정하는 경쟁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모두가 같은 하나님의 길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조금 더 깊이
24절의 「말에 밝은」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로기오스(λόγιος)는 말을 잘한다는 뜻으로도, 학식이 있다는 뜻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25절의 「영이 뜨겁게 끓는 가운데」에서 「영」이 아볼로 자신의 영 또는 마음을 가리키는지, 거룩한 영의 활동을 가리키는지는 해석이 갈립니다. 다음 장인 사도행전 19장에서는 요한의 세례만 받은 사람들과 거룩한 영의 관계가 다시 문제가 되므로 두 본문 사이에 주제적인 연결이 있습니다. 다만 아볼로가 19장의 사람들과 정확히 같은 수준의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볼로가 건너간 곳에서 다시 시작된 복음
이제 아볼로는 아가야로 건너가려 합니다. 아가야는 고린도가 속한 로마의 속주이므로, 아볼로가 향하는 곳은 바울이 오랫동안 머물며 교회를 세웠던 지역입니다.
그가 아가야로 건너가려 하자 형제들이 북돋우며 그를 맞아들이도록 제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그곳에 이르러 은혜로 믿게 된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사도행전 18:27 · 본디새김
아볼로는 혼자서 모든 일을 결정하고 떠나지 않습니다. 에베소의 형제들이 그를 격려하고, 그곳의 제자들에게 편지를 써서 그를 맞아들이도록 합니다. 앞서 사도행전 15장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으로 편지와 사람들을 보냈듯이, 여기서도 편지는 아볼로가 낯선 방문자로만 남지 않도록 공동체 사이를 잇습니다.
누가는 아가야의 신자들이 어떤 유명한 설교자의 가르침으로 믿게 되었는지를 먼저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은혜로 믿게 된 이들」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일 년 육 개월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고 많은 사람이 믿고 세례를 받았지만, 누가는 그들이 믿게 된 일을 바울의 뛰어난 능력만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성경을 통해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입증하며, 여러 사람 앞에서 힘차게 유대 사람들을 논박했기 때문이다.사도행전 18:28 · 본디새김
바울은 유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고 엄숙히 증언했습니다(18:5). 아볼로는 성경을 통해 같은 사실을 입증합니다(18:28). 두 사람의 말하는 방식과 능력에는 차이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같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바울이 없는 곳에서 계속됩니다.
조금 더 깊이
고린도전서 3:6에서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지만, 자라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이 바울이 고린도에서 오랫동안 말씀을 전하고 떠났으며 이후 아볼로가 그 지역의 믿는 이들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고 기록한 일을, 바울은 씨를 심는 사람과 물을 주는 사람의 비유로 설명합니다. 그리고 그 비유의 마지막에서 사역의 성과를 자기 것으로 삼지 않습니다. 씨를 심는 일도 물을 주는 일도 중요하지만, 생명을 자라게 하는 능력은 그 일을 한 사람에게 있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한 일은 달랐지만,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맺으며 — 바울이 떠난 뒤에도 이어지는 이야기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다」고 말씀하셨지만, 그 함께하심은 바울이 혼자 모든 일을 감당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일터와 삶을 나누었고, 실라와 디모데가 내려왔으며, 티토 유스도가 자기 집을 내주었고, 바울이 떠난 뒤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아볼로를 가르치고 아볼로가 아가야의 믿는 이들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에서 떠났다고 해서 고린도 교회가 더 이상 자랄 수 없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고린도의 사람들을 「내 백성」이라고 부르신 약속은, 바울 한 사람에게서 시작되어 바울 한 사람에게서 끝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한계 속에 있었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는 로마에서 쫓겨났고, 바울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필요했으며, 아볼로에게는 더 배워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본문은 클라우디우스의 추방 명령이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에 따라 내려졌다고 말하지 않고, 바울을 반대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런 행동을 했다고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누가는 그러한 상황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전해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정확하게 가르치는 사람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은 더 배울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순간일 수 있습니다.
이제 장의 끝에 이르면 바울은 이미 고린도를 떠났습니다. 에베소에도 잠시 머물렀다가 떠났고, 갈라디아와 브루기아의 제자들을 찾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바울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에베소에 남겨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돌아오고,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길을 더 정확하게 배운 아볼로를 따라 아가야로 건너갑니다.
누가는 마지막 절에서 다시 바울을 등장시키지 않습니다. 대신 아볼로가 성경을 펴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밝히는 장면으로 끝냅니다. 한때 고린도에서 바울과 함께 천막을 만들던 부부가 있었고, 그 부부에게서 배운 사람이 이제 바울이 떠난 지역에서 다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떠났지만, 말씀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