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풀어 읽기 · 27장
이 장의 자리 · 27–28장 · 로마로 가는 길
배는 잃어도 사람은 잃지 않습니다
사도행전 27장에는 배를 살리려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항로를 바꾸고, 바람을 피하고, 배를 밧줄로 동여맵니다. 폭풍이 거세지자 짐을 바다에 던지고 배의 장비까지 내버립니다. 배를 살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하나씩 시도합니다.
그런데 배는 결국 부서집니다.
그토록 지키려고 했던 배가 얕은 바닥에 걸리고, 배 앞부분은 움직이지 않으며, 뒷부분은 거센 물살에 부서져 갑니다.
그렇다면 이 항해는 실패한 것일까요?
누가는 마지막에 「이렇게 해서 모두가 무사히 육지에 닿았습니다」라고 기록합니다.
배는 잃었습니다. 실었던 짐도 잃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한 명도 잃지 않았습니다.
이 결말을 이해하려면 폭풍 한가운데서 바울이 전한 말씀을 먼저 기억해야 합니다. 바울은 「여러분 가운데 목숨을 잃을 사람은 아무도 없고, 배만 잃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배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고, 오히려 배는 잃을 것이라고 하면서 그 대신 사람들의 생명이 지켜질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반드시 우리가 붙들고 있는 모든 것을 지키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하나님이 지키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배가 아니라 배에 탄 사람들의 생명입니다.
처음에는 아무도 바울의 말을 따르지 않습니다. 백부장은 바울보다 배를 모는 사람과 배 주인의 말을 더 믿습니다. 뱃사람들은 자기들만 살려고 배에서 달아나려 합니다. 마지막에는 군인들이 죄수들을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이 모든 장면에서 사람들의 선택은 서로 충돌합니다.
그런데도 결국 276명 모두가 살아남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사도행전 27장은 단순한 바다 모험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약속과 인간의 판단, 두려움과 책임, 자신을 지키려는 마음과 다른 사람의 생명을 돌보는 일이 한 배 위에서 맞부딪히는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한 명의 죄수가 있습니다.
바울은 배를 소유하지 않았습니다. 항로를 결정할 권한도 없었습니다. 배를 조종할 기술을 책임진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항해가 끝날 무렵, 그 배에 탄 모든 사람의 생존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말을 하는 사람은 바울입니다.
그는 어떻게 그런 사람이 되었을까요?
「우리가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가기로 결정되자」 — 죄수와 동행자들
27장은 한동안 등장하지 않았던 「우리」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가기로 결정되자, 사람들은 바울과 다른 죄수 몇 명을 ‘황제 부대’ 소속인 율리오라는 백부장에게 넘겼습니다.사도행전 27:1 · 두루새김
사도행전의 서술자는 이전부터 때때로 「그들」이 아니라 「우리」라고 말했습니다. 16:10에서 바울이 마케도니아 사람의 환상을 본 뒤 그곳으로 가려고 했다는 대목, 20:5 이후의 여행 기록에서도 이런 표현이 나타났습니다. 이번에는 바울이 로마로 향하는 항해가 「우리」의 이야기로 기록됩니다.
이 표현만으로 사도행전의 최종 저자가 모든 항해를 직접 경험했다고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직접적인 동행의 기록으로 이해하는 견해가 있지만, 여행 자료의 활용이나 고대 항해 이야기의 문학적 관습과 관련해 설명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 안에서 이 일인칭 복수가 만드는 효과는 분명합니다. 배가 움직일 때도, 바람에 밀릴 때도, 살아날 희망을 잃을 때도 서술자는 「우리」라고 말합니다. 독자는 바울을 멀리서 바라보는 사람이 아니라, 함께 배를 타고 위험을 겪는 사람들의 자리에서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그리고 그 배에는 바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죄수들이 있습니다. 율리오라는 백부장과 그가 지휘하는 군인들이 있습니다. 아리스다고도 함께합니다. 아리스다고는 마케도니아의 데살로니가 출신으로, 이미 사도행전 19:29에서 에베소의 소동에 휘말렸고, 20:4에서는 바울의 동행자 가운데 하나로 등장했습니다. 바울은 완전히 혼자 떠나는 것이 아닙니다.
3절에서도 이 점이 드러납니다.
다음 날 우리는 시돈에 도착했습니다. 율리오는 바울을 친절하게 대해 주며, 친구들에게 가서 보살핌을 받도록 허락했습니다.사도행전 27:3 · 두루새김
율리오는 바울을 감시하는 로마 군인입니다. 바울에게 자유가 주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는 여전히 죄수입니다. 다만 백부장의 허락 아래 자신을 돌봐 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율리오는 처음부터 바울에게 적대적인 사람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는 어느 정도 호의를 베푸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호의를 베푼다는 것과 바울의 말을 믿는다는 것은 서로 다른 일입니다.
곧 항해가 위험해졌을 때 율리오는 바울이 아니라 배를 모는 사람과 배 주인의 판단을 따릅니다.
바람이 막아선 항로
바울 일행은 아드라뮈티온의 배를 타고 출발했다가 리키아의 미라에서 이탈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의 배로 갈아탑니다. 알렉산드리아는 이집트의 중요한 항구 도시였습니다. 로마 제국은 이집트에서 생산된 곡물을 주요 식량 공급원으로 활용했고, 알렉산드리아에서 이탈리아로 항해하는 대형 곡물 운반선들이 있었습니다. 본문의 알렉산드리아 배 역시 뒤에 밀을 바다에 내던지는 장면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곡물을 실은 상선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27:38).
그런데 항해는 처음부터 순조롭지 않았습니다.
4절에는 「맞바람이 불었기 때문에」라는 말이 등장하고, 7절에는 다시 「바람 때문에 더 나아갈 수 없어」라는 설명이 나옵니다. 키프로스섬이 바람을 막아 주는 쪽으로 지나고, 크레타 해안을 따라가며, 여러 날 천천히 나아가다가 겨우 목적지에 접근합니다. 7절의 「겨우」와 8절의 「힘겹게」라는 표현도 항해의 어려움을 거듭 보여줍니다.
배를 조종하는 사람들은 가고 싶은 방향을 알고 있었지만, 그 방향으로 마음대로 갈 수 없었습니다. 고대의 돛단배 항해에서 바람은 단순한 불편이 아니었습니다. 항로와 속도, 항구에 도착할 가능성 자체를 좌우하는 중요한 조건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느린 항해 때문에 더 중대한 문제가 생깁니다.
계절이 바뀌고 있었습니다.
「금식일도 이미 지난 터라」 — 누구의 판단을 따라야 하는가
9절은 여행이 위험해진 이유를 설명합니다.
시간이 많이 흘러 금식일도 이미 지난 터라, 배를 타고 가기에는 위험한 때가 되었습니다. 바울이 사람들에게 충고했습니다.사도행전 27:9 · 두루새김
여기서 「금식일」은 일반적으로 유대교의 속죄일을 가리킵니다. 레위기 16:29-31에 규정된 속죄일은 히브리 달력 일곱째 달에 지키는 날로, 오늘날의 달력에서는 대체로 9월 말에서 10월 사이에 해당합니다.
고대 지중해의 돛단배 항해는 가을이 깊어질수록 거센 바람과 나쁜 날씨 때문에 위험해졌고, 겨울철의 장거리 항해에는 큰 제약이 있었습니다. 누가는 바울 일행이 그날 어떤 종교 의식을 행했다고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그날이 이미 지났다는 사실을 이용해 항해하기 위험한 계절이 되었다고 알려 줍니다.
「여러분, 제가 보기에 이번 뱃길은 짐과 배뿐 아니라 우리 목숨에도 큰 피해와 손실을 가져올 것입니다.」사도행전 27:10 · 두루새김
뒤에 바울은 천사가 자신에게 전해 준 하나님의 말씀을 분명하게 밝힙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제가 보기에」라고 말할 뿐, 그런 계시를 받았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10절은 바울이 항해 상황과 위험을 판단하여 경고한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는 이미 여러 차례 바닷길을 여행한 사람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1:25에서 바울은 자신이 세 번 배가 부서지는 일을 겪었다고 밝힙니다. 그 편지와 사도행전 27장의 사건 사이의 연대를 고려하면, 바울에게는 이전의 항해 위험을 직접 경험한 배경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배를 모는 사람과 배 주인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사도행전 27:11 · 두루새김
이 결정은 무조건 어리석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배를 조종하는 전문가는 배를 모는 사람과 뱃사람들이고, 항해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은 배 주인입니다. 바울은 배에 탄 죄수입니다. 누구의 말을 더 믿을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면, 전문적인 항해 지식을 가진 사람들의 판단을 우선하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누가는 이들이 무모하게 출항했다고 말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실제 고민을 설명합니다. 아름다운 항구는 겨울을 나기에 알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은 조금 더 항해하여 포이닉스에 도착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 겨울을 보내기로 합니다. 이들은 겨울철의 위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라, 겨울 동안 배를 머물게 할 더 나은 항구를 찾으려 했던 것입니다.
지금의 항구에 남을 것인가, 아니면 위험을 감수하고 더 나은 항구까지 갈 것인가? 바울은 남는 편이 낫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은 출항을 선택합니다.
그런데 13절에서 마치 그들의 선택이 옳았던 것처럼 보이는 일이 일어납니다.
남쪽에서 바람이 부드럽게 불어오자, 사람들은 계획대로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닻을 올리고 크레타 해안을 바짝 따라갔습니다.사도행전 27:13 · 두루새김
그들은 아직 목적지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자신들의 계획을 실행하기에 좋은 조건이 나타났다고 판단했습니다. 사람은 어떤 조건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바뀌면, 그것이 앞으로의 결과까지 보장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누가는 그들이 실제로 어떤 마음이었는지 더 설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짧은 서술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보여줍니다.
남쪽에서 불어오던 부드러운 바람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배를 바람에 맡긴 채 떠밀려 갔습니다」 — 모든 통제력을 잃어버리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에우라퀼론’이라는 거센 회오리바람이 섬 쪽에서 몰아쳤습니다.사도행전 27:14 · 두루새김
「에우라퀼론」(εὐρακύλων)이라는 이름은 동풍을 뜻하는 그리스어와 북풍을 뜻하는 라틴어가 결합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대체로 북동쪽 계열에서 불어오는 거센 바람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배를 항로에서 크게 벗어나게 할 만한 위험한 바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람의 이름보다 더 중요한 것은 15절의 변화입니다.
배가 바람에 휩쓸려 맞서 나아갈 수 없게 되자, 우리는 배를 바람에 맡긴 채 떠밀려 갔습니다.사도행전 27:15 · 두루새김
그들은 처음에는 항로를 선택했습니다. 바람을 막아 줄 섬을 찾아가고, 해안을 따라 항해하고, 어느 항구에서 겨울을 보낼지 의논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배를 원하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없습니다.
이것은 통제력의 상실입니다.
그래도 뱃사람들은 배를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계속합니다. 가우다라는 작은 섬이 바람을 막아 주는 쪽으로 지나며 배에 딸린 작은 배를 겨우 붙잡아 끌어 올립니다. 그리고 큰 배의 밑으로 밧줄을 둘러 동여맵니다. 거센 물결에 의해 배의 구조가 손상되는 것을 막기 위한 응급 조치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들은 시르티스의 얕은 모래 바닥에 배가 걸릴까 두려워합니다. 시르티스는 북아프리카 해안의 넓고 얕은 모래 바닥 지대로, 그곳으로 떠밀려 가면 배가 빠져나오기 어려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배의 장비를 내려 항해 상태를 바꾸고, 가능한 한 위험을 줄이려고 합니다. 17절의 「돛을 내린 채」가 정확히 무엇을 내렸다는 뜻인지는 해석이 갈리지만, 뱃사람들이 배의 속도와 방향을 조절하고 배가 부서지는 것을 막으려 했다는 이야기의 의미는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폭풍은 계속됩니다.
다음 날에는 짐을 바다에 던집니다. 사흘째 되는 날에는 배의 장비까지 자기 손으로 내버립니다.
사람들은 배에 실은 짐을 목적지까지 가져가려고 항해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 짐이 자신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무게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하면 얻을 수 있었던 것을 포기하고, 지금 당장 살아남을 가능성을 붙듭니다.
그런데 이런 조치들을 취하고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도 별도 보이지 않고 거센 폭풍이 계속 몰아쳤습니다. 마침내 우리가 살아날 희망마저 모두 사라져 갔습니다.사도행전 27:20 · 두루새김
고대의 뱃사람들에게 해와 별은 방향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기준이었습니다.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오는지는 몸으로 느낄 수 있지만, 배가 어느 위치까지 떠밀려 왔는지는 정확히 알기 어렵습니다. 뱃사람들이 가진 항해 기술도 한계에 부딪힙니다.
누가는 단순히 배가 위험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자신들이 살아남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 못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라는 표현이 다시 중요해집니다. 바울의 동행자들을 포함한 배의 사람들 모두가 이 위험 가운데 있습니다.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죄수든 군인이든, 뱃사람이든 승객이든 폭풍은 구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같은 배에 타고 있습니다. 그리고 같은 바다 위에서 살아날 희망을 잃어 갑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바울이 그들 가운데 일어섭니다.
조금 더 깊이
17절에서 「돛을 내린 채」로 옮긴 원문 표현 토 스케우오스(σκεῦος)는 본래 장비나 기구를 가리키는 말로, 이 문맥에서는 돛이나 돛대와 연결된 장비를 가리킨다고 보는 해석이 많습니다. 그러나 정확히 무엇을 내렸는지는 논쟁이 있어, 돛 자체를 내렸다는 읽기, 돛을 다루는 특정 장비를 내렸다는 읽기, 배가 떠밀리는 것을 늦추는 해상 닻과 관련된 조치로 이해하는 읽기가 있습니다.
「저는 그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그분을 섬깁니다」 — 폭풍 속에서 드러난 바울의 소속
바울의 첫마디는 이전의 경고를 떠올리게 합니다.
사람들이 오랫동안 먹지 않은 채 지내고 있을 때, 바울이 그들 가운데 서서 말했습니다. 「여러분, 제 말을 듣고 크레타에서 떠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이런 피해와 손실을 피했을 것입니다.」사도행전 27:21 · 두루새김
이 말을 단순히 ‘내 말이 맞았지 않느냐’는 비난으로만 이해하면 이어지는 말씀을 놓치게 됩니다. 바울은 자기가 옳았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이전에 경고했던 피해가 실제로 닥쳤다는 점을 떠올리게 한 다음, 이제 새로운 말씀을 전합니다.
「하지만 이제 여러분에게 기운을 내라고 당부합니다. 여러분 가운데 목숨을 잃을 사람은 아무도 없고, 배만 잃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사도행전 27:22 · 두루새김
처음에 바울은 배와 짐뿐 아니라 사람들의 목숨까지 큰 손실을 입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도 목숨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왜 다르게 말할 수 있게 되었을까요? 23-24절이 그 이유를 설명합니다. 지난밤 하나님의 천사가 바울 곁에 서서 말씀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제가 보기에」라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자신에게 전해진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이야기합니다. 바울은 자신이 판단하여 위험을 경고했던 일과 하나님에게서 생명을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을 받은 일을 같은 것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천사의 메시지를 전하기 전에 바울은 하나님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지난밤에 하나님의 천사가 제 곁에 섰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하나님께 속해 있으며 그분을 섬깁니다.」사도행전 27:23 · 두루새김
이 말은 그가 누구에게 속한 사람인지 보여줍니다.
지금 바울은 로마의 죄수입니다. 법적으로는 백부장 율리오의 감독 아래 있습니다. 항해의 중요한 결정도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내립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을 가장 근본적으로 규정하는 관계가 따로 있다고 밝힙니다.
그는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속해 있으며」와 「섬깁니다」라는 두 표현은 서로를 보완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소유하신 분이라는 고백과, 자신이 그 하나님을 섬긴다는 고백이 함께 있습니다. 바울에게 신앙은 단지 어떤 종교적 신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삶이 누구에게 속해 있고 누구를 섬기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바울은 성전이나 회당에 있지 않습니다. 로마로 향하는 상선 위에 있습니다. 그 배에는 로마 군인들과 다른 죄수들, 뱃사람들과 승객들이 함께 있고, 그들은 모두 폭풍 때문에 살아날 희망을 잃었습니다.
그런 곳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배가 안전하다는 주장도 아니고, 자신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나은 항해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말도 아닙니다.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이 이 상황에서도 말씀하셨다는 고백입니다.
「너는 황제 앞에 서야 한다」
천사가 전한 말씀은 이렇습니다.
「그 천사가 말했습니다. 『바울아, 두려워하지 마라. 너는 황제 앞에 서야 한다. 보아라, 하나님께서는 네게 은혜를 베푸셔서 너와 함께 배를 탄 모든 사람도 살려 주기로 하셨다.』」사도행전 27:24 · 두루새김
여기에 두 개의 약속이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에 관한 것입니다. 그는 황제 앞에 서야 합니다. 이것은 23:11에서 예수님께서 로마에서도 증언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일과 이어집니다.
그러나 이번 말씀에는 새로운 내용이 있습니다. 바울에게 주어진 약속이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확장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누구입니까? 바울의 말을 무시했던 백부장도 있습니다. 배를 출항시킨 뱃사람들과 배 주인도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이라고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바울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기록되지 않는데도, 하나님이 생명을 지켜 주시겠다는 약속 안에 포함됩니다.
확실한 것은 그들의 생명을 살려 주시는 일이 바울에게 베풀어진 하나님의 은혜로 표현된다는 점입니다.
바울은 이 배를 책임지고 모는 사람이 아닙니다. 뱃사람들의 고용주도, 다른 죄수들의 대표로 선출된 사람도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바울에게 함께 배를 탄 사람들의 생명이 지켜질 것이라는 소식을 주십니다.
이것은 바울에게만 특권을 주는 방식의 구원이 아닙니다.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생명이 미치는 구원입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사명을 계속 이루어 가시면서, 그 사람과 함께 있는 다른 사람들의 생명도 돌보십니다.
이 사실은 이 장의 결말을 준비합니다. 배에 탄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나중에 자기들만 살려고 달아나려 합니다. 군인들은 죄수들이 도망갈까 두려워 그들을 죽이려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약속은 그들 사이의 구별보다 넓습니다.
「우리 배는 어느 섬에 밀려가 걸리게 될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뒤 「저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제게 말씀하신 그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한 가지를 덧붙입니다.
「다만 우리 배는 어느 섬에 밀려가 걸리게 될 것입니다.」사도행전 27:26 · 두루새김
하나님이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폭풍이 즉시 그칠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배가 정상적인 항구에 도착할 것이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어느 섬에 밀려가 걸리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배가 얕은 바닥에 걸리는 것은 뱃사람들이 가장 피하고 싶어 하는 위험한 상황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 위험한 사건을 거쳐 생명이 지켜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약속과 배가 부서질 것이라는 예고가 함께 있습니다.
이 장에서 하나님의 약속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배는 잃습니다.
그러나 생명은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제 배에 탄 사람들은 그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질지 아직 알지 못한 채 밤바다를 떠밀려 갑니다.
조금 더 깊이
24절에서 두루새김이 「네게 은혜를 베푸셔서」와 「살려 주기로 하셨다」로 풀어 옮긴 동사는 호의나 은혜로 베풀어 주었다는 의미를 담은 완료형입니다. 이 표현 때문에 바울이 배에 탄 사람들을 위해 기도했고 하나님이 그 기도에 응답하셨을 가능성을 생각하는 해석이 있습니다. 충분히 가능한 이해이지만, 본문은 바울이 그들을 위해 어떤 기도를 드렸는지 직접 기록하지 않습니다. 또 이 장면은 누가복음 8:22-25의 바다 이야기를 떠올리게 합니다. 그곳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람과 물결을 꾸짖으시고, 폭풍이 그치자 제자들에게 믿음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사도행전 27장에서는 바울이 바람을 꾸짖지 않고, 폭풍은 계속되며, 배는 마침내 부서지지만 사람들은 모두 살아남습니다. 두 이야기는 직접적인 인용 관계에 있지 않지만, 누가의 두 책을 함께 읽으면 하나님이 한 가지 방식으로만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라는 연결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때로는 위협이 사라지고, 때로는 위협이 사라지지 않은 채로 사람들에게 살아갈 길이 열립니다.
「이 사람들이 배에 남아 있지 않으면」 — 약속이 있다고 해서 손을 놓을 수는 없다
열나흘째 밤이 되었습니다.
바울 일행은 여전히 바다 위에서 떠밀려 다니고 있습니다. 한밤중에 뱃사람들은 육지가 가까워지고 있다고 짐작하고 물 깊이를 잽니다. 처음에는 스무 길, 조금 더 가서 다시 재어 보니 열다섯 길입니다.
물 깊이가 얕아지고 있다는 뜻입니다. 계속 떠밀려 가면 바위나 얕은 곳에 부딪힐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배 뒤쪽에서 닻 네 개를 내리고 날이 밝기를 빕니다.
앞에서는 넓은 바다에서 어디로 떠밀려 가는지 알 수 없어 두려웠습니다. 이제는 육지가 가까워졌기 때문에 두렵습니다. 넓은 바다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생겼지만, 동시에 육지 가까이에서 배가 부서질 위험도 커졌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일부 뱃사람들이 다른 계획을 세웁니다.
그런데 뱃사람들은 배에서 달아나려고 했습니다. 배 앞쪽에서 닻을 내리려는 척하며 작은 배를 바다로 내렸습니다.사도행전 27:30 · 두루새김
처음에 뱃사람들은 거센 폭풍 속에서 배에 딸린 작은 배를 겨우 붙잡아 끌어 올렸습니다(27:16-17). 그것은 배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작은 배를 자기들만 달아나는 데 사용하려 합니다. 함께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장비가 일부 사람들의 탈출 수단으로 바뀐 것입니다.
바울이 백부장과 군인들에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들이 배에 남아 있지 않으면 여러분은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사도행전 27:31 · 두루새김
이 말은 조금 전의 약속과 긴장 관계에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이 자신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함께 배를 탄 모든 사람도 살려 주기로 하셨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뱃사람들이 배에 남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약속이 확실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본문은 두 진술을 모두 그대로 기록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모든 사람의 생명을 지키시겠다는 약속이고, 다른 하나는 뱃사람들이 배에 남아 있어야 사람들이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그 뱃사람들은 배를 조종할 기술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군인들은 무기를 사용할 수 있고 죄수들을 감시할 수 있지만, 얕은 바닥에 걸리기 직전의 배를 안전하게 해안으로 이끌 항해 기술까지 갖추었다고 볼 근거는 없습니다. 뱃사람들이 달아나면 남은 사람들은 배를 다루는 데 필요한 기술과 경험을 잃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바로 그 위험을 지적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지키실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다고 해서 필요한 사람들이 자기 역할을 버려도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약속을 믿는 바울이 가장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려줍니다.
뱃사람들이 배에 남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군인들이 바울의 말을 따릅니다.
군인들은 작은 배를 매어 둔 밧줄을 끊어, 그 배가 떨어져 나가게 합니다. 처음에 백부장은 바울보다 항해 전문가들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군인들은 바울의 경고에 따라 뱃사람들이 달아날 수단을 끊어 버립니다.
그들이 바울의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바울의 판단을 실제 행동으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바울에게는 배를 조종할 공식적인 권한이 없지만, 그의 말은 이제 사람들의 생존을 위한 결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작은 배가 떨어져 나가면서 일부 사람만 빠져나갈 수 있는 수단이 사라졌습니다. 이제 그들은 같은 배에 남아 함께 해안을 향해야 합니다.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약속은 모든 사람을 향하고 있었고, 그 약속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일부만 탈출하려는 계획은 중단됩니다.
그들은 아직 안전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더 이상 뱃사람들만 따로 달아날 수는 없습니다.
조금 더 깊이
27절의 「아드리아 바다」는 오늘날의 아드리아해보다 넓은 바다를 가리킬 수 있었던 고대의 이름으로, 이탈리아와 시칠리아, 크레타 사이의 지중해 바다까지 이렇게 부르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현대의 아드리아해 위치만을 기준으로 항해 경로를 이해하면 안 됩니다. 또 20절의 「살아날 희망」, 31절의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34절의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됩니다」의 원문 중심에는 소조(σῴζω), 곧 구하다·구원하다라는 동사가 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이 동사는 병에서 낫거나 위험에서 벗어나는 일을 가리킬 수 있고, 죄와 죽음으로부터 얻는 하나님의 구원에도 사용됩니다(4:12에서 베드로는 예수님 외에는 구원을 얻을 다른 이름이 없다고 선포합니다). 27장에서는 폭풍 속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는 일이 직접적인 의미이며, 배에서 살아남은 276명이 모두 예수님을 믿고 죄 용서를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므로 이 둘을 완전히 같은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누가가 같은 구원의 말을 사용한다는 사실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이 다른 사람들의 몸과 생명을 돌보는 사람으로 나타난다는 점을 생각하게 합니다.
「빵을 들고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 절망 속에서 다시 시작된 식사
날이 밝아 올 무렵, 바울이 모두에게 음식을 먹으라고 권하며 말했습니다. 「여러분은 오늘로 열나흘째 기다리면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굶은 채 지내고 있습니다.」사도행전 27:33 · 두루새김
열나흘은 배가 폭풍 속에서 떠밀려 다닌 시간이기도 합니다. 이것을 반드시 모든 사람이 열나흘 동안 물 한 모금이나 음식 한 입도 먹지 않았다는 뜻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폭풍과 불안 속에서 정상적인 식사를 하지 못했고, 살아남는 데 필요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한 상태를 나타내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 바울은 음식을 먹으라고 할까요?
그들은 아직 안전한 육지에 도착하지 못했습니다. 배는 곧 얕은 바닥에 걸려야 하고, 마지막으로 해안에 접근하는 위험한 조치가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음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음식을 드시기 바랍니다. 음식을 먹는 것이 여러분이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됩니다. 여러분 가운데 누구도 머리카락 하나 잃지 않을 것입니다.」사도행전 27:34 · 두루새김
여기서 음식을 먹는 일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필요한 행동입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생명을 지켜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지만, 바울은 그 약속이 있으니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제대로 먹어야 한다고 권합니다. 「머리카락 하나 잃지 않을 것」은 온전한 보호를 나타내는 관용적인 말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말로만 음식을 권하지 않습니다.
이 말을 마친 바울은 빵을 들고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 그런 다음 빵을 떼어 먹기 시작했습니다.사도행전 27:35 · 두루새김
폭풍이 계속되는 배입니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제대로 먹지 못했습니다. 날이 밝으면 배를 해변에 밀어 올리려 해야 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빵을 듭니다.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빵을 떼어 먹기 시작합니다.
누가는 여기서 예수님께서 빵을 드시고 감사하시거나 축복하신 뒤 떼어 주시던 장면들을 떠올리게 하는 말을 사용합니다. 바울은 아직 살아남지 않았고, 해안에 도착하지도 않았습니다. 배가 얕은 바닥에 걸릴 위험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이 감사는 모든 문제가 해결된 뒤에 드리는 감사가 아닙니다. 아직 위험이 남아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며 드리는 감사입니다.
그리고 그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영향을 줍니다. 「그러자 사람들도 모두 기운을 내어 음식을 먹었습니다.」 앞서 바울은 사람들에게 기운을 내라고 말했습니다. 이번에는 자신의 행동으로 그들을 일으켜 세웁니다. 절망 때문에 손을 놓고 있던 사람들이 다시 살아남기 위한 행동을 시작합니다.
누가는 바울이 특별한 음식을 만들어 냈다고 기록하지 않습니다. 그가 폭풍을 멈추게 했다고도 말하지 않습니다. 그가 한 일은 빵을 들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먹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평범한 행동이 배에 탄 사람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줍니다.
이백일흔여섯 목숨
37절에서 누가는 배에 탄 사람들의 숫자를 밝힙니다.
배에 탄 우리는 모두 이백일흔여섯 명이었습니다.사도행전 27:37 · 두루새김
왜 이 시점에 숫자를 알려줄까요? 하나님이 바울에게 약속하신 것은 「너와 함께 배를 탄 모든 사람」도 살려 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제 독자는 그 「모든 사람」이 몇 명인지 알게 됩니다. 이 숫자는 이어지는 마지막 장면을 준비합니다.
과연 그 많은 사람 가운데 한 명도 잃지 않을 것인가?
사람들은 배부르게 먹은 뒤, 밀을 바다에 내던져 배를 가볍게 합니다. 먼저 먹고, 그다음에 밀을 버립니다. 배에 실린 밀은 원래 목적지까지 가져가야 할 짐이었지만, 지금은 그 짐을 지키는 것보다 배를 가볍게 만드는 일이 중요합니다.
아직 배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 배를 지키기 위해 실었던 것들을 계속 포기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배 자체까지 잃게 됩니다.
조금 더 깊이
「머리카락 하나」라는 표현은 누가복음 21:18에서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에 나옵니다. 다만 그곳은 박해와 죽음의 위험을 겪는 가운데 마침내 생명을 얻을 것이라는 약속의 문맥으로, 바로 앞에서 어떤 이들이 죽임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21:16). 반면 사도행전 27장에서는 배에 탄 모든 사람이 실제로 죽지 않고 살아남을 것이라는 구체적인 약속이 주어져 있으므로, 같은 표현이라도 문맥에서 강조하는 바를 구별해야 합니다. 35절의 빵을 들고 감사하고 떼는 표현은 누가복음 9:16의 오병이어, 22:19의 마지막 식사, 24:30의 엠마오 식사와 닮았습니다. 그래서 이 장면을 성찬의 의미와 연결하여 읽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그리스도인인 것은 아니며, 본문은 성찬을 행했다고 설명하지 않고 바로 뒤에 모든 사람이 기운을 내어 음식을 먹었다고 기록하므로, 정식 성찬 예식이었다고 확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실제 사건으로는 살아남기 위한 공동 식사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고, 동시에 누가의 표현이 예수님의 식사 장면을 떠올리게 하며 신학적으로 울림을 준다고 볼 수 있습니다. 37절의 숫자는 일부 고대 사본에 다르게 전해지며, 두루새김이 채택한 본문은 276명을 기록합니다.
「죄수들을 죽이기로 했습니다」 — 마지막 위험은 바다가 아니었다
드디어 날이 밝습니다.
사람들은 육지를 보지만, 그곳이 어디인지는 알아보지 못합니다. 다만 바다가 육지 안쪽으로 들어간 곳에 모래 해변이 보여, 가능하면 그 해변으로 배를 밀어 올리기로 합니다. 그들은 닻을 배에서 떼어 내 바다에 버리고, 키를 묶어 둔 줄을 풉니다. 그리고 배 앞쪽의 돛을 올려 바람을 받아 해변으로 향합니다.
이런 행동들은 뱃사람들이 끝까지 배를 조종하려 노력하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계획은 뜻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뱃사람들은 두 물살이 만나는 곳에 이르러 배를 얕은 바닥에 얹고 말았습니다. 배 앞부분은 단단히 박혀 움직이지 않았고, 뒷부분은 거센 물살에 부서져 갔습니다.사도행전 27:41 · 두루새김
바울이 예고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배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뱃사람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이제 배를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새로운 위험이 등장합니다.
폭풍이 아닙니다.
바위도 아닙니다.
배에 함께 타고 있던 군인들입니다.
군인들은 헤엄쳐 달아나는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죄수들을 죽이기로 했습니다.사도행전 27:42 · 두루새김
배가 부서지고 있으므로 모두가 어떻게든 육지로 가야 합니다. 그러나 군인들에게는 자기들이 감시하던 죄수들이 도망갈 수도 있다는 또 다른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죄수들을 놓치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아예 죽이려고 합니다. 본문은 군인들이 어떤 처벌 규정을 염두에 두었는지까지 설명하지 않지만, 그들이 죄수들을 죽이려고 했다는 사실은 확실합니다.
그들은 방금까지 같은 배에 타고 있었습니다. 같은 폭풍을 견뎠고, 같이 죽을 위험에 처했습니다. 하나님이 바울에게 살려 주겠다고 약속하신 사람들에도 함께 포함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육지에 도착할 가능성이 생기자, 군인들은 죄수들의 생명을 희생시켜 자기들에게 닥칠 위험을 피하려 합니다.
이것은 뱃사람들이 작은 배를 내려 자기들만 달아나려고 했던 행동과도 닮았습니다. 두 경우 모두 두려움 속에서 다른 사람의 생존보다 자기 안전을 먼저 확보하려는 행동입니다. 그들의 두려움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을 느낀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킬 정당한 이유가 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약속은 달랐습니다.
24절의 「너와 함께 배를 탄 모든 사람」에는 죄수들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군인들만 살리겠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뱃사람들만 살리겠다고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 약속을 가로막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위험은 바다가 아니라 군인들의 결정입니다.
바로 그때 율리오가 개입합니다.
그러나 백부장은 바울을 살리려고 군인들이 그 계획을 실행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그리고 헤엄칠 수 있는 사람들에게 먼저 물로 뛰어들어 육지로 가라고 명령했습니다.사도행전 27:43 · 두루새김
누가는 그가 바울을 살리려 했다는 동기를 분명히 밝힙니다. 그가 왜 그렇게 바울을 살리고 싶어 했는지, 바울의 하나님을 믿게 되었는지까지 설명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율리오가 항해 동안 바울을 가까이서 보아 왔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처음에는 바울을 친절하게 대해 주었습니다. 그다음에는 바울보다 배를 모는 사람과 배 주인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그러나 폭풍 가운데서 바울의 경고가 실제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경험했고, 이제 그는 바울을 살리기 위해 군인들의 계획을 막습니다.
그런데 율리오의 결정은 바울 한 사람에게만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그가 군인들의 살해 계획을 막았기 때문에 다른 죄수들도 살아남을 수 있게 됩니다.
바울을 살리려는 결정이 죄수들 모두의 생명을 보호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배는 더 이상 사람들을 목적지까지 실어 나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부서진 배의 조각들은 헤엄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육지에 도착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바울은 배를 잃을 것이라고 말했고, 실제로 배는 잃었습니다. 그런데 그 배의 남은 조각들이 사람들의 생명을 지키는 데 사용됩니다.
마지막 절은 짧습니다.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널빤지나 배에서 떨어져 나온 것들을 붙잡고 가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모두가 무사히 육지에 닿았습니다.사도행전 27:44 · 두루새김
바울이 특별한 힘으로 바다를 잠잠하게 했다고 기록되지 않습니다. 천사가 다시 나타나 사람들을 들어 올렸다고도 기록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헤엄쳤습니다.
널빤지를 붙잡았습니다.
부서진 배의 조각들에 의지했습니다.
그리고 모두 육지에 도착했습니다.
조금 더 깊이
41절의 「두 물살이 만나는 곳」(διθάλασσος)은 원문에서 두 바다가 만나는 곳, 양쪽으로 물이 흐르는 곳, 혹은 두 물살의 영향을 받는 지형을 가리킬 수 있어, 이 표현만으로 특정한 해안이나 암초의 위치를 확정할 수는 없습니다. 또 죄수의 탈출이 지키던 이들에게 심각한 일이었다는 점은 다른 본문에서도 드러납니다. 사도행전 12:19에서는 베드로가 사라지자 헤롯이 경비병들을 심문하고 끌고 가도록 명하고, 16:27에서는 빌립보의 간수가 죄수들이 달아난 줄 알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합니다. 이런 배경을 고려하면, 군인들이 죄수의 탈출을 자신들에게 닥칠 심각한 위험으로 여겼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부서진 배의 조각들을 붙잡고
사람들이 부서진 배의 조각들을 붙잡고 육지에 닿기까지, 24절의 약속과 44절의 성취 사이에는 수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뱃사람들이 달아나려 했고, 군인들이 그들을 막았고, 사람들이 음식을 먹었고, 배가 얕은 바닥에 걸렸고, 군인들이 죄수들을 죽이려 했고, 백부장이 그들을 막았습니다. 누가는 이 모든 과정을 생략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인간의 행동을 불필요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함께 살아남기 위해 서로에게 필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군인들에게는 뱃사람들의 항해 기술이 필요했고, 오랫동안 굶은 사람들에게는 음식이 필요했으며, 죄수들이 살아남으려면 백부장이 군인들의 살해 계획을 막아야 했습니다. 바울도 배를 조종하는 기술을 대신할 수 없었고, 뱃사람들도 자기들의 기술만으로 사람들을 구할 수 없었습니다. 이 모든 사람의 행동과 능력이 서로 연결되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집니다.
바울에게 주어진 약속은 그가 혼자 살아남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와 함께 배에 탄 모든 사람이 살아남았을 때 이루어졌습니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을 분리시키는 근거가 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의 생명을 돌보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위험을 보지 않는 태도가 아니라, 위험을 정확히 바라보면서도 하나님이 주신 약속을 신뢰하는 태도였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영혼의 구원만을 이야기하면서 굶주린 사람들의 몸을 외면하지 않았고, 자기만 살아남을 길을 찾지 않고 모든 사람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말하고 행동했습니다.
다만 이 장의 약속은 이 배에 탄 사람들의 생명에 관한 구체적인 말씀입니다. 이 이야기를 근거로 모든 위험에서 반드시 몸과 목숨을 건질 수 있다고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은 짐을 버리고, 장비를 버리고, 밀을 버리고, 마침내 배까지 잃었습니다. 이 장은 모든 것을 잃지 않아야 성공이라는 생각을 다시 살펴보게 합니다. 어떤 손실은 피할 수 없더라도, 무엇만큼은 잃지 않아야 하는가?
사도행전 27장의 마지막 장면에는 더 이상 온전한 배가 없습니다. 배 앞부분은 얕은 곳에 박혀 움직이지 않고, 뒷부분은 거센 물살에 부서지고 있습니다. 바울도 그 배에 타고 있던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누가는 바울 한 사람의 극적인 구조 장면을 따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대신 모두가 육지에 도착했다고 말합니다.
바다에는 부서진 배의 조각들이 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조각들에 의지해 육지로 올라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이 전했던 말씀 그대로, 배는 잃었지만 사람은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한 저자가 장을 따라 어려운 대목을 풀어 가며 쓴 글입니다. 여러 읽기를 나란히 놓는 자료와 달리 한 사람의 읽기를 따라갑니다. 편집 교정과 사실 검수를 거쳤고, 인용한 성경은 두루새김 본문입니다.