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20장

이 장의 자리 · 13–20장 · 여러 도시로 떠난 길

떠난 뒤에 누가 돌볼 것인가

사도행전 20장의 마지막 장면에서 사람들이 울고 있습니다.

바울은 무릎을 꿇고 그들과 함께 기도합니다. 사람들은 그의 목을 끌어안고 거듭 입을 맞춥니다. 그들이 무엇보다 마음 아파한 것은 「이제는 여러분 모두가 제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압니다」라는 바울의 한마디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사람들에게 자신이 평생 그들과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립니다. 그뿐 아니라 자기가 떠난 뒤 교회에 사나운 늑대들이 들어올 것이며, 심지어 지도자들 가운데서도 사람들을 끌어다가 자신들을 따르게 하려는 이들이 나올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들을 누구에게 맡기고 떠납니까?

더 강한 지도자를 세우는 것도 아닙니다. 자신이 없는 동안 교회를 완벽하게 지킬 제도를 설명하지도 않습니다. 그는 「이제 저는 여러분을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에 관한 말씀에 맡깁니다」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훌륭하게 사역했는지가 아니라, 자신이 떠난 뒤에도 이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답은 바울 자신의 능력에 있지 않습니다.

그들을 얻으신 하나님, 그들을 돌보도록 성령께서 책임자로 세우신 지도자들, 그리고 그들을 계속 굳세게 세울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말씀에 있습니다.

이 장에는 떠나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바울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향합니다. 드로아에서는 밤새 말씀을 나눈 뒤 떠나고, 밀레도에서는 에베소의 장로들과 마지막 인사를 나눕니다.

그런데 떠남의 이야기 한가운데에 뜻밖의 사건이 하나 놓여 있습니다.

유두고라는 젊은이가 삼 층 창문에서 떨어집니다. 사람들이 그를 들어 올렸을 때 그는 죽어 있었습니다. 바울이 내려가 그를 끌어안고, 얼마 뒤 사람들은 살아 있는 그 젊은이를 데려옵니다. 이 장면은 죽음의 위기 속에서도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의 일을 보여 주며, 이어지는 바울의 작별 인사를 다른 눈으로 읽게 합니다.

바울은 자신의 목숨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는 유두고를 끌어안았고, 장로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얻으신 양 떼를 돌보라고 당부합니다.

자기 목숨을 붙들지 않겠다는 사람이, 다른 사람들의 생명은 끝까지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이 긴장이 사도행전 20장 전체를 관통합니다.

읽는 시간 33분소단락 1120장 본문 읽기 →

예루살렘을 향하는 길 — 바울은 왜 다시 여러 교회를 찾아가는가

사도행전 20:1–6 본문 →

에베소에서 소동이 그친 뒤 바울은 제자들을 불러 격려하고 작별 인사를 합니다. 그리고 마케도니아로 떠납니다.

바울은 그 지방들을 지나가며 많은 말로 제자들을 격려한 뒤 그리스에 도착했습니다.사도행전 20:2 · 두루새김

바울은 새로운 지역을 개척하기보다 이미 복음을 전했던 지역들을 다시 찾아가고 있습니다. 마케도니아에는 빌립보와 데살로니가, 베뢰아가 있었고, 그리스로 내려가면 고린도가 있는 아가야에 이르게 됩니다. 바울에게 복음 전파는 한 도시에서 사람들을 믿게 하고 다른 곳으로 떠나는 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미 믿게 된 사람들을 다시 찾아가 격려하고 굳게 하는 일도 그의 사역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누가는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기록하지 않고, 다만 「많은 말로 제자들을 격려한 뒤」 다음 지역으로 갔다고 합니다. 이 장에서 바울은 계속 사람들을 격려하고, 가르치고, 타이릅니다. 드로아에서는 한밤중까지 이야기하고, 밀레도에서는 장로들에게 자신이 밤낮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타일렀다고 회상합니다. 그의 말은 떠난 뒤에도 믿음을 지키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행동입니다.

그는 그리스에서 석 달을 지냅니다. 그런데 시리아로 배를 타고 떠나려던 순간, 유대 사람들이 그를 해칠 계획을 꾸몄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마케도니아를 거쳐 돌아가기로 결정합니다.

바울은 위험을 알고 이동 경로를 바꾸었습니다. 이것은 뒤에서 그가 자신의 목숨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는다고 말하는 장면과 함께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은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을 해치려는 사람들 앞에 일부러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그의 목적은 무조건 위험 속에 뛰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주 예수님께서 맡기신 일을 끝까지 감당하는 것입니다.

여러 도시에서 온 동역자들

4절에는 갑자기 여러 사람의 이름이 길게 등장합니다. 소바더, 아리스다고, 세군도, 가이오, 디모데, 두기고, 드로비모. 누가는 그들의 출신 지역까지 적어, 베뢰아와 데살로니가, 더베, 아시아에 속한 사람들이 바울의 여정에 함께했다고 전합니다.

본문은 각 사람에게 어떤 임무가 있었는지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러 지역의 신자들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여정이 더 이상 그 혼자만의 여행이 아니라는 사실은 분명하게 보여 줍니다.

복음은 여러 도시에서 흩어져 살아가던 사람들을 하나의 관계망 안으로 연결하고 있었습니다.

한 도시의 교회가 다른 도시의 신자들을 생각하고, 서로 다른 지역의 사람들이 함께 길을 걷습니다.

「그들」에서 「우리」로

5절에 이르면 서술이 갑자기 바뀝니다.

이들은 먼저 드로아로 가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사도행전 20:5 · 두루새김

16장에서 드로아를 떠나 마케도니아로 건너갈 때 처음 나타났던 일인칭 복수 서술이 여기서 다시 시작됩니다. 독자는 다시 바울 일행과 함께 배를 타고 이동하는 듯한 서술 속으로 들어갑니다.

누룩 없는 빵을 먹는 명절이 지난 뒤, 일행은 빌립보에서 배를 타고 떠나 닷새 만에 드로아에 도착해 그곳에서 칠 일을 지냅니다. 이제 누가는 여러 도시를 빠르게 지나던 여정을 잠시 멈추고, 드로아의 어느 위층 방에서 보낸 하룻밤을 자세히 기록합니다.

그곳에 유두고라는 젊은이가 있습니다.

조금 더 깊이

누가는 3절의 계획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 바울이 배에서 습격을 받을 위험이 있었는지 출항 전에 공격당할 계획이 있었는지까지는 밝히지 않습니다. 4절의 동행과 관련해서는, 바울이 이 시기에 예루살렘의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돈을 모으고 있었다는 사실이 그의 편지에 나옵니다(고린도전서 16:1–4; 로마서 15:25–27). 그래서 이 동행을 그 돈을 전달하는 일과 연결하는 해석이 가능하지만, 20:4 자체는 이 사람들이 모두 그 돈을 전달하기 위해 선택된 대표들이었다고 말하지 않으므로 동행 목적을 하나로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5절의 「우리」가 누구를 포함하는지도 누가는 설명하지 않습니다. 저자가 직접 여행에 참여했다는 흔적으로 읽는 해석과, 동행자의 여행 기록을 자료로 사용했다는 해석이 모두 있습니다.

삼층 창문에서 떨어진 유두고 — 밤새 말씀을 듣던 공동체

사도행전 20:7–12 본문 →

한 주의 첫날, 우리는 빵을 떼려고 모였습니다. 바울은 다음 날 떠날 예정이어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하며 한밤중까지 이야기를 이어 갔습니다.사도행전 20:7 · 두루새김

사람들은 한 주의 첫날, 오늘날의 일요일에 해당하는 날에 모였습니다. 그들이 모인 목적은 바울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라고 소개되지 않습니다.

「빵을 떼려고」 모였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다음 날 떠나게 되었기 때문에 이야기가 길어지고, 모임은 한밤중까지 이어집니다. 누가는 그 방에 등불이 많이 켜져 있었다고도 기록합니다. 이야기는 어두운 밤에 벌어지고 있습니다.

유두고라는 젊은이가 창턱에 앉아 있었습니다. 바울의 말이 길어지자 그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다가 잠에 완전히 빠져 삼 층에서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들어 올렸을 때 그는 죽어 있었습니다.사도행전 20:9 · 두루새김

이 장면은 가끔 바울의 설교가 너무 길어서 젊은이가 잠들었다는 우스운 이야기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누가의 서술은 그렇게 가볍지 않습니다.

유두고가 왜 창턱에 앉아 있었는지, 얼마나 피곤한 상태였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가 부주의한 사람이었다거나 예배 시간에 잠든 잘못 때문에 벌을 받았다고 읽을 근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누가는 「그는 죽어 있었습니다」라고 사고의 심각함을 분명하게 기록합니다.

바울은 내려가 그 젊은이 위에 엎드려 끌어안고 말했습니다. 「소란 피우지 마세요. 이 젊은이는 살아 있어요.」사도행전 20:10 · 두루새김

바울은 위층에 머물며 사람들에게 진정하라고 소리치지 않습니다.

아래로 내려갑니다.

그리고 젊은이 위에 엎드려 그를 끌어안습니다.

9절은 그가 죽어 있었다고 하고 바울은 「살아 있어요」라고 말하기 때문에, 유두고가 실제로 죽었다가 살아났는지, 사람들이 죽었다고 생각했지만 아직 살아 있었는지를 두고 읽기가 갈립니다. 어느 쪽으로 읽든 바울은 죽음 앞에 놓인 사람에게 몸을 굽혀 다가갑니다.

이 모습은 죽은 아이 위에 몸을 뻗고 굽혔던 엘리야와 엘리사를 떠올리게 합니다(열왕기상 17:17–24; 열왕기하 4:32–37). 사도행전에서는 이미 베드로가 무릎을 꿇고 기도한 뒤 죽은 다비다를 살렸습니다(9:36–42).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을 살리실 때 자신의 권위로 말씀하셨지만(누가복음 7:11–17; 8:49–56), 사도들은 살아나신 예수님의 증인입니다.

누가가 보여 주는 것은 사도들이 예수님을 대신하는 또 다른 구원자가 되었다는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서 일으키신 하나님의 생명 주시는 일이 그분의 증인들을 통해 계속 나타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죽음의 소동 뒤에 이어진 빵과 이야기

바울은 다시 올라가 빵을 떼어 먹었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을 때까지 한참 이야기를 나눈 뒤 떠났습니다.사도행전 20:11 · 두루새김

삼 층에서 사람이 떨어졌는데, 바울은 다시 올라와 빵을 떼어 먹고 날이 밝을 때까지 이야기합니다. 모임의 목적이 「빵을 떼려고」였다고 기록한 누가는, 사고가 있은 뒤 실제로 빵을 떼어 먹었다고 말합니다. 중간에 심각한 사건이 있었지만, 그들이 모인 일은 중단된 채 끝나지 않았습니다.

처음에는 한밤중까지 말씀을 전하며 이야기를 이어 갔고, 이제는 날이 밝을 때까지 한참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들은 밤을 새우며 마지막 시간을 함께 보냅니다.

사람들은 살아 있는 그 젊은이를 데려왔고,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사도행전 20:12 · 두루새김

마지막에 강조되는 것은 바울의 기적을 행하는 능력이 아닙니다.

살아 있는 젊은이와 그를 보고 위로받은 사람들입니다.

처음에 바울은 많은 말로 사람들을 격려했습니다. 드로아에서는 말뿐 아니라 한 생명의 회복이 공동체에 위로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떠나지만, 유두고는 살아 있는 채로 공동체 안에 남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제 예루살렘을 향해 더욱 서두릅니다.

조금 더 깊이

「한 주의 첫날」 모임이 현대 시간 기준으로 토요일 저녁에 시작되었는지 일요일 저녁에 시작되었는지는 확정하기 어렵습니다. 유대식 날짜 계산에서는 해가 진 뒤부터 다음 날이 시작되었고, 로마식에서는 자정이 경계가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42의 빵을 떼는 일, 고린도전서 10:16–17과 11:23–26의 주의 만찬과 함께 읽으면 드로아의 모임을 공동 식사와 주의 만찬의 맥락에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이 절만으로 당시의 예배 순서나 성찬의 진행 방식을 모두 재구성할 수는 없습니다. 유두고에 대해서는, 첫 번째 해석은 9절의 「그는 죽어 있었습니다」를 그대로 받아들여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살리셨다고 이해합니다. 두 번째 해석은 바울의 「이 젊은이는 살아 있어요」에 주목하여, 사람들은 죽었다고 판단했지만 바울은 아직 생명이 남아 있음을 확인했다고 이해합니다. 9절의 진술이 사람들의 오판이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다는 점에서 실제 죽음과 회복의 사건으로 읽는 것이 서술의 흐름과 잘 어울리지만, 누가는 생명이 회복된 정확한 순간이나 의학적인 상태를 설명하지 않습니다. 또 7절의 「이야기를 이어 갔다」는 토론하거나 강론한다는 뜻의 동사이고, 11절의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함께 어울려 대화한다는 뜻의 동사입니다. 이 차이만으로 공식적인 설교가 끝나고 사적인 대화가 시작되었다고 확정할 수는 없지만, 모임이 한 사람만 말하는 자리에 머물지 않았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에베소를 지나쳐 밀레도로 — 떠나는 사람에게 남은 시간

사도행전 20:13–17 본문 →

바울은 드로아를 떠나 앗소스까지 걸어가기로 하고, 다른 동역자들은 배를 타고 먼저 출발합니다. 왜 바울이 혼자 육로를 선택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일행이 다시 합류한 뒤 누가는 앗소스, 미틸레네, 키오스 맞은편, 사모스, 밀레도를 차례로 기록합니다.

바울은 아시아에서 시간을 지체하지 않으려고 에베소에 들르지 않고 지나가기로 정해 두었습니다. 가능하다면 오순절 날에는 예루살렘에 도착해 있으려고 서두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0:16 · 두루새김

그는 에베소에서 오랫동안 사역했습니다. 회당에서 석 달 동안 토론했고, 두란노의 강의실에서는 두 해 동안 가르쳤습니다. 그런 도시를 다시 찾지 않고 지나갑니다.

그렇다고 아무 말 없이 떠나지도 않습니다.

바울은 밀레도에서 에베소로 사람을 보내 교회의 장로들을 불러 마지막으로 당부합니다. 이번에 그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처음 소개하지 않고, 공동체를 돌보는 지도자들에게 말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그들 가운데서 어떻게 살았는지 회상하고, 앞으로 교회에 어떤 위험이 닥칠지 경고하며, 그들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 당부합니다.

과거의 사역을 회상하는 이유는 지나간 일을 자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떠난 뒤의 교회를 준비시키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의 가르침보다 먼저 자신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여러분은 제가 … 어떻게 지냈는지 아십니다」 — 말보다 먼저 제시된 삶

사도행전 20:18–21 본문 →

장로들이 오자 바울이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제가 아시아에 도착한 첫날부터 지금까지 여러분과 함께 어떻게 지냈는지 아십니다.」사도행전 20:18 · 두루새김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설득했는지, 얼마나 큰 기적을 행했는지, 몇 개의 교회를 세웠는지부터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어떻게 지냈는지」를 이야기하고, 청중이 이미 그것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장로들은 바울의 행동을 직접 보았고, 바울은 이제 그들이 보아 온 삶의 의미를 다시 설명합니다.

「저는 눈물을 흘리고, 유대 사람들이 저를 해치려고 꾸민 일 때문에 시련을 겪으면서도 온전히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사도행전 20:19 · 두루새김

겸손한 마음, 눈물, 시련이 나란히 놓이고, 바울은 이 모든 일을 「주님을 섬겼습니다」라는 표현 안에 묶습니다. 원문에서 이 동사는 노예로 섬기거나 노예의 처지에서 일한다는 뜻을 지닙니다. 바울은 자신을 독립적인 종교 지도자로 소개하지 않고, 자신이 주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그의 겸손은 겸손한 척이 아니라, 섬기는 분이 자신보다 크신 주님이라는 데서 나옵니다.

그런데 주님을 섬기는 삶에 눈물이 함께 있었습니다. 연설의 뒤쪽에서 바울은 삼 년 동안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한 사람 한 사람을 끊임없이 타일렀다고 말합니다(20:31). 여기서 눈물은 자신이 겪은 고통의 흔적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향한 염려와 돌봄의 흔적이기도 합니다.

그는 사람들을 위해 울었습니다.

「여러분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 주저하지 않고 전했습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도 집집에서도 여러분을 가르쳤습니다.」사도행전 20:20 · 두루새김

바울은 자기가 알고 있는 모든 정보를 빠짐없이 말했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실제로 도움이 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전했다고 말합니다. 가르침의 목적은 얼마나 많은 지식을 전달했는지를 보여 주는 데 있지 않고, 듣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전하는 데 있습니다.

여러 사람 앞에서는 사람들이 함께 말씀을 들었을 것이고, 집집에서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삶과 상황에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을 것입니다. 바울의 사역은 공식적으로 말씀을 전하는 자리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도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힘주어 증언했습니다.」사도행전 20:21 · 두루새김

여기에는 회개하여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이 함께 나타납니다. 이것을 먼저 회개를 완성해야 예수님을 믿을 수 있는 두 단계로 나눌 필요는 없습니다. 회개는 하나님을 떠나 있었던 삶의 방향을 그분께로 돌리는 일이고, 믿음은 예수님을 주님으로 신뢰하는 일이며, 둘은 복음에 대한 응답 안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이 소식을 유대 사람과 그리스 사람 모두에게 전했습니다. 그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서로 다른 사람들에게 같은 하나님과 같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앞으로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말합니다.

그런데 그 미래를 그는 자세히 알고 있지 않습니다.

「성령께 붙들려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 고난을 알지만 앞일은 모르는 사람

사도행전 20:22–24 본문 →

「저는 이제 성령께 붙들려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그곳에서 무슨 일을 겪을지는 모릅니다.」사도행전 20:22 · 두루새김

「붙들려」(δέω)에 해당하는 원문의 낱말은 묶이거나 결박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바울은 자유롭게 계획을 세우고 원하는 대로 여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무엇인가에 붙들린 사람처럼 말합니다.

그를 붙드는 것이 성령인지, 바울 자신의 내적인 영과 결심인지는 읽기가 갈립니다. 어느 쪽으로 읽더라도 바울은 예루살렘으로 향해야 한다는 강한 확신 속에 움직이고 있습니다.

가야 한다는 것은 압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모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보여 주실 땅으로 떠날 때 그 길의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알지는 못했던 것처럼(창세기 12:1–4; 히브리서 11:8), 바울의 확신은 미래의 모든 사건을 미리 알고 있다는 확신이 아닙니다.

그런데 한 가지는 알고 있습니다.

「다만 성령께서는 도시마다 제게 분명히 알려 주십니다. 감옥에 갇히는 일과 고난이 저를 기다리고 있다고 하십니다.」사도행전 20:23 · 두루새김

우리는 흔히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라면 장애물이 없어지고 위험이 줄어들 것이라고 예상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는 바울에게 감옥에 갇히는 일과 고난이 기다린다고 알려 주시고, 바울은 그 길을 계속 갑니다. 성령의 경고가 언제나 위험을 피하라는 명령과 같지는 않으며, 앞으로 닥칠 일을 맞을 준비를 하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신자가 위험한 일을 선택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규칙으로 확대해서는 안 됩니다. 이 본문은 바울에게 주어진 특별한 사명과 그 여정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바울 자신도 고난 자체를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해치려는 계획을 알았을 때 여행 경로를 바꾸었고, 예루살렘으로 가는 일에서는 계속 나아갑니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위험이 있는지 없는지가 아니라, 자신이 맡은 일을 감당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러나 저는 제 목숨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습니다. 제가 달릴 길을 끝까지 달리고, 주 예수께서 맡기신 일을 마치려는 것입니다. 그 일은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기쁜 소식을 힘주어 증언하는 것입니다.」사도행전 20:24 · 두루새김

이 말을 생명을 하찮게 여긴다는 뜻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드로아에서 유두고를 끌어안았고, 뒤에서는 약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가 가볍게 여기는 것은 생명 그 자체가 아니라, 자기 생명을 지키는 일을 사명보다 더 중요한 목적으로 삼는 것입니다.

이 차이를 놓치면 신앙을 위해서라면 자기 몸을 돌보지 않아도 된다거나,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에서도 무조건 희생해야 한다는 뜻으로 바울의 말을 위험하게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사용하는 이미지는 경주입니다. 「제가 달릴 길을 끝까지 달리고.」 그리고 그 길은 바울이 스스로 만들어 낸 일이 아니라 「주 예수님께서 맡기신 일」입니다.

그런데 그가 전해야 할 소식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증언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위험에 내놓습니다. 그러나 그의 희생이 은혜를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닙니다. 은혜는 이미 하나님께서 예수님 안에서 베푸신 일이고, 바울은 그 은혜를 전하라는 사명을 받아 끝까지 감당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얼마나 담대한가만이 아닙니다.

그를 붙들고 있는 복음이 무엇인가입니다.

조금 더 깊이

22절의 「붙들려」는 원문에서 바울 자신의 내적인 영 또는 강한 결심을 가리키는 것으로도, 성령께 붙들려 있다는 뜻으로도 읽을 수 있습니다. 바로 다음 절에 성령께서 명시적으로 등장한다는 점은 성령의 인도로 읽는 근거가 되고, 22절 원문 자체는 성령을 분명하게 가리키지 않는다는 점은 바울 자신의 내적인 결단으로 읽는 근거가 됩니다. 원문은 어느 한쪽을 확정하도록 모든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며, 두루새김은 성령의 인도로 읽는 해석을 따라 「성령께 붙들려」로 옮겼습니다. 24절의 「달릴 길」은 경주 또는 경주의 과정을 가리키는 낱말로, 사도행전 13:25에서 세례자 요한이 자기 달릴 길을 마쳐 갈 때도 같은 낱말이 쓰입니다. 두 사람의 사명은 같지 않지만, 모두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서 맡기신 일과 연결하여 이해한다는 점에서 닮았습니다.

「누가 멸망하더라도 제게는 그 책임이 없습니다」 — 가르치는 사람의 책임과 한계

사도행전 20:25–27 본문 →

「저는 여러분 가운데 두루 다니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했습니다. 이제는 여러분 모두가 제 얼굴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는 것을 압니다.」사도행전 20:25 · 두루새김

이 말은 자신이 앞으로 죽을 것이라는 정확한 예언으로만 읽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그가 다시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작별하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오늘 여러분에게 분명히 밝힙니다. 누가 멸망하더라도 제게는 그 책임이 없습니다.」사도행전 20:26 · 두루새김

원문에서는 이 말을 사람들의 피에 대한 책임에서 깨끗하다는 표현으로 전하며, 두루새김은 그 뜻을 풀어 옮겼습니다. 이 표현은 에스겔 3장과 33장의 파수꾼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경고해야 할 사람이 침묵하면 하나님은 그 책임을 물으시지만, 경고를 들은 사람이 돌이키지 않으면 그 선택까지 파수꾼에게 책임지우지는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뜻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여러분에게 주저 없이 전했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0:27 · 두루새김

「하나님의 뜻」은 뜻, 계획, 결정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사도행전에서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정해진 뜻에 따라 넘겨지셨다는 베드로의 말(2:23)과, 예수님을 대적한 사람들의 행동까지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계획과 연결한 공동체의 기도(4:27–28)와 이어집니다. 바울이 하나님의 뜻을 알렸다는 말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 무엇을 이루셨으며 그 일에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를 전했다는 뜻입니다.

가르치는 사람의 책임은 사람들이 모두 자기 말을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해야 할 진리를 빠뜨리지 않고 전하는 일입니다. 물론 이 말을 할 말을 다했으니 사람들의 상태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아도 된다는 책임 회피의 선언으로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바울은 바로 다음에 장로들에게 양 떼를 돌보라고 명합니다.

사람의 믿음과 삶을 완전히 통제하는 것은 지도자의 책임이 아닙니다. 그러나 도움이 되는 말씀을 빠뜨리지 않고 전하며, 위험을 경고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돌보는 것은 지도자의 책임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그 책임을 감당했다고 증언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깁니다.

「교회를 목자처럼 돌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 양 떼는 누구의 것인가

사도행전 20:28–31 본문 →

「여러분 자신과 온 양 떼를 살피십시오. 성령께서 여러분을 그 양 떼의 책임자로 세우신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얻으신 교회를 목자처럼 돌보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사도행전 20:28 · 두루새김

바울의 당부는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장로들 자신에게서 시작됩니다. 이어서 그는 지도자들 자신 가운데서도 일어날 위험을 경고합니다. 다른 사람을 돌보는 위치에 있다는 사실이 그 사람을 위험에서 자동으로 보호해 주지는 않습니다.

지도자도 자기 자신을 살펴야 합니다.

장로와 감독은 서로 다른 사람들인가

17절에서 바울이 밀레도로 부른 사람들은 「장로들」이었습니다. 그런데 28절에서는 그들을 「책임자」라고 부릅니다. 여기에 쓰인 그리스어 에피스코포이(ἐπίσκοπος)는 살피고 감독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흔히 ‘감독’으로 옮기는 말입니다. 두루새김은 이들이 맡은 역할을 드러내어 「그 양 떼의 책임자」로 옮겼습니다.

두 명칭은 서로 다른 집단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17절에서 장로라고 불린 바로 그 사람들이 28절에서는 양 떼의 책임자라고 불립니다. 이 장의 초점은 직분의 높고 낮음이 아니라 그 직분이 무엇을 위해 주어졌는가에 있습니다.

책임자는 양 떼를 살피는 사람이고, 목자는 양 떼를 돌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둘은 모두 양 떼를 자기 뜻대로 지배하기 위해 주어진 자리가 아닙니다.

그 양 떼가 지도자들의 소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얻으신 교회

하나님이 자신의 피로 교회를 얻으셨다는 말은 무엇을 뜻합니까? 하나님이 피를 흘리셨다는 뜻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피로 교회를 얻으셨다는 뜻입니까?

「자신의 피로」에 해당하는 디아 투 하이마토스 투 이디우는 두 방향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의 피를 통해’로 읽으면 하나님이 자신의 피로 교회를 얻으셨다는 강한 표현이 되고, 기독교에서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시라는 고백에 따라 해석할 수 있습니다. ‘자기에게 속한 분의 피를 통해’로 읽으면, 원문에 직접 적혀 있지 않은 ‘아들’을 문맥에 따라 보충하여 하나님이 자기 아들의 피로 교회를 얻으셨다는 뜻이 됩니다. 이 구절만으로 하나를 의심의 여지 없이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어느 해석을 택하든 교회는 하나님이 구원하셔서 얻으신 공동체이며, 그 구원은 예수님의 피와 분리될 수 없습니다. 교회는 지도자들의 노력으로 만들어진 단순한 조직이 아닙니다. 에베소의 신자들은 바울의 소유도 아니고, 장로들의 소유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것으로 얻으신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교회를 떠날 수 있는 이유와, 장로들이 교회를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이유가 같은 곳에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자신이 없으면 교회가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을 내려놓을 이유가 되고, 장로들에게는 자신들이 교회의 주인이 아니라 맡겨진 양 떼를 돌보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할 이유가 됩니다.

목자는 양 떼를 돌볼 책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양 떼를 소유한 것은 아닙니다.

이 사실을 잊는 순간, 돌봄은 쉽게 지배로 변할 수 있습니다.

이리들은 밖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저는 압니다. 제가 떠난 뒤에 사나운 늑대들이 여러분 가운데 들어와 양 떼를 사정없이 해칠 것입니다.」사도행전 20:29 · 두루새김

늑대는 양 떼를 돌보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해치기 위해 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위험이 외부에서만 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도 사람들이 나와 그릇된 말을 하며, 제자들을 끌어다가 자신들을 따르게 하려 할 것입니다.」사도행전 20:30 · 두루새김

바울은 잘못된 정보를 전달하는 문제만이 아니라, 가르침이 사람들을 어디로 이끄는가의 문제를 함께 말합니다. 그릇된 말의 결과는 제자들이 예수님의 길을 따르는 대신 특정한 사람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돌봄을 맡은 사람이 소유하려는 사람으로 바뀌는 것입니다.

이 경고는 모든 의견 차이를 거짓 가르침으로 규정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초대 교회 안에도 여러 실제적인 판단 차이가 있었고, 바울 자신도 함께 일하던 사람과 갈라선 적이 있습니다. 바울이 경고하는 것은 사람들을 자신에게 매이게 하려고 가르침을 왜곡하는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가르침을 분별할 때는 그 말이 성경과 복음에 맞는지뿐 아니라, 사람들을 누구에게 향하게 하는지도 살펴야 합니다.

예수님을 따르게 합니까?

아니면 가르치는 사람 자신에게 묶어 두려 합니까?

「그러므로 깨어 있으십시오. 제가 삼 년 동안 밤낮으로 눈물을 흘리며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끊임없이 타일렀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사도행전 20:31 · 두루새김

처음에 등장했던 눈물이 다시 나오고, 이번에는 그 눈물이 누구를 향한 것이었는지 분명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입니다. 바울이 장로들에게 기억하라고 하는 것은 자신의 강력한 설교 능력이 아니라, 자신이 사람들을 어떻게 돌보았는가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 사람들을 다른 분에게 맡깁니다.

조금 더 깊이

17절의 「장로들」은 그리스어로 ‘나이 든 사람들’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장면은 초기 교회에서 장로와 감독이라는 표현이 적어도 여기서는 같은 지도자들의 역할을 설명하는 데 쓰였음을 보여 주지만, 이것만으로 이후 교회사에서 발전한 장로직과 감독직의 관계를 모두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별도의 역사적 연구가 필요한 문제입니다. 또 28절에는 사본 차이도 있습니다. 여러 그리스어 사본은 ‘하나님의 교회’로, 일부 사본은 ‘주의 교회’로 전하며, 두 형태 모두 오래된 사본들의 지지를 받습니다. 두루새김은 앞의 읽기를 따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얻으신 교회」라고 옮겼습니다.

「여러분을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에 관한 말씀에 맡깁니다」 — 떠나는 사람이 남기는 것

사도행전 20:32 본문 →

「이제 저는 여러분을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에 관한 말씀에 맡깁니다. 그 말씀은 여러분을 굳세게 세우고, 거룩하게 된 모든 사람과 함께 물려받을 몫을 여러분에게 줄 수 있습니다.」사도행전 20:32 · 두루새김

지금까지 바울은 자신이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가르쳤는지, 앞으로 어떤 위험이 올 것인지 이야기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들은 무엇을 의지해야 합니까? 바울은 자신에게 의지하라고 말하지 않고, 과거에 했던 말을 하나하나 완벽하게 되풀이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들을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에 관한 말씀에 맡깁니다.

「맡깁니다」는 누군가를 다른 이의 보호와 돌봄에 맡긴다는 뜻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사람들을 가르쳤지만, 사람들을 끝까지 세우고 완성하시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교회의 마지막 안전장치로 남겨 놓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두 가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을 굳세게 세우는 일이고, 다른 하나는 거룩하게 된 모든 사람과 함께 물려받을 몫을 주는 일입니다. 바울은 교회가 무너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그 소망을 지도자들의 능력에만 두지 않습니다.

물려받을 몫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자기 백성에게 주시는 몫과 약속하신 유산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약속의 땅이 중요한 유산이었고,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면서 그 몫이 더욱 넓은 의미로 나타납니다. 「거룩하게 된 모든 사람과 함께」라는 표현처럼, 그 몫은 특정한 지도자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모든 사람과 함께 누릴 몫입니다.

바울이 곁에 없다고 해서 그들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사람은 떠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믿기 때문에 사람들을 맡기고 떠날 수 있습니다.

「이 두 손으로 일해서 저와 동료들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했습니다」 —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

사도행전 20:33–35 본문 →

바울은 작별 연설의 마지막에서 다시 자신의 삶을 이야기합니다. 이번에 그가 보여 주는 것은 설교나 가르침이 아닙니다.

자신의 두 손입니다.

「저는 누구의 은이나 금이나 옷도 탐내지 않았습니다.」사도행전 20:33 · 두루새김
「여러분도 아시듯이, 저는 이 두 손으로 일해서 저와 동료들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했습니다.」사도행전 20:34 · 두루새김

사도행전 18장은 그가 고린도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함께 천막을 만드는 일을 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바울은 생계를 유지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동료들에게 필요한 것까지 마련했다고 말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에게 경제적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자신과 함께한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도 일했습니다.

「저는 모든 일에서 이렇게 애써 일하여 약한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는 것을 여러분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또 주 예수께서 직접 하신 말씀도 기억해야 합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사도행전 20:35 · 두루새김

「약한 사람들」은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가리킬 수도 있고, 몸이 약하거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포함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노동과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연결하고 있으므로 경제적인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포함하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지만, 그 범위를 경제적 가난에만 한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교회를 돌보라는 당부와 늑대에 대한 경고 끝에 돈과 노동의 문제가 등장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을 돌보아야 할 지도자가 오히려 사람들의 재산을 탐내거나,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이익을 얻으려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지도자가 언제나 보수를 받지 않고 일해야 한다는 보편적인 규칙이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9:3–14에서 그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이 그 일로 생활할 권리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여기서 그는 맡은 사람들을 이용해 재산을 쌓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을 돕기 위해 일했다는 사실을 본보기로 제시합니다.

양 떼는 목자의 소유가 아닙니다.

목자는 양 떼를 돌보도록 세워진 사람입니다.

네 복음서에는 기록되지 않은 예수님의 말씀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더 복되다」는 말은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어디에도 그대로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바울은 이 말을 주 예수님께서 직접 하신 말씀이라고 소개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입에서 입으로도 전해졌을 것이고, 이 말 역시 그렇게 알려졌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만 바울이 누구에게서 이 말씀을 들었는지, 예수님께서 어떤 자리에서 하셨는지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바로 앞의 설명과 함께 읽으면, 여기서 「주는 것」은 남는 재물을 나누는 행동보다 넓습니다. 자신의 시간과 노동, 재산과 능력을 다른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데 사용하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반대로 「받는 것」이 언제나 잘못된 행동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약한 사람은 도움을 받아야 할 수도 있고, 바울 자신도 다른 교회들로부터 지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받는 사람을 부끄럽게 만들기 위한 말이 아니라, 주는 사람에게 복이 있다는 선언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신을 마지막 본보기로 내세우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보다 앞서 계신 분을 가리킵니다.

주 예수님입니다.

양 떼를 얻으신 분과 양 떼를 돌보는 사람

이 말씀을 28절과 나란히 읽으면, 하나님이 교회를 얻으신 일은 예수님의 피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돌보는 사람의 섬김도 다른 사람에게서 무엇을 빼앗는 방향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해 자신을 내어 주는 방향이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10:11에서 예수님께서는 좋은 목자는 양들을 위해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고 말씀하셨고, 이것은 사도행전 20장의 목자 이미지와 주제적으로 이어집니다.

물론 장로들이 예수님과 동일한 방식으로 교회를 구원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교회를 얻으신 구원의 사건이고, 장로들의 돌봄은 그 은혜로 얻어진 사람들을 섬기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사건이 돌봄의 방향을 결정합니다.

양 떼를 얻으신 분은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양 떼를 돌보는 사람도 자기 것을 얻으려 하기보다 사람들을 위해 내어 주어야 합니다.

그 손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의 손이었고, 동시에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의 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 손은 마지막 장면에서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기 위해 무릎을 꿇는 바울의 손이 됩니다.

무릎을 꿇고 함께 우는 사람들

사도행전 20:36–38 본문 →

바울의 연설은 여기서 끝납니다. 누가는 장로들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앞으로 교회를 어떻게 운영하기로 했는지 기록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기록합니다.

바울은 이 말을 마치고 그들 모두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사도행전 20:36 · 두루새김

바울은 장로들보다 높은 자리에 서 있지 않습니다. 그는 그들을 가르쳤지만, 이제는 그들과 함께 기도합니다. 그가 맡았던 책임과 그들이 앞으로 맡아야 할 책임은 다르지만, 기도하는 자리에서는 모두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하나님께 맡겼고, 이제 실제로 그들과 함께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사람들은 모두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끌어안고 거듭 입을 맞추었습니다.사도행전 20:37 · 두루새김

바울은 에베소에서 눈물을 흘리며 주님을 섬겼고, 삼 년 동안 밤낮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눈물을 흘리며 타일렀다고 말했습니다.

처음에는 그가 사람들을 위해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는 그 사람들이 그와 헤어지며 눈물을 흘립니다.

그들은 다시는 바울의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는 말에 무엇보다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을 배까지 배웅했습니다.사도행전 20:38 · 두루새김

누가는 사람들이 늑대들이 들어온다는 경고 때문에 가장 슬퍼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단순히 지식을 전달하는 교사로만 알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와 함께 시간을 보냈고, 그의 눈물과 노동을 보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바울은 「여러분은 제가 아시아에 도착한 첫날부터 지금까지 여러분과 함께 어떻게 지냈는지 아십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의 눈물은 그가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한 마지막 대답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바울을 붙잡아 두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울을 사랑했지만, 그를 자신들의 곁에 영원히 머물게 할 수는 없었습니다. 바울도 그들을 사랑했지만, 자신이 맡은 일을 버리고 그곳에 계속 머물 수는 없었습니다. 깊은 관계였기 때문에 눈물이 있었고, 그 관계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결국 그를 배까지 배웅합니다.

맺으며 — 배까지 배웅한 사람들

사도행전 20:1–38 본문 →

드로아에는 유두고가 살아 있는 채로 남고, 에베소에는 양 떼를 돌보도록 세워진 장로들이 남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떠난다는 것이 하나님도 떠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교회는 특정한 지도자가 곁에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공동체가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것으로 얻으신 공동체이며, 그 안에는 성령께서 세우신 지도자들과 그들을 계속 세울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본문이 그러한 지도력이 완벽하게 성공했다고 선언하지는 않습니다. 지도자도 자신을 살펴야 하고, 공동체도 진리를 분별해야 하며, 모두가 자신들의 주인이 누구인지 기억해야 합니다.

밀레도의 바닷가로 사람들이 걸어갑니다.

그들은 조금 전까지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바울은 앞으로 어떤 고난을 겪을지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주 예수님께서 맡기신 일을 끝까지 마치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말할 시간이 끝났습니다.

바울이 이들에게 맡기고 가는 것은 자신이 없는 자리를 채울 또 다른 사람만이 아닙니다.

그는 그들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그들이 이제부터 살아가야 할 곳은 배 위가 아니라, 바울이 없는 에베소입니다. 그곳에는 여전히 하나님의 교회가 있고, 그들이 살피고 돌보아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떠납니다.

그리고 그들은 돌아가서 양 떼를 돌보아야 합니다.

그 양 떼는 바울이 남기고 가는 자기 소유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신의 피로 얻으신 사람들입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