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18장

이 장의 자리 · 13–20장 · 여러 도시로 떠난 길

내가 너와 함께 있다

고린도에서 바울은 사람들을 만나고, 함께 일하고,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반대에 부딪칩니다. 그는 옷을 털며 이제부터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가겠다고 선언합니다. 또다시 한 도시를 떠나야 할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어느 밤,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계속 말하고, 잠잠히 있지 마라.」 그리고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라고 덧붙이십니다.

바울에게는 반대하는 사람들의 얼굴이 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 도시의 「내 백성」을 보게 하십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곳에 일 년 육 개월을 머뭅니다. 지금까지 선교 여행에서 도시를 옮겨 다니던 바울에게는 상당히 긴 머무름입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18장의 독특함은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장의 첫머리에서 바울은 로마에서 쫓겨난 한 부부를 만나 그들과 함께 천막을 만들며 살아갑니다. 그 부부는 나중에 바울과 함께 에베소로 가지만, 바울이 떠난 뒤에도 그곳에 남습니다. 그리고 성경을 깊이 알고 예수님에 관한 일을 정확하게 가르치는 아볼로라는 사람을 만나, 그에게 하나님의 길을 더 정확하게 설명해 줍니다. 이 장은 바울이 없는 에베소에서 두 사람이 다른 설교자를 가르치고, 그 설교자가 다시 다른 지역의 믿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이야기로 끝납니다.

사도행전 18장을 읽으며 따라가야 할 질문은 이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울과 함께하신다는 약속은, 바울이 모든 일을 직접 이룬다는 뜻일까요? 아니면 바울이 떠난 뒤에도 계속되는 하나님의 일을 보게 하는 약속일까요?

읽는 시간 24분소단락 818장 본문 읽기 →

로마에서 쫓겨난 부부와 천막을 만드는 사도

사도행전 18:1–4 본문 →

바울은 아테네를 떠나 고린도로 갑니다.

고린도는 로마가 다스리던 아가야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반도를 잇는 좁은 땅에 자리하고, 두 방향의 항구를 통해 사람들이 모여드는 상업 도시였습니다. 로마의 행정과 그리스의 문화, 다양한 지역의 상업과 종교가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바울이 공개적으로 복음을 전한 이야기보다 먼저 한 부부를 소개합니다.

그곳에서 본도 출신의 유대 사람 아굴라를 만났습니다. 아굴라는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얼마 전에 이탈리아에서 왔습니다.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모든 유대 사람에게 로마를 떠나라고 명령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부부를 찾아갔습니다.사도행전 18:2 · 두루새김

누가는 그 명령의 정치적 배경이나 목적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왜 고린도에 와 있는지를 알려 줄 뿐입니다. 그들은 고린도에 정착하기 위해 로마를 떠난 사람들이 아니라, 황제의 명령 때문에 로마를 떠나야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본도 출신인 아굴라는 이미 여러 지역을 옮겨 다니며 살았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언제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다만 이후의 이야기에서 그들이 바울과 가까이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되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두 사람을 바울과 연결한 계기는 매우 일상적입니다.

바울은 그들과 직업이 같아서 함께 지내며 일했습니다. 그들은 천막을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사도행전 18:3 · 두루새김

바울은 자기 손으로 일하며 생계를 꾸렸습니다.

그는 도시마다 설교단에 서는 사람으로만 살지 않았습니다. 함께 일할 사람을 찾아가고, 일터에서 시간을 보내고, 먹고 지낼 곳을 마련해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한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야기를 따라가면 그 이상의 결과가 나타납니다. 바울은 같은 일을 하는 부부와 함께 지내게 되었고, 그 부부는 이후 에베소에서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더 정확하게 가르치는 사람들이 됩니다. 누가가 바울이 그들에게 무엇을 언제 가르쳤는지 기록하지 않으므로 일터가 정기적인 배움의 장소였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관계는 회당에서 한 번 만나는 관계가 아니라 삶의 공간과 일을 함께 나누는 동료들의 관계였습니다.

안식일에는 바울이 회당에서 유대 사람들과 그리스 사람들을 설득하려 합니다. 그러나 나머지 날에는 천막을 만드는 일이 그의 삶을 채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회당에서 전해졌지만, 그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의 삶은 회당 밖에서도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전해지는 길은 때로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을 만나 함께 일하는 것에서 열렸습니다.

조금 더 깊이

고대 로마의 역사 기록에도 클라우디우스의 추방 명령에 관한 언급이 나옵니다. 그 기록은 ‘크레스투스’라는 이름과 관련된 소요를 언급하지만, 그것이 예수님을 둘러싼 유대 사람들 사이의 갈등을 가리키는지는 논쟁이 있습니다. 시기도 흔히 기원후 49년 무렵으로 추정하지만 정확한 날짜는 확정되지 않습니다. 「천막을 만드는 일」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낱말은 신약에서 이곳에만 나오며, 천막을 만드는 일만 뜻하는지 가죽이나 직물을 다루는 기술까지 포함하는지에는 견해 차이가 있어 바울의 세부 작업까지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4:12에서 바울은 자신들이 손수 일한다고 말하고, 데살로니가전서 2:9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했던 일을 돌아봅니다.

회당 바로 옆집으로 옮겨 가다

사도행전 18:5–8 본문 →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옵니다.

앞 장에서 바울은 아테네에 도착한 뒤 두 사람이 되도록 빨리 자기에게 오기를 바랐습니다. 이제 고린도에서 두 사람이 다시 등장합니다.

실라와 디모데가 마케도니아에서 내려오자, 바울은 말씀을 전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는 유대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라고 힘주어 증언했습니다.사도행전 18:5 · 두루새김

「말씀을 전하는 일에 온 힘을 쏟았습니다」(συνέχω)로 옮긴 원문은 바울이 말씀에 붙들려 있는 상태를 나타냅니다. 바울이 말씀을 전하는 일에 더욱 전념했다는 뜻으로도, 말씀 자체가 그를 강하게 사로잡았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든 확실한 것은 고린도에서도 복음의 핵심이 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고 증언합니다.

그런데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타납니다.

그러나 그들이 맞서며 모독하는 말을 하자, 바울은 옷을 털며 말했습니다. 「여러분의 피에 대한 책임은 여러분 자신에게 있습니다. 저에게는 책임이 없습니다. 이제부터 저는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가겠습니다.」사도행전 18:6 · 두루새김

옷을 터는 것은 그들과 관계를 끊고, 그들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더 이상 지지 않겠다는 뜻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행동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피에 대한 책임은 여러분 자신에게 있습니다」라는 말도 단순한 분노의 말이 아닙니다.

에스겔 3:16–21과 33:1–9에서 하나님은 예언자를 파수꾼으로 세우십니다. 파수꾼이 경고하지 않으면 그 피에 대한 책임을 묻게 되지만, 경고를 들은 사람이 돌이키지 않으면 그 책임은 경고를 거부한 사람에게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해야 할 말씀을 전했고, 그 말씀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선택까지 책임질 수는 없다고 선언합니다.

그렇다고 그가 모든 유대 사람에게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않겠다고 최종적으로 선언했다고 읽어서는 안 됩니다. 바로 뒤의 이야기가 그렇게 단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곳을 떠나 티토 유스도라는 사람의 집으로 갔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고, 그의 집은 회당과 바로 붙어 있었습니다.사도행전 18:7 · 두루새김

바울은 회당에서 거절당한 뒤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가지 않습니다. 새롭게 복음을 전할 장소는 회당 바로 옆집입니다. 그는 반대에 부딪혀 자리를 옮겼지만, 그 도시의 유대 공동체와 완전히 단절된 곳으로 사라지지 않습니다.

회당 지도자 그리스보는 온 집안사람들과 함께 주님을 믿었습니다. 다른 고린도 사람들도 많이 말씀을 듣고 믿어 세례를 받았습니다.사도행전 18:8 · 두루새김

회당에서 반대를 받았는데 회당 지도자가 믿습니다.

바울은 이제부터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 가겠다고 선언했는데, 그다음에 이름이 등장하는 사람은 유대 회당의 지도자입니다. 그는 자신을 거부한 청중에게 같은 방식으로 매달리지는 않겠다고 말했지만, 유대 사람이라는 이유로 누군가를 구원의 대상에서 제외하지는 않았습니다. 고린도전서 1:14에서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보에게 세례를 주었다고 돌아보는데, 같은 인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듣습니다. 믿습니다. 세례를 받습니다.

반대는 실제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반대가 도시 전체의 반응을 결정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믿고 있는데도,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왜 그랬을까요?

조금 더 깊이

실라와 디모데가 가져온 지원 덕분에 바울이 생계를 위한 일을 줄이고 복음을 전하는 일에 더 집중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고린도후서 11:9에서 바울은 마케도니아에서 온 형제들이 자신의 부족한 것을 채워 주었다고 돌아봅니다. 다만 그 지원과 18:5의 활동 변화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있었는지는 누가가 설명하지 않습니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 — 바울이 아직 보지 못한 사람들

사도행전 18:9–11 본문 →

어느 날 밤, 주님께서 환상 가운데 바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계속 말하고, 잠잠히 있지 마라.」사도행전 18:9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는 단지 복음을 더 열심히 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먼저 「두려워하지 마라」고 하십니다. 본문은 바울이 무엇을 두려워했는지 설명하지 않지만, 그가 겪어 온 일을 생각하면 뜻밖의 말이 아닙니다.

빌립보에서는 매를 맞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데살로니가에서는 소요가 일어나 밤중에 도시를 떠나야 했습니다. 베뢰아에서도 반대자들이 찾아와 사람들을 선동했습니다. 고린도에서는 다시 회당의 반대에 부딪쳤습니다.

이 말씀은 바울을 두려움과 무관한 영웅으로 그리지 않습니다. 두려워할 만한 상황 속에 있는 사람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명령과 잠잠히 있지 말라는 명령 사이에 계속 말하라는 명령이 놓여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려움 때문에 그가 해야 할 일을 멈추지 않도록 하십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계속 말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입니까?

「내가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 아무도 너를 덮쳐 해치지 않을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기 때문이다.」사도행전 18:10 · 두루새김

「내가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는 성경의 오래된 약속을 떠올리게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자신의 부족함을 이야기했을 때 하나님은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고 말씀하셨고(출애굽기 3:12), 모세의 뒤를 이은 여호수아에게도 같은 약속을 하셨습니다(여호수아 1:5). 새로운 사명을 맡은 사람은 자신의 능력만으로 그 일을 감당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이 말씀을 하시는 분은 「주님」입니다. 사도행전 전체에서 바울에게 나타나 말씀하시는 분은 살아나신 예수님이십니다. 9장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바울에게 말씀하셨고, 23:11에서도 그의 곁에 서셔서 담대하라고 격려하십니다.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살아나신 예수님께서 이제 고린도에서 두려워하는 사도에게 함께하시겠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약속의 근거는 바울의 용기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계속 말하라고 명령받습니다.

그렇다면 「내 백성」은 누구일까요? 하나는 이미 믿게 된 사람들이라는 읽기입니다. 앞 절에서 그리스보와 많은 고린도 사람이 믿었다고 기록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나는 앞으로 믿게 될 사람들까지 가리킨다는 읽기입니다. 바울에게 계속 말하고 잠잠히 있지 말라고 명하시는 문맥에서는 이쪽이 자연스럽습니다.

바울의 시야는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는 눈앞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지만, 누가 앞으로 믿게 될지는 알 수 없습니다. 반면 예수님께서는 그 도시에서 자신의 일이 계속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이 약속을 ‘결과가 이미 정해져 있으니 바울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으로 읽으면 본문의 방향을 거꾸로 이해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백성이 많다고 말씀하시면서 바울에게 잠잠히 있으라고 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계속 말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일 년 육 개월 동안 머물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사도행전 18:11 · 두루새김

예수님께서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은 바울을 고린도에서 떠나게 한 것이 아니라 머물게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사람들이 바울을 고발하고 재판석 앞으로 끌고 갑니다. 아무도 그를 해치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조금 더 깊이

「내 백성」이라는 말씀을 하나님의 선택과 예정에 관한 신학적 논의와 연결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여기서 누가가 설명하려는 것은 그 선택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가 아니라, 바울이 고린도에 머물며 계속 복음을 전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갈리오의 재판석 — 바울은 보호받았지만, 다른 사람은 맞았다

사도행전 18:12–17 본문 →

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으로 있을 때, 유대 사람들이 함께 들고일어나 바울을 재판석 앞으로 끌고 갔습니다.사도행전 18:12 · 두루새김

갈리오라는 이름은 바울이 고린도에 머문 때를 1세기 중엽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외부 증거입니다. 그러나 누가가 이야기하려는 것은 다시 법정에 서게 된 바울입니다.

그들은 이렇게 고발했습니다. 「이 사람은 법을 어기는 방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라고 사람들을 부추깁니다.」사도행전 18:13 · 두루새김

유대 사람들이 고발하고 있으므로 모세의 율법과 관련된 종교적 논쟁이 배경에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 총독 앞에서 고발하고 있습니다. 유대 공동체 내부의 율법 해석 문제를 공적으로 처벌받아야 할 문제인 것처럼 제시하는 셈입니다.

바울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 갈리오가 유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유대 사람들아, 법을 어긴 일이나 악한 범죄 때문이라면 내가 마땅히 너희 말을 들어 주었을 것이다.」사도행전 18:14 · 두루새김
「그러나 말과 이름과 너희 율법을 두고 다투는 것이라면 너희가 알아서 해결하여라. 나는 그런 일을 재판할 생각이 없다.」사도행전 18:15 · 두루새김

바울이 자신을 변호하기도 전에 갈리오가 사건을 정리합니다. 그가 판단한 것은 예수님께서 정말 그리스도이신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로마 총독으로서 다루어야 할 범죄와 유대 사람들 내부의 종교적 문제를 구별하는 일이었습니다. 다만 이것으로 로마 제국 전체가 기독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갈리오는 자신 앞의 고발이 재판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뿐입니다.

바울은 재판석 앞으로 끌려왔지만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적어도 이 재판에서는 예수님의 약속과 일치하는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런데 이 장면에는 쉽게 지나칠 수 없는 마지막 절이 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회당 지도자 소스데네를 붙잡아 재판석 앞에서 때렸습니다. 갈리오는 그 일에 전혀 신경 쓰지 않았습니다.사도행전 18:17 · 두루새김

바울은 맞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소스데네가 맞았습니다.

누가는 소스데네를 때린 「사람들이 모두」가 정확히 누구인지, 왜 그가 맞았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폭행한 이들을 어떤 민족이나 종교 집단으로 단정하기 어렵습니다. 분명한 것은 갈리오가 그 폭행을 막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고발에서는 자신이 다룰 수 없는 문제를 구별해 냈지만, 바로 자기 앞에서 한 사람이 폭행당하는 일에는 무관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도 바울을 해치지 못하게 하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이 도시의 모든 사람이 폭력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는 약속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심을 단순히 모든 나쁜 일을 막아 주시는 방식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동시에 누가는 소스데네의 고통을 통해 어떤 숨겨진 목적이 이루어졌다고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의 고통을 다른 사람의 성공을 위한 수단으로 해석할 근거는 없습니다.

그저 한 사람은 보호받았고, 다른 사람은 재판석 앞에서 맞았으며, 총독은 무관심했다는 사실이 남습니다.

누가는 소스데네의 이야기를 더 이어 가지 않습니다. 대신 바울이 고린도에 여러 날을 더 머물렀다고 기록합니다. 다시 위험에 부딪쳤지만, 바울의 사역은 이 사건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 델포이에서 발견된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편지를 새긴 비문에 갈리오가 아가야의 총독으로 언급됩니다. 이 자료를 통해 그가 총독으로 있던 시기를 대체로 기원후 51–52년 무렵으로 볼 수 있지만, 세부 연대에는 논의가 있습니다. 그리스보도 회당 지도자로 소개되었으므로 그가 믿게 된 뒤 소스데네가 그 자리를 맡았을 수 있지만, 회당에 지도자가 여럿 있었을 수도 있어 정확한 관계는 알 수 없습니다. 일부 사본은 그리스 사람들이 때렸다고 밝히지만, 본문은 그렇게 한정하지 않습니다. 이 소스데네가 고린도전서 1:1의 「소스데네 형제」와 같은 사람일 가능성도 오래전부터 제기되었지만, 사도행전은 그가 이후 믿게 되었는지 기록하지 않으며 같은 인물인지 확인할 수 없습니다.

겐그레아의 서원과 에베소에서의 작별 — 바울의 계획보다 하나님의 뜻

사도행전 18:18–23 본문 →

바울은 여러 날 더 머문 뒤 믿는 사람들과 작별하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배를 타고 시리아로 떠났습니다. 그는 떠나기 전에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습니다. 하나님께 드린 약속이 있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18:18 · 두루새김

처음 고린도에 도착했을 때 바울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만나 함께 일했습니다. 이제 고린도를 떠날 때도 그들이 함께합니다. 잠시 머물 집과 일터를 얻는 것에서 시작된 만남이, 도시를 함께 이동하며 복음을 전하는 관계로 발전했습니다.

고린도의 동쪽 항구 겐그레아에서 바울은 하나님께 드린 약속 때문에 머리를 깎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전하는 그가 왜 여전히 이런 행위를 할까요? 구약에는 하나님께 특별한 약속, 곧 서원을 드리는 관습이 있었고, 민수기 6:1–21에는 나실인 서원과 관련하여 머리카락을 자르는 규정이 나옵니다. 그러나 누가는 바울이 어떤 약속을 무엇을 위해 드렸는지 설명하지 않으므로, 이 행위를 나실인 서원과 정확히 같은 것으로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본문이 말하는 큰 흐름은 분명합니다. 바울은 유대인의 신앙 관습과 관계를 모두 끊어 버린 사람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앞서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한 사건과도 연결됩니다(16:3). 그는 율법의 의식이 사람을 구원하는 근거라고 가르치지 않았지만, 그것이 곧 유대인의 모든 관습과 개인적인 신앙 실천을 금지한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오래 머물기를 청하는 사람들 앞에서

바울 일행은 에베소에 도착합니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에베소에 남고,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 유대 사람들과 토론합니다. 고린도에서는 회당에서 반대에 부딪쳤는데, 에베소 사람들은 바울에게 더 오래 머물러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바울은 작별하면서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여러분에게 다시 돌아오겠습니다.」 그리고 에베소에서 배를 타고 떠났습니다.사도행전 18:21 · 두루새김

바울은 좋은 기회가 있다는 사실만으로 반드시 그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16장에서는 거룩한 영이 바울 일행의 길을 막고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여기서는 특별한 환상이나 금지 명령이 없지만, 바울은 여전히 자신의 계획이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음을 인정합니다. 다시 오고 싶다는 의지와 그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태도가 함께 담겨 있습니다.

그는 떠납니다.

그리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남습니다.

바울은 가이사랴에서 배를 내린 뒤 교회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안디옥으로 내려갑니다. 이후 갈라디아 지방과 브루기아를 지나가며 모든 제자를 굳세게 합니다. 한 도시에서 일 년 육 개월을 머문 이야기와 달리, 여러 도시를 지나는 긴 여행이 몇 문장으로 정리됩니다. 누가는 독자의 시선을 다시 에베소로 돌릴 준비를 합니다.

그곳에는 바울이 남겨 두고 온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만나게 될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조금 더 깊이

그리스어 문장 구조상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은 사람이 바울인지 아굴라인지 논의의 여지가 있으며, 두루새김은 바울로 옮겼습니다. 22절의 「올라가 교회 사람들에게 인사한 뒤」는 예루살렘 교회 방문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예루살렘으로 갈 때는 흔히 올라간다고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절은 도시 이름을 직접 기록하지 않습니다.

아볼로 — 정확하게 가르치는 사람에게도 더 정확한 가르침이 필요했다

사도행전 18:24–26 본문 →

그 무렵 아볼로라는 유대 사람이 에베소에 왔습니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인 그는 말을 잘했으며 성경을 깊이 알고 있었습니다.사도행전 18:24 · 두루새김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의 중요한 도시였고, 헬레니즘 시대부터 큰 유대인 공동체가 있었으며,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의 성경 연구와 해석 전통도 발달했던 곳입니다. 다만 아볼로가 어디서 누구에게 배웠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누가는 그를 말과 성경을 다루는 능력을 함께 갖춘 사람으로 그립니다.

아볼로는 주님의 길을 배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뜨거운 열정으로 예수에 관한 일을 정확하게 전하고 가르쳤지만, 세례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습니다.사도행전 18:25 · 두루새김

아볼로는 주님의 길을 배웠고, 예수님에 관한 일을 정확하게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세례는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습니다. 이 셋을 어떻게 함께 이해해야 할까요?

본문은 그를 잘못된 가르침을 전하는 사람으로 소개하지 않습니다. 「정확하게」에 해당하는 아크리보스(ἀκριβῶς)는 신중하고 정확하게라는 뜻입니다. 아볼로의 문제는 그가 알고 있는 것이 틀렸다는 데 있지 않고,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다는 데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회개의 세례를 선포하며 자기 뒤에 오실 분을 가리켰습니다. 누가복음 3:16에서 요한은 자기보다 능력 있는 분이 거룩한 영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요한의 세례만 알았다는 것은 예수님과 관련된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은 그가 예수님의 죽음이나 부활을 몰랐다고 말하지 않으며, 구체적으로 무엇을 더 배워야 했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그가 회당에서 담대하게 말하기 시작하자,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그의 말을 듣고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길을 더 정확하게 설명해 주었습니다.사도행전 18:26 · 두루새김

25절에서는 아볼로가 「정확하게」 가르쳤다고 했고, 26절에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에게 「더 정확하게」 설명했다고 합니다. 원문에서도 앞의 아크리보스와 그 비교급인 아크리베스테론(ἀκριβέστερον)으로, 같은 어근을 씁니다. 아볼로의 가르침은 정확했지만, 더 정확해질 여지가 없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흔히 가르침을 옳은 가르침과 틀린 가르침, 두 가지로만 나누기 쉽습니다. 그런데 누가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보여 줍니다. 이미 상당 부분 정확하지만, 아직 충분하지 않은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서 옵니다.

천막을 만들던 부부가 성경에 능한 설교자를 가르치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로마에서 쫓겨나 고린도에 왔고, 바울과 함께 지내며 일했고, 에베소에 남은 사람들입니다. 이제 그들이 알렉산드리아 출신으로 성경을 깊이 알고 말을 잘하는 아볼로를 가르칩니다. 본문은 이 부부의 학력이나 공식적인 교사 자격을 기록하지 않지만, 그들은 아볼로의 설명에서 부족한 부분을 알아보고 채워 줄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장에서 두 사람의 이름은 세 번 등장하는데, 처음에는 아굴라를 소개한 뒤 「아내 브리스길라」를 언급하고(18:2), 배를 타는 장면과 아볼로를 가르치는 장면에서는 브리스길라의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18:18, 26). 이 순서가 브리스길라가 더 뛰어난 교사였다는 사실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브리스길라는 아굴라의 아내로만 언급되는 인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길을 가르치는 일에 함께 참여한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누가는 그들이 회당에서 공개적으로 아볼로를 반박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를 「데려다가」 설명해 주었다고 기록합니다. 이미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전하고 있는 사람을 데려다가, 그가 아직 충분히 알지 못하는 것을 설명해 준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배움은 아볼로가 복음을 전하는 일을 가로막지 않고 계속 이어지게 했습니다.

그 관계는 누가 더 높은 지위에 있는지를 결정하는 경쟁으로 그려지지 않습니다. 모두가 같은 하나님의 길을 더 정확하게 이해하는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조금 더 깊이

「말을 잘했으며」에 해당하는 그리스어 낱말은 학식이 있다는 뜻으로도 읽힐 수 있습니다. 「뜨거운 열정으로」로 옮긴 자리에는 원문에서 영이 뜨겁게 끓는다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 영이 아볼로 자신의 마음을 가리킨다는 읽기와 거룩한 영의 활동을 가리킨다는 읽기로 갈립니다. 어느 쪽이든 그가 열정적으로 가르쳤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사도행전 19장에서도 요한의 세례만 받은 사람들과 거룩한 영의 관계가 다시 문제가 되지만, 아볼로가 그들과 같은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아볼로가 건너간 곳에서 다시 시작된 복음

사도행전 18:27–28 본문 →

이제 아볼로는 아가야로 건너가려 합니다. 아가야는 고린도가 속한 로마의 행정 구역, 곧 바울이 오랫동안 머물며 교회를 세웠던 지역입니다.

아볼로가 아가야로 건너가고 싶어 하자, 믿는 사람들이 그를 격려했습니다. 또 그곳 제자들에게 아볼로를 반갑게 맞아 달라는 편지를 썼습니다. 아볼로는 그곳에 도착하여 은혜로 믿게 된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습니다.사도행전 18:27 · 두루새김

사도행전 15장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으로 편지와 사람들을 보냈듯, 여기서도 편지는 아볼로가 낯선 방문자로만 남지 않도록 돕습니다. 아볼로는 성경을 깊이 안다는 사실만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다른 믿는 사람들이 그를 격려하고 소개합니다.

누가는 아가야의 사람들이 어떤 유명한 설교자의 가르침으로 믿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은혜로 믿게 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일 년 육 개월 동안 가르친 사람들이지만, 누가는 그들이 믿게 된 일을 바울의 능력만으로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는 성경을 근거로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밝혀 보이며, 사람들 앞에서 유대 사람들의 주장을 힘 있게 반박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18:28 · 두루새김

바울은 유대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고 힘주어 증언했습니다(18:5). 아볼로는 성경을 근거로 같은 사실을 밝혀 보입니다. 두 사람의 방식과 능력은 달랐겠지만,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같습니다.

그리고 이 일은 바울이 없는 곳에서 계속됩니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다」

고린도전서 3:6에서 바울은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지만, 자라나게 하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 18장이 기록한 순서 그대로, 바울이 고린도에서 말씀을 전하고 떠난 뒤 아볼로가 그 지역의 믿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이 한 일의 성과를 자기 것으로 삼지 않습니다. 두 사람이 한 일은 달랐지만,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맺으며 — 바울이 떠난 뒤에도 이어지는 이야기

사도행전 18:1–28 본문 →

예수님께서는 바울에게 「내가 너와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셨지만, 그 함께하심은 바울이 혼자 모든 일을 감당하는 방식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아굴라와 브리스길라가 일터를, 티토 유스도가 집을 열었고, 그리스보와 많은 고린도 사람이 믿었으며, 바울이 떠난 뒤에는 그 부부가 아볼로를 가르치고 아볼로가 아가야의 믿는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로마에서 쫓겨난 사람, 두려움 속에 있던 사람, 아직 더 배워야 했던 사람 모두 한계 속에 있었습니다. 본문은 클라우디우스의 명령이나 바울을 반대한 사람들의 행동이 하나님의 특별한 계획이었다고 말하지 않지만, 그 상황들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한 장소에 갇히지 않고 계속 전해졌습니다.

이야기는 끝에서 바울을 따라가지 않습니다. 에베소에 남겨진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에게 돌아오고, 그들에게서 하나님의 길을 더 정확하게 배운 아볼로를 따라 아가야로 건너갑니다. 그곳에는 바울이 오랫동안 말씀을 가르쳤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누가는 마지막 절에서 다시 바울을 등장시키지 않습니다. 대신 아볼로가 성경을 펴고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밝히는 장면으로 끝냅니다. 한때 고린도에서 바울과 함께 천막을 만들던 부부가 있었고, 그 부부에게서 배운 사람이 이제 바울이 떠난 지역에서 다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떠났지만, 말씀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