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17장

이 장의 자리 · 13–20장 · 여러 도시로 떠난 길

세상을 뒤엎는 소식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소리칩니다. 「세상을 뒤엎은 이 사람들이 여기에도 와 있습니다.」(17:6)

그들은 바울과 실라를 고발하려고 이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을 여기까지 읽어 온 독자에게는 그 말이 묘하게 들립니다. 실제로 바울이 전하는 소식 때문에 곳곳에서 사람들이 자신이 믿어 온 것과 살아온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무엇으로 세상을 뒤흔들고 있었을까요?

그는 군대를 이끌지도 않았고, 도시의 권력을 빼앗으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가 계속 전한 것은 한 가지 소식이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소식이 유대 사람들에게는 성경을 다시 읽게 만들었고, 로마 도시의 관리들에게는 정치적 위협처럼 들렸으며, 그리스 철학자들에게는 비웃을 만한 이야기로 들렸습니다.

사도행전 17장은 같은 복음이 세 도시에서 어떻게 서로 다르게 받아들여지는지를 보여 줍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성경을 풀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밝히고, 베뢰아에서는 사람들이 그 설명이 성경과 맞는지 날마다 살펴봅니다. 아테네에서는 성경을 모르는 철학자들을 향해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부터 이야기합니다.

설명의 출발점은 달라집니다. 그러나 복음의 중심은 바뀌지 않습니다.

성경을 읽는 사람에게도, 철학을 논하는 사람에게도 바울이 끝내 전하려는 분은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아테네의 연설은 또 하나의 질문을 남깁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찾으려 하지만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정작 그 하나님이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가까이 계시지만 알지 못하는 하나님. 세상을 지으셨지만 사람이 만든 신전에는 갇히지 않는 하나님. 사람에게 섬김을 받으셔야 하는 분이 아니라 사람에게 생명과 숨을 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알리는 소식은 마침내 한 사람의 부활 앞에서 사람들을 갈라놓습니다.

읽는 시간 37분소단락 917장 본문 읽기 →

데살로니가 — 죽은 메시아가 어떻게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는가

사도행전 17:1–4 본문 →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를 떠나 암피폴리스와 아폴로니아를 지나 데살로니가에 도착합니다.

데살로니가는 마케도니아의 중요한 항구 도시였고, 로마의 주요 도로인 에그나티아 가도와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교통과 상업의 중심지였던 이 도시에는 유대 사람들의 회당도 있었고, 바울은 그 회당으로 들어갑니다.

바울은 늘 하던 대로 그들이 있는 곳으로 들어가 세 안식일에 걸쳐 성경을 가지고 그들과 따져 이야기했다.사도행전 17:2 · 본디새김

「따져 이야기했다」는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논의하고 논증한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믿는 바를 일방적으로 선언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회당에 모인 사람들이 함께 권위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성경을 놓고 논의를 펼쳤습니다.

성경을 풀어 밝히고 증거를 내놓으며, 그리스도가 고난받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어나야 했다고 설명하고, 「내가 여러분에게 알리는 이 예수가 그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했다.사도행전 17:3 · 본디새김

바울은 예수님이라는 사람의 놀라운 생애를 설명한 뒤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주장하는 데서 출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가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성경을 통해 밝히고, 그 길을 실제로 걸으신 분이 예수님이시라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가장 어려운 부분은 아마도 「그리스도가 고난받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어나야 했다」는 말이었을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히브리어 ‘메시아’에 해당하며, 기름 부음 받은 이라는 뜻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보내실 왕과 구원의 때를 기다렸고, 다윗에게 주어진 왕조의 약속과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예언들이 이러한 기다림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메시아가 고난받고 죽어야 한다는 주장은 모든 유대 사람이 당연하게 받아들일 만한 해석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왕이라면 원수들을 이기고 백성을 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셨다면, 도리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구원자이시라는 주장이 반박된 것 아닙니까?

바울이 풀어야 할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었습니다.

그는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이 하나님의 계획에서 벗어난 실패가 아니라, 그 계획 안에 놓인 사건임을 논증합니다. 「일어나야 했다」에 담긴 ‘해야 한다’는 뜻은 단순한 역사적 불가피성이 아닙니다.

누가복음에서도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겪고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시며 성경을 풀어 주셨습니다(누가복음 24:26–27).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성경이 가리키는 자신의 길을 이해하게 하셨고, 사도행전 17장의 바울 역시 그 연장선에 서 있습니다.

다만 누가는 바울이 여기서 구약의 어떤 구절들을 인용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누가가 강조하는 것은 구절 목록이 아니라 논증의 방향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죽음을 하나님의 계획과 충돌하는 사건으로 볼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성경을 통해 미리 밝히신 구원의 길로 이해할 것입니까? 이것이 바울이 회당 사람들과 논의하던 문제였습니다.

또한 바울은 고난받는 그리스도라는 개념을 설명하고 끝내지 않고 「내가 여러분에게 알리는 이 예수가 그 그리스도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결국 성경 연구는 한 사람을 알아보는 문제로 이어집니다. 성경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말한다는 사실을 이해하더라도, 그 그리스도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고백은 별개의 결단을 요구합니다.

바울의 설명을 듣고 몇몇 유대 사람들이 설득됩니다. 하나님을 받드는 그리스 사람들도 많이 붙고, 이름 있는 여자들도 적지 않게 동참합니다. 이 사람들은 단순히 새로운 종교적 정보를 얻은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기다리거나 경외하던 하나님의 약속이 예수님에게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새롭게 이해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변화가 도시의 갈등을 불러옵니다.

조금 더 깊이

이사야 53장의 고난받는 종이나 시편 16편의 죽음과 부패에 관한 말씀이 관련될 수 있지만, 바울이 세 안식일 동안 반드시 그 구절들을 사용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라는 다른 왕」 — 정치적 고발 속에 담긴 복음의 핵심

사도행전 17:5–9 본문 →

바울의 설명을 듣고 많은 사람이 믿게 되자 반대하는 이들이 나타납니다.

유대 사람들이 시샘해, 장터에서 어슬렁거리는 못된 사람 몇을 끌어들여 무리를 모아 도시에 소요를 일으켰다. 그리고 야손의 집에 들이닥쳐 두 사람을 민회 앞으로 끌어내려 했다.사도행전 17:5 · 본디새김

여기서 「유대 사람들이」라는 표현을 데살로니가의 모든 유대인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누가는 앞서 유대 사람들 가운데 몇몇이 바울의 말을 받아들였다고 기록했습니다. 이제 등장하는 이들은 그와 달리 바울을 반대하며 소요를 일으킨 사람들입니다.

야손이 정확히 어떤 지위의 사람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다만 바울 일행을 자기 집에 맞아들였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빌립보에서 루디아가 자기 집을 열어 선교사들을 맞아들였듯, 데살로니가에서는 야손이 그들을 맞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 환대 때문에 야손이 관리들 앞에 끌려갑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받아들이는 일은 개인적인 친절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겪는 위험에 연루되는 일일 수 있습니다.

고발자들이 외친 말은 이렇습니다.

그들을 찾지 못하자 야손과 형제 몇 사람을 도시 관리들에게 끌고 가 소리쳤다. 「세상을 뒤엎은 이 사람들이 여기에도 와 있습니다.」사도행전 17:6 · 본디새김

이 문장은 묘한 역설을 품고 있습니다.

지금 데살로니가에서 소요를 일으킨 사람들은 바울과 실라가 아니라, 그들을 반대하는 사람들입니다. 누가는 이 모순을 해설하지 않습니다. 소요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먼저 보여 준 뒤 고발자들의 말을 그대로 옮길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을 ‘복음이 실제로 세상을 뒤엎는다’는 누가 자신의 직접적인 선언으로 읽을 수는 없습니다. 본문에서 이 표현은 어디까지나 바울 일행을 고발하는 사람들의 말입니다.

하지만 그들이 제기한 다음 혐의에는 실제 복음의 내용과 맞닿는 부분이 있습니다.

「야손이 그들을 맞아들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카이사르의 결정들을 거슬러 행동하며, 예수라는 다른 왕이 있다고 말합니다.」사도행전 17:7 · 본디새김

유대인의 성경에서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는 말은 다윗의 왕권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선포하는 일에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시라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고발자들은 바로 이 지점을 정치적인 문제로 제시합니다. 카이사르가 다스리는 제국 안에서 다른 왕을 선포한다는 말은 위험하게 들릴 수 있었습니다. 데살로니가는 로마 제국에 속한 도시였고, 도시 관리들은 공공질서와 제국에 대한 충성 문제를 가볍게 여길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이 고발은 사실일까요, 거짓일까요?

예수님께서 왕이시라는 말 자체는 바울의 복음과 어긋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데살로니가에서 로마 황제를 몰아내기 위한 정치적 반란을 선동했다는 증거는 본문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고발에는 복음의 실제 주장과 그것을 위험한 정치적 행동으로 몰아가는 해석이 함께 들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23:2에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빌라도 앞에 고발하면서 예수님께서 자신을 그리스도 곧 왕이라고 주장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그 예수님을 전하는 사람들도 다른 왕을 선포한다는 이유로 고발당합니다. 두 사건을 완전히 같은 상황으로 볼 수는 없지만, 예수님 자신에게 제기되었던 정치적 혐의가 이제 예수님의 이름을 전하는 사람들에게도 제기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가 임명한 또 하나의 지방 통치자가 아니십니다. 예수님의 왕권은 하나님이 죽음에서 살아나게 하시고 높이신 분의 권위입니다. 이것이 곧 무장 반란을 정당화하지는 않지만, 인간의 정치적 권력이 궁극적인 권위라는 생각에도 머물지 않습니다.

17장 마지막에서 바울은 하나님이 한 사람을 세워 온 세상을 의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선포합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다른 왕」이라고 불리신 예수님께서 아테네에서는 장차 세상을 심판하시도록 하나님이 정하신 분으로 드러나시는 것입니다.

한편 데살로니가의 관리들은 야손과 나머지 사람들에게 보증을 받고 풀어 줍니다. 바울과 실라가 그날 밤 도시를 떠난다는 사실을 보면, 그들이 데살로니가에서 계속 공개적으로 활동하기는 어려워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야손은 풀려났지만, 그의 집에 왔던 선교사들은 떠나야 합니다.

그리고 바울 일행을 받아들이는 또 다른 도시가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고발자들이 말하는 「카이사르의 결정들」이 정확히 어떤 법령을 가리키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황제에 대한 반역 혐의로 이해하는 전통적인 해석이 있고, 제국의 통치와 관련된 예언을 금지하는 규정이나 사적 결사에 관한 법적 문제로 이해하는 해석도 있습니다. 어느 하나를 본문이 명시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관리들이 받은 보증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요구했는지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금전적인 담보였을 가능성이 있고, 앞으로 소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책임지겠다는 약속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베뢰아 — 열린 마음은 무조건 믿는 마음이 아니다

사도행전 17:10–15 본문 →

형제들은 밤사이에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냅니다.

데살로니가에서 위협을 받았으니 다른 도시에서는 조심스럽게 행동할 법도 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베뢰아에 도착하자 다시 유대 사람들의 회당으로 들어갑니다. 복음을 전하는 방식이 위험을 가져왔다는 이유로 그 방식을 모두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베뢰아 사람들에 관한 누가의 평가는 특별합니다.

이 사람들은 데살로니가에 있는 이들보다 마음이 트여 있었다. 온 열의를 다해 그 말씀을 받아들였고, 그 내용이 정말 그러한지 날마다 성경을 따져 보았다.사도행전 17:11 · 본디새김

말씀을 열심히 받아들이는 일과 그 말이 옳은지 따져 보는 일은 언뜻 긴장 관계에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미 믿기로 결정했다는 뜻 아닙니까? 그렇다면 왜 다시 그것이 사실인지 따져 보아야 합니까?

그런데 누가는 이 둘을 대립시키지 않습니다. 오히려 두 가지가 함께 있었다는 사실을 긍정적으로 평가합니다.

「따져 보았다」는 조사하고 심사한다는 뜻을 지니며, 법적인 조사나 신중한 검토를 가리킬 때도 쓰이는 말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의 말을 듣고 단순히 좋은 느낌을 받았기 때문에 믿은 것이 아니라, 바울의 설명이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성경과 일치하는지 확인했습니다.

바울이 그들의 검토를 방해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누가는 그들을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고 책망하지 않고, 오히려 마음이 트여 있는 사람들이라고 평가합니다.

본문에서 열린 마음은 검증을 포기한 마음이 아니라, 기꺼이 들으면서도 진지하게 살펴보는 마음입니다.

이것은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이 사용한 방식과도 잘 맞습니다. 바울은 성경을 풀어 밝히고 증거를 제시했고, 베뢰아 사람들은 그 증거가 타당한지 성경을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의 논증과 베뢰아 사람들의 검토가 서로 마주한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사용하는 성경은 오늘날 우리가 가진 구약과 신약 전체를 뜻하지 않습니다. 이때에는 신약성경이 완성되어 있지 않았고, 그들이 살펴본 성경은 이스라엘의 성경이었습니다. 따라서 베뢰아 사람들이 검토한 핵심 문제 역시 예수님께서 정말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리스도이신지,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에 대한 바울의 설명이 성경과 맞는지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많은 이가 믿었고, 지체 높은 그리스 여자들 가운데서도 남자들 가운데서도 믿은 이가 적지 않았다.사도행전 17:12 · 본디새김

이 절의 「그래서」는 앞선 검토와 믿음을 연결합니다. 말씀을 열심히 받아들이고 성경을 따져 본 일이 믿음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데살로니가 사람들은 성경을 제대로 살피지 않았고 베뢰아 사람들은 잘 살폈다는 식으로 단순화해서는 안 됩니다. 누가는 데살로니가에서도 몇몇 유대 사람들이 설득되었다고 기록했습니다. 베뢰아 사람들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는 그 지역 사람들이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선언이 아니라, 말씀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평가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평화는 오래 지속되지 않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을 반대하던 사람들이 베뢰아에서 바울이 말씀을 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와 베뢰아의 무리까지 흔들어 놓습니다. 이 장에서는 도시를 옮겨 가는 바울보다 반대자들의 움직임이 더 빠르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형제들은 이번에도 바울을 피신시키지만, 실라와 디모데는 베뢰아에 남습니다. 바울이 떠난다고 해서 그곳의 사역이 모두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말씀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있고, 그들과 함께 남아 있는 동역자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형제들의 배웅을 받으며 아테네까지 갑니다. 그러나 이 이동은 처음부터 아테네에서 대대적인 선교 활동을 벌이기 위해 계획된 여정으로 소개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기다림의 시간에, 사도행전에서 가장 독특한 연설 가운데 하나가 시작됩니다.

아테네 — 하나님을 모르는 도시에서 하나님을 이야기하다

사도행전 17:16–21 본문 →

아테네에 도착한 바울은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립니다.

그런데 그가 도시를 둘러보면서 보게 된 것은 아름다운 건축물이나 철학의 전통만이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아테네에서 그들을 기다리며 그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한 것을 보았다. 그 모습에 그의 영이 그의 속에서 격하게 뒤흔들리고 있었다.사도행전 17:16 · 본디새김

아테네는 고대 그리스 문화와 철학의 중심지였고, 여러 신을 기리는 신전과 제단, 조각상들이 도시 곳곳에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 도시를 보며 감탄하지 않습니다. 그가 보고 있는 것은 단순한 예술 작품이 아니라, 사람들이 하나님이라고 믿고 경배하는 대상들이었습니다.

여기서 예상할 수 있는 행동은 우상 숭배를 강하게 비난하는 연설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먼저 사람들과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그는 회당에서 유대 사람들과 하나님을 받드는 이들과 토론했고, 장터에서도 날마다 마주치는 이들과 토론했다.사도행전 17:17 · 본디새김

회당에서 시작하는 것은 다른 도시와 같지만, 이번에는 장터도 토론의 자리가 됩니다. 회당과 장터에서 모두 쓰인 「토론했다」(διαλέγομαι)는 데살로니가에서 성경을 가지고 「따져 이야기했다」고 할 때와 같은 동사입니다. 바울은 성경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그리스 철학과 여러 신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논증합니다.

그러나 두 집단이 공유하는 지식과 전제는 다릅니다. 회당에서는 성경을 권위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만났고, 아테네의 장터에서는 그 성경을 권위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따라서 바울이 전하는 진리는 같더라도, 그것을 설명하는 출발점은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장터에서의 논의에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이 참여합니다. 이 두 학파는 모두 고대 그리스 철학의 중요한 전통이었지만, 세계와 신을 이해하는 방식은 상당히 달랐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는 신들이 존재하더라도 인간 세계의 일에 개입하거나 인간을 심판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인간의 삶에서 불필요한 두려움을 덜어 내고 평온함을 추구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으며, 죽음 이후의 심판이나 육체의 부활은 그들의 세계관과 어울리기 어려웠습니다.

스토아 학파는 우주를 관통하는 이성과 질서를 강조했습니다. 인간 역시 이 질서 속에서 살아가며, 이성에 따라 덕을 실천하는 삶을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이들은 신적인 원리가 세계 안에 작용한다고 이해했지만, 그것이 곧 하나님이 한 사람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 역사 전체를 심판하신다는 믿음과 같지는 않았습니다.

두 학파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은 양쪽 모두에게 낯선 주제였습니다.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 몇도 그와 맞붙어 말을 주고받았다. 어떤 이들은 말했다. 「주워들은 말을 떠벌리는 이 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다른 이들은 말했다. 「낯선 귀신들을 알리는 자인 듯하다.」 그가 예수와 부활을 복음으로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사도행전 17:18 · 본디새김

「주워들은 말을 떠벌리는 이 자」는 본래 떨어진 씨앗을 주워 먹는 새를 가리키던 말로,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지식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한 채 늘어놓는 사람을 낮잡아 부르는 데 쓰였습니다. 철학자들 가운데 일부는 바울을 진지하게 대할 가치가 없는 사람처럼 본 것입니다.

다른 이들이 그를 낯선 신들을 알리는 자로 여긴 까닭을 누가는 그가 예수와 부활을 전했기 때문이라고 밝힙니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의 부활이 그들의 익숙한 종교적 범주 안에 쉽게 들어맞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아레오바고로 데려갑니다.

본문은 그들이 바울의 새로운 가르침을 알고 싶다고 요청하는 데 초점을 두며, 유죄 판결이나 법적 처벌은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그들의 호기심을 소개하면서 독특한 말을 덧붙입니다.

아테네 사람들과 거기 머무는 외지 사람들은 모두 더 새로운 것을 말하거나 듣는 일 말고는 다른 데 시간을 쓰지 않았다.사도행전 17:21 · 본디새김

이것은 아테네 사람들에 대한 서술자의 비판적인 평가로 읽힙니다.

새로운 것을 듣고 싶어 하는 것과 진리를 알고 싶어 하는 것은 반드시 같지 않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새로운 가르침에 관심을 보였지만, 그 관심이 자신들의 생각과 삶을 바꿀 준비가 되어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바울이 말하려는 내용이 그들에게 단지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상으로 남을지, 아니면 자신들이 믿어 온 세계를 다시 생각하게 만들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호기심 앞에 섭니다.

그런데 그의 첫마디는 의외로 부드럽습니다.

조금 더 깊이

「우상으로 가득한」에 쓰인 낱말은 신약에서 이곳에만 등장하며, 단순히 우상이 있다는 정도가 아니라 우상들로 뒤덮인 상태를 강조합니다. 「격하게 뒤흔들리고」에 쓰인 동사는 강하게 자극하거나 격분하게 한다는 의미를 지닙니다. 18절의 「낯선 귀신들」에 관해서는 이런 해석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스어로 부활은 아나스타시스이고 여성형 명사이기 때문에, 철학자들이 바울의 말을 예수라는 남신과 아나스타시스라는 여신을 전하는 것으로 오해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들이 부활을 실제로 여신의 이름으로 알아들었다고 명시하지 않으므로, 그 오해의 구체적인 내용을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 아레오바고는 아테네의 언덕 이름이면서, 그곳과 관련된 전통을 지닌 평의회 또는 그 기구를 가리키는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정확히 언덕 위에서 연설했는지, 평의회가 모이는 다른 장소에서 이야기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고, 바울이 정식 재판을 받았는지 새로운 가르침에 관한 설명을 요청받은 것인지에도 견해가 갈립니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 — 경건함 속에 숨어 있는 무지

사도행전 17:22–23 본문 →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했다. 「아테네 사람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모든 면에서 종교심이 유난히 강한 이들이라고 봅니다.」사도행전 17:22 · 본디새김

바울은 자신이 본 우상들에 대한 분노를 그대로 쏟아 놓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종교적 열심을 언급하며 말을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문장은 칭찬일까요, 비판일까요?

「종교심이 유난히 강한」에 쓰인 데이시다이모네스테로스는 해석이 한쪽으로 고정되지 않는 표현입니다. 신들을 경외하는 태도를 나타낼 수도 있지만, 신들을 지나치게 두려워하거나 미신적인 태도를 나타낼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아테네 사람들의 경건함을 순수하게 칭찬했다고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첫마디부터 그들을 노골적으로 조롱했다고 볼 필요도 없습니다.

이어지는 말은 이 모호함을 잘 활용합니다.

「두루 다니며 여러분이 받드는 것들을 살펴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겨진 제단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알지 못한 채 경건히 받드는 그 대상을 내가 여러분에게 알립니다.」사도행전 17:23 · 본디새김

사람들은 신을 경배하려고 제단을 만들었지만, 그 제단에는 누구를 경배하는지 알지 못한다는 사실이 새겨져 있습니다.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신적 존재가 있을 가능성까지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그 제단을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습니다. 그러나 그는 ‘여러분이 이미 참하나님을 올바르게 경배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신의 이름만 알려 드리겠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이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의 종교심을 어떻게 대합니까? 무조건 칭찬하지도 않고, 그들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고 몰아붙이지도 않습니다. 그들의 제단에서 출발하되, 그 제단만으로는 참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밝힙니다.

여기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와 전혀 다른 출발점을 사용합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사람들이 함께 알고 있는 성경을 펼쳤고, 아테네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손으로 세운 제단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나 목적은 같습니다.

사람들이 이미 가지고 있는 이해를 통해 아직 알지 못하는 하나님의 일을 밝히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바울은 그 하나님이 누구신지 설명합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문헌에는 아테네에 알려지지 않은 신들을 위한 제단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이 기록한 단수형의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비문을 지닌 제단이 실제로 발굴되어 확인된 것은 아니므로, 여기서는 누가가 전하는 바울의 관찰을 따라 읽어야 합니다. 또 그리스어 원문에서 「여러분이 알지 못한 채 경건히 받드는 그 대상」의 ‘그 대상’은 중성 관계대명사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바울이 곧바로 아테네의 제단에 새겨진 신을 성경의 하나님과 동일시했다기보다, 그들의 무지와 경배 행위를 출발점으로 자신이 전하려는 하나님을 새롭게 알리고 있다고 읽을 근거가 됩니다. 이 대목의 강조점이 아테네 사람들의 종교적 지식이 아니라 그 지식의 한계에 있다는 해석도 있습니다.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은 사람의 손에 갇히지 않으신다

사도행전 17:24–29 본문 →

바울은 아테네의 수많은 신들 가운데 하나를 소개하지 않습니다.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하나님, 이분은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므로 손으로 지은 신전들에 살지 않으십니다.」사도행전 17:24 · 본디새김

아테네의 신전은 사람들이 신들을 위해 지은 장소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하나님이 사람이 지은 신전 안에 거주해야 하는 분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분이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은 구약의 창조 신앙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지으셨다고 선포합니다. 이사야 66:1–2에서는 하나님이 하늘을 자신의 보좌, 땅을 자신의 발판이라고 하시며 사람이 지을 집이 어떻게 자신을 담을 수 있겠느냐고 물으십니다.

또한 이 말은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이 했던 「가장 높으신 분은 손으로 지은 곳에 살지 않으십니다」(사도행전 7:48)라는 말과도 연결됩니다. 스데반은 이스라엘의 성전과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이 말을 했고, 바울은 이제 아테네의 신전을 바라보며 같은 신학적 진리를 말합니다.

이 논리는 유대인의 성전과 이방인의 신전에 모두 적용됩니다. 하나님을 특정한 공간에 가두어 그곳에만 계시는 분처럼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아테네의 우상 숭배에만 해당하는 비판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역시 하나님을 성전이라는 건물에 제한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지으신 분이라면, 그분을 모시기 위해 지은 건물이 그분의 존재를 결정하지 않습니다.

이어서 바울은 신전 자체보다 더 깊은 문제를 지적합니다.

「무엇이 모자라신 듯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지도 않으십니다. 도리어 그분이 모두에게 생명과 숨과 만물을 주십니다.」사도행전 17:25 · 본디새김

사람들은 신을 위해 무엇인가 바칩니다. 제물을 드리고, 신전을 세우고, 신상을 아름답게 장식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살아 계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살아 있게 하십니다.

이것은 제사를 비롯한 모든 예배 행위가 무의미하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의존하시는 분이 아니며, 인간의 섬김으로 부족한 것을 채우셔야 하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시편 50편에서도 하나님은 세상과 그 안에 있는 것이 모두 자신의 것이므로 제물로 바치는 짐승이 필요해서 사람에게 제사를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십니다(시편 50:9–12).

바울이 아테네의 신전들을 바라보며 제기하는 문제는, 사람들이 경건하다고 생각하는 행위가 실제로는 하나님을 인간과 비슷한 욕구를 가진 존재로 오해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명과 숨을 주시는 분이라면, 그분은 사람들이 돌보아야 살아남는 신이 아닙니다.

그리고 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설명은 곧 인간 전체에 대한 이야기로 확장됩니다.

한 사람에게서 모든 민족을 지으셨다

「그분은 한 사람에게서 인류의 모든 민족을 지어 온 땅 위에 살게 하시고, 미리 정해진 시기와 거주지의 경계를 정하셨습니다.」사도행전 17:26 · 본디새김

이 말은 아테네의 청중에게 의미 있는 도전이 되었을 수 있습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오랜 문화와 정치적 전통을 자랑했고, 그리스인과 비그리스인을 구별하는 문화적 경계도 뚜렷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한 도시나 한 민족의 특별한 기원에서 출발하지 않고, 모든 민족이 한 사람에게서 나왔다고 말합니다. 이 문장은 창세기의 인류 기원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창조 아래 있으며, 서로 다른 민족들이 하나의 인간적 기원을 공유한다는 이해입니다.

바울의 논증에서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의 이름보다 모든 민족의 공통된 기원입니다. 아테네 사람들과 다른 민족들은 서로 다른 신들의 소유물이 아닙니다. 모두 한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민족들의 시기와 거주지의 경계를 정하셨다는 말은 어떤 뜻일까요? 이것을 각 민족의 정치적 국경이 모두 영원히 하나님이 정하신 것이므로 변경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으로 읽는 것은 지나칩니다. 바울은 여기서 특정 국가의 국경이나 정치 제도를 정당화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가 말하는 것은 인류의 역사와 거주 역시 창조주의 다스림 밖에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이어지는 27절에서 그 목적을 설명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혹시라도 더듬어서 그분을 찾아내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그분은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습니다.」사도행전 17:27 · 본디새김

「더듬다」는 손으로 만지며 더듬는다는 뜻입니다. 눈으로 분명하게 볼 수 없을 때 손을 뻗어 주위를 더듬는 모습을 생각하면 됩니다. 「혹시라도」와 함께 쓰인 동사들의 형태에도 찾아낼 수 있을지 조심스럽게 말하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찾으려고 한다는 사실이 곧 하나님을 정확히 알고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이 표현은 23절의 제단과 이어집니다.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는 글을 새긴 아테네 사람들은 신적 존재를 찾고 경배하려 했지만, 자신들이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그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멀리 계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은데, 사람들은 그분을 찾으려고 더듬고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인간의 세계에서 완전히 사라지셨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인간이 자신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이 아니라 그리스 시인의 시를 가져옵니다.

「우리도 그의 자손이다」 — 그리스 시인의 말로 우상을 반박하다

「우리가 그분 안에서 살고 움직이고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의 시인들 가운데 몇몇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도 그의 자손이다.』」사도행전 17:28 · 본디새김

「우리도 그의 자손이다」라는 말은 그리스 시인 아라토스의 시 《현상》(Phaenomena) 첫머리에 있는 표현과 일치합니다. 아라토스의 시는 제우스를 이야기하면서 시작합니다. 시인은 사람들이 어디에 있든 제우스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며, 사람들이 그의 자손이기 때문이라고 노래합니다.

아라토스가 말하는 「그」는 제우스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표현을 자신이 전하는 창조주 하나님에게 적용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제우스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같은 분이라고 말하는 것일까요?

그렇게 볼 수는 없습니다. 바울은 바로 앞에서 사람이 만든 신전이나 우상에 하나님이 갇혀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고, 곧이어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로 만든 형상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 시인의 신학 전체를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시에 담긴 한 가지 통찰, 곧 인간이 신적인 근원에 의존하여 존재한다는 생각을 가져와, 그 통찰을 더욱 일관되게 생각하면 우상 숭배를 다시 검토해야 한다고 논증합니다. 바울은 그 생각을 자신이 전하는 창조주 하나님과 연결하지만,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별을 없애지는 않습니다. 그 점이 바로 다음 절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손이니, 신이라는 것이 사람의 솜씨와 궁리로 금이나 은이나 돌을 새겨 만든 것과 같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사도행전 17:29 · 본디새김

인간이 하나님의 자손이라면,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받은 존재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자기 손으로 금이나 은이나 돌을 깎아 신의 형상을 만든다면, 생명을 받은 존재가 생명을 주시는 분을 자기 손으로 만들어 내는 셈이 됩니다.

바울은 그 모순을 지적합니다.

이는 구약 예언자들이 우상을 비판하던 방식과 깊이 연결됩니다. 이사야 44:9–20에서는 사람이 나무를 베어 그 일부로 불을 피우고 음식을 만들면서, 다른 일부로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는 모습이 묘사됩니다. 예언자는 사람이 자기가 만든 물건을 경배하는 모순을 드러냅니다.

바울은 그와 비슷한 논리를 아테네 사람들에게 제시하면서도 이사야서를 직접 인용하지 않고, 아테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시인의 말에서 출발합니다. 그들의 문화 안에서 참되게 사용할 수 있는 통찰을 발견하고, 그 통찰을 통해 그들이 믿고 있던 종교적 세계관의 모순을 드러냅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추면 바울의 연설을 절반만 이해하게 됩니다.

이제까지 바울은 창조주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설명했지만, 그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말하지 않았습니다.

바로 다음 절에서 연설의 방향이 바뀝니다.

조금 더 깊이

26절의 「한 사람에게서」는 원문에서 엑스 헤노스이며, 글자 그대로는 ‘하나로부터’ 또는 ‘한 사람에게서’라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일부 그리스어 사본에는 ‘피’라는 말이 추가되어 ‘한 피로부터’라는 표현이 나타나지만, 더 오래된 사본들에는 그 낱말이 없습니다. 28절의 아라토스 시 그리스어 원문에는 곧 「우리도 그의 자손이기 때문이다」라는 표현이 나타납니다.

하나님을 찾는 인간에게, 하나님이 회개를 명하신다

사도행전 17:30–31 본문 →

「그러니 사람들이 알지 못하던 때는 하나님이 눈감아 주셨으나, 이제는 어디서나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라고 명하십니다.」사도행전 17:30 · 본디새김

앞에서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한 채 경건히 받들고, 하나님을 찾으려고 더듬는 모습을 이야기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명령하신다고 말합니다.

이는 사도행전에서 전혀 새로운 메시지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선포했습니다(사도행전 2:38; 3:19). 바울 역시 이전 선교 여행에서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서라고 말했습니다(14:15).

그러나 아테네에서 이 말에 이르기까지 밟아 온 과정이 특별합니다. 바울은 먼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신 분이고, 사람이 무엇을 바쳐 그분의 부족함을 채울 수 없으며, 모든 민족이 그분에게서 생명을 받았고,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서 멀리 떨어져 계시지 않는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가까이 계시고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을 사람들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는 단순히 종교적 의식을 더 열심히 수행하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잘못 이해해 온 방식에서 돌아서라는 요구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자기 손으로 만든 형상과 같은 존재로 생각했다면, 그 생각을 바꾸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여러 신적 존재 가운데 하나로 여기고 있었다면,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새롭게 알아야 합니다.

또한 바울은 회개의 대상을 「어디서나 모든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앞서 모든 민족이 한 사람에게서 나왔다는 설명과 연결됩니다. 한 하나님이 모든 민족에게 생명을 주셨으므로, 이제 그분의 부르심도 모든 사람에게 향합니다. 아테네 사람들만 회개해야 하는 것도, 유대 사람들에게만 주어진 요구도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지금 회개를 명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바울은 그것을 미래에 일어날 한 사건과 연결합니다.

「그분이 날을 잡아 두셨고, 그날에 그분이 정해 두신 사람을 통해 사람 사는 온 땅을 의로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를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써 모든 이에게 믿음의 근거를 주셨습니다.」사도행전 17:31 · 본디새김

여기서 창조와 심판이 하나로 연결됩니다.

하나님이 모든 민족을 지으시고 그들에게 생명을 주셨다면, 그분은 인류의 역사와 삶에 대해서도 궁극적인 권위를 지니십니다. 바울은 처음부터 하나님을 「하늘과 땅의 주인」이라고 소개했고, 이제 그 주권이 마지막 심판에까지 미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구약의 하나님 이해와도 깊이 연결됩니다. 시편 96:10–13은 여호와야훼가 민족들을 올바르게 심판하시며 의로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다고 노래합니다. 시편 98:9 역시 그분이 의로 세상을 심판하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하나님이 그 심판을 직접 행하신다고만 말하지 않고, 「정해 두신 사람을 통해」 심판하신다고 말합니다. 그 사람은 누구일까요?

아레오바고 연설의 이 부분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이 직접 나오지 않습니다. 바울은 앞서 장터에서 예수님과 부활을 전하고 있었으므로, 사도행전을 읽는 독자는 이 「정해 두신 사람」이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연설 자체에서는 예수님의 이름을 마지막까지 명시하지 않고, 대신 하나님이 예수님을 어떻게 증언하셨는지를 말합니다.

여기에 아테네 연설의 결정적인 주장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장차 세상을 심판하시리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근거를 주셨습니다」는 개인의 주관적인 믿음만이 아니라 확신할 수 있는 근거나 보증의 뜻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시키심으로써 그분이 정하신 심판자에 대한 보증을 모든 사람에게 제시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데살로니가에서 바울이 했던 설명과 깊이 연결됩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하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고난받고 부활하셔야 했다는 성경의 증언을 제시했습니다. 아테네에서는 세상을 지으신 하나님이 장차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하며, 그 일을 위해 정하신 예수님을 부활시키셨다는 사실을 제시합니다.

출발점은 다르지만 결론은 같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밝히는 하나님의 행동입니다.

바울은 심판의 기준을 「의」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임의대로 세상을 심판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그분의 심판이 올바름과 정의에 따른다는 뜻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이 의로 심판하신다는 선언은 악에 대한 심판인 동시에 억압받는 이들에게는 정의가 이루어진다는 소식이기도 했습니다. 시편 98편은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하러 오신다는 사실을 온 땅이 기뻐해야 할 일로 노래합니다.

이 배경을 생각하면 바울의 선언은 단순히 사람들을 두렵게 만들기 위한 위협으로만 읽히지 않습니다. 세상은 우연과 불의 속에 아무런 결론 없이 버려져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온 세상을 의로 심판하실 날을 정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을 맡기실 분을 이미 죽음에서 일으키셨습니다.

여기서 아테네의 철학자들에게는 결정적인 문제가 나타납니다. 지금까지 바울이 말한 창조주와 인간의 의존성, 하나님의 초월성과 가까우심 같은 주제는 철학적인 논의의 대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실제로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어나셨으며, 하나님이 예수님을 세상의 심판자로 세우셨다는 주장은 철학적 원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 사건에 관한 선언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에 대한 추상적인 설명에서 멈추지 않고, 그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행하신 한 사건을 증언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 청중의 반응이 갈라집니다.

부활 앞에서 갈라진 사람들

사도행전 17:32–34 본문 →

죽은 이들의 부활에 관한 말을 듣고 어떤 이들은 비웃었고 어떤 이들은 말했다. 「이 일을 두고 그대에게서 다시 듣겠습니다.」사도행전 17:32 · 본디새김

누가는 바울의 연설이 통상적인 마무리 문장으로 끝났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부활에 관한 말이 나오자 곧바로 청중의 반응을 전합니다. 어떤 이들은 비웃고, 어떤 이들은 나중에 다시 듣겠다고 하고, 몇 사람은 바울에게 붙어 믿습니다.

누가는 바울이 하나님은 신전에 살지 않는다고 말했을 때 비웃음이 터졌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한 하나님이 모든 민족을 지으셨다고 말했을 때도 아닙니다.

부활을 말했을 때입니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도 죽음 이후의 삶을 상상하거나 영혼의 불멸을 논하는 전통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다시 일어난다는 기독교의 부활 신앙은 단순히 영혼이 죽음 이후에도 존재한다는 주장과 달랐습니다. 특히 에피쿠로스 학파는 죽음을 인간 존재의 끝으로 이해했고, 스토아 학파 역시 사도들이 전하는 죽은 자의 부활을 자신들의 철학적 틀 안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부활은 사람의 영혼이 육체를 벗어나 더 나은 세계로 간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죽으신 예수님을 실제로 일으키셨다는 사건의 선언입니다. 또한 바울은 그 부활을 예수님의 부활이 장차 이루어질 하나님의 심판과 연결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아테네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하나의 흥미로운 사상을 지식 목록에 추가하는 일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알고 있는 세계가 실제로 어떤 세계인지 다시 판단하는 일입니다.

「다시 듣겠습니다」라는 말은 더 알아보고 싶다는 진지한 관심일 수도 있고, 더는 듣고 싶지 않다는 정중한 거절일 수도 있습니다. 누가는 그들의 속마음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모두가 진지하게 공부할 마음이었다거나, 모두가 바울을 돌려보내기 위해 핑계를 댔다고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이 말 뒤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났다고 기록합니다. 연설의 자리에서 더 이상의 논의가 이어지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몇 사람이 그에게 붙어 믿었다. 그 가운데 아레오바고 의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여자와 그들과 함께한 다른 이들이 있었다.사도행전 17:34 · 본디새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에서는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다고 기록했지만, 아테네에서는 「몇 사람」이라고만 말합니다. 디오누시오가 나중에 어떤 교회 지도자가 되었는지, 다마리가 어떤 사회적 지위를 지녔는지는 이 본문에서 알 수 없습니다. 누가는 그들의 이름과 믿게 되었다는 사실만 남깁니다.

그렇다면 아테네에서의 선교는 실패한 것일까요?

사도행전 17장만으로 그런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때때로 아테네에서는 철학적인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성과가 적었고, 바울이 그 실패를 깨달아 이후에는 십자가만 전하기로 했다는 해석이 제시됩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은 바울이 자신의 아테네 연설을 잘못된 방법이었다고 평가했다는 기록을 제공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바울은 이 연설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회피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부활을 이야기했을 때 청중의 반응이 갈라졌습니다. 따라서 아테네에서의 사건을 바울이 복음을 철학으로 대체했다가 실패한 이야기로 읽는 것은 본문이 말하는 범위를 넘어섭니다.

그는 그리스 철학자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논증을 사용했지만, 그들의 사상 안에 복음을 가두지는 않았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설명하고, 인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있음을 밝히고, 회개를 요구하며, 마지막으로 하나님이 예수님을 부활시키셨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는 청중이 이해할 수 있는 곳에서 시작했지만, 청중이 이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곳에서 멈추지는 않았습니다.

상대방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는 것과, 상대방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내용만 말하는 것은 다릅니다. 바울은 그 차이를 지켰습니다.

같은 복음이 서로 다른 세계를 만날 때

사도행전 17:1–34 본문 →

사도행전 17장의 세 도시에서 같은 복음은 서로 다른 세계를 만납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성경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의 문제로, 베뢰아에서는 들은 말을 성경으로 검토하는 일로, 아테네에서는 알지 못하는 신과 세상의 기원과 생명의 근원을 묻는 질문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어느 자리에서든 바울은 결국 예수님의 부활에 이릅니다. 복음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것을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비추어 다시 이해하도록 요구합니다.

바울이 아테네에서 말한 창조주는 철학자들의 신과 적당히 결합한 결과가 아니라 이스라엘이 알고 있던 바로 그 하나님이며, 그분을 알리는 방식이 달라졌을 뿐입니다. 그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는데도 사람들은 그분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은 이미 가진 종교적 지식을 더 세련되게 만드는 과정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실제로 어떤 분이신지, 그분이 역사 속에서 무엇을 행하셨는지 들어야 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말씀을 살폈고, 아테네의 일부 사람들은 부활을 비웃었습니다. 그 차이는 단순히 누가 더 많이 배우고 지식이 많았는가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들의 이해를 넘어서는 일을 행하셨다는 증언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의 문제였습니다.

처음 아테네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그 도시가 우상으로 가득한 것을 보고 격하게 뒤흔들렸습니다. 그곳에는 수많은 제단과 신전이 있었고, 사람들은 새로운 이야기를 듣고 논하기를 좋아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셨다는 말에 어떤 사람들은 비웃었고, 다른 사람들은 다음에 다시 듣겠다고 했습니다. 누가는 바울이 더 길게 설명하며 그들을 설득하려 했다고 적지 않습니다. 그는 그들 가운데서 떠납니다.

이제 바울이 떠나는 장면에는 거대한 신전도, 철학자들의 논쟁도 더 이상 등장하지 않습니다. 대신 누가는 몇 사람의 이름을 남깁니다.

디오누시오와 다마리.

바울이 전한 부활의 소식을 듣고, 비웃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에게 붙어 믿었던 사람들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학자 견해·해석 전통과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본디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