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19장
이 장의 자리 · 13–20장 · 여러 도시로 떠난 길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과 아는 사람
에베소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바울을 통해 특별한 기적들이 일어난다는 소문이 퍼지자,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악한 영을 쫓아내던 사람들이 그 방법을 흉내 냅니다. 그들은 「바울이 전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엄히 명령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악한 영이 뜻밖의 대답을 합니다. 「나는 예수를 알고 바울도 안다. 그런데 너희는 누구냐?」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정확히 불렀습니다. 하지만 바울에게 일어났던 일은 그들에게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공격당하고, 벌거벗고 다친 채 달아납니다. 그들은 그 이름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부리던 다른 영적 능력처럼 사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 장에서 누가는 반복해서 같은 질문을 던지는 듯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 이름을 자기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그 이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 속한다는 뜻입니까?
이 질문은 에베소의 마지막 장면까지 이어집니다.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은 값비싼 책들을 가져와 불태웁니다. 반면 은으로 아르테미스 여신의 신전 모형을 만들어 많은 돈을 벌던 데메드리오는, 바울의 복음 때문에 수입이 위협받자 사람들을 부추깁니다.
한쪽에서는 자신이 의지하던 마술의 책들을 버리고, 다른 쪽에서는 자신이 의지하던 신전 모형의 시장을 지키려고 싸웁니다.
그 사이에 예수님의 이름이 있습니다.
에베소에서 누가가 보여 주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의 능력이 다른 종교의 능력보다 강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신적인 능력을 소유하고 이용하려는 방식 자체가 살아나신 예수님 앞에서 어떻게 흔들리는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장의 끝에서 온 도시가 모여 두 시간쯤 「에베소 사람들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다!」고 외칩니다. 그보다 앞서 누가는 이미 「주 예수의 이름은 높임을 받았습니다」라고 기록했습니다. 두 이름을 높이는 두 장면 사이에서, 에베소라는 도시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요한의 세례만 알던 사람들 — 기다리던 분이 이미 오셨다
바울이 에베소에 도착했을 때 아볼로는 고린도에 있었습니다.
앞 장에서 아볼로는 예수님에 관해 정확하게 가르치면서도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바울이 에베소에서 만난 사람들 역시 요한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만 누가는 이들이 아볼로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는지는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물었습니다. 「여러분은 믿게 되었을 때 성령을 받았나요?」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아니요. 우리는 성령이 계시다는 말조차 듣지 못했어요.」사도행전 19:2 · 두루새김
바울이 무엇을 보고 이 질문을 했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대답을 보면 문제가 분명해집니다.
이 대답은 두 가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성령 자체에 관한 지식이 부족했다는 뜻일 수도 있고, 예수님을 통해 성령이 주어지는 새로운 때가 시작되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선포했으므로(누가복음 3:16), 요한의 가르침을 알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에 관한 약속을 전혀 몰랐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바울이 다시 물었습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어떤 세례를 받았나요?」 그들이 대답했습니다. 「요한의 세례를 받았어요.」사도행전 19:3 · 두루새김
여기서 질문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바울은 성령에 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계속 시험하지 않고, 그들이 어떤 세례를 받았는지 묻습니다. 그리고 요한의 세례가 무엇을 의미했는지 설명합니다.
바울이 말했습니다. 「요한은 백성에게 회개하라고 하며 세례를 주었어요. 그러면서 자기 뒤에 오실 분, 곧 예수를 믿으라고 말했어요.」사도행전 19:4 · 두루새김
바울은 요한의 세례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요한은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서라고 선포했지만, 그가 하던 일은 자기 자신에게서 완성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기 뒤에 오시는 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이 부족하게 알고 있었던 것은 세례의 방법이나 형식이 아니었습니다. 요한이 가리키던 분이 누구인지, 그분을 통해 하나님이 무엇을 이루셨는지가 문제였습니다. 요한의 세례는 앞으로 오실 분을 기다리게 했고, 이제 바울은 그 기다림의 대상이 이미 오셨다고 선포합니다.
이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습니다. 바울이 손을 얹자 성령께서 그들 위에 내려오시고, 그들은 여러 언어로 말하며 예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로 올라가시기 전에,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제자들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사도행전 1:5). 오순절에 제자들이(2:1–4), 사마리아에서 사람들이(8:14–17), 고넬료의 집에서 이방 사람들이(10:44–48) 성령을 받았습니다. 이제 그 약속은 예루살렘을 멀리 떠나온 에베소에서도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을 받는 과정이 언제나 똑같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고넬료의 집에서는 세례를 받기 전에 성령께서 내려오셨고, 여기서는 세례를 받은 뒤 바울이 손을 얹자 성령께서 내려오십니다. 따라서 이 순서를 모든 신자가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공통된 단계로 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들이 어떤 의미에서 「제자」였는지도 해석이 갈립니다. 이미 그리스도인이었지만 성령을 받는 경험이 뒤따른 것으로 보는 해석이 있고, 아직 요한의 세례 단계에 머물러 있었으므로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본문은 그들의 이전 믿음을 세세하게 설명하지 않고, 지금 일어난 변화를 강조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도시에서 계속 하나님의 나라를 전합니다.
조금 더 깊이
2절의 대답은 원문을 말 그대로 옮기면 「성령이 있는가」 하는 표현이며, 두루새김은 「성령이 계시다는 말조차 듣지 못했어요」로 옮겼습니다. 요한복음 7:39에서도 성령의 선물이 아직 주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비슷한 표현으로 나타내므로, 성령의 약속이 이루어졌는지를 듣지 못했다는 뜻으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7절의 「열두 명쯤」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를 떠올리게 하지만, 누가는 그 상징적인 의미를 설명하지 않고 「쯤」이라고 말하므로 새 이스라엘을 상징하도록 의도했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회당에서 두란노의 강의실로 — 말씀은 장소를 옮기며 퍼져 나간다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토론하며 사람들을 설득했습니다.사도행전 19:8 · 두루새김
이전 장들에서 누가는 바울이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증언했다고 반복해서 기록했습니다. 여기서는 그 내용이 「하나님의 나라」로 소개됩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예수님에 관한 복음을 뒤로하고 다른 내용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은 아닙니다.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님에 관한 복음은 서로 나뉜 주제가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일을 말씀하셨고(1:3), 바울과 바나바는 많은 고난을 거쳐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14:22). 하나님의 나라를 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시작된 하나님의 다스림을 전하는 일과 연결됩니다.
그러나 몇 사람은 마음이 굳어져 믿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무리 앞에서 ‘그 길’을 헐뜯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나왔습니다. 그 뒤 날마다 두란노의 강의실에서 토론했습니다.사도행전 19:9 · 두루새김
「그 길」은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을 따르는 믿음과 그 공동체를 가리키는 이름으로 반복해서 등장합니다.
바울은 회당을 떠나지만, 도시를 떠나지는 않습니다. 회당에서는 석 달 동안 토론했고, 이제는 두란노의 강의실에서 날마다 토론합니다. 다른 도시에서는 반대가 심해지면 떠나는 일도 있었지만, 고린도에서처럼 에베소에서도 장소를 옮겨 가르칩니다.
이 일이 두 해 동안 이어졌습니다. 그리하여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은 유대 사람이든 그리스 사람이든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사도행전 19:10 · 두루새김
누가는 한 번의 놀라운 설교나 한순간의 기적으로 아시아 전역에 복음이 퍼졌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이어진 가르침이 두 해 동안 있었고, 그 결과 말씀이 널리 전해졌습니다.
아시아 속주는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 일행이 말씀을 전하려다 성령께 막혔던 지역이기도 합니다. 그때에는 들어가려는 길이 막혔습니다. 이제는 그 지역에서 주님의 말씀이 널리 들립니다.
기적과 소동이 이어질 에베소 이야기의 중심에, 날마다 한 강의실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이 놓여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강의실」(σχολή)로 옮긴 낱말은 본래 여가나 한가한 시간을 뜻하다가 학문적 토론이나 교육이 이루어지는 장소를 가리키게 된 말이며, 영어 school도 같은 뿌리에서 나왔습니다. 두란노가 누구였는지, 강의실의 주인이었는지 교사였는지는 확정할 수 없습니다. 10절의 「모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바울의 설교를 직접 들었다는 통계적인 말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에베소는 아시아 속주의 중요한 항구이자 행정·상업 중심지였으므로, 그곳에서 꾸준히 가르친 말씀이 다른 지역에 전해졌을 가능성은 충분합니다. 다만 각 도시의 공동체가 언제 생겨났는지는 이 장이 설명하지 않습니다.
바울의 몸에 닿았던 손수건 — 능력을 행사하시는 분은 누구인가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손을 통해 특별한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사도행전 19:11 · 두루새김
이 문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어입니다.
바울이 기적을 행하고 있었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행하고 계셨고, 바울의 손은 그 일이 이루어지는 통로입니다.
사람들은 바울의 몸에 닿았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병든 사람들에게 가져다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의 병이 낫고 악한 영들도 나갔습니다.사도행전 19:12 · 두루새김
손수건과 앞치마는 평범한 물건입니다. 이 물건들이 앞 장에서 천막을 만드는 일을 했던 바울의 노동과 관련된 것이었을 가능성도 있지만, 본문이 그렇게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여자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누가복음 8:43–48). 그러나 그때는 한 여자가 직접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댔고, 이곳에서는 바울의 몸에 닿았던 천이 다른 사람들에게 옮겨집니다. 누가는 이 물건들이 본래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말하지 않고, 바울이 그것으로 기적을 행하는 방법을 가르쳤다는 기록도 없습니다.
이 사건을 특정한 사람에게 닿았던 물건을 가져다 놓으면 병이 낫는다는 보편적인 원리로 바꾸는 것은 본문의 범위를 넘어섭니다.
오히려 누가는 바로 뒤에, 누군가가 예수님의 이름을 이용해 같은 능력을 얻으려다가 실패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바울의 몸에 닿은 천이 옮겨졌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바울이 전하는 예수님의 이름을 입으로 불렀을 때에는 아무런 권위도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차이를 설명하는 것이 바로 다음 이야기입니다.
조금 더 깊이
「손수건」으로 옮긴 낱말은 라틴어 sudarium에서 온 말로 땀을 닦는 천이나 작은 수건을 가리키고, 「앞치마」로 옮긴 낱말 역시 라틴어 계통으로 몸에 두르는 작업용 천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너희는 누구냐?」 — 예수님의 이름은 부릴 수 있는 주문이 아니다
에베소에는 악한 영을 쫓아내는 일을 하던 유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행위는 고대 유대 세계와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모두 알려져 있었으며, 신적인 이름을 부르거나 특정한 말과 의식을 사용하는 방식도 있었습니다.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악한 영을 쫓아내던 유대 사람 몇도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보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들린 악한 영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엄히 명령한다.」사도행전 19:13 · 두루새김
이 말은 바울이 16장에서 여종을 얽매고 있던 영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했던 말과 닮아 있습니다(16:18). 그런데 에베소의 사람들은 「바울이 전하는 예수의 이름으로」 명령합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자신들이 알고 믿으며 따르는 분이 아닙니다.
「바울이 전하는 예수」입니다.
누가는 이들이 대제사장으로 소개되는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었다고 기록합니다. 그리고 사건은 예상 밖으로 흘러갑니다.
그런데 악한 영이 그들에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예수를 알고 바울도 안다. 그런데 너희는 누구냐?」사도행전 19:15 · 두루새김
두 이름이 인정된 뒤, 세 번째 사람들의 권위가 거부됩니다. 악한 영은 이름을 부른다는 사실 자체를 권위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 영이 들린 사람이 그들에게 달려들어 둘을 제압하고 이깁니다. 그들은 벌거벗고 다친 채 집에서 달아납니다. 남의 몸에 있는 영을 쫓아내려던 사람들이 오히려 쫓겨나고, 영을 제압한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그 영에게 제압당합니다.
이 일이 에베소에 사는 유대 사람들과 그리스 사람들 모두에게 알려졌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했고, 주 예수의 이름은 높임을 받았습니다.사도행전 19:17 · 두루새김
왜 이런 실패가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는 결과로 이어졌을까요? 예수님의 이름을 다른 영적 기술처럼 사용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그 이름은 소리 내어 부르면 원하는 결과를 얻는 주문이 아니며, 그 권위는 부르는 사람의 발음이나 기술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예수님의 이름은 죽으셨다가 살아나신 주님의 권위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베드로도 걷지 못하던 사람을 일으킬 때 자신들의 능력이나 경건함으로 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했습니다(사도행전 3:12–16).
예수님의 이름을 아는 것과 그 이름을 자기 소유물처럼 사용하는 것은 다릅니다.
이 장면을 지나면 바울의 몸에 닿았던 천 이야기도 달리 보입니다. 그 천에 영적 힘이 저장되어 있었기 때문에 병이 나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기적을 부정하지 않지만, 그 기적을 인간이 조종할 수 있는 기술로 바꾸는 일도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기서부터 에베소의 변화는 사람들이 오래 의지해 온 생활 방식으로 깊이 들어갑니다.
조금 더 깊이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예루살렘 대제사장 명단에서 스게와를 확실하게 찾을 수는 없습니다. 「대제사장」이 실제 직무인지, 대제사장 가문이나 높은 제사장 신분을 넓게 가리키는지, 그가 내세운 지위인지에는 해석의 여지가 있으며, 본문만으로 그가 거짓으로 직함을 사용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15절의 두 「안다」는 원문에서 서로 다른 동사지만, 그것으로 지식의 수준 차이를 단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또 앞서 일곱 아들을 말하고 16절에서 「둘」로 옮긴 낱말을 쓰는데, 이 낱말은 당시 「모두」라는 뜻으로도 쓰였습니다. 일곱 아들의 활동을 소개한 뒤 그 가운데 두 사람이 겪은 사건을 기록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지만, 이야기가 압축되어 있어 구체적인 인원은 밝혀지지 않습니다.
불타는 마술책 — 믿게 된 사람들이 자기 삶을 드러내다
스게와의 아들들에게 일어난 사건이 에베소에 알려진 뒤, 뜻밖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믿게 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가 찾아와 자기가 한 일을 고백하고 털어놓았습니다.사도행전 19:18 · 두루새김
누가는 이들이 이제 처음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믿게 된 사람들 가운데 많은 이가 찾아와 고백했습니다. 무엇을 고백했는지 하나하나 밝히지는 않지만, 이어지는 19절을 보면 마술과 관련된 행위가 중요한 문제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 가운데서도 많은 이가 자기 책들을 모아 와서 모두가 보는 앞에서 태웠습니다. 그 책들의 값을 합해 보니 은으로 만든 동전 오만 개나 되었습니다.사도행전 19:19 · 두루새김
고대 지중해 세계에서 마술은 오늘날의 무대 마술과 달랐습니다. 신적인 이름이나 주문, 의식과 부적 등을 통해 초자연적인 힘을 얻으려는 행위였고, 사람들은 병을 고치거나 자신을 보호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려고 그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책에는 그런 주문과 의식의 방법이 적혀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책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 않습니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불태웁니다. 팔아서 돈을 되찾지도 않고, 자신들이 의지하던 방식으로 돌아갈 가능성을 공개적으로 끊어 냅니다. 그 책들이 담고 있던 지식과 기술을 더 이상 자신들이 의지할 힘으로 삼지 않겠다는 행동입니다.
스게와의 아들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주문처럼 사용하려다 실패했습니다. 믿게 된 사람들 가운데 여전히 과거의 마술적 관습에 의지하던 이들에게, 그 사건은 자신들이 무엇을 의지하고 살아가는지 다시 돌아보게 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실제로 안전과 능력을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는 다른 수단을 계속 붙잡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과거의 관습이 모두 정리된 것은 아니었고, 이제 책들을 가져와 불태웁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실이 이제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갈 것인가의 문제로 이어진 것입니다.
은으로 만든 동전 오만 개라는 숫자
누가는 불태운 책들의 값을 따로 계산했다고 기록합니다. 본문이 의도적으로 커다란 액수를 기록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들이 포기한 것은 상당한 경제적 가치가 있다고 여겨지던 책들이었습니다.
바로 다음 장면에서 은으로 신전 모형을 만드는 데메드리오가 등장합니다.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며 자신들이 가진 것을 버리고, 데메드리오와 기술자들은 자신들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다른 신의 이름을 높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말씀은 힘차게 퍼져 나가며 더욱 큰 힘을 드러냈습니다.사도행전 19:20 · 두루새김
이 표현은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자라고 퍼져 간다는 반복적인 주제와 이어집니다(6:7; 12:24). 누가는 교회가 재산을 얻었다고 말하지 않고, 그 가치를 헌금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경제적으로는 상당한 가치가 사라졌습니다.
여기서 말씀의 능력은 돈이나 물건을 더 많이 소유하는 것으로 측정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무엇을 의지하며 살아가는지가 바뀌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조금 더 깊이
에베소는 마술과 관련된 전통으로도 알려져 있었고, ‘에베소의 글자들’이라는 주술적 문구가 고대 문헌에 언급됩니다. 다만 이 책들이 바로 그 문구들만을 담고 있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원문은 은의 가치가 오만 단위였다고만 하고 화폐 종류를 밝히지 않습니다. 드라크마로 이해하는 해석이 흔하지만, 그것으로 오늘날의 화폐 가치를 확정할 수는 없으므로 현대의 원화로 바꾸어 제시하는 것은 신중해야 합니다.
예루살렘을 지나 로마까지 — 바울의 시선이 다시 멀어지다
이런 일들이 있은 뒤, 바울은 마음속으로 마케도니아와 아가야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가기로 정했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내가 거기에 간 뒤에는 로마에도 가 보아야 한다.」사도행전 19:21 · 두루새김
마케도니아에는 빌립보와 데살로니가가, 아가야에는 고린도가 있었습니다. 바울이 계획한 여정은 이미 복음을 전한 공동체들을 다시 찾아가는 길이기도 합니다.
「마음속으로」라고 옮긴 원문의 표현 엔 토 프뉴마티(πνεῦμα)는 두 가지로 읽힙니다. 바울 자신의 영, 곧 내적인 결심을 가리킨다고 볼 수도 있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상황을 나타낸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원문은 어느 하나를 분명하게 설명하지 않으며, 두루새김은 바울이 자신의 길을 정했다는 뜻을 따라 「마음속으로」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제 로마를 이야기합니다.
사도행전 첫머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까지 자신의 증인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1:8). 「가 보아야 한다」(δέω)는 ‘해야 한다’, ‘필요하다’라는 뜻의 동사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종종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 따라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일을 나타냅니다. 그래서 바울의 말은 단순한 여행 희망 이상의 의미로 읽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가 어떤 방식으로 그곳에 도착할지는 이 구절에서 밝혀지지 않습니다.
바울은 에베소에 머물러 있지만 그의 시선은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로 향합니다. 그는 디모데와 에라스도를 먼저 마케도니아로 보내고, 자신은 아시아에 얼마 동안 더 머뭅니다.
그리고 그가 아직 에베소에 머물고 있을 때, 도시 전체를 흔드는 소동이 일어납니다.
데메드리오 — 아르테미스의 위엄인가, 기술자들의 수입인가
누가는 이 사건을 「‘그 길’ 때문에」 일어난 큰 소동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런데 등장하는 사람은 철학자도, 율법을 가르치는 사람도 아닙니다.
데메드리오라는 사람이 은으로 아르테미스의 신전 모형을 만들어, 그 일을 하는 기술자들에게 많은 돈을 벌게 해 주고 있었습니다.사도행전 19:24 · 두루새김
에베소에서 아르테미스는 도시가 자신을 어떤 도시로 여기는지와 깊이 연결된 여신이었습니다. 에베소의 거대한 아르테미스 신전은 고대 세계의 일곱 불가사의 가운데 하나로 알려져 있었고, 도시의 명성과 자부심을 나타내는 건축물이었습니다. 데메드리오의 모형이 어떤 크기와 형태였는지는 확정할 수 없지만, 기술자들에게 상당한 수입을 가져다주었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데메드리오는 그 기술자들과, 같은 종류의 일을 하는 일꾼들을 함께 모아 놓고 말했습니다. 「다들 알다시피 우리는 이 일로 넉넉하게 살고 있어.」사도행전 19:25 · 두루새김
그의 연설은 여신의 위대함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자신들의 수입에서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에서는 그 문제의 범위가 점점 커집니다.
「그런데 다들 보고 들어서 알겠지만, 바울이라는 사람이 에베소뿐 아니라 거의 온 아시아에서 많은 사람을 설득해 마음을 돌려놓았어.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하면서 말이야.」사도행전 19:26 · 두루새김
이 말은 바울이 아테네에서 전했던 내용, 곧 하나님은 사람의 손으로 지은 신전에 계시지 않으며 금이나 은이나 돌로 만든 것과 같지 않다는 말과 매우 가깝습니다(17:24–29). 데메드리오는 바울의 가르침을 우상에 대한 근본적인 부정으로 이해했고, 그것은 핵심을 벗어난 반응이 아닙니다. 「거의 온 아시아」는 위기를 강조하는 말일 수 있지만, 사도행전은 앞서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기록했습니다(19:10).
사람이 만든 것이 신이 아니라면, 은으로 만든 신전 모형도 신적인 권위를 보장해 주는 물건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생각이 퍼지면 그 물건들의 종교적 의미가 흔들리고, 기술자들의 수입도 영향을 받습니다. 데메드리오는 그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다가는 우리 일이 나쁜 평을 받을 위험이 있어. 그뿐 아니라 위대한 여신 아르테미스의 신전도 하찮게 여겨질 수 있어. 온 아시아와 온 세상이 섬기는 여신이 그 위대함마저 잃게 될 위험이 있는 거야.」사도행전 19:27 · 두루새김
처음에는 수입이, 다음에는 자신들의 일에 대한 평판이, 이제는 여신의 위대함 자체가 문제가 됩니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이익에 관한 문제가 도시 전체의 종교적 자부심에 관한 문제로 커집니다.
물론 데메드리오가 아르테미스를 전혀 믿지 않고 돈에만 관심이 있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종교와 경제는 쉽게 나뉘는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의 연설이 「우리는 이 일로 넉넉하게 살고 있어」에서 시작되었다고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두 집단이 모두 돈과 종교를 연결하고 있지만, 그 방향은 서로 반대입니다.
한쪽에서는 자신이 의지하던 것을 버립니다.
다른 쪽에서는 자신이 의지하던 것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을 모읍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외치기 시작합니다.
「에베소 사람들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다!」 — 이유를 모르는 군중의 외침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분노에 가득 차 외쳤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다!」사도행전 19:28 · 두루새김
그들이 외치는 것은 수입을 지켜 달라는 요구가 아닙니다. 기술자들의 생업에서 시작된 일이 이제 도시의 여신을 지키기 위한 집단적인 행동으로 커집니다.
온 도시가 혼란에 빠지고, 사람들은 바울과 함께 여행하던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를 붙잡아 극장으로 몰려갑니다. 바울은 그 무리 안으로 들어가려 하지만 제자들이 말립니다. 아시아의 고위 관리들 가운데 바울과 친한 사람들까지 사람을 보내 극장에 들어가지 말라고 간곡히 부탁합니다.
아르테미스 숭배가 강한 도시에서도 바울과 좋은 관계를 맺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믿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이 장면은 바울이 모든 위험 앞에 무조건 뛰어들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고, 바울의 용기와 주변 사람들의 신중한 판단이 부딪치는 순간을 보여 줍니다.
모인 사람들은 혼란에 빠져 저마다 다른 말을 외쳤습니다. 대다수는 자기들이 왜 모였는지도 몰랐습니다.사도행전 19:32 · 두루새김
특정한 기술자들의 수입 문제가 도시의 종교적 자부심을 건드리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을 끌어들였습니다. 많은 사람이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사실만으로, 그들이 자기 행동의 이유를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때 유대 사람들이 알렉산더를 앞으로 내세우고, 그는 손짓하며 시민들 앞에서 자신을 변호하려 합니다. 유대 공동체가 바울 일행과 자신들을 구별하려 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지만, 본문은 그가 누구를 대변하려 했는지 밝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가 유대 사람인 것을 알아보자, 모두 한목소리로 두 시간쯤 외쳤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의 아르테미스는 위대하다!」사도행전 19:34 · 두루새김
저마다 다른 말을 외치던 사람들이 이제 한목소리를 냅니다. 그러나 문제를 이해하게 된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알렉산더의 말을 듣기도 전에, 그가 유대 사람이라는 사실만으로 하나의 외침을 반복합니다.
그들의 외침은 설명이나 논증이 아닙니다. 자신들이 누구이며 자신들의 도시가 어떤 여신을 받드는지 확인하는 구호입니다. 왜 바울의 가르침이 틀렸는지는 설명하지 않고, 그저 여신의 위대함을 반복합니다.
17절에서 주 예수님의 이름은, 그 이름을 주문처럼 사용하려던 사람들이 실패한 뒤 높임을 받았습니다. 28절과 34절에서 아르테미스의 위대함은, 신전 모형으로 수입을 얻던 사람들이 자기 이익과 여신이 위협받는다고 주장한 뒤 외쳐집니다. 누가는 두 장면을 나란히 보여 주며 묻습니다. 많은 사람이 큰 소리로 외치면 그 이름이 위대해지는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깨닫고 자신이 의지하던 것을 내려놓을 때 그 이름이 높임을 받는 것입니까?
에베소의 군중은 두 시간 동안 소리를 높입니다. 그러나 그 외침은 도시의 혼란을 끝내지 못합니다.
마침내 도시의 행정을 맡은 관리가 나섭니다.
조금 더 깊이
에베소의 대극장은 대규모 군중이 모일 수 있는 도시의 주요 공공장소였습니다. 다만 오늘날의 유적에는 이후 로마 시대에 늘리고 고친 결과가 반영되어 있어, 지금의 형태와 수용 인원을 바울 당시와 그대로 같다고 보아서는 안 됩니다. 「아시아의 고위 관리들」은 로마 아시아 속주에서 종교적 행사와 공적 활동에 관련된 지위를 가진 사람들로 이해되며, 정확한 권한은 시기와 지역에 따라 다를 수 있습니다.
도시의 행정을 맡은 관리 —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을 변호한 것은 누구인가
도시의 행정을 맡은 관리가 무리를 진정시키고 말했습니다. 「에베소 시민 여러분, 우리 도시가 위대한 아르테미스의 신전과 하늘에서 떨어진 것을 지키는 곳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사도행전 19:35 · 두루새김
이 관리는 그리스 도시의 공적 행정과 시민들의 모임에 관련된 중요한 직무를 맡은 인물입니다. 그는 군중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사실부터 확인합니다. 고대 도시들은 특정 신의 신전을 지키는 지위를 자랑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는 그 믿음이 참인지 따지지 않고, 에베소 사람들이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는 점을 이용해 군중을 진정시킵니다.
「여러분이 데려온 이 사람들은 신전의 물건을 훔치지도 않았고, 우리 여신을 모독하지도 않았습니다.」사도행전 19:37 · 두루새김
이 말만으로 바울이 아르테미스 숭배를 전혀 비판하지 않았다고 결론 내릴 수는 없습니다. 사람이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는 가르침은 우상 숭배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과 신전의 물건을 훔치거나 여신을 직접 모독하는 범죄는 구별해야 하며, 관리는 그 구별을 하고 있습니다.
「데메드리오와 그와 함께 일하는 기술자들에게 누구를 상대로 따질 일이 있다면, 재판이 열리는 날이 있고 총독들도 있습니다. 그곳에서 서로 고발하면 됩니다.」사도행전 19:38 · 두루새김
군중의 분노가 아니라 법적인 절차를 따르라는 것입니다. 그 밖에 더 요구할 것이 있다면 「법에 따라 정식으로 열리는 시민 회의」에서 해결하라고 덧붙입니다.
원문에서는 32절에서 혼란에 빠진 사람들의 모임, 39절의 「시민 회의」, 40절에서 해산되는 모임에 모두 에클레시아(ἐκκλησία)라는 낱말이 쓰입니다. 이 낱말은 사도행전의 다른 곳에서는 흔히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의 「교회」를 가리키지만, 본래 소집된 집회를 가리킬 수 있었고 그리스 도시에서는 시민들의 공적인 집회를 나타냈습니다. 두루새김은 각 자리의 문맥에 따라 「모인 사람들」과 「시민 회의」로 풀어 옮겼습니다.
이것을 근거로 누가가 의도적으로 에베소의 군중을 교회와 대조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은 사람들의 모임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 것이 단순히 모였기 때문이 아니라, 누구의 이름 아래 무엇을 위해 모였는가에 달려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극장에 모인 대다수는 왜 모였는지도 몰랐고, 두란노의 강의실에서는 날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두고 토론했습니다.
두 모임의 차이는 규모나 소리의 크기가 아니었습니다.
그 모임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가에 있었습니다.
로마의 처벌을 두려워하는 도시
「오늘 이 일로 우리가 소동을 일으켰다는 이유로 고발당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렇게 몰려든 데는 정당한 이유가 없으니, 이 모임을 설명할 말도 없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모인 사람들을 돌려보냈습니다.사도행전 19:40 · 두루새김
그들은 아르테미스의 위대함을 지키려고 모였다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로마 당국에 고발당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의 통치 아래에서 도시의 공적인 질서를 어지럽히는 일은 가볍게 다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관리는 바울의 신학에 동의하지도, 예수님의 이름이 참되다고 고백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정당한 근거 없는 소동이라고 지적합니다.
앞 장에서 갈리오는 바울에 대한 고발을 유대 사람들 내부의 논쟁으로 보고 재판하지 않았습니다(18:14–16). 그러나 갈리오는 소스데네가 맞는 일을 내버려 두었고, 에베소의 관리는 더 큰 소동을 막기 위해 사람들을 돌려보냅니다. 누가는 관리들이 모두 정의롭거나 기독교에 우호적이라고 주장하지 않고, 각 장면에서 그들이 한 판단과 행동을 기록합니다.
맺으며 — 극장의 외침이 멎은 뒤
이 장의 사람들은 저마다 의지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한 영을 쫓아내던 사람들은 이름을 불러 초자연적인 힘을 부리려 했고, 마술을 행하던 사람들은 책에 담긴 기술을, 데메드리오와 기술자들은 신전 모형의 수입을, 에베소 시민들은 여신과 도시의 위엄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바울의 손을 통해 특별한 기적들을 행하셨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의 권위는 바울에게서 나오지 않고, 하나님이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예수님에게서 나옵니다. 그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이름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그 주인께 속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손수건을 능력이 담긴 물건으로 여기거나 예수님의 이름을 정확히 부르면 원하는 결과를 얻는다고 믿는다면, 이 장을 스게와의 아들들처럼 읽는 셈입니다. 또 이 장은 돈을 버리는 사람은 선하고 돈을 버는 사람은 악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바울도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일했습니다(18:3). 문제 되는 것은 사람이 만든 물건을 신적인 권위의 대상으로 삼는 일입니다.
에베소의 극장은 수많은 사람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는 붙잡혀 왔고, 바울은 들어가려 했지만 제자들과 친구들이 말렸습니다. 알렉산더가 말하려 했을 때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고 두 시간쯤 한목소리로 외쳤습니다. 그런데 결국 군중을 가라앉힌 사람은 바울도, 또 다른 설교자도 아니었습니다.
도시의 행정을 맡은 관리였습니다.
그는 고발할 일이 있다면 재판 절차를 따르라고, 지금의 소동은 오히려 에베소가 책임을 져야 할 위험한 일이라고 말하고 모인 사람들을 돌려보냈습니다. 누가는 그 뒤에 바울이 극장에 들어가 설교했다고도, 군중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고도 덧붙이지 않습니다.
극장은 비워지고, 이야기는 그 자리에서 끝납니다.
하지만 독자는 이미 이 도시의 다른 장면들을 보았습니다. 두란노의 강의실에서 날마다 말씀이 전해졌고, 열두 명쯤 되는 남자들이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성령을 받았으며, 은으로 만든 동전 오만 개의 가치가 있던 마술책들이 사람들 앞에서 불탔습니다. 그때 누가는 「주님의 말씀은 힘차게 퍼져 나가며 더욱 큰 힘을 드러냈습니다」라고 적었습니다.
에베소의 극장에서는 아르테미스의 위대함을 외치는 소리가 멎었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강의실에서 전해지고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던 주님의 말씀은, 이미 힘차게 퍼져 나가고 있었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